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마속(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마씨오상(馬氏五常) | ||||
백상 | 중상 | 숙상 | 계상 | 유상 |
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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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謖
마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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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 면죽현령(緜竹縣令) 겸 성도현령(成都縣令) 겸 월수태수(越巂太守) 제1차 조위 북벌 참군(參軍) | |||
성씨 | 마(馬) | |||
휘 | 속(謖) | |||
자 | 유상(幼常) | |||
생몰기간 | 190년 ~ 228년(향년 38세) | |||
고향 | 형주(荆州) 양양군(義陽郡) 의성현(宜城縣) | |||
사망지 | 한중(漢中) | |||
월수태수 재임기간 | ?년 ~ 22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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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유비 → 유선), |
형주(荊州) 종사(從事) → 면죽(緜竹) 현령(縣令) 겸 성도(成都) 현령(縣令) 겸 월수(越巂) 태수(太守) 겸 참군(參軍)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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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참모이자 무장.백미로 유명한 마량의 동생이다. 마씨 오형제 중 마량이 넷째, 마속이 막내라고 한다.[1]
2. 생애(정사)
자세한 내용은 마속/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삼국지연의
"승상은 마속의 재질을 어떻게 보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당세(當世)의 영재(英才)입니다."
선주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짐은 이 사람을 보니 말은 잘하지만 능력이 말만큼 뛰어나지 않아서 크게 쓸 인물이 못 되오. 승상은 깊이 살피시오."
연의 85회에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말.
제갈량이 대답했다.
"당세(當世)의 영재(英才)입니다."
선주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짐은 이 사람을 보니 말은 잘하지만 능력이 말만큼 뛰어나지 않아서 크게 쓸 인물이 못 되오. 승상은 깊이 살피시오."
연의 85회에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말.
연의에서는 85회에서 유비를 통해 언급된 뒤 남만정벌을 떠난 87회에서 등장하며, 91회 때 조비가 죽은 틈을 타서 유언비어로 사마의를 실각시켜 제갈량에게 더 큰 신임을 얻는다.
최후도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공개처형이 되었다. 96회에서 한중으로 퇴각한 제갈량은 곧바로 마속을 군법에 회부하고, 마속에겐 경솔하게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해 전쟁을 망친 죄로 간단하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그래도 스스로의 잘못을 자각하곤 있었는지 마속은 사형판결이 내려졌을 때 변명 한마디 없이 잘못을 인정하여 사형을 받아들인다. 마속을 아꼈던 제갈량은 가족을 돌봐주겠다고 하고 마속을 끌고나가 목을 자르게 한 후 통곡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의 죽음에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선황 유비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났다는데서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유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연의 95회에서 마속이 가정을 위군에게 잃을 때 패턴은 연의의 앞 내용에서도 반복된 적이 있다.
- 14회: 유비가 원술을 정벌할 때 장비에게 서주의 수비를 맡긴다. 금주령과 함께 진등을 보좌관으로 붙여줬지만 장비는 금주령과 진등의 충고를 싸그리 무시, 결국 여포의 기습으로 서주를 잃는다.
- 58회: 마초가 동관을 공격할 때, 조조는 조홍에게 동관의 열흘 기한으로 수비를 맡기고 서황을 부장으로 딸려보낸다. 이에 서량군은 조조군을 도발하는데, 처음에는 그나마 서황이 말려서 참았지만, 결국 서황이 없는 틈을 타서 서량군이 다시 도발하자 조홍은 출전했다가 동관을 잃는다.[2]
-
71회~72회: 조조는 한수 전투에 서황에게 왕평을 딸려 보내는데, 서황은 71회 후반에 왕평의 조언을 무시한 채 한신 흉내를 낸답시고 배수진을 쳤다가 72회에서 패배한다. 그나마 왕평이 본진을 지켜서 피해를 줄였는데 서황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추궁한다. 마속과 서황 둘 다 왕평을 무시하다가 패배한 케이스인데, 심지어 이때 둘이 한 대사도 거의 같다.
즉 연의에서 서황의 능지는 마속과 동급이다. 과연 연의의 피해자의 대표주자 답다.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마속/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기타
산에 집착하다 전쟁을 말아먹고 본인도 죽는 대참사를 낸 임팩트가 커서 등애와 함께 등산애호가, 산악인 캐릭터로 곧잘 희화화된다. 지분을 나누면 마속이 실패한 산악인, 등애가 성공한 산악인으로 정리할 수 있다. 등애는 목적을 위해 산을 탄 반면 마속은 오히려 산을 타서 전쟁을 말아먹었기에 마속이야말로 진정으로 산을 사랑한 남자, 진짜 산악인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도 마속은 까고 등애는 빠는 경우가 많아[3] 마속과 등애는 중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이라고 칭한다.5월은 가정의 달이므로 마속을 까야 한다는 개드립도 있다.
정사 삼국지 촉서에는 마속전이 없으며, 마속의 형이 되는 마량전에 마속의 이야기가 부속으로 조금 나온다. 단지 편의상 나무위키나 파성넷에서 임의로 마량전을 마속전과 마량전으로 나눴던 것이다.[4]
영락성 전투에서 서하군과의 전쟁에서 난전 중 전사한 서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서희가 부장 곡진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임하자[5] 서하군과의 전투에서 패사했고[6], 마속은 왕평의 말을 듣지 않고 산 정상에 진을 치고 적과 맞서자 결국은 패했다.
6.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마속/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마량과 마속의 세 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량과 마속이 항렬에 따라 자를 쓴 것을 보면 적어도 그의 세 형은 백상(伯常), 중상(仲常), 숙상(叔常)이라는 자를 썼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2]
이 때문에 조홍은 (서황의 상세한 보고를 접한) 조조에게 친족이고 뭐고 참수형을 당할 뻔했지만, 그 다음에 마초가 기습했을 때 목숨 걸고 조조를 구해서 체면치레를 했다.
[3]
사실 한 쪽은 대실패, 한 쪽은 대성공으로 끝났으니 당연하다. 그리고 등애는 진짜로 모험을 할 필요가 다분히 있었던 반면에 마속은 쓸데없는 짓을 하다 말아먹은 거다.
[4]
촉서 9권은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으로
진수가 묶어서 전을 썼는데 자신의 국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책임회피를 하려고 도망가다가 잡혀서 죽은 마속이
동화,
유파,
마량,
진진,
동윤,
여예 같은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던 촉의 인재들과 나란히 묶일 리가 없다. 굳이 마속전이 들어가야 한다면 촉에 큰 해를 입혔거나 성격 및 처신에 문제가 있는 인물들을 묶은 10권(유봉, 팽양, 요립, 이엄, 위연, 양의, 유염)에 들어가는 게 맞다.
[5]
수원 부족으로 인해 북송군은 말똥을 갈아 즙을 내어 마시는 등 상황이 심각하였다.
[6]
서희 본인을 비롯한 이순거 등 20만 명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