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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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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謖
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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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면죽현령(緜竹縣令) 겸 성도현령(成都縣令) 겸 월수태수(越巂太守) 제1차 조위 북벌 참군(參軍)
성씨 (馬)
(謖)
유상(幼常)
생몰기간 190년 ~ 228년(향년 38세)
고향 형주(荆州) 양양군(義陽郡) 의성현(宜城縣)
사망지 한중(漢中)
월수태수 재임기간 ?년 ~ 2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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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유비 → 유선),
형주(荊州) 종사(從事) → 면죽(緜竹) 현령(縣令) 겸 성도(成都) 현령(縣令) 겸 월수(越巂) 태수(太守) 겸 참군(參軍) }}}}}}}}}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남만 정벌2.3. 가정의 패전
2.3.1. 마속의 실책2.3.2. 가정 전투의 중요성
2.4. 읍참마속
2.4.1. 정치적 처형?2.4.2. 탈영죄?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유비의 평가
4.1.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4.1.2. 반론
4.2. 능력4.3.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5. 기타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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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참모이자 무장.

백미로 유명한 마량의 동생이다. 마씨 오형제 중 마량이 넷째, 마속이 막내라고 한다.[1]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젊은 나이에 형주종사로 임용되어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갔고 이후 성도 현령, 월수 태수직을 역임했다. 재주와 기량이 빼어났고 군략 논하기를 즐겨 제갈량은 그를 특출나게 여겨 아꼈으나, 유비는 그를 크게 써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 평했다. 특히 백제성에서 임종하기 직전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그 실제를 과장하니, 크게 기용할 수 없소. 그대가 이를 살펴보시오."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런 유비의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며 신임하였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마속을 제대로 평했는지는 오래지 않아 드러나게 된다. 유비의 사람 보는 눈이 굉장함을 알려주는 대목.

제갈량이 마속의 형 마량과 형제 같은 관계였던 만큼[2] 이릉대전에서 불행하게 전사한 그의 아우를 배려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2. 남만 정벌

남만 평정전에서 제갈량에게 마음으로 공격하여 위무할 것을 건의하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여 남만인들의 마음을 공략해 복속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 이후 1차 북벌 이전까지 특별한 기록은 없다. 그 사이 군대를 지휘하거나 특정한 임무를 맡아 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제갈량 밑에서 참군이라는 벼슬까지 하면서 놀고 먹었을 리는 없으므로, 군사 행정이나 진언 등 참모 업무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제갈량은 별탈없이 제몫을 해낸 마속을 보고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는 유비의 말을 서서히 신경쓰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이 다음부터 마속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다가 한 방에 무너지게 된다.

2.3. 가정의 패전

천수, 안정, 남안 3군을 점거하며 성공적으로 진행되던 1차 북벌 때 주위에서는 오의 혹은 위연 등의 경험 많은 장수를 가정 방어전에 투입하자고 추천했으나 제갈량은 마속에게 왕평, 장휴, 황습, 이성 등을 부장으로 딸려주고 상당 수의 군세와 함께[3] 가정에 배치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길목에 세워야 할 방어진지를 산 꼭대기에 세우는, 전쟁사상 다시 없을 바보짓을 한다. 부장 왕평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이마저도 무시해버린다. 결국 왕평은 1,000명의 병력을 따로 빼서 보조 진채를 세운다.

위의 명장 장합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산 위의 진채를 공격하는 대신 산을 통째로 에워싸 포위하고 보급을 끊어 촉군을 말려죽였다. 산 위의 마속군은 식수와 식량이 다 떨어져, 그 뒤 대부분은 말라죽고 나머지는 위군과의 전투에서 전멸한다. 생존자는 거의 없었고 마속은 몇몇 부관들과 함께 겨우 도망쳤다. 이때 가정을 지키던 촉군 중에서 따로 빠졌던 왕평의 부대만이 그나마 무사했던 정도였다.[4] 이로 인해 가정을 잃게 되면서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이로써 3군의 호응에 힘입어 자신있게 막을 올린 촉한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2.3.1. 마속의 실책

일단 전략, 전술적으로 고지대를 점거하는 이점은 크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쪽은 투사무기의 사거리와 위력이 비약적으로 늘고 적 부대에 대한 완벽한 감제가 가능하며 험난한 지형조건을 이용해 성채처럼 방어에 임하기 쉽기 때문이다. 곳곳에 매복 병력을 배치해 좁은 산길을 오르는 적병을 덮치기에도 용이하다. 전면전을 벌일 때도 상대는 등반으로 힘이 빠지는 반면 이쪽은 내리막이라 힘이 적게 들어 유리하다. 자동화기가 널리 보급된 현대전에서도 감제고지의 이점은 크고, 그래서 한국전과 월남전에서도 고지를 뺏기 위한 전투가 숱하게 치뤄졌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적이 공격해줄 때의 이야기다. 즉 이 곳을 지나지 않으면 더이상 진행이 불가능한 보급로거나 하는 식으로 적이 고지대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나 먹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산과 이어져 있거나 해서 적의 포위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며, 전투를 위한 충분한 수자원과 물자의 확보는 기본이다.[5] 특히 중국 서북부는 기본적으로 건조한 지역이므로 식수의 확보가 중요한 요소인데 마속은 이러한 전장 환경을 전혀 살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건과 대책 없이 산 위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놨으니 거의 말려죽여 주십쇼에 가까운 배치인지라 위나라 명장 장합이 그냥 포위하고 말라죽을 때까지 기다려 가뿐하게 격파한 것이다. 물론 마속도 이에 대비해 물을 운반하는 급도를 준비하긴 했지만, 베테랑 장수인 장합은 그것도 손쉽게 끊었다.

인간은 3일 정도만 물을 마시지 못해도 생명에 지장이 생기며, 4일 정도면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고, 5일 이상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 특히 군인은 몸을 격렬히 움직이며 싸움을 하는 만큼 든든히 열량을 먹여주는 만큼 수분도 섭취를 해야 하니 하루이틀만 수분을 섭취하지 못해도 전투능력이 급감한다. 더군다나 인력으로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챙기고 이동하는 군대라면 더더욱 많은 물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6] 마속의 군대는 장합이 산 밑에서 급도를 끊고 포위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바로 물과 식량 문제로 전투력이 상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는 현실이 되었다.

가정의 산은 다른 산과도 이어져 있지 않고, 제대로 된 물줄기도 없으며, 옆에 멀쩡한 길이 있는지라 적이 그냥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위치였다. 감제의 이점이 있지만 전군을 거기다 배치시킬 필요는 없다. 그냥 대부분을 대로에 배치시키고, 관측소 정도만 세워 조기경보 효과를 노리거나 일부만 산등성이에 진채를 세우게 하고 기각지세를 이룬다면, 어느 한쪽이 공격받을 때, 다른 한쪽이 적의 취약점을 찌르는 식으로 수비 측에 굉장히 유리한 포지션을 점할 수 있다. 주변의 아군과 연계하고 있는 고지대에 위치한 병력은 소수일지라도 수배에 달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절대로 없는 것이지만, 이러했을 때는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오자병법에도 나와 있듯이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을 떨게 할 수 있는 위치를 다 갖춘 지형이 바로 가정이다. 공명 역시 그 점을 염두에 두었을 테고.

만일 마속이 산 위에 전병력을 배치한 뒤 일부러 포위당하게 해서 죽을 각오로 싸우게 하는 배수진을 노렸다면 이는 그의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해 보아야 할 정도의 중대한 판단착오다. 전술론에서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듯 산은 패자를 위한 마지막 버팀목일 뿐이다. 산성 같은 진작에 갖춰진 방어 시설이 아닌 그냥 산 위에 포위당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겼다는 역사적 예도 없고 반대로 정예군이 산 위에 포위당해 몰살당한 예는 역사에 무수히 나온다. 배수진으로 유명한 한신도 적군에게 약점을 보여서 적군이 진영에서 나와 공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고, 실제 전황도 별동대가 적진을 점령해서 승리한 것이지 결코 배수진에 있는 군대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파부침주로 대변되는 거록대전 역시 전략적으로 후퇴라는 선택지를 제거하였을 뿐, 전술적으로 병사들을 사지에 내몬 게 아니였다. 게다가 병사들은 사지에 내몰린다고 자동으로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니라 지휘관이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며, 지휘관에 대한 복종, 신뢰가 있어야 한다. 거록대전에서 항우는 불세출의 용장인데다 병사들도 강동에서 항우를 따랐던 이들이었고, 계교 전투에서 원소도 모자를 벗어 던지며 저항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공손찬을 격퇴할 수 있었다. 새로 부임한 지휘관인 마속은 당연히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왜 마속이 그런 중대한 착각을 했는지 정확한 심중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병서에서 말하는 전력전술의 요지가 실전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고지대의 점거가 유용한 경우도 분명 있다. 한중 공방전 정군산 전투가 대표적이다. 법정의 계책으로 황충 하후연보다 높은 곳을 장악하여 하후연의 진지를 훤히 내다보았고, 견디지 못하고 출진한 하후연은 황충의 군대에게 당했다. 그러나 정군산 전투는 가정 전투와 달리 산 위의 황충과 산 밑의 법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급과 식수를 충분히 받은 황충이 고지대를 점령해서 싸우는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주변의 아군 지원 없이 황충이 덜컥 고지를 점령해서 하후연을 공격했다면 그 또한 마속 못지않은 실책이 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전략을 치트키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한데 마속은 그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가 전혀 없었다. 아마 마속은 책으로 배운 건 많았으나 실전에서의 응용력과 지형 판단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괄을 비롯한 역사 속 수많은 똥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험 없고 이론에 능통한 사람들 중에선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외에도 마속은 장강 중류가 지나는 물이 풍부한 형주 출신이기 때문에 물이 부족한 중국 서북부의 상황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2.3.2. 가정 전투의 중요성

위나라의 장안에서 출발한 군대가 천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3군데의 길을 택할수 있다. 첫째로 위수 타고 넘어가기가 있는데, 이 길의 경사 문제로 갈 수 없다. 그 다음이 농관고도로 넘어가기인데 또 산을 타야 하며 대군이 넘어오기에 적당치 않다. 따라서 위수 길과 유사한 이유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가 가정으로 가는 것인데 산을 아주 잠깐 넘어갈 뿐이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군이 신속하게 넘어오려면 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산길을 넘기엔 장합의 군세엔 기병들도 있어 곤란한 부분이 있다. 이제 장합군의 행군경로를 보자면 이들의 목적은 당연히 제갈량 북벌군 격파일텐데 장안에서 천수로 일직선상으로 가지 못하고 가정까지 곡선을 그리며 진군하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상황의 위급함을 볼 때 이 경로가 최단 경로임은 부정할수 없으며 동시에 가정 쪽에 위치한 긴 산맥을 대군을 이끌고 통과할 길 자체가 가정 말고는 있기가 힘든 것은 알 수 있다. 이미 가정까지 올라온 것이 꽤 우회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을 보면 마속에게 제군(여러 부대)을 감독하게 하여 선봉으로 가정에서 싸우라고 보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동쪽 가정을 통해 오는 위나라의 군세를 마속의 선봉대[7]와 처음부터 싸우게 할 작정이었고 실제로 장합은 다른 길이 아니라 가정길로 가는 것을 선택했으며 이는 제갈량의 판단이 들어 맞은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언이며 마속이 장합과 맞서는 선봉으로서, 진령산맥을 넘은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결전의 장소로 촉한 수뇌부와 위나라 수뇌부 양측 모두 예측하고 있던 가정에 와서 성을 점거하지도 않고, 물을 버리고 산에 올라 부적절한 운용으로 패배했던 것도 모든 사료에서 교차 검증된다. 제갈량은 자신이 남긴 저술인 병요에서 "무릇 군대가 행군을 하고 진영을 구축할 때는 먼저 심복(지혜와 언변을 갖춘 간첩)이나 향도(그 마을 사람을 사용하는것)를 보내 전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라고 신신당부 했다. 따라서 촉군의 선봉이 제갈량의 병요에 맞는 충분한 군 운용을 했다면 이런 정찰을 통해 제갈량이 보낸 목적지 가정이 적의 진출방향인 것을 알고 장합군이 넘어오려는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마속이라면 가정에서 충분히 싸울수 있으리라 봤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위에서 추천하던 인물이 위연이나 오의와 같은 촉군 최고위급 장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속에게 주어진 임무는 기본적인 전술적 우위를 토대로 기초적으로 주어진 절도를 준수하면서 적군의 움직임에 따라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이 따로 절도까지 마련해서 준 것도 이런 기본적인 논의에 바탕을 두고 마속이 그 일을 해주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해야할 마속의 역할은 아주 뚜렷했는데, 바로 처음 기곡에서 조운 / 등지가 했던 그 역할이다. 조운 조진군을 막아주고 있는 사이,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끈질기게 버티면서 제갈량이 후방을 정리하고 구하러 올 때까지 가정부터 흥국까지 이중, 삼중으로 틀어막으면서 지연방어를 하든가, 대치 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혹시나 장합이 다른 길[8]로 가려 들면 등짝을 노리면서 견제하는 것. 즉, 가정성은 위군이 육반산맥을 넘는 것을 막는 위치가 아니라 육반산맥을 넘은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상황에 따라 적에 맞서 길을 막거나 병력을 이끌고 후방을 끊어 진출을 저지하기 알맞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정성 진수는 길을 막을때 제갈량의 절도를 따르면서도 자신도 끊임없이 정보를 취득하여 각 지역에 올 수 있는 위군 병력을 예상하고 능동적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듯 난이도가 무작정 쉬운 것은 아니었다. 보통 제갈량이 마속을 띄워주기 위해 일부러 가정의 날로 먹는 쉬운 일을 맡겼다는 말이 있는데, 가정이 핵심 방어 지역이며 최우선으로 적이 올 가능성이 높은 곳이어서 잘 해서 성공하기만 하면 영웅이 되는 곳이긴 했지만, 절대 날먹 수준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일손이 딸리는 촉군의 인재상황이나 병력 규모상, 정확히 시키는 대로만 하는 편장 하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 마속 휘하에 전투 경험이 풍부한 왕평부터 시작해서 역사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 부장을 넷이나 딸려 보낸 게 날먹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갈량은 그 인물들이 다 활약해줘야 가정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장합은 육반산맥을 넘어선 후 넓은 윗길로 가지 않고 좁은 가정으로 진입했고 이는 애당초 마속을 천수로 통하는 길 중 방어하기 쉬운 가정으로 먼저 보낸 제갈량의 예상대로였을 것이다. 왜냐면 아무리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빠른 기동중에 배후의 적을 두고 우회하다간 윗길, 아랫길(가정길) 두 길이 만나는 지점인 흥국이 가정, 악양에 주둔한 마속 쪽에 더 가까우므로 장합이 육반산맥을 나올 때부터 정찰병으로 경로를 파악하고 처음부터 그곳의 좁은 길을 막거나, 급히 빠져나가는 병력의 등짝을 털어버리거나, 후미를 끊고 보급 / 연락선을 털어버리거나 하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 때문에, 애초에 마속을 잡지 않고 우회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군대가 칭하길 총 20만의 군대였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었고 가정에서 왕평이 말 그대로 대패를 당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 무사귀환했음에도 1천호 이상의 피해가 났다는 점을 보면 마속의 군대는 이것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기한 이유로 인해 결국 위군의 진군 루트는 마속 정면 격파로 고정될 수 밖에 없었는데, 가정의 길은 다른 길과 달리 규모가 어찌되었던 이라는 방어적 이점이 있었고 또 가정에서부터 윗길과 아랫길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교차점이자 좁은길의 끝부분인 후방의 흥국까지 연계해서 수비할 수 있다. 또 장합이 알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청수현 북쪽 열유성에선 고상이 백업을 하며 아랫쪽 길을 막고 있어 아래쪽으로 갈 수도 없다. 사실 이건 장합이 가정으로 가면 마속이 버티는 사이 열유성에서 고상이 나와서 뒤를 털고, 열유성으로 가면 고상이 버티는 사이 가정에서 마속이 나와 뒤를 터는 가불기에 가까웠다.[9]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리다가 제갈량이 오면 게임 오버. 그렇다고 병력을 나누어서 한쪽은 가정을 공격하고 한쪽이 빠져나가면 마속도 성의 이점을 살려 일부 병력은 가정성을 방어하러 남겨두고 추격하여 뒤를 끊거나 흥국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방어하면 된다. 열유성에서 백업해 가정을 공격하는 병력의 뒤를 칠수도 있고. 이렇게 되면 오히려 관중 지원군이 일부는 가정에 묶이다가 격파되고 일부는 마속에게 막히거나 뒤를 끊기는 각개격파 상황이 왔을수도 있다. 장합이 5만 병력을 그대로 가정성으로 진군시킨것은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보고 결국 마속을 잡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인데, 이것도 이미 촉군이 준비한 바였으므로 마속이 정상적인 대응만 했다면 제갈량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장합은 어어 하다가 시간제한 안에 마속을 뚫지 못하고 패전했을 것이다.

2.4. 읍참마속

읍참마속의 고사의 근원. 전후사항이 어쨌든 마속의 실책으로 인한 가정에서의 참패로 인해, 순조로웠던 1차 북벌은 크게 실패해버렸고 결국 후퇴하여 촉으로 돌아온다. 이에 부장 왕평으로부터 당시 전후상황을 들은 제갈량은 마속에게 이번 패전의 모든 책임을 지게되어 처형을 당하게 된다.

정사 상랑전을 보면 상랑이 마속과 친했기 때문에 마속이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파면되었다가 제갈량이 죽은 후에야 회복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 전선을 말아먹고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도주했다가 잡혀왔다거나 나중에 가책을 느끼고 자수했다는 설도 있는데, 다만 배송지의 주석에서 인용된 양양기를 보면 마속은 제갈량에게 남기는 글에서 곤과 우의 고사를 들며 자기 자식을 부탁했는데, 굳이 말이 아닌 글로 남긴 것을 보면 처형당하는 시점에서 제갈량과 직접 대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은 약속을 지켜 마속의 자식들을 챙겨 주었다. 왕평전에 따르면 마속이 처형당할 때 부하인 장휴, 이맹도 군법에 따라 처형했다고 한다.

마속이 사형당할 당시 촉한 군대의 장병들은 울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연의나 2차 매체에서 시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캐릭터로 묘사되는 마속이지만 실제론 인망이 상당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장완도 굳이 죽여야했냐고 한 걸 보면 형을 낮춰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라의 대업의 단초를 책임지는 자이면서 탈영까지 한 극악의 패장을 살려뒀다간 향후 또 패전이 일어나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기에 강행했을 수도 있다.

마속의 처형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마속이 참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황으로 봐도 참수형이 자연스러운 상황이고 고사의 제목 자체가 읍마속 내지는 휘루마속이다. 하지만 참수는 삼국지연의에만 묘사된 부분이고, 명확하게 참수되었다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왕평전에는 마속을 주살했다고 나오며, 마속전에는 옥에 갇혀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기록이 달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다.

2.4.1. 정치적 처형?

한가지 의아한 것은 정사에서 구체적으로 시기를 보여주진 않지만 마속의 죽음이 신속하게 결정됐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톈은 형주, 익주, 동주병 계열로 나눠진 촉을 통일하던 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를 처형했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그 근거는 "마속을 죽여서 사람들에게 사죄하였다"는 기록이다. 단순히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한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과 관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이엄만 해도 제갈량이 그의 죄를 만방에 공언하자 출신성분 가리지 않고 핵심 관료들이 대거 참여해 탄핵시켰고, 북벌에 관해 반대하는 주장은 있었지만 출신 때문에 반대한 게 아니라 북벌을 하면 안되는 상황이라는 소신에 따라 반대한 거였다. 게다가 아무리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마속의 행위는 너무나 초보적이고 명백한 자신의 잘못, 그것도 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면 당연히 이행해야 할 명령을 고의로 어긴 것으로 인해 국가의 대업인 북벌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죄였다. 군대 지휘권을 줬는데 보통 막장짓도 아니고 사실상 항명에 가까운 행위를 한 것이라 제갈량이 그를 살려주고 싶어도 그럴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능력 부족이나 착각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면 나중에 중용하지 않으면 않았지, 책임은 묻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북벌 과정에서 수많은 장수들이 실수를 저지르거나 능력이 부족해 일을 크게 그르쳤지만, 제갈량이 이들에게 군법을 적용해 처벌을 내린 사례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과도한 처벌을 하는 것 역시 법치를 바로 세운다고 보기는 어려운 정책이다.

마속의 처형이라는 이슈를 두고 당시 촉한 내에서 출신 지역별로 인사들의 의견이 갈렸다는 기록은 사서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마속의 처형을 두고 제갈량에게 반론을 제기한 걸로 사서 상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장완 이막, 그리고 넓게 잡으면 마속의 도주를 묵인한 상랑 정도가 있는데, 장완은 형남 출신이고 상랑은 형북 출신, 이막은 익주 토박이이다.[10] 여기서 어떤 지역적 통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당시 촉한 정계에서 마속의 처형을 두고 신하들의 견해가 지역적 구분을 통해 나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속의 처형이 외부 세력으로서 익주를 지배하고 있던 유비-제갈량 중심의 인적 네트워크가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익주 세력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보인 정치적 타협의 일환이라는 이중텐의 견해는 개인적인 생각일 뿐, 그냥 근거가 미약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2.4.2. 탈영죄?

朗素與馬謖善 謖逃亡 朗知情不舉 亮恨之 免官還成都.
상랑은 원래 마속과 친하여 마속이 도망갔음에도, 상랑이 이 사정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아 제갈량이 이를 한스러워하며 (상랑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성도로 돌려보냈다.
<상랑전>

마속이 패전과 명령 위반의 문제보다는 몇몇 기록에 언급되는 탈영 이후 오 망명 시도를 해서 처형되었다는 관점이다. 상랑전에서 상랑이 마속의 도주를 눈감아주려 한 것이 근거로 제시되는데 마속이 정상적인 루트로 촉으로 퇴각한 거라면 이는 당연한 것이지 눈감아주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촉한이 나치 독일이나 소련처럼 퇴각이 금지된 나라인 것도 아니고, 제갈량의 북벌은 늘 난항이었던 만큼 북벌 중에 패전한 장수는 있었지만 처형당한 사람은 매우 드물며[11] 이름있는 장수 중에서는 마속이 유일하므로 그만큼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명사 홍량길은 마속은 명을 거역하고 죄를 피해 도망갔는데 주륙되는 게 마땅하다고 평했다.

사실 가정에서 오나라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콕 집어서 마속이 오나라로 도망가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어쨌든 마속이 참패 후 군사들을 수습하지 않고 도망가 그 뒤처리를 부장 중 한명에 불과했던 왕평이 죄다 도맡아야 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가려 했느냐에 상관없이 충분히 사형감이다. 고대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이 인권 의식이 발달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군 지휘관이 참패 후 자기 하나 살겠다고 병사들을 버리고 전선을 이탈해 부하들이 대신 군을 수습했다면 군형법에 의거해 사형에 처한다.[12]

3. 삼국지연의

"승상은 마속의 재질을 어떻게 보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당세(當世)의 영재(英才)입니다."
선주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짐은 이 사람을 보니 말은 잘하지만 능력이 말만큼 뛰어나지 않아서 크게 쓸 인물이 못 되오. 승상은 깊이 살피시오."
연의 85회에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말.

연의에서는 85회에서 유비를 통해 언급된 뒤 남만정벌을 떠난 87회에서 등장하며, 91회 때 조비가 죽은 틈을 타서 유언비어로 사마의를 실각시켜 제갈량에게 더 큰 신임을 얻는다. 훗날 제갈량도 강등되게 만들지만... 그런데 정작 그 유언비어가 현실이 되었지. 그리고 마속을 가정에서 깨뜨리는 역할은 사마의가 가져갔다. 또한 가정 수비는 마속이 온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군령장을 쓰면서까지 자청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정사에서 독단적으로 마속에게 맡겼던 제갈량의 책임을 어느 정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마속의 최후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대목을 읽고 '제갈량과 마속은 유비-제갈량과 비슷한 관계였나 보구나'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바로 뒤에서 패배와 참수형을 연이어 접하고 충격받는 전개가 되기도 하고.

최후도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공개처형이 되었다. 96회에서 한중으로 퇴각한 제갈량은 곧바로 마속을 군법에 회부하고, 마속에겐 경솔하게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해 전쟁을 망친 죄로 간단하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그래도 스스로의 잘못을 자각하곤 있었는지 마속은 사형판결이 내려졌을 때 변명 한마디 없이 잘못을 인정하여 사형을 받아들인다. 마속을 아꼈던 제갈량은 가족을 돌봐주겠다고 하고 마속을 끌고나가 목을 자르게 한 후 통곡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속의 죽음에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선황 유비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났다는데서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유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연의 95회에서 마속이 가정을 위군에게 잃을 때 패턴은 연의의 앞 내용에서도 반복된 적이 있다.
  • 14회: 유비가 원술을 정벌할 때 장비에게 서주의 수비를 맡긴다. 금주령과 함께 진등을 보좌관으로 붙여줬지만 장비는 금주령과 진등의 충고를 싸그리 무시, 결국 여포의 기습으로 서주를 잃는다.
  • 58회: 마초가 동관을 공격할 때, 조조는 조홍에게 동관의 열흘 기한으로 수비를 맡기고 서황을 부장으로 딸려보낸다. 이에 서량군은 조조군을 도발하는데, 처음에는 그나마 서황이 말려서 참았지만, 결국 서황이 없는 틈을 타서 서량군이 다시 도발하자 조홍은 출전했다가 동관을 잃는다.[13]
  • 71회~72회: 조조는 한수 전투에 서황에게 왕평을 딸려 보내는데, 서황은 71회 후반에 왕평의 조언을 무시한 채 한신 흉내를 낸답시고 배수진을 쳤다가 72회에서 패배한다. 그나마 왕평이 본진을 지켜서 피해를 줄였는데 서황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추궁한다. 마속과 서황 둘 다 왕평을 무시하다가 패배한 케이스인데, 심지어 이때 둘이 한 대사도 거의 같다. 즉 연의에서 서황의 능지는 마속과 동급이다. 과연 연의의 피해자의 대표주자 답다.

4. 평가

4.1. 유비의 평가

마속에 대한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先主臨薨謂亮曰 :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亮猶謂不然,
선주(유비)가 훙(사망)할 때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만 요란하고 실속이 없어 크게 쓸 사람이 아니니 그대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이하 생략)
▶ <마량전>

마속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비가 임종의 자리에서 그에 대해 했다는 위와 같은 말로 요약된다. 즉, 말이 실질보다 앞서니 크게 쓸 자가 못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4.1.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

  •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 : 마속이 제갈량의 최측근이었던 마량의 동생으로 당대에 이미 주목받고 있었다 하나, 실제로 마속이 본격적으로 군정에 두각을 드러낸 것은 제갈량의 남방평정 당시의 일이고, 유비가 마속을 저렇게 평가할 만큼 활동한 바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 유비가 저런 평을 내렸는데 마속이 중용될 수 있었겠는지 여부 : 마속의 실제 능력이나 인성 등이 어떻든 간에 무려 황제가 임종 직전까지 그 사람을 두고 "크게 쓸 자가 아니다"라고 평했는데, 그 평의 대상이 된 자가 중용된다는 것은 그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는 것과 진배 없다. 촉한은 한나라 부흥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건국된 나라였고 게다가 유비는 평범한 황제도 아닌 창업군주였기 때문에,유비 생전은 물론 후주 유선의 시대조차 조정 대신과 장군들이 황제를 어찌 못할 정도로 황제의 권력과 권위가 모두 강력한 편이었고, 제갈량을 비롯한 재상들의 권력 또한 황제의 위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제갈량을 직접 찾아가서 직접 등용한 게 바로 유비다. 또한 제갈량은 유비 사후 어쩌면 정적에 가까웠던 이엄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선제가 중용할 인재가 아니라고 특별히 거론했던 신하를 고명대신 중 한 명이 함부로 중용한다는 것은, 유비의 고명을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제갈량으로서는 심각한 리스크를 부담하는 일이다.
  • 문제는 정황이 명확하지 않다는 거다. 습착치와 같은 인물의 비판은 후세의 평가일 뿐이다. 당시 촉한 내부가 마냥 제갈량에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속에 관한 비판은 그가 제갈량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지, 그를 기용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14] 오히려 장완이 "아까운 인재를 성급하게 죽인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할 정도다. 제갈량이 스스로 벼슬을 깎아 사죄했다곤 하나, 이엄이라는 잠재적 정적이 존재함에도 제갈량의 실권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므로 마속의 기용 건으로 정치적 타격이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이른바 '유비의 평가'는 당대의 기준에서 볼 때 후세의 시각에서 해석되는 것처럼 마속에게 비판적인 것이었다고 보기 어려웠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리도 후대에 널리 알려졌기에 그 근거가 희박하지만 유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뭐 없지는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마속이 당시 유비가 따로 평가를 내리거나, 제갈량이 선제의 유명을 무시한다는 모험을 걸 정도로 거물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이다. 마량 형제에 대한 의리 때문에 선제의 유명을 무시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인정에 치우쳐져 정치가 제갈량을 간과하는 구석이 있다. 유비의 유고가 본디부터 널리 알려졌는지, 마속 사후 비로소 알려진 건지도 불분명하다.

4.1.2. 반론

  • 일단 마속이 두각을 드러낸 것이 남방 평정부터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주장이다. 정사를 보면 마속에 대한 기록은 마량전 끝에 부록마냥 덧붙여져 간략한 출세 과정과 기산 출병에 대해 기록된 것이 전부이며, 여기에 양양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갈량에게 남방 평정에 대한 조언을 한 것이 마속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즉, 마속에 대한 실질적인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 위의 주장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록을 근거로 실제 존재하는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이 마속을 신뢰했다는 기록이 실제 있기에 평소 유비가 이를 우려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 위의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는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전에는 마속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한 바도 없다가 그 시점에 갑자기 마속 이야기를 꺼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선 유비가 특별히 마속에 대해서만 말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유비는 이릉대전 다음 해에 병사한 것이지 이릉대전의 상처로 바로 사망하거나 한 것이 아니므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즉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마속도 언급된 것일 수 있다.[15] 마속은 유비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했다가 기록적인 실패를 겪은 특별한 경우라서 기록에 남은 것이지, 마속만을 언급했기 때문에 마속에 대한 언급만 기록에 남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설령 마속만 별도로 언급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릉대전 이전에도 당연히 제갈량 등과 인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므로, 과거에 마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견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다가 따로 이야기할 이유가 된다.
  •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 갑자기 마속에 대해 몇 마디 남겼다는 것은 가능하긴 하다. 유비는 백제성에서 일종의 칩거 상태였기 때문에 제갈량과 대화를 나눴을 시간이 적었을 수 있고 평소에 마속에 대해서도 별 말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설령 유비가 마속 하나만을 집어서 얘기했다 하더라도, 유비는 인물평만 남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착한 일이 작다고 행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고 나쁜 일이 작다고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은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나 사실상 범인에게는 실현이 불가능한 말이다. 이와 같이 유비의 유고를 전부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비의 유고들도 논리적이지 않거나 평소 유비의 언동에서 드러나지 않았다거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해 보이는 일을 삼가는 것도 어색한 일이다. 마속의 당시 나이를 생각해볼 때, 유비의 평가를 아직 미숙하니 큰 역할을 맡기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한 가능하기는 하나 밑바닥 신발장수에서 나라 하나를 세운 대영웅이 죽기 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길 말치고는 너무나 조잡스럽고 중요도가 떨어진다. 유비가 그때 남긴 말들의 중요도가 대단히 높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이와 같은 전제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해석은 유비의 유고가 여러 가지였기에, 여러 유고 가운데에서 마속에 대한 발언은 유비 본인이 툭 던지는 식으로 얘기했다든가 하는 형태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해석했을 가능성이다. 유비 입장에서는 평소에 자신의 사후 제갈량의 성향상 마속을 중용할 것 같은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근거가 어렴풋하고 직관적이라 잘 전달하기 어려웠다면 유고의 형식으로 몇 마디나마 전달해 두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 유비는 어디까지나 마속을 크게 쓰기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지,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니 등용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니다. 또한 크게 쓰지 말라는 막연한 표현일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느 이상의 권한을 주지 말라 지정한 것도 아니었다. 황제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한 사람을 이후에 재평가해서 등용한다고 해서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실제로 유비의 유고만을 근거로 한창 일할 청장년의 벼슬길을 제한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좀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다.[16]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그보다 적임자가 없다면 당연히 쓸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능력을 완전히 신임하지는 않았는데 그 증거가 바로 정사에서 언급되는 "마속이 제갈량의 절도를 어기고..."이다. 즉 제갈량은 단순히 마속에게 "알아서 수비해라"고 가정의 수비를 맡긴 게 아니라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다. 따라서 실제 제갈량은 마속의 능력 및 경험 부족을 감안하여 행동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시했으며 왕평을 부관으로 삼아 나름 대책을 세웠으나 마속의 성격 때문에 최후의 보험장치까지 해제되었고 당연히 이는 생전의 유비조차도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 이엄은 제갈량과 실제로 대등한 위치였다고 볼 수 없다. 이엄은 본래 유비의 부하가 아닌 유장의 휘하였으며, 유비가 죽기 직전 그를 상서령에 임명하기 전까지 그의 위치는 건위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제갈량은 형주 시절부터 유비를 보좌하여 이미 유비가 입촉하기 전부터 장사, 계양, 영릉의 3군을 진수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 당시 유비군 내에서 그와 견줄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은 오직 관우 뿐이었던 데다가, 여기에 제갈량은 유비가 황제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승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애초에 유비의 유언으로 고명대신이 되기 이전부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세력의 2인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를 견제할 수 있는 관우 장비, 법정, 마초, 황충, 황권과 같은 인물들은 각각 형주 공방전에서 전사, 암살, 병사, 위나라에 투항해버린 상황이었다. 반면 이엄은 파촉의 기존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도 법정이나 유파, 황권과 같은 인물들이 그보다 먼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아 왕의 작위를 얻으라고 권유한 바가 있는데, 이는 당시 제갈량의 권력이 불안정한 상황이었거나 둘의 위치가 동등한 상황이었다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외에도 파주 창설이나 관부의 설치 등을 요구하는 대상이 제갈량이었음을 볼 때 둘의 위치는 분명 제갈량이 위가 맞다. 즉, 이엄은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제갈량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였을 뿐 마속의 기용 문제만으로 둘의 위치가 한순간에 바뀔 만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가정이 성립되려면 먼저 제갈량의 기반이 불안한 상태여야 성립되는 법인데, 기록상으로 제갈량의 정치 기반이 불안한 상태였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17]

4.2. 능력

기본적으로 마속은 참모나 보급장교라면 큰 그릇이나 야전 지휘관이라면 작은 그릇이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건 몰라도 인재를 보는 눈만큼은 득도한 유비의 말이다. 다만 참모로 일할 때는 나름대로 괜찮은 조언도 했고, 제갈량이 병법도 논하며 신임했다는 것을 보면 참모로는 적어도 평균치 이상은 했을 것이다.[18] 가정에서 거하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야전 사령관과 참모는 임무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9] 그런데 참모도 결정권이 없을 뿐, 무조건 작전지휘와 담을 쌓는 게 아니라 전황을 제대로 파악해서 작전지휘에 대한 조언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 지휘관 대신 지휘를 하기도 한다.[20] 따라서 마속이 가정에서 설령 참모직을 맡아도 군사를 산 위에 주둔시켜야 한다는 헛소리나 했을 것이며, 그나마 마속이 활약할만한 분야는 비서나 행정 등일 것이다.직접 군사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아니라 사령관에게 조언이나 해주거나 옆에서 상관을 보좌하는 역할만 했으면 그럭저럭 활약했을지도 모를일.

제갈량은 형제처럼 가까웠던 마량에 대한 옛정 이외에도 마속에게 나름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에게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보고는 가정을 중요 포인트로 삼아 위군이 오는 방향에 따라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가정 전투에 파견한 것으로 그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실적을 올릴 계획까지 지참해주고 부장을 주르륵 딸려주고[21] 여러 부대를 따로 인솔하게 해 마속을 선봉으로서 가정에 투입했다. 이때 병력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진춘추에 나오는 "기산과 기곡 양쪽에서 아군의 수가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위는 오와의 전선에 신경쓰느라 촉을 상대하는데 많은 병력을 투자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북벌 초기에는 촉이 병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또한 마속의 대패로 촉군은 왕평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서현의 1천호의 백성들을 데려와도 피해가 복구가 안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니 원래 데려갔던 부대 규모도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때 제갈량 곁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촉한은 이릉대전 몇년 전부터 관우, 황충, 장비등의 일급 사령관들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고 이릉에서는 황권과 제갈량의 의형제로까지 추정되는 마속의 형 마량을 잃었기 때문에 재능이 보였던 마속을 기용하는건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던 것. 적극 가정에 갈 다른 후보 중에 조운은 조진과 대치하고 있으니 제외, 주변에서는 위연 오의를 가정으로 돌리라고 권했지만 그럴 경우 그들의 빈자리를 마속이 메워야 하고, 가정에서 막는 동안 농서지역을 장악하는 더 어려운 임무가 마속에게 주어진다.[22] 3군이 호응했다고 하지만 민심이 쏠렸다는 것이지 관리들까지 죄다 문열고 투항한 게 아니다. 특히 위의 명장 곽회가 필사적인 노력으로 농서 지역을 촉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저지했다. 우선 신속하게 상규의 곽회를 제압해서 천수, 남안을 완전히 장악해 촉군이 옹양주에 머물곳을 만드는게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한진춘추의 저자인 습착치는 마속을 인재라 평하며 비록 실패했으나 그를 처형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반박했다. 유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했던 것은 그만큼 마속이 능력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안그래도 인재가 부족한 작은 나라에서 그런 인물을 없앤 것은 스스로의 힘을 깎아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참고로 습착치는 촉한정통론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아무리 한 개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집단을 통솔하는 원칙과 규율보다도 중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처형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당시에는 마속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의견이 있었다.
“제갈량이 상국(上國-위나라)을 겸병하지 못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릇 진나라는 순임보를 살렸으니 폐법(廢法)하여 공을 이루었고, 초성왕은 득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를 죽이고 거듭 패배했다. 이제 촉은 궁벽한 한 귀퉁이의 나라로 인재가 상국보다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고 물러서서 어리석은 자를 거두어 쓰니 명법(明法)을 인재보다 중히 여겼던 것이다. 이는 삼패지도(三敗之道)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장차 대업을 이루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았겠는가! 또한 선주(유비)가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고 경계했지만 어찌 마속이 인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으리? 제갈량이 유비의 가르침을 받들고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 마속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천하의 재상으로 큰 공을 세우려 하면서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제한하지 않고 그 그릇에 따라 일을 맡기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 허물이 있었다면 주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고, 능력을 헤아림에 실수가 있었다면 유익한 인재를 죽인 꼴이다. 이를 두고 보면 (제갈량을) 지혜로운 자라 말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습착치

그런데 마속이 단지 패군지장이라 처형당한 게 아니라 정사 상랑전의 기록대로 도망가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때문에 이런 견해도 있다.
"이를 살펴본즉 마속은 군사가 패하자 도망하였고 후에 다시 잡아들이니 하옥(下獄)되어 죽은 것이다.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쳐 본래 취할 바가 없었다. 또한 제갈량의 절도(節度-군사 명령)를 어겨 군사를 잃는데 이르렀으나 복죄(伏罪)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尙) 멀리 도망갔으니,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는 가르침을 어겼으매 제갈량이 그를 주륙(誅戮)한 것은 심히 마땅하거니와 습착치(習鑿齒) 등이 제갈량이 잘못 형벌을 내렸다라고 기록한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다.
사사발복(四史發伏)에서 홍량길(洪亮吉)[23]이 말함

또한 명나라 시대 학자인 왕세정도 다음과 같이 습착치의 견해를 비판했다.
마속이 이야기한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이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사로 싸우는 것이 하책이니, 비록 태공, 손무가 법을 만들어도, 누가 이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합은 일개 기장(騎將)으로, 익덕의 얕은 꾀로, 그를 단절시키기에 넉넉했으나, 마속은 공명의 정비된 군을 부리고도, 한번 싸우곤 꺾이고 무너져,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했으니, 이가 마음으로 싸운다는 견해로, 천한 선비가 주의를 기울여 살펴 가정이 흔들리고 패한 것이다. 공명이 미처 유생을 모두 떼어놓을 수 없었음이 옳고, 마속을 경솔하게 믿어 그를 크게 기용했다가, 그 후 마속을 주살했음이 옳다. 습착치는 공명이 그가 주살됨은 얻었으나 그가 주살될만한 까닭은 얻지 못했다고 논했다. 위연, 오의는 쓰일 수 있었으나 쓰이지 않아, 그들의 불평이 오래 지속됐다. 진실로 마속을 아껴 주살하지 않았으면, 무엇으로 복종시킬 것이고, 자신만이 옳다 여겨 다시 법을 그르치는 이는, 무엇으로 장차 법을 행할 것이며, 장차 법을 행하더라도 무리의 의견은 뒤섞여 어지러워져 사태가 엉클어질 것이고, 법을 행하지 않으면 군기는 와해돼 부진할 것이다. 마속은 청담이나 떠드는 선비인데, 어찌 성득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순림보(荀林父)가 사면돼 진(晉)이 패국(覇國)이 됐으나, 성득신이 주살됐어도 초(楚)가 굳셈을 해하지 못했으니, 그런즉 초 또한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거듭 상랑전을 고찰하니,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갔는데, 상랑이 본디 마속과 친해, 마속이 도망가나 상랑이 사정을 알고도 알리지 않아, 제갈량이 이를 한스러워하여 면관시켜 성도로 돌려보냈으니, 그런즉 마속 또한 도망갔던 것이다. 바로 사형하지 않고 사패(司敗)가 찾은 이후에야 그를 잡았으니, 주살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가?
왕세정(王世貞)[24]의 독서후(讀書後) 서마속전후(書馬謖傳後)

또 속후한서를 지은 학경은 습착치의 평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량이 장완(蔣琬)의 말에 대답한 것을 살피건대, 성심(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평한 도리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밝히고 법을 세우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규범이 되는 것이니, 습착치가 제갈량을 지적하여 법을 폐하여 재주 있는 이를 보전(保全)함이 마땅하다 말한 것은 잘못이다.

4.3.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강유가 촉에 합류해서 제갈량의 가르침을 받게 되자, 마속이 자신의 입지에 위기를 느껴서 강유를 질투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실제로 근, 현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는 이런 식으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25]

이러한 이야기는 연의에서 묘사된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강유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연의에서 강유는 등장부터 천수 전투에서 적수가 없고 거의 신선이나 신 급으로 묘사되는 천하의 제갈량을 계책으로 한 번 이기고 오호대장군중 한명인 조운과의 일기토를 벌여 제갈량에게 큰 임팩트를 심어준다. 이후 제갈량은 강유를 사로잡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며 조위의 부마인 하후무까지 풀어주는 등 공을 들여 강유를 얻으며 평생 깨우친 것을 물려줄 자를 얻었다고 기뻐하며, 제갈량의 기대에 부응하듯 강유는 천수성을 화살 한 대로 얻는 공을 세우고 대 조진전, 대 강족전에서도 활약한다. 마속은 이 모습들을 모두 보고 난 후에 사마의가 재등판하자 가정을 지키러 갔다가 대패한다. 마속과 강유 둘 다 당시 젊은 인재로 묘사되었고 제갈량이 큰 기대를 걸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마속이 강유에게 제갈량의 으뜸가는 총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정에서 무리수를 두었다는 추측이 나올 법 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강유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상관인 태수 마준에게 기현 출신이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아 버려졌고, 이후 기현 주민들의 대표격으로 촉군 진영에 가서 항복 협상을 진행하다가,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참패당해서' 촉군이 퇴각하게 될 때 함께 가면서 귀순했다. 당연히 강유가 군사를 지휘해 촉군과 전투를 치른 일은 한 번도 없었고, 1차 북벌 당시 촉군을 위해 공을 세우거나 촉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만한 일 자체도 전혀 없었다. 애시당초 마속과 강유가 서로 만난 일조차도 한 번도 없었을 확률이 크다. 마속이 도망치다 붙잡혀 왔을 때 서로 얼굴 도장이나 한 번 찍었을까.

게다가 촉군 내에서의 입지를 따져 봐도 강유는 마속이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말고 할 짬이 되지 못했다. 마속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촉 진영 내부에서 꽤나 촉망받는 인재였고 제갈량에게도 상당히 신임받고 있었던 반면, 강유는 이제 막 들어온 항장이고 나이는 서른도 안 된 햇병아리였으니[26] 당시 그의 입지는 마속이 라이벌 의식을 느낄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설령 강유가 촉나라에서 촉망받았더라도 마속 입장에서는 본인 다음 세대를 맡을 뛰어난 인재이지 본인의 직접적인 라이벌은 아니었다. 당장 위에 왕평이 아직 짬이 낮아 마속 대신 대장을 할 여지가 없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강유는 그보다도 아래였고 실제로 왕평 사후에야 촉의 총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27]

5. 기타

산에 집착하다 전쟁을 말아먹고 본인도 죽는 대참사를 낸 임팩트가 커서 등애와 함께 등산애호가, 산악인 캐릭터로 곧잘 희화화된다. 지분을 나누면 마속이 실패한 산악인, 등애가 성공한 산악인으로 정리할 수 있다. 등애는 목적을 위해 산을 탄 반면 마속은 오히려 산을 타서 전쟁을 말아먹었기에 마속이야말로 진정으로 산을 사랑한 남자, 진짜 산악인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도 마속은 까고 등애는 빠는 경우가 많아 마속과 등애는 중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이라고 칭한다.

5월 가정의 달이므로 마속을 까야 한다는 개드립도 있다.

정사 삼국지 촉서에는 마속전이 없으며, 마속의 형이 되는 마량전에 마속의 이야기가 나온다. 단지 편의상 나무위키나 파성넷에서 임의로 마량전을 마속전과 마량전으로 나눴던 것이다.[28]

영락성 전투에서 서하군과의 전쟁에서 난전 중 전사한 서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서희가 부장 곡진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임하자[29] 서하군과의 전투에서 패사했고[30], 마속은 왕평의 말을 듣지 않고 산 정상에 진을 치고 적과 맞서자 결국은 패했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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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량과 마속의 세 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량과 마속이 항렬에 따라 자를 쓴 것을 보면 적어도 그의 세 형은 백상(伯常), 중상(仲常), 숙상(叔常)이라는 자를 썼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2]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제갈량이 마량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음은 틀림없다. 마량이 제갈량을 형이라고 불렀다는 언급을 보아 절친한 선후배이자 형, 동생처럼 대하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3] 연의에는 30,000명으로 나와 있지만 애초에 연의의 군세 자체가 뻥튀기가 심하다. 진짜 30,000명이었다면 이릉전투에서 병력 대부분을 잃고 일부만 겨우 복구한 촉군은 철수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으므로, 마속의 참패로 공세역량을 완전히 상실했으나 촉을 지킬 가용병력은 남았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배송지 왈, 가정에서 잃은 병사들은 서현의 1,0000여가(家)를 뽑아왔어도 회복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마속이 손실한 병력이 그보다 많음을 알 수 있으며 1가를 5명으로 보면 잃은 병사는 5,000명보다 많다. 이것은 마속이 잃은 병사들만 셈한 것으로 제갈량이 배치한 병력은 이보다 많았을 것이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4] 엄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북을 울리며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 장합이 복병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훗날 4차 북벌 때도 제갈량과 사마의의 본대와 싸울 때 장합이 별동대로 왕평을 급습하나 왕평이 이를 막아내는 등 장합의 천적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5] 권율의 유명한 행주대첩 당시 앞으로는 왜군과 대치했고 뒤쪽으로는 강을 끼고 있어 목책에 불을 질러도 금방 진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강을 통해 아주 약간이나마 보충병과 무기를 보급받기도 했다. [6] 미국군에서는 훈련 및 행군 중인 훈련병들에게 하루 8L의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한다. 현대의 군대가 비상식량 키트에 굳이 정수제를 넣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깨끗한 물의 상시 공급은 전투력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 [7] 당장 기산과 기곡에서 위군보다 병력이 많았으며 제갈량이 촉군이 대군(大軍)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그곳의 여러부대를 통솔하게 했다는 점에서 결코 적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대군의 선봉인 만큼 병사들의 양과 질도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어느 정도 병력이 어느 루트로 오는지 훤히 알고 있는 제갈량이 가정에서 장합의 발을 묶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 최소한의 병력은 딸려줬을 게 당연하다. [8] 가정 북쪽의 있는 너른 도로라든가, 남쪽 청수현 북쪽 열유성 쪽 길. 단 위군이 확보할 식수나 말먹이로 쓸 식수와 마초까지 풍부한 건 역시 가정 뿐이다. [9] 뭐 장합 정도의 A급 장수쯤 되면 화공을 쓰던 어쩌던 해서 몸 비틀어가면서 근성으로 뚫을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장합이라도 제갈량이 거는 가불기시간 제한 안에 뚫기란 매우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장합이 작전대로의 자리에 위치한 마속을 뚫는 것은 사실상 입스타에 가까운 영역이니 거의 고려되지 않는 가능성. [10] 애초에 이막은 성품이 오만하고 마속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갈량을 까기 위해서 서융족이 용서라는 행위를 하는데 넌 왜 못하냐고 돌려 까는것에 가깝다. 용서라는것도 한도가 있는것을 감안하면 이막은 장완의 인재가 없는데 굳이 죽여야 하겠습니다 보다 비교할수 없는 이치에 맞지 않는 오로지 제갈량을 까기 위한 변호였다. 이막은 이 일로 제갈량에게 찍혀 촉으로 짱박히고 살았어야 했으며 제갈량을 원망한다, 이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자 슬퍼하는 황제 유선에게 '황제는 제갈량에게 눈치보고 살았는데 그 제갈량이 죽었으니 기뻐하시죠?'라고 표를 올렸다가 분노한 유선에게 처형당한다. 형주의 마씨 형제 처럼 이막을 미롯한 삼형제를 이씨삼룡이라 불렀으나 이막의 오만함과 맞지도 않은 제갈량에 대한 비방 때문에 이씨삼룡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개차반이이었다. [11] 촉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대 기준으로 촉한의 정치와 법 집행은 매우 관대한 편이었다. 법가적 원칙에 입각해 신상필벌에 철두철미했다는 제갈량 역시 진수의 평대로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해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12] 대한민국 군형법 제 4장, 지휘관의 항복과 도피의 죄. [13] 이 때문에 조홍은 (서황의 상세한 보고를 접한) 조조에게 친족이고 뭐고 참수형을 당할 뻔했지만, 그 다음에 마초가 기습했을 때 목숨 걸고 조조를 구해서 체면치레를 했다. [14] 위연과 오의라는 대안이 이미 제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두 장군은 1차 북벌 당시 그 역할 자체가 불분명하다. 마속이 성공한 뒤의 다음 작전에 투입하려고 했는데 마속이 말아먹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퇴각한 거라는 설도 있지만 뒷받침되는 사료가 없어서 뇌피셜의 영역. [15] 마속의 형이자 제갈량과는 의형제 같은 사이인 마량은 유비의 명에 따라 촉한과 무릉만이의 동맹을 위한 외교관으로 종군했다가 촉에게 전황이 불리해진 뒤 뚜렷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이유로 죽었든 이릉대전으로 인해 사망한 마량과 그의 유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마속이 언급됐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16] 당장 제갈량의 후계자 장완은 본인 잘못으로 유비한테 밉보여서 한때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유비 사후 제갈량이 다시 데려다 놓고 기용해서 재상 자리까지 물려받았던 사람이다. [17] 제갈량은 실제로 가정전투의 패배로 우장군으로 자진 강등하였고, 3차 북벌의 성과를 바탕으로 승상에 복귀하였으나, 우장군 시절에 이엄이 제갈량보다 권위 상 위였다는 근거 역시 없다. [18] 마속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중 하나가 양양기의 '공심위상'. 남만을 정복하러 가는 제갈량에게 "용병의 대원칙은 적의 마음을 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심리전이 상책이고 군사로 싸우는 전투는 하책입니다(夫用兵之道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 그러므로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일화.실행이 쉽냐고 물으면 또 다르지만 정말로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라 안 할 수 없고 이렇듯 제갈량에게 조언을 하는것만 봐도 나름대로 식견이 있던것으로 보이다. [19] 이에 대해서 차라리 왕평을 부장이 아닌 총대장으로 쓸 수도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당시 왕평은 참군이었던 마속에게 소속되어 선봉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낮은 직급이었던 데다가, 항장이라 내부입지가 적을 수밖에 없는(훗날 강유도 제갈량-장완 라인을 탔음에도 중앙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못 썼다) 왕평을 아무 이유없이 하루 아침에 승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제갈량이 마속에게 군사적 식견이 뛰어난 왕평을 붙여준 것만 해도 그의 꼼꼼한 성격을 볼 수 있다. 이후 왕평을 중용한 것도 그가 군사적 식견을 통한 실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 실제 삼국지에서 참모의 조언에 따라 부대가 산에 올라간 사례가 있다. 이쪽은 제대로 판단해서 오히려 성공한 사례인데, 참모 역시도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1] 상대 장군인 장합조차도 중요 부장으로 비요만 확인되는 정도인데 마속은 이름이 확인되는 부장만 4명이다. 아무리 허접해 보여도 역사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 인물은 능력이든 명성이든 뭐 하나는 무명 장수들과 차별화되는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봐야 한다. [22] 그런 의미에서 후일 자신의 후계자인 장완에게 강유를 소개시켜 주어 그가 장완을 군사적으로 도와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마속에게도 군사적인 조언을 해줄 부장을 붙이면 마속이 그 역할을 다해주고 향후 마속의 중요 측근으로 마속을 보좌하는 역할로 왕평을 제갈량이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왕평은 충분한 조언을 해줬으나 마속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23] 산문 및 사륙문(四六文:騈文)에도 능했던 청나라의 문인 겸 학자. 변문팔대가(騈文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경학(經學)·역사지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요 저서에는 《홍북강전집(洪北江全集)》,《권시각집(卷施閣集)》등이 있다. [24]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後七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학식은 그 중에서도 제1인자였던 중국 명나라의 문학자. 명대 후기 고문사(古文辭)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격조를 소중히 여기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에는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考)》등이 있다. [25] 삼국지 공명전,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에서의 마속은 클론 무장이긴 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평이나 진지 대화 등을 통해 마속이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며 진삼국무쌍 BLAST에 레어 등급으로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플레이어블로 참전하여 강유와 라이벌 기믹을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 [26] 강유는 202년생, 마속은 190년생으로 12살 차이가 나는 띠동갑이다. 228년에는 각각 27세, 39세. [27]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으로, 제갈량이 죽고 무려 22년이나 지난 후이다. [28] 촉서 9권은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으로 진수가 묶어서 전을 썼는데 자신의 국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책임회피를 하려고 도망가다가 잡혀서 죽은 마속이 동화, 유파, 마량, 진진, 동윤, 여예 같은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던 촉의 인재들과 나란히 묶일 리가 없다. 굳이 마속전이 들어가야 한다면 촉에 큰 해를 입힌 인물들을 묶은 10권(유봉, 팽양, 요립, 이엄, 위연, 양의, 유염)에 들어가는 게 맞다. [29] 수원 부족으로 인해 북송군은 말똥을 갈아 즙을 내어 마시는 등 상황이 심각하였다. [30] 서희 본인을 비롯한 이순거 등 20만 명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