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5:45:07

유장(삼국지)

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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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 | 劉璋
파일:attachment/유장(삼국지)/you_long_novel.jpg
최종직위 <colbgcolor=#fff,#000>익주목(益州牧) 감군사자(監軍使者) 겸 진위장군(振威將軍)
성씨 (劉)
(璋)
계옥(季玉)
아버지 유언(劉焉)
생몰연도 ? ~ 219년
고향 형주(荊州) 강하군(江夏郡) 경릉현(竟陵縣)
사망지 형주(荊州) 의도군(宜都郡) 자귀현(秭歸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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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봉거도위(奉車都尉) → 익주목(益州牧) 감군사자(監軍使者) → 겸 진위장군(振威將軍) → 진위장군(振威將軍)[1] → 겸 익주목(益州牧)[2] }}}}}}}}}

1. 개요2. 생애
2.1. 익주목 유장2.2. 유비의 익주 입성2.3. 익주공방전
3. 가족 관계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4.2. 부정적인 평가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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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실의 종친으로 익주자사를 지낸 유언의 넷째 아들이다. 유언의 뒤를 이어 익주목이 되었으나 유비에게 익주를 빼앗겼다.

2. 생애

2.1. 익주목 유장

유장의 큰 형과 둘째 형이었던 유범 유탄 장안 조정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 유언 마등과 짜고 이각을 토벌하려 했을 때 이를 눈치 챈 이각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유장도 조정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으나, 사실상 한실에 반란을 일으킨 유언을 설득시키기 위해 익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유언은 설득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언이 급사하게 된다.

유언의 사망으로 익주에 구심점이 사라지자 조위(趙韙)[3] 등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받아 조정으로부터 감군자사 겸 익주목으로 임명받게 된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익주 땅을 다스리게 된다.

영웅기에 따르면 유언이 죽자, 아들 유장이 대신하여 자사가 되었는데 장안에서 영천사람 호모(扈冒)를 배수하여 자사로 삼아 한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한편 형주의 별가(別駕) 유합(劉闔)은 유장이 거느리던 심미, 누발, 감녕이 반란을 일으키자, 때에 맞춰 유장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패주하여 형주로 달아났다. 유장이 조위를 시켜 형주로 진공하여 구인에 주둔했다.[4]

영웅기에 이르길 방희와 유장은 예전의 우의가 있었고, 유장의 여러 아들을 방희가 난에서 구해주었기에, 유장은 방희를 후덕하게 대해주고,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게 하였는데 방희가 권세를 제멋대로 하였다고 한다. 후에 방희와 유장의 우호관계에 틈이 나자, 유장을 옹위했던 조위가 병사를 일으켜 안에서 호응하여서, 사람들은 흩어져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은 유장이 명쾌하게 결단함은 적으면서 밖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남양(南陽), 삼보(三輔) 사람들이 수만 가가 익주로 흘러 들어오자,[5] 이들을 거두어 병사로 삼고, 동주병(東州兵)이라 불렀다.[6] 유장의 성품은 너그럽고 유순하며, 위략(威略)이 없어, 동주 사람들은 예부터 있던 익주의 백성들을 침탈하고 폭행했지만, 유장은 능히 막지 못하고, 정령(政令)은 빠진 게 많아, 익주 사람들은 자못 원망을 품었다.

조위는 본래 인심을 얻고 있었고 유장을 옹립했었기에, 유장이 그에게 위임했었는데 이 꼴을 보고 조위가 딴 마음을 품었는지 백성들의 원망을 틈타 모반하여, 이에 형주에 뇌물을 보내 강화를 청하고, 몰래 주중의 대성(大姓) 호족들과 연계하여, 이들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돌아서 유장을 공격했다. 촉군, 광한, 건위군이 모두 조위에 호응하였다. 유장은 성도로 달려 들어가 성을 지키는 꼬락서니로 전락했는데, 동주병들은 조위를 두려워 해, 모두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죽을 힘을 다해 유장을 도우니, 마침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조위를 강주까지 역공하니, 조위의 장수 방락과 이이가 모반하여 조위군을 참살하고, 조위를 참수했다.

이렇게 유장 치세의 익주는 유장을 익주목으로 세운 사람이 호족들과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개판 5분전이었는데 유장은 유언처럼 익주를 휘어잡을 카리스마와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장의 통치기의 익주는 혼란기를 겪게되었다. 유언이 끌어들인 중원에서 전란을 피해 들어온 유민집단과 토착 호족, 북쪽의 강족, 저족과 한중의 오두미도 그리고 남쪽의 만족들이 제각기 얽히게 된다. 이들을 한 데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익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때는 성도가 포위되어 유장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사실 장로와 오두미도 역시 유언이 끌어들인 세력으로 유언은 장로를 후원하여 한중에 안정적인 기반을 갖도록 했다. 그런데 장로는 점차 교만해지고 방자해져 유언을 계승한 유장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이에 유장이 장로의 모친( 노씨)과 동생들을 죽이고 방희 등을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했으나, 수차례 격파되었다고 한다. 장로의 부곡들이 파서(巴西)에 많이 있었기에,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장로를 막게 했다. 그럼에도 장로는 파군과 한중군에서 거의 30년간 제패했으니 장로를 막는데는 실패한듯 하다.

익주는 지금의 쓰촨성 일대로, 분지다. 분지는 넓은 평야가 험준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에 자리 잡은 곳이었으므로 연중 따뜻하여 사계절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유하고 축복 받은 땅이었기에 누구나( 손권, 유비 등) 탐을 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유장의 통치는 법령이 해이하고 기강이 서지 않아 혼란하여[7] 이런 장점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익주의 지형의 이점이 아니었다면, 다른 군벌에게 치이고 까지며 땅을 내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튼 유장은 겨우겨우 익주 통치를 계속했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자 3백 명의 수인(叟人) 이민족 병사와 물자를 지원하여 조조에 복종하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3번 째 사자로 보냈던 장송 적벽대전을 앞두고 자신감에 차있던 조조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되었고, 이에 원한을 품고 돌아와서는, 아예 적벽대전에 패배한 조조의 세력이 밀려나자 조조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유비와 연합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유비에게 병사 수천 명과 온갖 물자 등 막대한 선물을 하게 된다.

한편, 유장의 나약함에 실망하고 있던 막하의 몇몇 관료들은 다른 힘있는 이에게 익주를 넘기려 한다. 장송 법정이 이를 주도했다. 이러한 생각 아래에 그들은 형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유비에게 익주를 넘기겠단 음모를 꾸미고는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

2.2. 유비의 익주 입성

211년, 조조 한중 장로를 정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 이에 유장은 조조가 장로의 물자를 얻어 익주마저 병합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8]

장송은 유장에게 유비는 유장과 같은 한실의 종친이며, 조조와는 원수 관계이고, 용병 실력이 뛰어나니,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토벌하도록 하면, 조조가 익주를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설득했다. 유장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겨 유비를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9] 자치통감에 따르면 법정에게 병사 4천으로 맞아들이게 했고 유비는 수만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이때, 황권 왕루는 유비를 불러들이는 것을 말렸으며, 특히 왕루는 성문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하며 결사반대했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결국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삼국지연의에서 각색이 좀 들어가서 황권은 유장의 옷자락을 물면서까지 붙잡았지만 화가 난 유장이 옷을 잡아당겨 앞으로 넘어져 앞니 2개가 부러졌고, 왕루는 성문 위에 몸을 묶고 사정까지 하였지만 유장이 들어주지를 않자 스스로 몸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자결까지 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유장은 그런 험한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의견을 고집해 유비를 불러들인다.

법정 장송이 유비를 찾아가 익주로 들어오도록 권하고, 유비는 몇 만의 군대를 이끌고 익주로 들어가서 성도에서 320리 떨어진 부성까지 와서 유장과 회담한다. 장송과 법정 그리고 방통은 이때 유장을 기습하라고 권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유장과 유비의 회담은 화기애애하였는데,[10]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行大司馬)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로 천거하고, 유비는 유장을 행진서대장군(行鎭西大將軍) 영익주목(領益州牧)으로 천거했다. 함께 잔치를 벌이고 유장과 유비의 장수들은 서로 술을 마시며 우애를 다지기를 100여 일이나 했다.

유장은 유비에게 장로를 토벌하는 것을 부탁하고 대량의 군량, 마필, 물자를 공급했으며, 백수군(白水軍)을 거느리게 하고 병사도 지원해주었다. 때문에 유비의 군대는 도합 3만 명에, 그 상태도 매우 강성해졌다. 유비는 북진하여 가맹(葭萌)현에 주둔한다. 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거뒀다. 팽양도 이 시기에 유비에게 임관하였다.

2.3. 익주공방전

다음 해 212년, 손권 조조에게 공격을 받자 유비는 방통의 상중하책 중 두 번째 계책을 실행한다. 유비는 유장에게 조조가 승리한다면 형주를 통해서 익주로 공격이 들어올 것이지만, 장로는 한중에 틀어박혀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니 우선 형주로 가서 조조를 막겠단 구실을 대 병사 1만과 물자를 부탁했다. 유장은 병사 4천만 빌려주고 물자도 요청한 양의 절반 정도만 지원했다.[11]

유비가 익주를 떠나려 하자[12] 장송이 당황하여 유비에게 밀서를 보냈다. 헌데 장송의 형 장숙이 두려워한 나머지 음모를 유장에게 폭로하여 장송은 참수되었다. 이 때문에 유장은 유비를 의심하고, 관문을 걸어잠그도록 지시했다. 유비는 분노하여 유장의 백수군 책임자 양회를 꾸짖어 목을 베고 황충, 탁응에게 명을 내려 개전하였다.

부하인 정탁은 청야전술을 구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유장은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백성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여 그 의견을 기각하였다.

유비가 부성을 점거하자 유장이 유괴[13], 냉포, 장임, 등현을 보냈지만 모두 격파당했다. 면죽까지 밀려나자 이엄을 보내서 유비를 가로막도록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데리고 유비에게 항복해버린다.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불러들이고 백제(百帝)성, 강주(江州), 강양(江陽)이 모두 유비의 손에 떨어졌다.

유장의 아들 유순이 낙성을 지켜서 겨우 1년간 시간을 끌고 방통을 사살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213년 낙성에서 싸우던 장임이 패배하고 유비군에게 붙잡힌다. 장임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하며 참수되었다. 214년 결국 유순이 지키던 낙성도 함락당하고 성도가 완전히 포위되었다. 성도에는 정예병 3만과 1년간 버틸 수 있는 식량, 물자가 있었지만 유장은 이미 항전 의사를 잃고 있었다.[14] 관서의 군벌이었던 마초마저 유비에게 귀의하여 군사를 이끌고 성 앞에 다다르니 유비는 간옹을 보내서 유장을 설득했고 마침내 유장은 "(우리) 부자가 20여 년 동안 이 주에 있으면서 은덕을 백성들에게 베푼 적이 없다. 백성들이 공격하며 싸우길 3년(百姓攻戰三年), 살점이 초야를 기름지게 함은(肌膏草野者), 이 유장 때문인데 어찌 마음을 편히 할 수 있겠는가!"(자치통감, 후한서, 정사 삼국지)라고 한탄하며 성문을 열고 나와 유비에게 항복한다. 이때 사람들이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항복한 유장에게 유비는 이전에 조조가 내려주었던 진위장군 벼슬만을 형식상 인정해주었을 뿐 정작 중요한 익주목 자리는 빼앗았다. 유장은 형주의 공안으로 쫒겨나서 연금 상태에 놓인다. 유비는 새로 차지한 익주를 기반으로 날아올라 마침내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연의에서는 유비는 득촉한 후 촉의 이전 통치자인 유장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제갈량이 "한 나라에 주군이 둘이나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언제 또 누가 자리를 찬탈할지 모른다"라며 딱 부러지게 처리했다.

황권 유파처럼 유비의 입촉 이후로도 계속해서 유비의 촉에 대한 지배권에 은근히 어깃장을 놓는 세력은 존재했으며, 역사에서 늘 그렇듯 지배권 교체 이후 이전 정권의 지배자 및 계승자의 존재는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자 명분이 될 잠재력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그 영향력을 봉쇄해두는 조치는 불가피하다. 오히려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이례적이라고 봐야 할 정도. 이는 유장이 워낙 무능해서 지지가 그리 크지 않았고, 유비 스스로도 인의의 군주라는 세간의 인식을 고려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큰 잡음 없이 유비가 순식간에 익주를 지배하에 놓은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유장을 내버려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유비의 자신감은 허언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공안에 머물던 유장은 관우가 패배하여 형주가 오나라의 손에 들어가자 손권의 포로가 되었다. 손권은 유장을 다시 익주목으로 임명해서[15] 유비 세력을 흔들어 보려 했지만, 이미 유비의 지배가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탓인지 별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고, 손권은 그의 아들 유천을 대신 활용하여 촉을 흔들려는 공작을 계속하게 된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유언
  • 어머니 비씨(費氏) - 비관의 재당고모.
  • 장남 유순 - 방희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낙성에서 1년간 항쟁하다가 낙성을 잃고 패퇴했다. 이후 유장이 항복하자 봉거중랑장으로 임명되고 성도에 남았다.
  • 차남 유천 - 유장과 함께 공안으로 이주했는데 손권이 형주를 차지할 때 손권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유장의 자손들은 두 나라에서 각각 대를 잇게 되었다.
  • 딸 유씨 - 비의의 족부인 비관과 결혼했다.
  • 증손자 유창 - 백록산에 은거해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303년에 나상이 요언을 믿고 죽였다.

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

낙성을 빼앗긴 후 유비군이 성도 코앞까지 다다르자 종사 정탁이 "유비는 병사는 많지만 치중(군수물자)은 부족하니, 백성을 모두 이주시킨 후 창고와 들판의 논밭을 모두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풀어 수성에 전념하면 유비는 물러갈 것이다."라는 (유비가 들었으면 가슴이 철렁했을)[16] 계책을 내놓았지만, 유장은 "적을 막아 백성을 평안케 한다는 말은 있어도 거꾸로 백성을 내몰아 적에 대비한다는 말은 없었다." 라면서 퇴짜를 놓았다. 나약한 성격도 있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는 온화한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유장의 주본거지였던 성도 사람들은 아무리 유비가 인의를 내세운다곤 해도 빠르게 항복하는 것에 비하면 지리멸렬하게 항전했을 때 후일 대우가 더 안 좋을게 뻔함에도 끝까지 항전을 유장에게 권하였으며 유장이 항복하자 성도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하니 확실히 성도에서는 유장에게 인심이 동정적이었던 듯 싶다.

통치 후반기 유장은 자신이 있는 성도와 촉군에 대해선 안정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위의 반란 때 호응해서 같이 들고 일어난 곳이 촉군이었는데 유장을 잘 보좌했던 유장의 브레인 왕상이 촉군태수가 된 이후에 시종일관 그 정치에 대해 칭찬 일색이기 때문이다. 즉 사건의 선후순서를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인데, 왕상이 211년까지 10년간 통치했고(즉 201년-211년) 유비의 공격이 212년이므로. 유장에 대한 직접적인 쿠데타 시도인 조위의 반란은 201년 이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촉군과 성도는 201년부터 212년까지 장로를 제외한다면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화양국지에 조위의 반란은 200년부터 201년까지였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 즉 194년부터 201년까지의 전개는 유장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가 일궈놓은 세력을 갑자기 승계함으로써 발생한 불안정이었다면 201년부터 212년까지는 그것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백성들에 대한 마음만은 높아 호족들이 동화를 미워해 임지를 옮겨달라고 요구했을 때, 백성 수천 명은 유임시켜줄 것을 애걸하니 유장은 백성들의 청을 들어 2년을 더 머물게 해주고 이후 태수로 승진시켰다. 유장의 통치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했어도 적어도 촉의 부유함을 유지할 수준은 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일단 익주가 부유하다 평해짐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동화전>에서는 사람들이 사치했다는 정도의 서술로만 그치고 있고 또한 <허정전>의 주석인 <익부기구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왕상은 유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익주는 풍요로우며 선비들은 아름답다고 평하고 있다. 이런 인재들을 고루 기용하지 못하고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기에 사가의 악평을 받긴 하지만 적어도 인재의 문제지 자신의 통치력이 미친 촉군 내에서는 백성들의 안정을 보장했다도 봐야 할 것이다. 또 동화가 익주 태수로 승진했는데, 일을 잘 했다는 것으로 봐서 남방에 대한 지배력은 역시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유장이 기용한 동화와 왕상이 성도령, 촉군태수로 일을 아주 잘한건 확인되고 동화는 그 제갈량조차도 뛰어난 인재라고 칭송했기 때문에 인재를 아예 못 쓴 건 아니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다만 사실 '유장은 나약하고 의심이 많아 대신을 믿지 않자 왕상은 이를 간하는 글을 바쳐 유장이 깨달아 이에 응했다'는 기록을 보면 왕상의 보좌가 유장의 후반기 통치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했던것만은 사실인듯. 그래서 유장 치세의 익주는 백성들의 이탈을 불러올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으며 다만 (유비와 비교해본다면) 효율적인 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선주전에서는 황권, 이엄은 유장이 임용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으며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었다고 기록해 놓았으니 유장이 암약하기는 했어도 능력있는 자를 아예 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장번이 이르길 '유장은 어리석고 약하나 좋은 말을 지켰으니, 이는 또한 송양공, 서언왕의 무리로, 무도한 군주가 되지는 않았다.' 라고 평가했다.

4.2. 부정적인 평가

촉서유이목전을 보면, 조위의 난 당시 '장로의 부곡이 파서 일대에 있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오두미도 세력이 익주에서 한중 뿐만 아니라 파서 일대에 이르기까지 세를 넓히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고도 장비를 파서태수로 임명하고 제갈량이 장로를 까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에 장로의 세력을 흡수한 조조군이 파서까지 침공한 것을 보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유장 시기의 익주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어 군사적 대립이 있었다.

후한서 유언전에 따르면 장로는 유장이 어리석고 겁이 많으며 줏대가 없어, 명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유장이 노하여 장로의 모친과 그의 동생을 죽이고, 그의 장수 방희 등을 파견해 장로를 공격하나, 자주 격파당했다. 장로의 부곡이 다수 파 위에 있었기에, 방희를 파군태수로 삼았는데, 장로가 이를 습격해 취하여, 마침내 파, 한에서 웅걸이 됐다고 했다.

화양국지에는 유장이 유약하고 결단력이 적어, 장로는 점점 한중에서 교만해졌고, 파이(巴夷)인 두호(杜濩), 박호(樸胡), 원약(袁約) 등이 배반해 장로에게 이르렀다. 유장이 노해, 장로의 모친과 동생을 죽이고, 화덕중랑장(和德中郎將) 방희를 파견해 장로를 토벌하게 하나, 이기지 못했다. 파인들이 나날이 배반해, 방희를 파군태수로 삼아, 낭중에 주둔해 장로를 막게 하니, 방희가 의당 병위(兵衛)가 필요하다고 해서, 번번이 한창(漢昌)의 종(賨, 공물을 바치는 이민족 백성) 백성을 불러 병사로 삼았다고 한다. 즉, 유장이 유비와의 3년 전쟁으로 백성들이 고난을 겪었다고 하기 전부터 이미 파 일대는 유장과 장로의 싸움터가 되었고 다른 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게 적어도 수십 년은 갔다는 것이다.

또, 유비가 성도를 공격하려고 하자 죽기를 각오하여 수성하려고 한 3만 백성들은 동주병들, 혹은 그들의 2세, 3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위의 반란을 격파하고 눌러앉은 그들이 유장과 연을 끊고 흩어졌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유장의 덕을 칭송하는 이 에피소드는 180도 달리 볼 수 있다. 유독 유장이 있던 성도의 백성들이 항전하려고 하였고 유장이 항복하자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그들이 유장과 가까운 관계였다거나 혹은 유비라는 침략자가 성도에 입성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유비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여러 정책을 펼치면서 익주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유비에게 저항한 자들도 많았지만, 투항한 자들도 많았다. 이엄, 비관, 비시 등이 있다. 허정은 유장 세력의 중심지역인 촉군 태수였는데 성도가 포위되자 투항하려고 했었고 말이다.[17] 또 유장이 집권한 직후 동주병들의 횡포나 유장이 집권하던 와중에 '유장의 이런 점이나 호족들의 이런 점은 다소 아쉽다'라는 비판은 있지만 오히려 유비가 그런 행동으로 익주민들의 원성을 샀다는 기록은 없다. 유비의 인재 기용도 선비들이 앞다투어 귀순했다고 하는데, 이는 유장을 바라보는 호족들의 인식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유장이 떠난 이후 유비가 유장이 멀리하던 사람들, 유장의 친인척 할 것 없이 고루고루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를 바로 잡으면서 '익주 사람들 전체가 크게 화합하게 되어'( 자치통감) 잊히게 되었지만.

그런가하면 촉과 제정, 역사 설치, 직백오수 주조, 왕련의 사염 정책 등 오히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실행한 정책들이 많다. 유장 치세에 유장을 섬겼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어디를 역임했다 정도로 끝나거나 두루뭉술하게 공로가 있었다는 정도일 뿐이다.[18] 치세 후반에도 방희, 이이, 장로와 반목하고, 유장 휘하 장수인 습숙이 남군공방전 당시 동오에 항복하는등 그의 정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데 실패했던듯 하다. 이는 유비를 부르자고 법정이 간언할 때 지금 주 안의 여러 장수인 방희, 이이 등은 모두 공을 믿고 교만하며 멋대로 굴고, 두 마음을 가지고자 하니, 예주(유비)를 얻을 수 없으면, 적은 밖을 공격하고, 백성은 안을 공격해, 필시 무너지는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즉 익주 인심이나 유장을 따르던 장수들은 언제든지 유장을 배신할 여지가 컸다는 얘기다. 실제 유비가 공격했을 때 그렇게 되었고.

장로, 조위, 감녕, 심미, 누발 등이 대표적인 유장 시절 모반자들이다. 특히 조위처럼 유장을 익주자사로 추천한 사람마저 배신해 성도를 포위할 정도였다. 그 밖에도 영웅기에는 동주병들이 백성들을 침략하고 폭행해도 막지 못하고 법령에도 문제가 많아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동주병과 결탁해 조위를 물리친 다음 이들을 어떻게 제어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익주 토박이들이 유장에게 가지는 불만이 결코 적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언의 익주 정권 자체가 반발하는 토착 호족들은 숙청하고, 일부는 회유하는 동시에 외부의 세력인 동주인들을 끌어들이면서 성장했으므로, 이를 갑자기 물려받은 유장 대에 그 불만들은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손책의 세력을 물려받은 손권과도 흡사하다.

다음으로, 익주가 안정된 것이 유장의 능력에 기인하는가를 따져야한다. 예컨대 동화가 성도령이 되자 풍속이 바뀌고 선한 방향으로 변했는데 현의 호족들은 동화의 엄한 법을 싫어했으므로 동부도위로 전임시키려 했다. 이를 유장이 막긴 했지만 동화에게만 맡기지 말고 유장 스스로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유장통치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빠진 정령을 완비해 확실하게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십이 없었으니 장송과 법정이 한탄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통치를 잘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통치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넓은 지역을 결속시킬 능력과 지도력이 부족했던 안타까운 케이스다. 통치력의 부재 문제로 유장 통치하의 익주는 유비가 공격하지 않던 시절에도 유언 시절 부하였던 무장들이 모반을 일으켰었다. 거기다 고질적으로 동주병이 익주 백성들을 토색질하고 행패부리나 유장이 이를 제대로 못 다스리는 것에 대한 불만도 컸다.

또한 제갈량전에 제갈량이 익주의 선비들은 명군 얻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평가했고 '유장은 나약하고 의심이 많아 대신을 믿지 않자 왕상은 이를 간하는 글을 바쳐 유장이 깨달아 이에 응했다'는 배송지가 허정전에 주석을 단 익주기구전의 구절도 유장의 인사정책에 불만을 가진 익주의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유비를 만날 때 황권, 유파, 왕루가 결사 반대했음에도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본 것이나 법정이나 장송이 유장을 버릴 생각을 한 것 역시 모두 이에 관계된 일이다. 유장은 믿어야할 사람을 안 믿고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는 등 리더십과 인재관은 문제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국은 익주정벌 이후 유비의 지도력으로로 신속하게 봉합되었으나[19] 유비의 부재 때면(한중 정벌, 유비 사망 직후) 반란으로 조금씩 터져나왔고[20] 제갈량에 의해 반란들이 완전히 진압된다.

유장을 공격한 것은 신의를 저버린 일이라 하여 유비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며 유비측 스스로도 유장을 공격한 것 자체는 도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하였다.[21] 유비가 배신한 건 분명한 것이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조차 "유장은 영웅으로서 자질이 없는데도 난세에 땅을 차지했으니, 분에 넘치는 자리에서 재앙을 자초한 건[22] 자연스러운 이치일뿐 이를 빼앗긴 것을 불행이라 할 수 없다."고 가차없이 비판했을 정도. 비록 한두 세대 정도 후대긴 하나 촉인 출신인 진수의 비판이니 당대 촉인들도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듯하다.

다른 이들의 논평도 비슷하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이 논하길 유장은 요해처를 막고 힘을 길러, 경계를 지키다 먼저 도모해, 오히려 세시(歲時)와 더불어 일이나 경우에 따라 일이 변해가는 걸 할 수 있었는데 급히 이기(利器)를 보내고, 조용히 귀양가며 내쫓김을 당했으니, 소위 본질은 양인데 거죽은 호랑이었던 격으로, 승냥이를 보고 두려워, 호소했다고 했고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가 기리길 유장의 재주는 영웅이 아닌데, 난세에 땅을 웅거하다, 탈취당해서, 진수는 불행이 아니라고 여겼고 유장, 조공이 법정, 장송을 업신여김을 보니, 두 한을 품은 사람이 불리고 나서, 함께 원망하며 서로 도와, 혹 국가가 멸망하거나, 천하가 삼분됐다고 했다.

물론 유장이 진 게 당연한 이치일 뿐이지 유비가 유장을 친 게 잘한 일이라는 말은 아니며, 주석을 단 사람들 중에선 유비가 그 뒤로 미안해하지도 않고 좋아했다며 유비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송지도 그 중 1명이다. 다만 오나라가 유장으로 흔들어보려고 했었는데 쥐뿔도 영향이 없었다거나, 위나라도 유비의 흠집인 유장 건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거나, 백성들 사이에서 유장에 대한 동정론도 찾아보기 힘든 걸 보면 유장이 익주에서 쉽게 잊혀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재밌는 점은 당대 기준으로 유비 세력을 제외한 누구도 이걸 비판하지 않았고, 후대 기준에서 비판했다는 점이다.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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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비에 의해 익주목을 빼앗기고 형식상 진위장군의 인수(印綬)만 돌려받는다. [2] 손권에 의한 선전용 임명 [3] 조씨의 위나라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호족 이름으로 이 사람은 나중에 모반을 일으킨다. [4] 해당 부분의 영웅기 원문은 '朐䏰。上蠢,下如振反'으로 '구인. 앞 글자는 준, 뒷글자는 여(如)와 진(振)의 반절로 발음한다.'는 뜻이다. 파성넷에도 생각보다 오역이 많으므로 주의가 요구된다. [5] 법정 역시 이때쯤 관중에서 익주로 피란온 사람이다. [6] 남양과 삼보지역은 익주에 비해 동쪽에 있다. [7] 제갈량은 입촉 후 이렇게 기강이 서지 않은 촉의 법령을 바로잡고 해이한 법령을 바로 잡으면서 촉을 안정시키고 법치를 확립하였다. [8] 결국 조조는 기어이 장로를 격파하여 한중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 때쯤 유장은 익주를 유비에게 빼앗기고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가 된 후지만 말이다. [9] 이는 유비가 혈통을 사칭했다는 헛소리에 대한 반박 증거 중 하나다. 유비의 혈통이 가짜면 장송이 유장을 속이려고 혈통을 들먹이지 않았을 것이고, 유장 역시 친족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이 아니기에 장송의 말에 낚였던 것이다. 설령 그 정도로 멍청이라 해도 당시 조조조차 "돗자리나 짜던 놈" 이라는 식으로 말했지 "황족을 참칭하는 놈" 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이쯤되면 증거 100%다. [10] 일단 유비와 유장 간의 회담은 그랬지만 유비와 유장의 신하들 간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당장 부성에서 유비와 장유가 나눈 대화는 양쪽 다 상당히 날이 서있는 트래쉬 토크였다. 훗날 유비는 익주를 차지한 후 장유를 숙청했다. [11] 나관중은 3만 명과 10만 석을 요구했는데 4천 명과 1만 석만 지원한 것으로 각색했다. [12] 물론 유비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장로를 제대로 공격할 능력도 없었던 유장이 스스로 요청해서 객장으로서 도와주러 온 것이었고 장로는 한중에 웅거한다고해도 수만 명의 병력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군벌이었다. 게다가 한중은 천혜의 요새지, 이런 곳을 공략하기 위해선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유장은 유비에게 많은 병사와 군량, 물자, 장비를 지원해주었다. 평소에도 유비에게 많은 선물을 해주었으며 유비가 익주로 입경할 때부터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백수군까지 유비의 감독 하에 두었다. 그런데 유비는 약속과는 달리 장로 토벌은 제대로 실행하지도 않고 형주로 돌아간다면서 또 달라는 것만 많으니 유장으로선 삥만 뜯긴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돌아가는 경비를 어느 정도 지원해주었음은 유장이 아직은 유비를 신뢰하였거나 스스로 관계를 파탄내려 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프로파간다로 이용한다. 위서에 따르면 유비가 진중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익주를 위해 강적을 정벌하며 군대는 괴로워하고 병들어 편안히 머물지 못했는데, 지금 금고의 재물을 쌓아두고 상을 줌에 인색하며 사대부가 출병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길 바라니 (거사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라 노하여 일갈하며 개전의 명분으로 삼았다고 한다. [13] 혹은 유귀 劉貴 [14] 재미있는 것은 유비군에 요지들을 속속 빼앗기며 위기에 몰린 시점에서도 온전한 정예군과 군수물자를 성도에 방치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 충심을 확인시켜 주었음에도 유장이 이 병력을 야전에 쓸 생각 없이 그저 성도에 머물게 두었다는 점이다. 애시당초 싸우기 위해 익주 각지의 군대를 끌어모았어도 이엄처럼 그냥 항복해서 유비군의 세만 불려준 경우도 있었고 유장이 '우리 부자가 20여 년간 덕을 익주에 베풀지 못했다'고 말했던 점을 감안하면 유장은 익주의 인심이나 자군에 대한 장악력을 스스로 믿지 못하고 본거지인 성도에서 병력을 빼는 것은 불안하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고 오랜 농성이나 청야전술을 시행하면 덕망이 없는 자기가 어찌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정예군 3만은 유장이 익주 병력과 인심을 통제할 수 없어서 후방에 놔두었거나 급조한 병력일 공산도 크고, 실제로 이후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익주의 인심을 완전히 장악한다. [15] 명목 상의 명예직으로 어찌보면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익주는 유장을 보호하고 있는 오나라 쪽에서 차지해야 할 영토이며 유비는 이를 불법점거하고 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 [16] 실제로 법정에게 이 얘기를 듣고는 분노했다. 하지만 법정은 유장이 그렇게 할 리 없다고 했다. [17] '유장이 항복하니 다들 항복하지 별 수 있나'라는 식의 의견도 있으나, 유비라는 침략자에 대하여 호족들이나 명사들, 유장 휘하의 신하들이 저항이나 투항을 결정한 것은 오로지 그들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백성들이 유장을 따랐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여몽이 형주를 취하자 저항이 없었으니 익주가 더 충성스러웠다, 관우의 장악력이 의심된다, 이런 의견도 있는데 대놓고 쳐들어온 유비와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관우군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무리다. 더욱이 남군은 오로지 미방만이 항복했으며 여몽에게 저항한 증거가 남아 있고 육손에게 맞선 지역들도 있었으니 이 주장은 설득력이 미흡하다. [18] 다만 이는 유장이 위촉오의 군주가 아니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삼국지의 열전은 위촉오 장수들과 그에 속하지 않은 군벌들의 열전이다. 원소, 원술, 유표, 유장 등의 부하들은 따로 열전이 없어 매우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있다. 예로 법정과 황권은 열전이 있지만 장송과 왕루는 열전이 없다. 즉 유장 치세의 행적을 분명하게 단언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 [19] 유엽이 촉을 치려던 조조에게 일주일만에 유비가 익주를 장악 성공했으니 칠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20] 유장과 유비의 후계자 유선의 차이가 여기서 나오는데 유장은 자신을 도와준 방희와도 불화하며 분란을 일으켜 내분을 자초한 반면 유선은 어린 나이에 유비와 제갈량의 동시 부재 상태에서도 양홍의 진언을 받아 황원의 난을 자신의 근위병으로 토벌하는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후일 유선이 완전 얼간이 오브 얼간이가 되어서 그렇지 실상 사람 믿고 일을 맡기는 군주로서의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는 유장이 유선을 따라가질 못했던 셈. 사실 유선은 촉한사상으로 대변되는 명재상들을 성공적으로 기용한 것도 그렇고 말년 5년 정도만 빼면 꽤 선방한 쪽에 속한다. [21] 아예 유비는 직접 유장을 배신하는 건을 두고 조조를 예시로 들어서 조조 같은 짓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비록 유장이 무능했다고는 하나, 신의를 저버린 것이라 유비 스스로도 항상 조조와 반대로 해왔는데, 이번에 조조 같은 짓을 한다고 여긴 것. [22] 부승치구(負乘致寇)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짐을 등에 지고 수레에 타니 도둑이 온다는 의미. 즉, 수레를 타는 고귀한 신분이 소인처럼 등짐이나 지니 저건 분명 훔친 재물이겠거니해서 도적이 이를 빼앗으려 한다는 뜻이다. 능력 없는 사람이나 소인배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재앙을 자초한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