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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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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형국문공(荊國文公)
왕안석
王安石
파일:external/korean.cri.cn/af7454a293e045009acfc963aa0f4638.jpg
출생 1021년 12월 18일 ( 천희[1] 5년)
북송 강남서로 무주 임천현
(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푸저우시 린촨구)
사망 1086년 5월 21일 ( 원우[2] 원년) (향년 64세)
북송 강남동로 강녕부 반산원
(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시)
국적 북송
재임기간 동중서문하평장사 (1차)
1070년 12월 ~ 1074년
동중서문하평장사 (2차)
1075년 2월 ~ 1076년
시호 문(文)
작호 형국공(荆国公)추봉서왕(舒王)[3]
성명 왕안석(王安石)[4]
개보(介甫)
반산(半山)
부친 왕익(王益)[5]
모친 오씨
배우자 월국부인 오씨
학력 과거 급제 (1042년)
경력 섬서회남절도판관
상주지주
삼사도 지판관
집현교리
강녕부 지부
한림학사
관문전대학사
지강녕부로 관부상서
관간진봉경략 기사 이문자

1. 개요2. 생애3. 신법4. 개혁의 배경5. 왕안석의 개혁6. 결과7. 왕안석의 신법 당시 대외관계
7.1. 서하와의 관계7.2. 베트남과의 관계
8. 비판9. 왕안석에 대한 어록10. 그 외11. 기타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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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세기 중엽 중국 북송 정치인. 는 개보(介甫)며 는 반산(半山)이다. 강서성(江西省) 출신이며, 5~6세 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한 천재였고, 보원 원년(1038)에 부친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끝에 4년 뒤 진사에 급제하여 북송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했다.

2. 생애

왕안석은 천희 5년(1021) 강서성 무주 임천현에서 태어났다.[6]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할아버지대에 이르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왕안석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관아의 하급관료였다. 더해서 그의 집안은 고향 임천현에 “하루 목숨을 기댈 만큼의 경작지”도 없었기에 가난했고, 청빈한 인물이었던 부친 왕익은 지방 하급관료로 지내면서 가족들을 이끌고 근무지를 전전했다.

어릴 때부터 똑똑했던 왕안석은 불과 5세 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했으며, 당대의 또래 수재들이 그렇듯 정치, 경제 등 당시 현실적인 부분보다는 시부(詩腑)를 만들어 명성을 올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가 17세가 되던 경우 4년(1037) 여름, 아버지 왕익이 강녕부(江寧府)[7]에 근무하게 되어 이곳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생각이 바뀌어 시부보다는 학문에 몰두했다. 하지만 경우 5년(1038)에 업무로 인한 과로 등으로 부친 왕익이 사망하여 부친상을 치러야 했다.

이 무렵 왕안석은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강녕부에 그대로 정착했다. 그는 강녕부에서 학문에 몰두함에도 당시 인종 경력 연간 학문의 유행을 따르면서도 방법은 달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해석 후에도 그는 자신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이 정확한지 검증하기 위해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눈으로 현실 생활을 직접 접하려고 했다. 또 단순히 유가의 학문, 경전만을 공부하지 않고 제가백가의 학문들과 의서 등 다른 학문까지 폭넓게 습득했다.
인종 경력 2년(1042), 왕안석은 과거에 급제해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을 수여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중앙 관리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학문 지식을 갖추고 행정실무 능력이 탁월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특히 관개사업과 재정 관리 업무 능력에서 평가가 좋았다.

가우 5년(1060) 인종에게 《만언서(萬言書)》를 지어 올렸다. 이때 그가 인종에게 건의한 개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중앙 관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여러 중앙관료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안석은 가계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사양했다. 만언서를 바친 지 2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잠시 관직을 떠났고, 모친상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 후에도 40세가 될 때까지 지방관으로 근무했다.[8]

3. 신법

왕안석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신법(新法)이라 불리는 개혁 때문일 것이며 왕안석의 개혁은 반대파의 견제와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4. 개혁의 배경

1038년 이원호가 국호를 대하( 서하)라고 고치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7년간의 전쟁으로 화약을 체결하는데, 송태조 조광윤의 문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송인종 연간에는 범중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하를 물리칠 군사력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하가 송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13만 필과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보내었다. 또한 거란에게도 화의를 주선한 대가로 비단과 은을 제공한다. 병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질은 형편없었고, 국방비가 정부 예산의 80%를 차지했다.

황실은 황실대로 낭비를 일삼는 행사를 하여 국고를 탕진하였고, 3년마다 과거를 치르니 벼슬자리보다 관료의 수가 많아졌다. 대지주가 늘어나자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물가는 상승하고 세수는 줄어들며 노비와 빈민들은 늘어나는 악순환에 시달렸다.

5. 왕안석의 개혁

왕안석은 인종에게 정치개혁안이 담긴 만언서(萬言書)[9]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가 중앙에 데뷔한 건 인종, 영종의 뒤를 이은 19세 젊은 송신종이 제위에 오르고 난 이후였다. 왕안석은 신종의 재가를 얻고 부재상인 한림학사로 임명된다. 그의 개혁 정책은 1069년~1074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서하의 침공 등으로 매우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하여 부국 강병을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 균수법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의 운송을 '발운사'라는 관청에서 통제하게 한 제도이다. 그동안 원거리에서 공물을 바칠 때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어 사실상 중간 상인들이 대납하고 폭리를 차단하여 방지하려고 하였다. 물자의 유통을 이치에 맞게 개선하여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각 지역마다 현물을 납부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문제는 지역마다 사정이 다른데 중앙정부가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거뒀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해당 물품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멀리 다른 지방까지 가서 이를 구매하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중간 상인들이 이익을 가로채기도 했다. (공납의 폐단) 왕안석은 발운사(發運司)라는 기구를 두고 중앙정부가 필요한 품목을 가장 편리한 곳에서 사들이고, 남은 것은 물품이 귀한 지역에 팔아 국가 재정에 보태도록 했다.
  • 청묘법(상평급렴법,상평렴산법)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사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어 지주들의 비싼 이잣돈을 얻어 쓰는 일이 없도록 한 정책, 필요한 재원은 상평창에서 충당함.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도 이것 때문에 왕안석과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게 된다.
  • 보갑법
    10집을 1보로, 5보를 대보로, 10대보를 도보로 편성하여 장정을 징집, 훈련하여 민병으로 삼아 평화 시에는 치안 임무를 수행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관군을 돕게한 정책.
  • 시역법
    자본이 적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대상인들이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을 막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한 정책. 상평시역사(常平市易司)라는 국영 유통업체를 두고, 물가가 하락하면 상품을 고가로 매수하고 물가가 상승하면 저가로 되파는 방식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방안이다. 또한 상인들에게 연 2할로 돈을 빌려줬다.
  • 모역법(면역법)
    역이 면제되어 온 관리, 사원으로부터 돈을 받아 실업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어 역의 형평을 기하고자 한 정책.
  • 보마법
    백성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군마로 쓰도록 한 정책.
  • 방전 균세법
    토지를 측량하여 사방 1000보(步)를 1방(方)으로 하고, 비옥도에 따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을 부과하도록 한 정책.

6. 결과

왕안석의 개혁안은 제대로만 된다면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이었으며,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불리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생각과 달리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제도 자체가 허점도 많고 부정부패, 고리대가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심화시켜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가 터져나왔다.

당장 대부호들이 대부분 기존 기득권층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반대파를 구법파(舊法派)라고 하고 개혁에 찬성하는 파를 신법파(新法派)라고 하여 당쟁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구법파의 당수는 사마광이었다. 더해서 왕안석을 지지하던 관료들이나 왕안석 찬성세력인 신법파 내부에서도 전보다 더 심해진 사회 부작용, 너무 급격하게 밀어붙이는 개혁 속도 등을 이유로 왕안석을 비판했다.

희녕변법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고 있던 1074년 희녕 7년, 허베이 성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파는 이것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분노로 상소하여, 당시 구법파의 배경이었던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 내시, 구법파 관료들이 지속적인 퇴진운동을 벌였다. 더해서 신법파 내부에서도 급격한 왕안석의 개혁에는 반대한 장돈[10], 증포, 여혜경[11]이 신법의 부작용을 비판했고, 원래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조차 청묘법의 문제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이에 신종도 왕안석을 해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왕안석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12] 신법은 왕안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신종의 재위 기간에는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신법당에는 왕안석 외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신법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난다.[13] 수완은 뛰어났지만[14] 구법파 사람들에게도 간사하다 평가받던[15] 여혜경의 경우는 평소 왕안석의 말을 기록해뒀다가 왕안석의 세력이 약해질 때 즈음 부정적으로 해석될 여지의 것들만 골라 황제에게 참소한다. 다음 해에 왕안석은 복직했지만, 이때 그의 복직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던 여혜경이 앞장서 ‘왕안석이 유가의 도를 배신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여겨 속이고 있다’며 신종에게 왕안석을 탄핵하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결국 왕안석은 1076년에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1085년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한다.[16]

신종이 죽은 후 선인성렬황후에 의해 사마광이 재상으로 등용되고 곧 신법이 폐지된다. 이에 개혁을 일부 지지하던 소식[17]을 비롯해 이런 반동적인 조치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 우려한 이들이 많았는데,[18] 그 얼마 후에 사마광도 오래 집권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을 초래해 송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된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과 관련하여 다음 두 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 이근명(2014). “왕안석 신법의 시행과 臺諫官”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이근명(2010) 『역사문화연구 제35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7. 왕안석의 신법 당시 대외관계

7.1. 서하와의 관계

왕안석의 신법 당시에는 하황지구[19]의 땅을 다시 되찾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거란족의 요와 탕구트의 서하 이 두 국가에 바치는 세폐로 인해 북송의 재정난이 심각한 상황 하에서 송 신종은 이를 타개하고 싶은 의지가 강하였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왕안석의 신법을 통해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였다. 또한 송 신종이 요와 서하에 시달리는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의지 하에 왕소는 "평융책"[20] 3편을 제시하였는데, 이에 따라 하황지구에 복속된 토번 부락을 정복함으로써 안사의 난 이후로 토번에 점령당했던 하황지구[21]를 수복함으로써 서하를 양면으로 협공할 수 있는 방면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를 희하개변이라고 한다.

그러나 1081년 오로벌하 시기[22]와 1082년 영락성 전투[23] 등 서하에 대패하는 일이 잦았던 데다가 왕안석 사후 사마광을 위시한 구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하황 지역을 토번에 빼앗겼다. 그러나 이후 환관 동관[24]이 토번으로부터 하황 지역을 수복한 데 이어 청당 지구를 개척하였으며 또 황두회흘을 정복하였는데, 이는 농우도호부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강족과 서하와 많은 전투를 벌임으로써 북송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25] 그러나 이는 북송이 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북송의 정병 상당수가 서북방에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멸망하자 하황 지역은 금과 서하의 관할 하에 놓였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 당시 있었던 희하개변은 북송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서역 여러 국가와의 무역 통로를 개척하였다는 점이다. 북송이 처한 당시 상황은 실크로드의 주요 요충지[26]는 탕구트의 서하가 점령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송이 서북방으로 영토를 개척함으로써 서역의 여러 국가와 교역 루트가 열렸다. 두 번째로 군마를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서 지역은 서하가, 연운 16주 지역은 요가 점령한 상황이었다.[27] 그리고 북송의 말들은 너무 빈약하였다. 그러나 하황지구를 개척함으로써 질 좋은 군마를 육성할 수 있었고, 이는 북송 군대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하를 양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까지 송이 서하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은 서쪽 방면이었다. 그러나 농우도호부를 설립함으로써 동쪽, 서쪽, 남쪽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7.2. 베트남과의 관계

태종 조광의 때 베트남 원정이 실패한 이래로 북송은 베트남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왕안석의 신법 시기 광서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베트남과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리 왕조가 선제 공격을 하자[28] 곽규 연달이 이끄는 북송 군대가 이에 맞섰으나, 풍토병으로 인해 죽은 자의 수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북송과 리 왕조는 화친을 맺는다.

8. 비판

후대에 대표적인 개혁자로 평가받지만 소위 '개혁 정치인'들이 다 그렇듯 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개혁 부분에 집중하여 고평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최근엔 이쪽이 다수파지만, 한동안은 그 폐단에 주목하여 나쁘게 보곤 했었다. 특히 성리학을 세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남송 주희가 사마광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저평가되어 온 편. 주희는 왕안석 또한 나름대로 유능한 명신으로 평가했지만 신법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북송의 멸망 원인으로 이 신법의 부작용을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왕안석의 평가는 나빴다.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신법 자체가 비현실적 내지는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미 당대에 소동파는 희녕변법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일단 정부의 전곡 출납 장부의 곡식 가격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있고, 품질이 떨어지면 팔 수 없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되니 조정에서 사들이고 되파는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아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똑같거나 구법 이상이고 차라리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희녕변법 후 신종은 32곳이나 되는 궁내 창고에 비단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창고를 추가로 지었을 정도였지만,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이 민간의 이익을 빼앗는것이라 지적하고[29] 상홍양에게 속은 한무제 말년에 이르러 도적들이 봉기하고 난이 일어났다며 만약 무제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거나 소제가 법을 고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얼마 안 가서 망했을 거라고 하기까지 했다.[30] 그러니까 왜 한무제랑 똑같은 짓을 하느냐는 비판이었다. 사실 상홍양(한무제)이나 왕안석이나 외부의 적(흉노, 요-서하)을 막기 위해 이런 정책을 추진했다는 걸 생각하면 소동파가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한무제나 상홍양은 흉노를 막을 재정을 만들어 실제 흉노 원정에 제대로 쓰기라도 했지 왕안석의 신법은 부작용만 일으켰다는 점에서...말 부터가 그런데 무제는 경제 시기부터 지어진 군마용 말목장을 더 지어 말을 기르게 했지만 왕안석의 보마법은 군마와 짐말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신법 중 가장 논쟁거리였던 청묘법 또한 정부가 민간 사금융보다 더 높게 고리의 이자로 돈놀이를 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더해서 청묘법이 처음 시범적으로 실시된 하북일대에서는 백성들이 단체로 존경받던 전 재상이자 명신 한기에게 몰려가 "청묘인지 뭔지 하는 것 좀 황제폐하께 제발 없애달라고 해주십쇼. 이것 때문에 죽겠습니다."라고 집단행동까지 했고[31][32], 신법당과 왕안석의 주장을 지지해주던 인사들까지 이를 비판했다. 또 보마법은 잠깐 지나가는 글에도 비현실적이라는[33] 비판이 이어진다.

즉, 왕안석의 개혁은 말만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을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기득권을 대체해 대지주, 대상인의 위치를 독점해 민간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정부가 사채놀이를 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짓이 아니냐는 것이 정책 자체에 오랫동안 가해진 비판이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홍대용의 계방일기 같은 것을 보면 세손( 정조), 유학자(실학자 포함)들이 한 목소리로 왕안석을 조롱하곤 했다.
"여기서 왕안석이 재상이 된 것이 역사의 쾌사입니다."
"어찌 그렇소?"
"그러지 않았다면 왕안석이 간신인 것이 밝혀지지 않고 현자로 평가되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저런 분위기였다. 왕안석이 얼마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그 이전에 대동법 실시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는 측은 자신들이 왕안석 같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정작 정조는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왕안석을 옹호했다.
정조 : "왕안석은 사마광과 비교하면 인품은 몰라도 재주는 뛰어나지 않소?"
다른 신하들 :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정치를 오래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이뤘을 것입니다"
채제공 : "옛법을 고치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요즘 젊은 것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사마광이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
정조 : "그렇소. 주자도 왕안석이 명신이라 일컬었소."

두 번째 비판은 왕안석의 태도와 신법당에 대한 것이다. 먼저 왕안석은 중앙 데뷔 당시부터 특유의 성격과 그 성품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 당시 조정 내에서 한기 등 경험 많은 원로들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오규같은 이들조차 함께 일할 당시 경험한, '당연한 것조차도 자기가 싫으면 무조건 자기합리화하며 듣지 않는 태도'와 업무 처리에서도 현실을 파악하지 않은 채 잘못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외고집' 기질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34] 하지만 신종은 원로들의 조언이나 군목사로 함께 일한 이후 경험을 토대로 기용에 반대한 오규 등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대의견을 낸 장지기에게는 과거 그가 구양수를 비판할 때 개인가정사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주장처럼 왕안석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된 성격과 업무 스타일은 개혁 집행과정에서 갈수록 문제를 발생시킨 결과, 왕안석을 지지했던 이들조차 정적으로 만들어 결국 왕안석은 실각, 송나라는 개혁의 실패와 부작용으로 긍정적 효과보다는 악영향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왕안석은 빠른 개혁을 위해 지지층을 최대한 늘리려 노력했고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이들을 대거 개혁 업무 전면에 추천해 중앙 요직을 차지하게끔 했다. 따라서 신법당은 순식간에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렇게 세를 늘리다 보니까 여혜경, 채경, 증포와 같이 영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신법당의 대부분 구성원을 이뤄버렸고, 왕안석 생전에도 뒤가 구린 짓을 해서 문제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35]

왕안석과 학문적 성향이 맞고 잘 통한 까닭에 일찍부터 절친이었던 여혜경의 경우에는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해준 뼈있는 조언처럼, 자신과 왕안석이 실각될 위기에 처하자 왕안석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다시 복직한 상황에서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 과거 왕안석의 발언들을 증거로 내세워 공격해 사임하게 만들었다. 또 증포의 경우, 신법의 열혈 지지자이자 추진 세력이었음에도 결국 왕안석이 실각하는 데 합세했다.[36] 왕안석 죽은 후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파당을 짠 것도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37] 거기다 그 파당의 내부 상태가 이러니 왕안석을 포함한 신법당 전체가 간신이라는 후대의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 사실 왕안석이 질이 나쁜 인물들을 믿고 그들을 대거 추천해 키웠다는 점과 파당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것 자체로도 충분히 간신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이다.

그 외에, 최근에는 저런 조치들로 북송을 구할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북송 시대 송휘종 무렵에 승자는 채경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측이었고, 구법당은 역적으로 몰려 모욕당했다. 또한 신법도 완전히 묻힌 것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정책이 발굴되었고 구법당 옹호측인 주희도 신법과 비슷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북송이나 남송이나 망했기 때문. 다만 북송의 멸망의 원인은 송신종부터 이어온 당쟁에도 있지만 송휘종의 사치와 낭비도 한몫 했으며 채경이 비록 신법당 측이라지만 그가 제대로 된 신법 정책만을 한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북송이 망한 결정적 원인은 막장 군주인 송휘종과 북송의 잘못된 외교정책에 있었다.[38]

아무튼 이제나 저제나 평가는 "현명한 개혁자 왕안석이 수구꼴통들의 음모에 매장당했다."나 "간신 왕안석의 사악한 음모가 나라의 수명을 깎았다"로 갈린다. 물론 세상 모든 정치가 이렇게 나뉜다고 봐야한다.

9. 왕안석에 대한 어록

왕안석은 학문을 좋아하지만 낡은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논의가 실제와 맞지 않을 것이니 만약 왕안석에게 정사를 맡긴다면 틀림없이 많은 것이 바뀔 것입니다.
왕안석이 정말로 등용된다면 천하가 반드시 혼란해질 것이니 공들은 마땅히 이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오.
당개
문장과 절개 있는 행실은 당대에 뛰어났고, 더욱이 도덕과 경세제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신종으로부터 예우를 받아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렀고 세상은 바야흐로 왕안석의 장래를 바라보며 이왕삼제(二帝三王)의 성세[39]를 다시 보기를 바랐을 것이다. 왕안석은 이에 재정과 국방을 선무로 삼는 데에만 급급하여, 흉악하고 간사한 이들을 끌어들이고 충직한 이들을 배척하였으며, 조급하고 흉포하게 천하 사람들을 부려서 경박하게 그들의 삶을 즐기는 마음을 허비시켰다. 결국에는 간사한 이들이 잇달아 잔학한 짓을 자행하여 사해에 해로운 독을 퍼트렸고, 숭녕(崇寧), 선화(宣和) 연간에 와서는 화란이 일어났다.
송사 권327 왕안석전, 주희의 비판
신종: "왕안석을 재상으로 삼는 것은 어떠하오?"
한기: "왕안석을 한림학사로 삼으면 자리가 남지만, 왕안석을 재상의 자리에 두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지만 신종은 한기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왕안석을 재상으로 삼았다. 아아! 이것은 비록 송나라의 불행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왕안석의 불행이기도 했다.
송사 권327 왕안석전

10. 그 외

신종이 왕안석에게 "옛날 당태종 고구려를 쳤는데 왜 못 이겼냐?"라고 묻자 " 연개소문이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참고로 이 일화는 중국 측의 사료에서는 따로 전하지 않는데, 술이부작의 원칙[40]을 중요시했던 김부식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에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은 낮다.[41] 아마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들은 이야기를 실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변법개혁을 이끈 개혁정치가의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의 뛰어난 산문작가들을 일컫는 당송팔대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의 한유(韓愈) ·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 소순(蘇洵) · 소식(蘇軾) · 소철(蘇轍)[42] · 증공(曾鞏)에 왕안석을 일컫는다. 이 칭호는 송나라 때의 진서산이란 사람이 처음 주창한 단어로 이 평가가 그대로 이후까지 이어져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도 받아들여진 것. 이런 의미에서는 중국문학사에도 제법 비중이 큰 인물이다.

특히 소식(소동파)과는 정치판에서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소식 개인적으로는 왕안석을 높이 평가했었고, 소식이 왕안석의 변법 중 남겨야 할 것은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마광의 눈밖에 나서 좌천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식은 실각하여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왕안석을 찾아가 함께 지내며 시나 문장을 짓기도 했었다고 한다. 반면 소식의 동생 소철은 신법에 명확히 반대하는 노선을 따랐고 이에 신법 찬성파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조선 정조의 경우는 세손시절에는 위에 나왔던 것처럼 왕안석을 비판했지만 왕이 되어서는 왕안석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한 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가. 희령(熙寧)의 정치가 물론 폐단은 많았지만 병제(兵制)를 변통한 것과 같은 것은 실로 좋은 법인데 어찌 모두 폐지해서 결국 융정(戎政)이 떨치지 못하고 나라의 형세가 더욱 약해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왕안석에서 나온 것이라면 꼭 서둘러 폐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지나쳤는가. 정자(程子)가 ‘우리들이 그를 격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말이 진실로 대현인의 공평한 말씀이며 공평한 마음이다. 대체로 왕안석은 고집이 너무 지나쳤지만 그 재주야 어찌 세상에 쓸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등용한 것은 그 뜻으로 보면 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록 정조 15년(1791) 4월 30일의 기사 중 #"
"‘왕안석은 반드시 영행전(佞幸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혹자는 ‘마땅히 명신전(名臣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였는데, 나중에 《명신록(名臣録)》을 보니 과연 그 가운데 들어 있고, 《송사》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주자(朱子)도 이미 명신으로 인정했으니, 어찌 얻기 어려운 인재가 아니겠는가. 다만 여혜경(呂惠卿) 같은 무리들을 등용해 진출시킨 것이 큰 착오였던 것이다. 대체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 역시 운수가 좋고 나쁜 것에 관계되는 것이다. 군주는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때의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역시 정조 15년(1791년) 4월 30일의 기사 중"

정조는 자신이 총애했던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에게 '너는 왕안석'이라고 말한적도 있다. 박제가가 이루기 어려운 개혁을 주장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근대 중국 지식인( 사대부)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고 도리어 이단아라고 보는 시각까지 존재했으나 청말 캉유웨이가 왕안석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왕안석에 대한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정적인 사마광과 사적으로는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로를 방향은 다르지만 국가를 위하는 애국자로 여기고 존경했으며, 사마광은 왕안석에게 상술된 것처럼 여혜경은 믿을 만한 인사가 못 되니 경계하라는 정치적 조언까지도 해 줬다. 두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신법당과 구법당 사이에 합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두 사람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흙탕 싸움이 열렸다.

11. 기타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소학교에서 왕안석의 작품 3개, 중학교에서 1개, 고등학교에서 2개를 가르친다.

판관 포청천에 등장하는 왕승상에 모티브가 되었다.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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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유안세 · 추호 , 전주 왕회(王回) 증탄, · 진관(陳瓘) · 임백우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진차승 · 진사석 · 팽여려 · 여도 · 장정견 · 공결 · 손악 · 진헌 · 강공망 · 진우 · 상안민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손고(孫鼛) · 오시 · 이소기 · 오사례 · 왕한지 · 황렴 · 주복 · 장순민 · 성도(盛陶) · 장형 · 안복 · 손승 · 한천 · 공정신 · 정목 · 석단 · 교집중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부즙 · 심기(沈畸) ,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이린 · 서승규 · 유효충 · 여승 · 나거통 · 제득일 · 이한징 · 형신류 · 허조 · 호중요 · 진긍 · 홍문무 · 역연경 · 동도명 · 곽종 · 고흔 · 주태 · 성상 · 진사도 · 방강 · 방천우 · 유빈 · 번경온 · 영서민 · 기위 · 하보지 · 이빈(李玭) · 후의 · 왕광제 · 강백 · 구승순 · 상진 · 두의(杜誼) · 요종명 · 등중화 · 모안여 · 이방(李訪) · 주수창 · 후가 · 신적중 · 학인 · 지점 · 등종고 · 심선 · 소경문 · 태형 · 앙흔 · 조백심 · 팽유 · 모순 · 양경(楊慶) · 진종 · 곽의 · 신세녕 · 구여령 · 왕주(王珠) · 안후 · 장백위 · 채정(蔡定) · 정기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척동문 · 진단 · 충방 · 만적 · 이독 · 위야 · 형돈 · 임포(林逋) · 고역 · 서복 · 공민 · 하군 · 왕초(王樵) · 장유(張愈) · 황희 · 주계명 · 대연 · 진열 · 손모 · 유역 · 강잠 · 연서 · 장찰 · 유여상 · 양효본 · 등고보 · 우문지소 · 오영(吳瑛) · 송강어옹 · 두생 · 순창선인 · 남안옹 · 장여 · 서중행 · 소운경 · 초정 · 왕충민 · 유면지 · 호헌 · 곽옹 · 유우(劉愚) · 위섬지 · 안세통 · 유정식 · 소곡 · 서적(徐積) · 증숙경 · 유영일
460권 「열녀전(列女傳)」
주아 · 학절아 · 진당전 · 여양자 · 동팔나 · 한희맹 · 모석석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조수기 · 왕처눌 · 묘훈 · 마소 · 초지란 · 한현부 · 사서 · 주극명 · 유한 · 왕회은 · 조자화 · 풍문지 · 홍온 · 소징은 · 정소미 · 조자연 · 하란서진 · 시통현 · 견서진 · 초연 · 지언 · 회병 · 허희 · 방안시 · 전을 · 지연 · 곽천신 · 위한진 · 왕노지 · 왕자석 · 임령소 · 황보탄 · 왕극명 · 사의도인 · 손수영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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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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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권 「영행전(佞幸傳)」
미덕초 · 후막진리용 · 조찬 · 왕보 · 주면 · 왕계선 · 증적 · 장설 · 왕변 · 강특립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채확 · 형서 · 여혜경 · 장돈 · 증포 · 안돈 · 채경 · 조양사 · 장각(張覺) · 곽약사 · 황잠선 · 왕백언 · 진회 · 묵기설 · 한탁주 · 정대전 · 가사도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장방창 · 유예 · 묘부 · 두충 · 오희 · 이전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이경(李景) 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 정조 전여조 이조 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만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부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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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종의 네번째 연호이다. [2] 철종의 첫번째 연호이다. [3] 휘종 정화 3년(1113년)에 왕안석을 공자의 사당인 공묘에 배향하고 서왕으로 추봉하였으나, 흠종 시기 이후에는 사당에서 왕안석의 신주가 내려갔고 작위가 삭탈되었다. [4] 참고로 현대 표준 중국어 발음은 Wáng Ānshí이다. [5] ? ~ 1038. [6] 왕안석이 태어난 곳은 임천현이 아니라 같은 강서지방의 임강군이다. [7] 현재의 난징(南京) [8] 왕안석이 오랫동안 지방관을 역임하고 다른 관직들보다 수입이 상대적으로 많은 관직을 희망한 이유 역시 그가 출생했을 때부터 집안이 계속 금전적으로 가난했던데다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기까지 해 최대한 가계에 보탬이 돼야 하는 사정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9] 한자 1만 자가 쓰였다고 이러한 명칭으로 불린다. [10] 건주 포성 사람으로 자는 자후(子厚). 어린 시절부터 그 재능이 뛰어났고 왕안석, 소식, 소철, 사마광 등과 친구였다. 본래 차갑고 냉정한 성품과 정치적 술수가 뛰어난 탓에 재능이 뛰어나고 사심없이 일처리를 했음에도 늘 구법파와 신법파 모두에게 적이 많았다. 그는 친구 왕안석이 신종의 희녕변법 때 중용되면서 편수삼사조례관에 임명되자, 변경 지역을 군사들을 이용해 개척하고 원주 설치 등을 이뤄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왕안석의 신법을 지지한 신법파임에도 왕안석과는 의견을 달리해 좌천되기도 했다. [11] 자는 길보(吉甫). 복건 천주(福建 泉州) 사람으로 신법 추진과 시행하는 동안 왕안석의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왕안석은 그를 주요 관직에 추천하고 신뢰했다. 하지만 동생 왕안국은 여혜경을 신뢰한 형에게 “아첨꾼 같으니 믿지 마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고, 여공저는 간사하다고 그를 평가했다. 아울러 정적인 사마광조차도 여혜경에게 ‘험교’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여혜경을 경계했고 왕안석에게 편지를 보내 ‘아첨하는 무리는 세를 잃으면 언젠가는 왕안석 자네를 팔아먹고 배신할 걸세. 그를 경계하게나”라고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안석은 사마광의 진심어린 조언에도 여혜경을 신뢰했다. [12] 훗날 금릉에 머물던 왕안석은 종종 ‘복건자(福建子)’세글자를 쓰면서 복건 사람인 여혜경이 망쳤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여혜경 역시 잠시 이 지역으로 귀양을 오게 됐는데, 같은 곳에서 머물던 왕안석이 안부를 건네며 덕담과 위로를 건넸음에도 이를 외면한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여씨의 됨됨이에 결정적으로 실망해 저런 말이 나온 것으로 추정. [13] 당장 왕안석의 문하생이자 왕안석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던 증포는 시역법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증포의 시역법 비판, 여혜경의 비판은 왕안석이 사임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친구이자 신법파였던 장돈, 처음에는 왕안석을 지지하던 구양수 등도 왕안석의 신법 중 일부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한 적이 있다. [14] 일례로 당시 낙학(洛學)의 거두 정이가 사는 고을을 여혜경 무리가 통과한 적 있는데, 100명이 넘는 큰 행렬이었음에도, 행차가 끝난 후에야 사람들이 알게 됐을 만큼 조용하면서도 신속했다고 한다. [15] 경골지사처럼 강경하게 왕안석 신법을 옹호해 신법당에서 입지를 확보했지만, 반대편에서는 특히 사마광이 명분과 실제가 미묘하게 다른 면모를 지적하며 왕안석에게 주의할 것을 경고한 바 있다. [16] 왕안석이 복귀하였다가 다시 은둔하는 기간동안 개인적인 아픔도 겪었다. 그가 아끼던 동생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왕안국이 병으로 사망했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아버지의 정치적 동지이자 뛰어난 학문적 지식과 재능을 가진 아들 왕방마저 폐병으로 요절했다. [17] 한국에는 소동파로 알려져 있는 정치가이자 시인. [18] 사실 신종의 모후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왕안석의 신법을 강하게 반대했어도 그 전체가 문제가 있다고 하지는 않았고, 사마광을 재상으로 임명했음에도 최초에는 신법 전체를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19] 오늘날 칭하이 호 일대 [20]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 황 2개의 주를 차지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서하를 양면에서 협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21] 당선종 때 장의조가 사주 일대를 비롯한 하서와 하황을 당 정권에 바치는 등 당 정권이 하황지구를 탈환하는 성과를 이루었으나, 장의조 사후 다시 빼앗겼다. [22] 이 시기 지휘관 중 하나였던 환관 이헌은 난주를 되찾는 성과를 이룬다. 그러나 각 장수들 간 단합이 되지 않았고 서하의 청야전술로 인해 실패하였다. [23] 이전에 영락성을 신축하였던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서희는 이를 무시하고 축성을 강행했다. 그리고 전선에서는 부장 곡진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 결과 충악은 이에 원한을 품고 구원하지 않았고 이헌과 심괄의 군대는 서하의 원군에 가로막혔으며, 서희는 서하군과의 난전 중 전사하고 영락성은 함락되고 만다. 충악은 그 와중 병사하였다. [24] 북송 6적 중 하나이지만 다른 환관과는 다르게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25] 동관이 서하에 대패하여 이를 숨기고 또 휘종에게 허위 보고한 적도 있었으나, 서하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26] 하서 지역은 안사의 난 당시 토번국에 빼앗겼으나, 장의조가 사주(돈황)을 탈환한 이래 다시 당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장의조 사후 다시 빼앗겼고, 하서회흘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서하가 하서회랑을 점령하고 있었다. [27] 석경당이 연운 16주 지역을 요에 넘겨주었다. [28] 리 왕조는 왕안석의 신법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29] 이게 후일의 조선에서 공납을 대신해 대동법을 추진하던 이들이 왕안석의 신법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 걸 조심한 이유가 될 것이다. [30]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하는 상소에서 한무제가 재력이 고갈되자 상홍양의 설을 받아들여 싼것을 사들이고 비싸게 파는걸 균수라고 했는데 상인들이 쓸모없게 되었고 도적이 일어나 개판이 났다. 한소제가 즉위하고 곽광이 백성들이 하고 싶어하는 바를 따르니 천하의 민심이 귀부하고 무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31] 당시 한기는 재상에서 스스로 물러나 지방관을 맡았는데 재상 시절 공명정대한 판결과 꼼꼼한 일처리 등으로 백성들과 농민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청묘법이 시행될 당시 하북 안찰사로 부임해 있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왕안석 주도로 하북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청묘법이 시행됐다. 하지만 이때 하북 농민들은 대출이 필요없음에도 청묘법 신청을 강요받고, 청묘법과 관련된 모든 비용들까지 농민들에게 전가해 불만이 쌓였다. 여기에 더해 이전까지 경험하지도 못한 수탈 방법들까지 나오면서 견디다 못한 하북 농민들이 결국 가장 존경하고 믿을 만한 전 재상이었던 한기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32] 농민들의 단체 항의 이후 한기가 하북일대를 돌면서 직접 농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사를 했는데 한기의 생각보다 그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한기는 신종에게 급히 조사결과와 함께 당시 청묘법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사례까지 상소까지 올려 그 상황을 전했다. 이때 신종은 왕안석의 말만 믿고 있다가 한기의 상소문을 직접 읽고 “과연 한기는 명신이고 충신입니다그려. 백성들이 이렇게 하소연하고 청묘법이 이렇게 심각한데 폐지해야 하는 게 아니오”라고 말했을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 따라서 신종은 주변 신하들에게 청묘법을 폐지하라고 말하기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이때 신종의 말을 들은 왕안석은 오히려 분에 못 이겨 한기와 신종을 싸잡아 강하게 비난했고, 퇴궁 이후에도 화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33] 군마와 짐말은 다른데 짐말을 군마로 쓰겠다는 이야기냐는 이유. [34] 한기는 왕안석이 그 학식과 재능으로는 한림학사로는 어울린다고 했지만 재상감은 아니라고 신종에게 조언했다. 또 왕안석 중용 의사를 밝힌 신종에게 왕안석을 경험해본 인사 중 간관 출신인 오규는 왕안석이 한결같이 일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당연히 해야 될 세수나 목욕조차 하지 않고, 시선도 신경 안 쓰는 이해못할 행동들과 세상물정에 어두운 일처리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35] 신법 시작 전 사전단계(세금징수를 위한 토지 결수 조사 과정)부터 이런 인물들 때문에 성과를 냈음에도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이때 중앙에서 어떤 개혁을 하는지 크게 관심없는 농민들은 왕안석이 보낸 측근들이 온 동네를 돌면서 온갖 이유로 자신들을 수탈하자 이들을 파견했다는 왕안석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한다. [36] 증포의 경우, 철종 사후 후계선정에서도 평소 자신이 시기하던 장돈을 반대해 휘종이 즉위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휘종 대의 간신 채경을 추천해 그가 재상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37] 조선시대에 붕당이 성행해서 알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사실 조선은 붕당을 경계한 국가다. 조광조가 쫓겨난 것도 이준경의 유소가 비난거리가 된 것도 붕당 때문[43] [38] 북송이나 남송이나 중요한 점은 내분으로 망하지 않고 외적의 침공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진, 한, 신, 서진, 수, 당, 명 이 국가들은 모두 통일왕조로서 죄다 내적 문제가 심각하여 망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럼 송나라는 어땠냐면 송은 제법 내적 문제는 괜찮았다. 북송은 송휘종의 막장 통치로 반란이 잦았지만 그게 딱히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북송 멸망 후 악비 같은 구국영웅들이 나서고 유예 같은 반례도 있기는 하지만 금나라에 의해 초나라 황제로 옹립된 장방창이 오히려 남송으로 귀순하는 등 보기 드문 일도 벌어졌다. 남송도 마찬가지로 남송의 내분이 심각한 수준이었다면 당시 세계제국을 이룬 몽골을 상대로 44년에 걸쳐 맞설 수 있었을까? [39]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뜻하는 말이다. [40] 지어내어 기록하지 않기. 실제로 김부식은 안시성주의 활약을 기록했지만 그의 이름은 기술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김부식 본인도 "이런 영웅의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게 애석하다" 라는 개인적 견해만 남겼을 뿐이다.(흔히들 알고 있는 양만춘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처음 등장한지라 신뢰하기 힘들다.) [41] 더군다나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니 더더욱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연개소문을 띄워줄 가능성은 낮은 것이다. [42] 소순은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다. 그래서 이들은 3소(三蘇)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