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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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王安생몰연도 불명
후조의 인물. 본래 갈족 출신 노비로, 재략이 뛰어나 그의 주인이었던 조적이 무척 총애하였다고 한다.
2. 생애
대흥 3년(320년) 6월, 북벌하여 후조의 장수 도표를 무찌르고 옹구(雍丘)에 주둔한 조적이 어느 날 왕안에게 말했다."너는
석륵과 같은 종족이고, 나는 너 한 사람 없는 것 정도는 신경쓰지 않으리라."
이후 왕안에게 재물을 후히 주어 석륵에게 보냈다. 왕안은 대담하고 지략과 재주가 있어 석륵이 그를 좌위장군으로 삼았다.태화 3년(330년) 2월, 소준의 난에 가담했다가 후조로 망명해온 조적의 동생 조약과 그 친족 100여 명이 석륵에게 체포되어 시장에서 공개처형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를 들은 왕안은
"어찌 조사치(士稚: 조적의 字)의 후손이 끊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라 탄식하고는 시장의 처형장으로 갔다. 이때 왕안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10살 밖에 되지 않은 조적의 서자 조도중(祖道重)을 몰래 구출해 자신의 거처에 숨기고, 그를 출가승려로 변장시켜 주변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조적의 대가 멸절되는 것을 막았다. 이후 무사히 장성한 조도중은 석씨의 후조가 몰락할 때 강남으로 도망쳐
동진으로 귀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