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7 09:34:42

고화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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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顧和
(288 ~ 351)

동진의 인물. 자는 군효(君孝). 양주 오군(吳郡) 오현(吳縣) 출신. 삼국시대 오나라 시기 형주자사를 지낸 고용(顧容)의 증손자. 서진 시기 임해태수를 지낸 고상(顧相)의 손자. 영군장군 고중의 조카.

2. 생애

고화가 2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맑은 지조가 있어, 친척 어르신인 명사 고영이 그를 중시하며 말했다.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의 기린이다.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필시 이 아이가 될 것이다."
당시 집안에 고구(顧球)라는 친척도 젊어서부터 명성을 얻어 주의 별가(別駕)를 지내고 있었는데, 고영이 고구에게 이르길,
"경은 조속히 나아가야 할 것이오. 자칫하면 군효(君孝)가 경을 능가하게 될 터이니!"
라며 고화를 극찬했다고 한다.

왕도 낭야왕 사마예를 모시고 건업(建業)에 이르자, 고화는 왕도의 부름을 받고 종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사도연(司徒掾)을 지내던 중, 장수교위(長水校尉)에 제수받은 동해왕 사마충(司馬沖)이 그를 주부로 삼아 자신의 휘하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영창 원년(322년)에는 사도좌조연(司徒左曹掾)로 옮겨졌다.

태녕 원년(323년), 승상 왕돈의 주부가 되었다가, 승진하여 태자사인, 거기참군, 호군장사를 역임했다.

태녕 2년(324년) 6월, 명제 사마소가 왕돈을 토벌하기로 결심하고, 사도 왕도를 대도독, 영양주자사(領揚州刺使)로 삼았다. 고화는 양주별가에 임명되었고, 왕돈이 평정된 후 옮겨져 산기시랑, 상서이부, 사공장사, 진릉태수를 역임하였다.

함강 초년(335년 ~), 어사중승에 임명되어 100만 전에 달하는 금액을 빼돌린 상서좌승 대항(戴抗)을 탄핵했다. 고화는 철저히 법에 따라 죄를 심의했으며, 대항의 비리에 연루된 상서 부완(傅玩), 상서랑 유용(劉傭) 등도 가차없이 면직시키니, 여러 백관들이 그를 자못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후 어사중승에서 시중으로 옮겨진 고화는 동진의 황제의 면류관은 비취나 산호가 아닌 잡주(雜珠)로 꾸민 것을 보고 상소했다.
"과거 면류관은 10개의 끈 중 2개는 모두 옥주(玉珠)를 사용했는데, 지금 잡주 따위를 사용하는 것은 예법에 합치하지 않습니다. 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백선주(白旋珠)로 이를 대체해야 합니다."
성제 사마연도 고화의 상소를 타당하다 여겨, 태상에게 명해 면류관을 고치게 했다. 또 한번은 성제가 자신을 키워준 보모 주씨(周氏)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안팎으로 조서를 내려 그녀에게 명호(名號)를 하사하려 했다. 이때 고화가 상소문을 올려 간했다.
보모 주씨가 폐하를 도운 공은 그녀와 그녀의 친척에게 집과 택지의 하사를 약속함으로써 이미 다하였으니, 은택을 더하는 것은 과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보모에게 명호를 하사한다 쳐도 그 역사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으며, 유사한 것을 찾아도 오직 한영제가 제왕의 사적인 은혜를 베풀어 유모 조요를 평씨군(平氏君)에 봉했던 일이 있으나, 이는 본받을 만한 선대의 법령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임금의 행동은 언제나 서적에 기록되어 장차 후대의 법도로 드리워질진대, 서적에 임금이 법을 어긴 일이 기록되어 있으면 후대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러자 성제가 그의 말에 따라 보모에게 명호를 내리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고화는 이부상서로 옮겨졌다가, 영군장군, 태상경, 국자좨주를 역임했다.

함강 8년(342년) 6월, 성제 사마연이 붕어하고 강제 사마악이 즉위했다. 강제 사마악은 고화를 상서복야로 삼으려 했으나, 고화는 노모의 간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했다. 그러나 강제는 칙령을 내려 고화에게 임명 조서를 받드라 명하고 그 대신 남들보다 조기퇴근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황제가 그를 예우함이 이와 같았다. 다만, 오래지 않아 조정 내에서 상서부 소속 관리가 궁 밖에 오래 머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바람에 은청광록대부, 영국자좨주(領國子祭酒)로 옮겨졌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고화는 사직하고 모친상을 치르면서 효로 이름을 날렸다. 고화가 상을 다 마치지 않았을 무렵, 위장군 저부(褚裒)가 고화를 상서령으로 천거하니,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산기랑을 보내 당장 직책을 받들라 명했다. 고화는 매번 조정으로부터 재촉을 받을 때마다 애통해하며 항상 친척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 사람들은 자신의 재주가 필요한 때라면 나라를 위해 부득불 의(義)를 희생하여 상복을 벗고 왕명에 먼저 따랐소. 그러나 나는 평상시에도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한데다 하물며 마음까지 황란한 지금, 장차 무엇으로 나라를 위해 만 분의 일의 보탬이 될 수 있겠는가. 부름에 응해 관직에 나가봐야 내가 효도를 가벼이 여긴다는 표시 밖에 되지 않을 것이오."
강제는 이후로도 계속 조서를 보내 관직에 나아가도록 고화를 타일렀으나, 고화는 10여 차례나 상소하면서 받들지 않았다. 그렇게 고화는 강제의 요청을 모두 사양하면서 모친상을 무사히 마친 후에야 비로소 직책을 받들었다.

다시 조정에 복귀한 고화는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을 들어 대신들의 문제점을 지적해나갔다. 당시 남중랑장 사상이 경현(涇縣)의 현령 진간(陳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어사부에서는 지방관을 대상으로 살인 사건을 저지른 사상을 탄핵하여 퇴출시킬 것을 청했으나, 사상은 강헌황후 저산자의 삼촌이었기에 조정 내에서는 그를 용서하고 사건을 덮으려 했다. 이에 고화는 사상을 벌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고화의 상소문은 끝까지 의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또 한번은 여남왕 사마통(司馬統)과 강하공 위숭(衛崇)이 모두 서모(庶母)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 3년상을 허락해 달라는 청을 올린 적이 있었다. 고화는 친모와 서모는 엄연히 대우가 달라야만 하며,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황족인 사마통과 개국공신의 후손인 위숭이 이러한 예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 상소했다. 조정에서도 고화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마통과 위숭의 청을 기각했다.

영화 7년(351년), 고화가 병으로 인해 현직에서 물러나니, 조정에서 그에게 좌광록대부, 의동삼사, 산기상시를 더하고 상서령 직책은 유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사공, 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목(穆)'.

아들로는 고순(顧淳)이 있으며, 상서이부랑, 급사황문시랑, 좌위장군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