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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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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 홍대용
洪大容
파일:6xjb4Ci.jpg
청나라의 문인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
출생 1731년( 정조 10) 3월 1일[A]
충청도 청주목 수심면 장명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장명마을)[2]
사망 1783년( 철종 7) 10월 23일[A] (향년 52세)
경상도 순흥도호부
(現 경상북도 영주시)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4]
부모 부친 - 홍력(洪櫟, 1708 ~ 1767)
모친 - 청풍 김씨[5](1708 ~ 1767)
형제자매 3남 2녀 중 장남
부인 한산 이씨 - 이홍중(李弘重)의 딸
덕보(德保)
담헌(湛軒)·홍지(弘之)
비고 인척사돈 은신군, 김정희

1. 개요2. 생애3. 업적
3.1. 학문적 노력
3.1.1. 지구지전설3.1.2.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 언급
3.2. 서양 악기 소개
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18세기 중반 조선의 관료, 교육자, 천문학자 노론 북학파 실학자로 분류된다.

2. 생애

1731년 5월 12일 충청도 청주목 수심면 장명리(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장명마을)에서 목사(牧使)를 지낸 아버지 홍력(洪櫟)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론 사림의 으뜸으로 꼽히던 석실서원의 미호 김원행[6]을 스승으로 학문을 연마했으며 과학 탐구와 서양 문물에 관심이 있어, 무한 우주론과 지전설을 지지했고 대중에 설파하였다. 저서로는 《담헌서》[7], 《사서문의》, 《의산문답》, 《임하경륜》[8], 《건정필담》, 《주해수용》, 《을병연행록》[9]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의 교분이 깊었고 박지원과 온갖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는데 박지원이 홍대용 사후에 직접 지은 홍덕보묘지명에 그 찬탄이 잘 나타나 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후세대 실학자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나경적과 함께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개량했다.

가야금 거문고를 잘 타는 것으로도 유명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연경에 갔을 때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가톨릭 성당이었던 천주당 남당에 방문하여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본 적 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음률에 밝았으며, 양금을 최초로 조선에 들여온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775년 홍대용은 세자익위사의 시직으로 출사하여 젊은 세손을 보필하고 가르치는 자리를 1년간 맡게 되었다. '계방'으로 불리는 세자익위사(그래서 이 시절에 세손과의 문답을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서> 내부의 기록도 '계방일기'다)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는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시직은 종8품으로 품계는 낮지만 믿을만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들이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세자의 말동무도 하고 선생도 하는 까닭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요직에 발탁되기도 했다. 홍대용은 이후 외직만 돌았고 정조가 보위에 오른 이후 몇 년 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게도 중히 쓸 일은 없었다.

세손은 서연 자리에서 홍대용에게 연경의 풍속을 묻기도 하고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등 1년간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의양이 홍대용을 고문으로 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홍대용의 막힘없는 대답을 보고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만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관은 다른 편이었는데 격물치지와 실천을 중시하던 홍대용에 비해 "그게 중요한 것은 알지만 치국 평천하의 일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답한다거나 " 강희제의 치세가 성군의 치세였다"라든지 연경의 번화함을 연경의 등으로 설명하는 홍대용에게 "조선 궁중에서 사용하던 등이 아름다웠다"며 응수하는 세손의 모습은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린 이유를 설명해주는 일화일지도 모른다.

3. 업적

3.1. 학문적 노력

3.1.1. 지구지전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지구지전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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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 언급

홍대용은 특이하게도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외계인에 관한 상상은 친구였던 실학자 박지원의 글을 통해서도 남아있는데 1780년에 중국을 방문했던 박지원은 추석날 밤에 중국 학자들과 어울려 달 구경을 하면서 저 달 속에서 지구를 쳐다 보며 이야기 하고 있는 '달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달뿐만 아니라 다른 별에도 그 별의 조건에 맞는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이런 생각은 자기의 친구 홍대용의 주장이라 소개하고 있다. 천문에 조예가 깊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우주는 무한하다는 주장을 펼친 인물인만큼,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상당히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이러한 면모 덕분에 그의 이름은 2001년, 한 소행성의 이름에 헌정되기도 했다.

3.2. 서양 악기 소개

1772년 6월 18일 오후 7시경 담헌 홍대용의 저택인 유춘오(留春塢: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뜻)에는 홍대용의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홍대용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람들이 유럽의 바로크 고음악 악기 덜시머 하프시코드를 모방해 만든 악기인 양금(洋琴)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이날 연주회는 홍대용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양금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연주법을 몰랐던 홍대용은 수 년간 노력한 끝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으로 양금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홍대용은 스스로 독주법을 터득한 맑고 청량한 타악기의 소리를 최초로 조선에 전했다. 홍대용이 중심이 된 '유춘오 악회'란 이름의 정기 음악회에서 서양 악기를 통한 음악을 처음 들은 청중들은 감탄했고 자리에 있었던 연암 박지원은 그 때의 감동을 자신의 문집 <연암집>에 정확한 날짜 시간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조선의 음악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해 국악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홍대용은 서양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악기인 양금뿐만 아니라 청나라 연경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즉석에서 연주해 천주교 신부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독학으로 혼천의를 만들기도 했던 홍대용으로서는 서양의 악기를 다루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절대 음감을 소유한 음악인이자 거문고 연주자로도 정평이 난 홍대용이었기에 몇 번의 궁리 끝에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법을 터득했던 것이었다. 이때 김창즙의 아들이자 당대의 기인으로 유명했던 김용겸이 그 연주에 감동하여 홍대용에게 큰절을 했다고 한다.

4. 여담

  • 한성부에 들어갈 때 홍대용은 말을 타고 당시 선진 문물이었던 선글라스(오수경)를 쓴 채 양금을 가지고 들어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의 양금은 남양 홍씨 가문에 대대로 전수되었는데 조선 말 대구도호부 사람인 서찬규가 홍대용의 고향인 천안군을 지날 적에 아주 청량하고 맑은 금속 악기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홍대용의 후손이 연주하던 하프시코드 소리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의외의 이야기지만, 한국인 최초로 천체망원경[10]을 직접 구매하여 천문 관측에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신단의 일원이였던 숙부를 따라서 자제 군관 자격으로 연행사 사절단에 참여, 멀고 먼 여정 끝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홍대용은 소문으로만 듣던 동양 최고의 천문학이 집대성된 천주당 남당에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이전의 조선인 방문객들의 무례하고 언짢은 행언에 반감을 가졌던 천주당 남당 신부들은 미개하고 무례하단 이미지가 박힌 조선인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3차례의 선물을 통해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었고, 마지막 선물에 같이 붙여 보낸 진심어린 편지를 보내고 나서야 신부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마침내 공식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으나, 천문은 천자의 영역이였던 탓에 함부로 관여했다간 역모죄로 연행되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천주당 남당 신부들은 청나라의 천문 연구 기관인 천문감 관료를 겸직하였던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기대를 하였던 홍대용은 비교적 보안 순위에서 매우 밀리는 천체망원경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러한 소극적인 접대에도 불구하고 천체망원경의 장점, 즉 멀리 있는 천체를 비교적 더 선명하게 확대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북경에서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민없이 천체망원경을 구매[11]하였다.
  • 젊은 시절에 예송논쟁을 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글을 지어 스승 김원행과 사이가 소원해 진 적이 있다.
  • 현대 기준으로하면 인싸성향의 선비였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12] 등 당대 서얼 출신이지만 능력은 출중했던 이들이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과거에 못붙은 백수였던 박지원 등과 친밀한 관계였는데 이들보다 나이가 10살 가량 많아 모임 중에서도 고문의 역할이었다고 한다.[13] 이들 외에도 이서구(李書九) 원중거(元重擧), 백동수, 성대중[14], 이희관(李羲觀), 윤가기(尹可基) 등이 이 모임에 어울렸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에는 백탑파, 혹은 북학파로 불리는 학자들이다. 다만 홍대용은 천안에 살고 다른 이들은 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인근에 살았기 때문에 실제 좌장은 박지원이었다. 하여튼 이들은 '백탑동인'이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결성하여, 사람들과 자주 만나 시문과 학문에 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주위에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의 글을 소위 검서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의 시는 형식주의에 빠진 당시의 시와는 달리 간결한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들이 나중에 검서관이 되었으므로 검서체라 불리었다고 한다.
  • 그 성향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을때도 드러났는데 청나라 고위관료였던 서성맹이 청나라 관료를 업신여기는 조선 관료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 궁에서 나가지 못하게하고 억압했을때, 홍대용이 나서서 직접 대면하여 정중하게 대하자 서성맹은 인품에 감격하여 흔쾌히 궁 밖을 나가 사신단이 성 내부를 유람하는 것에 대해서 허용했다고 한다. 인품이 어찌나 훌륭했는지 유람중에 만난 청나라 선비였던 엄성과 반정균이란 인물은 홍대용을 두고 "중국에서조차 얻지못한 진정한 친구를 조선에서 만나게 되었다." 라고 평했다. 엄성과도 우연히 만난 이후로 급격히 친해져 그의 집에 초대까지 되었는데 엄성의 아들인 엄앙은 어린시절 홍대용을 만났을때의 인상이 워낙 깊었는지 홍대용을 '큰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15] 누구든 만나면 금방 친밀해지는 탓에 임용한과 같은 역사학자는 우스갯소리로 그의 친화력은 '미스테리'같다고 평한다. 홍대용은 우연히 청나라 친구들을 만났던 일화를 <회우기>라는 책으로 기록하였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5. 대중매체에서



[A] 음력. [2] 인근의 해정리에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 [A] [4] 정효공파(貞孝公派) 22세 대(大) 항렬. [5] 군수 김방(金枋)의 딸이다. [6] 김수항의 증손자, 김창집의 친손자이며 김창협의 양손이다. [7] <담헌서>의 사론에는 주로 위진 남북조 시대 인물들의 평이 실려 있는데 촉한의 인물인 강유 제갈첨 등의 인물평도 실려 있다. [8] 일정 연령에 도달한 남성에게 토지 2결을 지급하라는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9]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의 <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중국 견문록으로 꼽힌다. [10] 그가 구매한 천체망원경의 성능제원은 경통 약 70cm, 외경 8-10cm, 구경 5~10cm 정도의 천체망원경으로, 당시로써는 조선이란 국가에만 한정한다면 유일무이한 최고급 성능의 천체망원경이였을 것이다. [11] 당시 조선인들 중 홍대용처럼 직접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구매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서양의 천문의기들은 유일하게 서양과 교역하고 지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가까운 중국에서만 제한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천체망원경을 사는 데에 홍대용이 지불한 값은 1845년에 북경의 방문한 이유원의 언급을 통하여 추정해본다면, 가격이 무려 부르는 게 값이였을 것이다. [12] 이들은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 4가(漢學四家)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이서구를 빼고 서이수를 넣으면 당대 서얼출신 4검서가 되고 이들과 후배인 정약용을 모두 넣으면 1780년대 후반과 1790년대 초반 시절 조선 정조 시대 중기의 6대 문장가(六大 文章家)로도 일컬어진다. [13]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박지원보다도 6살 위이다. [14] 다만 성대중의 경우 두 사람이 동년배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만난적은 없다. 성대중이 생전의 홍대용을 만나지 못한것을 아쉬워 하면서 적은 글도 있을 정도. [15] 이들은 청나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우연히 들렀던 선비들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중국 부호 중에서도 가장 부자였던 이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만났던 홍대용의 비장이 고향 친구의 부탁으로 청나라 안경과 오수경(선글라스)을 사려고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에 가격 흥정에 자신이 없었던 탓에 안경을 쓰고다니던 행인에게 다가가 쓰고있는 안경을 사겠다고 말하자 돈도 받지 않고 흔쾌히 내어줬다고. 그가 홍대용과 일행에게 이 일을 전해주자 홍대용이 비장의 사례도 할겸 비싼 안경을 그냥 내어준 사람이 궁금해서 시내를 유람하던 중에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또다시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