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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 |||
<nopad> 최광수, 정부표준영정 38호, 1988년[1] | |||
출생 |
1542년
11월 17일[2] (음력 중종 37년 10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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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의성현 (現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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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7년
5월 31일 오전 7시 ~ 9시 사이 (향년 64세)[4] (음력 선조 40년 5월 6일 진시)[5] |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산현 서미동 초당 정침 (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2리 | ||
재임기간 | 제82대 영의정 | ||
1592년
6월 10일 ~
1592년
7월 9일 (음력 선조 25년 5월 1일 ~ 6월 1일) |
|||
제84대 영의정 | |||
1592년
12월 4일 ~
1598년
11월 6일 (음력 선조 25년 10월 27일 ~ 선조 31년 10월 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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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봉호 |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 |
시호 | 문충(文忠) | ||
본관 | 풍산 류씨 | ||
자 | 이현(而見)[6] | ||
호 | 서애(西厓) | ||
학력 |
퇴계 이황의 문하 (
1550년대와
1560년대 사이) 식년시 생원시 급제 ( 음력 1564년 7월 20일) 식년시 진사시 급제 ( 음력 1564년 7월 20일) 문과 별시 병과 급제 ( 음력 1566년 10월 20일) |
||
공훈 |
수충익모광국공신 3등(輸忠翼謨光國功臣 三等, 1590) 호성공신 2등(扈聖功臣 二等, 1604) 청난원종공신 1등(淸亂原從功臣 一等, 1605)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 一等, 1605) |
||
신체 | 187cm 전후 추정,[7] 신발 350mm[8] | ||
붕당 | 동인 → 남인 | ||
저서 |
《
징비록》 《서애집(西厓集)》 《난후잡록(亂後雜錄)》 《진사록(辰巳錄)》 《근폭집(芹曝集)》 |
||
부모 |
부친 - 류중영(柳仲郢, 1515 ~ 1573) 모친 - 안동 김씨(1512 ~ 1601) |
||
형제자매 | 형 - 류문룡(柳文龍, 요절), 류운룡(柳雲龍, 1539 ~ 1601) | ||
부인 |
정부인 이경(李坰)의 딸
전주 이씨(1542 ~ 1589)[9] 계부인 장윤업(張潤業)의 딸 인동 장씨(? ~ 1591) |
||
자녀 | 6남 3녀 | ||
경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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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 외교관, 학자.2. 생애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구 안동 김씨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책을 읽을 때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11] 머리가 좋아 이황의 수제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이황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天之所出者)"라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12] 어린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13] 한양에 살 무렵에는 지금의 충무로에 살았는데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 '서애길'이라는 길이 있고 그곳에 류성룡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당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특히 정여립의 난과 관련한 기축옥사와 그와 관련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있었는데 그는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14]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건저 문제(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는데[15]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이 무렵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능란하며 경우가 바르고 말솜씨 있는 사람은 류 정승만 한 이가 없다."
- 이항복,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16]
이때쯤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결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참이었지만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강력한 왜군 침입 예고와 대비 주장에도 류성룡은 같은 당파 동인이자 쌍벽을 이루는 이황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보고를 듣고 기본적으로는 설마했던 것 같다.[17] 하지만 역시 찜찜했는지 이순신이나
권율 등을 천거해서 등용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항복,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16]
그러나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조선군은 무너져 선조가 몽진을 가야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때 전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간관들의 탄핵으로 인해 잠시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가[18] 복직되었고 이때 비변사의 도제조이면서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오늘날 국무총리 겸 총사령관)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도 바로 그였고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많은 일을 했다. 전시에 행해진 류성룡의 조치들은 유연하고도 실용적이었는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뜬금없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자 "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막으려고 위구르와 티베트에 원병을 청했다가 난리가 났듯 이걸 받아들이면 훗날의 우환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게 좋겠다. 다만 여진족으로서는 예전부터 우리에 대한 원한이 크므로 단호히 물리쳐 괜히 자극할 게 아니라 '도와준다는 것은 고마운데 지금은 왜란이 거의 평정되었으므로 굳이 너희한테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정도로 잘 사양하는 게 좋겠다"라는 의견을 낸 것만 보아도 류성룡의 통찰력을 알 수 있다.[19]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20]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21]하기는 했으나 1년도 못되어 폐지되었다.[22]
류성룡의 갑옷과 투구. 단순한 투구 모양과 가죽으로 만든 찰갑으로 구성된 특이한 형태다.
전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과 일본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치러 온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고 선조 또한 원해서 류성룡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부탁했지만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런데 북인[23]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을 하였고 결국 삭탈 관직되어 낙향했다.[24] 이후 1600년 복직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힘썼는데 쓰여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징비록》이다.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태와 참상 및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1604년 은거하던 안동 하회마을이 수해를 입는 바람에 하회마을에서 풍산 서미동으로 옮겨 살았고 1607년 5월 6일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의 '서애 선생 연보'에는 말년에 "조용히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손님들을 물리치며 살았다고 하며 류성룡이 임종하는 모습이 상세히 적혀 있다.
5월 6일 무진일, 진시(辰時)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그 전날 밤에는 남의 부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 오늘은 정신이 환하여 병이 없던 때와 같다."고 하면서 홍범(洪範)을 끝까지 외었다.
이날 진시 초에 사람을 시켜 내의를 맞아 오게 했다. 내의는 약을 달이느라고 곧바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여러 번 명하여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들어온 뒤에 손을 잡고 영결하며 말하였다.
"멀리 와서 병을 간호해 주니 천은이 망극합니다. 그대의 수고도 많았는데, 며칠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곧 명하여 당(堂) 중간에다 자리[席]를 마련하고 거기로 옮겨 나가려 하자 모시는 사람은 힘들게 움직이다가 괴로움이 더할까 염려해서 굳이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빨리 붙들어서 그곳으로 옮기자, 북쪽으로 향하여 정좌하고 편안하게 서거하였다.
- 《서애집》, 서애선생연보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숭례문의 상인들은 철시를 하여 애도를 표했고 백성들은 "류 정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1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슬퍼했다. 청렴했던 탓에 집안에 재산이 없어서 백성들이 제수 용품을 차려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2리에 있다. 1589년 먼저 사망한 아내
전주 이씨[25]와 합장되어 있다.그 전날 밤에는 남의 부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 오늘은 정신이 환하여 병이 없던 때와 같다."고 하면서 홍범(洪範)을 끝까지 외었다.
이날 진시 초에 사람을 시켜 내의를 맞아 오게 했다. 내의는 약을 달이느라고 곧바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여러 번 명하여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들어온 뒤에 손을 잡고 영결하며 말하였다.
"멀리 와서 병을 간호해 주니 천은이 망극합니다. 그대의 수고도 많았는데, 며칠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곧 명하여 당(堂) 중간에다 자리[席]를 마련하고 거기로 옮겨 나가려 하자 모시는 사람은 힘들게 움직이다가 괴로움이 더할까 염려해서 굳이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빨리 붙들어서 그곳으로 옮기자, 북쪽으로 향하여 정좌하고 편안하게 서거하였다.
- 《서애집》, 서애선생연보
3. 평가
친우인 이순신 덕분에 조선시대 재상중에서도 대중들의 인지도가 높다. 후세에는 조선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라 평가받는 인물이다. 류성룡은 퇴계 학풍을 계승한 인물로 근원적인 예학을 추구하기는 했지만[26], 왜란 때의 행보를 보면 현실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라 하여 대동법의 전신격인 제도를 주장해서 실현시키기도 했다. 또한 가끔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까이기도 하지만, 십만양병설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27] 류성룡의 주장이나 행보를 보면 이이의 '경장론(개혁론)'과 부합하는 면도 많다.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이황의 제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부분이다.다만 실록에는 그의 단점을 들어 " 재상으로서의 줏대가 없었으며 옳지 못한 일을 간하는 것이 없었다."는 등 다소 좋지 않은 평이 있다. 실제로 이순신이 탄핵될 때 류성룡은 당시 분위기 때문에 이순신을 제대로 구원하지 못했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어전에서의 발언을 보면 오히려 류성룡이 이순신의 모함에 소극적으로라도 편승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기도 한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 《선조 실록》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조정 신하들 중
정탁과
이원익 두 사람만이 이순신의 변호를 했고, 결국 이순신은 백의종군 처벌로 끝났다.- 《선조 실록》 1597년(선조 30년) 1월 27일
하지만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애초에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 모함하고 허위 보고를 했기에 이순신이 이런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원균이 보고한 내용의 진의를 말 타고 그 먼 곳까지 가봐야 알던 시절에, 조정에선 보고서만을 놓고 결정을 해야 했다. 물론 조정도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전란통에 "이순신이 출정을 안 한다."는 둥 원균이 허위보고를 했다고 해서, 그 진위 여부를 적절한 시간 안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선조의 하는 짓을 생각하면 이순신을 잘못 변호하다가는 사마천과 같이 피를 볼 수도 있다.
물론, 류성룡이 임진왜란 지휘와 수습에 많은 공을 세웠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뛰어난 일솜씨와 전란 극복의 공적은 당대 신하들도 인정하는 바였고 특히 훈련도감의 창설로 인해 조선 후기의 군제에 영향을 끼친 것도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지난 일을 반성하여 앞으로의 일을 경계한다."[28]는 의미에서 역작 징비록을 저술했으니, 이것들만 봐도 류성룡은 충분히 명신 대열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다. 다른 건 제쳐두고 임진왜란 최고의 양대 무장인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해서 방비한 사람이 류성룡으로, 과장 없이 말해도 그가 없으면 전쟁에서 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징비록에도 본인이 기록한 어설픈 일처리로 화를 부른 사례가 있다. 이여송의 부대가 보급을 논의할 때 평양을 탈환하면 곡식이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둘러댔다가 고니시가 철수하고 곡식이 없자, 개성에는 있을 것이라고 둘러댄 것. 그러나 개성에도 식량이 부족했다. 그 결과 명군은 식량과 말먹이가 부족하여 일본군의 군량을 빼앗아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수많은 군마가 말먹이 부족으로 폐사한다. 결과적으로 명군 장수들은 류성룡을 아첨하는 간신으로 평가하게 된다.
4. 기타
- 세종 시대의 황희, 동시대의 이원익, 정조 시대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꼽힌다. 행정, 군사, 외교 등 어떤 업무를 맡겨도 척척 해결해내는 인물이었으며 사람보는 눈도 대단히 뛰어나서 많은 인재들을 등용했다. 당시에도 명석함과 영특함으로도 소문이 자자해서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도저히 속일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 개인적으로는 바둑, 의술, 점술, 천문에도 통달하여 그와 관련한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의술에 대해서는 허준에게 조언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바둑은 국수(國手)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고수였다고 한다. 이여송과 선조가 바둑을 둘 때 바둑을 둘 줄 몰랐다는 선조를 위해 양산을 받치고 거기에 구멍을 내어 구멍 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선조에게 훈수를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29] 그 외에도 바둑과 관련된 일화들은 야사에 많이 전하나 기보 등의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객관적인 기력이나 실력을 짐작해 볼 수는 없다. 다만 평소 바보천치로 살던 형 류운룡에게 지기도 했다는 야담이나 일화도 남아 있다.
- 바둑 관련 야사로 전해지는 에피소드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류성룡이 상주 목사 시절에 한양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 와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고을에 복잡한 송사가 일어난 데다가 조정에서 사람이 와서 조정에 보낼 공문을 급히 작성해야 할 일이 겹치고 말았다. 하지만 류성룡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방과 형방을 불러서 송사의 판결문과 조정에 보낼 공문을 [구두로 작성하면서 손님과의 바둑도 계속 두었다. 결국 그 대국을 이겼고 송사 판결문과 조정에 보낼 공문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고 한다. 뒷날 류성룡의 후임으로 온 상주 목사가 이것에 감탄해서 자기도 류성룡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놓고 3가지 일을 동시에 시행하려 했으나 결과는 셋 다 실패.[30] 이는 야사이지만 그만큼 류성룡은 일 처리 능력이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보면 될 것이다.
- 류성룡의 형 류운룡은 동생과 같이 이황 문하에 수학한 문인이였으나 영의정에 오른 동생과 달리 음서로 올라 평생 한직을 전전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래서 동생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당대에도 퍼져있었던 듯하나 야사에서는 사실 동생보다 재주가 비상하고 뛰어난 인물로 나오고 안동 일대에도 류운룡을 소재로 한 전설이 많다. 류운룡은 평생 풍류를 즐기다 죽었는데 선비들의 이상향인 지리산 청학동을 찾는 데 주력했다고도 한다. 야사를 반영해 볼 때 학식은 있지만 관직생활에는 적성이 맞지 않았던 모양.
- 이런 전설들에서는 조정의 재상으로 활약하는 동생 류성룡과 은거기인으로 살아가며 음지에서 동생을 돕는 형 류운룡을 대비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비록 현실 정치에서 활약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은 류성룡이었어도 안동 지방이나 류성룡 일가의 고향이었던 하회 마을 입장에서는 종가를 잇고 있는 형 류운룡의 입지와 위상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의식이 '류운룡이 비록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동생보다 뛰어났다.'는 형태의 전설로 나타났다는 해석도 있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음관은 '문음취재'라는 별도의 시험에도 합격해야 했다. 즉, 최소한의 학식이나 업무 능력은 갖췄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선조실록>에서 류운룡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당시 류성룡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류영경 필두의 유당 측 인물들의 언급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 성품은 온화하여 남인의 영수라고는 해도 정작 본인이 당쟁의 선두에 나선 적은 없었는데 상대편 당수였던 정철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인들도 류성룡과 별로 불화가 없었고 그와 친밀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류성룡의 정치적 행적을 보면 서인보다 나중에 북인으로 갈라지는 동인 강경파와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류성룡은 대인 관계가 원만하기로 유명했지만 비타협적이고 강직한 북인의 중추였던 정인홍과는 앙숙 관계로 잘 알려져 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31]
- 이순신과도 친밀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 난중일기》를 보면 류성룡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이순신의 꿈에서까지 류성룡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각별한 사이였던 듯하다. 이를 증명하는 <난중일기>의 기록이 하나 있으며 이순신에게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일이 있는데 실제로 이날 이순신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점까지 쳐보며 류성룡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줬는데 이를 읽은 이순신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기록도 있다.[32] 그런데 정작 이순신이 선조에게 찍혀서 전란 중 갑자기 투옥되었을 때는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이순신의 탄핵을 거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류성룡의 위치와 입지를 고려해보면 충분히 이해갈 만한 부분으로 사적으로는 충분한 조력자였으나 공적으로는 그러지 못했다는 편이 맞으며 사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변호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이순신이 옥에서 나온 바로 다음 날 만난 사람이 류성룡인 것을 보면 이순신을 깐 것은 선조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함이라 보는 것이 옳을 듯.[33] 이러한 친분 관계 때문에 이순신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은 류성룡을 따르는 남인 계열 인사로 보았다.
- 《징비록》이 전후 일본에서도 간행된 탓인지 일본에서는 일본에 대해 서술한 책인 《 해동제국기》의 저자 신숙주와 더불어 조선의 정치인 중에서는 일본에도 잘 알려진 인물 중 1명인 듯하다. <징비록>이 그냥 일본에 넘어간 수준이 아니라 당대 일본에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으니 유명할 만하다.[34] 일본 서적 중에는 그를 '전시재상(戰時宰相)'이라고 소개한 책이 있는데 걸맞은 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 <징비록>에는 지병으로 치질을 앓아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가며 출근을 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으며 왜란기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자주 아파서 병석에 누운 적이 많았다고 한다.
- 안동에서 전해오는 구비전설에 따르면 6살 때 강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어와서 류성룡의 몸을 바위 위로 날려 착지시켜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바위를 '돌고지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 키가 장신이었다고 한다. 6척 장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키가 커서 나중에 사망한 후 제자들이 염을 하는데 너무 커서 방 안에 몸이 모두 들어가지가 않아 발목이 문 밖으로 나온채로 염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문하생들은 하염없이 통곡했다고 한다.
-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안동 병산서원은 많은 건축가들이 손꼽는 아름다운 서원으로 유명하다. 웬만한 고건축 서적에 병산 서원과 만대루가 빠지는 일이 거의 없으며 여름 내내 피고지는 목백일홍(배롱나무)로 한여름이면 꽃대궐 같은 풍경이 장관이다. 한겨울 눈 내리는 날의 병산서원도 고즈넉함이 일품.
- 한편 그의 다른 위패는 호계서원에도 있는데 이 위패를 어디다 두는가를 놓고 수백 년간 영남 유림 간의 논쟁이 생겼다. 자세한 것은 병호시비 문서 참고.
-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실장, 통일부 장관을 지낸 류우익과 풍산그룹[35]의 창업주 류찬우가 류성룡의 12대 손이다. 정치인 유시민은 직계 13대 손으로 장남의 요절로 종가를 이루는 차남 찰방공 류여의 자손이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 외무부 장관을 지낸 류종하[36]는 겸암 류운룡의 14대 손이다.
- 프로 바둑기사 류시훈 9단 역시 류성룡의 후손으로 찰방공 류여의 후손이다.
- 대한민국 해군에서 의도하지 않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을 너무 빨리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DDH-II)에 명명하는 바람에 상위 구축함인 세종대왕급 구축함( DDG-I)의 3번함에 서애류성룡함(DDG-993)으로 명명해 충무공 이순신을 임명해 지휘한 역사를 기리고 있다. 원래는 권율함으로 내정되었으나, 권율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대한민국 해군의 부정적 여론 때문에 상대적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친분도 있는 류성룡이 함명이 된 것. 참고로 세종대왕급 구축함의 2번함에는 반대측 붕당 서인에서 활동했었던 율곡 이이의 이름이 붙여져 율곡이이함(DDG-992)이다.
- 柳(버들 류)자를 쓰기 때문에 본래의 발음인 '류'를 쓸 건지 두음법칙을 따른 '유'를 쓸 건지 논란이 있는데 일단 柳씨 문중이 '류'를 사용하기에 주로 '류성룡'이라는 표기가 많이 사용된다.[37] 다만 조선 시대 인물이라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어떤 발음으로 불렀는지 알 수 없고 조선 시대의 한글 문헌에도 '유성룡', '류성룡', '뉴성룡' 등의 표기가 혼재된 만큼 본래의 한글 맞춤법 기준에 따라 '유성룡'으로 부를 때도 많다. 때문에 '유성룡'과 '류성룡' 중 어느 발음으로 읽어도 문제가 없다.
5. 대중매체
- 1985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배우 강성욱이 연기했다. 행재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주요 인물 비중으로 나오며 극 중 명나라의 민폐꾼들의 행각에 분노해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 게임 < 임진록> 시리즈에는 조선군 영웅으로 등장해 조선군 시나리오에서는 조선군 총사령관이다. 문관 캐릭터로 장풍을 쏴 공격하며 주변 유닛들의 방어력을 올려주고 '현혹' 기술을 사용하여 적군 유닛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처음 임진록2가 발매되었을 때에는 적 공중 유닛을 격추시키는 아이템 '공중탄'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패치가 되면서 다른 영웅들도 이를 쓸 수 있게 되어 엿을 먹었다. 2편의 확장판인 『조선의 반격』에서도 등장하지만 시나리오상으로나 존재감이 있고 게임상 운용은 잘 안하게 되는 편이다.[38]
- 게임 < 천하제일상 거상>에도 조선의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며 유생을 키우면 전직시킬 수 있으며 일러스트가 후덕하다. 특이하게 공중 공격이 가능하며 용잡이할 때는 필수. 전용 특수 기술로 포박술이 있어 몹들의 움직임을 봉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용병인 유생이 포박술을 쓰기 위해 필요한 고급 부채가 매우 비쌌던지라 싼 맛에 유성룡을 고용하는 유저들이 간혹 있었으나 고급파초선이 많이 풀리며 점점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포박술이 걸리지 않는 몹들이 많아지며 사실상 버려진 장수가 되었다. 선조의 영혼석(조선)으로 2차 전직도 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미실.
- 2004년 KBS 드라마 < 류성룡(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이재룡이 연기했다. 시작부터 이순신과 절친한 관계로 묘사되어 이순신에 대한 깊은 신뢰 아래 늘 뜻을 같이하며[39]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조력자가 된다. 조정에서 그와 관련된 논란이 일어나면 선조의 육탄 공격을 맞아가면서도 늘 이순신의 편에 서 주는데 나열해보자면 이순신이 이일에 의해 녹둔도 패전의 원흉으로 모함을 받았을 때 변호했고 전라 좌수사로 제수된 원균을 "그릇이 안 된다"며 파직시키고 이순신을 천거했으며[40] 좌수사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 수군 폐지를 막기 위해 궁궐로 올라와 선조의 어그로를 끌어 죽기 직전에 말렸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와 반대파의 이순신 공격에 적극 변호하며 이순신이 압송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직접 옥으로 찾아가서 울분을 토하는가 하면[41] 칠천량 해전 이후 선조가 직접 이순신을 거론하게 하여 복직에 힘을 써 주기도 했다.[42] 하지만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보류하자 그를 몰아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이순신이 수군만의 과거 시험을 선언하거나 명량 해전 직전 수군 폐지론이 거론될 때는 다른 중신들이 그러했듯 이순신의 선택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후 윤두수가 "원균도 이억기도 죽고 없으니 남은건 오직 한 사람 뿐"이라고 운을 띄우며 은근슬쩍 이순신을 거론하자 이에 빡쳐서 "어찌 그 입으로 감히 이순신을 거명할 수 있냐"면서 멱살을 잡는 등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준다.[43] 이순신과의 우정과는 별개로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명나라와의 교섭, 왜와의 담판, 전장 조율 등 여러 방면에서 유능한 면모를 발휘하는 인물이다. 이순신에게 집중하는 드라마임에도 이순신의 친우이자 조력자, 유능한 정승이자 노련한 정객으로써의 모습도 충실하게 다뤄지고 있다. 마지막 회에서 출전하지 말라는 선전관(=선조)을 무시하고[44]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 이순신을 변호하다 파직되며 은거해서 완성한 < 징비록>을 파직되기 직전에 세자 광해군에게 넘긴다.[45]
- 2010년 개봉한 영화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신정근이 분했는데,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정 대감 역할인 류승룡의 반대 당파 수장으로 나오며 통신사가 일본을 갔다온 시점에서 선조에게 "왜놈들이 쳐들어 올 리가 없다"고 한다. 바로 옆에 있는 신하가 "진짜로 쳐들어 오면 어떡해요?"라고 하자 뜻밖에 "와"라는 대답을 하는데 이유인 즉슨 "저 놈들 당론이 온다는데 아니라고 해야지". 이후 임진왜란이 개전되고 상대 당파에게 책임을 추궁당하는데 민심이 소란할까봐 그랬다고 헛기침하면서 뻔뻔스럽게 변명한다. 보다 못한 선조가 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치니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을 제시한다. 상대 당파에서 "육지는 신립, 바다는 원균"을 외치며 대립하자 선조가 "육지는 신립, 바다는 이순신"으로 타협안을 제시해서 찝찝하게 마무리. 이후 피난 종착지를 가지고 또 싸우는 등 대접이 시원찮다. 극 중에서 이름이 일체 언급되지 않으며 극을 주도하는 인물조차 아닌지라 류성룡임을 알아보는 시청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
2015년
KBS 드라마 <
징비록>에서는 배우
김상중이 연기했다.
류성룡(징비록) 문서 참조.
- < 대항해시대 시리즈> 중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선 한양의 NPC로 구현되었고 한양에서 1시 방향인 광화문 앞에 있다. 게임에서 조선어를 배우려면 유성룡에게 가면 된다. 또한 송산리 유적 메모리얼 보상으로 대장궁과 징비록을 주며, 조선 명물 요리 메모리얼을 완성하면[46] 지리학과 생존을 +1씩 올려주는 바지 저고리를 준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도 한양의 자택에서 후원자 NPC로 만날 수 있다.
[1]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영 최광수 화백은 류성룡 외에도
의천,
이규보,
허준의 표준 영정을 제작했다. 잘보면 이규보 초상 복붙이다.
[2]
율리우스력
11월 7일
[3]
어렸을 때 한성부 건천동(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에서 자랐으며,
이순신과 동네 친구 사이이다.
[4]
64년 6개월 24일 / 23,581일
[5]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의 기록 <우복집>에 의하면 병이 있어서 선조가 내의를 보내주었다.
[6]
≪주역≫의 현룡재전(見龍在田)에서 취했기 때문에 '이견'이 아닌 '이현'으로 발음함이 옳다.
[7]
키가 6척 장신 소리를 들을 정도로 키가 컸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진짜 키가 6척이 맞다면 당시 조선에서 1척이 보통 31.1cm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31.1*6=187cm라는 신장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용된 척의 종류가 다양했고 규격도 시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던데다 정작 류성룡 본인은 공문서에 군인의 신체 측정값을 주척(20.7~20.8cm) 기준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어떤 척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환산값은 달라질 수 있다. 신발 사이즈 주석 출처 링크 및
자(단위) 문서 참조.
[8]
출처
[9]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6대손.
광평대군 → 영순군 → 남천군 → 곤명군 → 이의번 → 이경 → 이씨부인.
세종의 13남
수춘군의 5대손.
수춘군 →
심순로의 처 이씨 → 곤명군의 처 심씨 → 이의번 → 이경 → 이씨부인
[10]
장남 류위가 일찍 죽어서 실제 장남은 전처의 차남 류여였다.
[11]
<
조선왕조실록>에 진짜로 이렇게 적혀있다.
[12]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김성일 왈 "스승님은 여태까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셨다." 김성일은 이황의 수많은 제자 중 1명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퇴계 이황이 "나는 이런 사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吾目中未見其此)"라 평가하는 등 수제자라고 봐도 될 정도의 인물이었다.
[13]
정확히는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의 친구였는데 이때 왕래하면서 안면을 트게 된 것 같다.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3살 많은데 다만 옛날 선비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망년지교'라는 말처럼 친구로 지낸 일도 많았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5살 차이인데도 서신을 보면 허물없이 자를 부르며 대화하고 있다.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의 경우 이항복과 허물없이 대화를 했지만 자를 부르지 않았다. 한음 이덕형은 엄연히 오성 이항복을 편지에서도 형이라 불렀고, 현대 한국 사회와 유사하게 형님동생하는 사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성과 한음이 동갑친구처럼 살았다는 것은 사료로도 증명될만큼 큰 오해이다. 요즘처럼 1살 차이도 서열을 따지는 건 오히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다.
[14]
기축옥사 때 박살난 당파는 바로 동인이었는데
이산해와 류성룡은 선조가 비호하여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정국이 서인 일변도로 가는 것을 경계하여 선조가 일부러 동인의 명망가인 둘을 비호해 줬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15]
북인은 서인을 개박살내고 싶어했고(
기축옥사 때 동인들 중에서도 훗날의 북인계가 더 피해를 입었기 때문), 남인은 대충 보스급만 몇 명 삭탈 관직하는 선에서 그치기를 원했다.
[16]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 파천하면서 원래 류성룡을 한양에 남겨 유도대장으로 삼기로 했던 것을, 당시
도승지 이항복이 반대 의견을 밝히며 동료였던 '노직(盧稙)'이라는 사람에게 한 발언이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류성룡 역시 선조를 호종하게 되고 유도대장은 이양원으로 교체된다.
[17]
류성룡이 저술한 《징비록》에 의하면 김성일이 "왜군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 이유가 "괜히 일 벌려서 쓸데없이 백성들 불안해 할까봐"라고 했는데 이것을 류성룡이 같은 당파였던 김성일을 변호하고자 넣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실제 류성룡과 김성일은 전쟁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임진왜란 직전까지도 계속했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에 대해 동인의 기반이던
영남의 사대부들은 집단으로 반대 움직임을 보였고 김성일 역시 이에 호응하여 "전쟁 준비는 그만두고 내치에 힘쓰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남의
사대부들에 대한 김성일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김성일은 민심을 다독이는게 아니라 전쟁 준비에 반대하도록 선동하는 쪽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졸전의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의 상상을 초월한 규모와
센코쿠 시대라는
일본사 희대의 난세를 거치며 다져진 이들의 전투력, 후일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빠른 진격 속도 때문이었다. 개전 후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서 류성룡의 일처리 솜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김성일은 잘못된 예측으로 전쟁 피해를 유발한 죄로 파직되었지만 다시 복직하여 임진왜란이 터진 후 최전선에 고충 처리반 역할로 파견되어 관군과
의병이 효율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속죄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다가 과로로 순직했다.
[18]
처음 서인 간관들은 이 당시
영의정 이산해만을 탄핵했지만 선조가 "전란을 막지 못한 건 이산해나 류성룡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이산해만 탄핵하느냐?"며 버럭하는 바람에 같이 파직되었다.
[19]
훗날
고종이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나라 군대에 파병을 요청했다가 일본군까지 참전하게 된,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20]
선조수정 7년 1월,
선조 7년 1월 21일,
선조 7년 3월 6일
선조 8년 10월 24일,
선조 14년 5월 24일,
선조수정 14년 5월,
선조수정 15년 9월,
선조수정 16년 4월
[21]
선조수정 27년 1월,
선조수정 27년 4월,
선조 27년 9월 20일,
선조 28년 8월 10일.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
선조 27년 11월 16일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
선조 28년 1월 24일,
선조 28년 2월 30일,
선조 28년 4월 19일,
선조 28년 7월 2일,
선조 28년 9월 24일,
선조 28년 9월 28일,
선조 28년 10월 17일,
선조 28년 11월 4일 공물을 일부도 대체가 불가능한 예산 규모인 1결당 2두를 책정해놓고 그마저도 군량미로 먼저 쓰려고 했었다.
선조 28년 10월 9일 대국민사기극이 따로 없었다.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
[22]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가 아직도 전란 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주요 원인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이나 제도상의 결함에 있었다기 보다는 유성룡의 말대로 방납·호우배의 이권회복 운동에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의 종식과 더불어 공납제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阿多介(虎皮방석) 1坐의 代價가 무명 200필(백미 70여 석)로 치솟는 가운데 농민은 날로 유망하여 갔고, “가난한 농민은 처자를 먹이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부자들 중에는 1년의 쓰임새가 쌀 수천 석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0941)0941)(趙 翼,≪浦渚集≫卷 2, 因求言論時事疏.) 극심한 빈부의 차이를 형성하여 갔다. 농민의 대대적인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위태로운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23]
선조 말엽부터
광해군의 집권 당파다. 소수파로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
붕당에 선명한 태도를 취했다. 대표적 인물은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이었다.
[24]
우연스럽게도 류성룡이 파직된 날과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날은 같은 날인 1598년 11월 19일이다.
[25]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26]
퇴계학파의 정통은 학봉 김성일의 학봉학파와 서애 류성룡의 서애학파로 이어진다.
[27]
십만양병설의 근거는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이 편찬한 <율곡행장>뿐이고,
광해군 때 편찬된 <
선조실록>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28]
징비록의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29]
다른 버전으로는 류성룡이 직접 선조에게 귓속말로 훈수를 했고 대국이 끝난 후 이여송이 "조선 말로 말씀을 나누시니 집중을 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훈수를 받으신건 아닌지요?"라며 따지자 선조는 "전쟁 중이라 전황이 자주 변하니 재상에게 전황의 변동을 보고받은 것입니다"라고 잡아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 류성룡은 일부러 비겨서 이여송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고 한다.
[30]
상추쌈 싸먹기가 추가되기도 하는데 이때는 후임 상주 목사가 상추 속에 바둑돌을 넣고 쌌다는 얘기도 나온다.
[31]
실제로 류성룡을 정계에서 축출해낸 사람도 정인홍이었다.
[32]
이 책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서 류성룡 본인이 직접 저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여러 병법서들을 류성룡이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비록 창안이 아니라 정리한 병법서라고는 해도 류성룡이 군사적 지식에도 전문가였음을 보여주는 부분. 《
징비록》에서도 군제 운영이나 성벽의 방비 방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으며 주목할 만한 의견도 있다.
[33]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의 사형을 주청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철저한 계산이라기보다는 이순신이 고문으로 반죽음 상태에 이른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바로 선조에게 달려가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두드려패냐고 항의하면서 어차피 죽일 생각이라면 편히 보내주자는 의미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 이후로도 겉으로는 이순신이 역도라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뒤로는
칠천량 해전으로 할 말이 없어진 선조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이순신를 복직시키도록 이끌어냈다.
[34]
조선 측에서 이를 경계하여 1712년에 징비록 수출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35]
비철금속 생산 전문 기업으로
대한민국 국군에서 사용하는 총알을 만드는 곳이다. 실제로 탄박스를 살펴보면 '로트 풍산 XXX...'라고 일련 번호가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36]
공식적으로는 유종하라고 사용한다. 인터넷에서 류종하로 검색하면 안 나온다.
[37]
특히 그 후손들은 예전부터 대부분 두음 법칙을 따르지 않고 한글로 '류'라고 써 왔고, 그 때문에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유'로 바꾸었을 때 반발이 심했다. 계속 정부에 개정을 요구한 끝에 2007년 8월 1일부터 규정이 바뀌었다. 자세한 것은
류(성씨) 참고.
[38]
그래도 시나리오상에서는 전작의 주요 인물이던
권율,
곽재우,
사명대사가 모두 존재감을 상실한 반면 류성룡은 역할이 지휘관이라서 살아남았다. 일본의 경우는
우키타 히데이에,
와키자카 야스하루,
사이쇼 죠타이가 빠졌고 명나라의 경우에는
심유경,
조승훈,
여여문이 미션에서 빠졌다.
[39]
대다수의 조정 대신들과
권율, 그의 부하 장수들과 군졸들까지도 이순신과 대립한 적이 있었지만 류성룡은
광해군,
정탁과 더불어 이순신과 직접적 갈등을 빚은 적이 1번도 없다. 굳이 들라고 한다면 명량 해전 직전에
수군 폐지론에 찬성한 것 정도인데 이순신의 안위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으며 작중에서는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설득하거나 이순신이 "서애 대감마저 내 뜻을 몰라주시는가"하고 실망하는 묘사가 다뤄지지는 않았다.
[40]
파직한다는 교서를 받을 당시 원균은 갓 취임하여 연회를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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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입지도 위험해 이순신을 적극 구명하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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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들고 직접
초계로 내려가기도 하는데 이 때
백의종군하면서 심신이 피폐해져 기절해 있는 이순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런 그에게 "다시 막중한 짐을 지우는게 너무 잔인하다"며 울분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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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선조가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명한다는 교지를 내리자 윤두수가 "류성룡이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평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누구도 이순신 이야기를 못하게 막고 결국 선조가 스스로 이순신을 거론하게 한 것"이라고 해설하는데 이를 근거로 보면 멱살을 잡은 것도 계산된 행동이었을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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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시킨 건 아니지만 부하들이 선전관을 감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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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이 쓰인 것은 1598년이 아니고 1604년이다. 물론 광해군이 즉위한 해가 1608년이니 세자 시절의 광해군이 <징비록>을 헌상받는 것이야
재현 오류가 아닌데 같은 화에 1598년 노량 해전이 나오는 걸로 보아 작 중에서는 '이 장면은 6년 뒤...'라고 생각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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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음식 판매원에게서 한 번에 사서 완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