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00년 3월 10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소련으로 가서 1929년 모스크바에서 동양학부를 졸업했다는 정보도 있다. 1930년 평양에서 양말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종사했으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4월 19일에 입소했다. 1935년에 출소하여 함경북도에서 적색농조운동을 전개했다가 또 체포되었다. 해방 후 출소하여 황해도에 정착했다.1945년 10월, 서북5도당책임자급당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 및 통제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조만식이 신탁통치에 반대하자 조만식을 반공반소분자로 몰아서 숙청하는데 참여했다.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11월 19일, 북조선인민회의 3차 회의에서 황해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도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남북로당 합동 전원회의에서 남북로당이 조선로동당으로 합당함에 따라 신설된 사회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김천해가 사회부장에 임명되면서 물러났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52년 즈음에 송봉욱이 후임 황해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신임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12월 22일, 최고인민회의 1기 6차 회의에서 리극로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리효순에게 검열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재선,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내각 로동상에 임명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응상, 리병남, 박문규, 박세창, 유철목, 정성언, 최재우, 최재하와 함께 북한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959년 8월 3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로동성이 폐지되면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1959년 10월 7일, 주소 북한대사 리신팔과 소련 외무성 부상 푸슈킨과의 대화에서 조선적십자협회 위원장으로 언급되는걸 보면 이때 숙청당한 것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확인되지 않으며 생사는 불명이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모스크바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직원들과 소련 외무성 극동과 직원들의 면담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