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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3333><colcolor=#fbe673> 배설
裵楔 |
|||
출생 | 1551년 ( 명종 6) | ||
경상도 선산도호부 | |||
사망 | 1599년 ( 선조 32) (향년 48세) | ||
한양[1] | |||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2] | ||
관직 | 합천군수, 선산부사, 경상우수사 | ||
가족관계 | 부친: 배덕문(裵德文) | ||
모친: 선산 백씨(善山白氏) | |||
남동생: 배즙(裵楫), 배건(裵楗) | |||
처:송원(宋源)의 딸 야로 송씨(冶爐宋氏) | |||
아들: 배상룡(裵尙龍), 배상호(裵尙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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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3333><colcolor=#fbe673> 본관 | 성주 배씨 | |
자 | 건부(建夫) | ||
시호 | 서강(西岡)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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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 자는 건부(建夫) 또는 중한(仲閑).임진왜란 당시 정3품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있었으며, 칠천량 해전에서 미리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12척을 끌고 탈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때 배설이 남긴 판옥선 12척에 신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끌고온 1척이 더해져 13척이 되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배설의 탈영이 조선 수군을 그나마 보전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순신은 그 13척의 판옥선으로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2. 생애
배설은 1551년 경상도 선산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명종 때 한성부윤을 지낸 배덕문(裵德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배건(裵楗)과 배즙(裵楫)이 있었다.[3] 정로위(定虜衛)로 복무하다가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 호방(虎榜)에 병과 45위로 급제하여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1592년(선조 25)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 종군했다. 조경이 황간·추풍령에서 왜군에 패하자 향병[4]을 규합하고 공을 세워 합천 군수에 제수되었다.
1592년 9월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김면(金沔)의 명령을 무시하였고 이 탓에 성주성을 공격하던 아군이 크게 불리해졌다. 김면 항목의 전투 일지 문단으로.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5]로 임명된 상태였는데, 배설은 "수령으로서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른단 말인가?" 라며 김면의 명령을 거부했다.[6]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겼다. 그러자 화가 치민 김면은 1593년 2월,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 군수 배설을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때 김면은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종2품)[7]로 승진한 뒤였다.
합천 군수, 부산진 첨사, 동래 현령, 밀양 부사를 거쳐 선산 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배설에게 상당한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했다. 이때 배설은 웅천을 급습해 꽤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여럿을 잃고 말았다.
칠천량 해전의 초반인 14~15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뒤,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들을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배설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7월 16일 일본군의 대선단[8]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9]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여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 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배설의 함대 외에도 잔여 조선 수군이 각자의 판단으로 뿔뿔이 흩어져 탈출하였으나, 함대 조직 및 명령 체계를 유지한 채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은 배설의 함대 뿐이었다.
배설이 경상 우수사로서 통제사의 명령없이 후퇴하면서 보존한 이 판옥선 12척은 훗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을 펼치게 된다. 전선이 없으면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으니 어떤 의미로는 12척의 판옥선을 남김으로써 이순신에게 역전의 기회를 남겨준 셈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배설은 싸움을 회피하고 전력을 남겨 전화위복의 여지를 만든 숨은 공로자였지만, 문제는 그 이후의 행적이었다. 이순신이 복귀해 내린 명령에 불복하고 탈영한 것이다. 배설의 탈영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에 관한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려서 이순신이 직접 군선을 찾아갔다. 이때 배설은 PTSD가 의심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배설이 자꾸 나약한 모습만 보이고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려 잠시 육지에 가겠다고 하자, 이순신은 한마디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장수된 자로서 함부로 먼저 혼낼 수 없다는 논지의 기록을 남겼다.[10] 그후 이순신의 심증은 적중하여, 배설은 탈영했다. 그 와중에 일본군 점령지를 단신으로 돌파해 고향인 경상도 선산으로 달아났다.[11]
칠천량 패전 이후 배설에 관한 난중일기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월 21일 양력 9월 2일 <경자> 맑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7월 22일 양력 9월 3일 <신축> 맑다. 아침에 경상 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8월 12일 양력 9월 22일 <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 나절에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경상 수사 배설이 겁을 내는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르치는데, 조정에서 살피지 못 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8월 17일 양력 9월 27일 <을해> 맑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12] 장흥의 군량 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가는데, 마침 그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8월 18일 양력 9월 28일 <병자> 맑다.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은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8월 19일 양력 9월 29일 <정축>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13] 그 업신 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14] 8월 27일 양력 10월 7일 <을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8월 28일 양력 10월 8일 <병술> 맑다.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 30일 양력 10월 10일 <무자>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15] 9월 2일 양력 10월 12일 <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 수사 배설이 도망쳤다. |
8월 12일자 기록에 따르면 배설이 겁내었던 정황이 있었고,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대도륙을 당할 때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철수시킨 것은 배설의 객관적으로 전황을 판단해서가 아니라[16], 단순하게 겁을 먹고 적전 도주한 것이라고 볼 근거가 된다. 또한 그가 탈영하기까지 기록을 토대로 보면 배설은 전선을 수습해온 공은 있지만 명량 해전이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대패의 근본적인 원인인 선조에 대한 불신[17][18]에 더해 칠천량 해전에서 얻은 PTSD까지 겹치면서 그가 탈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고위 지휘관이란 사람이 전시에 탈영을 해버렸으니 열받은 도원수 권율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고, 배설은 숨어살다가 왜란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인 1599년에 고향 경상도 선산군에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배설의 죄목은 전시 탈영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모아 이상한 짓[19]을 꾸몄고 조정에서 배설의 부친과 아들 배상충을 붙잡아 인질로 잡은 후[20] 배설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한다.
다만 칠천량 해전에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전력을 보전하고 나온 배설이 명량 해전을 기피한 건 이해가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 불과 한달 전까지 어이없게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해 함대의 90%가 날아가고 동생은 전사하고 자기도 구사일생을 겪었던 배설이 남은 10% 수준의 전력으로 지난번보다 많은 적을 상대하자는 인간을 만났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이순신이 통념을 뛰어넘는 초인이어서 이긴 거지, 당시에도 이순신 빼고[21][22] 조선 수군과 백성들, 조정, 명군, 일본군을 포함한 모두가 이건 절대 못 이긴다고 여기고 있던 상황이라, 명량 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든 수군 장수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이순신이 혼자 일본군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육군 소속이었던 안위가 처음 부름에 응답한 뒤에야 뒤이어 돌격했다. 그동안 곁에 동행한 장수들도 이런 지경이었는데, 이전의 참패를 직접 겪었는데다 한 번도 같이 싸워 본 적이 없는 이순신 하나만 믿고 목숨을 건다는 건 누구도 손쉽게 시도할 수 없는 일임이 당연하다. 명량 해전은 학계의 연구가 계속된 현대에도 승리의 요인이 지형도 무엇도 아닌 그저 이순신 하나로 요약되는 전투이다. 즉, 이순신이 불세출의 초인이었고, 배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적인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으로 배설을 완전히 옹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배설은 단순한 소시민이 아닌 전시에 군인들을 지휘하는 수군절도사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휘관도 아닌 정3품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현대로 치면 중장에 해당하는 장군이 적군이 무섭다고 혼자 도망친 격이다. 물론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라는 의견도 많지만, 그건 병졸이나 하급 장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정 3품의 고위 지휘관이라면 본인이 얼마나 두렵고 어처구니가 없었던들 탈영 따위의 무책임한 행위를 벌여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23] 따라서 그의 정신 상태를 고려해 탈영행위의 당위성을 파악할 수는 있어도, 그가 사형을 받을 만한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24] 정말로 본인이 싸울 수 없는 심리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직위에서 물러나고 자신에게 있는 지휘권을 이양하는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물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였을지는 별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25]
3. 사실 유능한 사람
명량 해전 이전 자신의 군함을 바치고 도주하다 처형당한 최후의 행보가 인상깊었기에 일반인들에게는 속된 말로 "배 셔틀" 인식이 강한 인물이지만,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배설은 유능한 사람이었다.실록에 따르면 배설이 진주 목사로 있다가 경상우수사로 발령나자 진주 백성들이 두달 넘게 떠나지 못 하게 막았다는 일화가 있으며, 이 사건을 두고 3차례 논의가 오고 갔다. 칠천량 해전에서도 일본군 함선 8척을 대파시켰고[26] 중과부적으로 이탈할 때도 전선을 수습하여, 병기를 처분하고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전력을 보존했다.
적전도주죄 자체는 명백한 과오지만, 그가 남긴 12척의 함선이라는 공과가 이순신의 손에서 명량 해전이라는 대승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참작해서, 후대에 와서 그가 쌓은 공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원종1등공신(原從一等功臣)[27]으로 증직[28]되어, 사후 11년 뒤 1610년(광해군 2년)에 신원(伸寃)[29]되어 가선대부 병조판서(현 국방부 장관)에 추증되었다. 심지어 사후 추증이 한 번에 그친 게 아니라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되었다. 전후 적전도주죄로 처형당하는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았음에도 사후에 무공을 인정받아 두 번이나 병조판서에 추존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한 번의 고비만 어떻게든 넘어갔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무의공 이순신처럼 충무공이 언급될 때마다 같이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으로 높아졌겠지만, 결국 멘탈이 깨져서 탈주해버리는 바람에 이미지를 망쳐버린 비운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분명히 적전도주죄라는 전시상황에서 최악의 과오가 있었음에도 후대에 병조판서로 2번이나 추존된 것을 감안하면, 두려움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무릅쓰고 김억추처럼 전투에 참가하여 후방에 있기만 했어도 조선 수군의 구원자라는 불멸의 영예를 얻었을 것이니, 이래저래 안타깝다.
4. 여담
여러모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노먼 다이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대중 매체에서의 취급과 실제 모습이 조금 다르며, 상관의 잘못된 지휘 때문에 졸전에 휘말렸지만 그 와중에 기록으로 공인된 전과가 상당하다는 것도 비슷하다.5. 대중매체에서
공식적인 기록상 칠천량 해전의 초기 대응 멤버였고 왜선을 가라앉힌 전과도 올렸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한 일 중 중요하게 평가받는 부분은 명량 해전의 기반이 되는 "12척을 끌고 퇴각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명량 해전 직전에 탈영했기 때문에 '도망치기 전문'이라는 이미지도 있어서 비겁한 사람으로 나오기도 한다.- 김성한의 장편 소설 《 7년전쟁》에서는 죽기 싫으면 싸게 싸게 도망가라고 선동한다. 나름대로 능력과 공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해서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으로 나온다.
-
김훈의 소설 《
칼의 노래》에서는 등장하는 시기는 짧지만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나온다. 허리에 병이 있어 선조의 조서에도 절을 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서, 조서를 다 읽은 이순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강렬한 문답을 남긴다. 바로 아래의 《불멸의 이순신》에서 남긴 대사의 원본이 이것.
"통제공, 무운을 비오."
(존망에 길에, 운세란 없는 것이오. 아시겠소? 배수사.)
"통제공, 용맹할 때는 용맹하고, 겁을 낼 때는 겁을 내는 것이 병가의 전략이라 알고 있소만……. 그게 바로 무운이라는 것 아니겠소."
(그래, 지금은 그 어느 때요?)
"허허, 그야 통제공께서 판단하실 일이 아니겠소. 저처럼 병든 몸이 어찌……."
(칠천량에서는 마땅히 겁을 내야 할 때였소?)
"용맹과 겁은 흔히 같은 것이오. 다만 쓰일 때가 다를 뿐이오. 송장에 덮인 바다 위에서 목숨의 귀함을 깨닫는 것 또한 용맹이오. 용맹은 인(仁)에 가까운 것이오. 아시겠소? 통제공. 그게 오묘한 말이오. 이거다 저거다 말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니 병법 아니겠소.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것은 내가 빼돌린 전선과 수졸 들뿐이오. 통제공께 다 드리리다. 그나마 통제공의 홍복이고 무운으로 아시오."
이순신은 배설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이 자를 베어야 한다며 몇 번이고 속으로 고뇌하며 '칼이 울었다'라고 표현했으나, 그가 감춰놓은 전선을 생각하며 애써 칼을 거둔다. 그 날 밤 배설은 탈영했지만 이순신은 연안을 다 뒤져 그가 숨겨놓은 배를 찾아낸다. 노가 좀 부러졌을 뿐 총알 자국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칠천량 해전 초기에 진즉 물러난 것으로 보였다.
이후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뒤 선조가 이순신에게 선전관 이원길을 보냈으나, 그는 "전하께서는 달아난 배설 때문에 근심이 깊다."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배설을 잡으려면 여기가 아니라 그의 본가로 가야 하지 않냐고 의문을 표하자, 이원길은 배설이 그의 고향에도 가지 않았으며, 그가 담력 있는 인물인데다 따르는 장졸도 많았기에 달아난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른다는 것이 전하의 근심이라 대답한다. 그리고 대놓고 이순신이 배설을 숨겨놓은 게 아닌지 탈영 여부를 열흘 간 샅샅이 조사한 뒤 돌아가는 모습으로, 선조가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후 언급이 없다.
-
적이 강한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어찌 진격만이 전략이란 말이오이까? 퇴각도, 전략이에요 전략!
― 본작의 배설을 상징하는 대사
안 되는 싸움이야⋯. 개죽음 당하고 싶은가!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황범식이 연기했다. 원균이 신임 통제사가 된 이후로 등장하며 적에게 쫄아서 교전을 회피하는 겁쟁이 장군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된다.[31] 부산의 적을 치기 위해 출전했다가 함선이 풍랑에 휩쓸리고 가덕도에 상륙한 병력이 몰살당하자 강력하게 퇴각을 주장하더니 결국 자신 휘하의 함선을 전부 끌고 진영을 이탈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함대가 전멸하자 멘탈이 나갔는지 술이나 퍼마시는데 뒤늦게 이순신이 남은 함대를 인수하려 하자 "내가 최고 지휘관이고 이순신은 역도"라고 무시하면서 인계를 거부하지만[32]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자 바로 태도가 바뀌어 회령포에 함선을 숨겼음을 시인한다. 이후에도 칠천량에서 그랬듯 하루종일 퇴각만 주장하며, 조정에서 수군 철폐령을 내리자 매우 반기지만 조정에서 결국 수군 철폐령을 거두자 갑자기 "우리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자들"이라며 또 태도가 180도 바뀌더니 그날 밤 협선을 타고 탈영한다. 상황에 따라서 태도가 휙휙 바뀌는 등 찌질해보이는 면이 많이 부각되는데, 그렇게 퇴각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상관이 결전을 벌이기로 하면 별 말도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지면서 뒷담만 늘어놓는다. 반대로 하급자인 우치적이 자신보고 탈영을 했다고 비난하면 당당하게 "함대를 살린 것"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면서 괜히 애먼 동료 장수들에게만 큰소리를 친다. 왜 퇴각을 해야 하는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거의 개그 캐릭터 수준.
-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어느 정도 개념이 잡혀있는 캐릭터로 나온다.[33]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 사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자신이 지휘한 판옥선들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에게 합류하지만 명량 해전에 앞서 선조(조선)에 대한 반감과 지휘권 분열에 대한 우려[34] 때문에 몰래 도주하는걸로 말을 맞추고 고향으로 돌아가는걸로 나온다.[35]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 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 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으며 배설을 미화하고 자빠졌다. 애당초 배설이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렸다는 이야기는 어떤 근거도 없는 김경진의 창작이다.
- 임영대의 대체역사소설 《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인물 해석이 긍정적인데 '불순한 뜻으로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하여 권율에게 잡히는걸 피한 후 역모를 위해 정여립, 이몽학 등 여러 역모와 반란 사건의 잔당 등을 규합하였다가 이순신이 군사를 일으키자 육지에서 호응해 이순신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한양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나온다. [36][37][38] 온건한 이순신과는 달리 조선 왕실 자체를 혐오하는 강경파지만 함경도에서 선조와 정원군의 요청으로 들어온 여진족을 상대로 무모하게 진격하다가 전사한다.[39] 그리고 자신이 죽기 전에 임종을 지키던 이순신한테 '이 나라의 백성들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 반정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이 이순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 명량》에서는 배우 김원해가 연기했다. 전형적인 소인배로 배 12척을 남겨준 것을 강조하지만[40]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순신을 암살하려 하고 건조 중이던 구선에 불을 지르는 등의 패악질을 끼치고 자신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하지만 안위의 활에 맞아 쓰러진다. 이 영화를 바탕으로 나온 소설판에서는 활을 맞지 않고 도주했으며 이후 권율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300냥을 내걸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냥 한 번 더 탈영한 겁쟁이 정도였던 것과 달리 이순신 암살 시도 등 온갖 막장 행위를 한 인간 쓰레기로 묘사했다는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배설의 후손들이 제작사인 CJ엔터테인먼트를 사자명예훼손죄로 소송을 걸었지만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관련 영상 일본 더빙판 성우는 명탐정 코난의 럼, 원피스의 버기 등으로 잘 알려진 성우 치바 시게루가 목소리를 연기했다.
- 웹툰 《 은하!》의 작가 그리폰은 배설의 행적을 재해석한 《 배설전》을 그렸는데 여기서는 철저하게 생존을 추구하여 생존이 걸린 사안에서는 두뇌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덕분에 칠천량 해전에서 유일하게 적을 격퇴한 전과가 부각되었고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는 초인으로 각성하여 길을 뚫고 지나가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명량 해전에서는 '이순신 혼자서는 전황을 뒤집을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으로 탈영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워낙 초현실적인 역량의 인물이었기에[41] 결과적으로 단 1번의 틀린 판단으로 처형당한다.
[1]
1599년 경상도 선산에서
권율에게 체포되어 한양에서 참형되었다.
[2]
1873년(고종 10)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3]
배즙은 형 배설처럼 조방장으로 수군에 참전했는데, 칠천량 해전 때 전사했다. 답이 없는 전투에 남은 배를 끌고 한산도로 가서 백성을 태우고 탈영한 셈인데 후술할 배설의
PTSD로 의심되는 행각의 원인 중에는 동생의 죽음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4]
중앙 관군이 아닌 의병이나 지방의 병사
[5]
조선 시대에 있던 관직으로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의 무관이다.
[6]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 의하면, 군수는 종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었다.
[7]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으로 병사라고도 한다.
[8]
엉겁결에 조선 함대를 공격한 것은 세키부네 60여척이었다. 이후 후발대가 도착하였으나, 배설은 그보다 일찍 전장을 벗어났으므로 실제로 '대선단'을 보지는 못하였다.
[9]
처음부터 관망만 한 것은 아니고 16일 새벽 최초의 공격에서 배설만이 유일하게 적선 8척을 격파했다. 허나 이후 전황이 글렀다고 보았는지 멀찍이서 관망하다 후퇴한 것.
[10]
무엇보다 이순신 자신 또한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에는 상선에서 내려서 육지 진영에서 머물고는 했으니,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에는 PTSD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특히 PTSD라는 병은 몇백년 뒤인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베트남전이 지나고 용어가 고정되었다. 한국은 2003년 이후부터 점점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는 병이 되었다. 당연히 조선에서는 이런 병에 대해 알리가 없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선조 실록 60권
#에서 ‘맹장(猛將) 배설이 수질(水疾, 배멀미)이 있다’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난중일기 8월 21자에도 '배설이 제 종(奴)을 시켜서 자신의 뜻을 밝힌 글인 소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몸조리를 하겠다고 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11]
이런 일화 때문에 사실 단신으로 일본 대군을 돌파할 수 있는 인간흉기 아니냐는 드립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왜군의 눈을 피해 숨어서 밤중에 이동하는 식으로 돌파했을 것이다. 정충신이 권율의 승전보를 의주 행궁까지 전달하기 위해 일본군 점령지를 돌파한 방법도 이런 식이었다. 물론 이렇게 적지에서 잠행하는 것도 그냥 적이 보인다고 숨으면 되는 쉬운 일은 아니니 그가 나름대로 유능한 장수라는 증거는 맞다.
[12]
명량 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판옥선 12척을 말한다.
[13]
교서는 임금의 명령을 담은 글이므로 그 자체에도 예를 갖춰야 하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다. 사극을 보면 누군가 '어명이요~'하면서 종이를 가져 오면 다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걸 볼 수 있다. 즉 이때의 배설은 임금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14]
난중일기에서는 이 구절의 바로 다음에 이방과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나오는데, 정황상 경상 우수사였던 배설을 직접 처벌하긴 곤란하므로 그 아랫 사람인 아전들을 대신 처벌한 것으로 보인다.
[15]
이렇듯 이전의 기록과 이날의 기록을 보면 배설에게 딱히 다른 깊은 뜻이 있던 게 아니라 공포증을 보이고 있어 그냥 냅다 도망칠까 궁리하는 걸 의심했던 것이 이순신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
배설이 적전도주한 것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참패했을 때가 아니다. 1차 교전 뒤 배설이 적전도주한 후 조선군이 참패한 것이다. 즉, 이미 사전에 수차례 참모들의 퇴각 권고를 무시했다가 이 사단을 낸 총사령관 원균이 패전의 가장 큰 책임자이며, 전투 중간 퇴각함으로서 나머지 병력을 버려 피해를 키운 배설은 해당 참패에 대해 그 다음으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남아서 싸웠다 한들 전황을 뒤집기는 커녕 이억기처럼 전사했을 확률이 더 높긴 하지만 말이다.
[17]
임금의 교지에 숙배하기를 거부한 것. 이순신 장군이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고 했을 정도로 커다란 불경죄다.
[18]
후대에서야 이렇게까지 선조를 옹호해주는 이순신이 별종으로 보이지만
난중일기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이순신은
선조가 본인을
백의종군시키기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전라좌수사로 만들어준
선조를 은인으로 여기며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었고 해당시점에서는 충성심이 예전같지는 못했겠지만
선조의 은혜를 입었던 사실이 없어지는것은 아니기에 충성심을 아예 버리지는 못했을것이다.
[19]
역모를 꾸몄다는 보는 견해도 있으나, 후대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증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 모함설이 성립하려면 배설이 군을 지휘하기 힘들 정도의 병중에 있었다는 의미이므로, 지휘권을 넘기지 않은 것은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20]
배설의 부친과 아들 배상충은 배설이 처형되고 나서 풀려난다.
[21]
난중일기에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라고 기록되어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들어 운이 좋아서 이겼다고 쓴 걸 보면 본인도 승리를 확신했던 것 아니고, 이 정도면 승산이 0인 건 아닌데? 잘 하면 될지도 모를듯? 수준이었던 걸로 보인다. 거의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시나리오를 현실화한 거니 유능할 뿐인 일반인인 배설 눈엔 그냥 전멸각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22]
사실 배설만 도망쳐서 그렇지 명량 대첩에 참가한 다른 장수들도 두려워서 반은 발을 빼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상황이 의외로 좋게 돌아가고 이순신 장군이 뒤에서 참여를 독려하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전한 것이었다.
[23]
그도 그럴것이 배설같은 고위 지휘관이 탈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병사들 사기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지휘관은 병사들을 책임지는 자리이므로, 배설의 탈영 행위는 자신이 살겠다고 병사들의 목숨을 내팽개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24]
정 싸움에 임할 만한 정신이 안 됐다면 차라리 명량 때 그냥 뒤에서 자리만 지켰어도 됐을 것이다. 어차피 명량 해전은 누가 봐도 개죽음을 당한다고 여겨질 만한 특수한 상황이었고, 이순신도 이를 인지했던 지라 뒤에서 머뭇거린 장수들 중에 처벌받은 사례는 없었으며,
김억추가 이런 식으로 버텨낸 후 육군으로 전출하기도 했다.
[25]
당장 원균이 미적거리자 권율이 치도곤을 때린 것에서 보이듯이, 전선의 장수들이 공세로 나서지 않는다고 닦달하던 조정에서 '나 더 이상 못싸우겠소'라고 한들 그를 후방으로 보내고 지휘권을 이양해 줬을지는 의문이다.
[26]
놀랍게도 이게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거둔 거의 유일의 전과이다. 그러니까 원균은 단 1척의 배도 못 격파하는 동안 배설은 휘하 12척으로 8척이나 격침시킨 것이었다.
[27]
정공신 다음 등급의 공신
[28]
죽은 후 벼슬을 높여줬다. 추서와 비슷하다.
[29]
억울함이 풀림. 현대어에서는 '복권'이 자주 쓰인다.
[30]
명량 해전 직전에도 한번 더 시전하고 탈주한다.
[31]
아무래도 주인공이 이순신이다보니 일부러 배설의 공은 축소하고 과만 부각시킨 듯하다.
[32]
실제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12척의 함대를 가지러 갔는데 배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괘씸하다고 까는 내용이 있다.
[33]
김경진의 의견에 따르면 그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던 시절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하였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 정도 해결시켰다고 말한다. 이 중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했다는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데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나머지는 숨겨두고 판옥선 6~7척만을 사용했을 뿐이지, 원래 경상우수영이 가진 판옥선은 25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원균이 숨겨뒀던 판옥선을 꺼내기만 하면 됐다.
[34]
당시 두 사람은 품계(=계급)가 같았다. 당시 삼도 수군 통제사는 별정직인지라 품계는 수군 절도사와 차이가 없었으나 이순신은 그 전에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았었기 때문에 그동안 지휘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복직시키면서 본래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가 아닌 수군 절도사와 같은 정3품 절충장군 품계를 주었다.
[35]
그런데 배설같은 고위 지휘관이 탈영하면 병사들 사기가 떨어져 지휘 혼란 이상으로 아군에 악영향을 끼치니 이건 억지로 배설을 미화하는것이며 어떤 인물이든 공은 공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봐야지 과오를 미화하는것은 잘못된 것이다.
[36]
어디까지나 소설을 위한 설정일뿐 실제 배설이 역모를 계획했는지는 불확실하며 모함당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실제로
칠천량 해전사후
PTSD증상을 보일정도로 정신상태가 좋지 않던 배설이 역모를 계획할 겨를이 있었을지는 의심스럽고 사후 조선 조정이 원종 1등공신에 봉하여 조정에서도 그 공이 작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였는데 역모를 꾸몄다면 불가능하다.
[37]
또한 배설 본인이 개인적으로
선조(조선)에게 반감을 가질수는 있어도 역모를 꾸미기에는 명분이 부족한것도 문제인데
토목의 변[42]이라는 추태를 보여
선조(조선)이상으로 입지가 위태롭던
정통제도
탈문의 변으로 복권에 성공했고 마찬가지로
삼전도의 굴욕이후
선조(조선)보다 입지가 위태롭던 인조도 죽을때까지 왕자리를 유지한것에서도 보이듯이
칠천량 해전에 대한 책임은 후대에
선조(조선)가 욕먹는 원인이긴하나 당대 지배층에게 반정하더라도 폭넓은 지지를 받을 정도의 명분은 못된다.
[38]
이몽학의 난에서도 보이듯이 초반에 선전해도 지배층의 지지가 없으면 끝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39]
여진족들이 조선 민간인들을 잡아다 인간 방패로 삼은 것을 보고 빨리 구출하려는 조급함 때문에 무모하게 진격했다.
[40]
안위가 "칠천량에서 그리 도망쳐나오고도 부끄럽지도 않냐."고 추궁하자 역정을 내며 "내가 그리 빠져나왔기에 시방 저 12척이라도 남아있는 것이다."라며 반박한다.
[41]
해전에 이골이 났다는 이유로
토끼공듀로
패러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