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2:31:12

이봉상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순신 원균 이순신 이시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류형 이경준 이운룡 이기빈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이경준 우치적 성우길 이정표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이영 류지신 정기룡 김예직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정기룡 원수신 구인후 이수일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이항 구굉 신경원 변흡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구인후 신경인 윤수 신경인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류림 류정익 이곽 류림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이현달 이완 김응해 류정익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황헌 이원로 남두병 류혁연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정익 조필규 김적 박경지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김시성 정전현 박경지 이지형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이도빈 류비연 김경 류여량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신여철 이지원 노정 신유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윤천뢰 이인하 전동흘 민섬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원상 변국한 김세익 류중기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이세선 신여철 이성뢰 심박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목림기 최숙 김중기 이기하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정홍좌 이홍술 민함 류성추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원덕휘 홍하명 이창조 이상전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남오성 오중주 정홍좌 조미중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김중원 이우항 이석관 이택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윤의 이상집 오중주 김중기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이수민 이봉상 신익하 남태징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윤오상 이재항 이복연 김흡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이수량 정수송 박찬신 김집
제105대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윤택정 구성익 조경 송징래
제109대 제110대 제111대 제112대
이우 이의풍 이언상 장태소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제116대
정찬술 구선행 조동점 김윤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이장오 이경철 오연제 이윤성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이태상 이은춘 정여직 윤태연
제125대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이주국 이한응 이국현 장지항
제129대 제130대 제131대 제132대
원중회 조제태 구현겸 조완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제136대
이방수 이창운 장지항 이경무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서유대 신대겸 구이겸 이한창
제141대 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이방일 김영수 류진항 심대겸
제145대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조심태 이한풍 신응주 이윤경
제149대 제150대 제151대 제152대
서유방 이득제 신대현 이득제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제156대
이유경 윤득규 임률 이인수
제157대 제158대 제159대 제160대
이윤겸 류효원 이당 신대영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오재광 조계 서영보 신홍주
제165대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서춘보 오의상 신경 박기풍
제169대 제170대 제171대 제172대
조화석 이석구 이유수 김영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제176대
이항권 류화원 이완식 임성고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이정회 이승권 이응식 허계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백은진 서상오 김건 류기상
제185대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이응서 이규철 김한철 이희경
제189대 제190대 제191대 제192대
류상정 임태영 심락신 이경순
제193대 제194대 제195대 제196대
신관호 정규응 이재봉 김건
제197대 제198대 제199대 제200대
이현직 이현직 정규응 채동건
제201대 제202대 제203대 제204대
이주철 권용섭 이종승 신환
제205대 제206대 제207대 제208대
이규석 정낙용 정기원 이원회
제209대 제210대 제211대 제212대
정운익 이규안 민경호 정기택
제213대 제214대 제215대
민형식 민영옥 홍남주 }}}}}}}}}

이인좌의 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주동자 <colbgcolor=#fff,#1f2023> 이인좌
조선 정부 국왕 영조 · 오명항 · 박문수 · 조문명 · 이삼 · 조현명 · 이봉상
반군 지휘관 이인좌 · 비정통 국왕 밀풍군
정희량 · 박필현 · 정세윤 · 신천영 · 이기좌 · 이사성 · 김중기 · 남태징 · 정사효 · 심유현
}}}}}}}}}
<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이봉상
李鳳祥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92212840000500_P2.jpg
교토대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이봉상의 초상화
출생 1676년
충청도 아산현
(現 충청남도 아산시)
사망 1728년
본관 덕수 이씨[1]
의숙(儀叔)
부모 아버지 이홍저
가족 숙부 이홍무
아들 이한필

1. 개요2. 생애
2.1. 죽음2.2. 사후
3. 유물4.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신.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다.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에게 피살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소론 반란 세력인 이인좌의 반란군에게 살해당했지만 당색은 소론이었던 걸로 보인다.[2]

2. 생애

1676년(숙종 2) 충청도 아산현(현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상주 진영장(尙州鎭營將:정3품)을 지낸 이홍저(李弘著)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사용(副司勇:종9품)을 지내다가 27세 되던 1702년(숙종 28) 알성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했다. 경종 포도대장(종2품),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정3품), 제94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 총융사(종2품), 한성부 우윤(右尹:종2품)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이 무렵 사헌부에 탄핵을 받았는데 영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봉상(李鳳祥)은 지난날 흉당(凶黨)들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이미 불러다 빌붙었다는 꾸지람이 있었는데, 지금 조정이 청명한 때에 이르러서도 음흉하고 교사스런 짓을 한 자취가 많습니다. 군부(軍府)의 재화(財貨)를 마구 남용하여 죄를 받고 귀양가 있는 흉도(凶徒소론)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으며, 군부의 중요한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감(都監)이 장차 폐국(廢局)되는 지경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봉상(李鳳祥)을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요약하면 "이 인물은 지난 정권때 아부해서 욕먹은 적이 있었는데, 군대 비품을 함부러 남에게 주는데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해야할 일을 안하고 있다. 그래서 훈련도감이 혼란스럽게 되버렸으니, 이런 무능한 인간을 쓰면 안된다."는 거다. 뚜렷한 잘못도 없는데 무능을 이유로 파직하자고 한걸 보면 어지간히 무능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론 정권 하에 있었던 사람, 그것도 소론 강경파와 연관이 있었던 사람을 군부의 요직에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이유로 탄핵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정치적 탄핵을 해야겠는데, 뚜렷이 잘못한게 없으니 '무능'을 들고 나올수밖에 없다. 다만 이후에도 파벌을 만들고 군대 물자를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한다고 한 차례 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행정과 경제구조의 특성상 관물의 출납이 애매한 경우가 많고, 군대의 경우에는 자기 사람을 심는 것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이걸 정치적으로 걸고 넘어지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결국 트집이다.

1725년(영조 1), 형조 참판(종2품)에 임명되고 훈련대장(訓鍊大將:종2품) 및 금위대장(禁衛大將:종2품)을 겸임하였다. 정미환국 시기에 밀려나서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나갔다.[3]

2.1. 죽음

1728년(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포로로 잡혔다. 이 때 이인좌는 상여에다가 병기를 실어 청주 경내에 들여보냈는데, 민간에서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하고 이봉상에게 보고한 병사도 있었으나 이봉상은 이를 믿지 않았다.

결국 성 안의 관리들 가운데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고, 밤중에 적이 쳐들어오자 영기(營妓, 병영 소속의 기생) 월례(月禮)[4]와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고 적군을 끌어들였다.[5] 이봉상은 밤중에 당황하여 침상 머리에 두었던 칼을 찾았으나 월례가 숨긴 탓에 찾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나와 칼로 위협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봉상은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라고 세 번 외치고 살해당했다.

충청병영 소속 군관이던 홍림(洪霖)[6]이 달려와서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내가 진짜 절도사다."라고 외쳤는데 적이 끌어내서 항복하라고 협박했지만 그 역시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는 "너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니 죽인다. 일이 성사되면 후손을 녹용(錄用, 사람을 골라서 씀.)하겠다."고 칭찬했으나 홍림은 "나는 아들이 없지만 있어도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지 않는다!"[7]고 소리친 뒤 죽었다. 이 때 청주영장 남연년(南延年) 역시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8], 어찌 개새끼(狗子)[9]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고 하며 죽었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에서 돌아와 그 순절을 전했다.

이봉상의 숙부 이홍무(李弘茂) 역시 이 무렵 64살의 노구였는데, 반란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으며 역시 벼슬이 추증되었다.

나중에 박문수의 보고에 따르면, 군관 홍림의 해월(海月)은 본래 충청 병영에 있던 기생이었다가 홍림의 첩실이 되었는데, 병영이 함락되고 이 소식을 알게 된 해월은 몰래 뇌물을 주고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서 장사지내주려 했다. 이때 이봉상 역시 들어갈 관이 없이 방치된 것을 알자 홍림의 시신은 베로 싸고 이봉상의 시신을 관에 넣어 숨겼다고 한다. 이후 해월은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하여 면천되었다. 홍림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그녀는 유복자로 아들을 낳아 키웠는데 그만 아들도 7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절망한 그녀는 삶의 희망을 잃고 스스로 남편과 아들의 뒤를 따랐으며 이후 열녀로 받들어졌다.

2.2. 사후

영조는 이봉상을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헌종은 청주목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라 하여 충민공이라 부른다. 나중에 조상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그와 함께 순절한 홍임, 남연년 등도 같이 있다.

3. 유물

교토대학 박물관에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으며, 육군 대학 박물관에 투구가 보관되어 있다고 전한다. 블로그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자리한 충무공 이순신 묘소 앞에 이순신의 신도비와 함께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가 서 있다. 원래는 그 뒤로 그의 묘가 있었지만, 1910년대 초반에 영인면 아산리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4. 여담

1708년 「주지(州誌)」를 보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인 송빈의 공적을 발견하고 너무 감격하여 충렬사(忠烈祠)를 짓도록 건의하였다고 한다.

영조 시기에 한자도 똑같은 '이봉상'이라는 죄인[10]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혼동이 매우 심하다.


[1] 충무공파 5대손. [2] 영조 1년 5월 11일 무신 6번째 기사의 내용에 흉당(소론)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적에 빌붙었고 군부의 재화를 귀양가 있는 흉도들에게 나누어졌다고 탄핵받고 마찬가지로 영조 1년 5월 16일 계축 3번째 기사에 흉적(소론) 이삼(李森)에게 은밀히 결탁하여 역적 조태구(趙泰耉 소론 4대신 중 한명)에게 뇌물질을 했다고 탄핵받고 영조 3년 5월 19일 갑술 1번째 기사에서는 돈 1백 냥과 베 20필을 몰래 홍약수에게 맡겨 역적 유봉휘(柳鳳輝 조태구와 함께 소론 4대신 중 한 명)가 죽었을 때 부의(賻儀)로 보냈는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단, 소론 내부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고, 이들의 사이 역시 나빴다. 소론 강경파 이인좌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소론 온건파로 보인다. 다만, 이봉상이 소론 온건파냐 하면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게, 노론이 소론 온건파 대신 조태억과 이광좌를 공격했을 때 같이 참여했다가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 정권이 들어서자 어영대장에서 충청병사로 옮겨진 이봉상은 소론 온건파 대신들인 이광좌와 조태억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죄로 하옥된 일까지 존재한다. 물론, 이봉상이 노론이 이광좌와 조태억을 공격할 때 동참했다고 해서 노론으로 보기도 힘든 게 이봉상은 위 각주의 설명대로 노론에게 흉당(소론)에게 빌붙었다고 공격받았다. 게다가 이봉상은 소론 강경파와 친분이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조가 즉위한 후에 역적으로 낙인 찍혀 유배지에서 죽은 소론 대신 유봉휘의 집에 이봉상이 부의를 보냈는데 유봉휘는 소론 강경파다. 당연하지만 이 때문에 이봉상은 역적의 집안과 내왕했다고 탄핵을 받았다. 게다가 이봉상은 영조에게 이사성(李思晟)이 재주가 있다고 추천하기도 했는데, 이사성은 소론계 무인으로(영조 실록에 흉당에게 아첨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데다가 소론 온건파 대신인 이광좌 역시 이사성을 남태징과 함께 영조에게 천망(薦望)하기도 했다) 이인좌의 난에 동참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 양덕부 역시 이인좌의 난에 동참했다(양덕부는 이인좌와 내통해서 청주성의 문을 이인좌의 반란군에게 열어주기까지 했다. 이인좌의 난에 동참한 걸 보면 양덕부는 소론 강경파였던 것 같다). [3] 현대로 따지면 육군참모총장이 제2작전사령관이나 지상작전사령관으로 밀려난 셈이다. [4] 국조인물고 홍림전에선 월녀(越女)란 이름으로 나와있다. [5] 즉 이 둘이 반란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결국 둘 다 참수형을 당한 뒤 효시되었다. 양덕부는 숙종 시절에 상당산성을 개축할 때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러한 연유로 상당산성 동쪽 암문 안의 돌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2015년 충북 지역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근래에 누군가가 쪼아버렸다고 한다. 이름 왼편에 있는 패장한량(牌將閑良)이란 글자는 멀쩡히 남아있다. [6] 1685년~ 1728년. 사후 호조참판 증직. [7] 아들이 2명 있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다만 청주목의 기첩(妓妾)이 낳은 유복자 홍한구(洪漢龜)가 있어서 면천되고 장성한 후 녹용되며, 홍림의 손자 홍경(洪儆)과 증손자 홍주구(洪疇九), 현손자 홍석붕(洪錫鵬) 역시 녹용되었다. # [8] 1653년 음성 출신. 이봉상이 태어난 해에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사후 이봉상과 똑같이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숭선군(崇善君)이란 군호를 받았다. [9] 실제 실록에 욕설이 순화되지 않고 들어가 있는 드문 사례이다. [10] 이이명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