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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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1]
이순신은 뛰어난 군사 능력[2]을 십분 활용하여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계속해서 승전을 거듭한 끝에
조선을
패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다.[3] 만약 이순신이 없었다면 일본군은
남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상보급로를 통해 보급이 더더욱 원활해졌을 것이다.《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투에서 빛나는 전승을 거두고 단 한 번의 패배는커녕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해군 제독은 이순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육상까지 포함해 세계 역사를 고루 둘러본다고 해도 이처럼 전설적인 신화를 이룩해낸 명장은 잔 다르크 정도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일컬어지는 '전장의 신화'를 쓴 명장이 이순신 하나뿐인 것은 아니나[4]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정복자이며, 이들이 이뤄낸 전과의 동기는 현대 기준으로는 좋게 보이지 않는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들을 싫어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싫어한다.
비록 이순신은 조정, 특히 국왕의 의심을 받아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처분을 받은데다,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일구어낸 병력과 물자들이 원균이라는 무능한 지휘관 탓에 모조리 사라지고,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통해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한 마디 불평 없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끝까지 싸워 승리를 얻은 만큼, 이순신은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명장과 구국 영웅을 넘어선 성웅(聖雄)으로 칭송받고 있다.[5] 이순신에 대한 존숭은 국내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콧대가 높았던 진린도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하여 나중에는 자신보다 두 살 적은 이순신에게 노야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경하였고 훗날 노량에서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할 정도였다. 심지어 적국이었던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무신(武神)이라 치켜세우며 그를 기리는 사당까지 있는 실정이고,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문은 한산도 대첩 패전일인 8월 14일(음력 7월 8일)에는 하루 식단을 전부 미역으로 하는 전통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여러 명장이나 위인으로 불리는 인물 대다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인격, 가족관계, 사생활에서 하자를 드러내거나 문제가 되는 사건에 휘말려 후대에 저평가를 당하는 경우도 적잖은데,[6] 이순신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단 하나의 흠결마저 나온 것이 없다.[7][8] 오히려 맨 앞의 서문처럼 난중일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인물이 이순신 본인이었다.
종합하자면 이순신은 당시 나라의 공식 기록부터 시작하여 주변 인물들, 일반 백성들, 주변국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현대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훌륭한 참군인 그 이상으로 성웅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한민족 역사상 손꼽히는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2. 각종 기록에서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각종 기록에서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순신 사후 조선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리한 문서이다.
3. 사후 조선에서
이순신은 죽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선조를 제외한[9] 후대의 왕들과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명사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였다.이순신 이전까지 조선에서 군사 문제를 논할 때 비교 기준은 중국이었다. ' 손빈, 한신의 계책', ' 송나라 악비' 등과 같이 중국의 이름난 명장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비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사후 조선의 군사 문제에서 비교 기준은 이순신이 되었다. 신하들이 군사 관련 안건을 논할 때 "이순신의 계책에 따르면..."이라 하며 언급한 것이 실록에 여러 차례 대놓고 실려 있을 정도. 중국 역사에 능통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보기에도, 이순신만한 인물은 역사를 통틀어 중국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신하였으며, 인기로 치면 조선 세종을 넘어설 지경이었다.[10]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11]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 《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 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12]
ㅡ 《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 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12]
상께서 말씀하셨다. "
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13]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14]
ㅡ 《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와 이원익[15]의 대화
이원익이 말하였다. "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13]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14]
ㅡ 《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와 이원익[15]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16]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후략)
ㅡ 이항복, 《충민사기》
ㅡ 이항복, 《충민사기》
수군 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 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 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ㅡ 《달천몽유록》, 1600년 소설[17]
ㅡ 《달천몽유록》, 1600년 소설[17]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ㅡ 류성룡, 《징비록》
ㅡ 류성룡, 《징비록》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18]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 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 분뿐이다.
ㅡ 김육, 『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ㅡ 김육, 『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큰 사람(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
이서평(李西平 :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
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19]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ㅡ 윤휴, 《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20]
ㅡ 윤휴, 《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20]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21]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22]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ㅡ 효종, 《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 / 1659년 윤 3월 30일
ㅡ 효종, 《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 / 1659년 윤 3월 30일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 《승사록》[23]
ㅡ 원중거, 《승사록》[23]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ㅡ 정조, 《 홍재전서》[24]
ㅡ 정조, 《 홍재전서》[24]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26]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에서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27]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을 선조가 내린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이다. 애당초 이순신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선조가 원균을 1등공신으로 만드는 꼼수를 썼을지언정 결국 이순신이 1등공신이 된 것만 봐도 그 누구라도 이순신의 공을 가릴 수는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조선시대에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가 있다.[28] 또한 위의 순조실록의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 이순신 사후 200년 이상이 지난
순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 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29]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이순신은 간과(干戈)[30]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31] 옹진이 아무리 피폐하였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ㅡ 영조, 《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 / 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 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다만 이처럼 하도 곳곳에서 칭송과 존경을 받고 대를 거듭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조정에서도 비교 기준으로 등극하다 보니, 조선 후기에는 관리들이 정말 어려운 사정에 처했더라도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냈는데 넌 왜 못하냐?라는 식으로 갈굼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사례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사
박문수. 박문수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시절 청나라 선박들이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숱하게 행하자 이를 단속하기 위한 함선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예산 지원을 조정에 요청했다. 하지만
영조로부터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대를 만들었는데 넌 고작 그거 하나 못해서 이렇게 찡찡대냐? 네가 알아서 해라"라며 퇴짜를 맞았다.[32][33]ㅡ 영조, 《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 / 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 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무장을 조상으로 둔 죄로 소질과 적성이 모두 무시된 채 반강제로 무과에 응시해야 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이순신 아래로 무려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에 불과하다.[34] 장남 이회 계열에서 114명, 차남 이열 계열에서 151명, 여기에 후사를 이어가지 못한 서자 이훈과 이신까지 합해 총 267명으로 특이하게도 선조~경종대까지는 몇 명 되지 않다가 영조 시기부터 급등해 고종 시기에만 93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순신의 장남 이회(李薈)와 조카 이분(李芬), 이완(李莞), 이봉(李菶)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숙부 곁에서 의병 신분으로 종군했다. 조카 이완은 정묘호란 당시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자 이신(李藎)은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서자 이훈(李薰)은 이괄의 난 때 전사하였다.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 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35] 이봉상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윤휴가 등장한 이유는, 다름아닌 자기 서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이다. 즉 윤휴의 형의 장인이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9대손 이용희(李容熙)는 병인양요에 참전했으며 형조판서를 거쳐 어영대장, 훈련대장, 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심지어 충무공의 13대손과 14대손은 독립운동가로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그 유명한 삼도수군통제사에도 역대 208명의 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는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덕수 이씨와 앞의 두 성씨의 인구수 차이를 고려하면 놀라운 저력이다.
후손들도 이런 내력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는지,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당시 실각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대원군에게 이순신의 8대손인 이문영이 배알했다. 흥선대원군이 그에게 일본을 물리칠 방안을 물어보자 이문영은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도 어찌 잘났겠는가[36]하고 대답했다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을 이끈 구로다 기요타카가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실없는 대답 같지만,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먼저 농담으로 꺼낸 질문에 이문영이 재치있게 맞받아친 것에 가깝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도 이순신의 후손 중 12명이 독립 운동을 하였고, 10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3년 1월의 이달의 독립 운동가 이민화도 이순신의 후손이다. # 이민화는 김좌진의 부관으로 김좌진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대로 무신 명가로서의 명예를 지켰으나, 역시 모두 완벽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이후 종친회 내부의 알력 다툼 속에 충무공의 유물이 암시장에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4. 현대 한국에서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37]
"실로 하늘이 내린 인물.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리라. 원칙적이고 기본을 중시하는 태도, 피아의 역량과 지형지물을 정확히 판단한 데 따른 창의적인 전략전술, 필사즉생의 정신, 선비보다도 더 선비다운 풍모와 자기 절제, 나라와 백성, 대의를 철저히 앞세우는 모습에서 '성웅'이란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인물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후기> 中[38][39]
"실로 하늘이 내린 인물.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리라. 원칙적이고 기본을 중시하는 태도, 피아의 역량과 지형지물을 정확히 판단한 데 따른 창의적인 전략전술, 필사즉생의 정신, 선비보다도 더 선비다운 풍모와 자기 절제, 나라와 백성, 대의를 철저히 앞세우는 모습에서 '성웅'이란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인물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후기> 中[38][39]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해군의 다짐
- 해군의 다짐
- 한국인에게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열이면 열 "이순신"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사를 대표하는 성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위인으로서의 이순신의 위상은 독보적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사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 사실상 이순신 말고 거론되는 이가 없는 정도다.[40]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함께 늘 1위를 다투고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두 위인의 동상이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인데, 광화문광장의 사회 · 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대신할 수 있을만한 위인은 아무도 없다. 물론, 이 두 인물이 또한 서울 출신이고 생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41]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이 장소에 이 두 인물처럼 상징성을 지닌 인물들도 또 없을 것이다. 다만, 이순신 장군 동상의 경우는 고증오류가 많아서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
-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 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을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 전반 혹은 선조 시기 정치사(政治史)와 연관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십 센터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 받은 경우라고 해야 맞는 것인데, 더 연구해봐야 지금 상황에서 딱히 성과적으로 나올 거리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다. 유명 수군 도독이 어떠한 의미인지, 20세기 내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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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에서 활약한 인물이므로 당연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장보고와 함께 엄청나게 좋아하고 밀고 있는 위인이다. 훈련병들은 기본적으로 정훈교육을 통해 이순신에 대해서 배우며, 훈련병용 교재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고 해군 훈련소의 건물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어록들이 적혀있다.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당시 장계로 올린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가
제7기동전단 본부에 당당히 걸려 있다.[42] 해군의 다짐 또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로 시작하며, 군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해군의 자존심의 근원이다. 해군의 많은 부대들이 자신들을 나타내는 부대마크 일부분에 거북선 문양을 그려두기도 하는데, 최상위 지휘부인 해군본부와 작전사령부, 각 해역 함대의 사령부들 마저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또한 해군사관학교에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이순신 제독 동상도 있다.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 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거나 명색이 충무공 리더십 센터 교관 출신 장교가 전역 후에
조선은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게 되고, 충무공 리더십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 시간에 날조된 <
칭기즈 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고,[43] 해군정보단 앞 비석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왜곡된 문구를 정보전의 중요함을 강조한 충무공 어록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새겨놓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 적도 있는데
명량 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 무장으로 승자총통을 쓰는, 그야말로 발로 만든 한심한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 있다지만,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 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 인물 이순신이나 조선 수군사를 연구하는 데는 쥐뿔도 관심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더 나아가 소설 불멸에서 이순신을 사실과 관련 없이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
김탁환이 해사에서 교수 사관을 했다는 이유로 SBS에서
남희석과 해사를 방문할 때 해사 생도들이 동원된 장면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
DDH-975 충무공이순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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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나 해군 출신자 등 일부에서 해군의 장성 계급을 이르는 호칭인
제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공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으로서 세웠고 실제로 해외에서는 전부 Admiral Yi Sun Shin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 General은 육군 지휘관을 의미하고, Admiral은 해군 지휘관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해군)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Admiral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한국어의 '장군'에 해당하는 단어라는 이유로 General을 사용해 버리면 이순신을 잘 모르는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 봤을 때 이순신을 육군 지휘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다만 제독 문서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육군의 General과 해군의 Admiral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동·서양의 역사적·제도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전근대 동아시아권에서는 대체적으로 육상과 해상의 군 조직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거나 일원화된 양상을 보였던 반면 유럽권 국가들에서는 육군과 해군이 개별적으로 성립하고 발달하였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유럽권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계급 체계도 서로 달랐고, 육군과 해군의 계급 명칭을 엄격히 구분하는 관행 역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후 19세기~20세기 들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를 통해 서양의 근대적 군사 제도와 체계를 도입하며 이러한 관행이 동아시아권에도 정착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권의 인물인 이순신에게 근대 이후가 되어서야 도입된 서양의 잣대를 무작정 들이미는 것은 사실 조금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순신은 엄연히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육군 지휘관이냐 해군 지휘관이냐를 무 자르듯이 엄밀하게 따지려 드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수군으로서의 업적이 좀더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므로 해군에서 내부적으로 제독으로 칭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해군과 관련이 없고 해군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일반인들이 장군으로 부르는 것까지 무작정 잘못되었다며 제독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이 최선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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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이 존경했다고 한다. 이 시절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 그 존경 덕에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가
크고 아름답게 증축되었고,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현재 사용되는
원화 중에
100원 주화의 앞면[44]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전에도 구 500원권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다.
* 숫제 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로 넘쳐나 왜색이 짙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를 누르기 위해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미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부터 널리 숭배하던 인물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전국에 크고 작은 이순신 사당이 여럿 세워졌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물론 추숭도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에 특별히 더 유난히 평가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역대 추숭을 찾아서 정리한 글 이를테면 중국 민중의 관우 신앙과 비슷하다.
- 또 효종, 숙종, 영조 대(代)에 이순신에 대한 추숭 사업이 여러 번 진행되었고, 숙종 대에는 현충사를 확장하고 거기에 숙종이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정조 대에는 《 이충무공전서》를 내는 등 조선 왕조 후반기 동안 꾸준히 추숭 사업이 이뤄졌다. 특히 정조는 평소에도 이충무공에 대한 열광적인 빠심(?)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는 이의 인쇄 비용을 자신의 사재인 내탕금에서 보태고, 자신의 문집 《 홍재전서》에서는 아예 "이충무공의 집안이야말로 가히 조선의 명족(名族)이라 할 만하다"라고까지 극찬한 바 있다.
- 무속 신앙에서는 용장군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참조. 용장군이라는 것은 흔히 물에서 싸우던 무인들을 영령으로 모시는 것[45][46]이라고 한다. 무당의 신앙은 무당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충무공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존재한다. 특히 호남 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이순신을 신으로 섬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수의 ' 영당 풍어굿'. 풍어굿은 원래 물고기가 잘 잡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인데, 여수의 '영당'이라는 곳은 충무공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47] 위치는 여수시 남산동 어항 단지이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방문해서 이 굿을 직접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매해 정월대보름에 이틀에 걸쳐 굿을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지역 행사처럼 벌인다. 이 굿을 하다 보면 무당이 "여수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에 나갈 적에 빈 배로~ 올 적에 만선하야~"라고 외친다. 이처럼 일부에서 말하는 것 마냥 무속이나 민간 신앙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일반인들에게 이순신은 지장의 이미지가 강하고 유독 용장의 이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장뿐만 아니라 용장의 덕목도 확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녹둔도 전투에서 이일의 부장으로 종군할 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남아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조선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등 무예를 발휘했으며[48], 명량 해전 때는 아예 미적거리는 부장들을 뒤로 하고 홀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전세를 뒤집었다.
- 풍어(豐漁)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청어 잡이에 열중했다. 한산도에 개간한 둔전만으로는 병사들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청어잡이로 군량을 때우려 했던 셈.[49] 그리고 비범하게도 명량 해전 이후에는 부족한 군량을 모으기 위해 '해로 통행첩'을 발급해 백성들에게 군량을 거두는 대신 말 그대로 바닷가를 통행할 수 있는 통행 허가증 비슷한 것을 내줬는데 이 결과 군량을 모으는 원 목적을 달성했고, 또한 조선 백성이면 통행첩을 가지고 있으니 없는 놈은 일본군이란 소리가 되어 간첩선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징비록》에서 이 해로 통행첩이 언급된다. 다만 반농반진으로 이순신이 이렇게 군벌화를 시도했으니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견제는 합당했다는 말도 돌아다닌다. 사실은 그 선조가 이순신에게 군비 지원을 못 해줬기 때문에 이순신도 살기 위해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만.
-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아가는 김에, 묘소가 현충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문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충사와 이순신의 묘소는 떨어져 있다. 현충사는 아산 염치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 이순신의 업적이나 가지고 있는 비중만 보면, 사실상 임진왜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며, 근래 들어 임진왜란의 다른 전투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대다수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이 이순신이 벌인 전투들의 일대기와 몇몇 유명한 육전들을 다루는 수준에서 머무를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책들에서는 이순신이 반드시 언급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경우 아예 주인공급의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보통 임진왜란 하면 십중팔구 이순신을 떠올린다.[50]
- 그의 수많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한산도 대첩 축제 등 그와 관련된 축제를 여는 지방자치단체가 있으며, 이순신이 해전을 벌인 남해의 모든 지역에는 승첩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로 명명된 교량이 있는데, 그 유래는 이 다리의 길이가 1,545m로 1545년생인 이순신의 생년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 현대에는 무략이나 전술·충심뿐만이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십과 철저한 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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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소태산 대종사) 또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였다. 생전의 설법에서 이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이 충무공은 그 마음 쓰는 것이 도(道)가 있었도다. 그는 높은 위치에 있으나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이 모든 군졸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고. 권세를 잃어 일개 마졸이 되었으나 또한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이 말 먹이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 말을 살찌게 했다. 때로 말에게 이르기를. '네 비록 짐승일지언정 국록(國錄)을 먹고 이만큼 자랐으니 국가 존망의 시기를 당하여 힘을 다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오직 위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고 아래를 거느림에 사랑을 다하였으니. 과연 그는 '지(智)와 덕(德)을 겸비한 성장(聖將)'이라 할 만하다."
이순신에 대한 박중빈의 발언
재미있게도 원불교에서는 박중빈이 깨달음을 얻어 교단을 연 날을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라 부르며 기념하는데 이 날이 4월 28일로 충무공탄신일과도 같은 날이다.
- 워낙 유명하고 존경받으며 뛰어나고 유능한 군인의 대표격 인물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군 간부들이 롤모델로 꼽는 인물이다. 물론 군대에 이런 말이 괜히 팽배한 것이 아니듯 대부분이 똥별 행각이나 하면서 쓸데없는 군기만 빡세게 잡는 걸 좋아할 뿐, 이순신의 진정한 의미의 참된 모습은 조금도 본받을 생각이 없는 인간군상들이 대부분이다.
- 갤럽 조사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2014년, 2019년, 202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 일설에는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국민들을 단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용된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52] 시기적으로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띄워진 위인이라는 요지이다. 다만, 이순신은 조선시대부터 저명했으며 교과서에 이미 등장했던 실제 유명했던 위인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것과 별개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이순신'이 문화 산업 안에서 캐릭터로서 주인공으로서 다뤄지기 시작한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1962년 무용극 성웅 이순신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시즘 성향의 국가나 세력이 과거의 전쟁 영웅이나 위인을 프로파간다로 악용한 사례는 상당히 흔하고 한국 역시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 같은 천부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백성[53]은 왕을 섬기는 게 당연한 것이고, 왕과 국가[54]를 구분할 줄도 몰랐다. 같은 나라 안에서 왕이 바뀐다면 몰라도 외세에 의해 왕이 살해 당한다면 그건 나라가 망했음을 의미한 게 그 시절이었다. 그 둘이 나뉘게 된 것은, 즉 '시민'이란 개념이 생긴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 당연히 파시즘이란 개념도 민주주의의 대척점으로 생겨난 것. 따라서 이순신의 언행을 두고 전체주의 운운하는 건 온당치 않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순신은 파시스트였던 게 아니라 당시 충효사상을 강조하던 유교 사회에 태어나 살았던 인물일 뿐이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 자체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논리는 과거의 역사적 인물을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의 사상과 관점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당시 시대를 감안해도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었는데 지장, 용장, 명장일 뿐만 아니라 덕장의 면목도 충분히 갖췄다. 이순신과 대비되는 원균의 경우 수급을 얻겠다고 죄 없는 백성들 목까지 베었다는 것이나 이순신이 죽자 남도 백성들이 통곡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러한 반발로 인해 민주화 이후에는 역으로 '이순신은 조선 왕조가 아닌 백성에게 충성했다'라고 주장하며 이순신을 민본주의적 영웅으로 표현하는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무리하게 이순신의 성향을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랬다면 역성혁명 혹은 자살 의혹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왕권국가인 조선에서 나고자란 이순신의 충성은 왕과 백성 모두에게 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왕 혹은 국가만을 생각했다는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와 백성만을 생각했다는 민주화 이후의 주장은 모두 이순신이 가진 충성의 단면만 두둔하는 것에 불과하다.
4.1. 정치적 견해에 따른 폄하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사회에 헬조선 담론을 위시로 한 자국 혐오와 탈민족주의 성향 등을 따르는 사람들,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나 진영논리에 함몰된 사람들이 이순신을 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대표적인 예로 박정희를 싫어하는 한국 강성 좌파 운동권에서는 이순신을 띄워준 박정희를 싫어하다 보니, 진영논리로 그 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는 원균을 띄워주고 "사실 원균은 용맹한 장군이었는데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주도한 박정희 때문에 억울하게 간신이 되었다."라는 원균명장설을 내세운 바 있었다. 심지어는 "이순신이 원균을 질투해서 그의 공을 가로챘다."라거나 "이순신의 능력은 사실 별거 아닌데, 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가짜 영웅이다."라든지 "이순신은 조선 시대에 전혀 인정을 못 받았고 아무도 알지 못한채 그대로 묻혀 버렸는데, 박정희가 집권하면서(혹은 일제가 이순신을 찾아내서) 다시 발굴해서 띄워준 엉터리 영웅이다."라는 식의 역사왜곡마저 서슴치 않는다.
원균명장설이 꽤 열풍을 일으켰던 1990년대에 나왔던 이순신이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 중에는 이런 식의 이순신 폄하론을 실은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1994년 4월 출간된 재야의 괴벨스 고정욱의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과 1998년 10월에 출간된 김탁환의 소설 <불멸>과 1999년 9월에 출간된 신봉승의 소설 <권율> 또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순신의 전공은 하층 계급, 즉 일반 병사들과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국의 모든 진보/좌파 성향 사람들이 이순신을 폄하한다고 매도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애초에 이런 진영논리로 이순신을 비하하는 작태를 보이는 몰상식한 사람들은 진보 세력 내에서도 극히 비주류일 뿐이며,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고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더 나아가서 진보적인 민중사관에 입각해서 이순신을 민본주의 성향의 영웅으로 재해석하는 주장들과 이를 반영한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또한 진보 인사들만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보수 우익이지만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잡지인 미래한국에서는 영화 명량을 두고 "이순신은 엄연히 명량해전에서 패배했는데, 왜 영화 명량은 그런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겼다고 역사왜곡을 했느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애당초 이순신 폄하의 가장 큰 결정체인 원균옹호론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좌우 구분이 없다. 당장 원균의 후손으로서 원균을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정치인의 당시 소속 정당도 보수에 속한다. 이 외에도 보수 우익이면서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가인 백지원도 그의 책인 조일전쟁에서 이순신을 다분히 폄하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은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철거를 긍정하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게 말이나 되느냐?" 라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
거기다가 탈민족주의와 자국혐오 및 일뽕 성향이 강한 네티즌들이 활동하며 보수 지지자들이 많은 일베저장소나 디시인사이드 같은 사이트들에서는 이순신이 굉장히 폄하당하고 있다. 한 예로 2005년 지금은 없어진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루XX[55]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티즌이 "한산도 대첩은 날조다",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자신의 책에서 이순신을 찬양한 일이 없다. 내가 그 책을 갖고 있어서 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순신을 마구잡이로 폄하하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여러 사료들에서 찾아내 제각기 반박을 하는 등[56] 한국 인터넷의 여러 게시판들이 한동안 매우 시끄러웠다.
극성 페미들도 이순신은 '남자의 역사'라서 동상 철거를 외친다. #
4.2. 한국 인터넷상에 퍼진 오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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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 미치후사에 관련된 일화 중 "이순신 장군이 번개를 다뤘다"라는 이야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이른바 이순신 번숨설.
이순신과 싸웠던 적장들 <2006-03-23>
이순신 일본 기록중에 이런 거 있던데 <2017-11-23>
이순신 목 따러간 왜장 최후의 결전 만화.manwha <2017-11-23>
그러나, 이 일화는 출처가 없다. 실제로는 일본측 기록에도, 조선군 기록에도 "이순신이 입에서 번개를 뿜었다"와 같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인터넷에 나오는 글에는 그냥 두루뭉실하게 '일본 측 기록' 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 기록이 어딘지 적어 놓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 '일본 측 기록(고산공실록)'에도 구루시마는 그냥 전사했다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57] 문제는 이게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디시 인사이드의 유머성 글이 시초로, 초기에는 분명 농담으로 시작했으나 이러한 맥락을 제거한 채 번숨설만이 널리 퍼져 "이순신 번숨설"을 진지하게 믿는 바보들이 있다. 그래서 해당 일화를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리는 사람도 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 기록은 군사 부대의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등의 과장은 있었어도 "입에서 나온 번개를 맞고 죽었다"와 같은 낭설을 기록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이순신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일본인들에게 빌미가 될 우려가 있다.
이 외에도 수능 역사 관련자나 국수주의 유튜버들이 이순신의 적이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자신의 인생사를 사심없이 적은 회고록에 "가장 죽이고 싶은자도 이순신이요. 가장 차를 마셔보고 싶은자가 이순신이다."라고 고평가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정설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관련 단어를 일본어로 찾아도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면 윤채근의 고전환담을 정설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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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의 이순신》 등,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사극에서도
일본군의 규모를 늘리는 오류를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상기한 위키백과의 '명량 해전에서의
일본군 1만 사상' 기재는 다름 아닌 《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나레이션이 출처였다.
사실 이는 드라마 제작진만의 잘못은 아니다. 한산도 해전 8,980명, 명량 18,000명 사상 등등의 과장된 자료 출처는 옛날 일본 선박이나 함대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을 때, 대선 - 아다케, 중선 - 세키부네, 소선 - 고바야로 잡고, 일괄적으로 200명, 100명, 40명씩 대입해서 계산한 것으로, 제법 그 역사가 긴 설이고, 여러 반론들이 있었지만 이 설이 가장 널리 퍼져서, 되려 넷상에서는 정설 비슷하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 일부 연구자들이 이를 무조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문제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이순신역사연구회가 발행한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내용을 인용해, 명량 해전의 일본군 사망자를 " 일본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라 기술하고 있다. 90명씩 승선하는 대 세키부네는 존재하지만, 기함용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 혹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규모가 커진 것이 대다수고, 이 시기에는 승무원 50명 ~ 60명 내외의 세키부네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므로, 이를 일괄적으로 100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전사자 수를 2배로 늘리는 결과를 낳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순신이 지금까지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같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비록 병력 측면에서 일본군에게 열세였음에도 늘 적절한 인력배치로 개개의 전장터에서만큼은 자신의 병력을 적의 병력보다 많게 유지하였던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 있다.[59] 항상 열세인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만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명량의 결과가 이러한 과장에 불을 붙일 정도로 극적인 승리란 점이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5. 일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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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본에서는 대략 이런 식의 맹장 이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854년 일본의 출판사 금행당에서 발간한 《조선정벌기》라는 책 속의 이순신. 이 책은 임진왜란 전까지의 조선 역사를 서술하고, 전쟁 진행 상황을 일본 처지에서 그림으로 서술한 책이다. 한반도 모양에 맞춰 그린답시고 고증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지만, 제법 무섭게 그렸다. 특히 들고 있는 방천화극. 《징비록》이 일본에서 발행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김시민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의 해군 연구에 의해 일본 내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평가들로 인해 일본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 물론 넷우익들 중 일부는 "이순신? 누구?"라며 까내리려는 인간들도 존재하지만, 되려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도 모르냐"라며 일침하는 일본인들의 반응도 볼 수 있다.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의[60]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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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역시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으로, 이 그림은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텍스트 내용도, 싸움 중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했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무인다움을 찬(讚)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대개 류성룡의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영웅다운 인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61]
1908년 발행된 일본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62] 이순신보다 뒤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때문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과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다. 이순신과 비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덜란드의
미힐 더라위터르보다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은 이순신에 비해서 인간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장갑 전함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 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제국의 군사사》(일본어: 《제국 방위사》, p. 399, 일본 제국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 저)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제국의 군사사》(일본어: 《제국 방위사》, p. 399, 일본 제국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 저)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또, 1929년 해군 소좌 출신 작가 가와타 이사오(川田功)는 그의 소설 《포탄을 뚫고서》(砲弾を潜りて)에서 주인공인 한 해군 병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당연히 세계 제1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솔 능력, 그의 모계(謀計), 그의 용기, 하나라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김준배 2018, 104에서 재인용)
출처
한편으론 1891년 강경한 확장주의자 가와사키 시잔이 쓴 위인전 《일본백걸전》(日本百傑傳)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 정운(鄭運)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수군을) 한산도에서 대패시켰다. … (중략)… 옛날 나폴레옹 1세가 산을 뽑고 바다를 뒤짚어엎을 세력을 갖고도 영국을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넬슨의 해군에게 제압 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의 쇠약함과 영국의 부강함은, 날을 같이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동서의 영웅(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는 동일하다." (김준배 2017, 243. 재인용 및 일부 편집.)
출처
또한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진상된 뒤 전국 중학교로 배포되었던 《제국해군사론》(帝国海軍史論, 1898)을 쓴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의 글 중에서 언급되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진왜란 같은 것을 사실대로 씀(直筆)으로 그 진면목을 기술하는 것은 자못 불쾌한 감이 있으나, 만일 해상권력을 쥐는 것의 필요성을 말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실패한 사적(事蹟)을 들어 은감(殷鑑, 실패를 거울삼는 것을 의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히데요시(秀吉)는 동양에 둘도 없는 영걸(英傑)로서 부하 장수도 모두 천군만마 중 뛰어난 인물들이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평양에서 북진할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은 우리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해전 전술에 졸렬(拙劣)하여 순신 때문에 시종 해상권력을 장악당한 죄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행동을 할 때도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됨은 만세불변의 원리로서 또한 성공의 기초이다" (김준배 2018, 94-96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추가로 오가사와라의 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순신 연구를 추가한 《제국국방사론》(帝国国防史論, 1907)을 쓴 해군대학교 교관 사토 데쓰타로(佐藤鉄太郎)의 글 중 다음 대목은, 지금도 종종 인용되고는 한다.
"(본인은 현재 일본의) 제국 국방의 방침이 과연 국가가 어려울 때 이에 응할 방법인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어 조선의 명장(名將) 이순신의 사적을 조사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가) 우리 수군을 격파한 것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은 격렬히 나의 정신을 일깨웠고, (나는) 공세적 국방의 의의(意義)에 관해 더욱 각성하는 바가 있었다.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蓋世) 해군 장수로서, 불행히도 조선에서 살았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불완전하지만 임진 왜란에 관한 전기를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서양에 있어 이와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수 미힐 더라위터르 이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넬슨 같은 자는 인격에서 도저히 비견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장수이다." (김준배 2018. 103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蓋世) 해군 장수로서, 불행히도 조선에서 살았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불완전하지만 임진 왜란에 관한 전기를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서양에 있어 이와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수 미힐 더라위터르 이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넬슨 같은 자는 인격에서 도저히 비견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장수이다." (김준배 2018. 103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참고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와 사토 데쓰타로 두 사람 모두 훗날 전시 총리까지 올라가는 스즈키 간타로의 동기들이다.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국 해군사관생도들이 견학차 방문했는데, 한 생도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제독을 가장 존경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제독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 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63],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이므로, 사실상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64] 그러니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도고가 개인적으로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최초의 출처는 박정희 때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전 수상이자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중계자 역을 했던 만주국 관리 출신의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영개로[65] 자신이 직접 "지인에게 들었다"면서 한 말로 이는 그저 당시 한일 협정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자 반일 감정을 누그려뜨리려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기실 도고는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말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발언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은 전무하다.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 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당연 일본 측의 어떤 기록에도 이러한 말은 없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 전쟁에서 일본 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66][67]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68]
그러나 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라는 책은 왜성을 직접 탐방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아마추어 연구가의 한계상 사료 해석에 한계도 있고, 학술 논문도 아닌지라 출처 표기나 사료 비평적인 면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도고가 노부인께 했다는 이순신 관련 발언의 경우 해당 책에는 저 문단 하나만 있고 인용 출처나 참고 문헌 목록 같은 믿을 만한 근거는 적혀 있지 않다.
실제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 역시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인데, 이영개의 거짓말일 수도 있고, 일본측의 사기 때문이든 위신 때문이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고 다니다가 특별히 말해줬을지도 모르지만 교차 검증이 힘든 만큼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일본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다름아닌 역보정 관련 때문인데, 만약 자신들이 이순신을 폄하할 경우, 임진왜란 이후 몰락한 일본의 장수들은 별 볼일 없는 이순신한테도 처참히 털리는 졸장이나 잡장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즉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은 전국 3영걸 중 한 명이자 센고쿠 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외 토도 타카토라 등등 일본의 장수들을 죄다 까내리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이 도리어 자충수가 되는 것. 특히나 당시 도요토미 정권 하의 무장들은 센고쿠시대를 거쳐 오며 히데요시 호령 하에 모인 다이묘 출신 장수들이 가토 기요마사 등과 같은 히데요시 직속 부하들보다 많았기에 더더욱 그 차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아예 이순신을 일본의 장군들이 모두 맞서도 너무나 강해서 일본의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인물로 격상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를 폄하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화하는 작업에 들어갔었고, 이와 맞물려 '육주해종(陸主海從)'의 기존 국방 노선을 '해주육종(海主陸從)'으로 바꿈으로써 해군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려던 당시 일본 해군의 주요 인물들이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이론에 지역적 색채를 가미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였다. 메이지 일본과 이순신, 그 애증의 역사
실제로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팽창의 정당화를 꾀하던 당시 일본 해군의 노력에 관해, 후대의 문필가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 일본 해군이었다. (중략) 1904, 5년경의 일본 해군사관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준배 2018 재인용)
출처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69] 실제로 일본에서 해군사 및 일본 전국사 연구의 대가 중 한 명인 키타지마 만지 교수의 경우 KBS 다큐멘터리에까지 나와서 이순신에 대해 뛰어난 평가를 내릴 정도. 그러나 현대에 와서 혐한들이 인터넷에 난립하면서 이순신의 전략과 의의로 폄하하는 왜곡 정보들을 퍼트리기 시작한다. 특히 왜곡된 문서가 많은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크며, 특히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깁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 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 일본쪽 사료에 의하면 사망자는 얼마 안 된다. 그러니 이순신에 의한 피해는 한국쪽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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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 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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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에서는 마치 이순신이 전쟁 범죄라도 저지른 듯이, 퇴각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추격하다가 역관광 당했다는 식으로 써놨으며[70], 조선군이 궤멸당하고 일본군이 전력을 온존하여 승전한 것처럼 써놨다. 참고로 퇴각과 항복은 완전히 다르며, 현대전에서도 퇴각하는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가 아니다. 애초에 퇴각 자체가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전술적 군사행동 중 하나다.[71] 피해 없이 집에 가고 싶으면 이기든가 그 자리에서 항복, 혹은 종전을 위해 협정이라도 했어야 했다. 군대의 퇴각은 민간인의 피난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72] 거기에 거짓 퇴각하면서 적을 끌어들여 단번에 격파하는 전술도 있으며 그 전술로 승리한 예가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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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가문은
고쿠다카 73만 석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데다가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던 도요토미군도 애를 먹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지만, 임진왜란 참전 이후 일본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1500명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노량 해전 이후 2년 뒤 가중내란이 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할 의사 자체도 적었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 해전에서 입은 큰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 노량 해전이 종전 전에 벌어진 엄연한 전투 행위라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노량 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마지막 대공세였던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순천의 왜성을 바다에서 포위하다가 응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벌어졌으므로, 위와 같은 시각은 당시 전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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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것과 다르게 일본 측 사료는 군충장과 진지표, 전황 보고서 등 신뢰도가 높은 1차 사료들을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수치적인 면에서 총 참전 인원 십수 명 수준의 전투에서도 보고를 위한 군충장을 작성했던 센고쿠 시대의 특성상, 부대 배치와 병력 현황, 일본군의 병력 흐름 등을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헤이안 시대 이후 일본에는 정사라고 할만한 게 없고 일본군 장수들의 가문 기록은 조선의 족보 기록과 비슷하게, 자기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공적은 부풀리고 피해는 축소하는 면이 있어서,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당시 히데요시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기 일수 였기 때문에 사실여부 검증은 필수다. 예컨대 있지도 않았던 명군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과 마찬가지로 당대인이 남긴 1차 사료라서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기록의 신뢰도만 따지면 조선 측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원균을 배설보다 낫게 서술하여 개인 감정만 드러낸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처지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 있고, 교차검증 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조선 측 기록, 일본 측의 행정 문서와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다.
- 다만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는 문장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써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일본 수구 세력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을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부러 이순신을 뺐다. 기존 대부분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이순신의 초상까지 실려 있었다.
- 일본어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충무공의 동상이 군사 정권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 서울의 관청가인 세종로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군사 정권의 힘의 상징으로 설치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더불어, 그 외에도 부산 용두산 공원이나 목포 등, 다수의 조선반도 남해안에는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실제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있기 때문에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올라와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동상이다.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일제 시대 때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변형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였다고 한다. 목적이 실제 일본의 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은 분명하나, 군사 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 이순신 장군 동상 및 몇몇 애국선열상의 철거가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한다.
6. 북한에서
이북에서는 두음법칙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리순신"이라 쓰인다.리순신 장군은 량반 출신으로 봉건 지배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봉건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조국 해방 전쟁 시기에 사회주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가슴으로 적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직격로를 열어놓은
애국자들과 비길 수 없다.
출처
요약하자면 인민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북한이 자신들의 체재에 알맞게 입맛대로 왜곡한 셈이다.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명장으로 큰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1967년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을 능가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온 게 상기한 여러 망언들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선 이순신이 희대의 애국자요, 천재적 지략가로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이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고 있다. 다만 김일성만 못하다고 할 뿐이다. 김일성의 이순신 평가
아래는 1967년 이전 이순신에 대한 북한의 평가이다.
임진 조국 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전쟁에서의 리순신 장군의 역할의 평가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하여야 하겠다. 당시 최대의 애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천재적인 군사 지휘관인 리순신 장군의 임진 조국 전쟁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그가 임진 전쟁을 조국 보위의 인민 전쟁으로 인식하고 인민에 의지하고 인민의 역량을 발휘시키고 인민의 역량을 굳게 결집하여 적을 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임진 조국 전쟁 과정에서 리순신 장군의 활동을 그 시대에 있어서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전 동양에 있어서 가장 열렬한 애국자이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리순신 장군의 투쟁은 애국 인민의 산 표본으로 되었으며 그가 군사 예술의 우수한 정수로 되었으며 그의 전략 전술은 애국 투쟁의 영광스런 상징으로 되였다.
리청원, 《임진 조국 전쟁 1592년 ~ 1598년》 (1955년)
리청원, 《임진 조국 전쟁 1592년 ~ 1598년》 (1955년)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이며 탁월한 전략 전술가였던 리순신 장군에 의하여 우리 수군 연합 함대가 지휘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순신 장군은 전쟁 전부터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함선 건조, 함선 수리 특히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 무기의 제작, 군량 준비, 병사들의 훈련 등 모든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백방으로 군비를 강화하였다. 장군은 또한 탁월한 전략가로서 적아간의 력량 관계를 정확히 타산하고 이에 립각하여 격멸전을 용감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전반적 전국에 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이를 분석하고 여기서 제기되는 과업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방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하루 속히 원쑤들을 우리 강토로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또한 잘 알고 시기적절한 대책을 취하곤 했다. 이와 같은 리순신 장군을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모신 우리 수군 병사들은 장군을 무한히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전체가 단결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원쑤들을 격멸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였다. 제 아무리 우수한 무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리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지휘관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와 같은 승리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길성, 《임진 조국 전쟁 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
최길성, 《임진 조국 전쟁 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
이렇게 이순신을 고평가하던 북한 학자들은 유물 사관을 신봉하였단 이유로 반종파분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북한이 이순신에 대해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그가 우상화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해도 당장 북한 땅이 배경인 작품인 《 심청전》마저 폄하하고 을지문덕, 강감찬 등 모든 위인으로 평가받던 인물의 계급적 한계성이 강조되었다. 오직 동학농민운동 같은 인민의 항거만 강조되고 왕조 자체는 모조리 폄하한다. 고려도 신라처럼 외세는 끌어들이지 않았지만 다른 것을 모조리 폄하하고 있다. 심지어 고조선조차 이 당시에는 지배계급이 다수를 억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지방을 강조하는 것은 '지방주의'라고 하여 초헌법적 원칙인 10대 원칙 등에서 철저히 금기시되는 내용이다. # 그나마 민족에 대한 평가가 좋아진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으로 독자성을 추구해야 했던 1980년대 후반, 단군릉을 만들며 고조선의 역사성이 다시 강조되는 것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다. 이순신은 그 이후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활약에 대한 언급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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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인민대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다른 전근대 위인들처럼 김일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즉각 평가절하되었다. 여담으로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남한에서 제작된 이순신 관련 드라마와 영화가 북한으로 전해지고 주민들에게 유포되었다. 탈북자들에 의하면 북한내 최고위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에 간 남측 기자들의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북측 관계자가 '우리 민족을 구한 영웅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
7. 중국에서
중국에서도 장웨이린 교수 등의 일부 인물들이 호평을 내리고 있으며 그는 제갈량, 항우, 손자, 관우 같은 인물들이 서양과 일본에 패한 말기의 청나라에 있었어도 청나라는 역사 속의 그 결과를 피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다르다고 언급했다.[75]
8. 서양에서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76]은 1921년 집필한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일본 정치사에서의 해양의 영향)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라 기술했다.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바다가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pp. 66-67.[77]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바다가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pp. 66-67.[77]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한 브리핑 중 이순신을 언급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中[78]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中[78]
제2차 세계 대전때 엘 알라메인 전투의 영웅이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 또한 자신의 저서인 《 전쟁의 역사》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79]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 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 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中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中
Extra Credits[80]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연재했었다. 1편 북을 계속 울려라, 2편 태산처럼 굳건하게, 3편 한산도의 밝은 달빛, 4편 사즉생, 5편 충무공, 6편 Korea Admiral Yi:Lies로 이루어져 있다. 좋아요가 평균 8천에 1만을 넘으며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반응. 한국어 자막도 있고 고증도 충실하니 시간이 나면 감상해보자. 시리즈 마지막인 Korea Admiral Yi:Lies편을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미국 해군 역사가 조지 해거만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300년 동안 멈추게 한 인물', 미국 리더십 전문가 짐 프리드먼은 '일본이 영국처럼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만들 기회를 빼앗은 인물', 미국 UCLA대학 역사학과 마크 길버트 교수는 '히데요시의 범(汎)아시아 야망(Pan-Asian ambitions)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43년 미국 상원에서 알렉산더 와일리[81] 상원의원이 2차대전 일본과 전쟁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 미국 의회 회의록에서 확인되었다.
레딧의 r/history에서 역사상 최고의 해군 제독을 꼽을 때 호레이쇼 넬슨, 체스터 니미츠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군이 이순신이다. 간혹 판옥선의 동 시대 동양 기준 우수한 제원을 이유로[82][83] 이순신을 '장비빨'이라고 시비를 거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원균과 칠천량 해전으로 가볍게 논박되곤 한다. 원균은 무기 수준을 제외하고 봐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졸장에 속한다.
레딧 역사 서브레딧에서 밀덕, 역덕들이 정리한 전 세계 역대 군지휘관 순위에서 해군 1위에 랭크되어 있다. 육군 1위는 칭기즈 칸, 공군 1위는 아서 해리스, 해군 2위는 나폴레옹을 무찌른 대영제국 불세출의 명장 호레이쇼 넬슨이고 영란전쟁때 대영제국 해군에 영원히 남을 대굴욕을 선사한 미힐 더라위터르가 3위에 랭크되었다. 러일전쟁의 도고 헤이하치로, 태평양전쟁의 체스터 니미츠, 살라미스 해전의 테미스토클레스 등등 불세출의 해군 명장들이 전부 이순신 아래로 평가 받았다. 해군 평가는 리더십, 전술 능력, 작전술, 전략적 계획, 보급 관리, 전술/전략의 혁신과 창의성, 조직/이론의 혁신과 창의성, 임무의 난이도, 영향력, 승리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 이순신 외에 랭크된 한국의 위인은 육군 178위의 광개토대왕, 201위의 을지문덕이 있다. 레딧에서 12명의 해전 명장[84]을 제시하고 4명을 골라서 나머지 8명을 막는 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 많은 역덕들이 Admiral Yi 한 명만 고르고 나머지 11명을 상대해도 충분하다고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는 10배의 적을 격퇴한 이순신 특유의 업적에 비유한 밈적인 발언이기는 하다.
9. 무예
무장으로서 이순신 개인의 무예에 대한 평가는 완벽에 가까운 전술적 평가에 비해선 떨어지는 편이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주로 지휘관의 위치에서 활약한 인물이라 무예를 평가할 요소가 그냥 적기도 하다. 다만 여러 기록들이 확대 해석 되어 무예 실력이 평균 이하라는 평가도 도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는 게 중론이다.흔히 이순신의 무예를 저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근거로는, 활 50발을 쏘아 42발을 맞추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무과에 32세라는 늦은 나이 급제했다는 점, 무과 성적이 29명 12등으로 중간 수준이었다는 점, 낙마로 처음 친 과거 시험에선 떨어졌단 점, 몸이 아파 고생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온다는 점 등이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들이다.
일단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인 32세는 늦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당시 무과 합격 평균 연령은 34세였다. 게다가 29명 중 12등이라는 성적도 어폐가 있는 게, 최종 합격자 29인 중 12등이란 거지, 무과 응시자 자체는 당연히 훨씬 수가 많았다. 게다가 합격자 29인 중 25인이 현역 군인었다.[85] 문과에서 무과로 전향한 사람이 현역 군인들이 포함된 경쟁에서 합격했고, 합격자 29명 중 12등이면 충분히 준수한 성적이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가 아닌 3년마다(자,묘,오,유년) 치러지던 정식 무과시험 식년시에 응시했다. 무과가 무술고시 같은 시험이고, 극소수의 합격자들 사이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는 게 무예를 폄하할 근거가 되진 못 한다. 당시 조선에서 무과 급제자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는 무과 응시자들을 너무 많이 합격시켜서 무과에 '만과(萬科)'라는 별칭이 생기고, 벼슬 자리의 부족이나 합격자들의 수준 저하 등 여러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이건 이순신이 무과에 응시했을 때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다.
또 과거 도중 낙마를 했던 것 역시 무예 실력을 논하긴 어려운데, 낙마는 실력이 있더라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사고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이성계조차 낙마로 부상을 당한 적이 있으며, 현대의 프로 경마 선수들에게서도 낙마는 종종 일어난다. 그리고 설령 낙마 당시에는 기마 실력이 부족했다고 해도 결국 두 번째에 합격했으니 적어도 과거에 합격할 정도의 기마술은 있었다고 봄이 옳다. 일단 무과에 합격한 시점에선 기마술이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순신이 자주 아팠음을 근거로 무예가 부족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이순신이 몸이 아프다는 난중일기의 기록들 대다수는 백의종군 이후의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그의 건강 악화는 사천 해전에서 얻은 총상의 후유증과 고된 업무와 전투로 인한 피로에 더해서 두 달간의 투옥과 심문에 의한 후유증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다는 통념과 달리, 당시 이순신은 파직 후 한차례의 심문을 받았을 뿐이긴 하지만 안그래도 전쟁으로 고생하던 중에 심문을 받고 투옥 생활까지 했으니 피로나 스트레스 등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왜란 시작 이후 이순신이 여러 이유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확률은 높지만, 태생이 무예를 익히기 어려운 병약한 체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애시당초 무과에 합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병약하다고 무예가 약하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오키타 소지처럼 폐병 환자지만 최정예 치안조직인 신센구미의 최선봉에 선 경우도 있고, 체 게바라는 천식 환자였지만 격오지를 누비며 게릴라전을 이끄는 군사 지도자기도 했다.
물론 그의 활쏘기 기록인 50발 중 42발 명중은 장병의 2/3가 활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활쏘기가 일반적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장군이나 전문 군관 같은 정예병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은 성적은 아니었다.[86][87] 하지만 최정예병들과 비교하면 하위권일지언정 객관적으로 봤을 때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88] 무엇보다 당시 이순신은 이미 50대 전후인 데다 한 차례 어깨부상도 겪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중년 정도의 나이지만[89],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무장으로선 적지 않은 나이이다. 이를 감안하면 세월에 의해 실력이 하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활은 다루는데 상당히 많은 힘이 들어가는 무기다. 당장 명궁으로 유명한 정조 역시 40세 이후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활의 적중률이 하락했다. 출처 물론 정조는 1년 동안 꾸준히 활쏘기를 수련하는 무관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지만, 요컨대 사람의 활쏘기 실력이 평생 동안 꼭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위는 어디까지나 50발 중 42발을 맞춘다는 게 이순신의 일반적인 실력이라는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순신이 활을 쐈다는 기록은 수백 개나 있지만 실제 몇 발을 맞췄는가는 42발을 맞췄던 단 하루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실제 이순신의 정확한 실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은 원균, 서성(徐渻), 군관 3명 등 여러 사람과 활쏘기 시합을 하여 이기기도 했다.[90] 이를 고려하면 그의 실력이 원균은 둘째치고 적어도 군영의 군관들과 비교했을 때는 딱히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무관 출신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활쏘기를 하고는 그의 활쏘기가 우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엄격한 이순신의 성격을 고려하면 정말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확률이 높으며, 스스로 활쏘기에 자신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군관이나 무관 등 정예병들 사이에서도 그냥 잘 쏘는 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순신의 무예에 관해 주변에서 직접적으로 남긴 기록들이 존재한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이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더욱이 글씨도 잘 썼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충무공행록에는 "22세 겨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팔 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순신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91]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이순신이 한창 무예를 훈련하던 당시에는 그 실력이 뛰어났음을 짐작 가능하다. 또 이를 고려하면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무장에게 필요한 창술, 검술 등도 당연히 기본 이상은 하였을 확률이 높다. 물론 왜란 직전 조선은 워낙 평화가 오래 지속되는 등 여러 이유로 시험 등에 직접적으로 평가되고 중시되는 활쏘기에 치중된 면이 있었다. 여러 기록에 창과 칼을 익히지 않아 문제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왜란 당시에 여러 장수들이 창칼로 활약한 것을 고려하면 정확히 익힐 사람들은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역시 본인의 칼에 관한 시를 몇 개 남긴 점이나 그 철저한 성격을 고려하면 창검술도 제대로 익혔을 확률이 높다.
이순신의 용맹이나 무예는 실제 전공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이순신 하면 원거리에서 화포 등으로 적군을 제압하는 수군 지휘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여진족과 맞닿는 최전방 국경에서도 3년간 복무했었는데, 니탕개의 난때 여진족 수괴인 울지내를 생포하고, 녹둔도 전투 같은 야전에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특히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은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을 이경록과 단 둘이 지휘하여 여진족의 1천 기병을 끝내 이겨냈다. 심지어 반격하여 포로 일부를 되찾기도 했다. 이는 그의 무예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0명 이하의 소부대를 지휘해 많은 병력의 적을 깨뜨리려면 이를 1선에서 이끌어야 할 장수 개인의 무예 역시 필요하다. 삼국지에서도 제갈량 같은 인물이 고작 몇십 명이나 몇백 명만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식의 기록은 맹장인 조운이나 감녕 같은 장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인데 이순신 역시 이런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개인의 용맹도 뛰어났거나, 적어도 무장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순신의 용맹한 성향은 심지어 수군에서 총지휘관으로 지냈을 때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몸소 시석[92]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며 전투를 독려하다가 탄환에 맞았다고 한다. 지휘관인 이순신이 직접 싸운 것을 보고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전근대에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 전투 독려 등를 위해 지휘관급이 몸소 일선에서 싸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물론 이순신급의 지휘관이 일선에 나서는 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긴 했다. 실제로 노량해전 때 이순신이 몸소 나서자 걱정한 부장들이 만류했다는 류성룡의 기록이 있다. 무예와는 큰 관련이 없는 부분이지만 명량해전에서 다른 전선들이 주저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봉으로 나가 싸운 것 역시 그의 용맹함을 보여준다. 이렇듯 이순신은 필요하면 1선에서 직접 나서는 용장의 면모도 확실히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했을 때, 이순신의 무예가 부족했다는 인식은 여러모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순신이 과거의 인간흉기 척준경, 당대의 이성계나 신립, 황진처럼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무예가 아주 특출난 장수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무장으로서 평균은 됐을 것이며, 오히려 평균보다 높은 수준의 무예를 갖추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는 편이 옳다.
[1]
Extra History 이순신 편에서 고증 자료를 찾는 과정을 다룬 영상에서 제작진이 '난중일기가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자료였다'는 의미로 언급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자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교 사회에서는 자신의 공적을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낮추는 것이 기본적인 미덕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처럼 남들에게 보일 일이 없는 자신의
일기에서까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2]
당시
일본군은
센고쿠 시대를 막 끝내고
일본 열도를
천하통일한 상태였기에, 그 시점에서 수많은 실전을 치러온 전사들로 거듭나 있었다. 그런 적들을 상대로 이순신은 막강한 장거리 화력을 지닌 조선 수군을 거느리고 철저하게 원거리서 요격하는 작전을 토대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 한 백병전을 거의 허용하지 않으며 개전부터 종전까지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다.
[3]
이순신이 전세에 끼친 영향들
1,
2,
3
[4]
'전략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바르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달마티아,
북아프리카 등
서로마 제국의 거의 대부분을 수복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사막 유목집단에 불과했던
베두인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쫒아내
중동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립했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중국 대륙에서
유럽까지 누비며 총 65번의 회전을 경험하고 32개의 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준사구의 일원
수부타이 등.
[5]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성웅으로 불리는 유일한 인물이다. 충무공처럼 그를 의미하는 대명사라 봐도 무방.
[6]
당장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1위를 다투는 세종대왕도 논란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흠결이 있다.
[7]
그리고 앞으로도 찾아낼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본 문서에서도 서술되지만 나라의 공식 기록물인 실록에서부터 이순신에 대해 오로지 찬양 뿐이며, 각종 민간 야사나
류성룡과 같은 주변 인물들의 기록에서도 이순신은 일관되게 비판 하나 없이 오로지 호평, 찬양만 존재한다. 결국은 흠결을 건질만 한 것이 이순신 본인의 난중일기 뿐인데, 여기서조차 공무를 볼 때 특유의 꼼꼼함과 군율에 대한 엄정함,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 공무가 끝나고 지인들이나 부하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먹고 승경도놀이 등을 즐기며 잠시간 여가생활을 보내는 모습, 지속되는 전쟁으로 피폐해지는 백성들과 나라에 대한 근심,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걱정하는 가장의 모습 등을 굉장히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러한 모습들이 무너진게 어머니의 부고를 전해들었을 때와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하늘이 도운 듯한 승리를 거뒀을 때, 그리고
원균을 비난할 때 정도이다.
[8]
정말 억지로 개인의 흠결로 볼 수도 있을 만한 점이 그래도 아군 수군 장수인 원균에 대해 거의 적군마냥 적의심을 드러낼 정도로 싫어했다는 것일텐데, 이유 없는 적의심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당시 원균이 보여줬던 모습이나
그 결과물을 보면 과정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정말 같은 편으로 있는 것이 더 해로울 정도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며 결과적으로 흠결은커녕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매우 정확했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만 되어 버릴 뿐이다.
[9]
선조 본인도 신하들에게 대놓고 저격만 안 당했을 뿐이지 (몽진 당시
신립의 형
신잡에게 "요동으로 가시면 필부(= 일반
백성)가 되는 건데, 필부로 지내고 싶으시면 굳이 요동으로 가실 필요도 없으실텐데요?"라고 저격을 먹은 일이 있다.) 왜란 중에 벌였던 온갖 추태 때문에 일찌감치 인망을 잃어서 암암리에
찐따 취급받고 있었던 판국이라 그가 인정을 하든 말든 별 상관은 없긴 하다.
[10]
이는 선대의 왕인 세종과 비교할 때 수많은 실책을 저지른 선조의 책임이 매우 크다.
[11]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즉 전라도와 충청도를 말한다.
[12]
해당 부분은 <졸기>라는 것으로 죽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적히는 부분이다. 실록을 편집할 때 수많은 사초에서 사관들이 쓴 졸기 중 의미있는 인물의 것만 추려 그 중에서도 가장 객관적이고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대표로 등재한다. 즉 해당 내용은 이순신에 대한 당시 조선의 가장 공식적인 평가인 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보통 흠결이 최소 한두 가지는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렇게 찬사로만 가득한 졸기는 보기 힘들다. 심지어 왕이나 왕후의 사망 기사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쓰는 사례가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이순신에 대한 찬사는 그렇다 쳐도, 칠천량의 대패를 두고
원균을 기용한 조정, 즉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책임을 대놓고 명시하며 까버렸다.
[13]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작전상 물러난 것을 이르는 것.
[14]
'비변사 때문에 이순신이 물러났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물론 이순신을 물러나게 한 주범은 선조이지만 차마 신하가 왕 앞에서 선왕 탓을 할 수는 없으니...
[15]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당시에 정탁, 권율 등과 같이 이순신을 구명했었다.
[16]
이순신이 음식이나 여색을 즐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링크를 한 것처럼 이 표현은 《논어》에서 등장한 관용적 표현이다. 《논어》 <자한> 편에서는 '덕을 좋아하는 것을 마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논어》 <학이> 편에서는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할 때는 여색을 즐기듯이 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공부를 게임하듯이 좋아하고 즐겼다'와 비슷한 느낌이다.
[17]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
[18]
장순과 허원은 모두
당나라
안사의 난 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함께 수양성을 지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안록산이 이끄는 반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모두 충절을 지켰던 인물들로 칭송받았으며
도교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19]
으뜸가는
[20]
윤휴의 이복 형의 장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백호전서를 읽어보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이순신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1]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항목. 흔히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막거나 승리하는 것에 대한 로망과 명량해전의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이순신이 적은 병력으로 능히 많은 수의 적을 막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명장의 기준인양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명량해전이나 특수한 몇몇 상황에서의 전투를 제외하면 이순신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적보다 병력의 수가 많거나 비등한 전투를 해왔다. 병법에 이르길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차선으로는 적과 나를 가늠하여 최선의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순신이 진정으로 명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수히 많은 정찰을 통한 적과 아군간의 전투역량 간파와 전시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엄정한 군율 및 뛰어난 행정력을 바탕으로 한 보급과 그렇게 쌓아온 역량으로 전장의 상황을 두루 보면서, 싸울 필요가 없을 땐 싸우지 않고 이득을 보는 전략을 택하고, 싸워야 할 땐 최선의 전략을 수립하여 불패의 신화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순신이 상대해왔던 적들은 일본 전국시대의 전란을 처절하게 겪은 장수들이었음에도, 이순신의 전략에 말려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순신은 철저하게 승리가 미리 계산된 전투를 해왔다.
[22]
사실
명량 해전에
거북선은 한 척도 없었다. 그냥 판옥선 가지고 다 때려부순 전투였다.
[23]
1763년 조선통신사행에 서기로 파견되어 다녀온 뒤 쓴 사행록이다. 통신사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는데, 일본의 사정을 살핀다 함은 구체적으로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기본 업무가 이렇다 보니 원중거 외에도 "일본의 전함을 봤는데, 우리 전함이랑 맞붙는다면..." 하는 식의 기록이나 "일본의 군사 제도는 이러저러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혹시 전란을 일으킬 때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하며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산한 기록도 있다.
[24]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이순신 팬덤의 양대 산맥. 《홍재전서》나 《실록》 곳곳에서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25]
김종서가 모시던 국왕 중에는 그 유명한
조선 세종이 있었고 세종같은 위대한 왕의 노고도 커서 이순신에 비하면 평가가 높진 않다.
[26]
선조 입장에서 보면, 원균을 통제사로 기용한 게 바로 자신인데
그 꼴이 났으니 공신에 올리기라도 해야 자신의 인사 실책을 어떻게든 덮고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지킬 수 있는 셈이다.
[27]
당장에 신하들은 원균을 선무공신 2등에 추천했고 그나마도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2등 공신에 올린 것조차 진심이라기보다는 선조 눈치가 보여서 그렇게 올려놨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 추측이 맞다고 치면 아무리 왕 눈치가 보여도 신하들 입장에서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동급에 놓는다는 건 차마 있을 수 없는 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28]
이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임란 직후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 돈을 모아서 공적비를 세운 일부터 시작해 통영 백성들이 돈을 모아 사당을 세우기도 했고, 아예 통영 쪽으로 부임한 현감이 자비를 털어 공적비를 세운 일까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사당과 공적비는 10개 이상이며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 있다.
[29]
운구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공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에 가십니까?"라고 하면서 운구를 붙잡고 울고불고 하는 통에 운구를 옮기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30]
전쟁에 쓰는 병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31]
이순신의 훌륭한 행정적인 역량을 볼 수 있는 대목. 그의 군사적인 역량이 뛰어남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비교적으로 행정적인 역량은 다소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이란 비단 병력의 수가 크고 많음을 떠나 해당 병력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원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는데도 크나큰 어려움이 따른다. 군대가 보급은 차치하고 자급자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중앙정부가 멀쩡하게 존재하였지만, 항상 보급난에 시달리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대본영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비교적 보급이 수월해진 근현대의 사례임에도 보급이 부족하여 의지만으로 전쟁을 무리하게 진행하다 패망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며, 보급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더 이전의 기록으로는, 강대했던 수나라의 100만 대군이 어째서 쉽사리 무너졌는가를 보면 군대에서의 보급역량이 전세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이순신은 전란의 와중에서, 중앙정부의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마저 스스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군대를 유지하였고, 그 병력으로 왜의 군세를 압도적으로 무찔렀으며, 이를 뛰어넘어 중앙정부에 필요한 공물을 대주는 등의 엄청난 행정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32]
현대와 달리 조선 시대에는 중앙 정부가 지방 관아나 군영에 예산을 거의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관아나 군영마다 아록전(수령의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 배정된 토지), 공수전(조선 전기에 지방 관아 운영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배정된 토지), 관둔전, 군둔전이 배정되어 있었다. 거기에 잡세를 거두거나 광산, 염전, 어살에 세금을 거두고 여러 경제 활동을 벌여 예산을 마련했다. 운송수단이 미비했던 당시에는 여러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중앙 정부로 옮기고, 다시 여러 지방 관아와 군영에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과 비용이 너무 들었기 때문이다.
[33]
다만 박문수의 경우는 절차를 건너뛰어서 문제가 된 것이 컸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황해도 관찰사에게 먼저 지원을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조정에 가서 돈 달라고 해야 하는데 박문수는 어째서인지 중간과정을 뛰어넘고 바로 영조에게 쪼르르 달려간 것이다. 그러니까 영조 입장에서는 지방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인데 그럴 생각도 않고 바로 중앙 정부에 와서 돈 달라고 한 것으로 비친 것이다. 거기다가 전시상황도 아니었고 비록 황해도가 전라도보다 빈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 황해도가 임진왜란 시기의 전라도보다 가난할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 같은 걸물과 비교한 것은 전형적인
꼰대질이지만.
[34]
그나마 이 한 명의 문과 급제자도 1875년
고종 때에 배출했다. 반대로 율곡 이이의 계열인 문성공파는 문과에만 줄줄이 급제했다. 이는 덕수 이씨의 특징으로, 문성공파 중심의 문골 세력과 충무공파 중심의 무골 세력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35]
이게 붙은 이유로 좀 웃픈데 '충'자가 붙은 건 주목할 만한 충심을 보여주어 붙은 것이지만, '민'자가 붙은 것은 충심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정작 주목할 만한 다른 업적을 세운 것은 없어서이다.
[36]
여담이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심을 지키다가
도쿠가와에게 찍혀서 사후 가문이 몰락했다.
[37]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장면에서 나온 해설.
# 그리고 이 해설은 과장도 허풍도 아니었다.
[38]
박시백 화백은 《조선왕조실록》 완간 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조선의 인물로 세종과 이순신을 뽑은 적 있다.
[39]
선조실록 편이었던 10권의 표지 인물 선정 과정에서
율곡 이이도 손색이 없었으나 이순신이라는 너무 거대한 산이 있었다는 후일담을 밝혔다. 실제로 이순신이 10권의 표지 모델이다.
[40]
개인 무력이 이순신보다 강했던 장군은 더러 있지만 거대한 전쟁의 판도를 아예 바꿔버린 단 한 명의 장군이라는 점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이기 때문.
[41]
세종:
종로구 통인동, 이순신:
중구 인현동
[42]
정조대왕급 3척이 전력화 되기 전까진 7전단의 전투함은 이순신급 6척, 세종대왕급 3척 총 9척으로 12척도 안 되니 7전단에서 금신전선 상유십이를 더 가슴 깊이 새길 만도 하다.
[43]
심지어 이 이른바 <충무공 어록>이라는 걸 일선 부대에까지 정훈교육자료로 뿌려놨다.
[44]
보통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
[45]
사실 무속 신앙에서는 정말 별별 인물들을 다 신으로 모신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남이 같은 인물들도 '원한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 모셔진다. 이 외에도
더글러스 맥아더나
관우 같은 외국인도 모셔지는
경우가 있다(다만 관우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군에 의해 도입된 까닭도 있다.). 대중에 이름이 알려질만한 군인이면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 맥아더의 경우에는 아직 죽지 않았을 당시에도 신으로 섬겨졌다.
[46]
무속의 관점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집이 아닌 외지에서 객사했고, 그것도 물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이러한 죽음 방식은 무속에서는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방식이라고 간주된다. 더구나 이순신은 죽기 직전까지도 "적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즉 적들을 모두 몰아내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겠다는 강한 원념을 품고 있었고, 그의 원념과 달리 일본 주력군은 전멸당하지 않고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죽을 당시의 상황이 비극적일수록, 그리고 생전에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은 인물일수록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특히 강하게 남게 된다는 것이 무속의 설명이며, 이 점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존재하는 신에 대한 관념이기도 하다.
[47]
이 사당에는 충무공 이순신 뿐만 아니라,
최영,
정운 등도 모셔져 있다.
[48]
이 덕에 이순신은 이일이 모함을 했음에도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처벌이 끝났다.
[49]
임진왜란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명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50]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신화와 같은 업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전쟁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순신 혼자서 바다를 막은 것만으로 조선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절대 아니다. 고금을 통틀어 전쟁의 근본은 육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순신의 업적이 너무 찬란해서 묻힌 사항이지만 당시 왜군은
센고쿠 시대를 지나며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가히 역전의 용사들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바다에서 도저히 이순신을 이길 방도가 없자 육지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 이순신의 뒤를 치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전력으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였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각지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관군과 의병 그리고 승병들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가며 적을 막았기에 전라도와 이순신의 통제영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것이 이순신의 빛나는 승리를 뒷받침했던 것이다.
[51]
한 명은
2013년에 입교한 해사 71기, 다른 한 명은
2014년에 입교한 해사 72기다. 이중 72기생의 아버지 또한 해군 장교 출신이며, 해사 40기로 최종적으로
해군군수사령부 참모장까지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52]
사실 이 정도는 양반이고 아예 이순신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가공인물인데 박정희가 날조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인터넷 게시판에 버젓이 돌아다닌다.
[53]
이 단어 자체가 어떤 뜻을 갖는지 알고 나면 이해가 더 쉽다.
[54]
사실 이때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 적어도 현대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아니다.
[55]
참고로 이 인물은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활동했는데, 일본의 극우 혐한에 열렬히 동조하면서 한국을 비하하는 게시물들을 집중적으로 올렸고, 그 때문에 혐한 성향이 강한 일본인 네티즌들로부터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다."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아울러 일본의 극우 혐한 인사한테 직접 혐한 자료들을 갖다 줄 정도로 활동력도 강했다.
[56]
모 네티즌이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쓴 책에서 이순신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열렬히 찬양한 부분을 찾아내 스캔해서 직접 인터넷에 올리면서 루이지의 주장은 완전히 논파되었다.
[57]
이순신 번개숨결은 한심한 선동과 날조다, 2020-07-14, 루리웹
[58]
소설 연구자가 쓴 소설… “청춘들도 고전 재미 느끼게 판타지 결합”, 2024-01-07, 동아일보
[59]
예시를 들자면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보여주었거나, 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입이 닳도록 강조했고, 어떻게든 기동에서 우위를 확보하려고 애쓴 이유였던 부분적 수적 우세의 활용이다.
[60]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 사발을 그냥 고려 자기라고 불렀다. 즉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외교관이 '고려'라는 말이 쓰인 외교 문서를 들고 왔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는 이유로 쫓겨난 적도 있다. 조선에게만 이런 것은 아니었고 중국 왕조가 송, 원, 명, 청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중국을 당나라라고 부르곤 했으며, 한 술 더 떠서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을 가리켜 "당인(唐人)" 이라고 하기도 했다.
[61]
김시덕, 《그림이 된 임진왜란》
[62]
일단 넬슨은 자기를 지켜주고 보살펴준 상관의 아내를 유혹하여 불륜을 저질렀고 타고난 성정이 워낙 드세다보니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63]
다른 유명한 일화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도고 제독에 관한 이런 일화들의 원전은 가와타 이사오가 쓴 《砲弾を潜りて》(博文館, 1925年)이며, 이 책은 전기 소설이다.
[64]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개의 서적에서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모양.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는 《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라는 서적도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 서명 운동의 실시를 도모함과 동시에, 한일 회담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 서적인 듯하며, 그리 신뢰할 수는 없는 서적이라는 듯.(
#).
[65]
참고로 이영개는 평범한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군에 비행기를 갖다바치고 그 대가로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없었던 일제 강점기 때에 무려 일본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만큼 거물급 친일파였다. 그러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달아났는데, 대략 1964년 즈음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려고 했을 때 국내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일부러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지어내어 퍼뜨렸다는 것이 유력한 견해
https://blog.naver.com/kc6731/120205408814.
[66]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 장군은 현지에 둔전을 개척해 보급을 스스로 조달하였기 때문에 보급이 끊긴다는 것은 근거지를 뺏기는 경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당연 무패의 이순신 장군은 보급량이 부족할지언정 보급이 아예 끊긴 적은 없다.
[67]
그러나 이것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정에 공물까지 갖다바쳐야 했던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면 얼추 맞다고 할 수도 있다. 쓰시마 해전에 국운을 건 일본과 이에 따른 전폭적 지원을 받던 도고 제독에 비해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었음은 사실이다.
[68]
출처 :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 이종락 지음, 선인 출판, 2010년, pp.27 ~ 28
[69]
순수 연구 목적으로도 이순신이 전쟁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고 전술했듯이 일본 측에서 억지로 이순신을 까내리면
자신들이 까내린 그 이순신에게 먼지나게 털린 일본의 장수들은 더더욱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도 있다.
[70]
조선 측은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 및 그 밑의 일부 지휘관 그리고 명군 지휘관 1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는 등 피해를 안 본건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전투에 참여한 함선의 2/3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이순신을 죽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피해를 많이 보았고 시마즈 본인도 여러 차례 죽을 뻔했다. 더욱이 이 때 조선군은 60척이었는데 조선군만 놓고 보면 1:5였고 명군이 합쳐져야지 6:5로 일본의 열세인데 조선의 피해는 뚝 떼놓고 명군으로만 규모와 피해를 집계해서 보면 총 300척 중에 1척이 격침된 게 전부다. 명군의 피해를 놓고 보면 일본군은 명군이나 조선군에게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을 뿐 역관광을 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고 쳐도 총 전력손실을 보면 조명 연합군은 전체의 1/6만 타격을 입었을 뿐인데 일본군은 2/3나 박살났다. 아무리 병력 면에서 조명 연합군이 약간 유리했다 하나 아무리 최대로 가정해도 1/6이 박살난 조명 연합군과 2/3가 박살난 일본군을 비교해보면 일본군이 역관광시켰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71]
예시로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에서 기병이 하는 일이 정찰과 퇴각하는 적에 대한 추격 및 격멸이었다.
[72]
현대전에서 퇴각하는 군대를 굳이 추격하지 않는 이유는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라 매복이나 역습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순신에게 복수하겠다며 해안 마을과 피난하는 민간인들을 어린아이조차 가리지 않고 한 명도 남김없이 학살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행태가 바로 전쟁범죄다. 심지어 이순신 자신조차 일본군의 보복으로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고 그 와중에 막내아들 이면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러니 더더욱 노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최대한 많이 몰살시키려 할 수밖에 없었다.
[73]
하늘을 날줄로 삼고 땅을 씨줄로 삼음. 경과 위는
위도,
경도할 때의 그 경위다. 즉 천하를 재단할 만한 큰 재주를 말함.
[74]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대단히 큰 공로를 일컫는다.
여와가 하늘을 보수했다는'보천'과 희화가 해를 목욕시켰다는'욕일'의 전설에서 따온 사자성어.
[75]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한 이들도 능력은 걸출했던 영걸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최후에는 결국 자신들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는데 반해, 이순신은 패망으로 기울어진
전쟁의 판도를
뒤집고 끝내 나라와 민족을 구해냈기 때문이다.
[76]
George Alexander Ballard, 1862~1948.
파쇼다 사건과
제1차 세계 대전 등에 참전한 군인이면서 역사가를 겸했기에 알게 된 듯 하다.
[77]
무슨 문헌을 참고하고 썼는지, 계속 'Yi-sun'이라고 이순신 장군을 호칭한다. First name이 '이순'이고 Last name이 '신'인 것으로 착오했을 수도.
[78]
1944년 10월 10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인용.
[79]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활쏘기·충각·백병전을 벌이는 건 일본 수군의 전법에 더 가깝다(활과 충각은 좋은 성능의 국궁과 견고한 판옥선으로 인해 조선 수군에서도 사용했지만 조선 수군의 전법은 근접전보다 적선의
접근거부 & 포격전에 가깝다). 이러한 서술은 몽고메리가
아시아의 전반적인 해군 수준을 몰랐거나 하등하게 본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고려 말부터 해전에서 화포가 사용되었으며, 조선 왕조에 들어서도 해상 포격 전술은 왜구를 상대하는 데 주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해상 포격전에 특화된 함선인 판옥선이 정걸의 주도하에 주력함으로 개발되었고,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 시켜 일본군을 압살했다. 그 외
베트남도 비슷한 시기부터 화포를 장착한 함선을 이용했고,
인도네시아 군도의 국가들 역시 카락선보다 큰 함선에 대포를 달아서
포르투갈 원정군이 애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0]
게임 개발자가 진행하는 채널로, 주로 게임과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한다. 그러나 별도로 'Extra History'라는 코너에서 역사 관련 영상도 올리고 있다.
[81]
20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친한파 미국 정치인으로, 1963년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자는 주장에 대해
현신규 박사의
녹화사업 성과를 소개하고 원조를 유지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82]
조선의 표준 전선인 판옥선은 일본이나 중국의 전선에 비해서 화력, 내구력, 운용능력이 모두 뛰어났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화력 투사를 전제로한 함선이다보니 선상 백병전을 위한 승조원 수가 제한적인 점 정도. 그나마도 판옥선의 선고가 일본 전함에 비해 높아서 판옥선에 접현을 하여 선상 백병전을 하려면 승자총통을 맞아가며 공성을 해야했다.
[83]
동양 기준인 이유는 유럽에선 이미 판옥선보다 4배 큰 배들이 돌아다니던 시점이기 때문.
[84]
호레이쇼 넬슨, 프랜시스 드레이크, 도고 헤이하치로, 체스터 니미츠 등 해전 역사에 남을 역대급 명장들이었다.
[85]
무과의 정원은 28명이지만 문과와 달리 무과는 합격 정원이 칼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실제론 정원보다 많이 뽑는 경우가 많았다.
[86]
임진왜란 때보다 약간 후대인
부북일기의 기록을 보면, 당대 최정예병이었을 함경도 군관들은 50발 중 43발을 맞추면 가장 못 쏘는 축에 들었다. 군관 이시복은 무려 200발을 연속으로 쏴서 모두 명중시켰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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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을 기준으론 무척 잘 쏘는 편이다. 5시 1순의 방식으로 쏜다면 적어도 2번은 몰기(모두 명중)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대한궁도협회의 승단 심사기준은 8단이 9순(45시)에 37중, 9단이 39중이다.
[88]
애초에 그랬으면 무과에 합격하지도 못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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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중년 정도 되면 평소에 몸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은 이상 몸이 조금씩 무너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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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서성의 경우는 문관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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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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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과 돌. 적들의 공격을 비유한 것이라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