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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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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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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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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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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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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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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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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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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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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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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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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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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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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중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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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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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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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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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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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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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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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항복(
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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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1. 개요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의 엘 알라메인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이다.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세를 뒤바꾼 대표적인 전투이며,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전차를 양측에서 동원한 전투다. 두 번의 전투가 있었고, 이 중 2차 전투가 유명하다.
2.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Battle of El Alamein |
|
북아프리카 전역의 일부 | |
1942년 7월 1일 ~ 27일 | |
교전국 | |
추축군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연합군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및 영연방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에토레 바스티코 |
]][[틀:깃발| ]][[에르빈 롬멜| ]][[틀:깃발| | ]][[틀:깃발| ]][[클로드 오킨렉| ]]
병력 | |
96,000명 전차 70대[1] 항공기 최대 500기 |
150,000명 전차 176대[2] 항공기 1500기 이상 1000문 이상의 야포 |
피해 | |
독일군 10,000여 명 사상[3] | 13,250명 사상 |
결과 | |
무승부(연합군의 전략적 승리) |
[clearfix]
2.1. 배경
가잘라 전투에서 연합군은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에 의해 재기불능 수준의 큰 타격을 입었고, 중동군 사령관 클로드 오킨렉은 6월 17일을 기해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게다가 가잘라 전투에서 너무 많은 물자와 장비를 집중시킨 탓에 토브룩의 방어태세가 크게 약화되게된다. 결국 가잘라 방어선이 무너지자마자 며칠 만에 토브룩이 함락되었고, 영국군은 3만 명이나 되는 포로를 내고 말았다. 또한 추축군은 토브룩에서 막대한 양의 식량/연료를 획득하여 마침 고갈되던 물자를 어느 정도 보충하였고, 이집트로 계속 진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공훈으로 다음날인 6월 22일, 롬멜은 원수로 진급했다.
클로드 오킨렉은 가잘라에서 메르사마트루까지 160여km를 후퇴했다. 하지만 병력/물자의 부족뿐만 아니라, 메르사 마트루의 지형상 쉽게 우회 및 포위당할 수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전쟁 전부터 건설한 요새가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방어의 핵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했다. 따라서 메르사 마트루는 일시적 진격 저지용도로 사용하고, 주 방어선은 150km 더 후퇴시켜서 엘 알라메인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엘 알라메인은 수십km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카타라 저지대 덕분에 기계화부대의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사막으로 우회한다는 전법을 써먹기 곤란하고, 방어선의 길이도 단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이집트 내부로 깊숙히 후퇴하는 셈인데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항구 하나인 알렉산드리아가 추축군 공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선에서 사소한 균열이 생겨도 함락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했다. [4]
2.2. 독일군의 문제점
영국군이 메르사 마트루를 사수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놓고 최종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토브룩에서 물자를 보충한 나치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을 재개한다. 요새가 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메르사 마트루는 함락되며, 연합군은 메르사 마트루 방어전에서 또 40여 대의 전차를 비롯한 피해를 입는다.그러나 엘 알라메인까지 영국군을 추격한 추축군에게 남은 전차는 단 70대로 손실율이 무려 80%에 달했다. 물론 영국군도 그 2배에 달하는 손실을 입긴 했지만 마침 본격화된 미국의 쇼미더머니급 리스 원조에 힘입어 단시간에 극복할 수 있었으나, 그에 비해 추축군은 수천km 수준으로 연장되어버린 보급선 때문에 단기간 전력 복구는 고사하고 당장 필요한 물자조차 제대로 수급할 수 없었다. 이미 6월 말 엘 알라메인에서 대치가 시작된 시점에서 영국군에는 소규모 장비 보충이 이뤄졌으며, 곧 전차 및 포병 자산에서 2배 이상의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가잘라 전투로 추축군의 사기는 최고조였으나, 돈으로 굴러가는 근현대전 특성상 이후 전투에서 양측의 사기가 역전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독일군은 토브룩의 항구를 통해 보급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토브룩 항 자체의 역량 부족, 연합군 공군의 직접적인 작전권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기대했던 만큼 이득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잘라의 패전을 듣고 영국 해공군이 더욱 기를 쓰고 추축군 보급선단을 작살내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불침항모 몰타가 지중해 중앙에서 버텨준 덕분에 추축군의 보급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5]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리비아에는 아직 쓸만한 유전이 개발되지 않았고, 정유시설도 없다시피 한 상태였으므로 모든 유류는 독일 본국에 의존하던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축군은 딜레마에 빠진다. 아프리카 군은 명백히 한계에 달해있었고 독일은 이를 온전히 지원해줄 전략적 역량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후퇴하자니 그간의 성과가 아까웠고 눈앞의 알렉산드리아가 너무나도 탐났다. 만약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다면 사실상 지중해 전체가 추축군의 지배 하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 알라메인 주변의 지형[7]때문에 롬멜의 장기인 우회 공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방어선 전면으로 공격하는 것 말고는 별 수가 없었다. 1942년 7월,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은 영국군의 방어선을 반복적으로 공격하며 돌파를 시도하였다. 다수의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8군은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유지하였고 이윽고 오친렉은 반격을 명령한다. 7월 26일 영국군의 반격으로 다시금 격전이 벌어졌으나 7월말 양측 모두 공세를 펼칠 여력을 상실하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투는 종료된다.
3. 전투 이후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의 공세는 저지했으나 영국군은 이집트 영토 깊숙히까지 밀려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고, 상술했듯 반격 작전도 실시했으나 영국군의 상황도 썩 좋지 않았기에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그러나 처칠은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공세를 펼치라고 요구하며 오킨렉과 갈등했고 이 과정에서 카이로까지 날아가서(...)[8] 오킨렉을 갈궜으며 결국 처칠의 신임을 잃은 오킨렉은 해럴드 알렉산더에게 중동 사령관 자리를 넘기고 인도로 전출, 후방지원만 담당하다가 종전을 맞게 된다.
한편 오킨렉이 직접 지휘했던 8군 사령관으로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 중장이[9] 착임하게 된다. 하지만 처칠의 기대와 달리 알렉산더와 몽고메리는 재편성과 방어에 전념했다. 이 때 몽고메리는 패배주의에 찌들어 롬멜을 찬양하던 부하들을 엄중히 질책했고,[10] 사상자까지 나올 정도로 고강도 훈련을 통해 부대 강화를 꾀했다. 또한 후방의 빵빵한 지원으로 8군의 규모는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이 때 독일 공군 제27전투비행단의 정찰기가 150 마일(=약 240Km) 속도로 8군 진지 주위를 돌고나니 10분이 걸렸다고 한다.
이 후 주도권은 완전히 뒤바뀌어 엘 알라메인 전선은 독일군이 방어하고 영국군이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 된다. 여기에 아프리카군의 증원/보급을 논의하기 위해 잠시 독일 본토로 돌아간 에르빈 롬멜에게 건강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당시 롬멜은 저혈압으로 인해 간혹 실신 증세를 보였으며, 위생이 열악한 사막에서 얻은 이질에다 위장병까지 앓고 있는 상태였고, 장기간의 피로가 누적된 상황[11]이었다. 결국 에르빈 롬멜은 본국에서 반강제적으로 요양을 하게 되고,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동부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게오르그 슈툼메 기갑대장에게 넘기게 된다.
4.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Battle of El Alamein |
|
북아프리카 전역의 일부 | |
1942년 10월 23일 ~ 11월 4일 | |
교전국 | |
추축군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연합군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및 영연방 [[자유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게오르그 슈튬메 †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리터 폰 토마|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에토레 바스티코 |
]][[틀:깃발| ]][[에르빈 롬멜| ]]
[[틀:깃발|
해럴드 알렉산더 [[틀:깃발| ]][[틀:깃발| ]][[버나드 로 몽고메리| ]] |
]][[틀:깃발| ]][[틀:깃발| ]]
병력 | |
116,000명 전차 547대[12] 장갑차 192대 항공기 770~900기 야포 552문 |
195,000명 전차 1,029대 장갑차 435대 항공기 730~750기 야포 892~908문 대전차포 1451문 |
피해 | |
사상자 및 포로 30,542명 500여 대의 전차 야포 254문 항공기 84기 |
13,560명 사상 및 실종 332~500대의 전차 111문의 야포 및 대전차포 항공기 97기 |
결과 | |
연합국의 승리, 독일의 북아프리카 유지 능력 상실 |
[clearfix]
4.1. 배경
8월 13일, 지난 7개월 동안 궤멸 직전의 타격을 받은 영국군 중동군 사령관으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부임했다. 몽고메리는 전임자인 클로드 오킨렉의 후퇴계획을 보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그따위 계획은 있을 수 없다. 10m라도 후퇴할 때는 우리 병력이 반 이상 줄어들었을 때다.”
그리고 그는 패배 의식에 젖어 있는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서두르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준비해나갔다.
반면 롬멜은 영국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 그리고 연합군의 지뢰밭이 너무 밀집되어 돌파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공격을 해야한다는 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결국 1942년 8월 30일 밤, 롬멜은 몽고메리의 제8군을 공격했는데 작전의 성패는 속도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남쪽 접근로는 카타라 저지대(Qattara Depression)로 막혔기 때문에 우회 기동에 제약을 받았고, 접근로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 데 하룻밤을 소비해야 했고, 가까스로 그곳을 돌파하여 알람 엘 할파 능선을 공격했으나 그랜트 전차에 매복 당해 독일군은 49대의 전차를 잃고 퇴각한다. [13]
결국 이탈리아 유조선 3척( Sanandrea, Abruzzi, Picco Fascio)이 격침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연료부족으로 선봉을 맡던 기갑사단은 피해를 입고 원 전선으로 후퇴했다. 이 알람 엘 할파 전투(Battle of Alam el Halfa)는 이집트로 향하는 추축군의 마지막 대공세가 되었다.
그 후 롬멜은 전투력 열세·보급지원 악화 등을 고려해 엘 알라메인을 고수하기로 방침을 결정한다. 그리고 전면(全面) 60㎞ 에 8㎞ 의 폭으로 50만여개의 지뢰를 매설하여 일명 악마의 정원이라는 거대한 지뢰지대를 만들었다. 만약 영국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려면 이곳을 돌파할 수 밖에 없었다[14].
그러나 당시 영국군 제8군과 독일군 아프리카 기갑군은 개요에 나와있듯 심각한 수준의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기갑군의 보급물자는 480㎞ 떨어진 토브룩, 960㎞ 떨어진 벵가지, 더 멀리는 1,920㎞ 떨어진 트리폴리 항구에서 내린 다음 트럭이 사막길로 수송해야 했는데, 도중에 영국 공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에르빈 롬멜은 이 보급문제로 독일 본토로 잠시 귀국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기갑군이 필요한 보급물자는 월 3만t이었으나 실제로 받은 것은 6,000t에 불과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롬멜이 고된 업무와 척박한 환경 때문에 병으로 앓아눕게 되었고, 슈툼메로 사령관이 교체되었다.[15]
이에 비해 영국군은 1942년 8월~10월 동안 엘 알라메인에 매일 증원군이 도착하여 총 병력 41,000명, 야포 800문[16]과 1,000대의 전차가 보충되었고, 그 전차들 중에는 미국의 M4A1 300대와 M4A2 18대도 있었다.[17] 이는 그 당시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이 티거, 판터는 고사하고 M4 셔먼을 상대할 수 있는 4호 전차 F2형을 불과 30대 밖에 보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절망적인 차이였다.
4.2. 전투 과정
드디어 8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는 반격의 신호탄이 되는 라이트 풋 작전의 개시일을 1942년 10월 23일로 정하고 주공을 북부의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로 택했다. 오후 9시 30분 영국군 폭격기의 출격을 시작으로, 곧 이어 900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방어시설과 지뢰지대가 상당수 무력화되었다.그러나 롬멜과 슈툼메가 악마의 정원을 비롯해 방어준비를 철저히 해놓은 덕분에[18] 이런 폭격/포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진지와 지뢰밭이 여전히 많았다. 게다가 악마의 정원 뒤에는 88mm 대공포와 전차들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지뢰를 제거하려던 공병들은 온갖 포탄 세례를 뒤집어썼고 전차들은 대전차 지뢰에 발이 묶여서 후속 포격에 작살나기 일쑤로 전투 초반 영국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10월 23일 방어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폴고레 공수사단에 영국군 제7기갑사단, 44, 50보병사단, 자유프랑스 제1사단, 그리스 여단등이 공격하지만 폴고레 공수사단의 분전으로 3일간의 전투 끝에 격퇴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말이 사단이지 사실 7개 대대, 3500여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대전차 능력이 부족해지자 일본군이 할법한 대전차근접전과 대전차포의 연계공격으로 110대의 전차를 격파한다.
이 와중에 영국군의 야포 사격으로 독일 통신시설이 괴멸되는 바람에 아프리카 기갑군 사령관 슈툼메는 뷔휘팅 대령을 대동하고 전선을 확인하러 나서게 된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지휘차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총탄을 맞은 뷔휘팅이 절명하고 슈툼메는 그 충격으로 심장병이 발작해 죽고 말았다. 게다가 이런 사고가 난 것 자체를 한동안 추축군이 몰랐기 때문에 슈툼메 대장은 실종으로 보고됐다.
반면 영국군도 예상 이상의 병력 손실로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영국군의 입장에서 최대의 위기는 10월 24일~10월 25일 밤에 벌어졌다. 엘 알라메인 전역이 아비규환이 되어 영국군이나 독일군 어느 쪽도 승패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25일까지 영국군 보병은 6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고[19] 전차는 130대가 파괴됐다. 몽고메리의 참모장과 제10·제30군단장은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보고 몽고메리에게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이렇게 응대했다.
“아직도 사용 가능한 전차가 900대나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
한편 전선의 소식을 듣고 다급해진 히틀러는 롬멜을 복귀시키지만, 노련한 롬멜로서도 별 수가 없을 정도로 전황은 나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10월 25일에 롬멜은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가고 아프리카 기갑군의 탄약과 전차 연료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10월 26일, 영국의 제9사단[20]이 북쪽에서 8㎞의 지뢰밭을 돌파했다. 북부에 대한 거센 돌파 시도에 롬멜은 영국국의 주공이 북쪽임을 확신했다. 롬멜은 예비대인 제90경기갑사단을 해당 방면에 투입하고 남방 50㎞ 지역에 있던 제21기갑사단도 북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21] 그러나 항공정찰로 롬멜이 정예부대를 북쪽에 투입한 사실을 간파한 몽고메리는 북부의 영국군 주공을 남쪽으로 8㎞ 지점인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전투지경선으로 이동시켰다.
11월 2일 오전 1시, 영국군의 슈퍼차지 작전이 개시되었다. 오전 5시 30분 전차가 길을 열어놓은 보병 사이를 뚫고 전진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는 돌진해오는 영국군 제9기계화여단의 전차를 차례로 격파했고, 제9기계화여단은 적진에 돌입해보지도 못하고 뭉그러지고 말았다. 이에 몽고메리는 2개 여단의 전차를 새로 투입했고 롬멜도 2개 기갑사단으로 하여금 양측에서 반격토록 했다. 전차전은 하루 종일 계속됐다. 전투가 끝날 무렵 독일군의 전차는 35대로 줄어들었고, 결국 독일군에게 반격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롬멜은 철수는 절대 안 된다는 히틀러의 말을 무시[22]한 채로 11월 2일 당일, 철수를 시작했고, 11월 3일 히틀러도 이 철수를 인정한다. 공군 운용에는 좀 꽝이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오폭을 우려해서 추격을 망설인 것도 있고, 마침 운좋게 기상이 악화되어 영국 공군의 공습이 효과적이지 못해 추축군의 잔존 병력은 영국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롬멜 장군은 아프리카 기갑군을 리비아로 귀환시키기 위한 작전을 계획, 후퇴를 개시했다. 우선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샬롬과 할파야 고개까지 후퇴한 뒤 매복하여 추격해오던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에도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줄 기회는 몇번이나 있었지만 대 전투 이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독일군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이후 히틀러는 롬멜을 다시 불러들여서 노르망디 방어를 맡겼다.
4.3. 연합군 전투서열
자세한 내용은 중동사령부 문서 참고하십시오.4.4. 결과
독일은 북아프리카 전역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내 군대를 구해내자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오. 우리는 지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날들을 눈 앞에 두고 있소
PS. 죽은 자들이 행운아요,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 에르빈 롬멜 장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
PS. 죽은 자들이 행운아요,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 에르빈 롬멜 장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편 영국군도 하루만에 중대 몇 개가 소멸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어떤 영국군 장교는 "이겼는데 이겼다는 기분이 안든다."고 말했을 정도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3만 명에 포병 전력은 전체의 85~90%가 괴멸되었다.[23] 반면 영국군의 사상자는 1만 5000명이었는데 문제는 기갑 전력의 피해가 극심하여 상당수의 영국군 기갑 부대가 아예 전멸해 버렸을 정도다. [24]
아무튼 이 승리로 몽고메리는 영국 최고의 육군 지휘관으로 부상했고 후에 원수까지 오르지만, 여기서 "밀어붙이면 다 된다"와 "병사는 소모품"이라는 고집을 가지게 되어,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의 대참사를 부르게 된다.[25]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의 철수를 결정하고 전쟁물자와 부대들을 북아프리카에서 탈출시킨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 영국, 자유 프랑스군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해안지대에 상륙작전을 감행한 횃불 작전이 성공했다. 이후 연합군은 1943년 5월 13일에 튀니지 전역에서 승리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역은 막을 내리게 된다.
엘 알라메인 전투는 같은 해 6월의 태평양 전선의 미드웨이 해전,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더불어 연합군이 1942년에 거둔 값진 승리이자 2차대전의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에 대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수상의 다음 두 어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비록 이번 승리가 전쟁의 끝, 혹은 '끝의 시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시작의 끝'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26]
"엘 알라메인 이전까지 우리는 승리를 맛보지 못했지만, 엘 알라메인 이후에는 더 이상 패배를 맛보지 않았다."
4.5. 평가
4.5.1. 추축국 측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기갑군은 부족한 현지 병력/물자와 병참 역량이라는 전략적 불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지난 전역 내내 영국군에게 더 많은 피해를 강요하였고, 만약 추축국의 보급이 연합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작전술의 귀재인 롬멜이 유리한 승부를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27] 물자난 때문에 단순히 '독일군은 보급을 경시한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보급을 신경썼다면 롬멜은 애초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 안됐다. 애초에 히틀러가 롬멜을 아프리카에 보낼 때 내린 명령은 단 하나, 졸전 중인 이탈리아군을 지원하여 궁극적으로 지중해 상실을 막는 것이면 족했다.물론 보급상황에 따른 작전 수립, 최고사령부에서 내린 방어임무에 충실하는 것도 정답이다. 하지만 야전 사령관으로서 불리한 전황을 타개할 수 있는 작전을 채택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걸 롬멜은 소수의 병력만으로 모든 면에서 우세했던 영국군을 상대로 실제로 해냈다. 다만 동부전선에 모든 관심이 쏠린 독일 본국과 부실한 이탈리아 해군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승리로 연장된 보급선을 지원할 역량이 되지 못했다. 또한 수복한 영토들도 유의미한 물자를 얻기 힘든 척박한 환경으로 영국군의 보급을 탈취해야 했으며 탈취를 위해서는 공세를 펼쳐야했다.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를 가시권에 둘 정도로 진격한 것이 오히려 대단한 셈이다. 그리고 롬멜이 시킨대로 수세적으로 나섰다면, 당시 제공권, 제해권을 전부 상실한 상황에선 추축군은 더욱 무난하게 북아프리카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만약 추축국이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을 분쇄했다면, 2차대전은 추축국의 승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우선 지중해 전역을 추축군이 통제하게 되어 중동지역에서의 안정적인 석유 수송과 영국본토와 인도 간 보급선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또한 중동을 거쳐 동부전선의 남부집단군과 합류하여 소련의 캅카스 지역을 공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다간 패할게 뻔했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나선 도박적인 공세 끝에 이런 대승리를 목전에 두게되었다면 그 어떤 지휘관이라도 공격을 택할 것이다.
즉, 엘 알라메인의 패배는 오직 롬멜의 무리한 공격만이 원인이라기보단, 대전략 방침을 고작 '야전군 사령관'의 능력에 끌려다닌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 책임도 크다고 볼 수 있다.[28] 불리한 입장에서 이 정도 성과를 낼 줄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최고사령부는 전선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면 롬멜이 폭주하기 전 인선을 교체하던가, 지중해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쳤다면 아프리카 기갑군을 확실히 지원하여 이집트의 영국군을 파괴해야했다. 그러나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아득바득 엘 알라메인까지 끌고올동안 독일 수뇌부는 롬멜의 전과와 병참 한계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29], 결국 전력은 전력대로 소모하고 성과는 그저 북아프리카에서 1년 더 버티는 것에 그치게 된다.
4.5.2. 연합국 측
유명한 장성들이 정면 충돌한 전투라서 그런지 상술했듯 "독일군이 보급만 제대로 받았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 몽고메리는 보급을 다 받고 이긴 것이다."라는 가정이나 VS놀이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보급선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장시킨 장본인이 바로 롬멜 자신이었다. 그리고 크레타 섬 전투 이후 공수작전 금지로 몰타를 제압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애초 전쟁에서 "이렇게 했으면 이겼을거"라는 쉴드는 먹히지 않는다. 운이 안 좋았건 실수를 했건 결과는 패배였다.또한 보급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전쟁에서 핵심 요소였음을 생각하면 롬멜은 자국의 병참역량을 가늠하지 않은채 작전을 짠, 무모한 장군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보급을 경시했다는 것도 사실이기도 해서,[30] 괜히 보급 차이를 운운하는건 롬멜을 더 저평가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31] 물론 몽고메리가 보급 상황이 더 좋았던 것은 맞긴하나, 그것으로 8군을 강화시킨 것은 엄연히 몽고메리의 능력이다.
게다가 롬멜이 작전술 운용만큼은 탁월했음을 고려하면, 본 전투의 교환비도 1:2 이상으로 우월했기에[32] 몽고메리가 무능력했다고 보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몽고메리가 아프리카 기갑군의 반격 가능성을 완전히 분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군 손실이 높은 것은 비판받을만하나 충분한 보급으로 적을 압도하여 승리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고, 그 기본을 잘하는 것이 명장이란 점에서 몽고메리에게 찬사가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5. 매체에서의 등장
이탈리아에서 영화화한 적이 있다. 덕분에 당시 이탈리아군의 무기를 여럿 볼 수 있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웹연재본에서는 랩 배틀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출판본에서는 리듬 게임 배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은하철도 999 TV판 에피소드 중 하나에는 엘 알라메인 행성이 등장하는데, 이 전투에서 모티브를 얻은 행성이다. 사람은 하나도 없고 사막에 가득 버려진 전차만 등장하는 곳으로, 배경과 스토리로 전쟁의 허무함을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반전 에피소드이다.
강철의 왈츠 특수미션중 하나인 알라마니 전투지역이 이곳에서 이름을 땄다.
퓨리(영화)의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이 영화화 준비 중으로 알려져 있다.
레고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1차 엘 알라마인 전투를 재현한 영상이 있다.
콜 오브 듀티: 뱅가드에서 루카스 릭스로 플레이한다.
[1]
이 중 55대는 독일군 전차, 15대는 이탈리아군 전차, 그외 다수의 전차는 수리중...
[2]
그리고 그외 902대의 전차가 수리중...
[3]
이탈리아군의 피해는 잘 알려지지 않음, 다만 7000여명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포로를 연합국이 사로잡음
[4]
여기에 지난 전투의 패전의 책임도 있었기에, 클로드 오킨렉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5일, 중동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헤롤드 알렉산더 대장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5]
그런데, 그
몰타를 공략할 여력을 빼돌린 건 다름아닌 롬멜 본인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충수였던 셈이다.
[6]
당연히 그 당시 독일군 상황으론 불가능한 길이었고 에르빈 롬멜이 까이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7]
북쪽엔 지중해, 남쪽으로는 카타라 저지대(Qattara Depression)가 있어 우회 기동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카이로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8군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했다. 정 우회를 하고 싶다면 남쪽으로 크게 돌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야하는 문제가 있었다.
[8]
물론 오킨렉을 갈구려고 간건 아니고 다른 일 때문에 카이로에 간 김에 오킨렉도 갈군것이다. 아무리 처칠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지휘관 갈구려고 런던에서 카이로까지 먼 길을 갈 리가
[9]
본래는 고트 중장이 임명되었으나 이동 도중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사망하면서 몽고메리가 임명되었다.
[10]
"적군"이나 "그 자"라는 말은 허용됐지만,
에르빈 롬멜이라는 단어를 8군의 금지어로 만들어버렸다.롬멜의 볼드모트 화
[11]
그의
주치의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거듭 권했으나
에르빈 롬멜은 그 충고를 무시하고 영국군만 잡는데만 골몰해서 병을 키웠다.
[12]
이 중 249대는 독일군 전차, 298대는 이탈리아군 전차.
[13]
사실 여기도 뒷 배경이 있었다. 토브록에서의 패배를 분석한 몽고메리는 롬멜이 남쪽 공격로를 채택하리라 예상한다. 알람 엘 헬파 능선은 13군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몽고메리는 이쪽 지형이 물러 기갑군의 기동이 제약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몽고메리는 미끼를 하나 던져놓는데, 이쪽의 지형이 전차 기동에 적합하다고 암시하는 지도가 담긴 차 한 대를 양군 사이의 무인지대에 버려 두었고, 독일군은 미끼를 물어버린다. 8월 30일 롬멜은 조공을 맡은 보병부대로 하여금 8군 방어선의 북쪽을 공격하게 했고, 이탈리아와 독일군의 전차 515대로 이루어진 주공은 남쪽의 알람 엘 헬파 능선을 돌파하고자 무른 지형을 통과하며 진격한다. 무른 지형은 추축국 기갑부대의 진격을 늦췄고 지뢰밭은 파멸적인 손실을 야기했으며, 이어서 13군단의 300여대의 전차와 수백문의 대전차포, 64개의 야포반이 불을 뿜었다. 이로인해 독일군 제21기갑사단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고 독일군은 퇴각한다.
[14]
단순히 지뢰만 발라 놓은 것은 아니고, 지뢰밭 뒷쪽으로는 88mm 대공포를 위치시켰다. 공병에 의한 지뢰 개척은 그 개척로의 폭이 굉장히 좁아지는데, 대체로 전차 한 대 정도 지나갈 정도다. 그 만한 폭을 지나다 보니 안그래도 개척하느라 느려진 속도는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88mm에게 좋은 표적지가 되어 기갑군의 손실이 유독 커졌다.
[15]
슈툼메도 무능한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운이 엄청나게 좋지 않았다.
[16]
이들 중 대부분이 높은 신뢰성과 준수한 화력으로 현재도
대한민국 국군이 운용중인 105mm
M2A1였다.
[17]
태평양 함대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을 개박살내고 여유가 생기자 도서지역 공략을 위해 쟁여뒀던 전력을 보내준 것이다. 당시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제식 명칭은 셔먼 Mk.II.
[18]
지뢰를 얼마나 깔았는지, 전투 후 포로로 지뢰제거작업을 대대적으로 거쳤는데, 70년이 넘어간 2010년대까지도 지뢰가 발견되거나 폭발한다.
[19]
지뢰와 같이 묻어둔 110㎏ 짜리 폭탄은 1개 소대 장병 30명을 순식간에 하늘로 날려버리기도 했고, 제42 스코틀랜드 연대의 1개 대대에서는 새벽이 오기 전까지 7명의 향도 장교가 사망 또는 중상을 입었다.
[20]
호주군
[21]
심지어 이 부대들은 다시 복귀할 연료도 없던 상황이었다.
[22]
아프리카군단장 리터 폰 토마 중장은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철수 불허 명령에 분노하여 스스로 영국군 주둔지로 차량을 몰고 가서 항복했다.
[23]
타군의 포병대와 달리 당시 대부분의 독일 포병대는 대전차포병(88대공포병)이었기에 전차와 전면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24]
이 전투를 묘사한 모 게임에서 영국군 전차가 20대로 시작해서 미션 끝날 때 2대만 남는게 현실에서 더 큰 피해로, 더 높은 수치로 매일마다 일어났다는 것...
[25]
사실 이건 몽고메리 특유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격까지 겹쳐진 문제다. 마켓 가든 작전은 실행 전에 참모들과 일선 지휘관들의 반발과 걱정이 있었지만 몽고메리는 듣지 않고 무시했다.
[26]
간단히 말해서 "적어도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다.
[27]
다만 독일군이 방어를 했기에 연합군에게 대출혈을 강요하게 된 점도 있다. 애초에 엘 알라메인에 방어선을 친 것이 우회기동이 제한되는 지형상의 특징 때문이었던 것이니 만큼 당초에 연합군이 누리던 방어상의 이점이 반대로 독일측에 유리하게 작용것이다.
[28]
물론 근본적으로는 추축국의 전쟁역량 부족이 원인이다.
[29]
당장 영국군이 대규모 반격을 벌일때 마다 그 소식을 들은 독일 수뇌부는 이제 롬멜이 한방 먹겠네!하고 기뻐했으나 롬멜은 매번 기적처럼 반격 기동전으로 극복해냈다.
[30]
아프리카에 적용 가능한 보급체계상 한계가 있다는 총참모장 할더 상급대장의 말에 롬멜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당신 일이잖소?"라고 대꾸했는데 이때 롬멜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31]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가 보급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독일해군은 잠수함이 아니고서야 지중해 진입이 불가능했고, 대전동안 이탈리아의 보급 상선 70%가 손실되었다. 이는 이탈리아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보급을 시도했음을 의미한다.
[32]
자료에 따라서는 1:4까지 벌어지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