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호프 전투 러시아어: Любанская оборони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Опера́ция по выводу из окружения 2-й ударной армии[2] 독일어: Schlacht am Wolchow[3] 영어: Escape of the 2nd Shock Army Operation[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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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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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하단, 돌출부 제거를 시도하는 독일 국방군 | ||
시기 | ||
1942년 5월 13일 ~ 7월 10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FSR 볼호프 강 서쪽, 노브고로드와 류반 사이 소련군 돌출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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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
포위망에서 탈출하려는 제2충격군 독일군의 제2충격군 섬멸 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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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안드레이 블라소프| ]] (제2충격군 사령관) |
]][[틀:깃발| ]][[틀:깃발| ]] 미하일 호진
[[틀:깃발| (북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 린데만| ]] (제18군 사령관) |
]][[틀:깃발| ]][[게오르크 폰 퀴힐러| ]]
결과 | ||
소련 제2충격군 전멸 | ||
영향 | ||
북부 전선 안정화 전선이 류반 공세 시작 이전으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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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병력 231,900명 | |
피해 규모 |
전사/실종 54,774명 부상 39,977명 |
전사 4,000명 실종/포로 700명 부상 19,000명 |
[clearfix]
1. 개요
제2충격군 철수 작전 혹은 류반 구원 작전은 류반 공세 이후 볼호프 전투의 후반부로 독일군의 본격적인 반격이 이루어진 시기다. 대신 전장이 볼호프강 전체에서 소련군의 돌출부로 축소됐다. 소련군은 돌출부를 지키는 게 무리라고 판단하고 철수를 결정했으나 그 전에 독일군이 먼저 공세를 펼치면서 제2충격군을 구하는데 실패했다.류반 남쪽 제2충격군의 돌출부는 일멘 호수를 경계로 바로 밑에서 동시기에 펼쳐진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제16군의 돌출부와 거의 같은 형태인데 차이점이라면 소련군의 돌출부는 좁은 회랑이 짧은 대신 강 건너라 방어가 불리하고 독일군의 돌출부는 바로 강 건너는 아니지만 좁은 회랑이 매우 길어 방어가 불리하다는 점이 있다.[5] 소련군에게는 굉장히 희귀한 경우로 현장에서도 스타브카에서도 돌출부를 포기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을 내린 경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국 소련군은 자신들의 돌출부는 지키는데 실패하면서 2충격군이 섬멸됐고 독일군의 돌출부는 제거하지 못해 2군단이 반 년간 더 버티다가 후방으로 철수하게 된다.
2. 전투 서열
2.1. 독일군[6]
-
북부 집단군 ( 사령관 :
게오르크 폰 퀴힐러 상급대장[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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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군 ( 사령관 :
게오르크 린데만 기병대장[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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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련군[9]
-
레닌그라드 전선군[10] ( 사령관 : 미하일 호진 중장[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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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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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충격군 ( 사령관 :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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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5월 초에 호진은 류반으로 공세를 펼치기 위해 2충격군을 강화할 계획을 세우고 후방에 6근위소총군단을 새로 편성했다. 그러나 돌출부 내부의 상황을 확인한 결과, 공세는 불가능했다. 호진은 11일에 스타브카에 2충격군을 아예 볼호프강 서쪽으로 탈출시키거나 최소한 미야스니 보르에 있는 약 3km정도 너비의 지협을 확장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스타브카에서는 아예 2충격군을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17일부터 철수 작전이 시작됐다. 극도로 좁은 지협만이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었으며 독일군은 22일부터 즉각 이 지협을 차단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5월 24일에야 돌파 허가를 받은 2충격군도 안에서 호응하기 시작했지만 독일군은 압도적인 포병 화력과 공군력을 동원에 좁은 지협에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1군단은 돌출부 서쪽을 공격하면서 적의 탈출을 막았고 주력부대는 지협 북쪽을 공격했고 38군단은 지협 남쪽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부대가 전멸할 때까지 지협을 방어했으나 포위망 외부에 있던 부대들이 호응하지 않아 30일에 지협이 독일군에게 넘어가면서 소련군은 완전히 포위됐다. 안에 갇힌 부대들은 약 40,000명으로 모두 2충격군 휘하에 배속됐고 동쪽의 52군과 59군에게 2충격군을 구출하라는 임무가 하달됐다.
이후 계속해서 지협을 탈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나 독일군이 계속 증원되면서 더 이상 지협을 탈환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스타브카는 6월 8일에 호진을 해임하고 다시 전선군을 두 개로 분할하여 레닌그라드 방면군은 고보로프 중장 휘하에 레닌그라드 전선군으로, 볼호프 방면군은 메레츠코프 대장 휘하에 볼호프 전선군으로 재편했고 더욱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19일에 잠시 2충격군과 59군이 연결되기는 했으나 수백미터에 불과한 너비의 통로였고 곧바로 독일군이 탈환했다.[13] 그리고 22일에 독일군이 포위망을 정리하기 위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하자 2충격군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 포위망 내부에는 약 24,000명이 있었으나 24일에 블라소프는 최후의 돌파 명령을 내렸고 소련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27일까지 사라졌다. 메레츠코프의 공세도 27일에 중단됐으며 7월 11일에 숨어있던 블라소프가 잡히면서 2충격군은 사라졌다.
4. 결과
독일군의 보고에 따르면 32,759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2충격군은 5월 30일까지 탈출한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전멸했다. 이에 1942년 전반기에 진행된 소련군의 마지막 공세가 종료되었다. 블라소프는 이미 포위된 2충격군에 사령관으로 부임해 부대를 탈출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전선군 사령부가 구출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전멸을 피할 수 없었다. 소련군은 이후 43년 2월 북극성 작전 시기까지 볼호프 강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으며 대신 제3차 시냐비노 공세와 제4차 시냐비노 공세를 비롯하여 시냐비노를 비롯한 라도가 호 남쪽 약 15km정도의 좁은 회랑[14]을 탈환하기 위한 제한적 공세를 펼치게 된다.
[1]
류반 방어작전
[2]
제2충격군 철수작전
[3]
볼호프 전투
[4]
제2충격군 탈출작전
[5]
양 쪽 다 철수하는게 상식적으로 맞는데 서로 배짱 싸움을 했다.
[6]
5월 11일 기준
[7]
6월 30일에 원수로 진급
[8]
7월 5일에 상급대장으로 진급
[9]
6월 1일 기준
[10]
4월 23일부터 두 전선군이 합쳐진 상황이라 3곳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레닌그라드 방면군은 서쪽 오라니엔바움 교두보와 레닌그라드를, 볼호프 방면군은 볼호프 강을 담당하고 있었다.
[11]
6월 8일에 해임되고 다시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볼호프 전선군으로 분리되면서 각각
레오니트 고보로프 포병중장과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으로 교체
[12]
8군,54군,4군은 돌출부 북쪽에 배치되어 류반 구원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3]
류반 공세와 구출 작전 내내 독일군은 이 돌출부 섬멸을 북부 집단군의 생명줄이라 보고 온갖 예비대를 다 투입했으나 정작 소련군은 통로 확보에만 매달리고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4]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볼호프 전선군 사이의 좁은 구역으로
슐리셀부르크 일대를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