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만 전투 Сражение под Умань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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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날짜 | 1941년 7월 15일 ~ 8월 8일 | ||
장소 | 소련 우크라이나 SSR 우만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이반 튤레네프| ]] [[틀:깃발| ]][[틀:깃발| ]][[미하일 키르포노스| ]] |
]][[틀:깃발| ]][[세묜 부됸니|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칼 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
]][[틀:깃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결과 | 나치 독일의 대승. 이후 나치 독일 전략에 지대한 영향 | ||
전력 | 30만 명 | 40만 명, 전차 600여 대 | |
피해규모 | 10만 명 사상, 10만 명 포로, 전차 600여 대 파괴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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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1년 7월부터 8월까지 우크라이나 서부 우만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독일군이 대규모 포위전을 통해 적지 않은 소련군 전력을 소모시켰지만 이후 독소전쟁의 분기점이 되는 결정의 원인이 된다.2. 전투 배경 및 전개
독일군 남부집단군의 모습.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의 막이 올랐다. 북부, 중부, 남부의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말 그대로 폭풍처럼 소련군을 밀어붙였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향해 진격해나갔고 주공인 중부집단군은 경이로운 포위섬멸전을 펼치며 소련군을 닥치는대로 갈아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남부집단군이었다. 남부집단군은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를 밀어버려 필요 전쟁 지속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반대로 소련을 굶어 죽이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개 기갑집단만을 보유한 나머지 돌파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세가 둔화되고 말았다.
남부집단군의 최초 전략은 우크라이나를 카르파티아 산맥을 중심으로 남, 북으로 나누어 제6, 17군과 제1기갑집단이 북쪽으로 뚫고 들어가면, 루마니아 근교에 배치된 제11군과 루마니아 제3, 4군이 베사라비야를 거쳐 진격한 후, 약 650여 킬로미터 후방인 드네프르(Dnieper) 강에서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젖줄인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의 방어문제가 대두되었고 결국 제11군과 루마니아군은 공격에서 제외되었다. 남부집단군은 그럼에도 리보프, 테르노필을 점령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중 독일 제1기갑집단이 목표지점인 키예프 근교 브로디에 도달하자 소련군은 2,500대의 전차를 동원해 방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독일 전차의 25%가 파괴되면서 남부집단군 전체의 공세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었다. 한편 플로에슈티 유전에 배치된 11군과 루마니아군도 베사라비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핵심 선봉대인 제1기갑집단의 손실이 적지 않았고 결국 키예프 초입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렇다고 중부집단군이 도울 수도 없던게 이미 벨로루시를 휩쓸면서 300km 이상 진격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로포노스의 효과적인 전력운용으로 인해 전진은 더 힘들어졌다. 그렇게 남부집단군 전체의 진격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 사이 소련은 세묜 부됸니가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부됸니는 기존에 선전하던 키로포노스의 권한을 보장하였고 덕분에 소련군의 손실 감소를 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이 난데없이 키예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키예프로 보내버렸다. 사실 키예프가 물자이동의 중심지였지만 전략의 중요성을 따져보면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멈춰있던 독일 남부집단군은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였다. 제6군이 키예프로 나아가 남서전선군을 견제하는 동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제1기갑집단과 슈퇼프나겔의 제17군이 키예프 남부로 크게 우회한 후 우만 일대의 남부전선군을 뒤를 때리기로 했다. 당시 우만에는 소련군 제6군과 12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7월 15일 1기갑집단과 17군이 키예프 남부로 진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부됸니는 이걸 키예프 때리러 오는 줄 알고 키예프 서부의 제5군과 26군을 철수시켜버렸다. 이 때문에 우만으로의 전진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쾌속으로 진행되었다. 16일 독일 제1기갑집단이 코지에틴을 점령하자 남부전선군의 북측면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런데 부됸니와 스타프카는 여기서도 헛발질을 한다. 이들은 독일 제1기갑집단이 드네프르 강 연안 체르카시로 나아가 키예프로 오는 물자를 차단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부됸니는 반대로 제1기갑집단을 때려잡자는 작전안을 설계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제1기갑집단이 우측으로 90도 꺾더니 우만 동쪽 페르포마이스크로 전진해버렸다. 이를 안 부됸니는 크게 당황하였다. 더욱이 독일 제17군까지 빈니차를 쓸어버리고 우만 정면으로 도착했다. 또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가 지휘하는 독일 제11군도 우만 남부 두보사리 쪽으로 북상 중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명령 때문에 병력은 움직일 수 없었고 8월 2일 클라이스트와 쇼베르트가 페르포마이스크에서 만나면서 30만의 소련군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부됸니와 남부전선군 사령관 이반 튤레네프는 스탈린에게 계속 후퇴 명령을 읍소했지만 스탈린은 "그런거 없으니 닥치고 지켜라"라는 답만 줄기차게 보냈다. 8월 5일 부됸니가 간신히 허락받고 병력을 드네프르 강 동안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미 손실이 20만을 넘긴 상황이었다. 결국 8월 8월 10만의 병력이 항복하는 것으로 전투는 막을 내렸다.
3. 전투의 영향
우만이 함락된 후 소련군 패잔병이 키예프로 밀려들어가면서 독일군 쪽으로 키예프에 커다란 돌출부가 형성되었고 이 때문에 독일군은 키예프 공략에 애를 먹게 되었다. 그렇다고 묶어만 두고 전진하기엔 키예프에만 70만의 병력이 있어 차후 뒤통수가 위험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때문에 격한 논쟁이 독일군 지휘부에서 벌어졌고, 결국 히틀러는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모스크바를 목표로 진격 중이던 중부집단군을 일단 정지시키고, 병력을 차출해서 키예프를 공격하기로 한 것. 이 때문에 (겨울을 앞두고) 모스크바 공방전은 더 늦어지게 되었다.다만 냉전 종식 후에는 키예프의 소련군을 무시하고 바로 진군했다고 한들 모스크바 공방전에 별 영향을 끼치지도 못함은 물론 도리어 후방이 위험해졌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