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전역 영어: North African campaign 프랑스어 : La campagne d'Afrique du Nord 독일어 : Afrikafeldzug 이탈리아어 : La campagna del Nordafrica, guerra nel deser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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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시기 | |
1940년 6월 10일 ~ 1943년 5월 13일 | |
장소 | |
북아프리카 | |
교전국 |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미국| ]] [[이집트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자유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그리스 망명정부|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해럴드 알렉산더| ]] [[틀:깃발| ]][[틀:깃발| ]][[아치볼드 웨이벌| ]] [[틀:깃발| ]][[틀:깃발| ]][[클로드 오킨렉| ]] [[틀:깃발| ]][[틀:깃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틀:깃발| ]][[틀:깃발| ]][[조지 S. 패튼| ]] |
]][[틀:깃발| ]][[버나드 로 몽고메리|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탈로 가리볼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우고 카발레로 [[틀:깃발| ]][[틀:깃발| ]][[조반니 메세| ]] [[틀:깃발| ]][[틀:깃발| ]][[에르빈 롬멜|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루트비히 크뤼벨[1] [[틀:깃발| ]][[틀:깃발| ]][[발터 네링| ]]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리터 폰 토마| ]] [[틀:깃발| ]][[틀:깃발|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 [[틀:깃발| ]][[틀:깃발| ]][[핫소 폰 만토이펠| ]] [[틀:깃발| ]][[틀:깃발| ]][[알베르트 케셀링| ]] |
]][[틀:깃발| ]][[이탈로 발보| ]] †
결과 | |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추축군의
이탈리아 반도로 후퇴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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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피해 규모 | |
[[틀:깃발|
영국 -35,478명 사망 -포로 및 실종 184,522명 [[틀:깃발| ]][[틀:깃발| ]][[미국| ]] -2,715명 사망 -6,528명 실종 [[자유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16,000명 사망+부상+실종 -주요 장비 항공기 1,400대 전차 2,000대 |
]][[틀:깃발| ]][[틀:깃발|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22,341명 사망+실종 -포로 340,000명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18,594명 사망 -포로 및 실종 133,400 -주요 장비 항공기 8,000대 전차 2,550대 야포 6,200문 |
1. 개요
<colbgcolor=#666> 1941년 6월, 배틀액스 작전 당시 진격하는 독일군 3호 전차 G형 |
2. 배경
나치 독일이 전 유럽을 휩쓸고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마저 빈사상태로 보내버리려던 시점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에 붙는게 이득이 될거라고 판단하여 추축군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당당하게 프랑스에 살짝 발을 들이밀었는데 소수의 프랑스 국경경비대에게 역관광당하는 바람에 잠시 체면이 구겨지긴 했으나 프랑스의 항복으로 서유럽 대륙에서의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이탈리아도 별로 한 건 없지만 추축군 자격으로 은근슬쩍 인접한 프랑스 영토와 식민지 일부를 점령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어쨌든 유럽의 주요 지역은 독일이 정리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본토 침공을 목표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탈리아는 그 틈새시장을 노리기로 결정하였다.[2] 이에 주목한 곳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영국 식민지[3]들과 발칸반도였다. 일단 독일이 이쪽을 노릴 생각은 별로 없어보였고 당시 관점에서 독일이 영국을 정복하는 것은 자명한 상황이나 다름없었기에 무솔리니는 이집트를 공격해도 영국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무솔리니는 이집트 원정을 천명하고 이탈리아군에 준비를 지시하였다.
2.1. 이탈리아군의 문제점
<colbgcolor=#666> 연설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
덤으로 이탈리아가 1930년대에 로마 제국 부활을 내세우며 아프리카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쳐들어가면서 벌인 학살과 현지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상당히 고전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이탈리아군이 불리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 때의 원한을 잊지 못하던 현지인들은 이탈리아군의 적인 연합군을 더 돕게 되었다.
그나마 이탈리아군 지휘관들은 나름대로 뼈아픈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기에 무솔리니의 무리한 원정계획에 반대표를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곧 양산되는 최신예 병기의 보급과 정예병력 지원을 약속하며 지휘관들을 독려하였고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를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약속한 최신예 병기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배송되지도 않았고 그라치아니 원수는 "그거 주기 전까진 전쟁 못함"이라 주장하며 형식적인 훈련에만 매진하면서
게다가 같은 추축국 동맹인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돌출행동에 골머리를 썩는 중이어서 확실히 선을 그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프랑스 전역에서도 남부 쪽에서 깔짝거리긴 했는데 별 도움도 안됐고 프랑스군에게 고전하다 밀려난 상황이었다.
2.2. 지역의 특성
알제리 남부에 있는 고원지대 '타실리 나제르(طاسيلي ناجر)'의 사암 '바위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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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교통로라곤 사실상 단 1개 뿐이다. 북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지중해 연안지역에 도시와 촌락이 듬성듬성 존재하며, 이들을 잇는 해안교통로가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교통로다. 그리고 나머지
사막 지역은 그냥 길이 없다고 보면 된다.
철도의 경우에는 일부 지역에 한해서 제한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육상/해상/공중 수송이 병행되어야 그나마 원활하게 할 수 있는데, 지중해는 항상 제해권 다툼이 있고, 공중에서는 제공권을 잡기 위한 공중전이 벌어지는데다가 수송량 자체가 적으므로 대다수의 물자는 해상수송을 통해 북아프리카 소재의 항구에서 하역된 다음에 트럭에 옮겨 싣고 수백~수천 km의 거리를 운송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이 전 과정에서 적 해군과 공군의 공격을 받아가며 해야 한다. 그래서 수송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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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선을 구축할 지역이 크게 한정된다. 남쪽에는
사하라 사막이 있고, 도로가 부족해서 전략적인 기동은 빈약해도 사막을 통해서 적군의 기동부대가 전술적으로는 충분히 우회할 수 있으며, 사막지형의 특성상 조금만 해안가에서 멀어져도 식수 등의 물자를 확보하기 힘들어서 방어선을 내륙으로 길게 연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어선이 붕괴되면 다음 방어선을 구축할 요지까지 긴 거리를 후퇴해야 하므로 수백km 정도의 후퇴와 전진은 기본사항이 된다.[7]
또 이런 기동전이 기본 상황이 되므로 다른 전역보다도 전차가 매우 중요해지며, 이탈리아 마냥 알보병만으로 전쟁을 치른 경우 30만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해도 그 병력들이 죄다 보급이 끊겨 항복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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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조달이 가능한 물자가 별로 없다. 사막 지역은 말 그대로 모든 물자를 외부에서 가지고 들어와야 하며, 다른 지역도 공업이 발전한 지역이 아니므로 식수와 일부 식량을 제외하고는 역시 조달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양측 모두 물자는 본국에서 수송선단을 통해 들여와야 한다.
이 때문에 양측 군대 모두 이미 구닥다리거나 그렇게 되가는 2선급 화기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노획품도 알뜰하게 이용했으며, 그럼에도 전투중에 물자부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 전투환경이 매우 가혹하다. 사막 한가운데는 낮이건 밤이건 생지옥 같은 환경이고, 바닷가라고 해도 평균기온이 워낙 높아 무더위가 심했다. 온도부터 최악인데, 허구한 날 모래폭풍과 대량의 먼지가 마구 밀려들어 전차나 기갑장비들의 엔진에 무리를 주었고, 하늘이 조금이라도 흐려져 태양빛이 약간이라도 약해지면 행복할 정도로 태양빛이 강렬하게 쏟아져내리며 전차고 차량이고 표면을 달구어댔다.[8] 또한 사막은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도 거의 없고, 현지인도 무턱대고 움직이기 어려운 가혹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머나먼 타지에서 건너온 군인들이 장기간 주둔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전쟁까지 벌어졌으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 그나마 영국과 이탈리아는 상황이 좋았다. 당장 이집트가 영국의 (사실상) 식민지[9]인지라 나일 강을 끼고 식수, 식량 등 물자 조달이 그나마 가능한 보급거점들이 갖춰져 있었고, 19세기 말부터 영국군이 주둔하였기에 환경 적응력도 괜찮았으며, 주둔군 차출 병력의 훈련 상태도 양호했다.[10] 그리고 이런 조건은 이탈리아군이라면 영국군보다 나쁠 것도 없었다. 리비아는 이탈리아가 30년간 식민지배한 곳이라 리비아 주둔군이 있던 건 마찬가지고, 트리폴리나 벵가지는 이집트 못지않은 대도시들로 유럽에서 보급물자 나르기는 이집트보다 훨씬 가까웠으며, 실제 북아프리카 전쟁의 주전장도 이 쪽이 가까웠다. 해군도 총 전력에서는 밀려도 대서양, 북해, 인도양 등에 분산되어 있던 영국 해군에 비해서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에 전력의 8할이 집중되어 있었고, 나중에 독일 공군과 해군도 가세하여 전력상으로는 대등 이상이었기에 수송의 어려움 자체는 비슷비슷한 수준이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 동부에 위치하고 남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강인데, 추축군이 가장 성공적으로 진격한 것은 이집트 중부 엘 알라메인이라서 나일 강은 전쟁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종합하자면 전쟁보다 생존에 더 집중해야 할 정도로 상당히 가혹한 환경이며, 병참과 수송의 난이도는 악몽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사실상 태평양 전쟁과 함께 자연이 인간에게 전쟁을 벌인 전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역. 그래서 연합국이고 추축국이고 일선의 병사와 장교 모두 생고생을 했어야만 했다.[11]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지조달 할 물자는 커녕 흔한 마을조차 거의 없는 환경, 데면데면한 원한 관계,[12] 극악한 자연에 맞서는 인간이라는 애환과 동병상련이 맞물려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범죄가 가장 적은 전역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게 된다.[13]
3. 북아프리카 전역의 시작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절정에 달아올라 이제 영국의 패망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었고, 이대로 가다간 지리적 요충지[14] 이집트마저 독일군에 꼼짝없이 넘겨주게 될 상황에 처하자 무솔리니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결국 무솔리니는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야 이 자식아! 불명예 전역하고 싶어? 빨랑 공격 안해!?"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닥달했고, 그제서야 깨갱한 그라치아니 원수가 투덜대며 이탈리아 왕국 육군을 움직여 이집트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리비아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의 규모는 25만 전후였고, 이집트 주둔 영국군은 3만 전후에 불과하여 장비의 질에서 영국이 더 우수했음에도 병력은 이탈리아군이 8배 이상 많았기에 영국 입장에서는 실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colbgcolor=#666> 북아프리카 전역 영국군 제8군 |
하여간 그렇게 공세를 시작한다고 하긴 했는데, 준비기간 중에 이탈리아 공군을 책임지던 이탈로 발보[15] 공군 원수가 항공정찰 중에 팀킬당해 사망한데다 내부 사정과 뻘짓으로 인해 폭격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폭격도 없었고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부대의 움직임도 없어 이탈리아 육군은 '진격'이라기보단 그냥 뭉그적거리며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포병 수송용 트럭도 부족해서 직접 화포를 끌거나 노새에 의존해서 수송하거나 병력수송용으로 가져온 트럭들은 숫자도 부족한 상태인데다가 사막의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엔진이 퍼지기 일쑤였고, 그나마 상태 좋은 트럭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전승 기념비를 세워야 된다는 명목 하에 대리석이나 수송하고 있었다. 즉, 병사들은 걸어서 사막을 횡단했다는 것이다.
영국군은 정보원들을 통해 이탈리아군의 이러한 비상식적인 행보를 속속 보고받고 있었고, 영국군 지휘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일단은 이탈리아군을 최대한 끌어들여 병력이 길게 늘어진 시점에 공세를 펼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나름대로 열심히 공세를 펼치고 있는 이탈리아군에게 정면승부를 걸지 않고 멀리서 포격을 가하거나, 기동성이 뛰어난 부대를 투입하여 찌르고 빠지는 형태로 응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9월 16일 국경에서 약 130km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영국군은 이 지점을 최일선 교두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실해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군이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이는 무솔리니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보니 발생한 보급의 문제였고, 그라치아니 원수는 시디 바라니 지역에 참호를 파고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땅을 빼앗았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측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이 무렵 영국 본토 사정은 매우 급박하여 영국 본토의 방공군이 거의 괴멸직전처럼 보였고, 독일은 런던 대공습을 가하여 영국의 패배가 목전까지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요컨데 기다리기만 하면 누워서도 떡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고, 이탈리아군은 프랑스 침공 때처럼 그대로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기로 한 셈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영국이 항복을 한다는 조건에서나 가능한 소리였다는 거고, 실제로 영국은 독일군의 공세를 끈덕지게 잘 버텼다. 게다가 실제로 영국이 패배 직전인 것도 아니었다는 게 함정인 게 하디스트 데이가 8월 18일로 거의 한달 전이고 영국이 승기를 굳힌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가 9월 15일이었다. 이탈리아군이 진격을 멈춘 시점에서 영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이미 다 지나갔고, 전세는 오히려 영국 쪽으로 기울었던 셈.
어쨌든 영국군 지휘관 웨이벌 장군은 이탈리아의 행동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본토 사정이 어렵다 보니 제대로 된 군수물자 지원도 받지 못하던 상황이라 전쟁 준비가 어려웠고, 어느 지점까지 이탈리아군을 끌어들이고 어느 시점에 반격할 것인기 고민하던 차에 딱 멈춰주었으니 귀중한 시간도 벌어주었고, 반격작전의 구상도 한층 쉬워진 셈이었다. 게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도 런던 폭격이 독일군의 자충수로 작용하게 되자 히틀러도 슬슬 영국 침공은 물 건너갔다고 판단하여 단념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탈리아가 기대하던 상황은 자연히 물 건너가게 되었고, 영국 이집트 주둔군은 사정이 조금 나아진 영국 본토에서 배송된 전차나 병력, 무기 등을 지원받으면서 착착 반격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니…
4. 영국의 반격
<colbgcolor=#666> 1941년 11월 28일 리비아 토브룩 인근에서 전투 중 휴식을 취하는 영국군 제4왕립전차연대 소속 마틸다 Mkll '디피언스' |
웨이벌 장군은 이탈리아군이 퍼져 있던 3개월 동안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3만 6천명에 달하는 영국군과 충분한 양의 물자를 비축하였으며 본토에서 새로 마틸다 II까지 보급받은 현재 준비 상황은 충분하다고 판단하였고, 12월 콤파스 작전(Operation Compass)의 개시를 선언하였다. 당시 이탈리아군의 방어기지는 10 ~ 20km 간격을 두고 7개소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정보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의 근무 및 경계태세도 개판이었고 방어진지도 허접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단다. 덤으로 사막전의 특성상 얼마든지 방어진지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대한 대비도 제로 상태였다.
그래도 이탈리아군을 기만하기 위해 일상적인 기동훈련이라 병사들에게 말하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국군 일부의 움직임은 이탈리아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나중에 서류로 보고해!"란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12월 9일 배치가 끝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 방어거점 중에서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틸다 II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세는 한참 게으르게 늘어져 있던 이탈리아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고 그나마 보유한 이탈리아군의 M11/39 같은 중형전차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허접전차들은 쌩철갑탄 2파운더 대전차포에 마치 밥솥 마냥 펑펑 터져나갔고 반대로 대전차소총 따위로 아무리 갈겨봤자 영국군의 기갑은 우습게 튕겨냈다. 생각보다 쉽게 방어기지를 점령하자 웨이벌 장군은 나머지 기지에 대한 공격도 지시하였고 이탈리아군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박살이 났다.
당초 웨이벌 장군은 시디 바라니 지역에서 닷새간의 제한적인 반격작전을 구상하였는데, 이탈리아군이 알아서 무너지는 바람에 불과 2일만에 시디 바라니 지역을 힘 하나 안 들이고 빠르게 탈환하였다. 이에 웨이벌 장군은 시디 바라니 전투 이후 어디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결심하고 리비아를 향해 폭주기관차마냥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상대라는 이탈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맞상대하기는 커녕 그냥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이탈리아군 장군이 직접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와 함께 항복하기도 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패주에 당황한 무솔리니는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쌍욕을 퍼부으면서 수비를 지시하였다. 어쨌든 리비아 국경선에 가까우며 개전전부터 이탈리아가 보유한 관계로 요새화된 바르디아 항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솔직히 바보가 아니라면 요새에 닥돌하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을 절망적인 경우에만 눈물을 머금고 하는 행위이다. 당시의 영국군은 해당 지역의 이탈리아 공군보다는 공군력에서 우세했고, 해군력에서는 더한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서 포격과 폭격을 시작했다. 그래서 해상에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가, 공중에서는 웰링턴 폭격기와 블렌헤임 폭격기들이 몰려와 바르디아를 콩가루로 만들었고, 결국 1월 4일 바르디아를 점령한 영국군은 "다음 목표는 토브룩이다!"를 선언하고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월 5일 이탈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토브룩마저 점령했다.
토브룩까지 함락당하자 이탈리아 패잔병들은 해안도로를 따라서 트리폴리로 도주하는 긴 여정에 올랐으며, 사막을 강행돌파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서 그나마 있던 기갑전력을 몽땅 날려먹고 엄청난 물자를 방기한 채 사람만 간신히 호구를 빠져나갔다. 게다가 이렇게 빠져나간 사람보다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한 사람이 많다는 대패를 당했다.
결과적으로 반격작전이 진행된 10주 동안 영국군은 무려 800km나 진격하는 기염을 토했고, 13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군 포로와 수많은 이탈리아군의 전차나 화포, 수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 영국군 전체 병력이 약 3만명이었다! 반격작전을 지휘한 웨이벌 장군이나 오코너 장군 모두 영국군이 올린 기대 이상의 성과에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였다.
30만 병력으로 구성되었던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군은 제8군과 제10군, 2개 군이 궤멸되고 장성 22명을 포함해 무려 13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멀쩡한 병력들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수비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일부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대참패.
5. 사막의 여우 롬멜
<colbgcolor=#666> 에르빈 롬멜 장군[16] |
앞서 언급했듯이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과 그리스 침공에서 보여준 이탈리아군의 추태를 비웃으며 " 지중해는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 입장에서는 소련 침공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탈리아가 다른데서 뭔 짓을 하건 신경 밖의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독일의 입장을 번복할 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으니, 바로 영국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당시 독일 해군이 지중해까지 가서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이상 이제 지중해에서 믿을만한 건 이탈리아 해군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타란토 공습으로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지중해에 대한 제해권은 이제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 상황이었다. 이는 영연방군이 남부 유럽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히틀러 입장에서는 지중해 지역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지중해 지역을 방치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장고 끝에 소련 침공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대기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헤르만 괴링에게 지시하여 제10항공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봉쇄하게 하였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협력하는 게 아닌 독일 지휘관이 이탈리아군을 지휘하는 편이 독일에게 이득이었는데,[17] 문제는 이탈리아군이 가진 거라곤 차량과 기본적인 무기로 무장한 보병 뿐이었다는 거고, 결정적으로 영국기갑을 상대할 강력한 대전차 수단도 없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군단이 새로 편성됐고, 당초 롬멜은 이탈리아군과 협력하여 방어선 사수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지만, 계속되는 패전으로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가면 갈수록 바닥을 치고 있는 중인데다 초기 이탈리아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역시 적응 안 되는 무더위와 사막 특유의 가혹한 환경, 그리고 압도적인 영국군의 군세에 비교되는 2개의 기갑사단 지원에 사기가 점차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방어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롬멜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쳐 최대한 빨리 영국군을 최대한 밖으로 격퇴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정찰 및 정보수집을 통해 영국군 역시 패주하는 이탈리아군을 따라 깊숙히 추격해오면서 보급에서 빈약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였다. 게다가 이 무렵 그리스에서 전투가 격화되는 바람에 영국군 일부 병력이 따로 그리스로 차출되면서 전력이 약해지고 공백도 생긴 상황이었다. 이에 롬멜은 방어가 아니라 영국군을 공격하여 최대한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수립하였다.
당시 롬멜은 충분한 양의 전차를 보급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부하들에게 굴러다니는 차량을 총동원해서 수백대의 가짜 전차[18]를 만들게 하였고, 일부러 전차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대도시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영국 첩자들을 상대로 잔뜩 허세를 부렸다. 그 결과 첩보원들을 제대로 낚았고, 3월 24일 사막의 여우의 전설이 시작됐다.
엄청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진격을 시작하자 영국군은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독일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본대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아 군단이라고도 할 수 없는 북아프리카군이 이렇게 빨리 공세를 취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한 상황이었는데, 대규모 전차부대가 몰려오니 그야말로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내빼기 시작했다. 이에 롬멜은 영국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거세게 몰아붙여 불과 1주일만에 영국군을 800km 밖으로 다 몰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반전이 있다면 이게 전부 제자리 걸음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토브룩은 처음부터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시작부터 심각한 병력 손실이다.
<colbgcolor=#666> 1941년, 전선을 시찰하는 롬멜 장군 |
어쨌든 고립된 토브룩만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주력부대는 토브룩을 공격하게 하고, 그 사이 일부 부대를 차출하여 카푸초, 바르디아 요새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요충지였던 할파야 고개를 탈환하여 이 지점에 수비 거점을 세웠다. 애초 독일군의 목표가 이탈리아 방어선 사수였는데 롬멜 입장에선 어디를 탈환해도 어차피 지켜야 하는 방어선이 원래 이탈리아 영토인 건 변함없었던 것.
한편 영국군은 롬멜의 공세가 정체된 덕분에 간신히 병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전열을 가다듬어 토브룩에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6. 롬멜의 분전
영국 본토에서 전차와 물자를 보급받은 웨이벌 장군은 브레비티 작전을 수립하고 5월 15일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초기 3일간 영국군은 할파야 고개와 카푸초 요새 인근까지 진군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롬멜이 이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공세는 좌절됐고 새로 투입된 전차들은 셔먼도 한방에 보내버리던 88mm 대공포(대공뿐만 아니라 대전차, 야포도 되는 사실상의 만능포)에게 관광탔다. 그리고 롬멜이 역반격을 가하자 결국 패주하여 5월 27일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였다.이에 영국군은 6월 14일 훨씬 규모를 확대시킨 배틀액스 작전을 수립하고 다시 한 번 리비아 땅으로 들어가 카푸초 요새와 할파야 고개까지 넘봤으나 이번에도 롬멜의 기민한 대처에 그대로 역관광당하고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마틸다, 크루세이더, 발렌타인 등의 전차를 대규모로 투입하였으나 그 망할 놈의 88mm가… 실제 할파야 고개 전투에서 1개 대전차포병 대대에게 영국군 전차부대가 전멸하면서 88mm의 명성만 드높여줬다.[20] 결국 롬멜의 명성만 높아져갔고, 영국군 사령관 웨이벌 장군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당하고 클로드 오킨렉 대장이 신임 사령관으로 발령되었다.
한편 배틀액스 작전이 끝난 직후 영국군은 공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공군 전력을 2배로 증강하기로 하고 서부사막공군을 창설하였다. 다만 아직 영국 본토 사정이 좋지 않아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는 보급받지 못했고 호커 허리케인과 미국에서 수입한 토마호크와 키티호크 위주로 병력을 편성하였다. 한편 독일군은 Bf109를 가지고 온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전투력 면에서 열세였지만, 독일군의 물량이 적다는 점을 노려 서부사막공군은 순전히 물량으로 승부를 걸었다.
이 무렵 영국은 이집트의 상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점이었는데 때마침 히틀러의 최고의 무리수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에게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애초에 히틀러가 노리고 있던 제1의 목표는 소련이었고, 그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북아프리카 전선의 병력 및 물자 보급 우선순위가 뒤로 쳐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선의 특성상 소련 침공보다 더 긴 거리를 영국 해군과 공군이 장악한 지중해를[21] 건너 단 1개의 해안도로로 운송해야 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물자를 더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사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14,000대 밖에 없는 트럭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8,000대나 주는 등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물자를 주려고 노력했다.
롬멜 역시 자신의 탁월한 전술적 능력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는 있었지만 언제나 충분하지 못한 병력과 물자를 걱정하며 싸우는 실정이었는데 독소전의 시작은 큰 부담이 되었다.[22] 결국 롬멜은 토브룩 점령을 시점으로 더 이상의 공세는 펼치지 않기로 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하였다. 원래 이탈리아 영토라는 점을 감안하면 겨우 원상복귀로 돌려놓은 것이다. 영국군 역시 롬멜을 확실하게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영국군은 또다시 대병력을 동원하여 크루세이더 작전을 실행하였다. 이 전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12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롬멜이 대체적으로 전력면에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하여 공세를 취하는 영국군 제8군을 매번 격퇴해 오히려 이집트 지역 국경선까지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수적 우위를 이용한 공격에 물자가 부족한 롬멜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가잘라 방어선과 아게다비아를 포기하고 엘 아게일라까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몰타가 말라죽어가면서 영국군의 방해가 없어진데다가 전선이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운송거리가 극적으로 줄어들어 잠시 보급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자 롬멜은 도박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전투를 끌어봤자 독일-이탈리아군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다시 한 번 공세를 펼쳐서 영국군을 리비아에서 몰아내기로 하고 작전을 수립한 것이다. 부하나 참모는 물론 당사자인 이탈리아군도 이 작전이 무리수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철회를 요청하였으나 롬멜은 고집을 부려 작전을 추진하였다.
롬멜의 기습적인 공세는 영국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또 다시 전군이 붕괴되어 후퇴를 시작하였다. 1월에 아게다비아와 벵가지를 탈환하였고, 2월에는 가잘라 방어선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여기서 롬멜은 영국군이 세운 방어선 때문에 한동안 고전했다. 그러나 5월에 가잘라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며, 돌파한 병력이 역포위당하는 상황에서도 분전해서 영국군의 주력을 일시적으로 소멸시키는 바람에 6월에는 눈에 가시나 다름없었던
또한 이 무렵 몰타가 다시 살아난데다가 북아프리카 전선 사상 최장의 보급거리로 인해 운송되는 물자의 태반이 2,000km나 떨어진 트리폴리에서 정체되는 등 독일-이탈리아군의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보급선을 영국군이 추가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연료와 탄약을 걱정하며 싸우는 지경이 되자 롬멜은 공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위에 언급한 벵가지나 토브룩의 항만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선 몰타의 영국 해군과 공군 때문에 보급선 자체가 달랑달랑한 상태라서 큰 의미가 없었다.
이 무렵 윈스턴 처칠은 "그놈의 롬멜! 우리 영국군은 그 놈 하나 못때려잡고 뭐하는 거야!?"라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는데 우연한 인사가 대박이 될 줄은 처칠조차도 몰랐다.[27] 게다가 영국군 역시 그놈의 롬멜의 지휘차량 매머드(마무트)를 반드시 전리품으로 취하고 말겠다며 지휘차량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매머드가 노획한 AEC 지휘장갑차를 개조한 차량이라 그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7. 몽고메리의 등장과 롬멜의 퇴각
엘 알라메인을 사수하고 있던 오킨렉 대장은 처칠과 갈등을 일으켜 결국 해임당했고[28] 그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이 부임하였다. 더불어 주력부대였던 영국 육군 제8군의 지휘관으로 고트 중장이 내정되어 있었는데 부임지로 이동중에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바람에 급히 몽고메리 중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29]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롬멜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장군들이 모두 기피하던 자리였는데, 몽고메리는 롬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임한 몽고메리의 선택은 간단했다. 충분한 물량이 확보됐다고 할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할 것. 그나마 나은 점은 훈련이 잘 된 정규군 전력을 사용하며, 대규모 화력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했고, 심지어 처칠이 그만하면 충분하니 제발 공격 좀 해서 롬멜을 몰아내라고 애원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몽고메리는 상큼하게 씹으면서 10월까지 영국과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참전한 미국에서 배송되어오는 병력과 물자만을 열심히 받아먹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다급해지는 것은 롬멜이었다. 결국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알람 알 할파 지구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카이로로 점령한다는 작전안을 수립하고 8월 30일 공세를 시작하였으나, 몽고메리가 먼저 공세가 해당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트릭까지 쓴데다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구축한 방어망에 걸리는 바람에 4일만에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10월에 이르자 영국군은 20만의 병력과 1,0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하여 전력비를 2:1까지 벌였다. 그러자 몽고메리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10월 23일 추축군에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 폭격기의 폭격과 대포의 포격과 함께 영국 보병과 전차들이 총공세에 나섰다. 이는 야간에 이루어져 완벽한 기습효과를 달성하였으며 독일-이탈리아군을 혼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혼란에서 벗어난 아프리카 군단은 무사한 방어진지를 거점 삼아 영국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영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몽고메리의 기본적인 작전방침은 1:1로 맞교환해도 아군이 이득이니 닥치고 물량으로 어택땅이었고 6,000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끝에 방어선을 돌파해냈다. 이후 연쇄적으로 방어진지가 돌파당했고 독일-이탈리아군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당시에 롬멜은 가혹한 야전생활 + 현지의 끔찍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쳐서 병을 얻어 독일 본토에서 요양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아프리카 전선으로 날아왔다. 롬멜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며 영국군의 공세를 막으려 하였으나 이미 전황은 아무리 영국군에게 고통을 준 롬멜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려있었다. 히틀러는 "후퇴는 불가하며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롬멜은 상큼하게 씹고 퇴각을 지시하였으며 결국 비관적인 보고가 계속 들어오자 히틀러도 퇴각에 동의하였다. 결국 엘 알라메인에서 퇴각한 독일군은 끝없는 패주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군 역시 이 전투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게 맞는 건가"란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엘 알라메인 전투).
한편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군의 패주가 시작된 시점에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횃불 작전을 펼쳐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모로코와 알제리 해안에 10만 7천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 무렵 독일-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지를 향해 철수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반대쪽 방향에서도 연합군이 진격하는 셈이라 추축군에게 쐐기를 박은 격이었다.
하지만 후퇴로 인해 보급거리가 다시 줄어든데다가, 이탈리아에서 더 가까운 프랑스 식민지인 튀니지를 독일군이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순간적이지만 다시 보급이 대량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축군은 튀니지의 한 귀퉁이에서 상당기간 저항할 수 있었고, 아직 전쟁경험이 미숙한 미군을 대차게 바르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판국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었을 때 롬멜을 비롯한 북아프리카 군단 수뇌부의 목표는 독일판 됭케르크 철수를 히틀러에게 관철시키는 것이었고 롬멜도 가우제도 히틀러에게 철수작전을 건의했다. 하지만 우리의 총통은 역시 철수에 발광하며 거부.
<colbgcolor=#666> 튀니지 전투 당시 3호 전차 N형 |
이로 인해 몽고메리는 높은 평을 받았지만, 상징적인 목표물로 삼아 그토록 노리고 노리던 롬멜의 지휘차량 마무트만은 끝내 얻지 못했다. 폰 아르님 장군이 롬멜 장군이 귀국하며 인계해 준 마무트를 항복 직전 소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8. 의의 및 평가
무솔리니의 과대망상이 결국 독일을 껴안고 함께 자폭한 전선으로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물론 독일이 영국 세력이 지중해에 존재하는 한 신경을 안 쓰진 않았겠지만 20만명에 가까운 인력을 투입하진 않았고 좀 더 차분한 외교전과 공습 작전으로 나왔을 것이고 소련 방면으로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허투루 날려먹은 물자나 병력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당장 독일군은 20만명에 가까운 전력을 북아프리카에 투입했는데 이 20만명이 독소 전쟁에 투입되었다면 좀 더 독일의 동부전선 붕괴를 지연시키거나 막대한 피해를 줬을 것이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그리스까지 공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까지 했다. 이때 그리스는 지속적으로 회유했으면 추축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를 국가였다.수많은 야사들이 전하는 이탈리아군의 졸전과 달리 사실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전역에서 독일군 못지 않게 영연방군에 맞서 선전한 이탈리아군도 제법 많았고, 롬멜이 등한시한 보급과 진지구축은 이탈리아군이 전담하다시피 한 것에서 보이듯 실제의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따라서는 꽤 분전하여 잘 싸우기도 했다.[30] 롬멜이 공세를 취할 때 수적인 면은 이탈리아군이 전원 담당했으며 롬멜과 자국군의 후퇴를 위해서 전차의 연료들이 떨어지자 스스로 고기방패가 되어 영국군을 맞아 전멸한 아리에테 기갑사단 등 이탈리아군의 전과는 상당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건 소수의 몇몇 예이지 이탈리아군이 위에 서술한대로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였다면 애초에 독일이 아프리카 군단 따윌 만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독일군이 투입된 것도 무솔리니가 되지도 않는 이집트 침공을 실시했다가 박살나고 트리폴리까지 밀려서였다. 전체적인 레벨에서 워낙 삽질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결국 무능한 이탈리아군이란 타이틀을 달게 됐다. 애초에 토브룩이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점만 생각봐도 독일-이탈리아군은 결국 이탈리아 영토 회복하겠다고 분전한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충분히 까여도 할 말 없다.
1941년 독일은 독소전쟁을 치르면서 서유럽에서 영국과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여기에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초 히틀러가 절대 2개의 전선에서 싸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한 맹세 따위 진작에 엿바꿔먹었다. 당시 독일의 역량으로는 3개의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아프리카 군단은 보급순위에서 항상 후순위였고 애초에 독일의 물자가 부족한데다가 바다를 건너는 최장의 보급거리, 이조차도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에게 대서양에서 탈탈 털리고 있어 이탈리아 해군에게 짬 때렸고 덕분에 그나마도 물자보급을 제대로 받은 적이 드물다.
사실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를 장악하거나 영국 해군 견제만 잘해줬어도, 하다 못해 몰타만 제대로 조졌어도 사정이 조금은 나았겠지만, 추축군이 크레타에서 공수부대가 받은 타격이 공수작전 금지로 이어질 만큼 심각해서 사실상 몰타를 점령할 능력이 없었던 점부터가 문제였다. 차라리 북아프리카에서 일을 벌이기 전 무리해서라도 몰타와 크레타의 영국 세력을 조지고 들어갔으면 모를까 그것도 해결하지 않은채 이집트를 쳤으니 답이 없었다. 애초에 크레타 섬 전투도 이탈리아의 뻘짓으로 탄생한 비극이다. 하다못해 이탈리아라도 제대로 보급을 해줬으면 해볼만 했다면서 이탈리아를 까는 경우도 있는데 이탈리아의 공업생산력과 수송력은 독일의 예상보다 더 나빴다.
롬멜은 이 전역에서 보여준 탁월한 작전지도 덕분에,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 총사령부의 예상과는 달리 영국군에게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고 빠른 기동력으로 토브룩, 트리폴리,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격을 할 정도로 활약하여 명장이란 평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롬멜을 까는 주장도 있다. 롬멜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쓸데없이 롬멜이 사령부 명령을 어기고 독일군 역량 이상으로 나대는 바람에 오히려 독일군의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주장이다.[33]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은 있다. 독일군 사령부가 애초에 의도했던 건 남부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일정 방어선을 고수한다고 나섰다면 영끌한 영연방군의 공격에 박살날 것이 분명했다 애시당초 롬멜에게 준 2개 사단은 보병사단이 아니라 차량화사단, 기계화사단이다. 당시 영국군 지상부대는 그리스에서 분쇄된 이후 유럽 전역에선 별 다른 전선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는데, 이는 곧 단일 표적에 대해 전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이었다. 당장에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과감한 기동전술로 초기에 득세하자 처칠은 곧바로 신형 전차인 크루세이더 전차를 투입하고 배틀액스 작전으로 롬멜을 압박했다. 만약 독일군이 수세적인 포지션에서 방어했다면 이미 1941년에 영국군의 물량에 격파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걸로 무슨 일정 방어선을 고수할까?
그렇다고 OKH가 바보는 아니었고 애초에 독일 본국도 기동방어를 염두에 두었으며 보급이 어려운걸 사전에 파악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 공격적 기동전술로 프랑스군을 뒤흔들었던 롬멜에게 2개 기계화사단을 주어 트리폴리에서 보급이 받쳐주는 한도내에서 기동방어로 리비아의 완전상실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롬멜이 공세를 시작하자 본국의 브라우히치 원수가 노발대발한건 그 2개 사단이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선발대의 미약한 전력만으로 공세를 시작해서였고 당시 그리스 전선에 전력을 차출당해 약체화된 영국군이 롬멜의 허세에 속아 패주했는데 토브룩까지 도달한 롬멜은 토브룩의 방어상태를 한번 건드려 보는 정도가 아닌, 작정하고 공격을 가해 불필요한 전력손실을 초래해서 브라우히치 원수가 폭발(불응하면 해임하겠다며 토브룩 공격 중단을 명령)했다. 만약 롬멜이 자신이 북아프리카에 온 이유, 즉 독일 수뇌부의 진정한 의도를 충실히 수행하려 했다면 토브룩은 위력 정찰 정도만 해보고 영국군의 반격에 대비해 철수준비를 했다가 영국군이 반격하면 트리폴리 쪽으로 후퇴하면서 영국군의 공세종말점에서 역습, 다시 토브룩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전력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시일을 끌어야 했다. 실제로 롬멜은 트리폴리와 토브룩을 몇차례 왕복했지만 이는 독일 본국에서 원한 기동방어의 형태가 아닌, 롬멜 자신의 무리한 공세와 그 과정에서의 영국군의 반격에 의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전력손실과 보급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당장에 독소전쟁과 마켓 가든 작전 당시 만슈타인과 발터 모델이 선보인 기동방어 전술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롬멜의 공세적 기동이 당시 추축국의 복잡한 상황속에서 자충수로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롬멜은 천성적으로 공격전에 우월한 능력을 보였고, 지리하게 연합군과 소모전을 벌이느니 한방에 박살내서 후환을 없애고 전선을 종결하려는 욕구가 강했으며, 실제로 그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전술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분명 불리한 전력이지만 공세적 기동으로 적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다면 그런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때문에 위대한 도전에 따른 장렬한 실패였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이미 사령관 하나의 성향으로 독일이 구상한 전역의 방향성 자체가 뒤틀린 것, 그리고 방향성이 바뀌었을 때 그를 해결하기 위한 차후 방향성과 대응을 제시하지 않고 상부와 동맹군의 무능을 탓하며 나선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다.[34] 한개의 야전을 통솔하는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성향을 고수하다가 결국 멈출 수 없는 기동작전을 강요하는 열차를 탑승하게 되어 전체 군단을 파멸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 그 사령관의 역량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패배는 롬멜이 한개의 야전군을 이끌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게다가 만약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가만히 놔두고 북아프리카 전역에만 신경 썼다면, 크레타 건으로 공수작전이 금지될 일도 없었고, 몰타는 독일 공수부대에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장악한 연합군은 히틀러의 우려대로 지중해를 장악하여 남부 유럽에서 추축군 세력으로의 압박이 가능한 거점을 확보했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이 마무리되고 병력이 재편되자 바로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시작했다. 덕분에 독일군은 헤르만 괴링 공수기갑사단을 비롯한 정예군을 이탈리아로 보내야 했고 가뜩이나 급하던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양쪽에 보강 가능했던 전력을 낭비했다.
9. 어록
사막의 전쟁은 해전과 흡사하다. 모래밭은 바다이며 전차는 배다. 육상의 전투에서는 한치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전에서 배는 바다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적함을 찾아 헤맨다. 사막의 전투는 바로 그 해전과 똑같은 것이다. - 에르빈 롬멜
나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이 보였다. 주위에는 거의 다 익은
대추야자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오아시스를 가로질렀다. 남쪽의 야자나무 숲 끝자락에 새하얗고 드넓은 모래 언덕이 파도치는 바다 같았다. 북쪽에는 높이 50m의 절벽이 수직으로 솟아 있고, 동쪽에는 바싹 마른
소금 호수인 카타라 분지가 있었다. 이 분지는 동쪽으로 300km 가량 펼쳐져 있는데, 그 끝부터 북동 방향으로 100km 가량 이동하면 알라메인이었다.(중략) 우리의 집결지는 마르사 마트룩에서 남쪽 약 300km 지점에 있었다. 알라메인 남쪽 50~70km 지대는 영국군이 통제중이었다. 마르사 마트룩으로부터 알라메인 사이는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진공상태여서 양측 모두
자유로이 군사작전을 구사했다. -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
한스 폰 루크.
10. 매체에서
배틀필드 시리즈의 첫 작품인 배틀필드 1942에서 주요 전선 중 하나로 등장한다.배틀필드 5의 캠페인들 중, 에피소드 1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롤로그와 에피소드 5에서도 잠시 다뤄지며, 멀티에서도 맵으로 등장한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2차 대전 타이틀에선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 밀려 그리 자주 나오진 않지만, 프라이스 대위나 윌리엄 피어슨과 같은 주요 인물의 배경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탈리아 영화 '엘 알라메인'에서는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군부의 무능으로[35] 죽어나가는 이탈리아군을 묘사하며, 이 전장이 이탈리아군에겐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보여준다.
퍼스트 어벤져에선 작중 레드 스컬이 잠시 언급한다. 사막에서 보물찾기라 폄하하는 게 압권.[36]
나치가 2차 대전에서 승리한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선 무려 원자력 추진 중전차(!)를 동원한 독일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수의 잔존 연합군이 여전히 독일과 싸우고 있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북아프리카 군단이 여전히 건재하며,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블라즈코비츠와 교전한다.
전략 시뮬레이션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3의 독일군 캠페인으로 나온다.
FPS 게임 스나이퍼 엘리트 3의 배경이다.
전략 시뮬레이션 Men of War: Assault Squad 2의 영국군 미션으로 등장한다.
2차세계대전을 모티브로 한 일본 라이트노벨인 유녀전기에서는 영국이 아닌 프랑스가 모티브인 프랑소와 공화국, 몽고메리가 아닌 드골 모티브 캐릭터 드 루고 장군이 로멜 장군하고 격돌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을 워게임으로 재현한 1979년작 보드게임 The Campaign for North Africa도 있는데, 플레이 시간이 60000분 = 1000시간 = 41일 12시간(!)이 넘어가는, 타이쿄쿠쇼기 따위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워게임이나 테이블탑 게임은 쌈싸먹는 무지막지한 게임이다. 플레이 인원은 8-10인, 10인 권장 게임. 하루 10시간 플레이 시 100일, 현실적으로 보면 수 개월 걸린다... 빅뱅이론 시즌 11 16화에서 주인공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이 나온다.
11. 기타
폴란드볼로 표현한 북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여러 독일군 에이스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그중에서 가장 빛난 인물로는 '아프리카의 별'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가 있다.
영국군은 본토 사정이 어렵다보니 영연방에 의지를 많이 했다. 본문에 언급했듯이 북아프리카 전역이 시작될 때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었고, 그 전에 영국 지상군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몸만 빠져 나와서 재정비를 하고 있어서 본토 바깥으로 대규모 원정을 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캐나다, 호주를 비롯하여 남아프리카 연방 등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파견하여 영국을 지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 중에선 그나마 전쟁 범죄의 빈도가 적은 곳 중 하나이다. 양측의 감정적인 적대감도 독소 전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떨어진 편이었고, 대부분 민간인이 드문 사막지대에서 싸우다보니 대민범죄를 저지를 기회도 없었다. 게다가 접촉하는 민간인도 대부분 상대국이 아닌 비시 프랑스령 알제리/튀니지 현지인, 이탈리아령 리비아 현지인들이라서 양측이 딱히 민족주의 등의 면에서 적대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도 거의 없었으며 양측 군 사이에 의약품과 담배같은 물자 교류와 포로 교환 등 페어플레이 기록이 많다.
습관적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르던 나치군도 롬멜의 지시 때문에 민간인 살상을 자제했다. 사실 롬멜은 학살행위에 대해 별로 좋게 보고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치의 전쟁범죄에 정면으로 반발할 정도의 아주 정의로운 인물이었다는 소리는 아니고 왜 굳이 그런 쓸모없는 일에 괜히 돈과 자원을 낭비하느냐는 의견. 당장 북아프리카에서 전차 굴릴 기름도 없는데 본토에서 유대인 잡아 족치느라 석유와 석탄을 펑펑 써대는 모습을 보면 롬멜은 뒤집어졌을 것이다. 롬멜의 초반 대성공에 한몫 한 것은 나무판자로 만든 가짜 전차였는데, 민간인은 몰라도 정규군에게 가짜 전차를 들이대면 들통날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민간인들을 살려보내서 탱크를 봤다고 증언을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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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 ~ 1939, |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 ||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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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침공 ,1939, |
폴란드 제2공화국 | |
태평양 전쟁 ,1941 ~ 1945, |
미국 영국 네덜란드 중화민국 | ||
북아프리카 전역 ,1940 ~ 1943, |
미국 영국 폴란드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 그리스 왕국 이집트 왕국 | ||
서부전선 ,1939 ~ 1945, |
프랑스 영국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 ||
유고슬라비아 전역 ,1941 ~ 1945, |
유고슬라비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체트니크 소련 미국 영국 | ||
독소전쟁 ,1941 ~ 1945, |
소련 폴란드 동부군 | ||
이탈리아 전선 ,1944 ~ 1945, |
이탈리아 왕국 미국 영국 | ||
라플란드 전쟁 ,1944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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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오그라드 함락으로 롬멜의 오른팔이 될 예정이었으나, 1942년 5월 29일 전선 정찰 중 영국군 진영으로 잘못 넘어갔다가 격추당해 그대로 포로가 되었다. 조명탄으로 아군 위치를 알려주기로 했던 이탈리아군 장교가 전화로 수다떨다가 신호탄 쏘는 걸 잊어버렸다고... 웃긴 건 영국에서의 포로 생활이 독일에서의 장군 생활보다 더 좋았다는 점이다.
[2]
북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획득한
로마의 영토였고 이 지역을 획득하기 위한 이탈리아의 노력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이후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신난다고 또 쳐들어간건 뭐든 행패부리고 총칼 들이밀면 된다는 국제정세를 보고 자뻑에 빠진
무솔리니의 독단이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와 리비아의 관계는 좋건 싫건 장난아니게 밀접하다.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축출에 이탈리아는 반대했었던 사실을 상기해 보자.
[3]
수단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 통치 하에 있었고,
이집트 왕국은 1922년 독립했지만, 아직도 영국이 절대적인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다.
[4]
다만 소화기의 경우 영국군의 리엔필드나 웨블리 리볼버, 빅커스 중기관총도 1차 대전 이전부터 쓰던 물건이다.
[5]
물론 전간기만 하더라도 항공기술을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산업능력의 문제로 그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6]
존 바실론이나
미하엘 비트만,
바실리 자이체프,
더글러스 베이더 같은 유명한 영웅들 외에도 이름이 기록되지는 못했지만 주목할만한 전공을 세운 전사들도 무척 많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홀로 PPsh-41과 모신나강을 들고 시가지에 침투해 소련군 저격수 12명을 사살하고 적 전차부대를 대전차포 사선으로 유인해 격퇴한 뒤 유유히 빠져나온 국방군 상병, 부상병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M1919 기관총으로 몰려오는 일본군에 저항하다 전사한 미군 군의관, 일본군에게 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어찌어찌 기사회생해 수십 km를 쉬지 않고 달려 일본군의 상륙을 알린 호주군 병사의 사례가 있다.
[7]
즉, 연료나 수송차량 소모가 막대하게 된다.
[8]
한 일화로 영국군이나 독일군이
A9 전차 혹은
크루세이더 전차,
4호 전차의 장갑판에 심심풀이로
달걀과
소시지 혹은
베이컨을 올려 봤는데, 그대로 지글거리며 익었을 정도였다. 이탈리아군은 이 점을 이용해 파스타를 데워 먹기도 했다.
[9]
앞서 말했듯 명목상으로는
이집트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다.
[10]
추축군은 주된 전력인 이탈리아군이 여러모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고,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숫자도 몇 없었다.
일본 제국을 제외한 몇 안 되는 나머지 추축세력의 식민지들은 연합국 식민지들과 달리 딱히 개발도 이루어지지 않아 물자조달도 시원찮았다.
[11]
추축군 최고사령관 에르빈 롬멜조차 부실한 병참과 가혹한 환경 탓에 황달을 달고 살게 될 정도니 말 다했다.
[12]
독일 - 이탈리아, 영국 - 미국은 서로 국가정책과 외교적으로 적대관계였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증오하고 완전히 섬멸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치즘의 관점으로 본 영국-미국은 자신들과 비슷하고 우월한 인종들의 국가로 봤기에 우호적으로 지내야 한다고 봤다. 사람은 커녕 짐승 취급조차도 안 한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동맹 일본조차도 쓸만한 하인 내지 원숭이로 봤다는 걸 고려하면 상당히 높게 쳐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학살이나 폭력을 가하기에는 서로 그럴만한 물자도 여력도 없었다.
[13]
독소전쟁과 태평양 전역 모두 북아프리카 전역과 같이 가혹한 환경에 병참과 수송의 악몽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서로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로 악에 받쳐 증오할대로 증오하는 사이였기에 역사에 두 번 다시 없을,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될 지옥도로 악명을 남기게 된다.
[14]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에 있었다.
[15]
무솔리니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이 시점에선 독일과의 관계 문제를 두고 무솔리니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팀킬을 가장한 무솔리니의 암살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현대에는 단순한 아군 오사가 정설.
[16]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해 사진기를 자주 들고 다녔다. 그래서 주변 동료들로부터 '사진작가'라고 놀림받곤 했다. 그가 자주 들고 다니던 사진기는
라이카 3형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로 선전장관
괴벨스에게 선물받은 것이다.
[17]
병사들은 놔두고 지휘관을 바꿨을 뿐인데 전황이 180도 바뀐 사례는 은근히 많다. 당장 임진왜란 당시
칠천량 해전과
명량 해전 모두 지휘관만 바뀌었음에도 결과가 180도 변한 대표적인 사례다.
[18]
차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서 전차처럼 위장했다.
[19]
나중에 탈출하여 서유럽에서 7군단을 지휘한다.
[20]
당시 영국군 전차들은 대전차용 철갑탄만 있을뿐 이런 대전차포같은 걸 잡을 수 있는 고폭탄이 없어서 더욱 일방적으로 털려나갔다.
[21]
물론 지중해에 전개된 해상 및 항공전력 자체는 독일+이탈리아군의 우위였다. 심지어 영국은 항공모함과 전함들이 줄줄이 격침/대파되어 모조리 전열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바람에 전함도 항공모함도 없는 상황이 된 적이 있었고 그나마 지중해 함대가 보유한 전함들은 전부 1차 대전 이전에 건조된 구형함정들이었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신형 전함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루프트바페와 유보트가 가세한 상황이었으니 지중해 함대가 총 전력에서 열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오히려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피해다니기도 했다.
[22]
애초에 소련 침공이 최우선이라 독일군 사령부는 롬멜을 보낼 때 '소련 침공이 가장 중요하니 북아프리카에서 판 크게 벌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롬멜은 이탈리아군과 나치 독일군의 사기가 나락인데다 동맹국 이탈리아의 구원 요구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공세전환으로 판을 키웠다. 롬멜이 도착하자마자 공세를 시작해 허세로 영국군을 밀어낼 때 독일 본국에서 분노한건 공세를 취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2개 사단조차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발대의 미약한 전력으로 시작한 공세였기 때문이다. 만약 영국군이 제대로 반격하여 그대로 분쇄되고 트리폴리까지 영국군이 진격하면 그대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이다. 그리고 토브룩까지 밀어낸 시점에서 토브룩에 맹공을 퍼부어 피해를 늘리자 더욱 분노했다. 애초에 롬멜을 보내기 전에 현장답사를 한 독일 장교들은 트리폴리와 토브룩을 오가는 기동방어를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롬멜은 몇번이나 수백 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했다.
[23]
롬멜이 지휘하던 부대의 13%에 해당하는 3,040명의 병사들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심각한 손실은 300여명의 장교들을 잃은 것인데 이는 전체 장교수의 70%(!)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24]
영국군 1만 9,000여명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백인 9,000여명 및 9,000여명 정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원주민과 인도인 병사 등.
[25]
식량 5,000t과 연료 2,000t과 2,000여대의 차량 등.
[26]
추가로 독일의 승전보고서에는 45,000명의 포로와 장갑차량 1,000여대 및 화포 400여문을 획득했다고 하였다. 물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27]
처칠은 몽고메리 인사에 기대는 커녕 몽고메리의 등판소식에 한탄과 한숨만 보일 정도로 낙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몽고메리가 질로 안되면 물량으로 승부하자는 작전으로 방어공세만 취하자 전임장군과 같이 패배주의자라며 더욱더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아프리카 전선을 이기게 되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28]
엘 알라메인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나 빨리 반격하라는 처칠의 요구를 참모들과 함께 비현실적인 작전이라며 거부했고 이에 처칠은 승질 뻗쳐서 신뢰를 잃었다며 그를 해임했다. 참고:ROMMEL's PANZERS p 236-237
[29]
당시 고트 중장은 휴 제임스가 조종하는 브리스톨 봄베이에 탑승한 상태로 이동하던 도중 JG 27 소속의 에이스 에밀 클라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조종사는 엔진 2개가 전부 맛이 간 상태로 어찌 불시착시켰으나 Bf109 두대가 불시착한 기체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고트 중장을 포함한 탑승자 대다수가 사망했다. 조종사인 제임스는 이때 살아남아서 1965년에 공군 소령으로 퇴역한 다음 2015년까지 살았다.
[30]
대표적으로 3500명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병력을 막은 폴고레 공수여단사단도 있다. 특히 이 부대의
사령관은 독일군의 지리멸렬함을 보고 "평상시에는 상관처럼 거들먹거리다가 전투만 시작하면 겁쟁이처럼 사라진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31]
사실 일본군은 생산력 자체는 열악하지 않았다. 특히 전투기 면에서는 단기간에 수천대를 상회하는 전투기를 찍어낼 정도로 괜찮았다.
그 상대방이 압도적인 물량과 품질의 국가인데다가
제 손으로 격파속도가 생산속도를 추월하게 만들어서 문제였을 뿐이다.
[32]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북아프리카 전역과 같이 생긴 지중해 전역에서 이탈리아 해군과 영국 해군의 세력도는 거의 팽팽했다. 물론 케이프 마타판 해전처럼 이탈리아가 탈탈 털린 적도 있지만 하푼 작전처럼 영국이 전함을 포함한 함대를 끌고 왔는데 반대로 이탈리아 구축함이 보급선만 털어먹고 튀어버리기도 했다.
[33]
롬멜은 애초에 사령부로부터 이탈리아가 빼앗긴 영토까지 되찾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보급량과 보급예산 또한 그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롬멜이 호기라고 여겨 계속된 진격으로 빠른 시간내에 막대한 영토를 얻어내자 사령부는 이왕 이렇게 된거 유전지대도 먹으면 최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롬멜이 너무 빠른 진격을 한 나머지 후방에서는 보급로 확보하기가 힘들었고 보급연료량보다 수송대 연료량이 더 드는 상황이 오게된 것이다. 후일 연합군도 노르망디 상륙 이후 너무 길어진 보급선 때문에 앤트워프를 확보하며 해결하였다. 게다가 북아프리카는 사막지대가 많아 식량 확보도 힘들고 탄약은 유럽 본토에서 건너와야 하는데 영국군이 미국에서 공여받은 항공기로 이 보급선들을 계속해서 침몰시켜버리니 독일은 점차 보급난에 빠졌다. 반면 영국군은 계속해서 식민지에서 오는 인적자원과 공여받은 무기로 무장하여 졸전으로 발생한 열세를 우세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34]
이건 독일 제국군, 독일 국방군, 일본군 일선 사령관들에서 잇달아 발견되는 현상이다.
[35]
사막에서 제일 필요한 물과 식량이 아닌
구두약을 잔뜩 보급해주거나,
땡볕의 사막을 걸어서 이동하란 명령을 내린다.
[36]
레드 스컬 입장에선 보자면,
독일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세상을 바꿀 물건이 있는데, 모래 밖에 없는 이탈리아 식민지에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게 여간 답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