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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 공국 Herzogtum Braunschwe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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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국장 | |
1815년 ~ 191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베스트팔렌 왕국 | 바이마르 공화국 | |
수도 | 브라운슈바이크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공작 | |
언어 | 독일어 | |
종교 | 루터파 개신교,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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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1905년 기준으로 면적은 3,672 km², 인구는 49만 4천명 가량이었다. 대부분의 독일 연방들이 그랬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국도 여러 부분의 월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2. 역사
브라운슈바이크를 의인화시킨 '브루노니아(Brunonia)'
이 지역은 원래 작센 공국의 일부였다. 12세기 벨프 가문과 작센 공국의 전성기를 일구었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브라운슈바이크를 작센 공국의 수도로 삼으며 이 지역은 북부 독일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사자공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의 권력 싸움에서 패하면서 사자공의 영지 대부분은 몰수당해 바르바로사 황제의 측근들에게 재분배되었으며 오직 브라운슈바이크 일대만이 사자공과 벨프 가문이 소유하는 사유지로서 남겨졌다.
사자공과 바르바로사 황제가 모두 죽은 후, 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는 바르바로사 황제가 벨프 가문에게 내려진 가혹한 조치를 다소 완화했다. 벨프 가문은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 일대를 중심으로 구 작센 공국의 일부를 환수받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을 세웠다. 이후 이 영지는 분할 상속과 재결합을 거치며 수차례 영지가 나눠졌다가 합쳐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이어졌다.
그러다가 1636년 본가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공국의 수도를 하노버로 옮기면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하노버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승격되었다. 1714년에는 본가의 게오르크 1세가 영국 국왕 조지 1세가 되면서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때 영국과 동군연합 관계였기 때문에 미국 독립 전쟁에도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나폴레옹 전쟁 종전 직후에 열린 빈 회의에서의 합의 결과에 따라 1815년 벨프 가문의 본가이자 하노버 왕조가 다스리는 지역이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방계 가문이 다스리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Fürstentum Braunschweig-Wolfenbüttel)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즉 벨프 가문이 이어오면서 분가가 형성되며 영지가 나눠졌다 합해졌다하면서 이어져 왔고, 18세기 들어 본가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이 영국 왕위에 당첨(?)되어 독일과 멀어지며 방계 가문만이 독일에 남았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왕실은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가문, 그리고 본가인 하노버 왕실[2]과 여러 대에 걸쳐 혼인이 잦았다. 대표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3]의 부인이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어머니인 루이제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가 출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6세의 부인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도 이 가문 출신이다. 이 결혼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야심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해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선제후국과 쾰른 선제후국이 이탈하며 친 오스트리아 세력이 필요해진 탓에 레오폴트 1세가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을 포섭하면서 둘째 카를 6세를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 공작 가문과 결혼시킨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대로였다면 종교 차이로 결혼이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카를 6세의 형인 요제프 1세는 조지 1세의 사촌 여동생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와 결혼했고, 뤼네부르크계(훗날 영국 국왕)는 하노버 선제후가 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의 제후국이 되었다가, 1918년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에 니더작센에 흡수되면서 폐지됐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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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빈 회의 이후
- 카를 2세(1815 ~ 1880)
- 빌헬름(1830 ~ 1884)
- 섭정기(1884 ~ 1913)[4]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1913 ~ 1918)[5]
편의상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라고 했으나, 이건 하노버 왕국 왕위요구자로서의 넘버링이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공으로서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이다. 아래 공위요구자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공위요구자로서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는 2세, 5세는 3세이다.
3.1. 공위요구자
1923년 이래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위요구자는 하노버 왕가 수장도 겸한다.[6]-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1887 ~ 1953)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1914 ~ 1987)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1954 ~ )[7]
[1]
우크라이나 국기랑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국기 비율이 약간 다르며, 브라운슈바이크쪽의 국기가 더 진하다.
[2]
영국 왕
조지 3세의 누나인 어거스타 공주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프로이센군 원수)에게 시집갔고, 그들의 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은
조지 4세에게 시집갔다.
[3]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5남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
[4]
하노버 왕국이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된 뒤 하노버 왕과 4촌 관계인 브라운슈바이크의 빌헬름이 자신이 죽은 뒤 공위를 하노버 왕가에게 넘기겠다고 했으나, 빌헬름이 죽은 뒤 프로이센 왕국이 하노버 왕가와 화해한 1913년까지 하노버 왕가가 브라운슈바이크를 상속받지 못 했다.
[5]
하노버의 왕자.
[6]
1923년까지는 마지막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세자가 하노버 왕가의 수장이었고, 그의 사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위요구권과 하노버 왕위요구권이 합쳐졌다.
[7]
모나코의 카롤린 공녀의 현 남편으로 유명하다.
소피아 왕대비와
콘스탄티노스 2세의 외사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