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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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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등작(五等爵)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1. 개요2. 역사
2.1. 중국2.2. 한국2.3. 일본2.4. 유럽
2.4.1. 변천2.4.2. Duke와 Prince2.4.3. 현존하는 공작위
3. 공작위를 가졌던 인물

1. 개요

언어별 명칭
<colbgcolor=#dcdcdc,#222222> 한자
영어 Duke
라틴어 Dux
그리스어 δουχ
독일어 Herzog
프랑스어 Duc

공작은 귀족 작위 중 하나다.

2. 역사

2.1. 중국

공(公)이란 글자는 원래 남을 높여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만인지상 임금이라지만 그 권력이 항상, 모든 군주에게 같지 않다. 고대에는 군주의 권력도 후대의 명, 청대에 비하면 별로 높지 않았다. 항렬이 높은 종친이나 손님으로 여기는 대상들을 부를 때는 남을 공으로 존칭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천자가 공(公)으로 존칭하는 대상이 다소 한정되었다. 의 자문역이자 유사시 섭정의 권한을 가지는 최고위 직책인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두고 삼공(三公)이라 불렀는데, 보통 왕보다 항렬이 높은 종친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왕에게 스승의 예우를 받았다. 또한 송나라의 군주인 송후(宋侯)는 상나라 후예 자격으로 의전상 왕의 신하가 아닌 빈객으로 예우 받았다.[1] 주나라 왕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공(公)으로 존칭했다. 즉, 엄밀하게 따지자면 공(公)은 작위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천자에게 공(公)의 존칭받을 정도로 그 대상들이 가장 높은 서열의 제후였던 점은 분명해서, 춘추전국시대의 유학자들이 주나라 때 사용된 여러 칭호들을 작위와 그 서열로 정의하면서 후세에는 오등작 가운데 최고의 작위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이왕삼각의 예에 따라 상나라 주나라의 후예에게 현(縣) 크기의 식읍을 내려 제후로 봉하고 그들을 공(公)으로 존칭했다. 그 외에는 구석의 특전을 받은 역적제후의 칭호로 사용하기도 했다.[2] 이 당시 공(公)은 군(郡)을 식읍으로 받는 왕(王)보다 더 높은 예우를 받도록 규정되어, 의전상 서열은 가장 높았다.[3][4] 삼국시대 위나라 때 비로소 그동안 관례상으로 주어지던 왕(王)과 공(公)이 공식적으로 법제화된 작위가 되었고, 서열 역시 왕이 공보다 높은 것으로 설정되었다.

수문제가 중원을 재통일한 이후, 국왕(國王) - 군왕(郡王) - 국공(國公) - 군공(郡公) - 공(公) - 후(候) - 백(伯) - 자(子) - 남(男)의 9등작을 제정하여 국왕은 조공국의 군주 중에서만 책봉할 수 있는 왕호로 정하고 황족 및 공신들에게는 군왕 이하의 작호에서만 책봉하도록 조정하였다. 이는 국왕으로 책봉된 조공국의 군주를 자국의 황족 및 공신보다 반드시 앞서 예우한다는 최혜국 대우를 보장한다는 의미의 조공 시스템을 완성하는 조치이면서 황족 및 공신은 독립국의 군주가 아님을 확실히 한 조치였기 때문에 이 틀은 명나라 시기까지 이어진다.

공자의 후손들은 당나라 시대부터 공의 지위를 받아왔으며[5] 왕조가 바뀌었어도 황제들은 이걸 대대로 공자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가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공의 지위는 폐지되고 새롭게 대성지성봉사관이라는 직책을 승계한다. 하지만 국부천대 이후 대만에 거주하고 있다.

한편으로 공(公)은 높은 관직을 지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은 홍 공이다. 이에 공자(公子)라는 표현은 높은 집안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었다. 공손(公孫)이란 성씨의 또한 이러한 용례대로 '높은신 분의 후예들'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고위 관직을 역임하여 시호를 받은 사람들은 시호 뒤에 공(公)을 붙여 호칭했다.

2.2. 한국

현존 사료상 우리나라서 "공작" 작위는 신라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백제 오등작을 사용했다고 추정하나 사료상으론 왕작위과 후작위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북국시대 발해도 공작위를 내린 사료가 존재한다.
한국에서 "공작" 작위는 고려에서 가장 많이 사용 되었다. 문종의 "오등봉작제"가 제정되고 체계화되어 사용되었다. 문종 이전엔 오등작 외에도 태자나 군 칭호도 사용했으나 문종 이후 오등작만 사용하게 되면서 왕자 왕족들, 대신들에게 봉작했으며 봉건제 유럽의 사례와는 다르게 군현제인 고려는 형식상 봉국(封國), 봉지(封地)를 주어[6] 왕족의 권위를 내세우거나[7] 대신의 공로를 치하할 때 사용하였다.

고려 왕조에서 공작위는 왕족에게 주는 공작과, 왕족이 아닌 신하에게 주는 국공(國公), 군공(郡公)의 형태로 주었다. 국공은 개성, 평양, 대방, 낙랑 같은 유명한 지방이나, 조선, 부여, 변한, 진한, 마한, 삼한, 계림, 금관 같은 국가 단위의 명의상 영지를 봉해주었다.[8] 군공은 OO군개국공(郡開國公)의 약자로 군(郡)단위 영지를 봉하였으며 주로 신하들의 본관 지명에서 따왔다. 그외에 강조의 정변으로 쫓겨난 목종에게 나라를 양보했다는 뜻에서 양국공(讓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얼마 안가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뒤에는 국왕 신분으로 돌리고 시호와 묘호를 바쳤다.

고려의 공·후·백 왕족(제왕)은 "영공 전하(令公 殿下)"로, 공이나 후가 된 신하는 "영공 저하(令公 邸下)"로 불렸다.[9]

고려에는 대공(大公)과 그 부인인 대비(大妃)가 있었던 적이 있다. 공양왕의 부모인데 공양왕은 허수아비 군주였음으로 부모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고 삼한국 공작, 삼한국 대비로 한 단계 낮게 추존했다. 하지만 왕의 아버지였던 만큼 '대공(大公)'으로 특별 취급해준 것이다. 공작의 부인은 보통 'ㅇㅇ국 대부인' 작위를 받는데 대비 작위를 받은 것도 왕모이니 특별 취급해준 것.

조선 왕조는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 연간에 있었던 백작+ 체제 위에 공작과 후작을 추가했다. 이때 친왕자들을 공작으로 봉하여 이방원의 경우 정안공이라 했고 셋째 형 이방의는 익안공, 넷째 형 이방간은 회안공이라고 했다. 1401년(태종 1) 공후백 3등작이 폐지되면서 공작은 대군으로 바뀌었다.[10] 이후 공이라는 표현에서 작위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관료들에 대한 존칭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한국 왕조의 공작들은 이하 항목을 참조.

2.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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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유럽

로마 제국 시대의 라틴어 Dux에서 유래했다. Dux란 원래 지도자, 혹은 영어 Leader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3~4세기 이후로 각 속주 별로 배치된 둘 이상의 군단을 지휘하는 관직명이 되었다. 고대 말에서 중세 초 사이 성립한 유럽의 게르만계 국가들은 로마의 관직을 자칭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Dux이다.

독일어권의 Herzog도 군대를 이끄는 사람에서 비롯됐는데,중세 고트어 herizogo의 heri가 군대(Heer), zogo가 이끌다(Ziehen)라는 뜻이다.

간혹 공작 중 특히 높은 인물을 대공으로 칭하기도 한다. 보통은 독립 공국의 군주를 대공이라고 하지만, 유럽 각국의 작위체계가 모두 다르기에 정형화된 법칙은 없다. 깊게 들어가면 대공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생길 정도.[11] 현존하는 대공국(Grand Duchy)은 룩셈부르크가 유일하다. 대공국보다 한 단계 낮은 공국(Duchy)은[12]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의 연방소속이었던 안할트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작센마이닝겐 공국 5개국이 폐지된 1918년 이후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13]

2.4.1. 변천

상기하였듯 DUX는 원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무관에 한정하지 않았지만,[14] 로마 관료로서 한 지역의 군단장 혹은 그 직속 상관의 칭호가 되면서 서로마의 붕괴 후에는 자연스럽게 게르만계 지도자들에게도 군사적 전통에 근거한 작위명으로서 굳어졌다.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치한 관직으로서 DUX은 엄연히 문민 행정과 분리된 무관이었다. 민간 행정은 PRAEFECTUS, Vicarius 등 다른 행정 관직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파리 대백작 위그[15]가 자칭한 DUX ET PRINCEPS DE FRANCORUM( 프랑키아의 지도자이자 영도자)는 위그 카페가 섭정으로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동시에 군권도 장악했다는 의미로 사용한 칭호이다. 이때만 해도 공작은 특정 지역을 장악한 영역 제후의 의미는 아니었기에, 이 때의 DUX는 공작으로 번역해선 안된다.

게르만계 통치자들이 고대 로마의 관직을 자칭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구 로마 제국령에 나라를 세운 경우 고대 로마의 행정체계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였던 점이 있고, 동시에 로마인이나 로마화한 현지인 유력자들과 융합이 용이해서 그랬던 점도 있다. 특히 독립 세력을 보유할 정도라면 (그것이 부족 단위 귀화든 동맹(foederati)이든 간에) 대개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많아서, 아예 제국 정부 차원에서 실질적으로도 해당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하고서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DUX가 단순한 자칭 칭호로 여겨지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국왕 다음 격의 지위의 작위로 공식화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게르만 대족장들에게 ' Herzog'라는 관직을 수여한 예에 따른 것인데, 'Herzog'라는 칭호가 고대 게르만족에서 '부족을 전쟁터로 이끌고 나갈 지도자로 선출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던 'Harjatugô'에서 유래한 것이었기에,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는 고대 로마의 'DUX'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후일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가 제정된 이후에 선제후의 다음가는 작위의 격으로 Herzog를 규정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이렇듯 고대 말에서 중세 초의 공작들은 대부분 기존의 지역 유력자들이 임명된 것이었다. 독일의 경우 부족 공국들이 그러했고, 프랑스의 경우 로마화가 많이 진행된 남부 지역에 공작이 임명되었다. 대표적으로 서고트 왕국의 영토였던 아키텐 지방은 기존 서고트 출신의 유력자들이 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부르군트 왕국의 영역이었던 부르고뉴 역시 공작으로 임명됐다. 남프랑스였으나 로마화가 많이 진행된 지방인 프로방스와 툴루즈는 각기 행정관(프라에펙투스)와 대관구장(patrician)으로 임명되었는데, 하는 역할은 비슷했다.

문제는 애초부터 지역 유력자를 형식상 관직에 임명하다보니, 공작들은 자기 부족 세력을 기반으로 권한을 행사하였고 자연스레 영역제후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위그 프랑스 공도 실제로 권력을 발휘한 것은 북프랑스 일대뿐이었고,[16] 남부의 아키텐 공의 지역이나 동남쪽의 부르고뉴 공이 장악한 지역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못했다. 결국 제국의 장악력이 약화되는 10세기까지 자연스럽게 부족적 관습법을 따라 '장군'이라는 관직이 세습재산화 하였고, 곧 지역 영주로 변하게 된다. 어휘 자체는 여전히 DUX지만, 그 의미가 영주인 공작으로서 작위로 변한 것이다.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의 권위로 황권이 유지되어서 각 공작에게 재판권을 주지는 않아서 별도로 황제가 통제하는 백작(재판관)을 파견했지만, 프랑스는 카페 왕조 자체가 저 유력 제후들이 추대한 탓에 권위도 바닥을 기었고, 따라서 프랑스는 초기에는 왕권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왕으로서 봉신을 부린다기보다는 평등한 동료나 동맹에 가까운 형태로 동원했다.

프랑스의 경우 당연하게도 넘사벽으로 커다란 영역을 먹고 있던 아키텐이나, DUX FRANCORUM 등의 선례를 따라 자연히 공작(DUX)이 최상격으로 간주되었고, 공작들도 자체적으로 행정관으로써 임명하기도 했던 백작위는 공작보다 하위로 간주되었다. 다만 이러한 정립은 좀 더 후대의 일이고, 진짜 중세 프랑스 왕국 시대에는 왕의 직속 봉신인 백작이면 공작에 특별히 꿀리지 않고 '(프랑스)왕의 동료(peerage of france)'라고 해서 가장 명예로운 지위였다. 샹파뉴 백작, 플란데런 백작, 툴루즈 백작 등이 이러한 왕의 동료에 들어서 공작과 대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17]

봉건 사회가 차츰 안정을 찾자, 독일의 부족공국의 공작들은 황제의 견제를 받아 차츰 해체되어 작은 규모의 공작령과 백작령, 주교후령 등으로 해체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기존 영역 제후들의 후사가 끊기면 직할령으로 흡수하거나 아예 전쟁과 모략 등을 동원하여 제거하거나[18] 일 드 프랑스 왕령지의 부유함을 기반으로 꾸준히 돈을 주고 영지를 사들이는 정책을 취했기에, 여러 백작령을 묶어 공작령을 신설하고 방계 왕실 가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 (발루아 백작가), 부르봉 왕조 (부르봉 공작가)가 이렇게 생겨난 가문이다.

유럽이 중앙집권사회에 접어든 이후로는 공작의 힘이 그리 크지 않은 나라가 많았다. 근세 이래 유럽사에서 중앙 실세 귀족은 백작이 대부분이었다(웬만한 재상이나 대신은 대개 '백작'). 후작은 오늘날로 치자면 국경지대 야전사령관이라서 중앙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독립적 세력에서 기원하였던 공작은 그 권력이 막강하였기에 역설적으로 군주와의 투쟁이나 집요한 견제 끝에 몰락하였고, 왕족으로서 공작인 경우도 혈통 상 충분히 왕위 찬탈을 일으킬 명분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서, 국왕이 상식적이라면 공작들에게 많은 사병과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귀족들은 차츰 그 자신이 지방세력으로 남기보다는 왕권에 협력하면서 중앙정부에서 한 몫 차지하고 때로는 국왕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결국 근세에 접어들면서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오래된 가문만이 아니라 일반 귀족이나 심지어 기사들조차 공적이 높을 경우 승격하여 공작위를 받게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는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감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다. 또한 토지와 다른 재산이 귀족 작위에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소유하는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공작위의 성격은 점점 변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왕족이 아닌 노퍽 백작이 노퍽 공작으로 승작하거나 존 처칠이 다대한 전공을 쌓으면서 기사에서 말버러 공작까지 승작한 것, 그리고 나폴레옹을 꺾은 아서 웰즐리 역시 남작부터 시작하여 자작과 후작까지 승작을 거듭하여 웰링턴 공작으로 임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19] 웨스트민스터 공작 같은 경우는 아예 그 시조가 평민 출신이다.[20] 즉, 공작, 정확히 작위제도의 의미는 작위 그 자체에 권력이나 특권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높은 영예를 누리는 직위로 성격이 변하였다.[21][22]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이 상당히 많은 인물들에게 공작위를 수여했다.

2.4.2. Duke와 Prince

Prince(獨 Fürst/Prinz)라는 호칭 또한 공작으로 번역되고는 하나, 둘은 어원부터 다른 별개 작위이므로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프린스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

국가별로 살펴보자면 서유럽에서는 영역제후로서의 Prince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거의 그냥 왕실 작위에 가깝다. 그리고 왕족인 Prince를 Duke보다 높게 두었다. 반면 Prince가 영역제후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과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인데, 동유럽은 아예 Duke 작위를 도입하지 않은 관계로 논외로 두고, 독일권에서는 영국, 프랑스와는 반대로 Prince(Fürst)가 Duke(Herzog)보다 낮고 백작(Graf)보다는 높은 작위로, 말하자면 후작에 해당한다.[23] 따라서 공국으로 번역되는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등은 프린스가 다스리는 Principality이지, Duchy가 아니므로 후국에 해당한다.[24]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독일어 정식 명칭은 Fürstentum Liechtenstein인데 리히텐슈타인은 본래 신성 로마 제국 내 Fürstentum이었으므로 구분했어야 하나, 초기 번역과정에서 모호한 번역을 하여 지금까지도 Duke와 Prince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하다.[25] Duchy와 Principality에 대해서는 공국 후국 문서 참고.

2.4.3. 현존하는 공작위

현재 전 세계 군주 중에서 대공(Grand duke) 칭호를 사용하는 인물은 룩셈부르크 대공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공국(duchy)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말 그대로 군주의 신하로서 받는 작위만을 서술한다.
  • 영국
    현재 영국에는 30명의 공작들이 있으며, 그중 7명은 왕족이다. 마지막으로 비왕족 공작이 서임된 연도는 1900년(파이프 공작)이며, 그나마도 부마를 공작으로 서임한 것이다.[26]
  • 벨기에
    벨기에의 공작위는 모두 중세에서 내려온 작위이다. Duke 작위 보유자는 왕위계승자 칭호인 브라반트 공작 외에 아렌베르크 공작(Duke of Arenberg), 뷰포르스포르탱 공작(Duke of Beaufort-Spontin)[39], 크로이 공작(Duke of Croÿ), 로즈코르스바렘 공작(Duke of Looz-Corswarem), 우르셀 공작위(Duke of Ursel)가 있으며, Prince 작위 보유자도 여럿 있다.[40] 그 중 대표적인 작위가 바로 워털루 대공(Prince of Waterloo)으로 영국의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이 겸하고 있으며 워털루 대공은 벨기에의 작위이면서 네덜란드의 작위로 인정된다.

3. 공작위를 가졌던 인물

※ 가상 인물은 작위/창작물 참조.

[1] 송나라의 군주는 무조건 송공(宋公)으로 호칭한 것이 아니다. 높여 부를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송후(宋侯)라고 불렀다. [2] 바로 왕망 조조의 경우다. [3]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책봉된 뒤에 위왕(魏王)으로 승작한 것 때문에 당시에도 공이 왕보다 낮은 작위 였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헌제가 조조를 위공으로 책봉한 조서에서 명시되어 있듯, 이미 위공으로 책봉된 시점에 조조의 지위는 제후왕보다 높은 예우를 받도록 규정되었다. 특히 조조의 경우에는 식읍마저 10개 군(郡)을 받아 제후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지위를 누렸다. [4] 본래 왕은 상, 주 대까지 (훗날 황제에 해당하는)중앙지역의 국가의 군주를 지칭하는 칭호였으나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제후국의 군주들이 왕을 지칭하고, 진시황이 황제를 만들어내면서 소멸했다가 이후 부활, 한나라 당시엔 제후국의 군주가 된다. 이후 제후국들의 세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왕은 (실권은 적으나) 황족들이 관례적으로 임명되는 명예직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즉 조조의 왕 책봉은 권한이나 의전의 문제보다는 황족만을 왕으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너뜨림으로서 후한 황실의 질서와 권위를 흔든 것의 의미가 있다. 조조의 위왕 즉위가 반발을 산 것, (국성을 가진) 유비의 한중왕 즉위가 당대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후한 중심의 질서를 지키려고 했던 여론이 강했기 때문이다. [5] 당나라 때 문선공으로 책봉되어, 송나라 때는 연성공으로 개칭되었다. [6] 가뜩이나 고려는 지방이 중앙 정부의 말을 잘 안들었는데 진짜 국가니 땅을 떼주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7] 예기에 따르면 오직 천자만이 제후를 봉할 수 있는데 "내가 얠 봉해주었으니 난 천자고 얜 그 천자의 핏줄이다!"라는 걸 은근슬쩍 드러내는 것이다. [8] 형식상 봉토. 오등작의 원조인 주나라는 진짜로 그 지역 땅을 떼줬지만, 위진남북조시대 이후에는 작호의 이름만 지명에서 따올 뿐 실제 역지를 수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참고로, 개성과 낙랑은 국명으로 취급된 사례가 있다. 개성국공이나 낙랑왕 같은 경우. [9] 고려사 형법지 용례, 동국이상국집 19권 참조 [10] 정작 제후국에서 공후백 작위를 사용할 수 없다며 공후백 작위제도를 폐지한 태종은 공후백 제도가 폐지된지 7년이 지난 태종8년에 태상왕 이성계가 승하하자 원간섭기 때 폐지된 묘호제도를 부활시켜 태상왕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고 3년뒤인 태종11년에 환왕 익왕 목왕 도왕으로 추존된 이성계의 4대조에게 묘호를 올려 환조 익조 목조 도조로 추존하였다. [11] 예컨대 독일 지역만 해도 대공으로 번역되는 Grand duke(Großherzog)는 영방 제후국 중 비교적 세력이 큰 제후국의 군주인데 비해, 역시 대공으로 번역되는 Archduke(Erzherzog)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통치자 및 황족 남자들을 지칭한다. 그런가 하면 제정 러시아에서는 대공(Grand Duke 혹은 Grand Prince)은 로마노프 왕조의 황자와 황손들을 가리킨다. (단, 황제의 증손주부턴 그냥 Prince를 칭한다.) [12] 실질적으로 "영토를 가지는 제후령"으로서의 공국을 말한다. [13]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경우, 공작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닌 이 다스리는 국가임을 뜻한다. 모나코 공국, 안도라 공국도 동일하다. [14] 중세 초의 라틴어 성경인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성경에서도 Dux는 단순히 '지도자'란 의미이다. [15] 카페 왕조 초대 왕 위그 카페의 아버지다. [16] 네우스트리아 지역. 프랑스 왕의 남부 영향력이 얼마나 적었는지, 프랑스 공이라는 칭호를 구 네우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영역제후령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북프랑스 = 프랑스 공국이었다는 관점이다. [17] 다만, 여기서 예시로 든 백작들은 성주층으로서 중소영주가 아니라 영역제후로서 웬만한 공작급이었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툴루즈 백작의 경우 아키텐 공작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넓은 영지를 보유했지만(둘이 프랑스 남부를 양분해서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급이 딸려서(?) 백작을 칭했고, 플랑드르 백작과 상파뉴 백작도 웬만한 공작급이었다. 중세 초기를 구현한 크킹에서 괜히 이 세 개를 모두 공작으로 구현한 것이 아니다. [18] 아키텐 공국이나 툴루즈 백국, 노르망디 공국의 몰락이 대표적이다. 툴루즈 가문은 아예 이단으로 몰려 멸문당했고, 플랜태저넷 왕조도 음모와 전쟁을 겪으며 프랑스 내 영지를 모두 몰수당했다. [19] 처음으로 받은 작위가 도루 남작이었고, 승전을 거듭하면서 웰링턴 자작, 웰링턴 후작 등을 모두 거쳐 공작이 되었다. 그밖에도 유럽 각국의 국왕들로부터도 수많은 작위를 수여받았다. [20] 1622년 준남작 작위 획득 → 7대 만인 1761년 남작, 1784년 백작 → 1대 만인 1831년 후작 → 3대 만인 1874년 대망의 공작. [21] 물론, 작위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기 때문에, 마지막 비왕족 공작위 수여도 1900년으로 이후엔 수여가 안되고있다. [22] 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고, 현재도 공작위를 가진것과 다른 귀족들과 대우 차이는 없지는 않다. [23] 유럽사에서 흔히 후작으로 번역하는 Marquis는 변경백으로 번역하는 것이 본 의미에 더 적절하다. [24] 영문 위키에 따르면 Dukedom은 군주의 신하로써의 공작위, 그 자체를 의미하고 Duchy는 공작이 다스리는 영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Duchy는 제후국의 개념이 포함된 것. [25] 한국은 근대 일본의 번역을 그대로 차용했는데, 당시 일본에서 독자적 작위체계였던 화족에서의 공작을 Prince로 번역하면서 Duke와 Prince의 구분이 무너졌었다. 사실 영어권에서도 Fürst를 어원 그대로 그냥 Prince로 번역해왔으므로 동양에서 유럽의 정보를 영어권 문서의 중역을 통해 얻어온 이상, 처음부터 혼동의 단초가 있었던 셈이다. [26] 파이프 공작은 원래 백작이었는데 에드워드 7세의 장녀 루이즈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면서 같은 이름의 공작위를 추가로 수여받는 형식으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27] 윌리엄 왕세자가 즉위하면 왕관에 병합되어 소멸된다. [28]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어 현 공작인 앤드류 왕자 사후 소멸이나 윌리엄 왕세자가 왕위에 오를 시 왕세자의 차남인 루이 왕자가 수여받을 가능성이 있다. [29] 다음 대부터 왕족 지위 상실 [30] 다음 대부터 왕족 지위 상실. [31] 현존하는 비왕족 공작 작위 중에 제일 오래된 작위이다. [32] 초대 공작은 존 처칠이다. [33] 초대 공작은 아서 웰즐리다. [34] 7대 공작 휴 그로스베너는 웨일스 공 윌리엄의 절친으로 그의 아들인 웨일스의 조지 공자의 성공회 대부이기도 하다. [35] 가장 적은 작위는 자작으로 140개 정도뿐이다. [36] 스페인의 장군이자 3대 알바공작인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잘 알려졌다. 16세기 유럽사의 굵직한 사건에 등장한 “알바 공작”은 이 사람을 지칭한 경우가 많다. [37] 성을 보면 알겠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원수이자 알만사 전투와 3차 바르셀로나 공방전의 영웅인 제임스 피츠제임스 장군(프랑스어로는 자크 드 피츠제임스)의 직계후손이다.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이 두 전투에서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지켜낸 공로로 스페인 귀족과(리리카 공작, 베릭 공작-원래 자코바이트 공작위), 프랑스 귀족 작위(피츠제임스 공작)을 하사받았다. 이후 스페인 귀족 작위는 장남에게 상속하고 프랑스 귀족 작위는 차남에게 상속했지만, 프랑스계 작위는 1967년에 단절되었다. 여담으로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영국의 국왕 제임스 2세의 사생아였다. [38] 그나마 형제들이 작위를 나눠서 상속받았기 때문에 겨우 40여개에 불과하지, 18대 여공작이었던 현 알바 공작의 어머니는 생전의 칭호가 무려 52가지였다. [39] 현재 후계자가 없어 단절 예정 [40] 기존에는 벨기에의 Prince는 신성 로마 제국의 후작 출신이라 후작임을 의미한다고 나와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벨기에는 분명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으나 프랑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에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Prince(프랑스어)/Prins(네덜란드어)는 프랑스의 Prince와 동일하게 Duke를 제치고 가장 높은 작위이다. 자세한 것은 영문 위키 Belgian nobility의 Structure of the Belgian nobility 부분 중 Princes in the Belgian nobility을 참고. [41] 명주군왕의 손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김정여가 명원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42] 발해고 기록. 어느 지역에 분봉 됐는지 알 수 없다. [43] 고려사 왕식렴 열전 기록. 개국은 일반적으로 작위에 붙는 미칭인지 진짜 개국에 일조하였기에 공덕 찬양 의미로 붙었는지 모른다. [44] 유자우 묘지명 기록. 고려사엔 개국공으로 떨어져있지 않고 '개국충절공' 처럼 시호에 붙어있다. [45] 조선국공(朝鮮國公) 작위는 박탈당하였고, 생전 작위였던 한양공(漢陽公)으로 다시 추증되었다. [46] 그 지역 송악이다. 송악의 신을 공작으로 봉한 것. 태조실록 2년 1월 21일 기록. [47] 대한제국 때 대신 [48] 시호와 함께 왕의 작위까지 있다. [49] 시호와 함께 왕의 작위까지 있다. [50] 시호와 함께 왕의 작위까지 있다. [51] 다만, 이 경우는 진짜 귀족 지위를 가진건 아니었고, 일종의 작위 요구 또는 경칭으로 보는 편이 낫다. 프랑스의 경우 1975년까지는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특권은 없어도 귀족의 가문과 칭호 자체는 허락했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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