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2:18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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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사례
3.1. 대한제국3.2. 청나라3.3. 일본

1. 개요

친왕(親王)은 한자문화권에서 쓰이는 왕작(王爵)으로, 보편적으로는 황자를 가리키는 왕실 용어로 이해되고 있다. 친왕의 부인은 친왕비라고 한다.

2. 역사

친왕은 원래 '작호(爵號)'의 개념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왕(王) 가운데에서도 관제상의 등급을 구분하는 표현이었다. 북주에서 국왕(國王) 작위를 법제화하기 이전까지 위진남북조시대에 왕작은 관제상으로 군왕(郡王)과 현왕(縣王) 두 종류가 있었다. 군왕과 현왕을 구분하기 위해, 하위 작위인 현왕은 반드시 봉호에 현왕임을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군왕은 보통 '군(郡)'자를 생략해서 표기했다. '친왕'은 북위에서 군왕에 시봉(始封)[1]된 황자와, 군왕 작위를 세습한 '번왕(蕃王)'을 구분하기 위해 등장했다. 남조의 양나라에서는 친왕 대신 '정왕(正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정왕을 세습한 사람을 '사왕(嗣王)', 그 이외의 세습 군왕을 '번왕(蕃王)' 3종류로 구분했다. 이후 북주에서 국왕 작위가 등장하면서, 국왕은 외국의 군주가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봉호에 '국(國)'자를 생략해서 표기했고, 하위 작위가 된 군왕은 반드시 봉호에 군왕임을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직계 황족과 황실 본가와는 점점 멀어지는 방계 황족들을 차등 대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었다. 직계 황족인 친왕(정왕)과 방계 황족인 사왕 및 번왕은 그 의전상의 서열을 달리했고, 실질적으로도 산계를 낮춘다거나 급여를 낮추는 조치를 취했기에, 이를 관제상에서는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제도상으론 황제의 형제나 황자는 정1품 국왕(國王)으로 봉해지는데, 이렇게 국왕 작위에 오른 황자를 '친왕'이라고 불렀다. 친왕의 적장자는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세습이 이뤄지면 '사왕(嗣王)' 등급의 국왕 작위를 받게 되는데, 관품은 종1품으로 낮아지고 식읍 또한 아버지의 최종 식읍의 수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책봉자가 받을 수 있는 식읍 규정에 따른 숫자만 받았다. 사왕은 대체로 국왕 봉호를 그대로 썼으나, 사왕 등급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을 때는 '사○왕(嗣○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황태자의 아들인 황손은 종1품 군왕(郡王)으로 책봉했고, 황태자의 아들은 아버지가 즉위하기 전까진 국왕이 되지 못했다. 사왕과 군왕 작위는 세습할 수 없었으며, 그 적장자는 국공(國公) 작위로 낮춰져서 세습하고, 국왕·군왕·국공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방계 후손들은 개국작(開國爵)이 주어져서 이를 세습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실제로 국왕이나 군왕이 되지 못하는 황손이나 군왕의 아들은 대체로 황제의 특은(特恩)을 구실로 군왕에 책봉될 수 있어서, 아버지의 작위와 봉호를 그대로 물려받지 못하더라도 대를 이어 군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현종 측천무후 시절 이씨 종실이 탄압을 받아 수가 적어졌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들면서 사왕의 세습을 허용하기도 했고, 원칙적으로 군공에 책봉되어야할 방계 황족을 국공으로 책봉하는 경우도 있는 등, 실제 작위 수여는 규정대로 이뤄지진 않았다. 당나라 말엽에는 군왕에 책봉된 유력 절도사가 국왕 작위에 책봉되는 경우마저 등장했다. 송나라의 황실 왕작 세습 또한 제도적 원칙과 실제 운영 방식은 당나라와 유사했으며, 특히 외척에게도 왕작이나 국공 작위를 폭넓게 수여했다.

명나라 때는 친왕을 세습하는 적통은 그대로 친왕으로 인정했고, 친왕을 세습하지 못하는 왕자는 모두 군왕으로 책봉했으며, 모든 왕작의 세습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국왕 작위가 친왕으로 단일화되었고, 군왕 또한 국왕과 구분되는 별개의 작위가 아니라 왕작 내 친왕의 하위호환으로 여겨지게 되어, 이전의 다른 왕조들과 달리 친왕과 군왕이 별개의 작위로 취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명나라의 경우 친왕은 1글자의 봉호를 군왕은 2글자의 봉호를 사용하여 양자가 자연스럽게 구분될 수 있었기에, 군왕의 봉호 또한 생략해서 부르게 되었다. 왕작이 친왕과 군왕으로 구별된다는 인식은 이처럼 명나라의 작위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에서 '친왕'은 왕작에 책봉되지 않았더라도 왕의 친형제나 아들에게 쓴 용례가 확인된다. 베트남에서 왕작은 대왕(大王, Đại vương) 및 왕(王, Vương)으로 구분되었다가, 응우옌 왕조에서 왕 및 군왕(郡王, Quận vương)으로 구분되어 쓰였으며, 친왕이라는 표현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직계 황족을 가리키는 용어로만 쓰였다.

청나라 일본에서는 친왕이 등급 개념이 아니라 정식 작호에 해당되며, 대한제국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3. 사례

대한제국, 청나라, 일본에서 '친왕'은 정식 작호로 쓰였기에 봉호에 항상 '친왕'을 명기했는데, 이 때문에 친왕의 봉호에 무조건 '친왕'을 명기하는 것을 정식 표기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듯, 명나라 이전의 중원 왕조에서는 친왕은 관제상의 등급 표현에 불과했기에 봉호에 '친'자를 표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3.1.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황제 칭호를 선포하면서 왕작을 도입했다. 종인학교 관제에 친왕 뿐만이 아니라 군왕(郡王)도 함께 언급된 점을 살펴보면 군왕 책봉 또한 고려하여 왕작 제도를 설계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한제국이 13년 만에 끝났기에 군왕 책봉 사례는 없다. 또한 청나라처럼 세습친왕가의 개념이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원래 조선에서는 군주의 직계 4대손까지만 종친으로 인정했으며, 제한적으로 봉작의 승습(承襲)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선친의 지위를 그대로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봉작을 받는 개념이었는데, 흥친왕 또한 부친의 대원왕을 그대로 세습하지 않고 별개의 봉작이 책봉되었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세습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제국에서 친왕들을 호칭할 때 '친'자를 생략해 '○왕'으로 부른 사례가 있기에, 일부에서는 '친'자를 생략하지 않는 일본의 사례와 대비하여 대한제국의 친왕들을 '○친왕'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본식 표현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식 문서인 책봉 금책에선 엄연히 '○친왕'으로 명기했고, 도장 또한 '○친왕인(○親王印)'으로 새겼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사례도 '○친왕' 쪽으로 표기한 사례가 훨씬 많으며, 오히려 '○왕' 쪽이 사례가 적다. 특히 봉호를 지정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한제국의 친왕 제도는 청나라의 친왕 제도를 참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의 작위 제도가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군왕 책봉 사례가 없이 친왕 책봉제도 또한 유지된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기에, 명확한 의전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약칭인 '○왕' 표현도 허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2. 청나라

청나라의 국호와 황제 칭호를 선포하면서, 후금 시절 팔기군의 기주(旗主) 역할을 하던 지위였던 '호쇼이 버이러(和碩貝勒·화석패륵)'를 왕작으로 개편했는데, 원래 호쇼이 버이러 8인 중 상위 4인은 '암바(大) 버이러'로 구분되기도 했으므로, 왕작으로 개편되면서 호쇼이 친왕(和碩親王·화석친왕)과 도로이 기윤왕(多羅郡王·다라군왕) 두 작위로 나눠졌다. 청나라의 친왕과 군왕은 이 두 작위의 약칭에 해당된다. 따라서 청나라에서 사용한 '친왕'에는 딱히 황자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 아니었기에 외번들에게도 '호쇼이 친왕' 작위를 수여할 수 있던 것이다. 왕작은 입관 이후로 기주 지위와는 무관하게 운영되었다.

또한 청나라 초기에는 한족 출신의 항장(降將)이 왕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특히 순치제 당시까지는 화남 지방을 외번으로 편제하여, 중앙에서 직할하지 않고 한족 번왕들이 직접 남명 정권을 구축하도록 했다. 강희제가 즉위한 이후 손가망(孫可望)의 의왕(義王) 작위를 세습한 양자 손징순(孫徵淳)이 1672년에 죽어서 손가망의 친아들인 손징호(孫徵灝)가 습작을 청했는데, 강희제는 이를 거부하고 모의공(慕義公)으로 낮춰 책봉했다. 이에 성공한 강희제는 이듬해 평남왕 상가희(尙可喜)가 장남 상지신과의 갈등 끝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차남인 상지효(尙之孝)에게 습작을 청하자, 습작을 불허하고 철번할 의향을 내비쳤고 상지효 역시 습작을 사양하여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평서왕(平西王) 오삼계와 정남왕(靖南王) 경정충 등이 철번을 우려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이른바 삼번의 난이 발발했다. 강희제가 이를 진압하면서 한족 외번은 모두 철폐되었고, 청나라 조정의 중원 전역의 직할통치가 실현되었다. 하지만 몽골과 신강 등에는 여전히 왕작을 받는 외번이 남았으며, 외번 왕작은 칸(汗)보다 낮은 서열이었다.

원래 팔기의 기주는 청나라 황실이 독점했기에, 만주족의 친왕 작위 또한 종실에게만 수여하였다. 종실의 왕작은 원래 세습에 제한을 두어 공과에 따라 승강되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세습으로만 유지되는 작위는 세습을 거듭할 수록 지위를 낮췄다. 하지만 일부 왕작은 그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습하는 특권인 '세습망체(世襲罔替)'가 부여되었는데, 그 혜택을 받는 왕작은 '철모자왕(鐵帽子王)'이라고 불렀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황실 문서 참조.

3.3. 일본

파일:일본 황족기.png
친왕기[2]

다이호 율령 이전까지는 천황의 직계 자손은 왕(王)으로 호칭했다. 701년 이후 천황의 아들만 친왕으로 불렀고 딸은 내친왕(內親王, 신자체: 内親王)이라 불렀으며, 황손 이후는 남자는 왕(王)으로 여자는 여왕(女王)으로 불렀다. 4세손까지는 황친(皇親)으로 계승권을 인정받는 범위에 있었고 5세손 이하는 친진(親盡)이 되지만,[3] 특이하게 5세손까지 왕 칭호를 쓸 수 있었으며 6세손 이하는 신적강하(臣籍降下)되어 황족 신분을 완전히 잃었다. 내친왕과 여왕은 황족 이외의 남성과 결혼하면 신적강하되어 칭호가 박탈되었다.

706년 2월 16일에 황친의 범위를 5세손까지로 넓히고, 5세왕의 적통 후손은 왕 칭호를 세습할 수 있도록 개정했다. 729년 8월 5일에는 6~7세손이라도 생모가 황손인 여왕일 경우에는 황친으로 인정했다. 이로 인해 황친의 범주가 지나치게 넓어짐에 따라, 798년 윤5월 23일부터 황친의 범주를 다시 4세손까지로 되돌렸다. 하지만 6세손 이하의 적통 후손이 왕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계속 인정했다. 이후로도 황친 인원 수가 많아질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성(姓)을 하사하고 신적강하시켰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는 황자나 황녀도 무조건 친왕이나 내친왕으로 부르지 않고, 천황이 선지(宣旨)를 내려야하는 개념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이를 친왕선하(親王宣下)라고 부른다. 1868년 윤4월 15일에 다시 율령제 규정으로 되돌렸고, 6세손 이하가 왕 칭호를 세습하고 있는 경우에는 칭호를 폐지하지 않고 그 당대까지만 왕으로 인정했다.

1889년 1월 15일에 황실전범이 제정되면서 황친 범위인 4세손까지 친왕·내친왕 칭호를, 5세손 이하는 왕·여왕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5세손 이하는 적남(嫡男)이 아닐 때는 성이 하사되거나 결혼으로 신적강하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9세손은 모두가 신적강하되어, 실질적으로 8세손까지 왕·여왕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1947년에 신헌법이 제정되고 황실전범 또한 현행 전범으로 개정되면서, 손자까지 친왕·내친왕으로 증손자 이후는 왕·여왕으로 개정되었으며, 신적강하라는 표현 또한 황적이탈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다이쇼 천황 직계를 제외한 구황족은 황적이탈 처리되어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일본국헌법 시행 이후로 "왕"은 한 명도 태어나지 않고 있다.

일본 황실 군왕(郡王)이 따로 존재하진 않는다. 한국이나 중국의 방식과 달리 황태자·황태손 등도 친왕으로 부른다는 것이 특기할 점이다. 이땐 '황태자·황태손○○친왕'이라고 한다. 또한 현재 일본의 귀족제도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내친왕이나 여왕은 같은 황족 남성과 결혼하지 않는 한 결혼하면 무조건 황적이탈되어 황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된다.


[1] 작위를 세습한 경우가 아니라, 처음 봉작된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 [2] 친왕, 내친왕, 친왕비, 왕, 여왕, 왕비 공통 [3] 5세손 이하를 친진으로 보는 것은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대체로 친진 이하는 가장 넓은 범위의 왕족 개념인 '종성(宗姓)'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보위를 계승할 수 있는 왕실 일원으로 여기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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