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21 01:30:13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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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대한제국 · 구한말 · 황실 · 황사 · 대한제국군( 장관급 장교) · 대한제국 애국가 · 대한제국 원 · 대한제국 훈장 ·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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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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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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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1]
파일:Korea_(orthographic_projection).png
1897년 10월 12일 ~ 1910년 8월 29일
,(12년 320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조선 일본령 조선[2]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 애국가
국화 오얏
표어 광명천지(光明天地)
(모든 땅에 밝은 빛을 내리리다.)
위치 한반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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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칭제 건원, 광무개혁
1899년 대한국 국제 선포
1900년 만국우편연합 가입
1901년 경인선 개통
1904년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체결
1905년 을사늑약
1906년 통감부 설치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국채보상운동,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1909년 안중근 하얼빈역 의거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제국 멸망
수도 한성부
행정구역 13도 7부[3] 1목 331군
민족 한민족
언어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한글
종교 유교 ( 성리학)
불교
천도교
기독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4]
국가원수 황제
역대 황제 초대 고종 (1897년 ~ 1907년)
2대 순종 (1907년 ~ 1910년)
국성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연호 광무 ,(1897년 ~ 1907년),
융희 ,(1907년 ~ 1910년),
통화 [5][6]

1. 개요2. 상세3. 대한국 국제4. 역사
4.1. 성립
4.1.1. 전제 군주국4.1.2. 고종의 제국 선포4.1.3.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4.2. 제국의 개혁4.3. 멸망4.4.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 계승
5. 대한제국의 근대성 논쟁6. 황실
6.1. 대한제국 계보도
7. 한국통감부
7.1. 역대 통감
8. 수교 국가9.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10. 군대
10.1. 편제
11. 기타
11.1. 이 시대에 들어온 근대 문물11.2. 대한제국의 오악(五嶽)11.3. 의화단 운동 진압에 대한제국이 참전 할 수도 있었다?
12. 대한제국의 인물 목록13. 역사적 사건 목록14.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
14.1. 드라마14.2. 영화14.3. 기타



1. 개요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 갑오개혁 당시 격상하여 칭한 ' 대군주'(大君主)의 칭호를 폐지한 후, ' 황제'(皇帝)를 칭하면서 조선에서 국호를 변경하여 세워진, 한반도 역사상 유일하게 대내외적으로 황제국임을 확실히 선포한 나라이다.

황제 중심의 자주 독립 국가임을 천명하면서 이전의 조선보다 나라의 격 자체는 높아졌지만, 현실적으로 외세의 내정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던 국가였다.

일본 제국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견제가 존재하던 대한제국 선포 초기에는 자주성을 보전하고 있었지만,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한 이후 체결된 을사조약(1905년)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속국화가 진행됐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주권마저 빼앗기고 일본의 일부로 강제로 병합당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으나, 근대적인 자주 독립 국가임을 천명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실제 1899년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처럼 조선 왕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의 지위로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약칭은 한국(韓國). 현대의 대한민국과 약칭이 같다. 나라이름은 '대한'이고, '제국'과 '민국'은 각각 황제국과 민주국이라는 정체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체가 달라졌을 뿐, 국호는 같은 이름을 쓰기때문에, 구분을 위해서 대한제국을 구한(舊韓)·구 한국(舊韓國)이라 하기도 하며, 흔히 쓰이는 구한말(舊韓末)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반대로 대한제국을 기준으로 보아 대한민국을 신한국(新韓國)이라 하기도 한다.

영어로는 Korean empire이고, 간략하게 표기할 때는 그냥 Korea라고 하기도 한다. 유튜브의 한국사, 세계사를 다룬 일부 영상에서도 Joseon이 Korea로 전환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공식 명칭이 Korea로 표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2. 상세

국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황실 상징이자 국장은 이화문의 오얏꽃 문장(李花紋)이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아래 '대한국 국제'에서 보듯 '대한국'과 혼용되었다. 따라서 이 문서는 ' 대한국'으로 검색해도 접근할 수 있다. 약칭으로는 '대한'과 '한국'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국명인 ' 대한(大韓)'과 국기인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이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사용 중. 대한제국의 황실 상징인 이화문은 전주 이씨 종친회, 대종종약원 등이 계승하여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7] 국가는 국권 침탈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가 광복하면서 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서로 다른 국가(하지만 제목은 둘 다 애국가)를 채택했다.

영어명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가 초기에 잠시 내세웠던 명칭이지만, 결국에는 Korean Empire나 Empire of Korea가 통용되었다. Korea의 어원이 ' 고려'인데 바로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였던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해서, 'Korean Empire'라고 하지 말고 'Empire of Dai Han'이라는 영문 호칭을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하기도 했는데 무시당했으며, 결국 Korea (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Coréa)란 명칭을 받아들여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발행한 우표를 보면 잘 알수 있다.

대한제국의 존속 기간은 1897년 10월 12일 ~ 1910년 8월 29일까지의 12년 10개월 18일 동안 존속했던 한반도의 나라이고, 조선 왕조까지 합치면 1392년부터 시작해서 1910년까지 대략 518년이다.

근대 문물도 많이 들어왔는데, 동화 약품의 부채표 활명수가 생긴 게 바로 직전인 1897년 9월 25일, 한국은행도 그렇고, 서울의 많은 대학도 이때 들어왔다.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 한국'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기 전이라고 하여 구한말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구한말'이라는 용어 자체는 대한제국 시기를 가리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시점 혹은 흥선대원군(명목상으로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비공식적으로 광무제, 융희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당시의 공식 의전 명칭이 아니다.[8]

또한 국호가 바뀌기는 했지만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갈아엎힌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왕조가 이름만 바꾼 것일 뿐더러, 어차피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봤자 군주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그 전의 조선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머릿 속에서의 역사상의 비중은 '그런 게 있었지' 수준이다. 이 시대를 구한 말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 언제 망했어?'라고 물어보면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대는 사람도 은근 많다. 사실 우리 나라의 여타 왕조들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대한제국만 따로 특별히 취급해야 할 이유가 칭제말고는 없긴 하다. 고구려의 경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꿨으며 이의 사용 기간 역시 '대한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내외적으로 '고려'라는 호칭이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지 국호 변경만을 이유로 ' 고구려'의 멸망 시기를 장수왕 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구려'로 불리든 '고려'로 불리든 700년 역사 전체를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지. 백제도 '십제'나 ' 남부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신라 또한 ' 사로국' · '서라벌' · ' 계림' 등 다양한 국호를 사용하다가 지증왕의 통치기인 503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전체 역사를 통칭해서 ' 백제'나 ' 신라'로 부른다. 궁예의 태봉 역시 '고려'나 '마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한 나라로 취급하며, 심지어 조선마저 극 초창기(1392년 ~ 1393년)에는 이전 왕조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시기만을 따로 떼어 내어 이때의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조선의 건국 연도를 1392년이 아닌 1393년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대한제국이 그나마 이전 왕조들과는 차별화되는 특징인 '칭제'와 관련해서도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이미 우리 나라 역사에서 외왕내제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으며, 특히 고려는 사실상 껍데기만 제후국이었을 뿐 대내적으로는 대한제국 뺨칠 정도로 황제 놀이를 그야말로 제대로 즐겼던지라... 물론 대한제국의 '대외적인' 황제국 선포는 이전 사례들보다 한 걸음 나아간 거긴 했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이름만 바꾸었을 뿐 왕조 교체 없이 국체가 조선에서 물 흐르듯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부르는 게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선과 대한제국을 칼로 무 베듯 생판 별개로 취급하여 조선이 1897년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되레 이상하다고 할수도 있다. 한 예로 1900년 10월 14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안에 있던 어진들이 소실되자 ' 정묘년 병자년의 오랑캐 난리말고는 이처럼 큰 재앙이 없었다' 는 표현까지 써 가며 매우 비통해한 고종은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비(= 내탕전(內帑錢))까지 털어 가며 선원전 복원 및 어진 모사 작업을 추진했으며, 모사를 위해 함경남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도 대규모의 화려한 행렬을 꾸렸을 만큼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종이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는 조선과 대한제국이 동일한 국체(國体)이기 때문이다. ( 관련 기사) 이 외에 대한제국 시대에도(심지어 일제 강점기에도) 황실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으며, 순종 역시 즉위 교서에서 '' 우리나라의 터전을 열어준 분은 태조 고황제'라고 똑똑히 명시해 놓았다.

대한제국이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나라라는 사실은 대한제국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과거 '500년간' 전래되어 왔음을 밝힌 대한국 국제 제2조로도 확인 가능하며, 대한제국 수립 이후의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에도 '500년 종묘 사직 어쩌구저쩌구'라는 문구가 다수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대거 신원한 것도,[9][10] 박지원 정약용 등 조선 시대의 명신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린 것도, 대한제국 수립 후 일반적인 추존 대상인 고종의 4 아니라 한참 옛날의 인물인 조선 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까지 그 범위에 포함시켜 ' 태조 고황제'로 추존했던 것도,[11] 이후 순종 시대에도 조선의 세자에 대한 추존 작업은 계속 이루어졌던 데 반해 신라나 고려와 같은 이전 왕조의 군주들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도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와 동일체임을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정치 체제가 공화제, 하다못해 입헌 군주제로라도 바뀌었으면 몰라도 실제로는 군주의 직함 이름이 '황제'로 바뀌었을 뿐인 전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니 정치 체제에 급격한 변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제가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의 국호를 고쳐 일본의 한 지방으로서 '조선'이라 한 것은 대한제국을 격하시키기 위한 뜻도 있지만, 당대 백성들에게 이전부터 계속 써온 '조선'(朝鮮)이란 단어가 훨씬 친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대 당대에는 공문서는 물론 모든 신문·잡지를 비롯한 모든 사적인 출판물조차 국호를 엄격히 지켜 '대한국', '대한', '한국'으로 사용하였다. 황제가 바꾸어 공포한 새 국호를 무시하고 예전의 국호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불충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니 당연하다. 일본조차 심지어 을사늑약 이후에도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정한론, 남한대토벌작전 등), 한일병합조약문에서까지 '한국'이라는 국호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과 조선의 실체가 동일하다고 하여 대한제국 시대를 다룬 미디어에서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역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선 대한제국의 수립 시점을 한국 근대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보통 근현대사 교과서는 고종 즉위 시절 쯤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3. 대한국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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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dddddd '''개헌''' 1차( 발췌) · 2차( 사사오입) · 3차 · 4차 · 5차 · 6차( 3선) · 7차( 유신) · 8차 · 9차 · 10차
#ffffff,#dddddd [[틀:대한민국 육법|{{{#ffffff,#dddddd '''기본육법'''}}}]] | [[틀:대한민국 공법|{{{#ffffff,#dddddd '''공법'''}}}]] | [[틀:대한민국 민사법|{{{#ffffff,#dddddd '''민사법'''}}}]] | [[틀:대한민국 형사법|{{{#ffffff,#dddddd '''형사법'''}}}]][br][[틀:대한민국 헌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3f7f5; font-size: .9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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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8월 17일 발표된 국제. 두산 백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 원문
大韓國 國制

第一條 : 大韓國은 世界 萬國의 公認되온 바 自主獨立하온 帝國이니라.

第二條 : 大韓國의 政治는 由前則 五百年 傳來하시고 由後 恒萬歲 不變하오실 專制 政治이니라.

第三條 : 大韓國
大皇帝께옵서는 無限하온 君權을 享有하옵시나니 公法에 謂한 바 自立 政體이니라.

第四條 : 大韓國 臣民이
大皇帝의 享有하옵시는 君權을 侵損할 行爲가 有하면 其已行 未行을 勿論하고 臣民의 道理를 失한 者로 認할지니라.

第五條 : 大韓國
大皇帝께옵서는 國內 陸海軍을 統率하옵시어 編制를 정하옵시고 戒嚴, 解嚴을 命하옵시나니라.

第六條 : 大韓國
大皇帝께옵서는 法律을 制定하옵시어 그 頒布와 執行을 命하옵시고 萬國의 公共한 法律을 效倣하사 國內 法律도 改定하옵시고 大赦, 特赦, 減刑, 復權을 命하시옵나니 公法에 謂한 바 自定 律例이니라.

第七條 : 大韓國
大皇帝께옵서는 行政 各 府部의 官制와 文武官의 俸給을 制定 或 改定하옵시고 行政上 必要한 各項 勅令을 發하옵시나니 公法에 謂한 바 自行 治理이니라.

第八條 : 大韓國
大皇帝께옵서는 文武官의 黜陟任免을 行하옵시고 爵位 勳章 及 其他 榮轉을 授與 或 遞奪하옵시나니 公法에 謂한 바 自選 臣工이니라.

第九條 : 大韓國
大皇帝께옵서는 各 有約國에 使臣을 派送, 駐紮케 하옵시고 宣戰, 講和 及 諸般 約條를 締結하옵시나니 公法에 謂한 바 自遣使臣이니라.
  • 번역
대한국 국제

제일조 : 대한국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인정해 온 바와 같이 자주 독립을 누리는 제국이다.

제이조 : 대한국의 정치 체제는 이전까지 5백년 동안 내려왔으며 앞으로는 만세토록 변하지 않을 전제정치다.

제삼조 :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무한한 황권을 행사하실 수 있으시니, 폐하께서 곧 국가이심을 여기에 밝힌다.

제사조 : 대한국의 신민이
대황제께서 누리시는 황권을 침해할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 일을 이미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를 따지지 않고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잃은 자로 간주한다.

제오조 :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국내의 육군, 해군을 통솔하시며 편제를 정하시고 계엄령을 내리시거나 해제하실 수 있으시다.

제륙조 :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법률을 제정하시고 반포, 집행을 명하실 수 있으시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두루 쓰이는 법률을 본따시어 국내의 법률을 개정하실 수 있으시다. 또한 죄 지은 자를 용서하시거나 형벌을 감해 주시거나 복권(復權)시키실 수 있으시니, 폐하께서 스스로 법을 정하심을 여기에 밝힌다.

제칠조 :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각 행정기관의 제도와 문관, 무관의 봉급을 제정하시거나 개정하실 수 있으시고 행정상 필요한 여러가지 칙령을 반포하실 수 있으시니, 폐하께서 스스로 정치를 하심을 여기에 밝힌다.

제팔조 :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문관과 무관을 등용하거나 파직하실 수 있으시며 작위와 훈장을 비롯한 여러 명예를 내리시거나 빼앗으실 수 있으시니, 폐하께서 스스로 신하를 포상하거나 처벌하심을 여기에 밝힌다.

제구조 :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조약을 맺은 다른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머물게 하시며 선전포고, 강화(講和)를 비롯한 여러 약조를 체결하실 수 있으시니, 폐하께서 스스로 사신을 파견하심을 여기에 밝힌다.

대한국 국제에서 볼 수 있는 특색있는 점은 당시 조선 왕실(정부)의 혁신을 통한 유의미한 발전을 꾀하는데다가, 국가의 권력의 주체를 황실에 두고 이에 따른 권력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전제주의적 성격이 강한데 대부분의 근대 헌법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권력의 주체를 인민으로 보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대한국 국제는 국민 주권, 의회주의, 기본권 보장과 같은 요소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근대적 헌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다못해 외견적 입헌주의에 해당하지만 진정한 근대적 헌법 취급은 받지 못하는 비스마르크 헌법이나 메이지 헌법조차도 제한적으로나마 기본권[12]이나 의회제 같은 것이 있었다. 심지어 당시 전제 군주국의 대명사였던 러시아 제국마저도 다음과 같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헌법 차원에서는 명시한 것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구시대적인 면모가 강하다.
2장
30조. 신민 그 누구도 법률이 예외 조항을 둔 것에 제외하면 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되지 않는다.
31조. 신민 누구도 합법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구금되거나 조사되지 아니한다.
38조. 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면, 특정한 목적으로 어떤 사회 단체 혹은 연맹을 조직할 권리를 신민은 갖는다. 이 조직의 조건 및 그들의 행동, 시한 및 규정 등의 합법성 획득 및 연대권한의 사용은 법률이 정한다.

또한 1908년에 제정된 청나라 헌법인 흠정헌법대강과 비교해도 이 문제는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흥정헌법대강 제2장
제1조 신민 중 법률 명령에 부합해 자격을 갖춘 사람은 문무 관리나 의원이 될 수 있다.
제2조 신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언론, 저작, 출판 및 집회, 조직을 결성해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
제3조 신민은 법률에 정해진 바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체포, 감금, 처벌이 불가하다.
제4조 신민들은 법관에게 청해 심판의 과정 중 안건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다
제5조 신민은 오로지 법률에 의한 절차에 의해서만 심판을 받으며 또한 관청의 심판에 응할 수 있다.
제6조 신민의 재산은 거주하는 곳에 미치며, 무고하게 침범당할 수 없다.
제7조 신민은 법률에 의거해서만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진다.
제8조 신민의 현재 세금 부담에 대해서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모두 옛 규정에 따른다.
제9조 신민은 국가 법률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4. 역사

4.1. 성립

4.1.1. 전제 군주국

칭제는 근본적으로 갑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3일 천하에 그쳤으나 김옥균 등은 왕의 공식 칭호를 군주(君主)에서 대군주(大君主)로, 전하 폐하(陛下)로, 왕 자신의 호칭을 (朕)으로 부르도록 하였고 이 대군주가 내리는 명령을 칙(勅)으로 하는 등 사실상의 칭제 계획을 올린다. 여기서 보듯, 제국의 선포는 곧 자주국의 선포였다. 물론 이런 꿈도 결국 사흘 만에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가 들어오고 명성황후 민씨의 복귀로 실질적 독립조차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관파천이 독립협회의 요청으로 중단되고,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황제 드립이 시작된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를 주장하였고 고종도 내심은 그게 아니었지만 일단 겉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하급 관료와 황실 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 영국 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독립협회도 엄연히 종친이 관여하고 이완용 등 관료의 상당수가 참가했기에 단순히 입만 산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이름만 빌려 줬다는 말도 있지만, 왕세자 이름으로 당시로는 적지 않은 지원금이 나간 것을 봐서는 초기에는 정부에서 만든 단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 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이 채택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 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빼앗는 식으로 입헌 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고종은 당연히 전제 군주정을 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계속된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폭력 집단으로 활용이 가능한 보부상들을 대거 끌어들였다.[13] 독립협회의 실력도 권력을 인수하기엔 부족했다. 애초에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 내 여론을 등에 업고 국내 외국 공사관들의 암묵적 지지를 배경[14]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하간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 상원)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독립협회 임원들의 거대한 막장 짓으로 시작과 동시에 박살이 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 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의회가 가지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나 국외 추방된 미국인 서재필(필립 제이슨)[15]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더구나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 내부의 친미, 친일 쪽 계파들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16]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 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박살내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급진적이어서 공화주의까지 이야기되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박영효 국왕설은 반대파의 모략이라고 해도,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1.2. 고종의 제국 선포


고종은 이 상황에서 외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제는 중립화론, 3.1 운동의 독립 청원, 상해임시정부 국제연맹을 이용한 외교 독립론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제국 선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가 러일 전쟁으로 나아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기록을 보면 고종은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용이야? 이런거 안 하면 안 될까?'하는 말을 계속하고는 있었다. 이렇게 보면 황제 선포 괜히 했다가 큰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그와는 모순되는 사실도 있다. 고종은 환구단을 이미 짓고 있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의 경우는 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하려다 못한것이긴 했다. 이것만으로 고종이 제국이 되는 걸 반겼다는 걸 증명하기엔 조금은 부족하지만 심증은 된다.

고종은 몇 번이고 사양하면서도 비등한 여론에 못 이기는 척하며 급하게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자기들 나라 이름은 외자로 쓰고 인근 민족과 나라 이름은 두 자로 써왔다. 근세에 서양 열강과 접촉하면서부터는 이들 나라의 이름을 굳이 세 글자에 맞추어 미리견, 영길리, 불란서, 노서아 등[17]으로 썼다. 서양 열강의 침탈로 중화주의가 패퇴한 뒤에야 이들 나라 이름을 한 글자[18]로 고쳐 불렀다.

주자학적 화이론(華夷論)의 영향에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제국은 당연히 외자 이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정한 '한(韓)'은 고종의 말에 따르면 우리 나라를 옛부터 중국 등에서 불렀으며, 삼한을 이었기 때문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한은 원삼국시대 마한, 진한, 변한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삼한의 의미는 삼국시대 후반부에 이르면 의미가 잘못 전해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람들 스스로가 삼한이자 그 후예라고 여겼다.[19] 삼한이 원래 삼국시대 초반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여러 나라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현대에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알아낸 것으로, 즉 삼국시대 후반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 때까지 삼한이란 단어는 삼국= 삼한일통= 한국이란 의미이다. 이 부분은 삼한 한국의 국명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대(大)'는 대청제국, 대명국 등 당시 중국 왕조들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종 실록 1897년 10월 11일

4.1.3.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앞서 보듯이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정 운운하던 세력이 전멸한 상황. 이제 길은 하나뿐이다. 결국 대한제국은 헌법격인 대한국 국제를 통해서 전제 군주국으로 태어난다. 이런 전제 군주화는 실제로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의 막장 상황이긴 했다. 고종의 경우는 반대파도 많았다. 박영효 등의 야심가는 국내와 연락해서 꾸준히 반란 시도를 이었고, 부친인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형제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과 연루되었다. 거기에 자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한 상황을 꾸준히 겪은 고종의 불안감이 더해진 결과였다. 결정타는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무리한 입헌군주국화 기도였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1. 언제 러일 전쟁이 터져서 열강에 의해 하던 것이 리셋될지 모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2. 그나마 배웠다는 인물들은 독립협회 등에 참여하며 밀려나가는 인적풀의 고갈이 더해지는 절망적 상황이 더해지는 전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그나마 자기 측근이나 믿을 만해 보이는 외국인 고문들 몇 명 데리고 좌충우돌 하는 형태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엽기적 상황으로 흘러갔다. 이른바 광무개혁의 시작이다.

국제 정세나 외교에는 큰 힘을 기울였지만 감각은 부족했던 고종의 노선은 제국 선포 8년 후인 러일전쟁 때 제대로 깨지게 된다.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그를 무시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는 뒤이어 전쟁에 승리한다.

4.2. 제국의 개혁

4.3. 멸망

4.3.1. 광무 융희가 되고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해 방해물을 제거한 후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여기에 미합중국 대영제국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명확하게 인정하게 된다.

고종황제 빌헬름 2세에게 붙어서 애걸복걸해 보았고, 빌헬름 2세는 "카이저 폰 코리아"(한국의 황제께)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 냥(500억 상당)을 독일 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일만 잘 돌아갔으면,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 파트너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기에 나름대로는 고종이 머리를 잘 쓴 거긴 했다. 삼국간섭의 선례도 있다. 하지만 안됐다.

이에 고종은 최후의 방법으로 만국평화회의 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이미 눈치를 챈 일본이 손을 써서 특사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몰아내고 순종을 옹립했다.

4.3.2. 융희 메이지 되다

순종이 새 황제로 즉위하자 일본은 정미7조약, 기유각서 등의 조약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경찰권 등의 국가 권력을 하나 둘 빼앗아 대한제국은 허울 뿐인 제국이 되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라는 이름의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고, 연호 또한 융희 4년에서 메이지 43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조선이란 지방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일본 제국 식민지가 된다.

4.4.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 계승

한일합방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의 죽음과 민족자결주의의 확산,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 등 여러 이유를 계기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3.1 운동이 국내외 전역에서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적통을 계승함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국호에 대해 의견이 둘로 나뉘였는데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을 비난하며 대한이 아닌 조선[20]을 주장했고,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였기 때문에 국호를 대한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헌법을 제정하면서 초대 헌법인 임시 헌장에서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우대하고, 임시 헌법에서는 대한제국의 판도를 계승한다고 밝혀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적통을 계승함을 명문화 하였다.

그리고 광복 이후 1948년 7월 1일에 제헌의회는 대한민국을 신생 국가의 정식 국호로 결정했다. #

한일합방 이후에도 대한이란 국명은 남아서 후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대한제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없었을 확률이 높고, 북한과 남한은 지금도 북조선, 남조선 하면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북한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기도 하고. 그 외 한민당은 고려 공화국을 지지하기도 했다. 기타 자세한건 대한민국/국명 문서 참고.

5. 대한제국의 근대성 논쟁

대한제국은 흔히 한반도 최초의 근대 국가로 평가되며, 근대 국가를 지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진정한 근대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러한 논쟁은 고종에 대한 논쟁,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논쟁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을 펴내면서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근대 국가였다고 주장했다. 황태연 교수는 근대성을 논할 때 종교에서 분리해 세속화된 정치, 신분적으로 차별이 없는 국민, 국민개병제에 바탕을 둔 군대의 정예화, 시장화와 산업화 등을 두루 살피자고 제안했으며, 대한제국은 이를 모두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이 비록 전제군주제 국가였지만 독일제국, 일본제국 등의 예를 들어 근대성과 전제군주제는 반드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군사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은 군사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근대성이 오랫동안 대한제국을 끝장낸 일제에 의해 폄하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복권을 주장한다. 황태연 교수 이전에도 이태진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등은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강하게 옹호한 바 있다. "대한제국이 제정한 헌법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무한한 군권과 전제정치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한제국을 근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면 메이지 시대 일본 역시 헌법에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메이지 시대 일본도 봉건왕조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대한국국제에는 일본헌법과 같은 의회 규정이 없지만, 황제와 독립협회[21] 추천으로 구성되는 중추원을 탄생시켜 이에 법률 칙령의 폐지, 개정의 권한을 부여해왔고, 갑오개혁 때 없어진 신분제를 되살리지 않으면서 만민이 평등한 근대 국민국가가 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22]

그러나 부정하는 측에서는 대한국국제에서 나타나는 전제군주제의 유지와 왕권에 집착하는 고종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대한제국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전제군주제가 근대성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하나 서구의 근대식 전제군주제는 절대왕정에서 계승된 것으로써 그를 지지할 사회적 계층( 부르주아)이 있었는데 고종은 그런 사회적 계층 없이 친위세력으로만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 말하자면 국민개병제인데,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그저 왕에게 충성하는 용병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했지 정작 일본에 대항하려고 군대를 사용하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김재호 전남대 교수의 경우 아예 대한제국을 고종이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던 반동적 시도로 보고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부정한다.

6.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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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장순대왕 연령군
진종 소황제 장조 의황제 낙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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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태황제 †덕안군 경은군 청안군 †인양군 의양군 예양정 †완림군 완순군 †완영군 흥친왕 †완은군 완창군
순종 효황제 †완효헌친왕 의친왕 의민황태자 †풍선군 영선군 경원군
청풍군 창산군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친왕 또는 방계 황족으로 추존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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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대한제국 계보도

7. 한국통감부

파일:일본 제국 국기.png 일본 제국 한반도 통치기관
1905~1910 1910~194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50px-Flag_of_Korea_%281899%29.svg.png 대한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png 일본령 조선
파일:1280px-Flag_of_the_Japanese_Resident_General_of_Korea_(1905-1910).svg.png 한국통감부 파일:조선총독부 휘장.png 조선총독부

7.1. 역대 통감

순서 이름 재임 기간 설명
임시 하세가와 요시미치 1906년 2월 1일 ~ 1906년 3월 1일 조선군 사령관 / 이토 부임까지 직무 대리
1 이토 히로부미 1905년 12월 21일(서울 부임은 1906년 3월 2일) ~ 1909년 6월 13일 1대 통감
2 소네 아라스케 1909년 6월 14일 ~ 1910년 5월 29일 2대 통감
3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년 5월 30일 ~ 1910년 9월 30일 3대 통감 / 이어서 초대 총독으로 취임

8. 수교 국가

다음 국가들은 대한제국이 수교한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괄호 안의 날짜는 태양력이다.

이 가운데 일본제국만 1910년 국권 침탈 때까지 수교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나라들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모두 단교하였다.

9.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대한제국 중앙정치기구(경각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大韓帝國京各部
의정부
,일반행정,
궁내부
,황실업무,
원수부
,국군통솔,
내부
,내무부,
외부
,외무부,
법부
,법무부,
규장각
비서원
시종원
장례원
종부사
군부
,국방부,
탁지부
,재무부,
농상공부
,농림부 / 상공부,
학부
,교육부,
}}} ||

일반적으로 내각을 포함한 산하 관청 및 궁내부, 사법 기관 등의 관청들로 칭제건원 후부터 1905년 을사 조약이 있기 이전의 관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10. 군대

10.1. 편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대한제국군의 편제
원수부 군부 참모부 교육부 시종무관부 동궁배종무관부 육군무관학교
조선군 훈련대 대한제국군 친위대 대한제국군 시위대 대한제국군 진위대 대한제국군 호위대 대한제국군 헌병대 대한제국군 상무영



대한제국군 편제가 잘 정리된 블로그

11. 기타

11.1. 이 시대에 들어온 근대 문물

11.2. 대한제국의 오악(五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대한제국의 오악(五岳)
북악 백두산
서악 묘향산 중악 북한산 동악 금강산
남악 지리산

천자국은 악해독(嶽海瀆)과 같은 중요한 자연물에 깃든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관례에 따라 지정했다.[32] 악은 오악이라 하여 다섯 곳을 꼽았지만 바다와 하천은 각각 사해(四海), 사독(四瀆) 즉 네 곳을 꼽았다.

11.3. 의화단 운동 진압에 대한제국이 참전 할 수도 있었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 중 러시아 제국 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 만약 참전했더라면 8개국 열강들의 연합군에 대한제국까지 9개국이 되어 역사 교과서가 바뀔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사 참전했더라도 당시 대한제국 군사력으로는 국경을 넘어오는 의화단 잔당을 막는 것부터가 버거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큰 활약을 펼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한국의 침략으로 중국인들이 반한감정을 가지면 이후 독립운동에서 불이익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연합군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고종이 직접 뒤늦게 일본 공사를 통해 참전 의사를 피력했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전력까지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며 거절했다. 일본 공사는 본국으로 보내는 전문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우스운 일이다."라며 고종을 비웃었다.

12. 대한제국의 인물 목록

13. 역사적 사건 목록

대한제국 선포 후에 일어난 사건 목록이다.

14.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같은 왕조이자 직전 국가였던 조선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다 못해 넘쳐 흐르지만 정작 대한제국을 제대로 다룬 창작물은 거의 없다시피한다. 있어도 조선 말기를 다룬 작품에 곁다리로 나오거나, 단막극, 특집극으로 짧게 나오거나, 실제보다 훨씬 부강한 대체역사 속의 대한제국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나라가 망해가는 우울하고 슬픈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뤄야하고,[33] 또 제국 선포 직전에는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의 대립이라는 좋은 소스거리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아주 없진 않다. 특히 2018년 tvN에서 방영된 ' 미스터 션샤인'은 정말 간만에[34] 대한제국기를 메인으로 다루었고 대박을 터뜨렸다. 대한제국기를 다루어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앞으로 기대해 봐도 좋을 듯.

상기한 이유로 이 항목의 상당수는 조선/창작물 구한말/창작물, 개화기/창작물과 겹친다. 단, 항목이 항목이니만큼 조금이라도 '대한제국'이 나온 작품에 한해서만 올리고 개화기를 다뤘어도 대한제국 배경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면 등재하지 말 것.

14.1. 드라마[35]

14.2. 영화

14.3. 기타


[1] 이화문. 이화는 전주 이씨 왕실/황실의 상징인 오얏나무(자두)꽃을 의미한다. [2]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기 이전에 쓰인 국호(혹은 지역명)인 조선(朝鮮)으로 개칭. [3] 한성부 제외 [4] 이전엔 갑오개혁 독립협회에 의해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했었고, 형식상이긴 해도 의회 제도로 중추원이 존재하였지만, 독립협회(중추원) 해산 후 대한제국에서 공인한 헌법 황제 무한한 군주권을 규정한 대한국 국제(1899년 제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5] 1892년 ~ 1902년 [6] 1902년 ~ 1910년 [7] 엄연히 조선 시대 당대부터 왕족의 가계를 정리한 전용 족보 선원록과 왕족 밖 전주 이씨 일반 종친의 족보가 구분되었으며, 훗날 흥선대원군 섭정 때 덕흥대원군 계파를 한 집안처럼 묶었지만 이는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 전주 이씨 종친회와 본디 관련없다. 그러니까 사회에서 자기가 전주 이씨니 왕족이다 하는 사람들은 갑오개혁때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노예나 성씨가 없는 사람들이 성씨를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서 편입한 것 때문이기에 놀리면서 비웃어주자. 해방 이후 혼란을 틈타. 전주 이씨 종친회 재단 대동 종약원이 사실상 참칭하고 있는 셈. [8] 고래(高來)로부터 중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 왕조에서 연호 시호, 묘호와 함께 붙여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대 표기의 원칙을 따르면 고종태황제, 순종효황제라고 쓰고 불러야 맞는다. [9] 이것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삭탈된 자에 대한 신원 행위는 같은 왕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전 왕조인 신라나 고려에도 역적으로 규정된 신하가 많은데 하필 조선의 신하들만 신원 대상에 포함시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 물론 정몽주와 같이 특이 케이스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10] 1908년 이완용이 건의하고 순종이 명을 내려 신원된 대표적인 신하로 이징옥, 윤원형, 정인홍, 윤휴, 조태구, 김일경, 정후겸, 김익순 등이 있다. 다들 조선 시대에는 그 언급조차 조심히 해야 했던 인물들. [11] 4대조 추존이 고종의 '조상'들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면, 이성계 추존은 고종이 속한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같은 추존이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얘기. [12] 일본이나 독일에서는 기본권을 '천황/카이저가 베푸는 것'으로 해석했다. [13]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 상원)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아직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지방민들은 아직 왕을 하늘로 떠받드는 근왕 의식이 남아있었던 만큼 황국협회의 잠재적 세력은 작지 않았다. 또 단순히 독립협회에 대한 안티테제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황국협회를 주도한 홍종우 역시 프랑스 유학을 거친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물론 어용단체의 성격상 개인 홍종우 뿐이긴 했지만. [14] 고종이 독립협회 해산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한양 내 독립협회 지지층이 아니라, 정동에 있던 외국 공사관들이었다.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것이 대외적으로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사실 그 서양 공사관들은 독립협회의 해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반응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 [15] 당시 박영효는 반란 시도를 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귀화한 다음 독립문과 관련해서 귀국했다가 다시 정치적으로 사고를 쳐서 추방된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조선인도 아니다. [16] 특히 박영효를 쓴 사람이 주요 대상이었다. 박영효는 이 시점에서도 조선 내부와의 연결과 반란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즉 박영효를 추천한 사람은 외환죄로 취급된 것. [17] 순서대로 아메리카, 잉글랜드, 프랑스, 로시야(=러시아). [18] 아메리카는 미리견의 미(美), 잉글랜드는 영길지의 영(英), 프랑스는 법(法), 독일은 덕(德), 러시아는 아라사의 아(雅). [19] 이는 고요묘, 고진, 고현 등 고구려 사람의 묘지명에서 고구려인 스스로를 삼한 사람으로 지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단지 진한 = 신라는 거의 맞는데 마한과 변한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이고 어느 쪽이 백제인지를 놓고 당시에 논쟁이 있었을 뿐. 가야 지못미 [20]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21] 이전버전에는 근본도 없는 인민협회라고 씌여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인민이라는 말을 나무위키에서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22] 이태진, 김재호 공저,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23] 한성 전기 회사가 1900년에 가로등 3개를 종로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24] 1905년에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전파하였다 또한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웠다. [25] 1907년 질레트가 농구를 소개하면서 농구를 전파하였다. [26] 1896년 최초 근대 운동회인 화류회 개최 [27] 광제호, 양무호 [28] 1909년 ~ 1910년까지 출간한 대한민보가 한국 만화의 시초이며 일본제국의 기득권층의 탄압에 대한 풍자 만화다. [29] (청량리 ∼ 서대문) 운행을 1898년부터 시작하였다. [30] 1909년의 엿장수에 관한 기록에 흰 엿과 검은 엿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면서 팔았다고 한다. [31] 당시 황제국의 예를 다하려고 외국 대신을 접대할 때 프랑스 음식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2017년 10월 11일 음식을 재현했다. # [32] 악해독의 악은 큰 산, 해는 바다, 독은 큰 하천을 말한다. [33] 역설적으로, 그래서 해방과 6.25 전쟁 직후 애국심을 고취시키던 시기에 많이 다뤄지기도 했다. [34] 1984년에 방영한 독립문 역시 이 시대를 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었고 자료도 별로 없어 '미스터 션샤인'이 현재 청장년층들에게는 거의 처음으로 인식된다. [35] 단막극, 특집극 포함. [36] 주 시대배경은 조선 말 개화기. 종반부에야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명성황후의 장례와 흥선대원군의 사망으로 드라마가 끝난다. [37] 이 영화가 다루는 시기는 1919년 ~ 1980년대(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대한제국이 한 번도 안나왔다. [38] 순정만화. 1920년대에 존재하는 대한제국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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