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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 |
초명 | 조중협 (趙重協) |
본관 | 양주 조씨 |
호 | 낭전 (琅田) |
출생 | 1860년 11월 4일[1] |
한성부 | |
사망 | 1919년 8월 25일 (향년 58세) |
사인 | 병사 |
직업 |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주요 경력 |
법부대신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비고 |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 개화파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된 매국노. 초명은 중협(重協), 본관은 양주(楊州), 아호는 낭전(琅田).1860년 서울 출신. 친일 성향의 개화파 관료로 1883년 10월 서북 변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러시아와 만주 등을 답사하고 돌아와 북방남개론을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아 전라도 보성으로 유배되어 6년을 보냈던 인물. 1906년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입각해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등에 동조하며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수작했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2.1. 관직 생활
|
조선귀족 자작 시절 모습[출처] |
1894년 7월 의정부 전고과 주사에 임명되어 보통 문무 시험 위원을 지냈다. 1894년 9월 청일전쟁 전야에 일본 특파 대사인 의화군 이강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 행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귀국 후인 12월 정3품으로 가자되면서 외무아문 참의에 임명되었다. 1895년 4월 외부 교섭국장으로 옮겼다가 5월에 각 항구 각국 거류지 조사 정리위원을 겸직했다. 1895년 8월 법부 형사국장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법률 조사 개정위원에 이어 10월에 특별 법원 판사를 겸직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여하였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친일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0여 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고마바 농학교에서 강습을 받았고 외국어 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활동했으며 양잠과 차 재배를 경험하는 한편 전문 학교에서 정치 법률과 일본어를 배웠다.
2.2. 친일 행적
|
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3] |
1906년 귀국한 그는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입각하였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관여했으며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큰 공을 세워 정미칠적이 되었다.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이등박문의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는 경술국치 후 경술국적 중 1명이 되어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친일파로 활동했다. 장석주, 김윤식, 조희연과 일선 사적 및 구관습 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1년 1월 이완용, 박제순 등과 함께 조선의 각종 구관을 조사해 일제의 조선 통치 자료로 공급할 계획으로 '조선구관연구회'를 설립했다. 같은 달 은사 공채 10만원을 받았고 2월에 조선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1년 3월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200원을 기부하는 한편 오성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에 찬성원으로 참석했다. 1911년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 매일신보』에 '병합 1주년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축사를 발표했다.
극동의 평화를 영원히 함에 있어서 일한 병합이 필요함은 오배의 노노를 부뢰하고 대세의 사연한 바인데 우리는 무사히 1주년을 경과 하였으니 차는 오직 천황 폐하의 지인지자하신 은덕에 욕함과 우일은 대명을 배하고 조선 통치의 임을 대한 사내 총독이 일시동인의 시정과 공명정대한 조치에 화함을 의하여 연함이니라..... 조선의 적자는 금회에 비로소 제1회의 탄생일에 해당하였는데 금후 3년, 5년을 점차 발육성숙하면 되고 된 일본에 대하여 충분히 보은할지요. 현재로써 미래를 추하면 유망한 장래가 유한 고로 여배는 충심으로 함을 불승하노라......
1912년 1월에는 조선인 문사와 일본인 문사들의 친목 단체인 '문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월에 '조선상업합자회' 사부총재로 선출되었다. 1912년 7월 감약당 주식회사 조선 측 발기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이완용과 함께 조선귀족 대표로 메이지 덴노 위문을 위해 도쿄에 갔다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한 후 9월 말에 돌아왔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1월에 ' 경기도 대지주회' 부회장과 '남부공익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2월 정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1월 '조선귀족회' 총회에 참석해 다음과 같은 3개항을 의결했다.
① 국어 (일본어)보급을 위해 유치원 창설. |
② 귀족 자제에 대한 정신 교육을 통해 이들의 소행이 향상되었으므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인의 도덕을 갖춘 유용한 재기로 양성. |
③ 귀족의 재산 보호를 위해 힘쓰고 이를 위해 지방 소유 전토를 시찰하는 동시에 농업 개량 장려를 주장하여 외지 농민에게 모법을 보일 것. |
2.3. 생애 후반
|
1915년 10월 28일자 매일신보[4] |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의 즉위 대례식에 참여하고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1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 평의원에 임명되는 한편 '제국군인후원회' 조선 지회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16년 11월 조선인 전직 관료와 귀족 대지주 실업가들이 친목 도모와 내선 융화를 목적으로 '대정친목회'를 발기하자 회장에 선출된 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1917년 4월 <매일신보사> 주최로 조직된 '남북 만주 시찰단'의 단장으로 참여해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 천황부 부를 알현하고 돌아온 후 <매일신보> 6월 30일자에 「안태하신 존가를 봉영하고」라는 글을 발표해 '이왕 전하의 동상하신 금회의 사실은 실로 일본 유사 이래 미증유의 성사되는 동시에 아! 조선에도 또한 일찍이 없던 바이며 필시에 조선이 청국에 대해 응수하던 당시의 정황을 회고하며 이번에 무한한 감개가 어찌 없으리오. 이로써 보면 이번에 성의는 첫째 이왕가를 위해 다행할 뿐 아니라 둘째 우리 조선인 전체의 영광이라 할 것이라 위로는 황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인민에 이르기까지 이왕 전하께 대한 성의를 다하면 우리 황국 신민 일반에 대하여 영원히 애호함을 심심치 인지될 것인즉. 우리 조선 인민은 제실의 이와 같은 위대하신 성지를 극체하며 내지 인민의 심훈한 친애를 감사하여 부디 내선이 일심협력으로 융화진취에 노력하여 더욱 더 충량한 신민이 되어 국가에 봉공하기를 자기할지어다.'라고 감사하는 마음을 밝혔다.
1918년 1월 조선지(朝鮮紙)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4월에 열린 창립 총회에서 감사역에 선출되었다. 1918년 7월 '조선국세(國勢)조사평의회' 평의원에 위촉되는 한편 주식회사 한성은행장에 선출되었으며 1918년 8월 '경성구제회'에 수많은 거금을 기부했다. 1918년 12월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왕세자비)의 결혼식이 1919년 1월에 발표되자 <경성일보> 12월 7일자에 "동화의 좋은 모범 / 옛 일선 관계를 재현"이라는 글을 발표해 일반 민중도 앞으로 더욱 내선 동화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 위원장에 임명되어 3월까지 재임했으며 얼마 안가서 1919년 8월 25일 종3위의 벼슬을 지내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조차도 사망 다음 날인 1919년 8월 26일자 1면에 조중응 자작 훙거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조중응에 대해 조의를 표하면서도 매국적인 행위 이외에도 기회주의적의 악매와 냉조의 중심 인물이 됨으로써 조중응 세자는 거의 경조부박의 수괴의 관이 유하였음을 사실이다라고 평가했다. 사망 후 작위는 세습되어 장남 조대호가 이어받았다.
3. 여담
-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보았고 반면 러시아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았던 인물이다. 청일전쟁 혹은 을사조약 이후부터 친일파로 변절한 타 매국노들[5]과는 다르게 이병무, 고영희[6], 송병준처럼 본래부터 친일 성향을 갖던 인물이었으며,[7] 박중양과 같은 신념형 친일파에도 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한국판 아르날도 도스 레이스 아라우조[8]인 셈이다.
- 조선 왕조 시기의 인물임에도 본처를 두 명씩이나 두었다. 을미사변 연루 혐의를 받고 10년간 일본에서 지낼 때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사실 한국에 본처가 있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결국 순종 황제의 중재로 두 사람 다 본처로 삼아 함께 살았다고 한다.
- 1960년 기준으로 아들이 서울에서 호텔을 경영했다고 한다. # 다만 친자 조대호(趙大鎬, 1893~1932)가 요절한 데다가 조대호의 양자 조원흥(趙源興, 1924~?)도 6.25 전쟁 시기에 납북되었고 남은 자식이 딸 조숙호(趙淑鎬, 1913~?)밖에 없는 것으로 볼 때 진짜로 조중응의 후손이 호텔주였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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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860년 9월 22일
[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3]
둘째 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조중응.
[4]
뒷줄 왼쪽이
조중응이다. 뒷줄 오른쪽 사람은
이윤용이고 앞줄 중앙의 여성은
이완용의 부인,
[5]
이완용,
이근택,
윤덕영,
민병석 등
[6]
특이하게도
개화파 출신 매국노였다.
[7]
우연히도 이들은 송병준을 제외하면 모두
정미칠적 +
경술국적에 들어가는 인물이기도 하며, 송병준도 정미칠적에 들어간다.
[8]
동티모르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의 자치령으로 합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