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박승환(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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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9년 9월 7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907년 8월 1일 (향년 37세)[1][2] |
한성부 대한제국군 개인 대대장실 | |
자 | 구여(九如) |
호 | 운파(雲坡) |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3] |
상훈 |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4](1962년 추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12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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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조선 한성부 태생이며, 1887년(고종 24년) 18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무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육군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정규군인 시위대에 소속되어 참위(= 소위, 중위)와 정위(= 대위)를 거쳐 1904년(광무 8년) 2월 참령으로 진급[5], 시위대 제1 연대 제1 대대장에 임명됐다.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태황제를 협박과 강요로 강제 퇴위시킨 데 반발해 황궁( 경운궁)에서 정변을 모의했으나[6], 고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순종의 즉위 후 후속 조치로 같은 해 7월 31일 일제가 순종의 명의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명하는 칙령[7]을 내려 8월 1일, 모든 군인들을 서울 동대문 훈련원[8]에 모이게 한 뒤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돈(천황의 은사금)을 몇푼 쥐어주며, 그들의 총기를 압수시키자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방인 1대대장실에서 권총으로 자결( 순국)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의 유서(유언)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의 유서(유언)
박승환 참령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남상덕 참위를 중심으로 휘하 대대원들이 강제 해산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해 일본군과 서울 시내[9]에서 교전을 시작하면서 남대문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들은 나중에 정미7조약에 반발해 일어난 민중들이 있는 정미의병에 대거 합류하게 된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박승환 참령의 애국정신과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현재 유해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순국지사' 칭호로 1973년 10월 31일에 부인 이씨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3. 기타
2023년 8월 31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이전을 검토했던 독립유공자 흉상 중에, 박승환 참령의 흉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참조.4. 관련 문서
- 가쓰라-태프트 밀약
- 경술국치
- 기유각서
- 남대문 전투
- 대한제국군
- 대한제국군 해산
- 안중근
- 을사조약(을사늑약)
- 을사오적
- 을사의병
- 이토 히로부미
- 정미의병
- 정미칠적
- 정미 7조약
- 포츠머스 조약
- 한국통감부
- 한일약정각서
- 한일의정서
- 헤이그 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