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01:31:15

대한제국군 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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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國 鎭衛隊
1. 개요2. 개설3. 설립 경위 및 목적4. 조직 및 역할5. 변천

1. 개요

대한제국군의 부대이다. 시위대 친위대 수도 한성부를 맡는 중앙군[1]이면, 지방대와 진위대는 각 지방을 맡는 지방군이다.

2. 개설

1895년 9월 갑오개혁 때 지방의 군대를 통폐합하여 지방의 진위대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평양과 전주에 설치하여 지방의 소요(騷擾)를 안정시키고 변경의 수비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지방에 지방대를 설치하였다가 1898년에는 14개 지방대대로 확대하였다. 1900년 6월 새로 진위대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지방대와 진위대가 진위대로 통합되었고,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었다. 1905년 4월 일제에 의해 진위대 병력은 8개 대대로 크게 축소되었다가 1907년 9월에 차례로 해산되었다. 이에 반발해 상당수가 봉기 후 정미의병에 참여하고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3. 설립 경위 및 목적

갑오개혁에서는 1895년 3월부터 지방에 주둔한 각종 군대를 통폐합하는 작업에 나서 8월 2일 전국적으로 옛 군제를 폐지하였다. 1895년 9월 13일 칙령 170호 육군편제강령(陸軍編制綱領)에 의거하여 중앙의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가 새롭게 창설되었다. 지방의 진위대는 부(府) 또는 주요 지방에 주둔하여 지방의 소란을 안정시키고 변경의 수비를 전임하였다. 평양부와 전주부에 2개 대대가 설치되었다. 대대본부에 대대장으로 참령(參領) 1명, 향관(餉官)으로 1등 군사(軍司) 혹은 2·3등 군사 1명, 부관으로 부위(副尉) 1명, 무기를 담당하는 참위(參尉) 1명을 두었다. 1개 중대에는 중대장인 정위(正尉) 1명, 소대장인 부참위(副參尉) 3명, 정교(正校) 1명, 부참교(副參校) 15명, 병졸 200명이 있었다. 1개 중대 병력은 220명이었으며 2개 중대 단위로는 총 444명이었다.

4. 조직 및 역할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5월 30일 각 지방의 친군영들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600명이었다.

1899년 6월에는 지방대가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설치된 원수부(元首府)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의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지방대와 진위대의 명칭 통합이 요청되었다.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일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에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었으며, 총병력 18,000명과 378명의 곡호대(曲號隊)를 가졌다.

진위대의 병력은 영관(領官), 위관(尉官), 정교(正校), 부교(副校), 참교(參校), 병졸, 곡호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월급은 참령 77원 35전, 정위 46원 75전, 정교 9원, 병졸 3원이었다. 군인의 월급은 1896년 지방대 시절에 비해 정교·부교·참교의 월급이 약간 올랐을 뿐 큰 변동은 없었다. 진위대 예산은 군인들의 월급을 비롯하여 피복비·음식비·치료비·연습비·여비·매장비 등으로 쓰였다. 진위대의 예산은 주로 역토(驛土)에서 징수하는 세금이나 인접 고을의 결전(結錢) 등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재정 부족이 문제가 되었다.

진위대의 역할은 지역 방어로 평안도 함경도의 진위대는 주로 중국과 러시아 방면 국경 방어를 담당하고, 삼남지방의 진위대는 각종 소요 사태와 활빈당 등의 변란들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자 청 봉기군 일부는 평안도와 함경도로 침입해 약탈을 자행한다. 이에 진위대가 봉기군을 진압하고 1902년 이후에는 요동과 간도로도 진출해 영유권을 두고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청군에 비해 훈련도나 무기의 질적인 면에서 우세였던 진위대는 청군과의 상당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였는데 간도협약 이후 영유권 분쟁은 종결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 진위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5. 변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4월 16일 진위대의 병력을 크게 감축시켰다.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 2,365명에 불과할 만큼 줄어들었다.

진위대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일본 통감부의 지시를 받아 을사의병으로 일어난 의병 대장 원용팔을 체포한 것을 비롯하여 강릉·단양·예천의 의병과 싸웠다. 당시 의병들은 황제의 군대와는 싸울 수 없다며 전투를 포기한 최익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들은 일본군과는 격렬히 싸운 반면 진위대와는 싸우기를 회피하였다.[2]

일본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1907년 8월 중앙의 시위대를 해산하고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순차적으로 진위대도 해산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의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해산 군인들은 일제에 적극 대항하여 의병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는 1907년 8월 5일 민긍호(閔肯鎬)와 김덕제(金德濟)가 이끈 원주 진위대의 봉기, 같은 해 8월 9일 수원 진위대 강화 분견소의 봉기 등 전국의 진위대에서 봉기하여 의병전쟁을 확산 시켰다. 을사의병으로 시작된 의병 전쟁에 해산군인들이 참가하며 정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만주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최근 진위대의 문서 보관함(군안궤)가 발견되었다. #


[1]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와 비슷하다. [2] 다만 통감부의 지시를 따르고 의병을 진압한 점은 그 당시에서도 현대에서도 비판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