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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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구춘선(具春善) |
본관 | 능성 구씨[1] |
출생 | 1857년[2] |
함경도
온성도호부 포항사 하풍천동[3] (현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노동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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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4년 3월 20일 (향년 87세) |
만주국 간도성 왕청현 백초구[4]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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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이며 만주지역의 항일 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구춘선은 1857년[5] 함경도 온성도호부 포항사 하풍천동(현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1886년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에서 근무하였으나 뛰어난 학식과 인품, 출중한 체력으로 행영(行營)의 도시(都試)에 선발되어 서울의 궁궐을 수비하는 군인이 되었다.
이후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의 일원으로 봉직하다가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겪은 후 1895년 낙향하였다.
1897년 가족들을 데리고 북간도 연길(延吉)로 이주했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인의 보호에 나서자 선생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 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이범윤이 노령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구춘선은 거점을 용정촌으로 옮겼다.
2.2. 교육운동
1907년, 구춘선은 연길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인 로버트 그리어슨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집사 이보연과 함께 용정에 용정시교회(龍井市敎會)를 설립했고, 같은 해에 연길현 용정촌에서 이동춘, 이봉우, 박찬익, 정재면, 윤해 등과 함께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 운동가들의 모임인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를 조직하였으나 '자치'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는 만주 군벌의 규제로 인해 1909년 9월에 간민교육회로[6] 이름을 바꾼 후 북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개몽시키기 위한 교육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이동휘가 세운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의 간사로 재직했다.1913년 왕청현 백초구 하마탕에 한인마을을 개척하고 하마탕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한인의 생활안정을 도모했다.
2.3. 3.13운동 및 의병 군사활동
1919년 3월 13일 정오 용정(룽징)에서 3.13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 그 회장으로 선출되었다.이후 동년 4월 대한국민회로 이름을 변경하여 북간조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단체를 이끌었다.
8월에는 보다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군정사후원회를 조직하였고 11월에는 임정 군무부의 왕청현 교통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28일 독자적인 무장단체로 활동하던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통합하여 대한 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1920년 6월 4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신민회(新民會)·의민단(義民團)·한민회(韓民會) 등과 연합 부대를 결성하였다. 이 연합부대는 이후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하여 승리한다.
1920년 10월 29일에는 총판부를 결성 총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12월에는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에 참여하였다가 자유시사변을 겪은 후 다시 동만으로 돌아와 1921년 12월 15일 양수천자에서 총합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청산리전투에서 참패한 일제가 간도 참변(間島慘變)을 자행하자 러시아로 이동한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왕청현 백초구(百草溝) 지역을 중심으로 신앙운동과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간도를 중심으로 한인의 권익보호와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다 1944년 년 3월 20일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한동안 현지에 매장되었는데,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면서 1999년 그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