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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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876년 3월 10일 |
평안도 평양부 | |
사망 | 1930년 5월 22일 (향년 54세)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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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사후 부여)[1] |
학력 | 숭실학교 졸업 |
직업 | 독립운동가 |
종교 | 유교 ( 성리학) → 기독교 ( 개신교, 감리교회) |
의거 | 스티븐스 저격사건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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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평양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1908년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전명운과 함께 미국의 외교관이자 친일파인 더럼 W.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둘은 별도로 스티븐스 저격을 계획했고 우연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나타나 같이 스티븐스 저격에 성공했다.2. 생애
평안도 평양부에서 출생해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며 고아가 되었고 1894년 평양부 중앙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한 감리교인이자 상항한인연합교회의 창립 멤버로 큰 길에 나가 큰 소리로 복음을 전도했던 열렬한 신앙인이었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190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철도 노무자, 어부 등으로 생활하였다.1908년 미국 외교관이자 친일파인 더럼 스티븐스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일본 덕분에 한국 백성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망언을 하게 된 것에 격노하여 전명운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휴양차 기차에 승차하려던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전명운 의사가 먼저 스티븐스를 찾고 저격하려 하지만 권총이 불발되는 바람에 서로 육탄전이 벌어진다. 전명운 의사는 권총을 뒤집어 잡고 그립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구타했으나 더럼 스티븐스도 반격에 나선다. 체격의 차이로 전명운 의사가 한참 열세였는데 같은 목적으로 그 자리에 온 장인환이 등장했고 장인환 의사는 전명운 의사의 고성으로 인해 상대가 더럼 스티븐스임을 눈치채고는 그의 등 뒤에 권총 3발을 발사한다. 이 중 1발은 전명운 의사의 팔에 총상을 내고 나머지 2발이 스티븐스의 가슴을 맞췄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얼마 못 가 죽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이로 당연히 이 암살을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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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직후 촬영된 장인환의 머그샷 |
전명운과 함께 미국 법정에 선 장인환은 2급 살인 혐의로 재판에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아 샌퀜틴 주립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는데 전명운은 공범 혐의에 대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교포 사회에서 많은 성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주고 변호인의 노력과 그의 애국심을 알게 된 현지 판사들의 배려에 따라 모범수로 10년 감형되어 복역하고 석방되는데 한인 교회의 목사와 기독교인들이 장인환을 변호하고 그의 출소에 축하회를 열었다고 한다. 1927년 조만식 등 조선 민족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18세의 윤치복과 혼인하고[2] 평안북도 선천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사회 사업에 투신하였으나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를 이기지 못하자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1930년 병고(病苦)를 앓게 되면서 투신 자살하였다.
3. 기타
-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