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7:43:33

송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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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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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직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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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백작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송종헌
宋鍾憲
파일:송종헌.png
창씨명 노다 카네노리
野田鍾憲
출생 1876년 10월 19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現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사망 1949년 5월 21일 (향년 72세)
본관 은진 송씨 (恩津 宋氏)
주형(周亨)
가족관계 아버지 송병준, 어머니 조씨
여동생 3명
아들 송재구, 딸[1]
학력 무관학교 (졸업)
경력 일진회 평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주임 참의
조선귀족 백작[2]
국민협회 회장
민중신문 사장
대동일진회 고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귀족회 이사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친일 행적2.2. 해방 이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정미칠적에 포함된 매국노 송병준의 아들이다.[3]

2. 생애

1876년 10월 19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現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서 태어났다. 1888년 10월 식년시 진사 3등 152위로 합격한 이후 1889년 10월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했다.

2.1. 친일 행적

그 역시 이완용, 윤덕영, 민영휘 버금가는 희대의 매국노 아버지를 따라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4년 8월 아버지가 조직한 친일단체 일진회의 평의원을 맡았으며 1906년 양지잠업전습소를 설립했다. 1908년 3월 유릉 참봉에 임명되었고, 4월 추양학교를 설립했으며 1911년 12월 경기도 용인군 양지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에 되었다.[4] 1912년부터 1913년 10월까지 양지군 참사를 지냈다가 1914년 6월 아버지 송병준의 작위를 이어받을 사자로 종5위에 서위됨과 동시에 천황의 사령서를 받았다. 1917년 4월부터 아버지가 설립한 후 사장을 지내던 조선농업주식회사의 이사 겸 감사를 맡았고, 1931년 10월 사장이 되었다. 1917년 5월 용인지방금융조합 감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1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주임 참의로 임명되어 1933년 6월까지 12년동안 세 차례 연임하였고, 그 기간동안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중앙신탁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했고, 1921년 8월 아버지 송병준과 함께 조선소작인상조회을 발기,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1922년 6월 정5위로 승서한 후, 1923년 10월 고육실천회 평의원 겸 특별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24년 조선예술단을 경영하기도 했다. 1925년 2월 1일 송병준이 사망하자, 같은 해 8월 아버지의 백작 작위를 습작했다. 1925년 경성금융주식회사 이사에 취임했고, 1926년 12월 양지공립보통학교 교사 중축비로 5000원을 기부했는데 이에 1927년 5월 면민들이 학교 정문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7년 합자회사 중앙자동차 사원과 조선교육보성주식회사 감사를 지냈으며, 1928년 9월 쇼와 덴노 즉위 대례식에 조선귀족 총대로 선정되어 일본을 직접 방문했고, 같은 해 11월에 종4위로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1월 중앙물산주식회사 이사를 지내던 중 11월에 용인군교육회로부터 교육관계 공로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30년 1월 친일단체 국민협회의 제15회 정기대회에 참석한 후 회장에 선출되었고, 2월 국민협회 기관지 <민중신문>을 창간해 사장에 취임했다. 1931년 2월 국민협회 회장 자격으로 '중의원의원선거법을 조선에 행할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제9회 건백서를 조선총독부를 거쳐 일본 제국의회에 제출했다. 1931년 이장전기주식회사 이사를 지냈고, 1932년 10월 임시국세조사사업에 기여한 공로자로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부터 1942년까지 합자회사 연안온천 사원 겸 주주를 지내기도 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 중일전쟁 직후 주최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해 9월 정4위 백작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1938년 11월 시천교를 개조한 친일단체 대동일진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9년 4월 대동일진회가 개최한 이용구, 송병준 추도제식에 참석했고, 같은 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40년 4월 대동일진회 산하 동학원 원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5월 일제에 국방헌금 500원을 헌납했고, 10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개최된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를 받고 참석해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4월부터 조선귀족회의 이사에 취임했다가 1944년 4월 퇴임했고, 이후 1944년 7월 재단법인 창복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3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되었다.

2.2. 해방 이후

해방 후, 1949년 3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조사를 받던 중 같은 해 5월 21일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3. 여담

  • 2007년 5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종헌과 그의 부친 송병준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파일:송돈호.jpg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 송병준의 증손자 송돈호.
  • 후손들의 말로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송종헌의 첫째 손자이자 송재구의 장남 송준호는 아버지 송재구가 사망하고 나서 충격에 빠진 채 방탕한 유랑 생활을 보내다가 1995년부터 기독교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베데스타의 집’이라는 돌봄시설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송종헌의 둘째 손자이자 송재구의 차남, 송준호의 배다른 동생 송돈호 서울특별시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다가 서울특별시 상암동 일대 60여만 평,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 30만 평, 강원도 금화군 금란면 갈현리 일대 임야 200여만 평, 경상남도 밀양군 초동면 임야 79만여 평 등 자신의 증조부 송병준의 땅에 대한 토지 반환 소송을 수차례 걸어왔다. 그는 2003년 일제강점기 시절 미쓰비시제강 공장이 있었던 인천광역시 부평 주한미군기지 'Camp Market'이 철수하고 토지의 반환이 결정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땅을 찾겠다며 소송을 걸었으나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의해 패소를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토지 브로커들과의 각종 사기 행각을 벌인게 밝혀져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2007년 4월 구속되기도 했다. 출소 이후에도 2008년 재산 국가 귀속 결정이 위헌이라고 반발하면서 헌법소송을 제기해봤지만 이마저도 2011년 5월 13일 대법원에서 패소당했고, 결국 잠적했다. 송돈호는 조상에 대한 반성은 커녕 " 증조부는 애국자다.", " 가난한 조선을 일본 힘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적반하장이 섞인 망언들을 내뱉기도 했다.


[1] 초대 한국은행 총재 구용서의 아내이다. [2] 부친 송병준 사후 백작 작위를 습작했다. [3] 사실 부자지간이 모두 친일파인 사례는 일제강점기동안 꽤 있긴 했었다. 박제순- 박부양 부자, 민병석- 민복기 부자, 조중응-조대호 부자를 비롯해 민영휘- 민대식 부자, 한창수-한상억/한상기 부자, 이윤용- 이명구 부자, 김성근-김호규 부자, 박기순-박영철 부자, 신태영- 신응균, 현헌- 현영섭 부자 등의 사례가 있으며, 3대까지 따진다면 이완용- 이항구- 이병길 일가, 이하영-이규원- 이종찬 일가, 김춘희-김교신- 김정록 일가가 있다. 고영희- 고희경- 고흥겸- 고중덕 일가는 4대가 모두 친일파였다. [4] 여담으로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을 일으킨 독립유공자 조문기 역시 이 학교에서 재학 중이었는데, 어느 날 그는 송종헌을 환영하던 일장기를 들고 집에 귀가했다가 외할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며, 이후 향교에 가서 태극기를 본 경험을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교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것을 계기로 항일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5]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이 있기도 전, 그나마 옥살이 중에 비참하게 씁쓸한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