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부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副議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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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남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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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정낙용 鄭洛鎔 | Jung Nak-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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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정낙현(鄭洛鉉) |
자 / 호 | 경구(景龜) / 지포(之圃) |
출생 | 음력 1827년( 순조 27) 11월 24일[1]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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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4년 2월 1일 (향년 87세) |
본관 | 연일 정씨[2] |
직업 | 무신,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정당 |
[[황국협회|
황국협회 ]] |
작위 | 조선귀족 남작 |
경력 |
농상공부대신,
황국협회 초대 회장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궁내부 특진관 조선귀족 남작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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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무신, 친일반민족행위자. 자는 경구(景龜), 호는 지포(之圃)이며 본관은 연일이다.놀랍게도 포은 정몽주의 17대손이며, 독립유공자 정정화는 그의 손녀이다.
2. 생애
1827년 11월 24일 한성부의 무관 가문에서 방어사를 지낸 아버지 정인기(鄭寅基)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재홍(李載弘)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1855년 4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 1857년 6월 선전관이 되었고, 사복 내승을 거쳐, 1861년 6월 수안 군수로서 외직에 나갔다. 1863년 태안 군수로 전임되었고, 1865년 6월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태안 부사, 1867년 5월 전라도 좌수사, 10월 우부승지, 1868년 10월 죽산 부사, 1870년 9월 전라도 수사, 1874년 남양 부사를 역임하였고, 1878년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어 1879년 1월 삼도수군 통제사를 거쳐 1882년 6월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됨으로써 다시 내직에 들어갔다. 이듬해 4월 병조 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 시의 부정 비리로 인해 1883년 7월부터 1884년 12월까지 전라도 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향리에 쫓겨났다가 사면되었다. 1885년 7월 좌변 포도대장, 8월 친군 후영사와 협판 내무부사, 9월 형조 판서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886년 2월 전환국 총판이 되었고, 3월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887년 9월 정헌대부에 올랐고, 12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1894년 5월 한성 판윤, 1896년 5월 중추원 의관, 1897년 7월 시종원경을 거쳐, 10월 농상공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1899년 10월 중추원 의장이 되었고, 1904년 9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1910년 10월 11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수작 사실을 통보받고 기쁜 나머지 밤 새워 주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실려 있다. "성격은 너그럽고 후덕하지만 명예와 사욕이 강해 항상 권문세가에 아부하고 요직을 얻었다."
191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실에서 열린 은사공채권 교부식에 참석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같은 해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참석하였다. 1912년 8월 1일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4년 2월 1일 사망하여 그의 남작 작위는 같은 해 3월 19일 아들 정주영이 세습하였다.
3. 성품
"성격은 너그럽고 후덕하지만 명예와 사욕이 강해 항상 권문세가에 아부하고 요직을 얻었다."
조선총독부, 『조선귀족약력』
조선총독부, 『조선귀족약력』
정낙용은 처세술에 능했던 기회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평을 보면 알 수 있듯 언제나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요직을 얻던 인물이었다. 1879년 삼도 수군 통제사 재임 당시에 비리를 저질러 유배되었던 인물. 고종이 독립협회를 견제하려는 뜻을 보이자 황국협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황국협회의 지지를 받아 대한제국 중추원의 의장을 역임하는 등 수구파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구한 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경술국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일제강점기에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작받았는데 이것이 너무 기쁜 나머지 밤을 새워가며 주연을 배풀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