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6:28:51

정낙용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부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副議長
{{{#!wiki style="margin:-5px -10px; padding: 5px 10px"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김병시
제2대

정범조
제3대

김홍집
제4대

어윤중
제5대

박정양
제6대

정범조
제7대

민영휘
제8대

이호준
제9대

박정양
제10대

한규설
제11대

이종건
제12대

이하영
제13대

조병식
제14대

정낙용
제15대

임상준
제16대

신기선
제17대

김가진
제18대

조병세
권한대행

김가진
제19대

민영소
제20대

박정양
제21대

심상훈
제22대

민종묵
제23대

이근택
제24대

한규설
제25대

서정순
제26대

김윤식
}}}
{{{#!wiki style="margin: -31px -1px -11px"
좌의장
우의장
조병세 정범조 }}}
{{{#!wiki style="margin: -31px -1px -11px"
부의장
초대

김영수
제2대

어윤중
제3대

신기선
제4대

윤치호
제5대

이하영
제6대

윤치호
제7대

홍종억
제8대

서정순
제9대

김가진
제10대

이유인
제11대

이용태
제12대

이도재
제13대

이종건
제14대

이근호
제15대

이건하
제16대

김가진
제17대

이근호
제18대

이종건
제19대

이근상
제20대

이재곤
제21대

성기운
제22대

신기선
제23대

이근상
}}}}}}}}}}}}
정낙용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순신 원균 이순신 이시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류형 이경준 이운룡 이기빈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이경준 우치적 성우길 이정표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이영 류지신 정기룡 김예직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정기룡 원수신 구인후 이수일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이항 구굉 신경원 변흡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구인후 신경인 윤수 신경인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류림 류정익 이확 류림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이현달 이완 김응해 류정익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황헌 이원로 남두병 류혁연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정익 조필규 김적 박경지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김시성 정전현 박경지 이지형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이도빈 류비연 김경 류여량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신여철 이지원 노정 신유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윤천뢰 이인하 전동흘 민섬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원상 변국한 김세익 류중기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이세선 신여철 이성뢰 심박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목림기 최숙 김중기 이기하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정홍좌 이홍술 민함 류성추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원덕휘 홍하명 이창조 이상전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남오성 오중주 정홍좌 조미중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김중원 이우항 이석관 이택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윤의 이상집 오중주 김중기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이수민 이봉상 신익하 남태징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윤오상 이재항 이복연 김흡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이수량 정수송 박찬신 김집
제105대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윤택정 구성익 조경 송징래
제109대 제110대 제111대 제112대
이우 이의풍 이언상 장태소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제116대
정찬술 구선행 조동점 김윤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이장오 이경철 오연제 이윤성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이태상 이은춘 정여직 윤태연
제125대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이주국 이한응 이국현 장지항
제129대 제130대 제131대 제132대
원중회 조제태 구현겸 조완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제136대
이방수 이창운 장지항 이경무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서유대 신대겸 구이겸 이한창
제141대 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이방일 김영수 류진항 심대겸
제145대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조심태 이한풍 신응주 이윤경
제149대 제150대 제151대 제152대
서유방 이득제 신대현 이득제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제156대
이유경 윤득규 임률 이인수
제157대 제158대 제159대 제160대
이윤겸 류효원 이당 신대영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오재광 조계 서영보 신홍주
제165대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서춘보 오의상 신경 박기풍
제169대 제170대 제171대 제172대
조화석 이석구 이유수 김영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제176대
이항권 류화원 이완식 임성고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이정회 이승권 이응식 허계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백은진 서상오 김건 류기상
제185대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이응서 이규철 김한철 이희경
제189대 제190대 제191대 제192대
류상정 임태영 심락신 이경순
제193대 제194대 제195대 제196대
신관호 정규응 이재봉 김건
제197대 제198대 제199대 제200대
이현직 이현직 정규응 채동건
제201대 제202대 제203대 제204대
이주철 권용섭 이종승 신환
제205대 제206대 제207대 제208대
이규석 정낙용 정기원 이원회
제209대 제210대 제211대 제212대
정운익 이규안 민경호 정기택
제213대 제214대 제215대
민형식 민영옥 홍남주 }}}}}}}}}

{{{#!wiki style="margin:-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7054c, #29176e 20%, #29176e 80%, #07054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fd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김가진
제2대

이범진
제3대

정병하
제4대

조병직
제5대

이윤용
제6대

정낙용
제7대

이도재
제8대

민병석
제9대

김명규
제10대

박제순
제11대

김명규
제12대

권재형
제13대

박정양
제14대

권재형
제15대

민병석
제16대

민영기
제17대

이종건
제18대

민병석
제19대

권재형
제20대

김규홍
제21대

민종묵
제22대

민영소
제23대

김가진
제24대

이도재
제25대

이지용
제26대

박제순
제27대

이근택
제28대

박제순
제29대

조동희
제30대

권중현
제31대

성기운
제32대

송병준
}}}
{{{#!wiki style="margin: -31px -1px -11px"
제33대

조중응
}}}}}}}}}}}}

조선귀족
朝鮮貴族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8px -3px -11px"
수작 공작
-
후작
박영효 · 윤택영 · 이재각 · 이재완 · 이해승 · 이해창
백작
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자작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남작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5]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6] · 조희연 · 최석민 · 한창수
습작 공작
-
후작
박찬범 · 윤의섭 ·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이병길
백작
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자작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ㆍ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
남작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용국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규현 · 민병억 · 민영욱 · 민철훈 · 민태곤 · 민태윤 · 박경원 · 박서양 · 박승원 · 박정서 · 성일용 · 성주경 · 윤치호 · 이강식 · 이경우 · 이규환 · 이기원 · 이능세 · 이동훈 · 이범팔 · 이병옥 · 이병주 · 이완종 · 이원호 · 이인용 · 이장훈 · 이중환 · 이창수 · 이풍한 · 이홍재 · 장인원 · 정두화 · 정주영 · 정천모 · 조원세 · 조중구 · 조중헌 · 최정원 · 한상기 · 한상억
승작 백작 → 후작
이완용
자작 → 백작
고희경 · 송병준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
조선귀족 남작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정낙용
鄭洛鎔 | Jung Nak-yong
파일:정낙용.gif
본명 정낙현(鄭洛鉉)
자 / 호 경구(景龜) / 지포(之圃)
출생 음력 1827년( 순조 27) 11월 24일[1]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914년 2월 1일 (향년 87세)
본관 연일 정씨[2]
직업 무신, 정치가
종교 유교 (성리학)
정당 [[황국협회|
파일:황국협회 로고.svg 황국협회
]]
작위 조선귀족 남작
경력 농상공부대신, 황국협회 초대 회장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궁내부 특진관
조선귀족 남작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3. 성품4.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무신, 친일반민족행위자. 자는 경구(景龜), 호는 지포(之圃)이며 본관은 연일이다.

놀랍게도 포은 정몽주의 17대손이며, 독립유공자 정정화는 그의 손녀이다.

2. 생애

1827년 11월 24일 한성부의 무관 가문에서 방어사를 지낸 아버지 정인기(鄭寅基)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재홍(李載弘)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5년 4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 1857년 6월 선전관이 되었고, 사복 내승을 거쳐, 1861년 6월 수안 군수로서 외직에 나갔다. 1863년 태안 군수로 전임되었고, 1865년 6월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태안 부사, 1867년 5월 전라도 좌수사, 10월 우부승지, 1868년 10월 죽산 부사, 1870년 9월 전라도 수사, 1874년 남양 부사를 역임하였고, 1878년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어 1879년 1월 삼도수군 통제사를 거쳐 1882년 6월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됨으로써 다시 내직에 들어갔다. 이듬해 4월 병조 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 시의 부정 비리로 인해 1883년 7월부터 1884년 12월까지 전라도 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향리에 쫓겨났다가 사면되었다. 1885년 7월 좌변 포도대장, 8월 친군 후영사와 협판 내무부사, 9월 형조 판서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886년 2월 전환국 총판이 되었고, 3월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887년 9월 정헌대부에 올랐고, 12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1894년 5월 한성 판윤, 1896년 5월 중추원 의관, 1897년 7월 시종원경을 거쳐, 10월 농상공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1899년 10월 중추원 의장이 되었고, 1904년 9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1910년 10월 11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수작 사실을 통보받고 기쁜 나머지 밤 새워 주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비밀문서인 『조선귀족약력』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실려 있다. "성격은 너그럽고 후덕하지만 명예와 사욕이 강해 항상 권문세가에 아부하고 요직을 얻었다."

191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실에서 열린 은사공채권 교부식에 참석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같은 해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참석하였다. 1912년 8월 1일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4년 2월 1일 사망하여 그의 남작 작위는 같은 해 3월 19일 아들 정주영이 세습하였다.

3. 성품

"성격은 너그럽고 후덕하지만 명예와 사욕이 강해 항상 권문세가에 아부하고 요직을 얻었다."
조선총독부, 『조선귀족약력』

정낙용은 처세술에 능했던 기회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평을 보면 알 수 있듯 언제나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요직을 얻던 인물이었다. 1879년 삼도 수군 통제사 재임 당시에 비리를 저질러 유배되었던 인물. 고종이 독립협회를 견제하려는 뜻을 보이자 황국협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황국협회의 지지를 받아 대한제국 중추원의 의장을 역임하는 등 수구파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구한 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경술국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일제강점기에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작받았는데 이것이 너무 기쁜 나머지 밤을 새워가며 주연을 배풀었다고 전해진다.

4. 같이 보기


[1] 양력 1828년 1월 10일. [2] 포은공파 28세 용(鎔)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