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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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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중옥(中玉), 시중(時中)
둔헌(遯軒)
본관 평택 임씨[1]
출생 1851년 2월 5일
전라도 옥구현 서면 대사리 남산 아래
(現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
사망 1916년 5월 23일 (향년 65세)
전라남도 여수군 삼산면 거문도
묘소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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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조선 말기의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임병대는 임병찬의 남동생이고, 임응철은 임병찬의 장남, 임수명은 임응철의 차남으로 임병찬의 손자이다.

2. 생애

1851년 2월 5일 전라도 옥구현 서면 대사리 남산 아래(現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에서 아버지 임용래(林榕來, 1809. 5. 30 ~ 1877. 7. 4)와 어머니 개성 왕씨(1810. 5. 27 ~ 1862. 9. 14)[2]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3] 이후 생계를 위해 옥구현의 아전으로 일했다.

32세 되던 1882년 둘째 부인 여산 송씨(1848. 12. 27 ~ 1909. 7. 29)[4]의 고향인 태인현 산내일변면 영동(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두월리 영골)로 이주했다. 1889년(고종 26) 2월 6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고, 이후 낙안군수에 임명되자 고을 백성들의 구휼 및 교육에 힘썼다. 1890년 9월 7일 병을 이유로 사직했고, 1893년 태인현 산내일변면 종성리(現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로 이주했다. 1894년 5월 21일 친군무남영 우령관(親軍武南營右領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6월 4일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군 고현내면 원촌리(現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의병대를 창설했다. 당초 전주군을 점거하고자 했으나, 수적으로 불리한 탓에 우선 태인군 군내면 읍내를 장악해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정읍군 순창군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끝에 이들을 격퇴한 뒤 고을을 장악했다. 이어 6월 8일에는 곡성군을 점령했는데 이때 의병대의 규모가 900명으로까지 늘어났다고 하며, 채영찬(蔡永贊), 황균창, 김갑술, 양윤숙(楊允淑) 등의 중소규모 의병장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 중 채영찬의 경우 대포장(大砲將)에 임명되어 의병진의 전력 강화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옥과군에서 관군에 패배해 순창군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6월 10일 순창군에서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일본군과 내통했다는 첩보를 들어 그를 체포한 뒤 처형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목숨을 살려주고,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그 뒤 이건용은 순창군 관아로 돌아가 주둔하기를 청해 허락을 얻고는 그 길로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6월 19일 광주군·전주군· 남원군에 주둔한 대한제국군 진위대 병사들과 함께 최익현이 주둔해 있던 순창군을 포위했다. 최익현은 6월 9일에 이미 고종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진 사실을 알았고, 또한 맞서싸워야 할 상대가 대한제국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제의 침략문제를 두고 일으킨 의병이 동족과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해 전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진위대는 이를 기회로 삼아 더욱 힘써 싸웠고[5], 이 와중에 소모장(召募將) 겸 중군장(中軍將)·서기(書記)로 있던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는 등 의병진이 격파되고 말았다. 이에 최익현은 의병진을 해산했고, 최후에는 임병찬을 비롯해 고석진(高石鎭)과 문달환(文達煥) 등의 참모(參謀), 그리고 김기술(金箕述), 양재해(梁在海), 나기덕(羅基德), 이용길(李容吉), 임현주(林顯周), 최제학(崔濟學),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유해용(柳海瑢) 등만이 남아 최익현을 호위했다. 6월 20일 결국 최익현이 투항을 결정하자 임병찬은 최익현의 의사에 따라 나머지 11명의 의병과 함께 체포되었고, 이튿날인 6월 21일 전주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인계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어 조선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감금 2년을 선고받아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 이후 최익현은 단식투쟁 끝에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임병찬은 1907년에 풀려나 귀향했다. 1908년(순종 2) 5월 7일 영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0월 15일 사직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고종으로부터 의병 투쟁을 명하는 밀지를 받았고 1912년에 그에 따라 대한독립의군부를 창설했는데,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이것이 그의 대표적인 행적으로 소개되며 왕정복고[6]를 주장한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으로 평가된다. 이후 1913년 2월 고종의 비밀 조칙을 받고 대한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취임했고, 1914년 2월 15일 상경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고, 1914년 6월 13일 거문도에 유배되어 단식한 끝에 1916년 5월 23일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1894년 12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김개남 태인현 산내이변면 사승리(現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 사승마을)에 있던 매부 서영기(徐永基)의 집에 숨어있을 때 임병찬이 이를 고발했고, 김개남은 12월 2일에 강화 진무영(江華鎭撫營) 소속 병사에게 체포되었다. 유생의 한계라는 얘기도 있고, 다른 동학교도들을 구하기 위한 임병찬과 김개남의 고육지책이라는 얘기도 있다. 2012년 7월 2일 전북도민일보 기사 조정에서 임병찬에게 김개남을 고발한 것에 대한 상으로 임실군수 자리를 내렸는데 임병찬은 이를 거부하였다.
    • 이후 임병찬의 평택 임씨 집안과 김개남의 도강 김씨 집안은 이후 철천지원수 사이가 됐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 첫 부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1846 ~ 1865. 12. 1)는 20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째 부인 여산 송씨(1848. 12. 27 ~ 1909. 7. 29)와의 사이에 장남 임응철과 차남 임예철(林禮喆, 1889. 2. 7 ~ ?)을 두었다.

[1] 평원부원군파(平原府院君派)-옥구공파(沃溝公派) 21세 병(炳) 항렬. [2] 왕학묵(王學默)의 딸이다. [3] 남동생 임병대는 아버지 임용래의 첫 부인 나주 나씨(1806 ~ 1880. 8. 3) 나도순(羅道淳)의 딸 소생이다. [4] 송상희(宋祥喜)의 딸이다. [5] 매천야록》 제5권에 따르면, 당초 조정에서는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 지방의 진위대로 하여금 순창군을 포위하게 했는데, 전라남도 관찰사 이도재 광주군에 주둔하고 있던 진위대에 순창군 경내에 주둔만 시키도록 하고 교전할 경우에는 승리를 거두더라도 참형에 처하겠다고 미리 칙령을 내려 둔 상태였기에 광주군의 진위대는 최익현 의병진과 교전하지 않았다. 남원군의 진위대는 출발할 때 아전 양한규(梁漢奎)가 의병들과 교전하지 못하도록 타일러 두어 탄환이 들어 있지 않은 빈 포를 발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주군의 진위대장 김 모는 적극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 [6] 국사편찬위원회 측의 설명에 따르면, 입헌군주제보다는 대한제국 시기의 전제군주제를 지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질의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