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0:56:33

한성신보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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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5년 2월 17일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도로 조선에서 발행한 일본계 신문. 청일전쟁 끝무렵 일본을 선전하고 조선 민중들의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발행되었으며 사장은 아다치 겐조로 구마모토 출신의 낭인들이 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일본공사관과 함께 명성황후 살해 계획을 꾸민 본거지였으며, 석방 이후 1906년 경성일보에 합병될 때까지 고종 명성황후에 대해 왜곡하고 비난, 러일전쟁 전후로는 일본을 선전하고 한국의 식민지화를 동조하는 기사를 실었다.

2. 상세

조선에서 근대적 신문은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간한 한성순보 한성주보가 있었지만 1888년(고종 25년) 7월에 폐간된 이후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력이 미치는 신문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895년 청일전쟁이 승리로 끝날 무렵에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일본 우호 여론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본공사 가오루는 이를 준비 중 아다치 겐조와 만나 신문발행을 결정하였고 일본 외무성에 신문발행을 건의하여 자금이 조달되었다.

아다치는 구니토모 시게아키를 주필로, 고바야카와 히데오를 편집장으로 사사키 타다시, 윤돈구 등을 기자로 구성하였다. 이 한성신보 기자들은 대부분이 구마모토의 낭인 출신들이었기에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위대 집단에 가까웠다.

이중 한글로 실은 윤돈구는 탁지부 대신 윤용선(尹容善)의 조카이자, 궁내부 협판 윤정구(尹定求)의 동생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의 문명화를 이끈 선구자라는 홍보를 지속적으로 한 반면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책에 따라 기조가 달라졌는데 고종에 대해서는 일본이 원하는 방향대로 정책을 추진한 시기에는 '전례 없는 개화 군주'라고 칭찬했으나 을미사변 이후에는 '간신배에 둘러싸인 무능한 군주'라는 편견을 심었다. #

한성신보는 한글과 일본어판을 다르게 구성하여 편향된 기사로 내보냈는데 한글판에서는 을미사변, 김홍집 살해사건, 아관파천, 의병활동 등에서 사실왜곡, 한국정부의 무능함이나 한국사회의 미개함을 선전하는 한편 일본판에서는 한국 내 일본인들이 사회정치적 불안감으로 동요해서 일본으로 떠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보도행태를 보였다. [1]

삼국간섭, 아관파천 등으로 러시아와 한국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반러 논조, 대한제국의 외교 무용론, 중립국화 무용론 등을 유포하였고 한러 간 용암포 조차협정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등 반러와 친일 여론을 확산시켰다.

러일 전쟁이 곧 다가온다는 기사도 썼으며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국가라고 홍보하기도 하였다.[2]

이들의 보도는 당대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전파되어 독립신문,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 장영숙.한성신보의 이중적 언론활동 # [2] 장영숙. 러일개전의 길목에서 ≪한성신보≫의 역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