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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제4대 황제
강희제 | 康熙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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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1654년 5월 4일 | ||
청
북경 자금성 동육궁 경인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
사망 | 1722년 12월 20일 (향년 68세) | ||
청 북경 창춘원 청계서옥 (現 베이징시 하이뎬구) |
|||
능묘 | 경릉(景陵) | ||
재위기간 | 제4대 황제 | ||
1661년 2월 5일 ~ 1722년 12월 20일 (61년 30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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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
중국식 : 아이신쭤뤄(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한국식 : 애신각라 |
|
휘 |
중국식 : 쉬엔예(玄燁) 만주어 : 히오완예이(ᡥᡳᠣᠸᠠᠨ ᠶᡝᡳ) 한국어 독음 : 현엽 |
||
부모 |
부황
세조 장황제 모후 효강장황후 |
||
형제자매 | 8남 6녀 중 3남 | ||
배우자 |
정후 -
효성인황후 혁사리씨 계후 - 효소인황후 뉴호록씨, 효의인황후 동가씨 |
||
후궁 |
|
||
자녀 | 35남 20녀 | ||
신장 | 약 170~ 175cm[1] | ||
한호 |
만주어 : 얼허 타이핀 한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ᡥᠠᠨ) |
||
칸호 |
몽골어 : 엥케 아무굴랑 칸 (ᠡᠩᠬᠡ ᠠᠮᠤᠭᠤᠯᠠᠩ ᠬᠠᠭᠠᠨ) |
||
묘호 | 성조(聖祖) | ||
시호 |
중국식 :
만주어 : 고신 황디(ᡤᠣᠰᡳᠨ ᡥᡡᠸᠠᠩᡩᡳ) |
||
연호 |
1662년 ~
1722년 중국식 : 강희(康熙) 만주어 : 얼허 타이핀(ᠯᡥᡝ ᡨᠠᡳᡶᡳᠨ) |
|
강희제의 친필 글씨[3] |
[clearfix]
1. 개요
청나라 제4대 황제.청나라의 전성기 강건성세를 열었던 명군이자 성군이다. 현대 중국에서도 대제(大帝)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황제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사에서 가장 긴 62년이라는 세월 동안 청나라를 통치했다.[4] 다만 강희제는 매우 긴 재위 기간에 비해 사망 당시 나이는 비교적 이른데 즉위 당시에는 고작 8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에, 1722년 사망 당시에는 69살로 61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재위했음에도 일흔을 못 넘겼다. 1616년에 건국되어 1912년에 멸망하여, 전체 존속 기간이 300년이 채 되지 않는 청나라 역사의 1/5이 넘는 기간이 강희제의 시대였던 셈.[5]
강희제는 엄청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강행한 것에서 보이듯이, 만주족 전통 무술과 기마술을 단련하는 데에도 힘썼다. 강희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무를 겸비한 만주족의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청나라 황제 중 처음으로 중원에서 태어나 만어와 한어를 모어로 익히고 유교적 제왕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황제로, 중국 왕조로서의 청나라의 시작은 실질적으로 강희제의 치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6]
위에 언급됐듯이 역사적으로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군주로서 강희대제라 불리기도 한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조선의 세종을 세종대왕이라 하는 것과 같다.[7]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강희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중국의 황제는, 혹자는 그가 무궁한 재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의 강토가 광활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렇지만, 그는 진정 자신의 몸에 모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것을 사용했다. 그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보면, 그의 말은 소박하고 담백함이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공봉(供奉)되는 물품을 제외하고, 그는 조금도 사치스러움을 구하지 않았고 매우 일반적인 음식에 만족했으며, 조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2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곳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직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8]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 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조아킴 부베. 강희제전(康熙帝傳), 루이 14세에게 올린 보고문 中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2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곳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직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8]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 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조아킴 부베. 강희제전(康熙帝傳), 루이 14세에게 올린 보고문 中
"그라말디는 군주가 가진 놀랄 만한 지식욕은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제후들과 제국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멀리서는 흠모해 마지않고, 가까이서 대할 때는 존경을 금치 못하는 그 군주가 페르비스트와 함께 (궁전의) 내실에서 마치 선생을 모신 (온순한) 학생처럼 날마다 서너 시간씩 수학 도구와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클리드의 정리를 터득하고 삼각 함수를 이해했으며, 산술로 천체의 현상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다. 최근에 그곳에서 돌아온 르 콩트 신부가 출간한 중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군주는 자신의 자식들이 과학의 근본 원리와 여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끔 수학에 관한 책을 친히 집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그 군주는 자신의 나라를 밝혀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집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최신 중국 소식> 中
그는 유클리드의 정리를 터득하고 삼각 함수를 이해했으며, 산술로 천체의 현상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다. 최근에 그곳에서 돌아온 르 콩트 신부가 출간한 중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군주는 자신의 자식들이 과학의 근본 원리와 여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끔 수학에 관한 책을 친히 집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그 군주는 자신의 나라를 밝혀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집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최신 중국 소식> 中
실학자 홍대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김종수, 홍국영, 정민시 등 꼬장꼬장한 반청 노론계 인물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였으니, 홍대용이 강희제에 대해 엄청 감동을 받긴 했나 보다.[9] 그런데 홍대용은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건륭제 때부터 청나라가 속에서 곪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보면, 홍대용의 통찰이 실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합하면 당대에도 모범적이고 귀감이 되는 군주로서 평가받았고 현대에도 중국에선 일부 한족우월주의자들이 설치면서 인기가 조금 시든 감은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는 군주이다.
강희제 역시 사람인지라 단점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후계자 문제로,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후계자가 명군인 옹정제가 되었으니 잘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년에 강희제는 후계자를 끝까지 명확히 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의 유언에서야 제4황자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지를 내렸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강희제가 의도한 후계자가 옹정제인지 합의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는 황태자 윤잉의 주변에 몰려든 간신들과 그로 인한 윤잉의 비행, 그리고 파벌 형성을 경계한 것이지만 이 탓에 황자들의 다툼이 심해졌다는 점만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10]
물론 황태자 윤잉이 처음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강희제가 장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만주족에게 익숙하지 않은 규칙을 밀어붙인[11] 순간부터 윤잉에겐 고난이 시작된 것이고, 윤잉을 고립시키며 그 측근들을 배제하는 강희제의 태도는 황태자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어 흑화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렇게 자식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는 실패한 셈.
성군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한족에게는 폭군이나 다름없는 문자의 옥 문제도 있다. 이것 때문에 현대 들어서도 중국에서 강희제를 까는 한족 안티들이 일부 있을 정도다. 물론 현대적 기준에선 까여도 크게 할 말은 없는 정책이지만, 굳이 옹호를 하자면 강희제는 오히려 그 강도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속했고[12] 또 당시 시각에서 보면 이민족이 많은 중원을 통치해야 했던 소수민족 만주족 입장에선 생존이 걸린 문제긴 했다. 결과적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 많은 통제를 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덕분에 청의 통치에 불만이 있던 많은 한족 학자들이 탄압받거나 죽어야만 했다.
강희제 말년에 벌어진 황자들 간 다툼은 당파 형성,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후대인 옹정제 대에 큰 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강희제 말년의 문제들이 후세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전중기 치세에서 다져진 내실과 다음 대 황제인 옹정제의 뛰어난 정치력 때문. 옹정제는 거의 일 중독 수준의 정무 처리로 강희제 대부터 이어온 부정부패를 척결해나간다.
일본의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경우, 강희제가 훌륭한 황제인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좋았기 때문에 강희제의 치세가 융성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가 활발한 시대이니 청조의 딸리는 군사적 능력[13]을 물량으로 보충할 수 있고[14], 세수가 넘치니 수탈을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소빙하기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야자키의 비판이 2020년대에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고도 하나, 군사력 쇠퇴와 화기 발전 억제는 소빙하기와 큰 관계가 없다. 또 하술할 지정은제 역시 소빙하기에도 오히려 인구가 늘게 한 원인이기에, 강희제를 변호할 거리가 되는지 어떤지 의문이다.
강희제의 정책 가운데 지정은제는 간과하기 쉬운 문제이다. 나무위키나 개론서에서야 단순히 선정으로 취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정책이었다. 은 유입이 늘어난 호경기인 강희제 시절에는 괜찮았지만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도 청 조정 자체는 세수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강희제가 호경기의 덕을 봤다는 설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강희제는 청나라의 화기 개발을 억제하였다. 특히 1696년에 강희제는 화기의 연구와 개발을 금지시키고 이전에 만들어진 병기에 대한 서적들도 열람을 제한하였다. 청나라의 군사가 승승장구한 이유가 오로지 창과 궁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강희제 본인이 냉병기를 좋아했기 때문도 있지만 진짜 근본적인 이유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세력이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정책은 청나라의 화포와 총기 기술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뒤를 이은 황제들도 강희제의 정책을 본받음으로써 결국 청나라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약화시키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강희제 사후 150여년 뒤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15][16] 강희제도 이런 부작용을 모르는 바는 아니라서 청나라의 화기를 기존의 홍이포에서 신식 화기로 바꾸어 발전시키는 나름의 업적도 세우긴 했지만, 결국 냉병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찬밥 취급했다는 한계도 부정할 수 없다.[17] 그렇지만 강희제 개인의 잘못만이라기보단, 따지고 보면 100년이 넘게 화기 개혁을 할 동인도 의지도 없었던 청 황실의 문제이기는 하다.
4. 기타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 ~ 1722년)는 한국의 현종(1659년 ~ 1674년), 숙종(1674년 ~ 1720년), 경종(1720년 ~ 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성과를 내었다. 당연히 조선의 사신들을 만난 적도 있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현종실록 19권, 12년 2월 20일 2번째 기사[18]
강희제는 성황사[19]에 새해 인사를 드리고 온 뒤, 조선의 사신들을 자금성 건청궁으로 따로 불러들였다. 먼저 사신들을 가까이 앉게 한 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국왕과 몇 촌인지, 언제 길을 떠날 것인지, 글을 읽었는지, 그리고 부사 정익(鄭榏)의 이름자를 물어본 다음에 말했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을 신하가 강한 소치라 한다.[20]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이에 복선군 이남이 대답하였다.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강희제는 빙그레 웃고는 시랑 중 한 사람에게
저 사람이 국왕의 가까운 친척[21]이므로 저리 말한 것이다.
라 말하고 사신들을 물러가게 했는데, 그 시랑도 함께 나오면서 역관 이일선(李一善)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그리고 사신들은 나중에 이일선으로부터
시랑이 말하길, 사신이 황제의 물음에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하더이다. 또 가로되, 오늘 사신을 대하면서 우리나라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느냐고 하더이다.
라는 말을 듣고 강희제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첨언하자면 이 시기 조선에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재앙인 경신대기근이 휩쓸고 있었다. 여기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가 "너희 나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어가고 있다더구나? 그게 다 군약신강의 나라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강희제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22][23][24]
물론 조선에 닥친 천재지변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군약신강이라 굶어죽은 것은 절대 아니고, 태종이 가뭄을 핑계로 처남들의 처형을 미루는 척하자 신하들이 역심을 품은 자가 있어 전지조화가 깨진 탓이라 하기도 했고,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수신에 힘쓸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청나라도 조선과 같은 재난을 겪고 있었다. 원나라 말부터 줄곧 하락세를 보이던 중국의 연 평균 기온은 딱 강희제 치세에 최저점을 찍고 청나라 말이 되어서야 영상으로 회복되는데[25], 그에 비해서 청은 상대적으로 기근의 영향이 적었다. 이는 강희제가 엄청나게 잘나서가 아니라 은의 유입이 많아지고 전란으로 인구가 줄은 덕분에 청의 경제가 기근의 영향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보는 평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조선을 군약신강의 나라라고 비웃는 듯한 평을 내린 것과는 별개로 을병대기근[26] 때는 조선이 도움을 요청하자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조선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쌀을 보내줬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명나라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과 곡식을 보내준 덕분에[27] 조선에서만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줬는데[28] 비해 강희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일 뿐만 아니라 대기근 당시 고통받던 조선에게 쌀을 보내줬음에도 조선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숭덕제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엄청나게 수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악연이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다.[29]
그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하면 강희제의 조선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굉장히 유화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 입장에서야 병자호란 같은 조선에 대한 원정이 "우리 할아버지 대에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일 테니 당연한 것이긴 하다. 심지어 할아버지 시절의 조선 침공은 통역관들의 오역 때문이었다는 뇌피셜까지 읊어댔을 정도로. 또한 대만 정벌 시기 동녕 왕국에서 상국으로 받들 것이니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해 달라고 청해왔는데, 대신인 나라 밍주가 제후국인 조선의 예를 들어 찬성하자 그와의 대화에서 "조선은 언어와 풍속이 달라 중화와 융화될 수 없어 그대로 놔뒀지만, 대만은 우리와 풍속이 같으니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만약 강희제가 조선에 대해 유화적이지 않았다면 당시 조선의 반청감정은 실제보다 더더욱 강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북학론 또한 철저한 배척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30] 어떻게 보면 강희제는 미래에 조선이 청나라의 쇠퇴를 틈타 청나라의 멸망에 기여하는 일을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방지한 셈이다.[31]
중국 최대의 악습인 전족을 뿌리뽑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청에 머물던 선교사들에 의해 강희제의 통치는 유럽까지 알려졌고, 나폴리 동부 대학에는 '중국 학회'까지 세워진다. 유럽의 학자들은 '철인 군주'를 꿈꾸던 플라톤의 이상을 기독교도 안 믿는 중국에서 실현했다면서 유교와 기독교와 연결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32] 의외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물론 그 환상은 열강이 청에 직접 발을 내딛으면서 무참히 깨지고 만다.
참고로 강희제 본인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는데, 선박들이 해외로 팔려가고 목재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고 네덜란드인들이 남해에서 버티는 모습[33]을 보며 연해 지방의 총독들을 만난 자리에서 " 미래에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이 짐의 예측이다"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정도면 뭐...
5.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강희제/가족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6. 대중매체에서
중국의 작가 얼웨허(二月河, 이월하)는 《제왕 삼부곡》이라는 시리즈 소설을 썼는데, 그 중 첫 작품인 《강희대제》는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옹정황제》, 《건륭황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도 번역되어 정식 출간되었으며, 개정판 기준으로 《강희대제》가 12권, 《옹정황제》가 10권, 《건륭황제》가 18권으로 분량이 엄청나다.2001년에는 중국 중앙방송에서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어 동시간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레이(韩磊)가 부른 이 드라마의 타이틀곡인 < 向天再借五百年>[34] 역시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곡이다. 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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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드라마 < 궁쇄심옥>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다. 화살을 던져서 사람을 죽일 정도로 무술이 뛰어난 것으로 표현된다. 다른 드라마들에서도 강희제는 권신 오배만큼은 아니지만 무술이 뛰어난 것으로 표현된다.
2015년 드라마 <다정강산> 마지막회에서 겨우 걸어다닐 나이에 황제로 등극한다.
2016년 드라마 <황제의 봄>(적막공정춘욕만)에서도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군주의 자질이 넘치며, 무예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김용의 소설 《 녹정기》에서는 주인공 위소보의 절친으로 등장하여 무협 소설 팬들에게는 익숙한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강희제(녹정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외에도 강희제가 세 명의 주인공들 중 한 명으로 나오는 중국 드라마 <회옥공주>가 있다. 중국 배우 정가유, 손요위가 주연이고, 강희제 역은 손요위가 맡았다. 강희제의 본명이 현엽으로 나오는 걸 빼면 극 중 스토리는 실제 사실에 기반한 것은 거의 없고,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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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예쥔의 글은 시리즈물이다. 중원을 평정하고 천하를 경영했던 청(淸)나라의 황제들인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 3대가 이루어낸 태평성세의 지혜를 모은 3권의 책으로, '수신제가'는 강희제, '치국'은 옹정제, '평천하'는 건륭제를 다루고 있다. 어찌되었든 최근의 중국은 강희제의 치세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준가르 정벌, 북벌, 대만 정벌 등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앙정부의 의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중국이 강희제를 높이 여기는 분위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지만, 강희제가 실제로도 대단한 업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부정하긴 힘들 듯 하다. 후진타오 등은 그렇게나 강희제를 본받쟀는데 후임인 시진핑은 사극 금지령 등으로 처참하게 말아먹고 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아시아 왕조>에서는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노년기의 모습으로, 대사나 말투가 자비롭고 평화주의적이다. 게임 중 보물을 많이 수집하면 다른 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잘났다 그래. 보물 찾았다고 좋아하지 마" 라는 식으로 쏘아붙이거나 "그래, 보물 찾기라도 잘 해야지" 라고 비꼬거나 "네가 보물을 찾는 동안 나는 군대를 모았지" 라며 엄포를 놓거나 하는데, 강희제는 적으로 만나도 "그대의 이재(理財)는 짐이 배워야 할 점이로다"라고 칭찬한다.[35] 게임에서 중국의 컨셉을 유교로 잡아서 그런지 유교적인 대사도 많으며, 영문 원판에서는 늙은 현자 내지 도인(道人) 같은 느낌을 의도한 것 같은데, 간드러지는 목소리여서 간신이나 환관 같다는 평도 있는 모양이다.
중국의 모바일 게임 < 황제라 칭하라>에서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하인 청나라의 황제 강희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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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0cm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고 175cm는 강희제가 입었던 의복으로 추정한 키인데 강희제의 키는 대략 170cm대 초반에서 170cm대 중반으로 보인다. 당시로는 꽤 큰 키였다. 오늘날의 180 중반 쯤인 듬직한 체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
대표 시호가 인(仁)이기 때문에 짦게 표현하면 인황제(仁皇帝)라고도 한다.
[3]
참고로 해당 글은 당의 시인인
왕유의 녹채(鹿柴)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4]
사실 강희제의 손자이자 제6대 황제인
건륭제는 60년 간 재위하다 스스로 퇴위한 후 4년을 더 살았던 만큼 그가 퇴위하지 않았다면 강희제의 기록을 넘어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즉위 시점에서 10세도 안 되었던 강희제와 달리 건륭제는 20대였다. 하지만 애초에 건륭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강희제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60년만 채우고 퇴위한 것이고 퇴위 후 4년 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사실상 64년을 재위한 셈이라 강희제보다 더 오래 통치한 건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건륭제 문서 참조.
[5]
대체적으로 훌륭한 군주로 알려진 인물들은 안타깝게도 재위기간이 그리 길지 못하다. 그만큼 나랏일에 힘을 쏟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남아나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무려 60년 넘게 나라를 통치하였다. 물론 이는 강희제 본인이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도 있다. 친정을 시작한 게 10대 중반이니 실질적으로 통치한 기간은 52년 정도다. 아들인 옹정제도 강희제 못지않게 걸출한 군주였지만 46세라는 고령에 즉위한 탓에 겨우 13년만 재위하고 죽었다. 다만 손자인 건륭제는 말년에는 암군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강건성세로 불릴 정도로 재위 대부분을 청나라의 최전성기로 이끈 황제인데 60년을 재위한 것도 모자라 4년을 더 실권을 잡았고 강희제와는 달리 20대 중반에 즉위해서 사망 당시 무려 아흔을 앞둔 87세였다.
[6]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만주 황실에서 한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고, 돌림자를 넣어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관리들이 자신에게 올리는 공문서도 반드시 만어와 한어를 둘 다 사용하여 보고하게 했던 사례들이 있다. 청 황실 및 관료들의 한어 사용 자체는 요동 한족 및 명에서 넘어온 투항세력을 등용하던 누르하치-홍타이지 시절부터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황제가 내리는 성지 등의 공문서에서도 만어에 준하는 법적 지위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강희제의 치세는 청조의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할 수 있다.
[7]
이와 같은 그의 위대함은 묘호를 봐도 잘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나라의 창건자 또는 중건자가 아니면 조(祖)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강희제는 祖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성스럽다는 뜻의 성(聖)을 함께 사용하여 성조(聖祖)라는 묘호가 붙여졌다. 이 묘호는 중국의 모든 왕조 중 추존 군주를 제외하면 같은 사례가 없으며, 비슷한 묘호의 사례도 요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요성종(聖宗)이 유일할 뿐이다.
[8]
마포로 만든 홑마고자
[9]
그런데 홍대용은 김종수의 형 김종후(홍대용 본인에게는 서원 선배가 된다.)에게
한족이라 하나
변발을 한 중국 선비들을 만났다고 마구 까였다.
[10]
옹정제의 즉위 과정에서 일어난 황족들과 만주사회의 분열은 건륭제 시대에서야 마무리되었다.
[11]
누르하치는 군주 사후 부족회의를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는 여진족의 풍습을 계승하라는 유조를 남겼고
숭덕제,
순치제는 의정회의를 통해 선출되었다. 순치제가 서거할 때 의정왕회의 구성원들은 안친왕 악락을 제외하면 너무 어리거나 결원이 많았기 때문에 권위가 없어 순치제와
효장문황후의 지명으로 강희제가 황위에 올랐다. 강희제는 전통적인 계승법이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여겨 적장자인 윤잉을 황태자로 책립하였다. 그러나 군주 생전에 후계자를 두는 방식은 만주족에게 익숙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입관 이후로 적서의 구분이 약해지면서 서자들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서자였던 강희제가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황족들과 대신들은 이전만큼 적자 계승을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12]
문자의 옥은 강희제의 아들
옹정제를 거쳐 손자
건륭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다. 오히려 강희제 본인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많이 노력한 편으로, 건륭제 시절처럼 말도 안되는 이유로 숙청하려고 처벌하진 않았고, 걸린 일들이 진짜 청나라 입장에선 반역자 포지션인 반체제적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다.
[13]
사실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이 시대부터 청은 이미 전술적으로 성과가 나쁜 경우가 많았다. 삼번의 난에서도 반군에게 고전해서 한인 병사를 모집했고, 조선에 군사를 빌리거나, 대만 정복이나 소수민족 정벌도 물량으로 보충하는 등. 사실
팔기군의 군사력이 한창 빛을 보던 초기(중원 입관 전)의 청나라도 이러한 문제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청나라가 승리한 전투인
사르후 전투,
송산 전투,
정묘호란,
병자호란조차도 청나라 자체의 역량만으로 이겼다기보다는 적군의 무능함에 힘입어 승리한 것에 가까웠으며, 청나라의 중원 입관 자체도 명나라의 멸망 및
오삼계의 투항에 힘입어 가까스로 성공한 것이다.
[14]
이러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족 왕조인
송나라,
명나라에서 크게 두드러진 바 있다. 결국 중원 입관 이후의 청나라는 군사적 능력으로 승부하던 전형적인 유목제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고, 그러한 유목제국에 비해 떨어지는 군사적 능력을 경제력으로 보충하는 한족 왕조식 체계로 바뀌어간 셈이다.
[15]
다만 150년 뒤 열강에게 패배한 것을 강희제 때문이다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는데, 화약병기 기술력은 산업혁명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유럽에게 뒤쳐진 상태였다. 조총부터가 유럽에서 전래된 것이고 역시나 유럽산 대포인 홍이포와 불랑기포가 명나라 전통의 대포들을 몰아내고 제식병기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금방 복제 해낸걸 생각하면 아직은 격차가 넘사벽으로 벌어지진 않았지만, 화약병기의 발전은 이미 유럽이 주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설령 강희제가 화기 개발을 억제하지 않고 계속 개량했다 할지라도 산업혁명으로 문명단계 자체가 바뀌어 버린 서양 열강을 상대로 패배한다는 결론은 바뀌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실제보다 그나마 낫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16]
출처: 훈련도감 설치 및 운영의 동아시아적 특성
[17]
어떻게 보면 만주족은 기마궁술을
자신들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화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한족 등 지방 세력들의 반기를 막기 위한 필요성을 느낀 것에 더해서 “그래도 만주족이면 역시 기마궁술이지”라는 생각으로 기마궁술을 강조한 것도 있었던 듯하다. 강희제의 조부
숭덕제는 생전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 자손들이 향락과 사치로 나태해져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잊어버리고 한인의 법도에 빠져드는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고, 손자
건륭제도 "우리는 건국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했다. 이러한 오래된 관습과 전통은 엄격한 노력을 통한 연습과 체득으로써 공손하게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불시에 활쏘는 연습장에 들러 화살을 쏘게 하기도 했다. 만주족 고관이 쓴 편지 중에는 "
옛날에는 만주족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활을 직접 만들 줄 알았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활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서 한족 장인들한테 주문 제작해서 쓰더라"라고 투덜대는 내용의 것도 있다. 건륭제 때인
1752년 황제가 예고도 없이 궁술 연습장에 들렀다가 만주족 고위 관리들이 쏜 화살이 과녁은 고사하고 땅바닥에 픽픽 떨어지는 참담한 꼴을 목격해 1년치 봉급을 벌금으로 부과하고 일부는 아예 관직을 삭탈하기도 했다고.
[18]
참고로 이때 강희제의 나이가 불과 16세, 우리나라
중3 나이였다.
[19]
이 성황사(城隍祠)라는 말이 원래 성황당(城隍堂)을 가리키는 말인데, 북경의 천단을 폄하해서 이렇게 말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20]
이른바
군약신강. 다만 이무렵 조선은
경신대기근을 당한 상태긴 했다.
[21]
복선군은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아들이므로 현종에게는 사촌형제가 된다.
[22]
아이러니하게도 강희제와 동시기에 재위했던 조선의 임금은 현종과 숙종으로 (태종~세종 재위 기간을 제외하면) 조선 역사 중 왕권이 가장 강한 시기였다. 심지어 숙종의 경우에는 성년도 채 되지 않은 14세에 즉위 직후 바로 친정을 했을 정도. 심지어 유년기 당시에는 모두 왕실 웃어른인 태황태후(대왕대비)와 황태후(대비)가 살아있어서 성년기까지 치세를 지켜봤다. 강희제는
효장문황후와
효혜장황후가, 숙종은
장렬왕후와
명성왕후가 있는데 왕실어른들의 존재가 숙종과 강희제의 안정적인 왕권 확립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23]
조선과 달리 명과 청은 황제권이 매우 강력했다.
홍무제가 신하들을 쥐잡듯 잡은 이후 청나라까지 계속 그런 기조가 이어져 왔다. 그나마 명나라 때는 환관들이 득세할 때도 있었지만 청나라는 그런 거 없었다. 그렇다 보니 강희제의 시점에서 조선 왕의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해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24]
오히려 신라, 고려때보다 조선이 그나마 왕권이 강했다는 게 아이러니. 청나라의 조공국이 된 후의 조선이 확실히 군약신강의 나라가 된 것은
순조 치세부터였는데, 어찌 보면 강희제가 의도치 않게나마 조선의 미래를 예견한 셈이다.
[25]
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6]
경신대기근에 묻혀서 그렇지
을병대기근도 굉장히 참혹한 대기근이었다.
경신대기근 때도 반청감정 때문에 청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조선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말 다했다.
[27]
다만 그렇다고 만력제한테 고마워하기만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이후 만주족의 성장을 사실상 방관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에 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기에 만력제는 절대 조선에서도 마냥 좋게 봐줄 수 없는 인물이다.
[28]
물론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조선인들도 만력제가 나라 망친 암군이라는 건 인지했고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했다.
[29]
다만 강희제를 높이 평가한 조선인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실학자
홍대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여담으로 해당 구휼미의 경우 청나라 기록에서는 옥처럼 흰 쌀로 구제하였다고 나오고, 조선의 기록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이었다고 나오는데 강희제 성격상 먹을 수 없는 썩은 쌀을 구휼미로 줄리는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의 기록이 거짓으로 보인다.
[30]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해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숭덕제가 미화된 영향으로 현대 한국인들은 한때 조청관계 개선을 강희제가 아닌 숭덕제의 업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들 중 현재까지도 그런 식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강희제가 조청관계 개선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애써 외면한다.
[31]
물론 이와 별개로 훗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당시 예관
신규식, 범재
김규흥, 춘교
유동열 같은 몇몇 조선인들이 신해혁명에 가담하긴 했지만, 이 때는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도 이미
경술국치로 인해 일본 제국에 병탄된 후라서 조선 왕실의 입장과는 무관하다.
[32]
다만 유교와의 연결점을 찾는 학풍은, 이보다는 선교와 연결되어 이루어졌다. 즉 어느 날 갑자기 "너희들이 생각하던 건 다 틀렸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공맹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설득력이 있다.", "공맹께서 하신 말씀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그리스도교의 말씀과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도 배척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게 훨씬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 이러한 경향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명나라 시대의 예수회 선교에서부터 나타난 경향이며, 훗날 조선에서 특히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보편적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쪽이 훨씬 와닿는 설명이기도 하고.
[33]
강희제 성장기와 치세엔 네덜란드가 대만을 점령했다가 정성공에게 뺏긴 후에도 계속 기웃거렸다. 약 40년 전에는 마카오를 점령하려고 하기도 했고.
[34]
닛몰캐쉬의 중국 틱톡 패러디에서 나오는 바로 그 노래이다.
[35]
영문 원판에서는 'I can learn much from such an aggressive gatherer(그렇게 열심인 채집가로부터는 많은 걸 배울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