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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 청 후궁 | }}}}}}}}} |
<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추존황후 효공인황후 | 孝恭仁皇后 |
|||
청 옹정제조 성모황태후
인수황태후 | 仁壽皇太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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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1660년 4월 28일 | ||
사망 | 1723년 6월 25일 (향년 63세) | ||
청
북경
자금성 영화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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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경릉(景陵) | ||
재위기간 | 청 격격 | ||
미상 ~ 1679년 11월 15일 | |||
청 덕빈 | |||
1679년 11월 15일 ~ 1682년 1월 28일 | |||
청 덕비 | |||
1682년 1월 28일 ~ 1722년 12월 27일 | |||
청 황태후 | |||
1722년 12월 27일 ~ 1723년 6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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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성씨 | 오아(烏雅) | |
부모 | 부친 초품 일등공 겸 정5품 포의호군참령 오아 위무 | ||
배우자 | 성조 강희제 | ||
자녀 | 황4자, 황6자, 황7녀, 황9녀, 황12녀, 황14자 | ||
관저 | 영화궁(永和宮) | ||
민족 |
만주 정황기 포의 → 만주 정황기 |
||
봉작 |
격격 → 덕빈(德嬪) → 덕비(德妃) → 인수황태후(仁壽皇太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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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효공선혜온숙정유자순흠목찬천승성인황후 (孝恭宣惠溫肅定裕慈純欽穆贊天承聖仁皇后) |
[clearfix]
1. 개요
강희제의 후궁으로, 옹정제의 생모.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첫번째 상삼기 포의 출신 황후다. 선조는 해서여진 4부중 하다부 출신이다. 부친 위무는 자금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포의호군참령이고 친정은 오래된 명가라고 하나[1] 정황기 포의 출신으로 청대 기준으로는 나름 높은 신분이나 만주 팔기 명문가 출신이 많은 강희제의 후궁 중에서는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증조부가 전장에서 여러 공을 세운데다 조부 액삼이 1품 내대신이고 종숙인 다필은 내무부대신을 지냈고, 여동생 중 한 명은 뉴호록씨의 적통인 아령아의 적처가 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다. 내무부 포의[2] 출신이기 때문에 내무부 수녀로 입궁했다. 강희제의 총애를 받아 정황기 만주로 대기했고, 옹정제 즉위 후 일족 전체가 정황기 만주로 대기되었다.2. 상세
이름은 만주어로 술병을 뜻하는 말우. 강희 14년, 만15살 때 양비 위씨, 정비 만류합씨 등과 함께 내무부 수녀로 선발되었다.[3] 강희 17년에 아이신기오로 인전을 낳았다. 그 다음해에 귀격격에서 덕빈으로 봉해졌다.옹정제를 포함해 슬하에 3남 3녀가 있다. 장남인 옹정제는 효의인황후가 양육하였다. 셋째 아들인 황14자 인정(胤禎, 윤정)[4]과 경민황귀비 소생의 13황자 인샹은 덕비가 양육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인샹의 행장이나 옹정제의 상유에도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 외 둘째 아들인 황6자 윤조(胤祚)는 5살에 요절했고, 첫째 딸은 2달 만에 사망했으며, 셋째 딸은 11살에 요절했다. 둘째 딸 고륜온헌공주[5]는 퉁기야(佟佳) 가문의 순안안(舜安顔)과 혼인했는데 그는 효의인황후의 조카였다. 자식들 중에서 유독 막내아들인 인정을 편애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옹정제 즉위 전까지 인전과 인정 모두 덕비에게 잘한 기록은 있어도 갈등을 일으킨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1697년 초 즈음에 조금 아팠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가 1697년 2월 8일 화이라이(懷來) 현에서 태감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떠나올 때 덕비가 몸이 좀 안 좋던데… 이제는 병이 완전히 다 나았겠지?"라며 자상하게 안부를 물어보는 부분이 있다.
2.1. 옹정제와의 반목
옹정제가 황위에 오르자 우야씨는 '내 자식이 대통을 계승하다니 꿈꾸지도 못했던 일'이라며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더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태후의 관저인 영수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고 옹정제가 바친 황태후의 존호를 받길 거부한다.[6]우야씨가 옹정제에게 이렇게 냉담하게 반응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꼽힌다. 첫째는 옹정제가 즉위하자마자 유일한 동복형제이자 14황자 윤정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윤정은 귀경하라는 옹정제의 명을 받은 즉시 병권을 빼앗기고 강희제와 주고받은 서신을 모조리 압수당했다. 그리고 우야씨가 계속 황태후 책립을 거부하고 윤정이 반항적으로 굴자 격분한 옹정제는 윤정을 강희제의 능지기로 보내버리면서 모자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둘째는 우야씨는 옹정제가 합법적으로 대통을 계승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황족들과 대신들은 옹정제를 믿지 않았다. 강희 55년 창춘원에서 옹정제가 중병에 걸린 윤사를 집으로 옮긴 사건 이후로 그는 형제 팔아 아버지 환심 산 인간으로 낙인 찍혔고 의문스러운 즉위 과정 때문에 더욱 신용을 잃었다. 강희제의 다른 후궁들도[7] 출궁한 후 3년 동안 옹정제에게 냉담하게 대했다. 융과다에게 공식적으로 외삼촌이라는 칭호를 수여한 것도 부수적인 이유로 꼽힌다.[8]
결국 옹정제가 즉위한지 반년만에 사망했는데 죽을 때까지 황태후 존호를 받지 않았다.
비록 심한 갈등이 있었지만 옹정제는 자신의 친모를 그리워했다. 효공인황후를 그리워하며 시를 짓고 양심전 동불당에 강희제의 신위와 효공인황후의 신위를 같이 모셨지만, 자신의 양모라고 공언한 효의인황후에게는 이런 효행을 전혀 해주지 않았다.
우야씨의 여동생 중 한명은 알필륭의 적자인 아령아의 정실부인이 되었고 이 덕비의 여동생이 낳은 아령아의 딸은 옹정제의 측근이자 이복동생인 과의친왕 윤례의 적복진이 되었지만 정작 아령아는 조카인 옹정제, 사위인 윤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령아와 그의 아들이자 옹정제의 이종사촌인 아이송아는 처조카이자 사촌인 옹정제가 아니라 8황자 윤사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옹정제는 즉위 후 아령아가 윤사를 지지한 일을 거론하며 아령아의 묘에 '신하답지 않고 아우답지 않으며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아령아의 묘'라고 새겨놓았다. 아이송아를 비롯한 아령아의 아들들은도 참수당하거나 유배되었고 그 처자들은 신자고에 들어갔으나 건륭제 즉위 후에 풀려났다.
3. 미디어 믹스
[1]
옹정제의 주장이다. 효공인황후의 할아버지 오아 액삼은
병자호란 당시
의주성 일대에서
지천 최명길의 밀서를 전달하던 조선인 전령을 잡고
광교산 전투 당시
슈무루 양구리를 죽인 조선군 저격수를 잡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숭덕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는다.
광교산 전투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전황의 혼란 속에서 양고리를 저격한 저격수를 잡을 수 없었으므로 비슷한 사람을 잡아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2]
상삼기의 포의로 황실 직속 부서에서 일하는 계층, 대부분 궁녀가 여기 출신이다.
[3]
내무부 수녀들의 이름이 적힌 상소문이 발견되면서 이들의 이름이 밝혀졌다.(왕면삼의 <청대후비잡식>) 또한 만주어 기록에 의하면 옹정제가 양비를 두고 태후와 입궁 동기라며 친근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옹정제는 "네 형제들의 어머니를 잘 대우해라"는 황태후의 의지를 받들어 정빈 만류합씨는 12황자 윤도의 어머니고 태후의 입궁 동기이기에 정비로 높여주고 정황기 포의에서 만주 정황기로 대기한다고 명했다.
[4]
옹정제 즉위 후 允禵로 개명당한다.
[5]
강희제와 황태후가 가장 아꼈던 공주라고 한다. 다른 공주들은 거의 다 몽골로 시집보냈지만 온헌공주만은
만주족과 결혼해 가까이 살았다.
[6]
쉽게 말해 황태후 책립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7]
혜비, 의비, 영비, 정비, 성비
[8]
융과다를 사적으로 외삼촌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공식적으로 외삼촌이라고 부르는 건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