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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 청 후궁 | }}}}}}}}} |
<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강희제의 제2계후 효의인황후 | 孝懿仁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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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56년 | ||
사망 | 1689년 8월 24일 (향년 33세) | ||
청
북경
자금성 동육궁 승건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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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경릉(景陵) | ||
재위기간 | 청 격격 | ||
1676년 ~ 1677년 9월 18일 | |||
청 귀비 | |||
1677년 9월 18일 ~ 1682년 1월 28일 | |||
청 황귀비 | |||
1682년 1월 28일 ~ 1689년 8월 21일 | |||
청 황후 | |||
1689년 8월 21일 ~ 1689년 8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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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성씨 | 동가(佟佳) | |
부모 |
부친 승은공 동가 동국유 모친 혁사리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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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각혜황귀비 | ||
배우자 | 성조 강희제 | ||
자녀 | 1녀 | ||
관저 | 경인궁 | ||
봉작 | 격격(格格) → 귀비(貴妃) → 황귀비(皇貴妃) | ||
시호 |
효의온성단인헌목화각자혜봉천좌성인황후 (孝懿溫誠端仁憲穆和恪慈惠奉天佐聖仁皇后) |
[clearfix]
1. 개요
강희제의 세 번째 황후. 순치제의 후궁이자 강희제의 친모인 효강장황후의 조카로, 부군인 강희제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영시위내대신 승은공 동국유(領侍衛內大臣 承恩公 佟國維)이며, 여동생은 강희제의 후궁인 각혜황귀비이다.2. 생애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의 질녀로 강희제에겐 외사촌 누이가 된다. 본성(本姓)은 동씨로 한군기 출신이나 강희제의 즉위를 전후해 만주 성(姓)인 동가씨로 개성(改姓)한 고모 효강장황후와 같은 이유로 동가씨가 됐다.강희 15년에 입궁해서 격격이라고 불렸으나 특별히 비(妃)급으로 대접을 받았다. 강희 16년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서 정식으로 책봉받은 첫 번째 귀비였다. 강희 17년 효소인황후가 사망하자 강희 20년 황귀비(皇貴妃)로 진봉되었고 태황태후인 효장문황후의 명으로 혜비 납란씨, 영비 마가씨의 보조를 받으며 육궁을 주관했다.[1] 강희 22년 황녀를 낳았으나 생후 1개월 만에 요절하였다.
강희 17년(1677년) 영화궁의 서비 오아씨가 옹정제가 되는 윤진을 낳자 강희제는 윤진을 효의인황후에게 맡겨 양육하도록 했다.[2] 만주 기록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강희제의 황8자 윤사도 양육했다.[3][4] 그외에도 여러 명의 황자를 키웠는데 다른 황자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밝혀진 사항으로는 강희 26년에 4명, 강희 28년에 5명이다. 윤진과 윤사는 효의인황후가 서거한지 3년이 된 강희 31년에도 경인궁에 남아있었으며 가장 오랫동안 경인궁에 머무른 황자들이었다.[5]
강희 28년(1689년) 7월 중병으로 위급하자 특별히 황후로 진봉되었으며 이튿날 승건궁에서 사망했다.[6][7] 이에 시호를 "효의황후"로 했으며, 10월 경릉 동쪽에 있는 효동릉(孝東陵)에 장사하고 위패를 별전에 따로 모셔 효성인황후와 효소인황후보다 차등에 두었다.
옹정제는 즉위하며 효의인황후를 자신의 양모라고 공언하며 키운 정을 강조하고 융과다에게 외삼촌이라는 공식 직함을 수여했다. 그러나 동가씨 포섭이 순조롭게 되지 않자 효의인황후의 백부 동국강이 총에 맞아 전사한 것을 깎아내리고, 친모 효공인황후가 죽은 후 시를 짓고 양심전 동불당에 강희제의 신위와 효공인황후의 신위를 같이 모셨지만 효의인황후에게는 이런 효행을 전혀 해주지 않았다.
3. 자녀들
-
황8녀 (1683~1683)
유일한 딸이었으나 생후 1달 만에 요절.
[1]
동가씨가 황후 대리 황귀비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궁을 통솔할 수 있는 황귀비는 오직 섭육궁사황귀비뿐이며 동가씨는 일반황귀비였다.
[2]
청나라는 빈 이상의 후궁이나 황실 어른들이 황손을 양육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이들은 황손의 양모는 아니고 주 양육자이자 후견인에 가깝다.
효장태후의 시녀이자 강희제의 보모 역할을 한 쑤마라도 강희제의 황자를 양육한 바 있다.
[3]
윤사는 본래 혜비에게 양육되었다가 효의인황후에게 양육되어 경인궁의 작은아거로 불렸다.
[4]
이 탓인지 동국유, 악륜대, 순안안 등, 효의인황후의 친족들은 윤사의 황위 계승을 지지했다. 효의황후의 형제인 융과다만이 예외적으로 강희제의 지명으로 옹정제 윤진을 지지했으나 옹정제 즉위 이전까진 같은 파벌은 아니었다.
[5]
청 황궁에선 비슷한 또래의 어린 황자들을 그룹으로 짜서 연식이 있는 후비나 황실 어른의 궁에 모아놓고 같이 기르는 편이었다. 다른 궁에서 따로 자란 황자라고해도 분봉과 분가는 같은 그룹 황자들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6]
이전 기록에선 경인궁에서 거주했는데 병 때문에 승건궁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7]
책립 조서에서 衆子(황자들)을 양육했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