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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愛新覺羅 允禩 애신각라 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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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화석염친왕(和碩廉親王) |
별호 | 다라패륵(多羅貝勒) ⇒ 관작 삭제 ⇒ 다라패륵(多羅貝勒) ⇒ 화석염친왕(和碩廉親王) / 팔현왕(八賢王) |
출생 | 1681년 3월 29일 |
사망 | 1726년 10월 5일 (향년 45세) |
부친 | 청 성조 강희제 |
모친 | 양비 위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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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인스(胤禩).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의 서자이며, 제5대 황제 옹정제의 이복동생이기도 하다. 만주 정람기인이다. 강희제의 황9자 윤당과 함께 옹정제 즉위 후 가장 가혹하게 숙청당한 황자로 유명하다. 비록 추탈당하긴 했지만 염친왕(廉親王)에 봉해졌다.2. 생애
2.1. 초기 생애
강희 20년 음력 2월 10일에 서비 위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모가 자식을 직접 키우지 않는 청 황궁의 관습에 따라 혜비 나라씨 슬하에서 자랐다.[1] 그러다 당시 황귀비인 효의인황후의 궁에서 옹정제와 함께 양육된다.[2] 현재 연구에 따르면 두 사람은 같은 양육자 아래서 자랐고, 윤사의 생모인 양비 위씨와 옹정제의 생모 덕비 우아씨는 입궁 동기로 친분이 있어 어릴 적엔 친밀한 형제지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3]강희제가 황자들의 학습성과를 점검할 때 윤사가 다른 건 괜찮은데 서법이 엉망이라 하작을 스승으로 붙여주고 서법을 연습하게 했으나 악필은 교정되지 않았다.
강희제의 총애를 받은 황자여서 갈단 칸과의 전쟁 때 강희제를 따라 원정에 참여했다. 원정에 나선 황자들 중 가장 어렸다. 2차 준가르 원정에서도 황장자 윤제, 황3자 윤지와 함께 참여했고, 3차 원정에서도 똑같았다.[4]
안친왕 악락의 외손녀 곽락라씨와 혼인하며 17세의 나이로 패륵에 책봉된다. 이는 작위를 받은 황자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이후 유친왕 복전과 함께 광선고를 관리하고 동악묘 중건을 도맡았다. 광선고는 팔기 대출 업무 부서여서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는데, 강희제가 자신이 아끼는 친족인 두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맡긴 것이다. 이때 복전, 복전의 아들 보태, 패륵 소노[5], 정친왕 아이강아[6] 등의 황족들과 만한 대신들에게 성품이 소박하고 어질다는 평을 들으며 팔현왕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신민들로부터 불자, 팔불이라고 불렸다. 다만 황태자 윤잉과는 사이가 나빴는데 윤사의 유모가족과 윤잉의 측근 옹태 사이에 다툼이 있어서 시비가 붙었고 강희제가 윤잉을 편들었기 때문이었다.[7][8]
1차 분봉을 받은 황자들 중 3황자 윤지와 함께 가장 강희제의 신임을 받는 황자였다. 강희제는 두 황자에게 태자 윤잉의 외숙조부 색액도를 심문하는 기밀사항을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1차 폐위 때 윤잉의 파벌인 내무부 총관 능보를 처형한 뒤 윤사에게 내무부 총관 대리를 맡겼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윤사는 조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점점 키워나갈 수 있었다.
2.2. 윤잉의 첫 폐위 이후
윤잉을 구금했을 때 윤제가 아뢰었다. 윤잉은 행실이 추잡하고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관상가 장명덕이 일찍이 윤사는 귀해지리라 하였습니다. 이제 윤잉을 죽이려고 하니 부황께서 손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강희 47년 9월 25일
강희 47년 9월 25일
그러나 장명덕 사건 이후 윤사에 대한 강희제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강희제는 반태자당의 진짜 당수가 바로 윤사임을 깨달은 것이다.
강희제는 황자들을 건청궁으로 불러 모아 '이미 황태자 자리를 노리는 자는 나라의 도적이라고 경고했는데도 황태자 폐위 후 1황자 윤제가 윤사를 추천했다', '윤사가 간악하여 당파를 조성하고 윤잉을 해치려했다'고 윤사를 저격하며 그를 체포하도록 명했다.[9] 결국 윤사는 패륵 작위를 삭탈당했으나[10] 위세는 건재했기에 강희제는 윤사를 신자고 천한년(賤婦)의 혈통이라며 비방하고[11], 적복진 곽락라씨에 대해 없는 사실을 지어내면서까지 깎아내렸다.[12]
강희제가 이렇게 분노한 이유는 윤잉과 윤사의 권력 기반이 순치제의 측근 대신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안친왕 악락과 색니는 순치제의 최측근으로서 한인 등용 정책과 중앙집권 정책을 지지했고, 악락이 색니의 딸을 적복진으로 맞이하며 이들의 결속이 강화되었다. 비록 강희제는 이런 순치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효장문황후의 사랑을 받아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순치제의 한인 등용 정책을 계승했고, 색니의 손녀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인 적자 윤잉을 한군기[13] 출신인 석문병[14]의 딸과 혼인시키며 윤잉이 한군기와 한인 관료들의 지지를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윤잉은 태자비와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고, 온갖 비행을 저지르며 강희제를 실망시켰다. 반대로 윤사는 한군기인 및 한인 학자들과 교류가 많은 안친왕부의 도움을 받아 한군기인 및 강남의 한인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15] 설상가상으로 악락의 적자들이 외가인 혁사리 가문, 윤잉과 결별하고 윤사를 편들면서 강희제가 윤잉을 위해 짜놓은 판은 완전히 어그러졌다.[16]
11월, 강희제는 윤잉의 태자 복위를 위해 창춘원에 조정대신 삼십여명을 불러모아 황장자 윤제를 제외한 황자들 중에서 태자를 골라 추대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강희제의 숨은 의사를 따르지 않고 모두 윤사를 추대한다.[17]
이 당시 윤사는 9황자 윤당, 10황자 윤아, 14황자 윤정과 뭉치며 자신과 윤당의 소속기이자 처가가 소속된 정람기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정대신들[18]의 지지를 받으며 반태자당의 당수로 군림했다. 훗날 옹정제를 지지한 양황기의 부찰씨 가문과 융과다의 동가씨 가문도 처음엔 윤사를 황태자로 밀었을 정도였다.[19]
강희제는 경악과 분노를 토해내며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잉을 다시 복위시킨다.
강희 48년 11월 곽락라씨의 외삼촌 안군왕 마이혼의 상중에 마이혼의 동생 경희가 태자당 소속인 보군통령 조기야 토호치[20]의 회음을 고발하면서 태자 윤잉을 중심으로 한 병부와 형부의 모반 계획이 밝혀지고 강희제는 윤잉을 더는 봐줄 수가 없어 다시 폐하고 모반을 계획한 탁합제 등을 처형한 뒤 반태자당의 공로를 치하했다.[21]
그러나 윤사에 대한 강희제의 악감정은 여전하여 윤사의 녹봉을 빼앗고 질책했다. 윤사도 양비가 약을 끊고 치료를 거부하며 죽은 뒤 강희제에게 반감을 드러내며 부자간의 갈등은 깊어졌다.[22]
강희 53년 11월 윤사가 바친 매 두 마리가 바로 죽어버리자 강희제는 자신의 노쇠함을 조롱하는 의도라고 여기고 황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윤사는 신자고 천한 년(賤婦)의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마음이 음험하였다. 들으라! 관상가 장명덕의 말로 대신들을 따르게 하고 2아거를 모살하고자 하는 자(윤제와 장명덕)를 구하여 나라를 들썩이게 한 일은 모두 알고 있다. 2아거를 죽이려 한 자는 짐을 유념치 않은 것이다. 짐이 병에 걸렸을 때 대신들이 윤사를 보주(保奏)했고 짐은 윤잉을 책립하고 풀어줄 수밖에 없어 수년동안 번민했다. 윤사는 처음 뜻한 바를 이루고자 난신적자 등과 당을 결성하고 간사한 짓을 저질렀다. (...). 이미 악륜대, 아령아가 모두 자백했다. 지금부터 짐은 윤사와 부자의 정을 끊겠다. 짐은 훗날 개돼지 같은 아거들이 은정을 외면하고 병란을 일으켜 짐이 윤사에게 제위를 넘기도록 핍박할까 두렵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짐은 웃으며 죽으면 그만이다. 짐은 깊이 분노하며 아거들에게 특유(特諭)하노라. 짐의 자은(慈恩)을 새기고 짐의 뜻을 받들고 자신(子臣)의 도리를 지켜라. 그렇지 않는다면 짐이 임종했을 때 건청궁에 놓인 짐을 두고 너희들이 쟁탈을 벌일 것이다. 윤사는 황태자가 될 수 없다. 짐은 그의 당우들을 이처럼 골수에 사무치도록 증오한다. 2아거가 패역하여 인심을 여러 번 잃으면 윤사는 인심을 얻어왔다. 이자는 2아거보다 수백배 위험하도다.[23]
2년후 9월 윤사가 창춘원에서 장티푸스 또는 말라리아로 보이는 질병에 걸려 위독했을 때도 강희제는 윤진에게 명을 내려 윤사를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24] 3황자 윤지와 4황자 윤진 등 여러 명의 황자들이 의사의 진단서까지 붙여가며 윤사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보고해도 강희제는 냉담하게 반응했고 11월에 윤사를 한 번 찾아갔을 때 윤지와 윤진이 아직 완쾌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강희제는 이미 병이 다 나았다고 우겨서 윤지와 윤진은 자기들이 잘못 봐서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사가 회복된 뒤에 강희제는 그에게 녹봉을 예전과 같이 지급하라고 명하며 윤사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이후 윤사를 정무에 참여시키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어느정도 화해를 했다. 강희 56년에는 윤사의 아들 홍왕에게 내정에서 기거하라는 명을 내린다.[25]
같은 해 강희제가 총애하는 한인관료 이광지가 황자들 중 윤사가 가장 현명하다고 추천하였다. 이전과 달리 강희제는 반응하지 않았다.
강희 57년 황14자 윤정이 서북면에서 전공을 세우며 차기황위후보로 급부상한다. 윤사는 황위를 단념하고 윤당 및 여러 대신들과 함께 윤정을 지지했다.
2.3. 옹정제 즉위 후
1722년에 옹정제가 즉위한 후에도 윤사에 대한 대신들의 지지는 굳건했기 때문에, 옹정제는 윤사를 염친왕으로 봉하고 공부상서직을 맡기며 황13자 윤상, 마제, 융과다와 함께 총리사무대신으로 임명했다.윤사는 염친왕으로 봉해졌을 때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바 있다. 처가 식구들이 친왕 책봉을 축하했으나 윤사는 "황제가 오늘 은혜를 베풀었지만 내일 처형하려할지 누가 알겠는가? 눈앞의 은혜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했고 복진 곽락라씨는 "어찌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겠는가? 이 머리를 보존할 수 없을텐데."라고 말했다.[26][27]
이내 옹정제는 윤사를 윤당, 윤아, 윤정과 만나지 못하도록 모두 외지로 보내며[28] 황8자당을 와해시켰고 윤사의 처외조부인 안군왕부를 해체시키고[29] 그 속하에 있던 기분좌령을 압수하여 이친왕 윤상에게 넘겨주었다.
이후로 옹정제는 수틀리면 윤사가 총애하는 아내의 친족 때문에 골육을 원수처럼 대한다고 저격하고, 자기가 윤당, 윤정과 떨어뜨려서 원망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며 끊임없이 추궁했다. 또한 대신들이 윤사에게 미혹당해 황제인 자신을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분노를 퍼부었다.[30] 그러나 윤사는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 옹정제에게 반항한 기록은 없다. 오히려 옹정제에게 불복하는 황14자 윤제를 진정시키고 보호했다.[31] 다만 옹정제가 사적인 자리에서 윤사와 다퉜음을 암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32]
옹정 2년부터 윤사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는데, 유친왕 보태는 작위를 빼앗겼고[33], 패륵 소노는 종적을 박탈당했고[34], 아이송아와 악륜대는 성경으로 추방당했다. 옹정제는 모두 죄를 달갑게 받아들이고 윤사를 원망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같은 해 연갱요 숙청의 계기가 된 공부낭중 악주 사건이 일어났다. 공부낭중 악주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은 수천 냥의 손해가 나자 공부상서인 윤사는 악주를 해임하고, 대신 자신이 은 1700냥을 납부하고 악주에게 은 1600냥을 빌려 완납했다. 이후 악주는 연갱요에게 2만냥을 주어 자신을 포정사로 삼아달라고 청탁했고, 연갱요는 옹정제에게 이 일을 사실대로 고했다. 그러나 옹정제는 윤사도 계속 데리고 있지 못해 해임한 사람이 연갱요에게 전향한 것에 의문을 품고 숙청할 마음을 굳힌다.
마침내 연갱요가 숙청된 직후 옹정제는 윤사를 숙청하기로 한다. 옹정 4년 정월 5일, 옹정제는 양심전 서난각에 왕공대신들을 소환하여 윤사의 죄를 물었다. 황위를 탐했다, 선황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군중을 미혹했다 등등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윤사는 말없이 있다가 옹정제가 강희제의 어비를 불태운 일에 대해 말을 번복했다고 하자 갑자기 대신들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면 일가족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했다.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옹정제가 또 신의를 저버리자 이에 질려버려서 작정하고 이런 맹세를 한 것이다. 매 두 마리가 죽은 일로 윤사가 강희제의 질타를 받고 병으로 누워있을 때 그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집안의 서신을 불태우게 했다. 그런데 가족의 실수로 강희 47년 9월 윤사가 옹정제와 함께 베이징을 지키고 있을 때 강희제와 주고받은 주비까지 태워버렸다. 옹정제가 이 일을 윤사에게 묻자 그는 사실대로 답해주었다. 옹정제가 즉위한 직후, 종인부에서 왜 주비를 불태웠는지 윤사에게 묻자 그는 병으로 혼미한 중에 실수로 태웠다고 고했다. 이렇게 서로 묻어두기로 암묵의 합의가 됐는데 3년 후 옹정제가 이 일을 들먹이자 결국 폭발한 윤사가 옹정제를 도발한 것이다. 옹정제는 이전에 윤사가 윤당과 왕래하면 일가족이 죽는다고 맹세하자 그에게 "일가족의 범위는 넓다. 짐을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타박했는데도 왕공대신들 앞에서 다시 이런 맹세를 하다니 저주하는 게 틀림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35]
이후 윤사는 황실 법도로 징치되어 작위를 추탈당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윤사의 적복진 곽락라씨도 수모를 피하지 못했는데 옹정제는 곽락라씨의 위세와 악랄함 때문에 윤사가 첩을 적게 들였고 그로 인해 대가 끊길 뻔했다고 주장하며 강제로 이혼시켰다. 윤사는 강제 이혼으로 분노하며 병을 얻어 왕부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것이 또 죄목으로 지적되었다. 옹정제는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윤사가 아내의 일로 자신을 원망해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며 그 아내를 반드시 죽이고 그에게 중죄를 묻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36]
3월 12일, 윤사는 대신들이 전달한 옹정제의 명으로 인해 자신의 이름을 만주어 아키나(阿其那)로 아들인 홍왕은 '보살보'로[37] 개명하는 수모를 겪는다.[38] 윤사는 종인부에 유폐된 뒤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간수에게 "나는 시신이 온전하길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자살하지 않고 반드시 옹정제에게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을 씌우겠다는 저주에 가까운 발언이어서 옹정제는 이를 죄목으로 추가했다.
5월 17일, 백성들 사이에서 '팔불(윤사)이 갇혀 군민이 새 주인을 미워한다', '옹정이 즉위한 이래로 가뭄과 기근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옹정제는 "이런 흉악하고 간사한 부처는 금시초문이다. 짐은 즉위 이래로 백성을 사랑하며 군민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어찌 은혜를 갚지 않고 원한을 품는가?"라고 분개하며 소문을 퍼트린 자를 처형했다.
6월 3일, 옹정제는 윤사의 40대죄를 공표한다. 당을 결성한 죄, 효자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 양비의 장례를 요란스럽게 치른 죄, 공처가라서 아내가 경망스럽게 웃어도 따지지 않고 하작의 딸을 양육한 죄, 감히 일가족을 걸고 맹세한 죄, 친왕으로 책봉되어도 은혜에 감사하지 않은 죄 등등이다.
이후 종인부에 유폐되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다가, 윤당은 1726년 8월 27일에 훙서하였고 윤사는 그 소식을 듣고 건강이 악화되어 9월 10일에 구토병으로 훙서하였다.[39]
팔기 공동통치의 실질적인 종말을 알리는 인물이다.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공동통치 전통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윤사의 몰락을 기점으로 팔기의 추대로 차기 계승자를 선출하는 전통은 완전히 단절됐고 황권과 신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 윤사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제각각이지만 사교성이 매우 좋고 인망이 두터우나 그로 인해 강희제와 옹정제의 경계를 사서 몰락했다는 점에선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옹정제는 즉위 후에도 자신의 친동생 윤정과 대신들이 황제인 자신이 아니라 윤사를 지지해서 무척 분개했다.[40]
3. 복권
건륭제는 즉위한 직후 윤사와 윤당을 복권시키고자 하였다. 옹정제의 숙청으로 수많은 황족들과 만주 명문가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황족들과 명문가들의 갈등과 불만이 폭주했고 건륭제는참고로 윤사의 증손자인 면삼은 함풍제 때 황실 종친으로 대접받으며 이부상서, 태자소보 등을 지냈다.
4. 가족 관계
4.1.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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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복진 곽락라씨(郭絡羅氏)[44]: 화석액부 명상(明尙)과 화석격격(和碩格格)의 딸 / 안화친왕 악락(岳樂 1625~1689)[45]의 외손녀
정람기 최고명문가 출신이다. 친가인 곽락라 가문은 누르하치의 거병부터 함께 한 공신 양슈와 누르하치의 여동생 아지가의 직계자손이며[46], 외가인 안친왕부는 청 황실인 애신각라씨의 방계로 어머니 화석격격은 안친왕의 측복진 소생의 딸이다. 부모를 일찍 잃은 후 외조부인 안친왕 악락이 왕부로 데려와 직접 양육했고, 안친왕이 죽은 후에는 안친왕의 적복진 혁사리씨와 혁사리씨 소생인 외삼촌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윤사와 곽락라씨는 안친왕부에서 혼례를 올렸는데 이는 강희제의 다른 황자들조차 허락받지 못한 특혜였다. 곽락라 가문과 안친왕부의 지원으로 윤사는 처가가 속한 정람기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시아버지 강희제도 곽락라씨의 위세를 경계해서 윤사를 곽락라씨가 쥐고 살아서 윤사에게 자식이 얼마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시아주버님인 옹정제도 곽락라씨를 꺼려서 자신의 정실 효경헌황후를 보내, 곽락라씨의 방자한 위세를 달래고자 했다고 말하며 곽락라씨를 윤사와 강제로 이혼시키고 핍박했다. 그만큼 위상이 대단했다는 의미다. 결국 남편 윤사와 황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시아주버님인 옹정제의 즉위 후 보복을 직격으로 맞아 곽락라씨 본인도 폐서인이 되어 죽고 외가인 안친왕부도 몰락에 가까운 큰 타격을 입었다.[47]
- 측복진 모씨(某氏 ?~?): 성씨 미상 / 옹정 연간에 졸함
- 서복진 왕씨(王氏)
- 첩 장씨(張氏): 장지벽(張之碧)의 딸
- 첩 모씨(毛氏): 모이격(毛二格)의 딸
4.2.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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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 홍왕(弘旺 1708~1762): 첩 장씨 生 / 보살보(菩薩保)로 개명됨
아버지 윤사가 구금된 후 생모 장씨와 자신의 복진과 함께 열하로 배향갔다. 열하에서도 계속 종을 부리고 열하 총관이 편의를 봐주어 그럭저럭 잘 지냈으나 옹정 6년 번하인(藩下人) 진경이 행군의 성문 앞에서도 관례를 어기고 말에서 내리지 않자 발끈하여 진경을 폭행한 일이 문제가 되어 흑룡강으로 유배를 갔고 구금되었다. 그곳에서도 부친에게 물려받은 친화력으로 수비병들과 의형제를 맺고 자유롭게 지냈다. 옹정 8년 홍왕이 경성으로 돌아와 철쇄를 단 채 수감당했을 때 이 사실이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다. 사촌인 건륭제가 즉위하자 윤사와 윤당의 자식들을 석방시키고 황실 족보에 복귀시키면서 본명을 되찾고 노비와 집을 하사받았다. <황청통지강요(皇淸通志綱要)>를 저술하였는데 청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 1녀 군군(郡君 1708~1775): 첩 모씨 生 / 손오복(孫五福)[48]에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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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홍시(弘時, 1704~ 1727)
옹정제의 황3자. 실제 혈연상으로는 윤사의 조카다. 옹정제가 자신의 아들 홍시가 윤사와 가깝게 지내고 품행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절연하고 윤사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황실 족보에서도 제명시켰다.[49] 결국 1년 후 사망한다. 이복동생 건륭제 즉위 후 숙부인 강희제의 황14자 윤정과 함께 신원이 복원되었다.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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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경심 배우 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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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회 배우 하지용
[1]
혜비는 윤사 외에도 많은 황손들을 키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린 황자들을 네다섯살 정도까지 혜비의 연희궁에서 키웠던 걸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혜비는 사전적인 의미의 양모라기 보다는 어린이집 교사(...)에 가깝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계속 좋았는지 강희제가 윤사의 일로 화가 치민 나머지 밖에서 기다리던 신하들이 다 들을 정도로 혜비와 말다툼을 벌인 기록이 있다.
[2]
한문 기록에서는 옹정제만이 효의인황후에게 양육된 것으로 나오지만 효의인황후의 황후 책례문에 '황자들'을 양육했다고 나오고 내무부 기록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둘은 모두 효의인황후에게 양육되었다.
[3]
두 사람의 왕부도 바로 옆에 있고[50] 별장도 같이 지어서 성인이 된 후로도 꽤 오랫동안 우애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들이 옹정제가 원래 윤사와 친했다는 사료를 계속 발굴하고 있다.
[4]
하지만 윤지는 출병 직전 병에 걸려서 따라가지 못했다.
[5]
아이신기오로 추연의 자손이다.
[6]
지르갈랑의 자손이다. 옹정 4년 작위를 빼앗기고 15남이 장친왕이 되었다.
[7]
윤사는 이에 불만을 품어 옹태를 폭행하고 유모의 남편을
경민황귀비의 딸인 옹우특공주(화석온각공주)에게 보내 피신시켰다.
[8]
훗날 강희제는 자신이 결코 윤잉을 편애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윤사를 탓했다.
[9]
이때 14황자 윤정이 8형이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없다며 8형을 지키고 싶다고 청하자 열이 뻗친 강희제가 칼을 빼들어 윤정을 베려고 하고 황자들이 뜯어말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10]
하지만 윤잉을 해치려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한달만에 작위가 복구됐다.
[11]
양비 위씨가 가문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내무부 관령 출신으로 신분이 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희제의 이 발언 때문에 신자고 노비라는 인식이 박혔다.
[12]
강희 47년 10월 강희제는 악락이 보정대신들에게 아부해서 친왕 자리를 얻었고, 곽락라씨의 질투 때문에 윤사가 자식이 없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악락은 순치제의 신임을 받아 친왕으로 봉해졌고, 강희 47년 정월과 5월에 윤사의 두 자녀가 태어냈다.
[13]
한군기와 민인으로 뷴류되는 한족은 엄연히 다르며 이들은 기인으로서 만주 기인들처럼 만주의 풍습을 따르며 만주 기인들과 혼인했다. 그러나 한족 풍습에 비교적 익숙했기에 한인 관료들과의 소통책 역할을 하기도 했다.
[14]
한군 정백기인 석정주의 자손으로 본래 과이가씨였다.
[15]
윤사는 곽락라씨의 의견을 따라 청초의 유명한 학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하작의 딸을 양육한 바있다.
[16]
악락의 계승자인 마이혼의 계복진이 동국강의 딸이어서 혁사리 가문과 윤잉보다 동가씨와 윤사와 더 긴밀해진 탓이기도 하다.
[17]
이 때문에 윤사는 공추(공동 추대)태자(公推太子)라는 별명이 있다.
[18]
동국유, 동국강(동국유의 형)의 아들 악륜대, 뉴호록 아령아, 부찰 마제, 납란 규서, 동악 칠십, 소노, 이광지, 왕홍서 등등
[19]
동가씨에선 동국유의 아들 융과다 정도만 옹정제를 지지했다. 부찰 마제는 강희제에게 구타당하면서도 강희제와 기싸움을 벌였으나 복직한 뒤에 조용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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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악락 속하에 있던 하오기 포의였다. 악락의 속인들 상당수가 태자당에 속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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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로 조정에서 황태자당은 거의 전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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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 53년 강희제는 2차 태자 폐위 직전에 윤사가 "제가 지금 어떻게 걷겠습니까? 병으로 누워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며 감히 패륵 주제에 자신을 떠봤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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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이 발언은 훗날 옹정제가 윤사를 벌할 때 인용된다. 그러나 이 기사에는 오류가 있는데 윤사가 양비의 2주년 제사를 하는 중이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3주년이었다. 이 사건이 실제로 있던 사건인 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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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옹정제는 윤사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희제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동의를 구해서 황9자 윤당의 분노어린 질타를 받았다. 이들은 이전까지 친한 형제였지만 윤잉의 1차 폐위 이후로 서서히 멀어지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이가 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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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황자들의 후계자가 될 손자들을 궁에 데려와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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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부가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이유는 바로 옆집 이웃이었던
옹정제의 뒷끝 하나는 장난 아닌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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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옹정은 염친왕부와 그 인척들을 조사하다 이 부부가 한 말을 알게 된 뒤 격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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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는 윤사에게 윤당과 만나면 일가족이 죽을 것이라는 맹세를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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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락의 자손들은 황족 신분은 유지했으나 성경으로 쫓겨났다. 그러다 건륭제 시대에 보국공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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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그 능력을 인정해서 옹정 3년 재능과 절조는 모든 신하들보다 뛰어나고 음험함에 있어서도 비할 데가 없다며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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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를 경성으로 불러달라고 간청하고 윤제가 강희제의 영전에서 옹정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자 윤사가 윤제를 달래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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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각미록에서 윤당과 윤제를 쫓아낸 뒤 윤사가 마음을 바꾼다면 모든 이들이 개과천선할 것이라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빌다시피했는데도 윤사는 굽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윤사가 자신을 지지하면 아무도 즉위 과정을 문제 삼지 않고 승복할텐데도 끝까지 그러지 않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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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는 자기가 산학을 가르쳐줬는데 왜 윤사를 편드냐고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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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소노 일가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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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는 당혹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친왕 윤지가 윤사에게 미리 관련 정보를 유출했다고 의심해서 윤지를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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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상으로는 처형당했다는 기록이 없다. 옹정 4년 2월 7일, 옹정제가 윤사의 처에게 따로 교지를 내리겠다고 한 이후로 언급이 뚝 끊긴다. 윤사와 윤당이 죽고 나서 그 가족들을 처분할 때도 서스허의 처(윤당의 복진)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는 언급은 있으나 곽락라씨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그녀를 처형을 하려고 했는데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살았어도 좋은 취급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영헌록>에 따르면 곽락라씨는 옹정제의 명으로 자결했고
사후 시신의 뼈까지 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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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자비'라는 뜻으로 보살같은 황제인 옹정제가 자비를 베풀어, 자신의 아들만은 살려주기를 바라는 윤사의 뜻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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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나의 뜻에 대해선 현재에도 해석이 분분하다. 개새끼라는 해석이 많지만 개는 만주어로 인다훈이고, 만주족은 개를 매우 사랑하고 신성시하는 종족이어서 멸칭의 의미로 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마 위의 물고기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윤사가 자포자기한 심정을 드러내고자 바짝 말라가다라는 의미의 아캬남비(akiyanambi)라는 단어에서 따온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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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 독살설이 떠돌았고 현재도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지속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쇠약해진 정황이 뚜렷하다. 양비의 장례를 치른지 몇달이 지나도 남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걸을 수 없었던 적이 있고, 매 사건 직후 급병에 걸리고 일시적인 대인 기피증이 생겼고, 중병으로 앓아눕고 난 후에도 발에 종기가 나서 고생했다. 옹정제 즉위 이후엔 야근과 압박에 시달려 각혈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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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각미록에서도 아키나가 형제들과 대신들을 홀렸는데 자신은 현명해서 넘어가지 않았다느니,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아키나가 뉘우치면 자연스럽게 해산됐을 것이라느니 하며 윤사의 인망에 대한 질시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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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가 대의각미록을 출판하며 이런 여론을 잠재우려 했으나 역효과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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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상황을 묘사한 파르냉 신부의 서신에 따르면 황14자 윤제를 유폐에서 풀어주자 백성들이 환호하며 윤제를 맞이하고 무릎을 꿇고 절하며 새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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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는 이들이 황위를 탐하기는 했으나 명백하게 반역을 꾀한 적은 없고, 선제께서도 말년에 이들을 벌한 것을 후회하셨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당연하지만 후자는 전조의 과오를 바로 잡을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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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드
보보경심의 등장인물인
곽락라 명혜의 실제 모티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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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
누르하치의 7남 화석요여민친왕 아파태(饒餘敏郡王 阿巴泰)의 4남으로 누르하치의 손자. 사후인 강희 39년 안군왕으로 강등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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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슈의 아들 다르한은 누르하치의 차녀와 혼인했는데, 그들이 적복진 곽락라씨의 조상이다. 그외에도 여러 명의 종실녀가 곽락라 가문과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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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친왕부는 작호가 보국공으로 깎였으나 자손은 계속 이어졌다. 친정인 곽락라씨는 몰락하지 않았고 윤사가 몰락한 직후인 옹정 5년에 자신들의 조상인 아지가를 공주로 추봉해달라고 주청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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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9황녀 화석각정공주와 화석부마 손승운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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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등의 한문 기록에서는 품행 문제로 나오고 윤사를 비호하다 옹정제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아 이미 황실족보에서 제명된 윤사의 양자가 되어 연좌죄로 황실에서 제명되었다는 사실은 원본 기록물에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