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8 20:56:51

가경제


파일:200px-Imperial_standard_of_the_Qing_Lord.svg.png
청 황제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제1대 제2대 제3대
태조 천명제 태종 숭덕제 세조 순치제
제4대 제5대 제6대
성조 강희제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
제7대 제8대 제9대
인종 가경제 선종 도광제 문종 함풍제
제10대 제11대 제12대
목종 동치제 덕종 광서제 공종 선통제
추존
충의제 · 시조 · 조조 원황제 · 순황제 · 흥황제 · 정황제 · 직황제 · 경조 익황제 · 현조 성황제 · - 성종 의황제-
관련 직위: 몽골 제국 대칸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몽골 대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5px"
제1대 임시 제2대 제3대
칭기즈 칸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툴루이 오고타이 칸
ᠥᠭᠡᠳᠡᠶ ᠬᠠᠭᠠᠨ
귀위크 칸
ᠭᠦᠶᠦᠭ ᠬᠠᠭᠠᠨ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몽케 칸
ᠮᠥᠩᠬᠡ ᠬᠠᠭᠠᠨ
쿠빌라이 칸
ᠬᠤᠪᠢᠯᠠᠶ ᠬᠠᠭᠠᠨ
ᠥᠯᠵᠡᠶᠢᠲᠦ ᠲᠡᠮᠦᠷ ᠬᠠᠭᠠ ᠬᠠᠶᠢᠰᠠᠨ ᠬᠥᠯᠥᠭ ᠬᠠᠭᠠᠨ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아유르바르바다 칸
ᠠᠶᠤᠷᠪᠠᠷᠪᠠᠳᠠ ᠬᠠᠭᠠ
ᠰᠢᠳᠠᠪᠠᠯᠠ ᠬᠠᠭᠠ ᠶᠢᠰᠦᠨᠲᠡᠮᠦᠷ ᠬᠠᠭᠠᠨ ᠠᠰᠢᠦᠬᠡᠪᠡ ᠬᠠᠭᠠᠨ
제12대 제13대 복위 제14대
자야아투 칸 ᠬᠦᠰᠡᠯᠡᠨ ᠬᠠᠭᠠᠨ 자야아투 칸 린칠반 칸
제15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ᠲᠣᠭᠣᠭᠠᠨᠲᠡᠮᠦᠷ ᠬᠠᠭᠠᠨ ᠠᠶᠤᠰᠢᠷᠢᠳᠠᠷ ᠬᠠᠭᠠᠨ ᠲᠡᠭᠦᠰᠲᠡᠮᠦᠷ ᠤᠰᠬᠠᠯ ᠬᠠᠭᠠᠨ 조리그투 칸
제19대 제20대 제21대 제22대
엥케 칸 니굴레수크치 칸 토코칸 칸 오루크테무르 칸
제23대 제24대 제25대 제26대
올제이테무르 칸 델베크 칸 에세쿠 칸 아다이 칸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타이순 칸 아크바르진 칸 에센 타이시 우케크트 칸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몰론 칸 만두울 칸 다얀 칸 바르스볼루드 칸
제35대 제36대 제37대 제38대
알라그 칸 구덴 칸 자사크트 칸 세첸 칸
제39대 제40대 제41대 제42대
후투그투 칸 에제이 칸 아군다 우루시예그치 나이람다고 복다 칸
Эеэр засагч хаан
제43대 제44대 제45대 제46대
ᠡᠩᠬᠡ ᠠᠮᠦᠭᠤᠯᠠᠩ ᠬᠠᠭᠠᠨ
Энх амгалан хаан
나이랄투 툽 칸 텡그린 테트국치 칸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투르 게렐트 칸 투기멜 엘베그트 칸 부린 자사그치 칸 바다르굴트 투르 칸
제51대 제52대
헤우트 요스 칸 복드 칸
청나라 황제가 대칸을 겸임
원 황제 · 몽강국 주석 · 몽골 정부 수반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E6%B8%85_%E4%BD%9A%E5%90%8D_%E3%80%8A%E6%B8%85%E4%BB%81%E5%AE%97%E5%98%89%E5%BA%86%E7%9A%87%E5%B8%9D%E6%9C%9D%E6%9C%8D%E5%83%8F%E3%80%8B.jpg
청나라 7대 황제
묘호 인종(仁宗)
시호 만주식: 숭옌 후왕디(ᠰᡠᠩᡤᡳᠶᡝᠨ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한호 사이충아 펑션 한(ᠰᠠᡳᠴᡠᠩᡤᠠ ᡶᡝᠩᡧᡝᠨ ᡥᠠᠨ᠌)
칸호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ᠰᠠᠶᠢᠰᠢᠶᠠᠯᠲᠤ ᠢᠷᠦᠭᠡᠯᠲᠦ ᠬᠠᠭᠠᠨ)
연호 만주어: 사이충아 펑션
한자: 가경(嘉慶)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용얀(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ᠶᠣᠩ ᠶᠠᠨ)
중국어 아이신줴뤄 용옌(愛新覺羅 顒琰)[1]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옹염
생몰 음력 1760년 11월 13일 ~ 1820년 9월 2일 (61세)
재위기간 음력 1796년 2월 10일 ~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1. 개요2. 즉위 전3. 재위 기간
3.1. 강건성세 그 이후3.2. 군도: 민란의 시대3.3. 역모: 반란의 시대
4. 각종 매체에서5. 기타

1. 개요

1795년 선제인 건륭제의 퇴위로 즉위하여 1820년까지 약 25년간 청나라를 통치한 황제이며 건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이고, 건륭제가 늦은 나이에 얻게 된 아들이라 큰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대단히 도덕적이고 원리를 중시하는 군주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강했으며 신하들의 간언 역시 주의깊게 들었다. 예컨대 당시 관료로 종사하던 홍량길이 가경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간언하자 우선 그를 내쫓은 후 다시 들여와 크게 중용하곤 하였다. 가경제는 인(仁)의 군주를 자처하였으며 이후 전개되는 백련교의 난과 아편의 확산 역시 최선을 다해 막으려 힘썼다. 다만 옹정제와 같은 무시무시한 워커 홀릭도 아니었으며 건륭제와 같이 시대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노력은 중국 전 지역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가경제의 전 시대인 강옹건성세가 지나치게 찬란했기 때문에 그에 묻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도광 이후의 비중없는 암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군주라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치세에 일어난 큰 사건들은 어느 정도 수습하는 모습도 보이고...

2. 즉위 전

건륭제의 열다섯번째 아들로서, 생모는 영귀비 위가(한군팔기 한족이지만 개국에 협조해서 만주인대접을 받음~가 가 한군팔기라는 증거)씨(후에 효의순황후로 추존)이다.

그가 건륭제의 후계자로 낙점되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건륭제가 처음으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차남(적장자) 단혜태자 영련(永璉)이었다. 영련은 효현황후와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태자밀건법에 의해 후계자로 정해졌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이에 건륭제는 슬퍼하면서 대신들을 모아놓고 후계자 밀지를 공개한 후에 태자로 추봉하였다. 건륭제가 두번째로 후계자로 낙점한 아들은 7남 영종(永琮)이었다. 영종 역시 효현황후의 아들이었으나 일찍 죽었고 건륭제는 영종을 후계자로 낙점했었음을 공표한 후에 철친왕(哲親王)으로 추봉하였다. 이후에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하기 전까지 후계자를 누구로 했느냐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영종이 사망한 시점이 1747년이고, 후일의 가경제가 되는 영염이 태어난 시점이 1760년이다. 영염이 태어나자마자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할지라도 13년의 후계자 공백이 남는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했을 때, 장년으로 접어든 건륭제가 이 기간 동안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보인다.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1748년 효현황후가 사망했을 때, 건륭제는 서장자였던 영황(永璜)과 3남 영장(永璋)에게 국상 중에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으며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물론 영황과 영장 역시 건륭제보다 일찍 죽었다.) 4남인 영성(永珹)과 6남 영용(永瑢)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내어져서 후계자 대열에서 탈락했음을 알 수 있다. 1748년 당시 7남 이하는 어리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5남 영기(永琪)가 이 기간 동안 잠정적인 후계자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건륭제의 아들 중 최초로 화석친왕의 작위를 얻은 점과 영기의 생존기간 동안은 그가 건륭제의 아들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기 때문이다. 건륭제 역시 옹정제 재위기간에는 형제 중에 유일한 화석친왕이었고, 도광제 역시 가경제 재위시에 형제 중에서는 유일한 화석친왕이었다. 대체적으로 후계자에 근접해 있는 아들들이 친왕의 작위를 얻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료에서 보이는 건륭제의 영기에 대한 총애와 영기의 능력(특히 만주어 구사 능력과 무예 등) 등은 가경제가 후계자로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영기가 건륭제의 후계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5남 영친왕 영기(榮親王 永琪) 또한 1766년 사망했고, 이 해에 계황후 휘발나라씨도 건륭제의 총애를 잃어 폐위되었다. 계황후의 아들이었던 12남 영기(永璂)는 황후 출신의 적자로서 후계자에 선정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모친의 폐위로 입지가 불안하게 되었으며 건륭제보다 먼저 1776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계황후 대신
새황후를 두지않고 총애하는 영염의 생모인 영귀비 위씨를 황귀비에 책봉해 후궁을 다스리게 하는데 황후에 올리고 싶어도 한족출신(한군팔기)인게 문제여서 황귀비에 봉하고 이때부터 영귀비 위가씨 소생을 후계자로 생각했을것이다.

1795년 당시의 건륭제의 살아있는 아들들은 8남 영선(永璇), 11남 영성(永瑆), 15남 영염(永琰/가경제), 17남 영린(永璘) 등 4명 뿐이었다. 이 중 친왕에 책봉된 아들은 11남 영성(성친왕)과 15남 영염(가친왕)이었다.(1789년에 동시에 화석친왕에 책봉). 건륭제는 영성과 영염을 정무에 참여시켰고, 영선은 일처리를 못하고,영린은 여자를 밝히고,영성이 무예를 싫어하고 문약하고 결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건륭제와 대신들의 신망은 영염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마침내 1795년 9월, 건륭제는 영염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듬해 제위를 물려주었다.

3. 재위 기간

3.1. 강건성세 그 이후

건륭제 치세 후기부터 드리운 재정 파탄과 권신의 부정 축재로 인한 부패와 관료 사회의 타락이라는 재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좋은 예로 1799년 상황 건륭제가 사망하자 상황이 총애한 만악의 근원 니오후루 허션(鈕祜祿 和珅, 뉴호록 화신)을 체포하여 자결하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당시 허션이 축재한 재산은 청나라의 20년치 세금과 맞먹었다고 한다. 건륭제 항목에서도 다루었지만 허션의 이러한 부정 축재는 만주 - 몽골 귀족, 중앙과 지방 관료, 향신층의 축재와 사치를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와 청나라의 멸망의 전주곡이 되었다. 그런데 가경제 본인은 그 몰수한 허션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내탕금[2]에 넣어 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허션이 죽으니 가경이 배불리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허션 하나 잡았다고 달라진건 크게 없었다. 엄청난 부패는 당연히 농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강압적 착취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관중에서는 백만이 넘는 농민들이 수탈을 피해 도망쳤다. 하북성(河北省)에서도 대량의 농민들이 고향을 이탈해 내몽골이나, 한족에게는 금지(禁地)였던 만주로 도망쳐 정착했다.

3.2. 군도: 민란의 시대

엄청난 세금에 들볶인 농민들은 마침내 농민 봉기로 대응하기 시작했는데, 1796년 폭발한 백련교(白蓮敎)의 난[3]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 1805년까지 약 10년이나 계속되어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백은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썼고, 관중과 호광(湖廣) 일대의 농지와 향촌 질서가 일거에 붕괴하여 내륙 지방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농민 반란 진압에 10년이나 애를 먹으면서 청 정부의 군사적 무능과 민심의 이반이 명확해졌으며, 막대한 전비(戰費)는 19세기 내내 청나라를 괴롭힌 재정 파탄의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간신히 진압된 백련교의 반란은 1813년 이른바 '천리교(天理敎)'라는 이름을 걸고 다시 폭발했는데, 이 반란 때 천리교도들은 고작 200여 명으로 자금성을 습격하는 흠좀무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미숙한 전략이라 쓰고 똥멍청이 짓이라 읽는다. 자금성이 무슨 행궁이나 별장도 아니고 엄연한 정궁인데...으로 청군이 그나마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4]

3.3. 역모: 반란의 시대

한편 한족 농민의 반란 외에도 가경제의 치세에는 소수 민족의 반란도 빈번하였다. 이미 1726년 ~ 1729년, 1746년 ~ 1749년, 1758년 ~ 1759년, 1781년 ~ 1784년에 잇따라 폭발한 바 있는 이슬람교도와 사천(四川) 일대의 소수 민족 봉기는 점점 격화되어 1795년 ~ 1797년의 묘족 반란과 1833년의 2차 묘족 반란으로 가시화되었고, 1807년에는 티베트족의 봉기가 터지기도 했다. 이것 또한 변경 지대에서도 청나라의 통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반증이었다.

이처럼 가경제 시기에는 청나라에 대항한 민족 - 민중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 사회 혼란이 커지고 민심이 동요했으며, 거듭되는 아편의 밀수로 인해 재정 불안이 시작되고, 부패한 관료와 귀족층의 무능과 타락으로 제국의 붕괴가 실질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가 죽은 후 도광제의 대에 이르면 아편전쟁 등으로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다.

4. 각종 매체에서

테메레르 시리즈에선 전 세계에 용이 존재하고 특히 중국이 용들의 지위가 가장 좋은 덕에 워낙 청이 킹왕짱한 동네가 되어 국가도 안정된 상태고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중. 물론 백련교도의 반란이나 영국의 아편 무역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긴 하지만, 세계관 상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켰다간 오히려 좆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5] 역사보다 훨씬 행복한 팔자를 타고났다고 할 법하다.

테메레르 윌리엄 로렌스를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바람에 로렌스를 형식상 양자로 입양했다. 등장은 2권 밖에 없지만 이후로도 편지로 연락하며 용싱 황자 사후 호주에 상인을 보내고 원주민들과 교류를 맺으면서초반이고 작지만 마을을 만들기 시작하는등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시간이 지나 영국이 감기 전염병을 이용 영국 외 전세계 용을 전염병으로 학살 하려고 한 일들이 청나라에도 알려지면서 미엔닝 황자를 도아주는 동시에 원한을 품은 리엔이 나폴레옹 편에 붙어서 프랑스를 도아주고 이후 러시아가 프랑스에게 공격당하면 또는 함락당하면 청나라 또한 순망치한 당하는것이 시간 문제 라는것을 알고있던 상황에서 마침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자 로렌스와 테메레르의 도움도 될겸 러시아를 지원하고자 용 300마리를 러시아로 보내는 등 상당한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자 포지션겸 원래 역사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요리왕 비룡 애니판의 황제가 가경제라는 말이 있으나, 연대로 따진다면 광서제가 맞다.

5. 기타

가경제의 통치기(1795년 ~ 1820년)는 조선의 정조(正祖, 1776년 ~ 1800년), 순조(純祖, 1800년 ~ 1834년)의 재위기와 겹친다.

명나라 가정제와 헷갈리지 말자.

뱀발로 청의 모든 황제 중에서 가장 비중이 낮다. 강건성세로 대표되는 청 초기의 치세와 서세동점으로 대표되는 청 후기의 난세에 아주 절묘하게 끼어있다보니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농가 경제, 서민 가경제 등의 뜬금없는 결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에 나오는 중국 황제가 바로 가경제이다.

크게 부각되진 않는데, 청나라의 악명 높은 문자의 옥을 종식시킨 게 가경제다.
[1] 원래 이름은 영염(永琰)이었지만, 永이 상용 한자인 관계로 즉위시에 永을 顒으로 고쳤다 [2] 국고와 분리된 황제의 개인 계좌. [3] 이전에는 제림이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진압되었다. 1796년에 폭발한 난의 주동자는 죽은 제림의 아내인 왕총아. [4] 이 때 태자였던 도광제가 권총을 쏘면서 직접 군을 지휘했다고 한다. 오오 황자님 오오. 그러나 정작 도광제 본인이 황제가 되었을 때는 무능한 황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어마어마한 실책을 범하고 말았으니... [5] 당장 영국 함대 해군력은 테메레르 세계관에서도 청나라를 압도하지만, 셀레스티얼이 다 출동하면 몽땅 다 남중국해에 수장해 버릴 수 있다! 애초에 6천 마리 이상 되는 압도적인 공군력을 본토에 보유하고 있는만큼 영국이 시비를 걸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