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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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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린 시절3. 우주를 향한 도전4. 전쟁 포로5. 귀환 후6. 사망7. 웬디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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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Porter "Bill" Lawrence
미합중국 해군의 군인. 1930년 1월 13일 출생 ~ 2005년 12월 2일 사망

1. 개요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 테스트 파일럿, 그리고 월남전기 미군 전쟁 포로였다. 문이과를 두루 섭렵하고 지덕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NASA의 찬란한 스페이스 레이스 시절 활약한 우주 비행사들이 만약 우주 비행사가 못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논하는 if 놀이에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1]

2. 어린 시절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린 로버트 '패티' 로렌스(Robert "Fatty" Lawrence)의 아들로 태어난 빌 로렌스는 밴더빌트 대학교가 위치한 내슈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적부터 동시를 곧잘 지을 정도로 문학소년의 성격을 드러냈고, 풋볼과 농구, 야구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낸 운동선수로서 여러 대학 스카우트들을 애타게 했지만, 예일 대학교의 전액 장학금을 쌩까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사관학교에서도 스포츠에서 맹활약했고, 여단장생도를 지내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1951년 졸업,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2][3] 여단장생도 시절 전 생도들을 강렬하게 휘어잡았던 탓에 리더십이 높게 평가받았고 그런 임무를 뛰면서도 725명 중 8등이라는 최상위급 성적으로 졸업했기에 생도대장과 교수 등 사관학교 높으신 분들의 총애를 받아 졸업 후에도 병과 훈련 대신 생도대장 전속부관으로 잠시 근무했다고.

3. 우주를 향한 도전

전속부관으로 근무한 후 해군 전투조종사 교육을 수료한 로렌스는 F2H 밴시 조종사로 근무했다. 한국, 일본 등에서 근무한 뒤 테스트 파일럿 스쿨도 우등으로 수료했고, 사상 최초로 항모에서 발진하여 마하 2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소련과의 우주 경쟁의 일환이었던 머큐리 계획에 지원하였지만, 최종 후보자로 선발되었음에도 아쉽게도 비행훈련 중 심잡음이 좀 이상하다고 탈락 처분을 받았다. 7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가 임무 직전 그라운딩 당한 디크 슬레이튼이 떠오르는 부분이다.[4] 비행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뽑으면서 이 문제는 너무나도 중대해서 다시 태클이 걸릴 사항이었기 때문에 결국 우주 비행사의 로망은 포기해야 했다.[5]

4. 전쟁 포로

그러던 중,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1967년,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CV-64 컨스털레이션[6] 함에서 전투비행대장으로 근무하던 로렌스 중령은 F-4B에 탑승하여 출격했는데, 롤링썬더 작전의 일환으로 공습을 수행하던 중 대공포에 맞았다. 유압 계통이 맛이 간 와중에도 폭탄은 떨궜지만, 꼬리날개가 날아가며 다급하게 후방관제사와 함께 탈출했지만, 둘 모두 탈출 후 지상에서 월맹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리고 로렌스는 전쟁포로들이 수감된 이른바 '하노이 힐튼'에 수감되었다. 같이 수감된 동료들 중에는 제임스 스톡데일, 존 매케인 3세 등이 있었고, 다 같이 얻어터지고 고문당하고 회유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로렌스는 이를 견뎌냄은 물론, 상당한 재치와 지력을 발휘했다. 감방 벽에다 새기며 동료 수감자들과 의사소통에 쓸 간단한 암호를 만들기도 했고, 동료들의 탈출 시도나 몸조리를 돕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동료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했다. 베트남 전쟁기 행방불명된 미군 포로들이 매우 많아서 큰 문제로 지적받았는데 로렌스의 또렷한 기억에 의한 증언은 전쟁 역사가들, 그리고 실종자들의 (유)가족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명석한 기억력으로 60일 간의 독방 수감 기간에 오로지 입과 머리만으로 긴 시를 써내려가기도 했는데, 이 시는 그가 돌아온 뒤 고향 테네시 주의 주시(詩)로 선정되었다.

5. 귀환 후

1973년, 드디어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로렌스는 PTSD를 겪으면서도 성실히 군복무를 이어나갔고, 제독으로 진급한 뒤 주로 함재기 연구개발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1978년에는 전쟁 영웅의 이력과 사관학교 시절의 모범생 이력을 바탕으로 미국해군사관학교장으로 내정되었다. 마침 1977년에 미 해사의 초창기 여생도들 중 로렌스 제독의 딸인 웬디가 입학했던 터라 더욱 이슈가 되었고, 1980년 첫 여생도들의 졸업, 그리고 1981년 딸 웬디의 졸업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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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에서의 딸,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이후 로렌스는 북태평양을 관할하는 제3함대 사령관을 역임[7]한 후 인사참모부장을 지내고 1986년 중장으로 퇴역했다. 군생활을 마친 후에는 여러 강연이나 언론보도 등에서 자주 얼굴을 드러냈는데, 이렇게 의식적으로 꾸준히 베트남에서의 기억을 대외에 털어놓은 것이 전쟁 포로 시절의 PTSD를 이겨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6. 사망

2005년 로렌스 제독은 노환으로 타계했다. 미 해군에서는 마이크 멀린 해군참모총장이 조의를 표했고, 존 매케인 의원도 로렌스 제독 덕에 포로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며 감사를 담은 조의를 표했다. 이후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DDG-110이 USS 윌리엄 P. 로렌스로 명명되었고, 해군사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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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G-110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족들. 좌측의 짧은 머리 여성이 웬디, 가운데는 밴더빌트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로리 로렌스(Laurie Lawrence), 둘째 아내이자 말년까지 함께한 미망인 다이앤(Diane Lawrence). 이들 외에는 아들 윌리엄 로렌스 주니어와 양아들 프레더릭이 있다.

7. 웬디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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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웬디 로렌스(Wendy Barrien Lawrence)는 NASA 우주 비행사이다. 아버지의 우주에 대한 염원을 대신 이뤘다.. 미 해군 헬리콥터 조종사로 활동하며 MIT에서 학위를 딴 뒤 1992년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발되었고, 1995년 2월 STS-67(엔데버) 미션에서 처음 우주 임무에 나섰다. 1997년 9월의 STS-86(아틀란티스), 1998년 6월의 STS-91(디스커버리) 미션에서는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에 방문하기도 했다. STS-86 미션에서는 귀환하는 대신 미르 EO-24에 합류하여 미르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두번째 미국인 여성이 될 예정이었지만 오를란 EVA복이 작은 체구의 여성이 입기엔 너무 크다, 소유즈도 로렌스가 타기에는 너무 크다는 이유로 동료 남성 우주비행사 데이비드 울프에게 해당 임무가 돌아갔다. 이후 STS-107 컬럼비아 폭발사고 이후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재개 미션인 STS-114 미션에서 활동한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웬디는 NASA에서 은퇴했다.


[1] 실제로 6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을 뛰는 일선 전투조종사들 사이에서 우주비행사들에 대해 (마냥 까지는 않아도) 질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테스트 파일럿으로 활동하다 NASA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전쟁에 투입된 이들은 더욱 상실감이 컸다. [2] 동기로는 아폴로 15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로 달을 밟았던 제임스 어윈이 있다. 이 쪽은 공군으로 가서 SR-71 블랙버드 파일럿으로 근무하다 NASA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었다. 로렌스만큼은 아니지만 굉장히 기구한 커리어를 보낸 인물로, 달에서 돌아오면서 심장 문제로 죽을 뻔 했다가 훗날 종교에 귀의했지만 결국 달을 밟은 우주인들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3] 미국육군사관학교의 동기급 우주비행사로는 버즈 올드린이 있다. [4] 다만 슬레이튼의 경우는 로렌스보다도 많이 심각해서 공군에서도 그라운딩 처분을 받았다. [5] 다만 머큐리의 멤버들은 대개 1940년대부터 군생활을 시작했던 베테랑들이었던지라 경륜에서 밀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로렌스와 비슷한 연배는 이후 2기부터 뽑히기 시작한다. [6] 별자리라는 뜻이다. [7] 전쟁포로였던 사람이 맞는지 태평양 함대 테니스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