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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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 주도 세력 |
삼번의 난 ,1673 ~ 1681, |
<colbgcolor=#ffffff,#1f2023> 동녕국 오삼계 | |
임상문의 난 ,1786, |
임상문 | |
백련교도의 난 ,1796 ~ 1804, |
백련교 | |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
||
염군의 난 ,1851 ~ 1868, |
염군 | |
천지회의 난 ,1849 ~ 1850, |
천지회 | |
두문수의 난 ,1856 ~ 1872, |
평남국 | |
야쿱 벡의 난 ,1862 ~ 1877, |
야쿱 벡 | }}}}}}}}} |
1. 개요
白蓮敎徒-亂청나라의 제6대 고종 건륭제가 황위를 아들인 인종 가경제에게 물려준 1796년부터 1805년까지 10년에 걸쳐 이어진 대반란이다. 100년 넘게 번영하던 청나라의 최전성기인 강건성세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백련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백련교도의 난이라 한다.
2. 상세
반란의 주요무대는 호북(湖北)· 사천(四川)· 섬서(陜西)의 3개 성(省)이 접경을 이룬 크고 넓은 산악 지대였다. 이 지대에는 청나라 초기 이래 화남·광동 등 인구가 조밀한 지방으로부터 옮겨온 이주자가 많았고, 일시적으로는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 생산과 목재 및 광산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청나라의 행정적·재정적 지배가 시행되고, 시비(施肥) 기술의 미발달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고갈도 현저해지면서 궁핍화된 민중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뚜렷해졌다.결국 청나라는 주민들을 소개하고, 성을 쌓아 그곳으로 수용하여 반란군과 주민들을 분리시킨 끝에 겨우 진압했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의 공로자는 청나라의 타락한 정규군[1]이 아니고, 오히려 지방의 유력가들이 소집한 의용병인 ‘향용'(鄕勇)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막대한 전비(戰費)와 10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고,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비가 많이 들어간 것은 고종 건륭제의 총애를 받던 니오후루 허션이 전비를 횡령하고 착복했기 때문이며 청나라의 장군과 장교들이 더 많은 예산을 타내기 위해 일부러 반란 진압을 대충대충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청나라 군대가 부패했기 때문에 백련교도의 반란이 오래 끌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들의 분파인 천리교 신도들은 아예 가경제를 암살하기 위해 자금성에 침투했다가 지친왕 면녕이 이끈 환관 및 황궁 시위들과 격전을 벌인 끝에 물러나기도 했는데 이를 계유지변이라고 한다.
비록 백련교도들의 반란은 1805년에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한족들은 만주족의 팔기군은 물론 사실상 주력이었던 녹영병까지 전투력이 처참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19세기부터 청나라는 태평천국 운동이나 염군의 난 같은 한족들의 수많은 반란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약해지다가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청나라 말기의 권법 집단으로 의화단의 난을 일으킨 의화단이 원래 백련교도의 일파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반청 성향이었던 백련교도의 난과 달리 의화단은 친청 성향을 드러낸 것이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