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1-18 11:47:09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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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6대 국왕
仁祖
인조
파일:조선 인조.jpg
묘호 열조(烈祖) → 인조(仁祖)
시호 조선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장목(莊穆)[1]
본관 전주(全州)
종(倧)
천윤(天胤) / 화백(和伯)
출생 황해도 해주
사망 한성 창덕궁 대조전
능묘 장릉(長陵)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부왕 조선 원종[2]
모후 인헌왕후(仁獻王后)[3]
생몰
기간
음력 1595년 11월 7일 ~ 1649년 5월 8일 유시(酉時)
양력 1595년 12월 7일 ~ 1649년 6월 17일
(53년 6개월, 1만 9,541일.)
재위
기간
음력 1623년 3월 14일 ~ 1649년 5월 8일
양력 1623년 4월 13일 ~ 1649년 6월 17일
(26년 2개월 5일, 9,562일.)
1. 개요2. 묘호 "인조"3. 일대기4. 치세와 정책의 영향5. 총체적 평가
5.1. 비판
5.1.1. 중립외교의 파탄5.1.2. 두 번의 호란, 한 번의 삼궤구고두례5.1.3. 비정한 군주
5.2. 긍정
6. 인조의 능7. 인조 어필8. 동상9. 대중매체에서10.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제16대 임금. 묘호는 인조(仁祖), 시호는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휘는 종(倧), 자는 천윤(天胤) 혹은 화백(和伯)이다.

아버지는 선조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 구씨다. 선조는 또 다른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 광해군을 낳았고, 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낳았다. 따라서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은 인조의 삼촌, 정명공주는 인조의 고모가 된다.[4]

이종은 정원군 연주군부인 구씨 장남[5]으로 태어나 능양군[6]으로 책봉되었다. 원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 과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다.

왕비는 2명으로 능양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 그녀가 1635년 늦둥이를 낳다가 사망하고 3년 후 1638년에 간택된 장렬왕후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로 불리었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 어렸다.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 역사상 최대의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바로 예송논쟁이다.

인조대에 병자호란과 이로 인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는데, 이 때문에 인조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2. 묘호 "인조"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결정되어 있었다.
" 오대십국시대 남당의 임금 서지고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인조)에게 이 글자를 쓰는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 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이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대행 대왕의 공덕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世宗)과 세조(世祖)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하건대 이미 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자로 고치소서."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을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 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을 지켜 업을 높였다"이다. 실록에선 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에 부합된다고 적었다.

"인조"라는 묘호는, 시법에서 인은 유교에서 추앙하는 최상의 덕으로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 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7]"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심지어 굳이 성종으로 하자면 大자를 붙여서 대성종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성종은 이후 사대부들에게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도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8] 여기에 조(祖)는 보통 재조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아주 영예로운 묘호다. 더불어 묘호를 정할 때 조(祖)나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래도 조를 종보다 더 높게 치는 일이 많았다.

즉,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이라는, 거의 요순 급의 이상적인 초월 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사 뿐만 아니라 5000년 한국사를 통틀어 현종(고려)이나 세종대왕 정도만이 어울릴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9]

3. 일대기

3.1. 반정과 즉위까지

아버지와 형제의 복수를 위해 칼을 뽑은 군주.[10]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인헌왕후 구씨가 그곳에서 인조를 출산한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 보고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인조를 돋보이기 위한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행장 특유의 과장으로 보인다.

선조 때 능양군으로 봉해졌다. 정치감각이 빼어났던 할머니 인빈 김씨가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후 여러모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초기때가진 대우가 좋았다. 그의 아버지 정원군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광해군이 옥사를 일으킬 때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역할 정도만 하면서 유유자적지냈다.

하지만 광해군의 의심병으로 미. 역모혐의로 동생 능창군을 억울하게 잃었다. 동생을 잃은 능양군은 중부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서인들과 함께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다. 인조는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오른 중종과는 달랐다. 엄연히 반정을 주도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중종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를 냈다.
  • 이를 두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미신때문에 능창군을 죽이고 정원군의 집을 뺏았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사관의 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작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다. 능창군이 죽은 것은 광해 7년의 일이고, 정원군의 옛집인 새문동에 서별궁(경희궁)을 지은것은 광해 9년 정원군이 죽은 것은 광해 11년 말의 일이다 화병으로 죽었다기에는 자식이 죽은지는 5년 땅을 빼았긴지는 3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오히려 아들이 죽은 다음해에도 정원군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며 아부하기 바빴고 광해군도 정원군의 장례식에 특별대우를 해준다.

다만 종친이 정사에 관여하는 길이 막히기 이전 사람이며 반정 이전 한 정파의 수장이었던 태종, 세조와 달리 평범한 왕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처럼 자기세력을 완벽하게 쥐는 장악 능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걸 인조 개인의 역량 문제로 몰아갔는데 태종, 세조때는 종친이 조정에서 요직을 차지하는데 장애가 없었다.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왕자들에게 병권을 부여해서 친위세력으로 삼으려 했고, 세종은 태종대에 짝짓기로 수를 불린 특권층을 견제하고 자기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왕자들을 키웠다. 덕분에 정안군과 수양대군은 가장 강한 정파는 아니었지만 한 정파를 이끄는 위치에 설수 있었다. 왕의 의중에 따른 관제데모나 사신접대, 제사 같은 소일을 제외하면 종친의 정치 참여가 아예 막힌 시대에 태어난 인조가 그들 처럼 되는건 능력과 별도로 불가능했다.

광해군의 폐위에 명분이 없다는 광해군 옹호론의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폐모살제와 영건 사업으로 인한 민생파탄은 현대 대중들이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게 아니었다. 광해군 재임기 15년간 조선의 민생은 이미 한계를 넘겨 파탄 직전에 있었다. 광해군을 죽이지 않은건 그가 한때 왕이었고 여전히 왕족이었기 때문이지 인조반정 명분이 부족해서라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조선에서 왕은, 왕족은 엄연히 사대부들 위의 특권계층이었고 아무리 죄가 커도 왕족을 함부로 죽이려드는 왕은 없었다.

3.2. 책봉 문제

명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국왕은 충순한데 왜 폐위시켰냐?'라는 반응을 보냈다.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 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 것도 방해받았다.

어렵사리 북경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곱지 않은 명나라 대신들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으며 당시 명 황제는 조선왕을 시해했다는 소문은 물론 '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까지 듣고있어서 조선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 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인조 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완전한 도움은 아니었다.

이때 인조가 명에 쓴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쓴 은의 총량을 능가했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온갖 갖은 행패를 부린 계기가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지 2년뒤, 햇수로 즉위 3년째 되어서야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왕에 책봉된다. 광해군이 친명배금 정책을 따르지 않고 금수와도 같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니 폐위시켜야 한다는 서인들의 논리를 도리어 명나라가 깨버린 셈이었다.

3.2.1. 정명공주와의 관계

MBC 드라마 " 화정"에서는 인조와 정명공주와 대립 관계를 나타내지만, 당시 소성대비, 정명공주 모녀는 유폐되어있었기 때문에 살벌한 공안정국 아래 서로 만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정명공주를 옹주로 강등하고, 폐서인으로 만들려고 한 측은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다. 그리고 이 대북파를 지원한 사람이 광해군이다.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사람 역시 광해군이다. 기록에는 이이첨이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건 광해군이 분위기 조성까지 다 해놓고 슬쩍 빠지는 술수를 썼기 때문이다. 소성대비 정명공주 모녀를 바로 궁궐로 복위시키고, 막대한 전답을 내려준 사람은 인조다. 광해군이 계속 즉위했다면 절대 광명은 없었을테니 정명공주로서는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이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인조는 할머니 소성대비와 고모 정명공주를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감시를 하였다. 이는 공주의 어머니 소성대비가 정치적 식견이나 처세에 능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데 원인이 있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인 인물이었던 소성대비는 공주와 사위에게 주기위해 지속적으로 땅과 재물을 요구하고 왕만 탈 수 있는 어구마를 사위에게 내려주며 인조의 권위를 슬슬 긁었다. 그리고 광해군 폐위 명분 중 하나가 폐모살제이고 인조의 왕위를 인정해준 사람이라 일단 숙여야 하는 입장이라 겉으로는 늘 숙였지만 인조라고 그런 행동들이 기꺼울리가 없었다. 결국 소성대비 사후 공주에게 화살이 날아가게 된다.

1632년(인조 10년) 인목왕후가 죽은 지 얼마 뒤 인조는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정명공주가 저주 굿으로 왕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날부터 정명공주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다. 옛날 사람이라 미신을 잘 믿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물 몇개 묻는걸로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굿과 저주는 왕실의 여인들을 역모에 엮어 넣을 때 가장 손쉽게 쓰이는 방법이다. 광해군 시기 대북이 소성대비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칠서의 옥을 꾸몄을때 그러했고, 뒷날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를 제거할때도 그랬다.

인조는 자신의 병의 원인으로 정명공주로 지목했으나,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서 안 된다고 주장해서 위기를 넘겼으나 인조가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고, 여염집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숙이고 지냈다.

이 숨 막히는 감시는 1649년 인조가 죽으면서 비로소 풀어졌으나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효종도 정명공주를 견제했고, 심지어 그녀의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명공주가 위협 없이 온전히 어른으로 대접 받은 것은 정통성으로는 누구도 비길바가 없었던 숙종대에 이르러서 였다.정명공주가 시집간 풍산 홍씨 가문은 홍봉한, 혜경궁 홍씨, 홍국영 영조 정조 때 권력의 실세가 된다.

3.3. 이괄의 난

인조 정권은 초장부터 불안했다. 집권 직후에 대북을 갈아버렸고, 반정의 명분이였던 폐모론에 소극적이었던 소북도 조금이나마 숙청했다. 비록 대북 숙청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서인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는데, 여기에는 인조 자신의 복수라는 의견도 있다. 능창군의 죽음 당시 능양군이 소북의 영수인 유희분에게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얻어 가며 뇌물을 바쳐 동생을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유희분은 능양군의 말을 무시했고[11] 결국 동생이 죽자 복수를 맹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게다가 인조 반정에 협조적이었던 북인 잔당(중북)들도 벼락을 맞게 된다. 이 배경에는 서인 김류 주도설과 인조 주도설이 있는데, 어느쪽이라도 이원익이 한탄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다.

이후, 중북 숙청 과정에서 반정 공신 이괄에 대한 혐의가 공신들의 내분으로 이어져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자 화가 폭발하여 여진족을 막기 위해 훈련받은 군사 1만을 끌고 남하하여 안주, 평양, 황주, 개성 전격전의 속도로 함락하고 수도 한성까지 점령한다. 내부 반란으로 한성을 점령당한 조선 시대의 반란은 이 반란이 유일무이하다.[12]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으며 이괄은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반란군은 무악재(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자신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 체계가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괄의 부하들이 청군으로 편입되어 수도까지의 길을 알려주었다는 점이 컸다. 핵심 인력들이 반란군이 된 대가를 치른 셈이다.

3.4. 정묘호란

서인 정권은 흔히 '친명 배금' 정책을 고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인조 반정을 일으키고 인조가 중용한 인사들은 주화론자였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정권이 (후대의 효종 같은 경우와 비교해) 적극적인 반청 정책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 있다. 광해군 대의 외교 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내부적으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일반 백성들에게 친명 배금을 표방한 것은 당연한 문제였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 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사대하겠다고 말하면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결론은, 결국 이런 친명 배금 정책 덕분에 인조 5년에 또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 인물인 이귀나 최명길 등은 주화파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중에도 그런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도 숫제 매국노 취급이었다. 이렇게 반정을 일으킨 서인 멤버들을 특별히 공서(훈서)라 하는데 광해군 시절의 북인(특히 대북)들보다 더 현실주의적인 세력들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인 외교 방법을 논한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13]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척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후금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14]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버리지 못했다. 솔직히, 광해군 때부터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동일한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이 엎어진 건 병자호란 이후 더 이상 명나라를 도울 수도 없고, 명이 청의 공격도 아닌 농민반란으로 망하자 실망을 금치 못한 뒤다.

무엇보다 전쟁의 원인은 누르하치 홍타이지 시절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와 경제적 원인이 컸다. 청은 기세등등했으나 산해관조차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경제력이 청 태종 때 즈음에는 고갈되는 중이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1626년까지 만주에 2년 ~ 3년 연속의 대기근이 닥치면서 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점에서 청은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고, 명나라에게도 했으나 점점 비굴해져가는 상황이었다. 1627년에는 식량값이 8배로 뛰며, 군대를 유지하기도 벅찬 지경에 이를었으며 홍타이지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또한 광해군 대의 조선은 이미 광해군과 박승종의 명을 받은 정충신이 후금의 정보를 캐내고 홍타이지를 집중적으로 경계하여 그가 후계자가 되기 이전부터 주목하며 철통 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기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15] 그러다가 이괄의 난이 벌어지고 그 잔당들의 설득에 넘어가 홍타이지는 후금의 멸망을 막고자 드디어 조선을 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물론 이괄의 난이 누구책임인지를 따져보면 인조탓이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중립정책을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됐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 것으로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인조는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로 중립정책만 유지했고,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강경파였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후의 청태종)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고, 이괄의 난으로 인해 방비가 아작나는데 광해군 때의 방비의 절반만 복구해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정충신이 평가하고 인조를 설득했음에도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된다. 당시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 정권의 타도를 기치로 내건 후금은 빠른 기동전으로 성을 피해 바로 수도를 공략했다. 이에 조선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을 담당하는 방어군이 괴멸된 것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16] 당시 서인 정권들도 전략 수립에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전력 공백과 반란군 진압시 병력 피해 등도 알고 있었기에 병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17]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된 서북 지역의 군사력 으로 인해 인조반정 이후 계획된 후금에 대한 군사 전략은 그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또한 이괄의 난 이후 강화된 기찰은 북방 무관들이 제대로 훈련조차 맘놓고 못 할 상황으로 만들었다. 정묘호란 중 자폭하면서까지 분전한 영변부사 남이흥은 유언으로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국왕은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를 마시지 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정묘화약).

그러나 후금은 어거지로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조공 자체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또 가도 모문룡을 함께 토벌하기도 했다. 후금에 조공을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징발하는 통에 애꿎은 조선 백성들만 허리가 휘었지만 조정에서는 대충 넘어가며 8년이 흘렀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의 목전에서 여전히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의 태도에 앙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정권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 단절까지 생각하게 된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전쟁나면 큰일난다고 막긴 했지만 결국 둘은 인조의 눈 밖에 나 유배를 간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도원수가 바로 김자점이였다.[18]

3.5. 병자호란

정묘호란 8년 뒤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가 사망했다.[19] 이에 후금은 조문단을 보냈으나 이와 함께 홍타이지를 황제로 함께 추대하자는 의견도 함께 보냈다. 후금은 나름 형제국이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으나 상당한 무례함을 보였고, 인조는 논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물러가는 후금의 사신단에게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홍타이지는 격분하게 된다. 그러던 인조 14년에 또다시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20]

형제관계와 달리, 칭제인정은 명에 대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결정적으로 명이 멸망할 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21] 오히려 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명이 망하지 않은데다 명에게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조지은이라는 빚까지 있어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22] 이는 명에 대한 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정권을 쥔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으로서는 중립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 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조선을 설득하길 포기한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으로 바꾸었다. 예전부터 조선에 강경파였던 홍타이지는 칭제인정을 거부하고 초강경 국서를 투하, 동시에 팔도에 교서를 내려 방비를 분부하는 인조정권에 분개한다. 최명길의 반박상소에 곧 다시 화친으로 정책을 바꿨지만 사신이 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한다.[23]. 음력 병자년 12월로, 양력( 그레고리력)으로 1637년 1월 되는 해였다.

결국 인조는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강화도도 못가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 만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 농성으로 버텼지만 전쟁 전에 식량을 바깥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결국 물자가 바닥나게 되고, 각지의 근왕군(속오군)마저도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쌍령전투 등으로 청군에게 각개격파 혹은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숫적으로 압도적 우세에서도 청의 기동 전술에 휘말려 흩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도망친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는 과정도 일이고, 재조직해 다시 공격을 할 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일부 승전을 거둔 근왕군들도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 때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자점의 주력 함경도 근왕군은 한번 털린 이후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24]

이괄의 난 영향으로 조선의 중요지점에는 중앙의 측근들만 기용하고 국내 감시가 너무 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병자호란 때도 도원수의 김자점과 중요한 요충지인 강화도의 김경징 같은 무책임과 무능력자들을 임명했는데, 최소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인조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사령관을 잘못 임명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군이 집단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한 것도 있다. 이괄의 난 이후 기찰(감시와 통제)이 심각해졌고, 군 지휘관들도 본인들 안위를 위해서 군 훈련 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몽골 침입 때도 굳건했던 강화도마저 함락당해 강화도에 주둔하던 왕자들까지 포로로 붙잡히는 꼴을 연출하게 된다. 물론 몽골군과 달리 청군은 수전을 피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25]

3.5.1.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0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각개격파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자 김류, 최명길 등이 "피폐(皮幣),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자, 결국 주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하여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이는 한국사에서 왕이 몸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 최대의 굴욕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굴욕으로 인하여 왕권은 바닥을 쳤는데, 인조실록에 따르면 삼전도 굴욕 후 창경궁으로 환궁하기 위하여 한강 소파진에서 배를 타는데 신하들이 먼저 타려고 인조의 옷을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더 웃긴 것은 인조가 이렇게 망신을 당했는데도 인조는 처벌하지도 못했다고 한다.[인조실록]

청은 왕에게 굴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후세에 길이 남기도록 비를 세우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줄여서 '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27] 다시 말해 적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우리 손으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비석은 유교 국가이자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해온 조선의 입장에서 실로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내내 두고두고 조선의 수치를 상징하는 표시로 남았으며, 한국사의 흑역사로 치부되어 현대까지 수난을 겪었다. 청의 국력이 약해진 구한 말부터는 당연히 보복의 대상이 되어[28] 훼손의 운명을 겪었다. 고종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바로 삼전도비를 파묻었고, 일제가 이를 다시 복구했으나 이번에는 1956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당시 문교부에서 치욕의 상징이라며 또 파묻었다. 1963년 이걸 또 꺼내서 다시 훼손하지 못하게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이번에는 2007년 2월 3일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 국가적 치욕이 버젓이 서 있는걸 볼 수 없다며 페인트로 훼손을 가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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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로 훼손당한 사적 101호 '삼전도청태종공덕비'. [30]

훼손된 삼전도비는 정부에서 정성껏 복구해 조선 시대의 원위치로 옮겨 세워놨다. 관련 기사 허나 아무리 반면교사적 가치가 있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좀 안타깝다. 비록 치욕적인 역사라고 해도 역사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역사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왜곡으로 자기 정권에 쓰는 일본 정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들

다만 그나마 다행히도 결국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났지만 조선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3.6. 말년

병자호란의 패배는 인조가 개판을 친 것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군 자체가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을 겪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탓에 막장이었던 것도 있어서 그나마 실드를 쳐줄 구석이 약간은 있다. 하지만 소현세자 문제는 인간으로써도 비정하다고 욕을 먹는다. 또한 궁궐 뒷부분에 연못을 파고 잔치를 자주 벌였으며 궁녀들이 들고있는 가마에 타고 놀았으며 그 가마에 떨어져 다친적도 있었다.

하지만 큰며느리 강빈마저 비정하게 죽였던 인조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4년 뒤 인조는 날씨가 한창 더워진 인조 26년인 1649년 6월 어느 날,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학질 증세로 사망한다. 실록에는 며칠 전부터 감풍 등의 증세가 있어, 계속 침을 맞았던 왕이 갑자기 두드러기 오한이 났고, 의원이 진찰한 결과 학질증세가 있다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5세까지 살았던 인조가 조선 시대 왕 중에서 단명했다 말하긴 힘들지만.

4. 치세와 정책의 영향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내려간 것도 인조 시기.

조정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고,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 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덕분에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외롭게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딱하게 여겼는지 환속 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조 본인부터가 불탄 한양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문제를 인식하고 바꿀 생각은 안했던 인간인지라...[31][32] 다만 이건 당대 기득권층 대부분이 비슷하긴 했다. 백성들이 불쌍하긴 한데 내 기득권은 내주기 싫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 회복된 것은 효종 - 현종기를 거치면서였다.

이후 소현세자를 박대하고 급기야 아예 후계를 세손이였던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바꿔버리면서 왕권이 약해지게 된다. 당장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로도 신하들에게 책 잡힐 행동은 하지 못했으며 죽은 다음에도 예송논쟁에서 보듯 계속 시비에 시달렸다. 정통성 문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진 현종도 클 대로 큰 산당을 제어하는 데 고생을 했고 결국 숙종 대에 가서야 왕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정작 인조 본인은 즉위 자체가 서인 정권의 정당성과 연결되어 있었던 데다 명이 멸망한 후 청은 조선이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33] 죽을 때까지 나름 강한 왕권을 누리고 갔다. 물론 그 왕권으로 그가 한 것은 전쟁 피해를 조금 복구한 정도고, 그나마도 아들과 손자는 왕권을 위해서 더 작업하다가 차례로 과로사해야 했다. 여러모로 무책임한 왕.

더구나 인조가 모문룡이 죽을 때까지 가도에 보낸 군량미가 매년 3만석이며, 이마저도 모자라면 모문룡이 주변 조선인들을 약탈한지라 병자호란 시기까지 인조 정권에서 낭비한 세수는 26만 8천 7백여 석(= 약 5만톤 가량)으로 당시 조선의 세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양을 모문룡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긴 힘든 게 모문룡이 명을 뒷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병자호란 직후 조선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가도에 주둔한 명군(정규군이 아닌 모문룡 잔당)을 쓸어버렸던 일이다.

그나마 인조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1. 양전의 실시, 2. 기존 경대동의 문제점 파악 및 추후 시행책 논의, 3. 공물변통론과 대동법 논의, 4. 인조 말기 흉년기의 임시방편적 구휼제도를 시행 등이 있다.

그러나 제도의 정착을 위해 왕실의 희생을 감수할 의지는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법 제도의 시행' 영역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실무자들을 방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즉위 직후 시행한 삼도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그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양전이 미비하여 토지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에 방납업자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산림 등에서도 대동법에 대한 이견이 많았으며 대동법을 주창했던 이원익까지 그만두자고 주청하자 강원도 외에서는 폐지하고 만다. 요약하자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논의와 몇번의 시범 실시[34]가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

결국 교과서상에는 ' 대동법을 시작했다'는 타이틀만 달고 있는 광해군[35]이, 학자들 사이에선 '진정한 대동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효종(정확히는 이때 정국을 주도해 대동법을 정착시킨 김육)과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기'인 현종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 조도사를 뜯어고친 것도 반정으로 싸늘해진 민심 수습을 위해 내세운 것이었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지만 이건 사실 법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것이라 다른 왕이었더라도 어차피 해야 했다. 게다가 최명길이 올린 상차에서 양전을 다시 해야 한다며 '선왕 때 새로 경작된 땅은 전안에 들지 않았고 묵은 것만 전안에 들었다'라고 발언한 점에 비추면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양전 사업마저도 불완전한 요소가 있었다.

인조 대 새로 실시된 '영정법'(영정 과율법) 역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기존의 등급을 나누어 징수하던 전세를 일괄적으로 고정해 걷는 것으로, 대부분의 전답을 최하등급 하하전으로 지정해 최저 세인 4말을 걷기로 한 것이다. 대충 보면 취지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남의 밭을 가는 대다수의 소작농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영정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세금과 수수료를 추가로 때려서 농민의 허리를 더 심히 휘게 만들었다.[36] 이러다 보니 민중의 원성이 너무 커서 결국 숙종 때엔 영정법의 허점을 보완할 비총법을 만들어 가혹한 징세를 완화시켰고 영조 때 법제화시켰다.

다만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다. 영정법은 전세 징수에 있어 관행화된 지 오래였던 걸 법제화하며 정리한 것으로 당연히 거기서 추가 징수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원래 조세 수입의 대부분은 공납이었고(광해군이 궁궐을 짓겠다고 평소의 몇배에서 몇십배에 이르는 물자를 징수해대던 그 공납) 영정법이 규정한 전세 따위는 공납과 군포, 나중에 등장하는 환곡 등에 비하면 원래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다. 그걸 소작농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고 트집을 잡고 후대의 왕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늘어난 대동법으로 징수된 대동미와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결작 등 즉 공납과 군포 대신 받는 쌀들을 영정법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건 기만적인 주장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조 때부터 회복세에 들어선 조선 경제는 경신대기근이라는 희대의 대재앙 이전 몇십년간 잘 나갔다. 요즘 백성들이 사치를 과시할 수단으로 실생활에 불편할 정도로 옷자락이 길게 늘리고 아무리 열심히 절약을 강조해도 비싼 것만 소비하는 풍조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툴툴거릴 정도로.

5. 총체적 평가

5.1. 비판

제 식구 챙기기와 우유부단함으로 세 번이나 나라를 결딴내고 거기에 조선 멸망의 불씨를 만들어낸 암군[37]
자식인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과 손자들을 핍박하고 죽게 만든 조선 희대의 사이코패스

직접 쿠데타 과정에 참여했을 만큼, 능력은 갖추었으나,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비전 자체가 부족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가닥을 잡아주지 못했다.

게다가 인조는 무능하고 부패한 공신들을 끝까지 끼고 갔다. 인조 시대의 인재풀은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세조, 중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빈약하다. 국정 경력에서도 공신 가운데 고작 김류만이 그나마도 비실무직인 청요직을 역임했을 뿐이며, 그 가운데는 후대에 매국노로 잡혀 죽은 김자점, 김경징까지 있을 정도다. 기축옥사 직후 정철의 실각이래 서인의 오랜 실각으로 그야말로 유생과 불평분자, 지역 수령이 모인 아마추어 당파가 서인이었으니... 그나마 최명길 정도가 신료로서 뛰어난 편이지만[38] 그마저도 인조 반정에 가담하여 왕위에 앉힌 무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등용된 것이다.

왕이 된 후에도 김자점 같은 무능한 인물도 아부 잘한다고 권신이 될 정도로 주변에 예스맨들만 채우려 하는 모습에 신하들이 반대하는 추숭에 매달릴 정도로 권력에 집착해놓고 정작 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썼을 뿐 두 차례의 호란을 초래했고 가정적으로는 아들 소현세자를 박대했고,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손수 죽이며, 손자들에게 "그 개새끼 같은 것들을 왜 신경 써야 되냐"라고 욕하며 죽였고, 일가까지 박살내는 등 반성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두고 두고 까인다.

긍정 항목에서 길게 쓰고 있는 '여민휴식'이니 국방 강화니 하는 것도 반란의 후속 조치 아니면 자기 잘못으로 초래한 파탄적 상황에 대한 사후 수습책에 불과하다. 인조 정권은 정작 그렇게 힘을 길러서 한 번 써먹어야 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는 인조 정권의 '컨트롤 타워'로서 한계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비판자들로 하여금 "애초에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 힘이 길러지긴 길러졌나?", "국가를 재정비해서 뭘 했다느니 하는 게 전부 허울만 그럴싸한 조치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민생이 살아났다고 주장하며 사치근절 기록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사치근절 기록은 광해군 집권기에도 인조 즉위 직후에도 있었던 기록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박살난 직후에도 사치가 심하다는 주장은 나온다. 결국 끼워맞추기 밖에 안되는 주장이다.

전반적인 치세가 치욕으로 점철되어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문제가 많은 군주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인조는 운이 좋았다. 백성 수 만이 요동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도, 자식들이 볼모로 끌려 갔어도, 국내외에 인조가 가진 권력 탈취를 도모하는 세력이 없었을 뿐이다.

비판자로서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인조는 단순한 무능력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정을 주도해서 성공시킨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전쟁에 직면했던 시기의 모습을 보면 백성들은 죽어나가거나 말거나 재조지은이라는 미몽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대다수 관료들보다는 확실히 사리분별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데도 권력을 지키기 급급했으니 전형적인 암군이라고 볼 수 있다. 암군은 능력이 없다기 보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책임하게 회피한다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인조의 우유부단함은 단연 외교와 국방에서 잘 드러난다.

5.1.1. 중립외교의 파탄

인조는 반정 명분 중 하나는 명에 대해 충성스럽지 못했던 '광해군의 망은배덕[光海忘恩背德]'이었다.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교서에서 광해군 이혼의 부덕함을 질책한 분량의 절반 가량이 대명 사대 소홀과 친후금 정책을 성토하는 내용이었을 정도다.[39] 일부 현실적인 주화파들이 중립외교를 주장했다고는 해도 이들을 인조 정권이 이를 거국적으로 밀어주기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이는 정충신, 남이홍 같은 당대 명장들과 국방 정책을 논의했을 때 인조가 한 말이다. 그때 조선의 국방력은 안주 같은 북방의 주요 군사 거점을 지키는 것도 버거워 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 조·명 연합군을 궤멸시킨 후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명나라 군대를 박살내고 있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 무신들이 그런 점을 기껏 알아듣게 설명해 줬더니, 인조란 자는 "어째서 고위 장성이란 자들이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먼저 나가서 적을 치겠다고 하는 패기가 없냐"며 나무랐던 것이다. 그만큼 인조 정권은 대 명/후금 문제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때 조선의 집권 세력도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했다느니 하는 말은 저러한 사료들을 죄다 무시해서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저것은 물론 집권 초기의 일로, 나중에는 인조도 현실을 파악하고 저런 정신나간 주장을 하지 않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러한 발언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이, 이는 대내적으로 후금에 대한 적개심을 반복·강조해야 정당성이 확보되는 인조 정권의 태생적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권이니만큼 실제로 전쟁으로 맞붙어 참패하는 일을 겪지 않고서는 후금 중심의 질서에 결코 순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집권 세력이 후금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거나 할 정도로 미쳐돌아간 것은 아니었고 상대의 강대함에 밀려 개시(開市) 요구 등을 들어주긴 했으나 누가 봐도 하기 싫어하는 티 팍팍 내며 최소한의 성의만을 보이는 정도였지,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명나라에게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인조 반정 소식을 접했을 당시 명나라는 " 광해군은 우리한테 협조적인데 왜 내쫓았냐?"는 반응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동아시아 3각 외교에서 거의 호구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엄청난 뇌물을 바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백성들 고통은 심해졌다. 이렇게 명나라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정통성을 위해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아버지 정원군 대원군이 아니라 아예 왕으로 추존한다.

후금이 청으로 재탄생한 이후의 북방 외교는 더 심각했다. 물론 조선에서 전쟁을 완전히 막을 방법까지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차피 조선이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이상 청나라는 침공할 것이 뻔했고, 설사 전쟁을 하지 않아도 막대한 공물과 군사를 요청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전쟁이 필연적이라 해도,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조선의 입장에선 최대한 늦출수록 유리했다. 그런 이유로 이귀, 최명길, 박로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적대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인조는 결정적인 상황일 때마다 결단을 내리지 않고 뒤로 빠졌고 결국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이는 선조와 매우 다른 점이다. 선조가 졸렬함을 드러낸 건 임진왜란 도중 이몽학의 난 이후였다. 그 이후로도 의주 파천을 단행하고 진주성 함락을 필연으로 보는 등 전황 판단도 나쁘지 않다. 애초에 이순신 장군을 직접 발탁한 이가 선조였고, 임진왜란 이후의 군사 전략과 복구 정책을 봐도 선조는 국가운영만큼은 뛰어난 군주였다.[40]

결국 인조는 주화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립외교보다는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게 된다. 결국 정묘호란이 터지고, 이괄의 난으로 약체화된 조선군은 계속 밀려서 정묘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을 이기지 못한다는게 판명되었으나 이는 인조 정권이 그 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화친을 모색하는 계기가 전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로 인해 후금에 대한 적개심만을 키웠을 뿐이었다. 정묘호란 발생 9년 후에는 인조 정권이 조선을 방문한 용골대, 마부대 이하 청 사신단을 박대해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귀국하는 사신단에 분노한 백성들이 돌을 던지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인조는 용골대 등을 달래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사신단을 박대한 것만으로도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실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조는 이를 뛰어넘는 강경책을 일삼았으니 제일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비타협적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는 청 태종에게 협박장에 가까운 국서를 보낸 것이다.
지금 명나라는 곧 2백여 년간 중국을 통일해 다스려온 주인인데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한번 요동과 심양 한쪽 땅을 잃었다 하여 문득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옛날 왜구가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 중국을 범하고자 했으나 우리 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단서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 나라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백성을 잔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계책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뒤에 수길(秀吉)이 죽자 그 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는데, 머리가 떨어져 죽은 자들은 모두 전날에 우리에게 독기를 부렸던 장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씨(源氏) 평씨(平氏)를 축출하여 멸망시키고 우리 나라와 통호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성한 것이 평수길(平秀吉)의 시대보다 배나 됩니다. 천도(天道)가 전쟁을 싫어하며 선을 돕고 악을 벌한다는 것이,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중략)
그리고 천심이 매인 바는 실로 백성에게 있는 것이니, 설사 우리 나라가 의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어 그 병화가 비록 참혹하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41] 지금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접한 것으로 어둡지도 민멸하지도 않을 도리로서, 서생(書生) 소자(小子)가 간책 위에서 주워온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6월 17일

혹자는 이 국서 전달을 인조 정권의 전쟁 회피 노력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당장 위의 문면만 봐도 "전쟁이 나면 났지 니들 말 들어 주나 봐라." 하는 식으로 나오고 있는데 무슨 놈의 전쟁 회피란 말인가. 회피가 아닌 정도를 넘어서, 조선과 전쟁을 벌인 이후 멸문당했던 도요토미 가문을 들고 온 시점에서 저 글은 사실상 협박 문서라고 하는 것이 맞다. 협박도 우월한 입장에서 해야 협박이지 약한 입장에서 벌이는 협박은 그냥 도발이었다. 실수였다는 변명도 안 통하는게, 인조는 이 문서를 격문[檄]이라고 칭했는데, 토황소격문을 비롯한 역사상의 격문들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적대 진영에게 보내는 격문은 항전의 의지를 적극 표명하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와 한판 붙을 생각으로 문서를 작성한 것이 맞고, 실제로 6개월 뒤에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는다.

자신이 도화선이 되어 청의 침공이 가시화 되었음에도 인조는 자기 합리화와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주화파들이 적극적으로 청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아무 것도 안 한 채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보고만 있었다. 한마디로 무책임의 표본이었다.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는 문제는 인조의 결정 회피로 7개월이나 끌게 되었다. 결국 박로가 직접 사신으로 출발했으나, 박로가 압록강을 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터지고 만다.

"조선 측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더라도 청이 대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을 쳤을 것"이라는 주장은 조금도 인조의 책임을 덜어 주지 못한다. 청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런 때에 명분을 제공해서 침공을 앞당긴 인조 정권의 실정은 더욱 엄중하게 질타를 받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이 홍타이지에게 두 번째로 유린당한 병자년(1636년)은, 후금 사신단에 대한 조선 정부의 푸대접 및 조선 민중의 공격, 조선 사신단의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 참가 거부 및 국서 유기 사태, 인조의 도발적인 국서 전달 등 유난히 후금 / 청에 대한 적대 행위가 집중되었던 해다. 오랫 동안 밖으로는 명의 무역 봉쇄, 안으로는 기근과 반란에 시달렸던 청이 하필 그 해에 조선을 침공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긴 힘들다. 청의 입장에서 인조 정권이 보인 행태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격이었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일에 정묘년(1627년)에 쥐어터지고 무릎꿇은 조선 따위가 참견한 자격이 없음은 현실적으로 보나 명분론적으로 보나 당연한 이치다. 홍타이지가 황제임을 천명한 이상, 신속(臣屬)을 거부하고 있는 조선은 천자로서 토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논리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조선의 관료들이었다. 즉,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은 전쟁을 각오하고 군신 관계를 거부했던 것이다. 만약 인조 정권이 '진정한 천조는 명나라밖에 없기 때문에' 청은 그런 명분을 앞세워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야말로 아이 같은 순진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인조 이하 조선의 관료들이 그렇게 어리석었을 리는 없다.

21세기 현재의 한국사 오타쿠들이 온갖 현란한 수사와 논리를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달리, 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인조 정권의 대 후금 강경 노선이 병화를 불러들였다는 데에는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백성·사대부 모두가 말이다.
김류가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데, 지금 어떻게 섬과 통하여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류가 도체찰사 임무를 담당하여 만약 국가의 병력으로는 그들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찌 그 때에 기미책을 극력 주장하지 않고서 국가가 망하고 난 뒤에야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린다.’고 말을 하는가. 아, 당시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던가. 신진 인사들이 국가의 대사를 경솔하게 논의한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장을 취사 선택한 자는 또 누구였던가.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9일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북방 방어군의 역량의 심각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두 번의 전쟁에서 밀린 거라고 하지만, 이괄의 난은 '인조의 불운'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닌, 인조가 뿌린 씨앗에서 열린 열매에 가깝다.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나라에게 온건 외교를 이어가고 있던 군주를 내쫓아 후금의 경계심을 샀으며, 내부적으로도 후금에 대한 적대 여론을 자극하는 여건을 조성해서 아이신교로씨로 하여금 '조선=적성 국가'라는 인식을 굳히게 만든 정치적 격변의 주인공이 다른 이가 아닌 인조 본인이었던만큼, 당시 인조가 처한 외교적인 난제가 '남이 준 불행'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결국 후금 내부 사정 문제를 제외한다면, 어떤 점을 강조하더라도 호란에 있어 만악의 근원은 인조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5.1.2. 두 번의 호란, 한 번의 삼궤구고두례

인조의 군사적 무능은 두 번의 호란, 특히 병자호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저지른 주요 군사적 실책은 다음과 같다.
  • 청군의 병력 이동에 대한 관측 / 예측에 실패해서 더 안전한 남쪽 변방이나 강화도가 아닌 애매한 곳에 중앙정부가 피신하게 됨
  • 피신처인 남한산성에 군량이 부족한 탓에 장기 농성이 불가능했음
  • 군대의 요직을 김자점, 김경징과 같은 무능한 이들이 차지한 결과 청군이 쾌속 진군하고 두 왕자가 피신 중이던 강화도가 함락됨
  • 전반적으로 방어군이 지휘 체계 문제 보급 미비 등으로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함

이 가운데 인조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이 하나라도 있나?

이러한 인조 정권의 삽질들에 대해서 인조 옹호자들은 보이는 태도는 놀랍다. 이를 도리어 인조를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청군의 빠른 진군 속도를 예상하지 못했고, '하필이면' 도원수 김자점이 무능한 자였고, '불운하게도' 남한산성에 군량미가 없어서 인조가 굴욕을 당했다는 식이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1630년대 당시 조선에는 인조를 수장으로 하는 정권 말고도 정부가 하나 더 있었고, 상기한 실책들은 전부 그 정부가 저지른 잘못인 것 같다.[42]

물론 병자호란에서 조선 정부와 군대가 보였던 모든 추태, 졸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조 못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개별 전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에 직접 참여한 각급 지휘관들에게 우선적으로 물어야 하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동시에 최종 인사권자이자 군 통수권자인 인조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음도 당연하다. 특히 '도원수 김자점'과 같은 최고위급 직책에 대한 잘못된 인사가 불러온 참극에 대해서는, 참극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만큼이나 인조의 책임이 무겁다.

인조 정권이 군정에서 보인 한심함은, 병자년 9월에 인조가 비변사 당상관들을 인견(引見)했을 때 영의정 김류와 주고받은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金瑬曰, 義州舊[缺][43]頃日筵中, 聖敎痛責其失。蓋義州形勢, 今則與前不同, [缺]迫事之後, 人民稍集, 守備[缺]器械, 庶有拮据之路。元帥柳琳[缺]皆如臣意矣。上曰, 下三道赴西之[缺]義州農軍, 亦在減去之中, [缺]當何以繼兵也? 予非禁[缺]今事勢, 多有難便者, 今欲[缺][44]勢稍振, 年穀稍豐, 然後[缺]擧行矣。金瑬曰, 臣等亦不敢保[缺], 但今事機, 庶有可爲, 故敢達矣。[缺]義州修築之擧, 姑爲停寢以俟, [缺]今番出身, 亦不令趁卽赴防, 待後日修築義州之時, 始許赴防, 亦似宜當矣。

김류가 말했다.


" 의주의 옛 (빠짐)에 대해서는 지난날 경연(經筵)에서 성교(聖敎)로써 아프게 실패를 질책하셨습니다. 무릇 의주의 형세는 지금 예전과 같지 않은데, (빠짐)박한 일이 벌어진 다음에 인민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어서 수비 (빠짐) 기계를 어렵게 마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수 유림 (빠짐) 신의 뜻과 같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 하삼도에서 서북으로 근무하러 하는 (빠짐) 의주의 농군(農軍)들이나 모두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군대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길 수 없는 것이 (빠짐) 지금의 상황에서 불편함이 많은 것이니, 지금 (빠짐)세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어느 정도 풍년이 든 다음에 (빠짐) 거행해야 할 것이다.

김류가 말했다.

"신들도 보장할 수는 없지만(빠짐), 다만 지금 일의 기틀은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빠짐) 의주에 성 고쳐 쌓는 일을 잠시 그만두고 기다려야 하며, (빠짐) 이번 출신(出身 : 무과 급제자)들도 곧장 근무를 시킬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의주에 성을 지을 때 근무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역시 마땅할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53책 (탈초본 3책) 인조 14년 9월 4일 을사 8/29 기사
[45]

빠진 글자가 많은데다가 즉석에서 한 발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서 이해가 쉽지 않을 텐데, 풀어 쓰자면 이런 얘기다
김류 : 알다시피, 의주의 상황은 예전과는 달리 지킬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혹시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병력과 물자가 채워질지도 모르겠다.

인조 : 후방에서 올려보내는 병력이나 의주 자체의 병력이나 모두 줄어들고 있으니 지금은 의주의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같은 식으로는 안 될 거 같고, 풍년이 들어서 여유가 생겨야 그곳의 전력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다.

김류 :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 하자. (어차피 지킬 수도 없으니) 의주성 보수 공사 멈추고 정예 병력도 보내지 말자. (여력이 생겨서 의주를 확실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어) 보수 공사가 재개되면 그때 병력을 올려 보내자.

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지금 이 인간들 의주를 포기하자고 하고 있는 거다.
뭐 포기한다는 게 의주의 수비군을 아예 해체시키거나 뒤로 물린다는 것은 아니고, 중앙정부로서는 해줄 것이 없으니 당분간 니들끼리 알아서 버티라는 정도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히 황당한 얘기다. 의주는 당시 조선의 최전방 요충지로서 오늘날의 한국에 비교하자면 파주 철원과 같은 북부 전선의 거점이었다.[46] 그런 곳을 지키는 부대들을 완편 상태로 유지하지도 못하고 망가진 성책을 수리하는 것조차 손을 떼려고 했던 것이 인조 정권이었던 것이다.

의주성 가까운 곳에 성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고, 고려 강감찬이 쌓은 것을 1628년 이후에 고쳐 쌓은 백마산성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 적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때에 최전방에 방어 거점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있는 것조차 제대로 관리 못해서 포기하네 마네 소리가 나오는 것은 제대로 된 국방이라 볼 수 없다.[47]

병자년 11월 중순, 그야말로 병자호란 코앞의 시점에서도 인조 정권은 여전히 그렇게 의주를 버려 두고 있었다.[48] 설사 나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성 수리와 병력 공급이 재개되었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충실히 방어 시설을 구축하며 군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겠는가. 의주 같은 곳이 그 지경이었으니 그 전쟁에서 조선의 3도가 유린당했던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결코 '운발'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다.

의주 수비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기록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 인조 정권의 전반적인 전쟁 준비 상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 이성구(李聖求)가 나아가 아뢰기를,

"돌아온 호역(胡譯)의 말을 들으면 저 도적이 군대를 동원시킬 낌새가 있다 하니, 외방(外方)의 병마(兵馬)를 국경에 불러모아 몇 달 동안 변고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 어떻게 오랑캐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구가 아뢰기를,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어할 준비를 하고자 하면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覊縻)할 방책을 세우고자 하면 명사(名士)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12일 임자 2번째 기사

먼저 당시 병조 판서였던 동지경연사 이성구가 귀국한 호역(여진어 통역관)의 말을 빌려 전쟁에 임박했음을 경고하는데, 인조가 호역 따위가 무슨 남의 나라 실정을 제대로 알겠냐며 지껄이는 현실 부정부터 가관이다. 이성구는 기가 막혔는지 청의 침략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전쟁이 안 일어날 것처럼 구는 게 쪽팔리지 않느냐고 나무란다.

그러자 인조도 쪽팔린 건 알았는지, 더 이상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고, 방어할 준비를 하는데 형세가 이와 같고(이성구 말대로 국방 역량 강화에 다들 무관심하고) 입만 산 선비란 놈들은 화친을 결사반대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제대로 된 전쟁 준비도 적극적인 유화책도 마련하지 못한 정부의 총책임자가 누구인가? 인조의 일침은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인 셈이다.[49]

보통 병자호란 당시 보인 조선군의 지리멸렬한 모습에 대해 인조 옹호자들은 흔히 이괄의 난에 북방의 정예 병력이 쓸려나가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핑계를 대는데, 이괄의 난이 남 탓 할인가는 넘어가더라도, 그때 훼손된 전력을 10년 동안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조가 군사 문제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서툴렀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병자호란 때 황해도에 2만이 넘는 정예군이 있었고, 이밖에 8만 가까운 속오군이 구성되어 있었다지만, 이들이 정말 건실한 군대였다면 삼전도의 굴욕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조대 조선 군대가 무기력했던 가장 큰 원인은 기강해이 때문이었는데, 그 근본 원인을 제공한 이는 다름아닌 인조 자신이다.
신이 생각건대, 온 나라의 정병과 무사가 모두 여러 대장의 수하에 모여 있는데, 일이 없으면 농장을 감독하는 역사를 하고 일이 있으면 호위(扈衛)로서 편안함을 취하는 곳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묘 호란에 강도로 피란갔던 일에 대해서는 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날쌘 군사를 모아 섬속에서 늙히면서 한 명의 병사나 한 마리의 말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않고 수백 보 밖에서 적의 기병을 엿보면서, 내란(內亂)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켜 그것으로 자기네의 목숨을 보전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와 휴척을 함께 할 훈신들은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러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은 없는 것이 으레 이와 같으니, 급한 때에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3월 2일 정미 2번째 기사

이는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과 더불어 양대 척화파 거두였던 부제학 정온이 위의 용골대 귀국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인조에게 올린 상소다. 정온은 훈신(勳臣) 즉 공신 세력이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으로 부리며 야전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현실을 규탄하고 있는데, 그 훈신들 뒤에 누가 있는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알 것이다.[50]

그때 사헌부도 훈국(訓局) 즉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정예 병력들이 야전을 회피한다며 비슷한 지적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인조의 반응은 한 마디로 " 니들은 나대지 말라"는 거였다.

인조는 그러는 주제에 군대 인사에서도 한심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최고위급 장수들을 하나같이 형편없는 인물들로 채웠다. 인조가 도원수, 부원수 급으로 선임한 장수가 장만, 이괄, 김자점 등인데, 이 중에서 유능하다고 할 만한 자는 이괄 정도였으나 그나마도 관리에 실패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51]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노먼 다이크 중위마냥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 청군이 국경을 넘은 지 단 7일만에 한성에 도달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구축해 둔 2만 정예병을 전장에서 이탈시켜 전력 보존만을 꾀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전시 수도 격인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도검찰사 김경징은 뭔가 결정을 내리긴 했는데, 그게 싸우자는 게 아니라 놀자는 거였다. 그로 인해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해서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 원손 등 왕실의 핵심 인물들과 여러 대신들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때도 김경징은 싸우지 않고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중앙정부는 항전 의지가 완전히 꺾여서 성 밖으로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광해군이 외적 방비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국경에 집중시키고도 국가 예산을 궁궐 짓는 데 낭비해서 국방 강화를 스스로 방해했고[52], 인사 관리에 실패해서 훈련도감 장수들이 능양군과 내통하게 만들어 끝내 권력을 잃은 것처럼, 인조 역시 청의 침략에 대비해 뭔가 이것저것 하긴 했는데 본인이 실토한 바와 같이 전투 준비 태세 수준은 형편없었고, 결정적으로 자질이 없는 인물들을 중요 직책에 임명해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인사 실패는 단순히 '인조가 인재 보는 눈이 없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인조는 저 둘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철저히 인조가 자신에게 왕위를 선사하고 보전해 준 사람들에게 베푼 '보은 인사'였다. 위에서 언급한 정예 병력의 야전 회피 문제도 결국 훈신들의 군대 사유화가 빚어낸 것이었다. 결국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보인 한심함은 인조 반정으로 형성된 공신 세력이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구조적 문제'의 결과물이었다.

인조 개인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니 옹호자로서는 좋아할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한 공신 세력을 만든 인조 반정이 누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인지, 그들의 특권을 보장한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 '개인'이 휘하의 대신들에 비해 특별히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혜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12월 13일에 청군이 안주에 이르렀다는 김자점의 장계를 받고도 적이 깊숙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강화도 파천을 유보한 것, 대신들이 청하는 세자 분조를 거절한 것 은 분명한 실책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도저히 안 보인다 싶으면 인조 옹호자들은 절망적으로 광해군을 소환하곤 한다. "그래도 광해군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인조 정권이 잘한 점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광해군을 연산군 못지 않게 나라를 망친 조선 왕조 최악의 임금 중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최악보다 나으니 훌륭하다? 인조 옹호자들이 정말로 인조를 뛰어난 임금이라 여겼다면 태종, 세종, 성종, 영조, 정조와 같은 조선조의 영주·명군·성군에 견주지 본인들이 혼군·암군·폭군으로 규정한 광해군에 갖다댈 리가 만무하다. 인조 옹호자들의 광해군 타령은 역설적으로 인조가 한심한 임금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인 셈이다. 그저 최악보다는 나으니 낫다는 식 하지만 이건 엄연히 광해군보다 낫다는것으로만 쓰일 수 있을 뿐 객관적인 인조 옹호로는 될 수가 없다.

광해군이 아무리 무능하고 한심해도 누구마냥 '오랑캐' 앞에서 머리를 박는 일은 없었다. 두 번이나 이웃 나라에게 전면적인 침략을 받아 두 번 다 완패하는 일도 없었다. 세 번이나 적군을 피해 서울을 버리고 내빼는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왕자였던 임진왜란 시절에는 행패만 부리고 다닌 왕자들 중에 유일하게 책임있게 외적에 맞서 싸운 전쟁영웅이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정도의 공적은 커녕 하다못해 눈에 띄는 행적이라고 불릴 만한 것조차 없다. 1삼궤구고두· 2패전· 3몽진에 빛나는 인조에 비하면, 0삼궤구고두·0패전·0몽진의 광해군이 적어도 국방에서는 우수한 지도자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53] 이때 "광해군은 운이 좋았을 뿐, 정권을 오래 유지했다면 반드시 인조가 겪었던 것과 같은 참화를 겪었을 것이고 결과는 더욱 참담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너저분한 정신승리일 뿐이다.[54] 가정·상상은 실제로 일어난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거기에 중요한 것은 애초 광해군이 몇 년만 정권을 유지했다면 북방 방비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장수들도 인조에 의해 숙청당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테니 후금은 대기근으로 알아서 붕괴해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지 4년만에 정묘호란이 벌어졌다. 이 때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켰지만, 그 규모도 3만에 불과했으며 홍타이지는 사정이 너무 나쁘기에 이것조차 망설이지만 이괄의 난 잔당들의 설득으로 겨우 움직인 것이었다. 광해군이 계속 정권을 유지했다면 후금은 대기근으로 인해 내부붕괴로 무너져내렸을 것이기에, 광해군의 몰락과 인조 정권의 탄생은 홍타이지에게 있어서 하늘이 내려준 기적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인조 정권이야말로 무너질 위기의 후금을 살려내고 청 제국을 탄생시킨 구원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1.3. 비정한 군주

인조의 아들로는 요절한 소현세자와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3남 인평대군이 잘 알려져 있다.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이유의 5대손 이채중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후사 없이 일찍 죽은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고 이구로 개명했으며 남연군이 되었다. 그리고 남연군의 막내아들이 바로 흥선대원군.

만약 인조에게 다른 아들이 없었거나 소현세자가 원손이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살았다면 싫어도 데려가야 했겠지만 소현세자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요절했고 인조에겐 무술연마를 즐겨하는 신체 건강한 차자 봉림대군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 의료사고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은 뒤 인조는 같이 청에 볼모로 갔지만 차자라서 청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던 봉림 대군을 후계자로 세운다. 이는 종법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왕의 권위와 모략으로 반발을 찍어 눌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 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듣지못할 하교를 내린 다음 이시백, 이시방 형제와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다. 시류를 잘 읽는 현실주의자 면모가 강했던 김류는 이러한 인조의 의중을 짐작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이며 김자점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쓰려고 인조가 남겨 중용한 인물이었다. 인조가 원손에게 후사를 잇게 할 수 없다고 강변하자 김류는 양녕대군을 거론하고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냐는 반박을 받았다. 인조가 재차 원손이 총명하지 못하다고 하자 김육은 자신이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는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지위로 눌러 끝끝내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전위대 역할로 조정의 여론을 흔들어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자신이 나이가 많아 원손의 성장을 기다릴 수 없다는 발언을 고려하면 봉림대군 승계를 확정지은 시점에서 인조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년 뒤 실제로 사망한다.) 후계구도를 굳히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 작업이란 봉림대군에게 걸림돌이 될 게 뻔한 소현세자 가계의 완전한 제거였다. 하지만 김육 말마따나 어린 원손은 뚜렷한 책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표로 삼은 게 원손의 어머니 강빈이었다. 강빈의 품성이 문제라기 보단 원손이 어려 트집잡을 게 없으니 대신 어머니를 노린 것 이다.

인조는 광해와 대북이 소성대비 영창대군을 궁지에 몰때 써먹었던 저주를 자신이 활용했다.

뒤숭숭한 궁안에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고, 조씨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조의 사주아래 행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조는 즉시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으나 궁녀들이 목숨으로 상전을 지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살엄음판 같은 정국이 이어지는 가운데 1646년 1월에는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인조의 대처는 이상했는데 1월 3일 인조는 왕의 독살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이 일을 신하들에게 알리거나 의금부나 형조에서 조사하지 않고 궁궐 내에서 내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다. 여기까지도 수상한데 여기에 조사 과정에서 수라를 만드는 왕의 궁녀들보다 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을 더 많이 잡아 조사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신하들은 이 사실을 알고 공식 조사를 하자고 요청했지만 인조가 이를 거부하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1월 11일에 뜻을 꺾고 의금부에서 공식 조사를 시작한다.[55] 이쯤 되면 거의 강씨를 노리고 한 조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의금부가 한 달 동안 조사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세자빈의 궁녀를 포함한 용의자들은 자백하지 않아서 열명 중 일곱명이 고문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조사했는데도 증거가 없자 인조는 권위로 누르기로 작정 하고 행동에 나섰다. 음력 2월 3일에 인조는 비방기를 통해서 조사를 하던 신하들은 압박한다. 이에 같은 날 신하들이 사죄 겸 용의자들을 고문해도 나오는게 없다고 항변을 하자 인조는 아예 강빈을 직접 언급해가며 누명을 씌우는데, 인조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은 심양에 왕위를 도모하면서 있을 때 홍금적의(용포)를 만들고 내전(內殿)의 칭호(왕과 왕비 칭호)를 마음대로 사용했고 작년 가을에는 성내는 일이 많았으며 요즘은 문안을 안한다. 이것으로 봤을 때 최근의 저주 사건과 지금의 독살 시도 모두 강빈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강빈을 사형시키라'고 인조는 주장했다.

감금된 강빈이 어찌 문안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이는 철저하게 권위를 활용한 찍어누리기였다. 신하들이 쉽게 수긍할 리가 없어 이시백은 인조의 홍금적의 주장은 그저 비단을 사들인 것이지 역모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김류 이경석 같은 신하들도 수긍했다. 무엇보다 설령 이게 다 사실이더라도 화 좀 내고 문안 인사 좀 안 온게 어떻게 저주와 독살의 근거가 되는 지는 아무도 수긍하지 못했다. 그래서 옛 성현들처럼 자비롭게 처리하자고 신하들이 주장했지만 인조는 무시한다. 다음날에도 김류 등은 당태종과 태자 승건의 사례를 들어가며 강빈을 살려 줄 것을 청했지만 인조는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빈은 내 자식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신하들의 간청을 무시한다.

신하들이 다시 ' 강빈이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嬪)으로 있을 때는 소현(昭顯)의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윗전을 모욕했다며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
"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인조실록》 24년 2월 9일[56].

결국 1646년 3월 15일, 35세의 강빈은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의 누명과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자신을 못 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외친 죄목 등으로 인조의 명령으로 사형을 당했다.

강씨가 죽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강빈의 사형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까면서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57]과 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인조가 주장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정식 조사[58]를 요청했다. 만약 이 강빈 혈서가 사실이라면 인조 입장에서는 강빈 사건에 대한 완벽한 전환점이 되고 문제많던 강빈 숙청도 역모 처단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 강빈 혈서를 주장한 인조는 이 조사 요청을 무시했다. 그리고 1646년 5월 신빙성이고 뭐고 인조가 주장했고, 인조의 강짜로 조사조차 못한 강빈의 혈서를 근거로 강빈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린다. 때문에 학자들은 왕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자 청의 영향력 하에 있는 후계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인조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혈서설은 마지막으로 남은 강씨의 아들들(이자 자기 손자들)까지 완전 처리하기 위한 자작극으로 추정된다. 강씨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그 곳에서 풍토병에 걸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2년 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결국 강씨의 아들 중에는 3남 경안군 이석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힘겹게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

간추리면 인조의 소현세자 제거는 세자와 청의 관계성이 크게 작용한 사건으로 철저하게 정치적인 고려로 행해진 행동이었다. 봉림대군이 후계로 정해진 이상 그의 정통성을 위해 소현세자 가계는 배제되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신하들의 반대를 권위로 찍어누르는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해석해서 인조의 인격적 결함에서 원인을 찾는 주장이 많은데 모든건 철저하게 짜여진 각본이었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의 후계자 선정과 소현세자 가계 제거 과정을 보면 우선 인조의 권위가 일반인들이 생각과는 달리 매우 강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조의 양팔이 되어 실행조 노릇을 한 사람들이 보인다. 김자점 소용 조씨. 둘은 각각 봉림대군의 후계자 선정 과정과 강빈 제거에서 실행조를 맡아 인조의 의도를 성사시켰다. 그 반동으로 왕을 직접 비판할 수 없는 왕조국가 특성상 미운털이 모조리 이 둘에게 박혔고 정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총애하던 인조가 죽으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었는 상황에 놓여버린다.

실록에서는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라고 쓰고 있다.'는 사관평이 남아있는데 강빈 죽음 관련해 어그로가 전부 조씨에게 몰렸음을 알 수 있다.

인조는 그래도 자신의 개 역할을 충실히 해준 이 둘을 어여삐 여겨주었지만 효종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김자점은 효종 즉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왕이 훙했는데 눈물 안 흘린다는 얼토당토 않은 죄몫으로 축출되었다 반역 혐의로 제거되고 조씨는 장렬왕후와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했다는 죄몫으로 사사되었다. 그나마 조씨는그녀의 자녀들을 잘 대해주고 많이 도와주라는 인조의 유언 덕분에 자녀들의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아래 혈육핍박을 단순히 마키아벨리즘적으로 인식해서 변호를 해주는데 물론 권력관계 특히 절대군주제같은 절대권력관계에서는 비인간적인 행보가 자주나오는 것도 현실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이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절대적인 이론이 아닌만큼 인권적 반론도 나오는게 현실이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키아벨리도 그 악행으로 인한 피해보다 이득이 있어야 마키아벨리즘적으로 변호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인조의 이 행보는 득은 거의 없고 피해가 엄청났다.

아주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인조가 청의 영향력을 배재했다고 주장하지만, 우선 청이 조선을 통합하려 했으면 이미 병자호란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원나라때처럼 허수아비 왕을 파견하려 했다면 당시 청나라는 장자세습의 전통이 없었다. 당장 홍타이지도 장자가 아닌데 황제가 되었고, 인조에게 협박편지에서도 두 아들이라고 명시했는데 이 말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을 왕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소현이 죽을때 봉림은 아직 청에 있었는데 원도 그랬지만 보통 왕을 갈아치울때는 본토에 있는 사람에게 군대를 같이 들려보내 왕을 갈아치우는게 현실적이다. 이미 소현의 가족까지 모두 조선땅에 있는데 청이 궂이 소현세자나 그 가족들을 선택할 이유가 거의 없다. 물론 소현세자나 그 가족을 청에서 왕으로 세울 확률이 아주 없는 것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봉림쪽이 그 가능성이 더 높았고 정확히는 안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이었다. 결국 인조는 가능성도 거의 없는 위협을 두고 소현에 대한 악감정으로 오판해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더불어 이 패륜이 그나마 옹호를 받으려면 결과라도 좋아야하는데 결과는 아주 나빴다. 이 전무후무한 패륜으로 사림들 대다수는 인조와 조선정부에 등을 돌려 산림이 되어 버렸고, 그결과 아들 효종은 산림들의 지지를 받기위해 송시열에게 저자세로 기어야했고, 그래도 이 소현일가에 대한 패륜을 두고 반발이 벌어져 왕권에 큰 흠집이 났다. 거기에 효종이 죽자 송시열 등 서인 산당 과격파는 아예 효종의 승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여기에 반발하는 남인과 심각한 정쟁을 벌인다. 다행히 현종의 조율로 유혈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서인과 남인의 갈등의 골은 지독해져 바로 다음왕인 숙종때부터는 왕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환국이라는 극단적 파벌 정치로 악화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극단적 파벌 정치는 후대로 갈수록 격화되어 최종적으로는 세도정치라는 괴물을 낳아 결국 조선을 망하게 만든다.

정리하자면 인조의 패륜으로 아들부터 증손자까지 3대가 정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왕권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더불어 환국과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붕당 정치의 과격화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간이 인조다. 아무리 마키아벨리즘으로 해석해 변호해주려고 해도 이런 결과물을 낳은 이상 도대체 변호의 여지가 없는 악행이다.

5.2. 긍정


인조에 대한 재평가를 대중에게 처음 알린 것은 오항녕 교수의 평가로 알려져 있지만 오항녕 교수가 아니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조 시기 치세에 대한 연구는 다른 학자들 역시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학자 하나의 연구결과로만 이런 재평가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건 오산이다. 특히 인조 치세에 대한 연구나 평가를 단순히 까가 빠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보는 건 대단히 편협한 시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과는 달리 인조 본인의 판단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인조 본인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정작 뚝심있게 결정을 내려야할떄는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즉, 어떻게든 시행하려는 추진력과 비전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악평의 대부분은 광해군이 남긴 뒷처리까지 인조가 뒤집어쓴다는 주장이 있다. 광해군 때 이미 외교와 정책을 이끌어야할 행정부의 능력이 이전 왕(광해군)이 주도한 물갈이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평가처럼, 만약 인조가 정말로 능력이 없었다면 여러 차례에 호란과 반란을 단순 운이 좋아서 견디며 계속 권좌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말이 정말 안 된다.

권력의 쟁취와 안정 면에서 인조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의 벌여놓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모두 배척 받았다. 광해군이 내치는 사실상 망국으로 만들어버렸기에[59], 공사를 중단시키고, 대동법 확대(즉위 초년에 강원도 확대)등 나름 능력을 발휘했다.[60]

소현세자의 박대건도 실상 단순히 소현을 미워했다는 개인적인 호오 이전에 청의 영향력이 소현세자에게 너무 큰 문제가 있었다. 강빈을 사사한 것도 이게 봉림대군을 위한 행동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지만, 만약 인조가 딱히 개입하지 않았다면 강빈 사사 자체는 후계자에 걸림돌이 되는 전 세자 세력에게 무자비한 숙청을 가한 것이 된다.

봉림대군이 옹립 될 당시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힘을 너무 키워주어 나중에 효종이 그들을 내쫓을 때 나라가 한바탕 난리가 난게 흠이라면 흠인데 이것도 효종이 즉위 후에 김자점을 순식간에 개박살내는 거 보면 과연 인조가 김자점에게 얼마나 권세를 몰아줬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뭐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입장에서는 토사구팽으로 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 단순히 무능한 왕도 아니다. 스스로 반정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고, 인목대비의 명분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원익, 최명길, 정충신 같은 중요 인사들도 보호해주었다.[61] 국가운영 면에서는 광해군보다 확실히 나았다. 자기가 친 사고를 보며 통곡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도 가져서, 1623년 즉위 초의 대동법 개정, 1633년 상평통보 발행과, 1634년 3남 일대 양전, 군사개혁 같은 업적을 남겼다.[62] 대외정세에 대해서도 신하들보다는 인조의 판단력이 그나마 우월한 수준이었다.

현대의 인식이나 미디어에선 광해군 이미지까지 뒤집어 쓰는 왕이기도 하다. 하지만 광해군은 행정이나 경제 분야에 밝지 못하여, 선조의 중신들을 죽이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상황을 인조 말기가 되어서야 회복될 정도로 악화시켰다. 일례로 광해군이 궁궐 예산을 메우기 위해서 매관매직을 허락한 결과, 궁핍한 백성들끼리 좋은 수령이 쫓겨나지 못하도록 돈을 모으는등 전후복구와는 동떨어진 방향에서 국정이 엉망이었다. 인조 시절의 조선이 왜 국가안정화에만 신경을 썼는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광해군 말기의 실정까지 인조 탓으로 덮어씌우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삽질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살피고 김육, 이원익 등의 실무자들을 방해하지는 않아, 정말 필요한 개혁 자체는 그럭저럭 진행한 왕이기도 하다.[63] 덕분에 말년에는 국정 실패를 만회했고, 아들 효종부터는 암군들의 역사를 끝내고 그럭저럭 국가가 돌아가는 기틀을 물려주었다. 죽기 전에는 효종(세자) - 현종(세손)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후계자들을 깔끔히 했고, 광해군의 실패와 청나라 태종에게 털린 뒤 왕조의 재건에 성공했고,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통해서 경제와 민생을 모두 재건해낸다. 즉 외치나 인사 관리로 따지면 암군의 칭호를 절대 피하기 어려우나, 유명하지 않은 후반기에는 수십년간 이어진 암군들과 전쟁의 여파를 막아내면서 숨을 돌릴 기회를 주었다.

당장 인조는 반정한 바로 그날에 영건, 나례, 화기 등 12개 도감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조도사 6명과 제주 목사의 처형을 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정치적 과장이 있기는 하겠지만, 민의 고통에 대한 반정세력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극심한 흉년으로 재정난이 예측되는 시점에 광해군의 조도성책을 불살랐던 것, 조도관이 민간에 흩어져 비축해둔 미, 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던 것도 그 연속선에 있는 조치였다. 또한 인조는 즉위 후 6개월 만에 민에게서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 수천 석을 삭감했다. 이 원곡은 진헌, 제향, 어공에 쓰일 예정이었는데, 광해군 13년 이전의 미납 공물이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인조 말년 공식적인 공물가 원곡의 총량이 5만 석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때 삭감된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 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서나마 광해군대의 '일탈' 을 '정상화' 해야 했다.[64]

광해군 대는 국가 재정 수요가 폭증하면서 납세자들의 납세 부담이 급증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공물 납부 및 징수 과정에서의 구조적 폐단으로 존재했던 방납(防納)이 다시금 부활했고, 궁궐 공사가 과도하게 연이어 추진되면서 수많은 백성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왕실을 최정점으로 한 지배층의 사치 및 낭비 풍조가 만연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광해군 치세 3기인 광해군 10년 ~ 15년(1618년 ~ 1623)의 5년 동안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조정이 '여민휴식'의 기치 아래 국가 재정 규모의 감축, 긴축재정의 실시, 세금 부담의 완화와 같은 개혁적 움직임을 추진해왔음을 고려해보면, 광해군 정권의 일탈적 양상은 바로 그 '여민휴식' 정책의 '부작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중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인 1640년대를 소빙기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670년 ~ 1700년 무렵이었다. 중국 역사학계가 1640년대를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시기로 이해하는 까닭은 바로 이 무렵 왕조 교체를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 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65] 반면 같은 수준의 이상 저온의 충격을 받은 1640년대 즈음의 조선은 도리어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이는 인조 정권이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긴축 재정, 세금 부담의 완화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위해 매진했던 덕분이다.[66]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여민휴식을 국정 운영 모토로 하여 국가재정 규모 감축, 긴축 재정, 세금 부담 완화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광해군 대에 완전히 180도 돌아서 일탈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국정을 운영한다. 덕분에 중국이 왕조 교체라는 격변으로 이상 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무사히 넘기고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 아무리 효종이 명군이라도 처음부터 기반없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운 법이고 인조는 꽤 의미있는 성과들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여민휴식이라는것은 본래 중국 전한의 황로학파가 내세운 사상으로서 전한 초기 문제와 경제의 정책이었다. 여민휴식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으며 이는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다. 선조는 임란 이후 이 정책을 실행했고 이 정책은 인조가 계승하여 효과를 거두게 된다. 효종 3년에, 전 판서 조경이 '중국의 능화지로 벽을 바르고 능단과 금수로 만든 옷을 해 입고,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 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 까지 만연했다고 한탄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족들까지 편승 하는 등, 사치 낭비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인조 - 효종기의 국가 사정은 오늘날의 생각보다 상당히 나은 것이었고 이런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정책은 현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점차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 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현종 말기부터 숙종 시대에 이르는 소빙기로 인한 기근의 연속은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것은 숙종, 영조, 정조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데.이는 한나라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호족이나 지주 계급이 성장했고 이로 인한 사회 양극화로 인해 한무제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 주도, 국가의 사회 경제 개입과 법가적인 통치책을 쓴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또한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인조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놀랍게도 병자호란 이전까지 광해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의리를 떠나서 이익 관계로 생각해도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인조이든 광해군이든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친명 정책을 유지하되, 청(후금) 자극은 자제'이다. 이는 과거 고려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유지했던 노선과 똑같다. 왜냐하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그 순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막혀있었고, 정말 심각한 내분으로 명나라가 자폭하지 않는한 자력으로 청나라는 도저히 명나라를 끝장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과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대체적으로 청나라에게 밀리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송나라는 그보다 더 심하게 털리면서도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요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대세가 청나라이니 실리를 위해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결국 후대의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명나라의 멸망은 이자성의 난 때문이므로 청나라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어렵다고 본 조선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이 반란의 성공은 청군 때문에 명의 전력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지만, 어쨋거나 청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서 오삼계에게 막혀있었다.더군다나 명나라는 남송으로 살아남은 송나라 때의 교훈을 살려 강남에 많은 물자와 지방군으로 이민족이나 반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세워진 남명이 숭정제의 대책없는 자살과 후계의 불안정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망해버렸다.[67] 따라서 조선이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유사한 상황에 있었던 고려의 대응책이 된다.[68]

결국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가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는, 기본적인 외교 노선이 아니라 구체적인 외교 스킬의 문제다. 물론 그 외교 스킬을 다룰 광해군-인조 시기 조선의 관료들의 인식 자체가 너무 떨어진게 문제이지만. 실제로 광해군 시절 집권 세력인 대북의 대외인식은 이후의 서인들이나 남인들보다 더 꼴통들이었다.

물론 이괄의 난은 그의 실책이 맞다. 정쟁에 의해 발생한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정예군이 배치되었던 북쪽지역 방어가 허술하게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서북지역 군관들은 이괄의 난 이후로 역적으로 몰릴까 봐 진법 훈련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전략 예비군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상황에서 그가 아예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다시 군적을 정비하고 중앙군을 증강했다. 5군영 중에 선조 대에 창설된 훈련 도감, 숙종 대에 창설된 금위영을 제외한 어영청(1624년), 총융청(1624년), 수어청(1626년)이 인조 대의 작품이며 금위영의 모태가 되는 정초청도 인조 대에(1636년) 신설된다.[69] 그리고 이괄의 난의 교훈을 받아들여 광해군 대에 내버리다시피했던[70] 기병 전력과 근접전 능력의 배양이 이뤄졌다. 쌍령 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지방군과 달리 중앙군은 팔기군에 밀리지 않는 역량을 보여줬다. 숫자가 적어서 문제였지. 또 그냥 성곽만 세워놓은 수준이던 남한 산성을 천혜의 요새로 탈바꿈 시키고 강화도 성지도 증축해 방어 체제를 정비하면서 수도권 방어에 주력했다. 정작 서북 지역 방어가 이괄의 난 이후로 박살 난 시점에서 병자호란 초기에 허무하게 북쪽이 금방 뚫리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지만 뭔가 잘해보려고 해도 이런게 나오는게 인조 퀄리티니 이건 어쩔수 없는 부분이고(...).

여기에 인조가 재수가 없었던건 하필이면 체찰사와 강도 검찰사가 김자점 김경징이었다는 것과 하필이면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남한 산성에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 이괄의 난으로 북방 지휘관 상당수가 날아가고 장만과 정충신도 병사해 호란 당시 인조 정권에는 믿고 맡길 국방 전문가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물자가 거의 고갈되기 직전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며 10만 대군을 막아서던 인조가 왜 강화도가 함락되자마자 바로 항복을 했는지도 답이 나온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왕이 들어갈 때는 죽음도 불사하겠다고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고 세자를 요구하자 세자를 내주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하며 비굴한 태도를 보인다. 호란이 발발한 그 시점에 인조의 선택지는 사실상 강화도가 함락되지 않기를 비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다른 이야기지만 병자호란 자체는 조선이 무조건 잘못해서 발발한 전쟁이 아니다. 세폐에 형제관계까지 조선은 명과 단교하고 (산해관도 못뚫던) 청과 군신관계를 맺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제외하며 어떻게든 들어주려 했다. 병자호란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당시 청나라는 약탈 경제 체제로서 경제 상황 자체가 완전히 파탄이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침공의 구실을 찾았어야만 했다.

조선의 인조는 고려 고종과 달리 나름 실권을 쥐려고 했으며, 그 나름대로 왕권을 공고히하니 그 나름대로 업적이 있으나 고려 고종이 외치에서 업적을 닦은 것과 달리 내정에선 고려 고종과 달리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는 또 나름 칭찬이 가능하다. 앞전에 왕이 폐위가 되었는데 고려 고종은 스스로 오른 것이 아니라 권신들 손에 올랐고, 반대로 조선의 인조는 스스로 올랐다는 점에서는 높은 평을 받는다. 본시 앞전에 왕이 폐위가 되면 실권을 잃는 경우가 허다한데 조선 인조는 실권을 얻었다는 점에서 내치에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받는다. 대체로 조선 인조가 욕을 먹는 것은 외치에서의 비판이지 내정에선 그런대로 괜찮은 왕이었다. 반대로 고려 고종의 경우는 외치에서 많이 극찬받아도 내치에선 장기간 재위에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권신들에게 휘둘렸다.

또한 혈육 핍박에 대한 변명을 해 보자면,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71] 왕조 국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식으로 정적이 되는 사례는 고대부터 무척 흔하고 초성왕의 예처럼 둘 중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예도 적지않다.

소현세자의 경우에는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원 간섭기 고려가 타국 역사학계에선 원의 속국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왕조 국가에서 왕이 원의 의중에 따라 갈아치워지고 원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청이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킨다면,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사후 승인에 머물렀던 명의 책봉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조선 왕실에 가해진다.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조선 왕이 탄생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은 당연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의 행보는 그런 위기의식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을 잊었는가? 짐은 나한테 무릎 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는가 하면, 항복 조건에 "유고시 (자기네 손아귀에 있는)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굳이 넣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쯤엔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있었다.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으로 인조의 권위가 떨어진 상황에서 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그렇지만 절차와 조사를 무시하고 억지로 죄를 뒤집어써서 위의 변명은 자신을 정당화한 변명에 불과하다.

6. 인조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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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릉(長陵). 단종 능,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능도 장릉(章陵)인데 이 둘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장릉(章陵)은 김포에 있다. 첫 왕비 인열왕후 한씨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삼전도비 테러범이 다음 표적으로 타겟팅한 물망에 오른 곳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능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장릉 참고.

7. 인조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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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어필로, 행서체로 적혀 있다. 대대로 필체가 반듯한 조선 왕가의 특질은 계승된 듯.[72] 다만 필체를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시들에게 베끼게 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8.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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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도서관에 있는 서흔남 동상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송파도서관에 세워진 일종의 미담 동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인조를 업고 피신한 나무꾼 서흔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서흔남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실존 인물로 대장장이 나무꾼일을 하는 낮은 신분이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남한 산성 외부의 근왕군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로로 양반이 되고 벼슬까지 제수받았다. 인조를 업고 피신시켰다는 전설이 가장 유명하며 인조가 피난 당시 입던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9. 대중매체에서

9.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가장 비판받는 군주.[73] 광해군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기로 결심한대로 패륜적인 임금이 되지않도록 보여주려고 노력한 초기 모습은 높이 평가하였지만, 결론은 자기가 만들어낸 참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 뿐.

책 초반에 인조의 초기 균형 감각과 자비는 꽤 괜찮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위 직후 이귀가 왕족 인성군이 종친들을 거느리고 인목 대비를 폐하자고 주청한 것으로 죽이자고 하자 반대했다. 인성군은 이후 두차례나 역모[74]에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이괄의 난에서도 인성군이 직접 자금 제공을 하는 등 참여했다는 진술에도 참고 그를 살려주었다. 결국 끝내 북인 유효립의 역모 사건 때문에 인성군을 죽이기는 했지만 성의성의 간언에 인성군의 가족에 대한 연좌제를 물리쳤으며, 이후 사후 10년만에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또한 광해군 같이 특정 당파만 등용하고 특정 개인에게 힘을 몰아주지 않는 것 또한 높은 평가를 내렸다. 이귀가 선조 시절에 동인이 이이 성혼을 비판할 때 선조가 "이이, 성혼이 당이라면 자신이 먼저 들어가고 싶다"라는 것을 회상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렇게 이귀가 스승을 높이자 인조는 듣기 싫다며 "당이란 말은 비록 주자의 말이라도 듣고 싶지 않소 "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인조편 마지막 파트의 제목은 대놓고 무엇을 하였는가이며, 선조와 비교해도 사실 선조를 훌쩍 뛰어넘는 왕이었다고 평했다. 박시백 화백도 인터뷰에서 "지도자로서는 빵점이며 가장 그리기 싫었던 편"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작가가 고종 편에서는 인물 평가를 최대한 배제했기 때문에, 결국 이 작품 전편을 통틀어 인조가 가장 심한 비판으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75] 인조 편 마지막 페이지에 "패륜을 명분삼아 반정한 그였지만 '패륜'에 있어서도 밀려 보이지 않는다"라고 써 놓았는데 그 다음 장면에 광해군 그림이 나오면서 "밀리긴? 나보다 더하구먼. You Win "이라고 써 놓은 걸 보면 진짜 마음에 안 들어하는 듯.[76]

박시백은 완결 인터뷰에서 작품 속 가장 짜증나는 인물 2명 중 하나였다고 대놓고 말했다. 나머지 1명은 인조의 할아버지 선조.[77] 자세한 것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문서 참조. 조선 중기 이후로 "조선이 왜 망했는가?"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외치를 중시하고, 내치를 크게 경시하는 박시백의 성향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9.2.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 남한산성

국역본 조선왕조실록이 없어 일반 작가나 PD가 사료에 접근하기 매우 어려웠던 1980년대 작품답게 폭군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밀어내고 등극한 것으로 묘사된다. 배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유인촌. 그저 한없이 착하게만 나온다. 청나라가 쳐들어와도 명나라와의 의리 드립을 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남한산성으로 도주 후 용골대에게 잡혀서 어쩔 수 없이 청나라에 항복했다. 이후의 왕실 피바람은 일절 언급조차 없다.

9.3. 드라마 일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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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의 전 드라마 일지매에서 대표적인 악역이자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청나라에게 휘둘려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자신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겸(극중에서의 일지매)의 아버지(인조의 동생으로 나온다.)를 죽이는 만행도 저지른다. 백성들과 만날 때는 성군인 것 같이 행동하지만 궁에 들어오면 본색을 드러내는 교묘한 이중 플레이의 인물. 걱정하지 말라며 덥썩 평민 노파의 손을 잡고 달래다가 다음 신에서는 삐뚤어진(;;;) 얼굴로 을 말끔히 물로 씻는다. 결국 마지막 화에서 일지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일지매가 용서해줘서 간신히 살게되었으나, 이후 정신착란 증세에 걸린다.

김창완이 연기했는데, 왕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대체로 후덕하게 생기거나 카리스마가 있는거와는 달리 좀 빈약하게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부분 때문에 과장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직접 기른 수염으로 연기했다. 다만 목소리랑 싱크가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9.4. 최강칠우

최정우가 연기했다. 드라마 전개상 비중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악의 축. 측근인 김자선[78]에게 소현세자를 죽이도록 지시했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소현세자의 막내 아들 이석견이 살아있는 것을 알게되자, 데리고 와서는 완벽하게 독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석견을 보호하고 있던 소윤이 총으로 쏴 죽이려고 하자 미쳐버리고, 자신을 부르는 소현 세자의 환청을 들으며 자신이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며 세자를 부르며 갑자기, "그놈이 세자 그놈이 내 자리를 노렸단 말이다 아들이 어찌 애비의 자리를 노릴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왕이야. 감히 누가 나를 죽여. 누구든 내 자리를 탐내면 다 죽여버릴게야"라 발광하나 다시 "내가 그런게 아니야. 내탓이 아니야. 세자야, 내가 아니야"하며 결국 이 일이 원인이 돼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

9.5.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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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에 나온 것처럼 김갑수 선생이 연기, 첫 등장은 대전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는 장면으로, 석견이 귀양간 제주도에 역병이 돈다는 말에 석견의 안위를 근심하는 척("참으로, 딱한 아이로다.") 하는 등 겉보기에는 성군 흉내를 내고 있으나, 불안정한 눈빛으로 음험한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그 뒤로 등장하지 않다가 청나라 용골대가 사신으로 방문하는 에피소드에서 다시 등장. 용골대가 소현세자와 의형제를 맺은 인연으로 석견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자[79] 크게 근심하며 이경식에게 제주도의 일은 어찌되었는가 묻고, 이경식이 용한 의원을 내려보냈다 하자 안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용골대와의 회담에서 석견을 보낼 수 없다고 하나, 이경식에게 석견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고받고는 분노한다. 이때의 위압감은 악의 축 이경식도 움츠러들 정도. 용골대와 을 쏘며 대화를 나눌 때를 보면 용골대 말마따나 조선인답게 활을 잘 쏜다. 마지막에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석견의 사면을 청하자 이는 자신이 죽고 봉림이 왕이 된 후에 하라고 한다. 이때 남긴 "이건 내 역사니라."라는 독재자 카리스마 압권.

처음엔 그저 배경 정도로만 등장하는 왕인가 하고 시청자들의 관심에 없다가 갑자기 김갑수 선생의 폭풍간지 인조 연기를 보고 충공깽에 빠진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같은 배우가 연기한 연개소문에서의 수양제를 연상시키는 사례. 갑수옹이 괜히 악역본좌 소릴 듣는게 아니다.

9.6. 전 드라마 탐나는도다

공부의 신의 영어선생 양춘삼( 앤써니 양) 역으로 유명한 이병준이 연기했다. 외국인인 박연(벨테브레)와 윌리엄을 등용하여 재능을 발휘해서 조선에서 기거하도록 명했다. 윌리엄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연극 햄릿을 왕실에서 연출하는데 하필 인조의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거의 죽을 뻔했다.[80] 같은 드라마에서 광해군이 은거 중인 현자처럼 묘사되는 것과는 비교된다.

9.7. 마의

선우재덕이 연기하였다. 행적들은 추가바람.

9.8.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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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의 전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는 이덕화가 인조 역할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는 궁중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인조의 악역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소현세자 독살설을 채택했다. 병자호란 이후 스스로 갖게 된 열등감 등으로 인해 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조 귀인 김자점의 농간으로 인해 결국 아들 부부를 죽음에 이르게끔 만든 걸로 나온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판단력이 흐려져, 이 드라마에서의 인조는 폭군이면서도 막후 실세인 조 귀인의 야욕에 이용당하는 꼭두각시 국왕이라 봐도 될 정도가 된다. 극 중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성 사이코. 첫 왕비 인열왕후와 사별한 후 44세에 15세의 어린 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이하면서, 첫날 밤에 다른 후궁의 방에서 술을 마시는 진상(?)을 부리기도 했다. 김자점은 이런 인조를 가리켜 "정숙한 여인 앞에선 뭐가 그렇게 찔리는지 오금이 저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화를 다른 여인에게 푸는 걸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 따로 없다. 안 그렇소? 능양군 나리"라는 대사를 날리기도 했다. 극중에서 위 사진처럼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익선관을 쓰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것도 왕 자격이 없는 인간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토리가 진행되어 갈수록 안습한 인간이 되어가는데, 조 귀인의 농간에 넘어가 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그 죄책감으로 미쳐가기 시작하고, 덤으로 조 귀인이 몰래 인조의 차에 아편을 넣는 바람에 아편 중독자까지 된 비참한 몰골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임종이 가까워오자 조 귀인이 자신이 중전이 되려는 음모로 인조를 감금하기까지 하는 바람에 죽기 직전까지 안습한 꼴을 당한다. 그나마 세자(봉림대군)와 중전, 상선이 힘을 합쳐 인조를 구해낸 덕분에 죽는 순간까지 조 귀인에게 이용당하는 꼴은 면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조 귀인이 인조의 꼭두각시였다(...). 자세한건 조 귀인 문서 참조.

참고로 병자호란 패배 주 원인 중 하나가 김자점이 수만의 병력을 갖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은 것인데 여기서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김자점에게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황해도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해 김자점이 군을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인조 본인 때문에 전쟁에 진것을 김자점에게 화풀이해 김자점이 타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9.9.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재미있게도 김훈의 전작 칼의 노래의 싸이코 선조와는 달리 굉장히 동정적으로 묘사된다. 두 임금 모두 무능한 권력을 상징하지만, 두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인 듯. 조용하고 속을 읽을 수 없는 인물로, 청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타계하려 노력하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9.10. 남한산성(영화)

위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남한산성(영화)에서는 박해일이 연기한다. 원작 소설처럼 조용하고 고민하는 모습이다. 유약하여 미증유의 위기를 이겨낼 정도의 능력은 없지만, 김상헌이야말로 진정 충신이라고 아뢰는 최명길에게 오명을 무릅쓰고 항서를 쓰기로 한 그대도 충신이라고 위로하는 등 군주로서의 존엄함은 지니고 있기에 인간적으로 연민이 가는 인상이다.

9.11. SNL 게임즈 - 카스2 병자호란

민교는 더이상은 안 속는다면서 처음부터 조선군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전작과 달리 잡졸, 왕 인조, 장군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어서 인조를 골랐다. 마음대로 하라는 해설을 듣고 옥새로 궁녀를 희롱하며 궁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데, 청나라군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잡혀서, 삼전도의 굴욕을 재현해야 하는데, GTA 군대 시리즈의 모션 인식이라서 키보드의 키가 이마에 붙을 정도로 머리를 키보드에 박아야 했다.

9.12. tvN의 전 드라마 삼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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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을 맡은 김명수가 인조 역할로 출연. 드라마 공홈에 있는 캐릭터 소개를 보면 여기서도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암군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말로 암군이었다. 백성들의 원성과 청에 대한 분노로 갑자기 용골대의 목을 치고 청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나, 주인공과 삼총사의 활약으로 결국 취소한다. 작중 겁이 많아 세자에게 의존하며 의심도 많아 말을 바로 믿지 않는 행태를 보인다. 마지막화 전까지만 해도 능력은 없더라도 불쌍한 왕이라며 동정표가 많았는데 마지막 화에서 그런 동정표 마저 싸그리 사라졌다. 김자점과 최명길을 불러 소현세자가 자신보다 그릇이 크고 왕의 품격을 갖췄다고 겁을 내며 나보다 뛰어난 아들은 원하지 않는다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고 말했고, 이후 청의 침략에 겁을 먹고 "빨리 움직여라 "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나와 동정표가 완벽히 사라지게 되었다.

9.13. MBC의 드라마 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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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적이고, 멀리를 볼 줄도 모르는, 즉, 허수아비 역할도 못하는, 왕좌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 - 강주선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인간적 기본은 돼야, 허수아비라도 제대로 하죠 - 강주선 부인

배우 김재원이 인조를 연기한다.

능양군으로써의 첫 등장에서 부터 광해군이 있는 궁궐을 가리키며 왕의 자리를 향한 야심을 드러낸다. 얼핏 한량 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지만, 광해군과 적대시하고 있는 세력들에게 접근함과 함께 광해군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모습으로 대립을 시작하기는 하는데 조선과 백성을 사랑하기는 커녕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강주선의 꼭두각시가 돼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억울한 고변으로 자살한 동생을 자신이 고발해 죽인 것으로 묘사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조용히 반란을 준비 중이던 인조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23화 때 백성을 선동해 광해군을 곤란하게 만든다.[81] 특히 광해군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듣고 이런 일을 해서 더욱 광해군과 대척점이 있는 인물이다. 백성이 죽던, 나라가 망하던,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백성과 나라를 희생시키는 인간 말종으로 나오며, 심지어는 정명공주가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자 인목대비를 협박하는 패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당장 사르후 전투 후 명나라 앞잡이인 강주선마저 명나라의 국운이 끝난 것을 알고[82] 광해의 실리외교와 화기도감을 통한 국방강화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반해, 인조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유발하거나 화기도감을 없애려고 하는 얼간이로 그려질 뿐만 아니라 나라의 위급함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성과를 은폐한다. 게다가 끼리끼리 모인다고 자신과 똑같은 인간 말종인 김자점과 의기투합한다.

말년에 죽기 직전에야 "내가 너를 미워한 것은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미워해서다."라며 화해. 하지만 강주선과 김자점 등은 그대로 소용 조씨의 숭선군을 옹립하려고 한다.

여러가지 고증오류를 보이는 "화정"에서 특히 왜곡이 많다.(...) 이기적이고 쪼잔한 인조에 대한 성격 묘사는 괜찮지만, 이걸 역사 그대로라고 평가하는 건 무리가 있다.

9.14. KBS의 전 드라마 오렌지 마말레이드


인간세계의 왕으로 흡혈족의 수장과 평화협정을 맺는 착한 왕으로 나온다. 뭐?!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9.15. 천윤의 비사

대체역사소설 천윤의 비사에서 주인공을 괴롭히고 마음을 다 잡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결국 항복 이후 본격적으로 나라 상황은 생각지도 않고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암군의 모습을 보이면서 공명첩 발행과 북벌 준비를 하면서 주인공과 소현세자를 괴롭히고 며느리 강빈이 성경(심양)에서 아들을 나으면 후계자로 만들려고 하나, 결국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세자와 같이 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송시열을 성경으로 보낸다. 그러다가 어의 이형익을 보내 죽이려다 실패하고 주인공과 세자가 국내로 들어온 틈을 이용 죽이려다 실패하고 국경 지역까지 도망친 주인공과 용골대, 소현세자를 죽이려다 또 실패하는 등 막장 아버지 겸 막돼먹은 행동 하다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를 하나 결국 주인공 김민재와 용골대의 3만 군대로 인하여 항복하고 능양군으로 격하 성경(심양)에 유폐되고 인조실록에서 능양군일기로 사서도 격하된다.

10. 관련 문서



[1] 이것이 청에서 받은 첫 시호지만 조선 조정은 청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표제를 살펴 보면 선조실록까지는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명의 시호를 붙여서 사용해 왔지만 인조실록부터는 그냥 '인조대왕실록'으로만 제목을 정해두게 된다. [2] 인조반정 후 추숭 [3] 인조반정 후 추숭 [4] 다만 선조 인목왕후의 나이 차이가 하도 많아서(32년), 고모 정명공주와 삼촌 영창대군은 능양군보다 더 어렸다. 그리고 명목상 할머니인 인목왕후는 능양군보다 고작 11살 위였다. [5]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 차남이자 서자인 능풍군, 그리고 3남이자 적자인 능원대군,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 [6] 작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 [7] 연산군일기 2권, 연산 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 [8] 다만 이때는 명나라에도 인종이라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봐서 성종으로 정해졌으며, 연산군이 통감에 나온 중국 송나라 송인종을 들어 성종이라는 묘호가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조선 성종은 한국사 순위권 암군인 인조 따위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인 명군이다. [9] 세종대왕은 4군 6진의 개척을 이유로 세(世)를 묘호로 하였다. 왜 조가 아니라 종이었냐면 개국을 한 태조 외엔 조 자를 쓴 예가 이전까지 없었으므로.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 태조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朱世珍). [10] 다른 시대로 가면 신라 신무왕 역시 복수를 목적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참고로 그는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다. [11] 유희분이 뇌물을 먹고 입을 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2]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은 인조 반정 때 군사적으로 지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던 김류와 이귀처럼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 공신으로 밖에 배정을 받지 못해서 벌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권력 다툼이었다. [13] 이들을 청서라고 일컬었다 [14] 인조반정의 중심인 이귀 역시 고려 때 처럼 송나라( 남송)와 금나라를 동시에 섬겼는데 조선도 그러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문제는 요나라 - 북송 때도 그랬다.) 문제는 명나라가 송나라와 달리 갑자기 무너졌다는 것이다. 다만 영원성 전투를 보면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다.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은 것은 이자성에게 명나라가 망하고, 이 때문에 제거 당할 위기에 놓인 오삼계가 열어준 것이다. 조선에 근접한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고 명나라가 바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15] 조선에 우호적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을 칠 여력이 없던 것이다. 당장 정묘호란에서 후금이 동원한 군사는 3만이고, 북방선이 아작이 나있는 조선에 안내꾼들까지 데리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강화를 맺고 물러나야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16] 정묘호란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홍타이지로서는 조선을 치는 것은 그냥 안그래도 유지하기 힘든 군대를 완전히 말아먹고 후금이라는 나라를 멸망에 몰아넣을 삽질이 될 것이었기에 조선을 칠 생각은 상황상 못했을 것이다. [17] 인조 정권 초반 조선은 후금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서북 방면의 거점 방어를 최우선시 하였고 그에 따라 방어 체계도 수립됐다. 그러나 이괄의 난 으로 인해 약화된 서북 지역 방어 대신 임진강, 한강, 강화도 방어가 가장 중요시 되는 수도권 방어 체계가 중심이 된다. 수도권 방위를 위해 총 2만 4천에 달하는 병력을 부랴부랴 증강시키기도 하였고 이는 수세적 방어 전략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후금의 예상 진격 루트 1. 의주 - 용천 - 철산 - 정주 - 안주 2. 벽동 - 창성 - 삭주 - 귀성 - 태천 - 영변 - 안주를 예상하고 방어 진지와 산성 정비 등 방어 태세를 강화하여 중앙군인 훈련도감의 병력 250명과 충청 / 전라 / 경상도 = 하삼도 병력 5,000명을 서북 지역에 이동시키며 함경보 남부 병력 2,000명을 평안도로 배치하는등 이괄의 난으로 인해 1만 미만(8,500명)으로 지키던 변경 수비 병력을 16,000명으로 증강하였다. [18] 인조가 김자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애당초 여러 논의를 할 때 자신이 김자점의 허접한 전쟁 대처 논리를 박살내 놓은 바 있다. 하지만 결국 김자점을 도원수로 기용하지 않나, 자점 외에 도원수에 어울릴 만한 인재들을 배제하지 않나... 병자호란에서 수수방관 해도 용서할 정도였다. 최소한 선조 원균을 잘못봤을 때처럼 큰 사고를 안 쳐서 평범한 장수로 오인한 것이 아니다. [19] 아이러니하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터지기 직전에 인조의 가족들이 사망하는 일이 생긴다. 정묘호란 직전에는 인조의 친모인 계운궁이, 병자호란 직전에는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승하한다. 게다가 인열왕후가 승하하기 전에는 대왕대비 인목왕후가 승하한 직후여서 사적으로 복잡한 상황이기도 했다. [20] 다만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일부 역사학자들이 원인을 조선이 아니라 청에게서 잡고 있다.오수창 교수 또한 그러하였으며 한명기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인 역사평설 병자호란에서 그렇게 주장한 바 있다. [21] 명이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건 이자성이 들고 일어난 1639년 이후의 일이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다만 북경을 약탈하여 조선에서 약탈한 양보다 많았지만, 임시방편이었던 모양이다. 이자성이 중요한 것은 이자성으로 인해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삼계는 만리장성의 책임자였다. [22] 광해군 때 중립외교는 오직 광해군 혼자 했다. 집권당인 대북파는 대명의리를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이 앞장서서 대명의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미디어와 달리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0만 대군을 출병시키고, 기근의 허덕이는 조선 백성을 위해 100만톤 가량의 곡식을 보냈다. 물론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독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슬쩍 발을 빼려는 명나라를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 [23] 방비 분부의 경우 상당히 감정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국서 투하 이전에 청 사신들이 돌아가자 바로 다음날부터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조정에서 나오게 된다. [24]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이다. 원래 김류가 군을 지휘해야 하지만, 김류는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도원수로 군을 통솔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패했다고 해도 계속 청나라를 압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시 청나라가 수도를 포위한 것은 장기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자점을 임명한 사람이 바로 인조다. 비록 장만은 능력은 떨어져도, 능력있는 부하에게 지휘를 맡기거나, 부하를 보호하는 등 개념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당시 청나라는 이미 명나라를 버리고 튄 모문룡의 수하들로부터 대량의 수군과 군수품을 지원받은 사례가 있다. 즉, 몽골 원정 당시와는 다르게 수군 전투력이 이미 훨씬 압도했다는 소리다. [25] 강화도 함락 상황이 걸작인데, 당시 인조의 지휘관 인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자세한 것은 김경징 문서 참조.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30일 기사 [27] 삼전도비는 이 사진에 나온 위치에 있지 않고 2010년에 석촌호수 공원으로 옮겨놓았다. 고증에 따르면 정확한 위치가 석촌호수 물 속이라고 하며(당연히 조선 시대에 물 속에 세운 게 아니라, 원래 삼전도비를 세운 위치에 석촌호수의 물이 찼다는 의미다.) 물 속에 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공원 내부에 세웠다고 한다. # [28] 실제로 이 시기부터 반중 감정이 엄청 강해져 나중에 만보산 사건 같은 일도 벌어지게 된다. 문제는 그 대안으로 택한 나라가... [29] 그는 동학 운동을 촉발케 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선정비도 공격한 이력이 있으며, 국가적 치욕의 장본인인 인조의 사당도 공격 타겟에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 남자는 2012년 12월 노태우 생가 방화 용의자로 붙잡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정의 실천 행동당이라는 진보 단체 소속으로 밝혔으며, 방화 현장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 편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 [30] 출처 : 위키피디어, 그리고 위키피디어 [31] 박시백은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예 백성들을 신경도 안쓴 광해군에 비해서 나은 정책을 내놓은 점도 분명히 많으나, 단지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만큼 신하들이 반발하면 그 이상은 문책하려하지 않았다. [32] 설사 인조가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더라도 병자호란으로 인해 왕권이 맨틀을 뚫고 들어간 상황인지라, 신하들 때문에 제대로 정책을 시행할 수도 없었다. 당시 인조의 왕권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예로 들자면, 삼전도의 굴욕 이후 한양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이 자기가 먼저 배를 타겠다고 인조를 밀치면서 탈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임금을 밀치고 자기가 먼저 배를 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 [33] 물론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라든지 군사적으로 불온해보이는 움직임 등을 감시하는 등의 간섭은 있었지만 그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34] 흉년이 심할 때 공물가를 쌀로 대신 내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35] 광해군 대동법에 회의적이었고 재위 초엔 대동법 확대 요청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이는 교과서상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36] 이같은 제도상의 폐해는 고교 한국사 과목에서도 비중있게 가르칠 정도다. 시험에서도 영정법의 취지만을 설명해서 마치 실제로 괜찮았던 제도마냥 낚는 페이크성 출제가 많다. 게다가 세수 보충을 위해 궁전 경비용으로 쓰는 땅인 궁방전, 관청 경비용 토지인 관둔전을 대폭 증가시켰는데 이 토지에서 걷는 세금들은 호조 주관의 중앙 재정에 편입되는 세금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조 입장에서는 면세지가 잔뜩 늘어난 셈이고 실질적으로 국가 재정 증대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게 정설. [37] 물론 인조 집권기와 세도정치가 상당한 기간을 두고 벌어진 일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전단계인 환국이 예송논쟁으로 인한 붕당의 과격화였으며 이 예송논쟁의 주요 책임자가 인조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38] 최명길은 조선 시대에 유일하게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한해에 모두 급제한 괴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초시생이 한번에 합격한 셈. 인조 정권에서 군계일학의 현실주의자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청의 파병 요청을 극렬 반대하여 부결시켰으며, 명나라와 몰래 연락을 취해서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환향녀 박대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도 반대하는 등 종종 인조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은 축출당했기에 박시백의 조선 왕조 실록 인조 편에선 유일하게 동정과 옹호를 받는 인물이다. [39] 반면에 부흥 등 역덕 커뮤니티의 광해군까들이 인조 반정의 결정적인 원인인 양 부각시키는 궁궐 공사를 비판한 내용은 스무 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산 상태에 이르러 10년이 훨씬 지난 후인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전쟁 수행 능력에까지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 그러니까 양 호란의 졸전도 인조 잘못이 아니라 광해군 탓이다(이런 얘기는 인조 정권의 인사들도 한 적이 없다)라는 몇몇 부흥 유저, 네이버 블로거들의 주장과 달리, '국가 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지적한 내용은 전무하고 민가를 다수 철거했다는 것과 공사를 제때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 문제삼았을 뿐이다. 문서 나머지에서도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를 강조했을지언정, 정부 재정의 위기를 암시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오항녕이 광해군대 궁궐 영건 비용을 국가 재정의 20% 이상으로 본 것은 당대의 명확한 통계 수치를 인용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추론에 불과하며, 설사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이를 '국가 재정 파탄'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적어도 반정 세력은 그러한 '재정 파탄'을 —그런 게 있었다는 증거도 없지만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최우선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40] 선조는 이순신과 광해군에 대한 문제를 빼면 특별히 실정이라고 부를만한 정책이 없는 양호한 왕이다. 당장에 왜란 전후 처리를 보면 과연 이 인물이 멍청하다고 왜곡되는 선조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절한 외교 정책과 복구 정책을 펼쳤다. 심지어 여진족의 강성을 우려해 여러 번에 걸쳐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적당히 여진족을 예우하는, 등거리 외교의 시초를 세운 것이 선조다. 그래서 그 당시 선비들이 선조는 일본을 막아내지 못하지만, 여진족은 잘 대처했다고 한다. [41] 이 부분 때문인지 청은 조선을 침공한 후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온 것은 다 너네 임금 때문이다.' 라는 내용을 적는다. 즉, 이 당시인조가 보낸 도발성 격문을 읽고 그대로 받아쳐준 셈. [42] 저 논리들도 반박이 가능한게 이미 광해군 시기에 적들이 성을 놔두고 바로 수도로 직행하면 어쩌냐며 비변사에 대책을 마련할것을 지시한적이 있던것 도원수 김자점을 무능한 자인걸 인지하지 못한것 남한산성에 군량미를 제떄 비축하지 않은것 등등으로 반박이 가능하다. 특히 김자점 직전에 있던 이들은 유능한 이들이란데서 더 까일만하다. [43] 城 자로 추정됨. [44] 軍 또는 兵 자로 추정됨. [45] 참고로 이 대화 앞에는 안주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 대화 다음에는 최명길이 "기어이 척화를 하려거든 의주를 어떻게든 사수해야지 북방 방어 거점이 안주 하나여서는 안 된다. 기왕이면 정부가 의주까지 나가서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투 태세를 취하자."는 요지의 진언을 올렸다. 최명길의 말에 인조는 깜놀해서 "너님이 의주를 반드시 지키자는 건 너무 막나가는 말 같다[卿之必守義州之言, 似乎過矣]"고 했다. [46] 다른 말로 하자면 적군이 공격해온다면 공격당할 첫번째 지역이 된다는것이다. 그런곳을 방치 수준에 가까운 방임을 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임진왜란의 선조는 그정도 판단을 하진 않았다. 선조가 전쟁에 대비해 많이 공을 들은 지역은 일본군의 공격 제1,2순위가 될 수 있는 경상,전라였기 때문 이중에 경상도 방면은 실패했지만 전라도에서는 성공해서 임진왜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47] 해당 회의 기록은 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백마성의 병력과 물자를 옮기면 의주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김류의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 대책에, 인조가 "지금 대책을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면서 말로는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거 아니냐[今不能預加措備, 而徒曰可守, 豈不異乎]"며 황당해 하는 반응으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1. 의주를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대책도 없으면서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건 "이상하다"와 2. 의주를 지킬 수 있는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니 지키는 거 일단 "포기하자" 둘 중에 어떤 것이 저 회의의 결론에 가까운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48]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15일 을묘 1번째 기사, 2번째 기사 참조. [49] 이는 인조정권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정통성 있게 왕위를 물려받은지라 나름대로 중립정책을 할 수 있었다지만 인조는 광해군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했고 그 '찬탈'한 명분은 폐모살제와 재조지은이었다. 문제는 폐모살제는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서 대충 실천에 옮겼는데 재조지은은 명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인것 인조나 인조정권의 수뇌부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괜히 후금-청을 건드렸다가는 우리나라만 망할거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청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또 재조지은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일이다. 결국 인조정권 성립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인조정권이 그렇게나 청을 건드리진 않으려고 했음에도 인조정권 자체가 청나라에 호의적이진 않은건 청이나 명이나 다 알았다. [50] 실제로 이귀,김류,이서,신경진등 반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4명은 군관을 각각 400명씩 거느릴 수 있었다. 당시 이귀야 죽고 없었지만 아직 나머지 셋은 살아있던데서 보면(이후 이서는 병자호란 도중 사망) 무려 12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사병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거다. [51] 이괄 역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인조는 자기 사람인 이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아들을 붙잡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놓고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지휘하는 아버지가 가만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인조가 비밀리에 이괄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이괄의 난은 반쯤 인조가 일으킨 사건인 셈이다. 믿을거면 확실히 믿고 내칠거면 확실히 내쳐야 했는데 어설프게 행동해놓고 자기가 바라는대로 되게 해달라고 한 셈 [52] 하지만 국방 강화를 이 때 얕볼 수 없는 것이 정충신이 광해군 대의 절반만 해도 후금의 방비를 막을 정도라고 최소한의 조건의 2배 이상의 방어를 해둔 상태였다. 즉 수비전에 필요한 전력은 충분하다못해 넘치도록 해둔 상황이었다. [5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얘 선조하고 비교한다(...) 여기서 선조와 인조가 같은 장면에 나와서 선조는 "폐세자 희망 파천 1회" 라고 말하고 인조는 "폐세자 실현 파천 3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조의 말이 압권 "2:0 니가 이겼어" [54] 애초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광해군이 몇 년만 유지되었으면 후금은 대기근으로 알아서 자멸했다. 후금의 당시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지도 않은 정신승리일 뿐이다. [55] 출처 : 승정원일기 [56] 인조 47권, 24년(1646년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2월 7일(갑신) 2번째 기사, 2월 8일(을유) 3번째 기사, 2월 9일(병술) 1번째 기사 [57] 작은 아버지. 인조는 인평대군을 말하는 듯하다고 주장 [58] 당시 강빈 사건은 철저히 인조가 독단적으로 조사했으며, 의금부 등 신하들을 통한 정식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59] 국가재정의 1/3을 궁궐에 쏟아 부었다. 지금도 돈 안되는 대규모 토목공사하면 나라가 거덜나는데 국고의 1/3을 십수년간 퍼부었으니... [60] 물론 확대했던 대부분의 지방은 1년 만에 강원도를 제외하고 취소했기에 강원도만 확대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동법을 확대하기도 쉽지 않았다. [61] 단, 최명길은 조선과 인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도 믿지 않았으며, 정충신의 경우는 광해군 시절 군사첩보의 핵심 인력이었지만 인조 시대에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정충신은 염탐과 행정, 군사배치 등이 특기인 인물로 외교사절로도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짜 외교사절보다는 홍타이지를 회유를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후금의 군사 배치 등 여러 정보들을 염탐하기 위해 광해군이 밀명을 내린 것이었다. 현장요원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이괄 같은 맹장을 좋아해서 그런 인재를 썩혀둔 것이 문제였고, 후기에는 그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다가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그리고 임경업은 국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62] 물론 이 모든 업적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흐지부지되어 제몫을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63] 그러나 군사 쪽으로 정충신과 남이흥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괄의 난 직후 후금에 대비해 방비책을 제시하는 둘을 면전에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남이흥은 사실상 소모품 취급으로 사지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64]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65] 조영헌, 「'17세기 위기론'과 중국의 사회 변화 - 명조 멸망에 대한 지구사적 검토」, 『역사비평』107, 2014년, pp.183 ~ 192. [66] 김성우.「光海君 치세 3기(1618년 ~ 1623년) 국가 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 경제의 붕괴」(『大邱史學』118, 2015년 [67] 남명이 빠르게 정권을 안정시키고 온전히 살아남아 중원을 양분 했다면 조선과 남명의 연합으로 청나라가 역관광을 타거나 적절한 힘의 균형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흘러갔을 수 도 있다. [68] 여기에 대해서는 '고려는 군사력이 충분했지만, 조선은 아니었잖아?'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삼전도급 굴욕은 아니었어도 2차 여요전쟁에서 상당한 위기를 격었다. 정묘호란의 경우는, 서희의 외교 담판 급은 아니더라도, 조선 입장에서는 출혈을 최소화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도 성공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고려는 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을 박살 낼 기회가 있었고, 조선은 기회가 없었다는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 [69] 정초청에 현종 대(1669년) 신설된 훈련 별대를 1682년 통합하여 만들어진게 금위영이다. [70] 목장 관리는 고사하고 감목 관직조차 광해군 대에 없어졌다가 인조 대에 복구된다. [71] 그래도 제법 정략이 늘었던 제위 후반의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후반기의 정국을 철저히 자기 뜻대로 끌고 나가며, 민회빈 강씨를 사사해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세자(효종)는 물론 세손(현종)으로까지 이어지는 후계구도까지 완성시켜놓고 죽는다.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같은 이들이 대중매체에서 인조를 쌈싸먹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이들은 그저 인조의 장기말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들은 싱겁게 제거된다. [72] 영조의 경우는 필체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73] 마지막에 무엇을 하였는가라며 인조 비판용 챕터를 따로 만들어 놨다. 욕 먹는 왕은 뒤로 갈수록 많지만 비판 전용 챕터가 따로 있는 경우는 인조가 유일. [74] 박홍구와 아들들이 광해군을 태상왕 삼고 인성군에게 전위시킨다고 했었다. [75] 다만 이건 작가 본인이 최고로 좋아하는 조선 왕 3명 중에 한명으로 광해군을 뽑았을 정도로 광해군에 대해 옹호를 많이 하는 편이기에 그런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76] 박시백 만화와 대중의 이미지를 인용하여 선조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여론이 인터넷에 많은 편인데, 적어도 선조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나라를 지켰으며 매우 양호한 편에 속하는 왕이다(정작 박시백의 만화에서도 선조의 정치력이나 판단력이나 인사 방식 등은 어느 정도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인조의 인선은 권력유지를 제외하면 모두 무능하였다. 거기다 선조는 도읍인 한양을 1번 떠났지만 인조는 무려 3번이나 떠났고, 선조는 폐세자를 희망 했지만 인조는 실현하고 심지어 죽였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책에서도 선조가 엑스트라로 출연해 "2:0, 네가 이겼어." 라고 한다. [77] 선조에 대해 상황 평가는 잘 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고 잔머리를 너무 굴린다고 깠다. [78] 모티브는 아무래도 김자점인 듯. [79] 실제 역사에도 있었던 에피소드, 단 이때 용골대가 데려가겠다 한 아이는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 [80] 햄릿과 인조반정의 공통점이 조카가 삼촌을 치는 스토리이다. [81] 실제 인조가 잠저시절에 동생이 역모로 유배가서 자살했는데 대놓고 이런 짓을 했다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82] 그러나 실제 역사상 사르후 전투 이후 청군은 영원성 전투에서 패해 누르하치를 잃고, 대기근에 시달리는 등 명나라를 압도하지 못했다. 훗날이 아니라 당시에는 국제정세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몰랐다. 당시 기준으로 명나라가 일개 농민반란으로 망할지, 그리고 산해관을 지키던 한족 장수가 투항하여 같은 한족을 몰살 할 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사르후 전투 이후 명은 30여년을 더 버티다가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