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의 후궁에 대한 내용은 귀인 조씨(영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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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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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 貴人 趙氏 |
|||
출생 | 1619년 | ||
사망 | 1652년 1월 24일 (향년 미상) | ||
조선
한성부 일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조선 숙원 | ||
1638년 2월 10일 ~ 1639년 1월 24일 | |||
조선 소원 | |||
1639년 1월 24일 ~ 1640년 10월 12일 | |||
조선 소용 | |||
1640년 10월 12일 ~ 1645년 11월 19일 | |||
조선 소의 | |||
1645년 11월 19일 ~ 1649년 3월 23일 | |||
조선 귀인 | |||
1649년 3월 23일 ~ 1652년 1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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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순창 조씨 | |
부모 |
부친 조기(趙琦, 1574 ~ ?) 모친 한옥(漢玉, ? ~ 1652) |
||
배우자 | 인조 | ||
자녀 | |||
봉작 |
숙원(淑媛) → 소원(昭媛) → 소용(昭容) → 소의(昭儀) → 귀인(貴人) |
[clearfix]
1. 개요
조선 인조의 후궁. 아버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조기(趙琦), 어머니는 조기의 소실인 한옥(漢玉)이다.[1]처음 입궁할 때부터 논란을 일으켰으나 인조의 총애를 받아 종1품 귀인의 품계까지 올랐으며, 슬하에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낳아 2남 1녀를 두었다. 하지만 효종이 즉위하면서 몰락하고, 결국 사사되는 최후를 맞이한다.
2. 생애
2.1. 인조의 후궁이 되다
1630년(인조 8)에 궁녀로 입궁했다. 사실 시작부터 조씨의 입궁은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 특히 실록에서는 조씨는 정백창(鄭百昌)이 진납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썼는데, 정백창은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의 형부다. 단순히 소문이 아닌 사실이라면, 조씨의 입궁은 왕비가 주선한 셈. 아무튼 이명준의 상소를 인조가 물리치면서 이때부터 조씨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된다.조씨는 1637년 12월 종4품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이후 1638년에 정4품 소원, 1640년에 정3품 소용, 1645년에 정2품 소의[2], 1649년에 종1품 귀인으로 책봉된다.[3][4] 당시 인조에게는 간택 후궁인 귀인 장씨도 있었으나 조씨에게 완전히 밀려서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2.2. 인조의 남다른 총애
인조의 총애를 믿고 무척 오만방자하게 굴었는지, 실록에는 "조씨가 패악무도했다"고 대놓고 기록하기도 했다. "성품이 간사하여 왕의 총애를 믿고 자신이 싫어하는 이들을 모함했다"는 기록도 있다.1643년, 인조의 승은 상궁이었던 이정민이 당시 소용이었던 조씨를 저주하다 발각되어, 저주를 실행한 직속 나인 애향과 연옥은 각각 거열형과 참형을 당하고, 이정민은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했다. 이 사건은 사실 소용 조씨가 이정민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저주물을 묻어놓고 이정민을 모함한 것이라는 의혹이 전해진다.
한편 인조는 첫 왕비 인열왕후가 출산하다가 죽자, 인조는 44세의 나이에 15세의 장렬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했다. 그런데 소용 조씨가 인조에게 장렬왕후를 모함하는 말을 해서, 사실상 인조가 장렬왕후를 찾지 않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는 소문이 세간이 파다했다고 한다.
2.2.1. 민회빈 강씨와의 대결
특히 조씨가 소용이던 시절의 주특기는 인조에게 장남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부부를 틈만 나면 모함하는 일이었다. 이런 탓에 그녀가 소현세자를 독살한 주범이라는 설이 있다. 야사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치의였던 이형익은 조씨의 사가에 자주 왕래해서, 세간에 "조씨가 어머니를 통해 이형익을 사주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어쨌든 소용 조씨와 민회빈 강씨의 사이가 험악했던 것은 분명해, 민회빈 강씨가 죽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인 소위 전복 독살 미수 사건도 귀인 조씨의 자작극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실록에 소용 조씨의 자작극을 암시하는 글이 남아 있다.
궁인(宮人) 정렬(貞烈)·계일(戒一)·애향(愛香)·난옥(難玉)·향이(香伊)·천이(賤伊)·일녀(一女)·해미(奚美) 등을 내사옥(內司獄)에 하옥하고 내환(內宦)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자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상(인조)이
세자빈 강씨(姜氏)를 미워해 오다가 드디어 여러 강씨를 귀양 보내니, 안팎이 의구(疑懼)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이 전복구이를 드시다가 독이 있자,
강빈(姜嬪)을 의심하여 그 궁인과 어주 나인(御廚內人)을 하옥시켜 심문한 것이다. (중략)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24년 1월 3일
결국 그로 인해 민회빈 강씨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강빈이 죽으면서 "소숙[5]과 조씨 때문에 어미가 죽으니 그 원한을 갚아 달라!!"라고 했다는 걸 보면, 강빈이 얼마나 소용 조씨에게 원한이 깊었는지 알 만할 듯. 다만 이것은 인조의 주장으로, 인조는 이 발언과 강빈이 죽기 전에 남겼다는 혈서로 강빈의 자녀들을 처벌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신하들이 정식조사를 요청했는데, 만약 사실이었다면 이전에 강빈 조사 때 보인 추태를 만회할 인조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인조가 이 조사요청을 무시한다. 그리고 조사도 못한 이 혈서주장을 가지고 인조는 강빈의 자녀들을 제주도로 보내 죽여버린다.《 인조실록》 인조 24년 1월 3일
여기에서 의문은, 과연 인조가 배후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씨가 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그 총애는 사라지면 그만이다.[6] 인조는 소현세자를 견제했고, 자신의 몸이 좋지 않자 다음 권력을 가질 민회빈 강씨와 그녀의 본가를 박살냈다. 그런 점에서 인조는 자신의 뜻을 알고 행동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소용 조씨일 수 있다. 즉, 인조는 소용조씨의 욕심을 십분 활용하며 뜻을 함께했다는 것.
2.3. 인조의 사망
소용 조씨는 인조가 죽기 약 3개월 전인 1649년(인조 27년) 2월 11일, 종1품 귀인에 책봉되었다.그 해 초부터 병석에 드러누운 인조는, 5월 8일 새벽 왕위 계승자인 세자 내외를 찾지 않고 조 귀인의 세 자녀를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효종) 앞에서 "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동복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4. 고부 갈등과 저주 사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조 귀인의 기세는, 인조가 사망하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보통 왕의 총애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그 왕이 죽자마자 힘을 잃기 때문.[7][8][9][10]특히 조 귀인은 가문의 뒷배경이 있던것도 아닌지라 더욱 빠르게 추락한다.친청파 숙청 과정에서 조 귀인의 사돈이기도 한 김자점이 모반을 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 귀인 또한 장렬왕후와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숭선군부인 신씨는 신익전의 딸로, 조 귀인의 맏며느리이자 장렬왕후의 조카이다[11].
이게 밝혀지게 된 것도 괜히 밝혀진 게 아니다. 평소 며느리 숭선군부인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조 귀인은 딸 효명옹주의 여종 영이를 데려다 숭선군의 첩으로 삼았다. 이에 숭선군부인은 이모인 장렬왕후에게 가서 하소연했고 분노한 장렬왕후가 영이를 문초하자 겁에 질린 영이는 "조 귀인이 대비 마마와 전하를 저주한다"는 자백을 했다.
결국 영이를 비롯해 귀인 조씨와 효명옹주의 심복 나인, 하녀 등 저주 관련자들은 줄줄이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추안급국안의 기록을 보면 잡혀온 나인, 하녀들에게 매일같이 30대씩의 신장이나 압슬, 낙형을 가할 정도로 추국을 가혹하게 진행했다. 심지어 귀인 조씨와 가까웠던 나인이며 저주물을 땅에 묻었다는 의혹을 받아 체포된 김선례는, 도합 240대의 매를 맞고 1차례의 압슬, 2차례의 낙형까지 당한 끝에 결국 고문받던 중에 목숨을 잃었을 정도였다. 훗날 숙종 연간 장희빈의 무고의 옥에 연루된 나인들을 심문할 때는 때리는 댓수를 줄이는 등 비교적 관대하게 진행한 것에 비하면, 귀인 조씨의 저주 사건 추국은 정말 피 튀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는 인조 시대의 공안 정국의 영향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12] 그리고 희빈 장씨는 한때나마 왕비였고 사건 당시에도 세자의 생모였던지라, 귀인 조씨와는 처지가 다르다. 사건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룰 경우에는 세자의 정치적인 입지에도 영향이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나인들과 하녀들은 자복하여 줄줄이 거열형을 당하고, 귀인 조씨는 자진을 명받아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자식들도 전부 폐서인이 되어 유배를 가게 됐다.
그리고 이 일은 조씨와 결탁했던 김자점의 몰락으로도 간접적으로 이어진다. 김자점은 이전부터 효종을 몰아내는 새로운 형태의 반정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씨의 옥사가 이어지던 와중에 분위기를 타고 김자점의 음모를 안 자들이 고변한 것.
3. 자녀
인조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녀인 효명옹주는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과, 장남인 숭선군은 신익전의 딸과, 차남인 낙선군은 김득원의 딸과 결혼했다. 이 중 효명옹주는 저주 사건의 원흉이라 대신들과 종친들이 여러 차례 "극형에 처하라"는 요구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효종이 혈육을 극형에 처하는 걸 꺼려 유배로 감형되었고, 그냥 어머니와 누나의 뻘짓에 연루된 숭선군과 낙선군도 유배되었다.정통성 문제로 단호하게 대처해야 했던 소현세자와 강씨 문제를 제외하면 왕실 식솔들에게 자비로웠던 효종이 형제들이 못내 걸렸는지 숭선군과 낙선군은 1656년에 유배가 풀려 돌아왔고,[13] 효명옹주 또한 효종이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1658년 석방하였다. 김자점 등을 비롯해 사건에 연루된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데 비해, 이들은 효종의 비호를 받아 상당히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4. 평가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 장희빈 등과 함께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악녀로 취급받으며 평이 부정적인 편. 효종의 즉위와 소현세자 일가족의 제거는 세자의 병사라는 변수 아래 역시 환후가 깊었던 인조가 나이 어린 후계자 대신 장성한 후계자를 지정하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철저히 인조의 의중 아래 진행된 일이다. 종법상 무리수가 많았던 효종의 승계를 뿌리박기 위해, 김자점과 귀인 조씨는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정적을 만들었고, 국왕인 인조를 비판할 수 없었기에, 모든 비난이 김자점과 귀인 조씨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비슷하게 악녀 취급받던 장희빈은 숙종이 어떤 인간인지 대중에게도 제법 알려지고, 라이벌이자 피해자로 불렸던 인현왕후가 여러 매체에서 다뤄진 만큼 착하고 현숙하지만은 않은 왕후였다는 것이 밝혀지며 과거의 악녀 이미지가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 다만 사실 장희빈은 정사에서는 노론에서 쓴 야사나 인현왕후전에 나오는 나쁜 행적에 비해 실제 행적이 많이 부족하고,[14] 반면 이쪽은 인조의 국정장악력이나 후계 구도를 둘러싼 현실적 문제(당시로선 고령에 건강도 위중했던 인조 + 너무 연소한 이석견)에 무지하다보니 베갯머리 송사와 음모로 왕을 좌지우지한 요녀의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말희부터 달기와 포사를 거쳐 내려오는 동양 역사학의 고전적 레퍼토리일 뿐임에도.
5. 가족관계
5.1. 친정( 순창 조씨)
5.2. 배우자 / 자녀
- 남편 : 인조
-
딸 :
효명옹주이씨(李氏) -
사위 :
낙성위(洛城尉)김세룡(金世龍) - 김자점의 손자 - 아들 : 숭선군
- 며느리 : 영풍군부인(永豊郡夫人) 신씨(申氏) - 신흠의 차남 신익전(申翊全)과 장렬왕후의 언니 조수임(趙壽任)의 딸
- 손녀 : 이효순(李孝順)(1659 ~ ?)
- 손자 : 동평군 이항
- 손녀 : 이철순(李哲順)(1661 ~ ?)
- 손녀 : 이희순(李喜順)(1663 ~ ?)
- 손녀 : 이종순(李終順)(1667 ~ ?)
- 손자 : 이강(李棡)요절
- 아들 : 낙선군
- 며느리 : 동원군부인(東原君夫人) 김씨(金氏)
- (양손자) : 임양군 이환(臨陽君 李桓)(1656 ~ 1715) - 경창군의 장손 청평군 이천(淸平君 李洤)의 차남
6. 여담
- 귀인 조씨와 비슷한 인생은 이이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모시는 왕을 혹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버리는 것이 닮았다. 특히 이이첨은 정권을 위해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사사하고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를 폐서인시키는 것이었다. 귀인 조씨도 인조의 비호 아래 정적인 민회빈 강씨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나, 권력을 부여해주던 인조가 죽은 후 결국 효종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떻게 보면 귀인 조씨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할 수도 있다. 효종이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김자점과 귀인 조씨였기 때문. 이 둘이 필사적으로 소현세자 사후 민회빈 강씨와 세손을 공격해 정통성을 잃게 만들었고, 덕분에 차남인 효종이 조카를 제치고 세자가 되어 이후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사후 효종은 김자점과 귀인 조씨를 외면했다. 다만 효종으로서도 할말은 있던 게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버린 귀인 조씨와 김자점은 도저히 친위 세력으로 써먹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능력이 국정 실무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 또 모르겠는데, 둘은 정적을 모함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국정에서는 매우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토사구팽을 해야 했던 것. 그러자 김자점은 이판사판으로 청나라와 내통해 나라를 통째로 팔아버리려다, 실패하여 끔찍하게 처형당하고 그의 가문도 통째로 몰락한다.
- 다른 면으로 유사한 사례는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이다. 숙의 문씨는 귀인 조씨와 달리 권력에 접근한 적은 없으나, 영조의 총애만을 믿고 친정일가 전체가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다 결국 정조 즉위 원년에 사도세자를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는다. 후궁에 불과한 문씨에게 실제로 그럴만한 능력이나 동기도 없었기에[15] 무고했다는 것 자체가 무고이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의 소현세자 제거나 영조의 사도세자 제거 모두 왕 본인들의 이성적 의지가 절대적으로 개입되어 있었던 행동이며 일개 후궁들의 베갯머리 송사로 그런 중대사를 결정지을리도 없다. 하지만 대신들은 정조가 사도세자 일을 추궁할 것을 겁냈고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없고 대신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으니, 그들에겐 선왕의 승은후궁에 불과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데 인성까지 안좋은 숙의 문씨는 굉장히 만만한 먹잇감이었기에 이런 중과부적인 이유로 문씨는 덤터기를 쓰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7. 대중매체에서
귀인 조씨의 권세는 어디까지나 배후에 있는 인조 덕분이었으며 인조 사후 급격하게 몰락한데서 알 수 있듯 인조가 없으면 그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중매체에서는 반대로 자식과 손자들까지 배제하는 냉혹한 권력자 인조는 호구로 만들어 내버려두고 귀인 조씨를 모든 일의 배후 조종자로 만드는 정반대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따지고 보면 노론 음모론 못지 않은 역사 왜곡.[16]- 1981년 KBS1 대하드라마 < 대명>에서는 권기선이 열연하였다. 후반부에 등장하여 소현세자 부부를 몰락시키는 빌런역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당시 영상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게 흠이다(1회, 26회, 49회, 50회만 남아있다).
- 2013년 JTBC 드라마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김현주가 연기했다. 본명은 조얌전으로 나오며 양반가 첩실의 딸로 나온다. 장렬왕후를 모함해 인조의 냉대를 받게 하고 소현세자를 암살하며 민회빈 강씨에게 누명을 씌어 사약을 마시게 만드는 등 갖은 악행을 벌이다 결국 마지막회에 모든 죄가 밝혀져 폐서인이 된채 궁궐에서 쫓겨나 스스로 자진했던 실제 역사와 달리 궐 밖에서 분노한 백성들[18]이 던진 돌에 의해 처참하게 맞아 죽는다. 물론 실제로는 이렇게 죽지는 않고 사약을 받았으며 후궁의 예로 장례도 치러졌다.
- 2022년 영화 올빼미에서 배우 안은진이 연기하며 소용 조씨로 나온다. 작중 최고 흑막의 사주를 받아 소현세자의 독살과 그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와 장남 원손을 모함하는데 가담한다.
[1]
어머니가 정실 부인인지 소실인지에 대해 말이 많으나 당대의 기록을 모두 살펴보면, 김두남(金斗南)과 조기(趙琦)의 두 얼자(孽子)가 부정하게 궁에 들어왔다고 말하므로 소실이 맞다.
[2]
이때부터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사실 인열왕후가 죽은 시점부터 총애로는 으뜸이었으나
병자호란과 뒤늦은 인열왕후의 못마친 상을 거치면서 독차지한 시점이 다소 늦어진 것.
[3]
인조가 죽기 약 3개월 전에 귀인에 책봉되었다. 사실상 궁궐의 안주인이었을 정도로 권세가 높았으나, 출신의 한계 때문에 정1품 빈은 커녕 인조가 죽기전에야 간신히 귀인이 된듯하다.
[4]
하지만 조씨는 인조가 살아생전 평생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했고, 인조가 살아있었다면 계속 품계를 올려주었을테니, 만약 인조가 더 살았다면 계속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빈(嬪)이 될 확률도 있었을 것 이다.
[5]
'작은 아버지'라는 뜻이니, 소현세자의 동생들 중 하나를 가리킨다.
인평대군이라는 설도 있으나 대부분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라 본다.
[6]
대표적인 예가
장희빈이다.
[7]
전 시기에
명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였던 환관
위충현이, 자신의 뒷배가 되는
천계제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다.
삼국지의 사마씨나
손준 -
손침 같이 군부를 장악한 상태가 아니라면, 결국에 그 왕의 죽음과 동시에 몰락한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대통령 측근들이 대통령이 물러나고, 공격당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도 있는데 대통령이 물러나도 다음 대통령이 성향이 같으면, 그 대통령과 측근은 공격을 당해도 나름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대통령이 물러나고 다음 대통령이 성향이 다르면 공격을 받는 것으로 모자라서 수사를 많이 받는다고 볼 수 있다.
[8]
같은 성별의 비슷한 예로는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뒤바리 부인이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왕세자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및 루이 15세의 세 딸과 신경전을 벌였으나, 결국엔 루이 15세가 죽은 이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내쳐져
런던에서 거주하다가 부동산 문제로
파리에 왔을 때 혁명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참형을 당했다.
[9]
그리고 이게 왕비와 일반 후궁들의 차이이기도 하다.
왕비의 경우는 설령 왕이 죽거나 총애가 사라져도
내명부의 넘버원이므로 함부로 후궁들이 개기는 건 불가능하고 설령 왕의 미움을 사더라도 왕비의 권위가 어디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왕이 죽은 후에는 대비가 되어 왕실 어른이 되므로 권위가 더 올라가서, 설령 피 한 방울 안 섞인 계모라 할지라도 후임 왕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10]
왕은 아니지만 조선
명종 때 실권자였던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과 그의 아내
정난정도 문정왕후가 죽자 이때를 노린 대신들의 탄핵 요구로 순식간에 몰락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1]
장렬왕후의 언니의 딸
[12]
인조 역시도 민회빈 강씨를 몰아붙일 때 그녀를 모시던 나인들을 죄다 잡아다 고문했는데 고문을 받던 열명 중 일곱명이나 죽었다.
[13]
효종은 정통성 때문에 민회빈 문제는 단호했음 에도 그 아들인
경안군에게는 동정적이라 나중에 유배도 풀어주고 종친으로 복권시켰다. 정통성에 위협이 될 여지가 있는 경안군에게도 그럴 정도인데, 그보다 위협의 강도가 약한 이복형제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4]
장희빈을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드라마가 당대 역사적 연구가 부족한 탓에 인현왕후전이나 사씨남정기를 바탕으로 만든지라 장희빈을 악녀로, 인현왕후를 현모양처로 표현한 탓이 크다.
[15]
다만 숙의 문씨는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와 영조의 적모이자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멀쩡히 살아있을 때에도,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자신보다 품계도 높은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인원왕후에게 회초리까지 맞은 전적이 있다. 문씨가 야망을 품었다기보단 영조의 총애를 믿고 입지가 차원이 다른 영빈에게까지 방자하게 행동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전적들이 사도세자를 무고한 동기가 되었고, 문씨는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대부분의 왕실 일원들을 적으로 돌린 결과 영조의 사후 1년도 안 돼서 정조의 명으로 사사당하고 문씨의 친정도 싸그리 몰락한다.
[16]
이는 인조에 대한 편견인데 "인조=무능력"이라는 고정 관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는 절대 무능하지 않았는데 정략으로
광해군을 능가했고 권력에 거슬리면 아들
소현세자, 며느리
민회빈 강씨, 손자들까지 배제하는 뼈 속까지 차가운 인물이었다.
[17]
2014년 tvN 드라마 <
삼총사>에서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 역.
[18]
평소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존경하던 이들이었다. 이 둘이 전부 조씨에 의해 죽어 분노가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