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7:30:51

영창대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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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선조의 왕자
영창대군 | 永昌大君
파일:영창대군묘.jpg
영창대군묘 전경
출생 1606년 4월 12일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614년 3월 19일 (향년 7세)
조선 강화도 유배지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묘소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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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의(㼁)
부모 부왕 선조
모친 인목왕후
형제자매 14남 11녀 중 13남
자녀 양자 1남
작호 영창대군(永昌大君)[2]
}}}}}}}}} ||
1. 개요2. 생애
2.1. 출생 과정2.2. 출생 당시의 정치적 상황
2.2.1. 북인 집권기2.2.2. 선조의 실추된 권위2.2.3. 적장자 계승 원칙2.2.4. 종법적으로 문제 없었던 광해군의 즉위2.2.5. 광해군과의 나이 차이2.2.6. 어린 대군의 입지
2.3. 선조의 죽음2.4. 최후2.5. 영창대군 사망의 전말
3. 가족4. 여담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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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14왕자 중 13번째 왕자이자 인목왕후의 소생으로,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이며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존재 자체로 이복형 광해군에게 폐모살제[3]를 저지르게 하여, 그가 인조반정으로 쫓겨나는 가장 큰 명분을 제공했다는 데서 그 존재감은 적지 않다. 영창대군의 탄생이 영창대군 본인과 광해군 둘 다 불행하게 만들었다.

2. 생애

2.1. 출생 과정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대신 후궁들에게서 14남 12녀라는 많은 서자를 두었는데, 그중 가장 총명하다고 평가받는 2왕자 차남 광해군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시로 세자로 삼았다. 서장자인 임해군을 비롯해 장성한 다른 아들들 중엔 인격에 문제가 심각한 왕자들이 많았고[4], 나머지 아들들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초유의 국난 상황으로 인해 국왕이 갑자기 죽거나 잡히는 상황도 올지 모르니 미루던 세자 책봉을 해야만 했고, '나이와 능력으로 보면 광해군이 세자를 맡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은 선조 본인도 거의 즉각 동의했다.[5]

종전 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자신이 직접 말을 꺼내 연안 김씨 가문 김제남의 차녀를 계비로 간택했는데, 그녀가 인목왕후다. 당시 선조는 51살, 인목왕후는 19살, 김제남은 41살, 광해군은 28살이었다.

선조의 재혼은 당시에도 무리수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많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왕비가 사망할 경우 새 왕비를 간택하기보다는 기존의 후궁들 중에서 한 명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재혼하는 게 특별한 게 없는 일이 된 것은 후궁을 왕비로 삼을 수 없게 된 숙종 이후 세워진 법도였고, 인목왕후 이전의 계비들( 현덕왕후, 안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은 문정왕후만 빼고 모두 후궁 출신에서 승격한 케이스다.[6] 물론 후궁이 없었다면 왕비를 새로 간택해서 뽑아야 했겠지만, 당시 선조는 명문가 출신 간택후궁만 2명( 정빈 홍씨, 정빈 민씨)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새로 간택을 한 선조의 사례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다. 당시 실록을 보면 사관도 '후궁들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을 왕비로 올리면 될 걸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라 사정도 안 좋은 마당에 굳이 새 왕비를 간택하다니 이해가 안 된다'는 뉘앙스로 선조를 깠다.[7]

아무튼 그렇게 간택된 인목왕후는 1603년 정명공주를 낳고, 1606년 이의를 낳았다.

흥미로운 점은 왕자 이의는 사실 선조 생전에 대군으로 봉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극 등에서 선조 시대에 '영창대군' 운운하는 대사가 나온다면 고증 오류다.[8] 적자였으나 '원자'는 결코 아니고 대군도 아니었는데도 탁소북으로 인한 세자와 왕위계승 가능성이 점쳐졌으니 그야말로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광해군은 비록 출발은 대군도 아닌 군이었으나 영창대군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동궁, 즉 세자로 상황이 매우 달랐다.

2.2. 출생 당시의 정치적 상황

2.2.1. 북인 집권기

왕자 이의, 즉 영창대군이 휘말린 소용돌이를 파악하려면, 임진왜란 전후의 붕당 정국과 선조의 추락한 권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직후 집권당은 북인이었는데, 전쟁 기간 동안 강경책을 제시했고 정인홍, 곽재우 같은 조식의 제자들이 낙동강 서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손쉽게 집권당이 되었다. 집권당이었고 향촌 거점인 영남 동부가 왜군에게 짓밟힌 남인 류성룡, 김성일 등 조정과 정규군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류성룡이 종전을 앞두고 주화오국(主和誤國)[9]했다는 북인의 탄핵과 류성룡과 조목의 대립으로 촉발된 남인 자체의 내분으로 실각한 상황이였다.

서인 역시 의병장은 다수 배출했지만 정철 (1593년 卒), 성혼 (1598년 卒), 윤두수 (1601년 卒)같이 당파를 이끌 거물 정치인들이 차례로 병사하고, 조헌, 고경명, 김천일 같은 서인계 의병장 대부분이 금산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해버려 성격이 불같은 이귀나 당색이 옅은 김류 정도를 빼고는 한동안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전쟁 이후 집권당이 된 북인은 분열하기 시작하는데,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 건을 둘러싸고 정인홍 류영경이 서로 토론 배틀을 벌었지만 서로 타협하지 않고 합의를 보지 못했다. 결국에는 북인은 유영경을 중심으로 해서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으로 구성한 소북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해서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으로 구성했던 대북으로 나뉘었다. 선조는 나이가 많고 원칙주의자였던 대북의 정인홍보다 소북의 대신이자, 영합을 잘했던 류영경을 영의정으로 삼아 힘을 실어주었다. 유영경의 권세가 강해지자, 소북 내에서 다시 반발하는 인사가 나와 남이공 중심의 청소북[10]과 유영경 중심의 탁소북[11]으로 나뉘었다.

유영경이 선조의 의중으로 영창대군 편에 서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에 오르는 바람에 결국에는 자결했다. 그럼에도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의 대북은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의 소북에 대해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봉산옥사 계축옥사가 터지면서 대북이 이를 주도했다. 그래서 영창대군과 인목왕후의 온건한 처리를 주장하며 서인 남인계 대신이었던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가 조정에서 쫓겨났고, 소북은 기세가 위축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북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어잡게 되지만, 이이첨이 폐모론을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대북이 다시 이이첨 계통의 육북, 기자헌 계통의 골북, 소수의 중도파 중북으로 나뉘었다.

2.2.2. 선조의 실추된 권위

한편 선조 임진왜란 이후 땅에 떨어진 권위로 고심하고 있었다. 파천도 파천이었지만 전쟁 중에 왕이 요동으로 망명을 추진하거나 이순신을 파직시켜서 수군을 궤멸시키고 삼남[12] 지역을 통째로 내줄 뻔 하는 등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때문에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는 반역에 가까운 일이 발생했다.

평양을 나와 평안북도 의주로 튀던 중, 선천에서 류성룡 정철이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양위해줄 것을 요구하려 했다가 서로 말을 못 꺼내서 실패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선조의 충신이었던 이항복 이덕형조차 분조 후 즉위한 당숙종의 사례를 거론하며 대놓고 선위를 주장했다. 당시 선조는 요동까지 피난하려 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생 남이순·송희록은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반면 세자 광해군 임진왜란 기간 분조 활동을 통해, 선조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권위가 강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 이후 집권당은 정인홍 같은 광해군 절대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북인이었다. 서인 정철은 아예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건저[13]의 문제를 일으켰고, 이귀 역시 광해군을 호종했다. 남인도 당장 수장 류성룡 개경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만든 사람이었으니, 광해군 지지파에 가까웠다.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심희수도 광해군을 지지했고 이호민, 황신, 김상용, 이정구, 정경세, 오윤겸 등도 역시 광해군을 지지하거나 광해군을 호종했다. 그 외에 선조의 유교 칠신 중에도 유영경을 뺀 신흠, 서성, 한준겸, 허성, 박동량, 한응인 등은 광해군을 지지해 줬다.

다른 왕자들을 살펴보면 선조가 가장 총애하던 4남이자 인빈 김씨의 장남 신성군은 이미 전쟁 중에 병사했고, 그나마 나이가 찬 장자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은 왕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사약 마시고 죽었을 강력 범죄자들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붕당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결국 자의든 타의든 광해군은 선조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선조로선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광해군을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위 카드를 꺼내들어 선수치고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명나라에 기대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권위를 끌어 올리려는 무리수를 썼지만 당연히 한계에 부딪혔다. 이런 와중에 선조는 50살이 넘어서 계비 인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적자 이의를 낳았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극소수 탁소북이 왕자 이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선조는 광해군 견제를 위해서 탁소북을 키우게 된다.

아버지가 아들을 경계해 견제한다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왕조 국가에서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았다. 당장 위에 언급된 당현종 당숙종만 해도, 현종이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숙종을 견제하면서 조정이 갈라졌고 정쟁 끝에 현종 지지파가 귀양가는 걸로 막을 내렸다. 뒷날의 인조 소현세자를 들어 수차례 겁박을 일삼는 청나라의 태도에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조선 왕이 탄생할 가능성을 바짝 경계했고, 결국 세자빈 민회빈 강씨를 사사하고 세손들을 귀양 보내게 되었다.

조선 태종과 폐세자 양녕대군의 관계도 대중들이 흔히 아는 비행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폐위 같은 내용 대신, 태조가 내정한 적장자 말고 태종 자신의 즉위 명분인 택현(擇賢)에 맞는 후계자를 세워 자신의 권위를 굳히려 한 노림수로 보는 학계 주장도 일부 있을 정도다.[14] 다만 기록대로라면 양녕대군이 각종 비행을 엄청 저질러댄 망나니도 맞긴 해서, 태종이 안 그래도 택현을 명분으로 충녕대군을 밀까 하고 있던 참에, 그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양녕대군이 그 명분을 아주 신나게(...) 뒷받침해줬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다만 위에 언급된 사례와 반대로 태종은 굉장히 막강한 왕권을 이미 확보한 상태였고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태종과 맞설만큼 영향력을 가졌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다. 군왕-세자가 저런 식으로 정치적인 라이벌이 되는 경우는 왕의 실정이나 외부 상황으로 왕의 권위가 약해진 상태에서 왕위계승권자의 권위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인데, 태종은 외척과 형제들을 미리 정리한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권위를 위협당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실록을 봐도 태종이 자신의 적장자를 견제했다고 볼 만한 정황은 없고, 오히려 위의 세 아들이 요절한 가운데 늦게 얻은 양녕대군을 극심히 아꼈다는 기록만 있다. 당시 태종이 견제했던 것은 공신들과 외척이었지, 28세 나이에 겨우 얻은 후계자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수준의 소수설이란 점을 참고.

설사 세자가 왕권에 도전할 생각이 없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세자 쪽으로 자연스레 사람이 들러붙게 된다. 당장 영창대군만 하여도 탄생하자마자 탁소북이 들러붙어 광해군을 견제하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전제왕정에서는 정작 본인의 의지가 없더라도 왕권에 도전할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부 경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선조처럼 임금의 권위가 추락하고 세자의 권위가 높은 상황이면 더더욱.

2.2.3. 적장자 계승 원칙

왕위 계승의 법칙에 대략 설명이 되어 있듯 적장자 승계는 주나라이래 유교 문명을 국시로 삼은 왕조들의 계승법이다. 조선 역시 주자 성리학을 받아들여 사회 규범까지 세세하게 유교식대로 뜯어 고쳤는데 사대부들의 모범인 왕실은 말할것도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는 적장자 승계 원칙이 잘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세자의 경우 적장남이 되는 게 우선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꽤 많았다. 조선 초 대표적 사례로는 태조의 막내 아들 폐세자 ( 의안대군) 이방석과 정종의 아우인 태종, 태종의 3남인 세종인데, 간략히 상황을 따져보자면,
  • 의안대군은 막내아들이고 나이도 어렸지만, 조선의 건국 이념과 건국 주도 세력의 의중이 작용했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과 그를 지지해준 태조는 새 왕조가 모든 면에서 구 왕조와 완벽히 결별하길 바라며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세자 책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왕이 흔들리지 않고 건국의 이념을 계승해 가려면 고려 구 세력과 이어지지 않아야 된다고 보았다. 신의왕후 소생 5왕자는 건국 과정에서 제각기 공이 있었으나 태조가 고려 정계의 일원이었던 시절에 혼기가 찼던지라 권문세족으로 통칭하는 고려 구 세력과 혼맥으로 밀접히 이어져 있었다.[15] 남는 건 왕비의 자식이면서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아 고려 구 세력과 뚜렷한 연결고리가 없는 이방석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방석이 건국 이전부터 세자로 낙점되었다.[16] 현 왕비의 자식이고 동복형 이방번은 처음부터 경쟁 대상이 못 되었으며[17], 고려 제일의 무장이었던 건국자 태조 정도전, 남은 같은 핵심 공신들, 매형 이제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기반이 약하지도 않았다.
  • 태종 정종의 아들이 아니라 동복동생이다.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에게 적장자가 없다는 점을 노려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태종은, 정계를 장악하고 형의 양자가 되어 적장자 계승 명분으로 왕위를 승계했다. 다만 이 명분을 끝까지 끌고 가지 않고 정종을 슬쩍 묻어버리며 택현(擇賢)을 명분으로 세워 족보를 정리하고 자신을 실질적인 창업주로 내세워 권위를 강화한다.
  • 맏형을 밀어내고 즉위한 세종은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세자로 세웠는데, 그전에 양녕을 지지할 만한 외척 세력과 경험이 부족한 세종을 뒤흔들 공신 세력이 모두 제거되었다. 태종 본인의 즉위 명분이 택현(擇賢)이었으며 무엇보다 양녕이 수 년 간 쉬지 않고 파행을 저질러 명분을 그야말로 퍼다줬다. 게다가 즉위 후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사돈 심온을 사사하여 조정을 한 번 더 정리해줬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조선이 주자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초기 국가 기틀이 잘자리 잡지 못할 때 였다. 그럼에도 세자 이방석 신덕왕후의 사망과 태조의 병환이란 변수 아래 쟁쟁한 이복형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인정사( 1차 왕자의 난)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더욱이, 세조 이후에는 적장자 계승이 손에 꼽는다.
  • 세조는 장자 의경세자가 죽자 장손 월산대군이 아니라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후계자로 삼아서 예종이 등극했다. 이 경우 단종 폐위 명분인 군주가 어리고 나약하여 국가 대사를 맡기 어렵다는 구실에 장성한 차남을 두고 어린 장손을 세자로 세우는것도 당시 현실적으로도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예종이 죽자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큰 조카(세조의 장손) 월산군을 제치고 그의 동생 잘산군 예종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오르는데 곧 성종이다. 성종은 월산대군보다는 어렸지만, 예종의 양자라는 명분으로 입적되었고, 당대 최강의 실력자이자 세조의 오른팔 한명회를 장인으로 두고 있었다는 든든한 정치적 배경 덕분에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이 되더라도 당시 왕실 어른이였던 정희왕후,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있어서 지지 기반이 튼튼했다.

적장자 계승 원칙이 유교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일반 사대부들이야 장손이 어려도 제사만 이어받음 그만이나 왕실의 경우 왕실제사 종묘 사직 뿐만 아니라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위치이기에 어린애를 앉힐수 없었다. 이는 유학자들도 어느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특히나 광해군의 경우 영창대군이 태어나기전에 의인왕후의 양자로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영창대군이 태어나는 즉시 신하로 신분이 확정이 되버렸고, 당시 성리학에서는 군신명분이 한번 세워지면 다시 바꿀수 없는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도 불가능하며 [18] 양자로 입적 된 이상 이미 16세기 부터 사대부가에서 적자가 태어나도 양자를 파양하려는 송사를 국가차원에서 불허하는 판례가 이미 정착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가능했다.[19] 지금에서야 양반가에서 적자가 없으면 친척을 입양하는것이 마땅한걸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오히려 편법이며 유교 예법의 본고장 중국 에서는 양자대신 서자를 적자로 삼아 들였고, 율곡 이이의 예에서 보듯이 유학자 중에 권위자인 이이는 적자가 없자 서자가 제사를 받들었다. 가장이 적첩구무자(嫡妾俱無子), 즉 가장과 적실 또는 첩 사이에 낳은 아들이 없어야만 가능하였다. # 만일 서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입양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적자가 없고 서자가 있으면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 하여 서자를 양자로 들여야 함이 본래 예법이다.[20]다만 이 경우 가문의 격이 내려가고 서자의 후손은 과거 응시가 불허 되기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카나 친척을 양자로 받는 경우가 많아졌을 뿐이다.

요 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위하고, 순이 우에게 선위하는 것을 진정으로 유교 예법으로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요순우탕은 성인이고, 그 후 주나라에게 천명이 넘어가 문왕과 무왕을 이어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조카인 성왕을 업어 키우고, 힘이 있음에도 적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 신하의 자리로 물러나서 칭송을 받는 것이었고 그 후 주나라 예법이 곧 유교의 예법이 된 것이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조선을 지배한 주자 성리학 입장에서 바라 볼 때 성인의 도통(道統)이 천자였던 요순에서 제후인 주공, 그 다음 사대부인 공자와 맹자로 유교의 도통(道統)이 이어진 것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사대부는 가문을 물려받고, 제후는 나라와 종묘사직을 물려받는 것을 본분이라 보고 이 본분을 지키는 것이 유교세계의 이상적인 예법으로, 이 질서에서 벗어나 신하임에도 또는 소통임에도 더 높은 지위에 욕심을 품는 것은 패륜으로 간주하던게 성리학 질서에서의 사상이었다. 즉 열심히 수양하여 성인이 되는 것은 신분에 상관 없으나, 상속은 적장자 원칙으로 확고하게 태생적 권리자만을 인정한 것이 유교의 예법이다.

2.2.4. 종법적으로 문제 없었던 광해군의 즉위

단종은 정통성이 강력했던 왕이었음에도 단지 어리고 지지기반의 중심을 잡아줄 왕실어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21][22] 찬탈이 벌어졌다. 왕자 이의의 후계로 더 취약해지면, 왕실 내 찬탈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역성혁명 가능성도 있었다. 세조 대의 단종의 예만 들어도 왕실 안전을 위해서는 나이로 보나 지지 기반으로 보나 광해군이 후계자로 더 알맞았다.

현실주의자였던 선조가 정말로 광해군을 폐하고 왕자 이의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 세자와 10년 이상 정적으로 지내면서 위태위태하게 왕권을 지켜온 터라 늘그막에 얻은 아들로의 후계 교체는 한 번쯤 고민했을 가능성은 있고 뒤의 행적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냄새는 풍기고 있다.[23]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여지가 없었다. 권위가 바닥을 쳐 십수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킨 마당에, 10년 넘게 아무 문제 없이 능력을 인정받은 세자를 2살짜리와 교체하는 무리수를 두는 건 불가능했다. 전쟁 때 분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국정 경험이 풍부한 장성한 세자를, 3살도 안 된 아기와 교체한다?[24]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될 뿐더러 선조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자 원인 중 하나인 원균이 있으며 그 아낀 원균이 터트린 칠천량 해전 하나만으로도 선조에게는 그럴 권위조차 없었다.[25] 당연히 유영경을 제외한 신하들도 전부 광해군을 지지하고, 오히려 적자인 왕자 이의의 지지 기반이 서자인 광해군보다 훨씬 취약했다. 선조의 마음이 때때로 영창대군으로 갔음에도 결국은 광해군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런 면 때문이었다. 설사 영창대군이 세자가 되더라도 지지 세력도 없거니와 숙청을 하려고 하면 전쟁 영웅과 공신을 비롯한 사대부 전체를 쓸어버리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이전부터 동서인이 모두 인정한 후계자 1순위였고, 임진왜란 때 활약으로 민간의 지지도 높았다. 이후 10년 간 세자 자리를 지키면서 능력과 지위가 더욱 탄탄해졌다.[26] 광해군은 대리청정도 아니고 분조를 이끌었다. 그의 능력은 다른 때도 아니고 전쟁 중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증명한 것이었다.[27] 선조가 요동까지 가려는 상황에서 대리 청정과 비교되지 않는 업무를 분조를 이끌며 완수한 광해군에게 당색을 막론하고 신하들의 지지가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이 차남인 점은 장남 임해군이 워낙 심한 개망나니라서 조선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28] 그러나 명나라에서 보기에 광해군은 서자라서가 문제가 아니라 차남이라서가 문제였다. 명나라 역사상 황후나 황태자비 소생의 황자가 즉위한건 영락제 홍희제 선덕제 3대 뿐이고 모두 후궁에서 낳은 황자들이라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혈통만 가지고 본다면 선조의 정통성이 더 허약했다. 적어도 광해군은 왕(선조)의 친아들이지만,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3남, 즉 중종의 서손이다(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 명종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면, 그의 삼촌들이나 형 하원군, 하릉군[29]이 후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하원군과 하릉군의 경우 명종 사망 당시 20살을 넘겼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훗날 서자 출신으로 즉위한 영조 형을 독살했다는 혐의가 문제가 되었을 뿐, 경종과 영조를 포함한 숙종의 아들은 모두 후궁 소생이므로 자신의 적장자 여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선조의 손자 인조는 선조의 희망처럼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귀양보내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는데, 덕분에 인조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이 문제로 고생을 했다. 적자가 계승했는데도.

게다가 당시 예학의 종법 해석으론 광해군이 영창대군보다 정통성에서 우월했다. # 참고 글

결론적으로 보면,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위치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왕위경쟁자라기보다는, 권위가 떨어진 선조가 위세가 극에 달한 광해군을 두고 왕노릇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견제수단, 일종의 도구에 가까운 위치였다.

그러나 광해군 스스로가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상당했다. 얼마나 심했는지, 이미 선조의 정비이자 본인의 적모인 의인왕후가 본인을 크게 지지해준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30]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한다. 결국 광해군이 영창대군보다 혈통적 정통성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만일 본인을 지지하며 친자식으로 직접 입적한 의인왕후가 살아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테지만 의인왕후는 이미 사망했고, 그 후 들어온 계비 인목왕후는 법적 어머니에 불과한 진짜배기 계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공성왕후 역시 공빈 김씨로 격하되었다.) 무엇보다도 예학의 근원지인 중국 명나라에서조차 광해군을 서자라는 이유로 의인왕후 생전부터 세자 책봉을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였으며, 선조처럼 황후에게서 적자를 얻지 못했다. 만력제는 후궁 소생의 셋째 황자를 황태자로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대신들의 뜻에 밀리고 있었다. 결국 만력제는 황후가 적자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자연히 명나라의 조정은 광해군을 조선의 공식적인 세자로 인정하기를 꺼렸다.[31]

명나라의 세자 책봉 고명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광해군의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류영경의 주장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선조의 장자는 광해군의 친형인 바로 임해군이다. 명나라 대신이 광해군의 즉위 후 임해군의 소식을 물었고, 광해군의 대신들이 "임해군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위를 양보했다"고 거짓말했다는 점 역시, 광해군의 정통성이 영창대군은커녕 임해군보다도 못했음을 뒷받침한다. 물론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기에는 심한 부적격자이며, 이를 명나라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광해군이 보인 행보는 스스로의 컴플렉스가 극심했고 다급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2.2.5. 광해군과의 나이 차이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나이차는 자그마치 31년. 어머니 인목왕후조차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고, 영창대군에게는 조카가 되는, 광해군의 아들 원손 이지도 영창대군보다 8살이나 많았다. 설사 광해군의 입지가 취약했다 쳐도 2살짜리 유아가 어머니보다도 나이 많은 이복형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명나라도 당시 만력제가 억지로 아무 문제 없는 적장자를 대신해 3남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 "쟁국본" 때문에 "지금은 곤란하다"라고 반대한 거지, 광해군의 능력과 차기 왕위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강제로 폐하고 세자인 광해군을 세울 생각까지도 했던 명국이었다.[32] 그저 쟁국본 및 책봉 문제를 핑계로 조선을 길들여 이익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 승하 후엔 못이기는 척 광해군의 승계를 인정했다.[33]

종합하면 광해군의 신료들의 지지, 실무 경험, 나이, 종법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하여 그 기반이 결코 불안하지 않았고, 선조는 세자 교체할 힘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며 자기가 왕위에 계속 있기 위해서 견제 용도로 활용했을 뿐이다. 실제로 선조는 죽음이 가까워오자 전위의 명을 내렸으며, 이때마다 전위에 적극 찬성하는 정인홍 등 과잉 충성파는 제어하면서도, 세자가 석고대죄 할 때마다 "세자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유영경도 당연히 "전위는 안 되지만 세자의 지위는 흔들 수 없다"는 해명문을 올려야 했다.[34] 그만큼 광해군의 승계는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선조야 진지하게 세자교체를 노리지 않고 영창대군을 견제수단용 도구로 썼다고 해도, 유영경 등은 선조가 장수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35]에 바탕을 두고 세자를 교체하는 계획을 세웠을 정황은 높다. 그러나 유교 국가 조선에서 군신의 의리는 한 번 정해지면 뒤집을 수 없다는 명분을 뒤집기란 어려운 것이었고,[36] 유영경조차도 겉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2.6. 어린 대군의 입지

이런 와중에 소북 영의정 류영경은 부화뇌동하여 노골적으로 세자 교체에 열을 올렸고 인목왕후는 궁중 법도를 어겨가며 아들 이의를 세자처럼 입히고 다니는 상황이였다. 다만 전술했듯 광해군의 지지기반이 훨씬 탄탄했기에, 인목왕후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후일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37]

거기에 선조는 이의의 외가이자 인목왕후의 친정을 키워주기 시작하는데, 일례로 김제남이 아들 김규(金珪)를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신옹주(貞愼翁主)의 장녀와 결혼시키려 했던 건이 있다. 정신옹주의 남편인 서경주(徐景霌)는 훗날 왕이 될 광해군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이 혼사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뜸 선조가 서경주에게 편지를 보내 김제남과 사돈을 맺을 것을 요청하고,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서경주는 결국 자기 딸과 김규를 결혼시킨다.[38] 원래 부마의 집안은 조선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들이지만, 처가를 키워주려는 선조의 이러한 행보가 광해군을 더욱 불안하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인지 훗날 민인백의 《태천집》에는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서경주가 사돈 김제남에게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서경주는 이의가 창진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침을 놓아서 소경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으니, 그 방법을 이용하여 이의가 눈을 멀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김제남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고 한다. 만일 서경주의 말대로 영창대군이 눈이 멀었다면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았겠지만 비참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39] 인조 때 죽었을지도.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장님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는 일촉즉발 같았고, 여기에 선조는 의도야 어찌됐든 불을 넘어서 네이팜을 들고 와 도배를 하는 꼴이었다.

2.3. 선조의 죽음

이윽고 선조는 세자 승계를 교지로 내리고 눈을 감는다. 선조는 어린 자식이 걱정되었던지 류영경 등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왕자 의를 잘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유언에서조차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의를 네가 지켜야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결국 자식에 대한 그 무리한 사랑이 영창대군의 목숨을 앗아갔다.[40] "동기를 사랑하라"는 선조의 유언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목숨까지 흔드는 행동이 된 것이다. 이 와중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유영경이 왕자 교지를 감춰버려서 계승에 차질을 빚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비가 된 인목왕후가 이미 대세가 넘어간 것을 파악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선조의 훙일 다음 날로 서두르면서 광해군은 그대로 왕위를 승계한다.[41] 어심을 읽은 줄 알고 줄을 잘못 선 유영경과 탁소북은 즉각 숙청되었다(...).

류영경은 사실 선조의 교지를 감추어 왕위계승을 지연시키는 반역에 준하는 짓을 저지른 건 둘째치고, 7년 동안 국정에 영향을 끼쳤음에도 명나라로 세자 책봉을 요구하는 사신도 안 보냈기 때문에 숙청당할 게 확정된 상태였다.[42] 이로 인해 영창대군은 이복형이 즉위하자마자 유영경을 비롯한 얼마 되지도 않는 지지세력까지 모조리 잃었다. 이는 다른 의미로 영창대군을 광해군과 대북의 위협에서 보호해줄 수 있는 세력이 전무해졌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선조의 견제와 류영경의 부화뇌동은 겨우 2살 ~ 3살짜리 왕자를 광해군 최대의 정적으로 만들어 버렸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왕자 이의를 숙청 대상 톱 순위로 세우는 한 요인이 되었다. 덧붙여 광해군도 이와 관련된 여파로 인해 결과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2.4. 최후

<colbgcolor=#94153e> 드라마 <화정>에서 묘사한, 영창대군이 끌려가는 장면

이후 6살이던 1611년(광해군 3년)에야 영창대군으로 봉군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칠서의 옥을 통해 역도들이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폐서인되어 강화도(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영창대군이 유배를 갈 때 2명의 궁녀가 따라 갔는데, 한번은 인목왕후가 옷을 지어 보냈으나 새옷에 얼룩이 있었다. 이에 영창대군이 새 옷에 어찌 얼룩이 있냐고 묻자 궁녀들이 "이는 자전께서 눈물을 흘리신 흔적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영창대군이 오열했다고 한다. 이에 광해군이 두 궁녀를 잡아들였다. 광해군일기에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에게 옷을 지어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를 뜯어 조사해보니 인목왕후가 아들을 달래기 위해서 피로 지은 헝겊이 발견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외에 영창대군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에 "의는 사람됨이 영리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대비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염려하여 괴로움을 말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라는 대목도 있다. 결국 다음 해인 1614년(광해군 6년) 음력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죽은 당시 나이가 겨우 만 8세. 어린 나이에 비참하게 살해당한 건 고려 창왕도 마찬가지지만 영창대군은 그보다도 1살이 더 어렸다. 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인 김제남과 외숙부들(즉, 인목왕후의 형제들)까지 전부 역도로 몰려 사사당하면서 외가마저 거의 멸문되었다.

칠서의 옥은 처음엔 강도 살해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대북의 침소봉대식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선조 대 기축옥사( 정여립의 난)을 조작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칠서의 옥은 그거보다 훨씬 심했다. 정여립 때는 최소한 대동계라는 사병 집단이라도 존재했다. 광해군 대 대북 주도로 억울한 옥사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는 점도 의심을 깊게 만든다. 당시 상소들 중 하나에서는 누구는 도둑질을 하고 잡힌 뒤 역모를 꾀했다고 고하였다는 내용이 있던 것으로 연루자들을 거짓으로 불어 자신은 목숨을 구하려는 태도로 이미 광해군은 역모 고변자는 거짓으로 고한 자도 신하들의 반대를 씹고 보호해준 바 있었다.

원래 같으면 반좌율에 걸려야 할 일이기에 이는 분명 대북의 정치 공작이 있던것으로 보인다. 이 일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직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의 고변으로 영창대군의 연루는 결정지어졌는데, 응서는 이후 실수라며 이 밀고를 번복한다. 그러나 한 번 걸린 고변을 놓치지 않은 당시 대북의 영수 기자헌과 이이첨, 유몽인 등의 주도로 압슬형을 비롯한 각종 고문을 통해 영창대군과 연관된 반역 사건으로 몰고 갔다. 한편 서인 남인을 제거할 기회를 노린 대북은 즉시 영창대군을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비단 대북뿐만 아니라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비롯한 소북도 과거의 행적 때문에[43] 자칫하면 옥사의 불똥이 소북에게까지 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영창대군이 죽어야 나라가 편해질 것"이라고 강경하게 나섰고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대북과 함께 반대했다. 이때문에 조정에서 어느 누구도 감히 영창대군의 예우를 청하거나, 대군의 예로 장사를 지내자고 주장해서는 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였던 서인과 남인에서 영창대군에 대한 처우를 조심스럽게 주장했다가, 당연하게도 역적을 옹호했다며 그대로 조정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북인에서 영창대군을 유배를 하고 차후에 제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예외는 "죄는 크나 죽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린 곽재우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광해군은 대북과 소북을 비롯한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은 것을 어린아이를 섬에 보낸 자신의 탓이라며 대군의 예로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시킨다.
강화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의(㼁)의 죽음을 치계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이 고아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하였으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장례를 치르는 일과 제물을 올리는 일을 본관으로 하여금 각별히 살펴서 치르게 하라. 내가 마땅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염(斂)하는 것을 살피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의의 장례를 대군(大君)의 예로 치르도록 하라.” 하였다. (음력 2월 10일자 기사)
도승지 이덕형[44] 등이 아뢰기를, "역적 영창의 죽음에 특별히 장례와 제전을 후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전하의 우애하는 지극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영창대군이 종묘사직에 죄를 지어 속적이 이미 끊어졌으니, 관에서 장례를 도와주는 것은 공론에 거슬리는 점이 있습니다. 신들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받들 수가 없으니,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규정을 따지며 막을 일이 아니다. 전례에 따라 속히 하유하라."

물론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전후 사정을 봤을 때 광해군이 죽인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광해군의 특기가 잔뜩 분위기 조성해서 밑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해 음력 5월 ~ 6월 내내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상소 릴레이에도 짐짓 따르지만 않고 방치해왔던 모습이 대표적이고, 뒷날의 소위 폐모 여론 조사 부분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45] 특히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이정표의 권유를 "이의가 진실로 죄인이다. 그러나 상이 우리들을 보낸 것은 지키라고 한 것이지 살해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거부한 별장 홍유의가 교체되고[46], 강화부사 기협은 영창대군의 편의를 좀 보아주었는 모양인지 광해군일기 중초본 69권, 광해 5년 8월 2일 정해 3번째기사에 "부사 기협이 자주 음식물을 보내주어 이의가 힘입어 조금 살아갈 수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광해군 6년 1월에 체포되었다. 기협은 영창대군이 흰 떡이 먹고싶다고 울자 "죄인의 음식은 반드시 승전의 분부를 기다려 주게 되어 있다. 한 잔의 물도 감히 마음대로 들여보낼 수 없다."라고 하면서 처음엔 들어주지 않았으나,허락을 받고 흰떡 두덩이를 주었다가 그 일을 빌미삼아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는 혐의로 파직된 것이었는데, 역적질을 한 혐의로 문초를 받았으나 박승종 등이 떡을 준 것 외에는 큰 죄가 없다고 아뢰어 중죄는 받지 않았다.[47] 이를 볼 때 광해군의 의도는 악어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영창대군과 달리, 동복누나인 정명공주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2.5. 영창대군 사망의 전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영창대군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진다. 재조사 결과 영창대군은 병사가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다만 <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살해 과정은 '설'로만 언급되며 그 설은 아사, 증살(蒸殺), 독살 등 다양하다. 증살은 말 그대로 방에 가두어 둔 상태에서 불을 때워 그대로 쪄서 죽인 것이다.[48]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가시 울타리)를 수직한 자가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고 하였다. 지금의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74권, 광해 6년(1614년) 1월 13일 병인 5번째기사 정항을 강화 부사로 삼다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를 살해하였다. 정항이 고을에 도착하여 위리(圍籬) 주변에 사람을 엄중히 금하고, 음식물을 넣어주지 않았다. 침상에 불을 때서 눕지 못하게 하였는데, 의가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의는 사람됨이 영리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대비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염려하여 괴로움을 말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을 듣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75권, 광해 6년(1614년) 2월 10일 임진 2번째기사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 대군 이의를 살해하다
광해군이 이정표를 별장(別將)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몰래 빨리 죽이도록 하자, 이정표가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이 늘 의롱 위에 앉았고, 때때로 섬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빌기를 '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이정표가 음식에다 잿물을 넣어 올리자 영창대군이 마시고서 3일 만에 죽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려면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한다.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1625년) 3월 19일 정묘 3번째기사 동양위 신익성에게 영창 대군의 비문을 쓰도록 명하다

현대에는 증살이 워낙 임팩트가 있는 살해 방식이다 보니, 영창대군이 쪄죽은 것을 기정 사실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사인은 위에서 보듯 실록 자체에서도 모호하다. 증살이 언급된 광해군일기에서조차 정항이 아사 또는 증살로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성으로 적고 있으며, 영창대군의 비문과 인조실록에는 이정표가 잿물을 먹여 죽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근대시기니 부검 같은 명확한 증거 자료를 찾기 쉽지 않았고, 나온 증언들이 대부분 "강화도 사람들이 말하길 그렇다더라."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창대군 살해죄로 처벌된 사람은 없었다. 집권한 서인 측에서도 "그런 소문만 믿고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이 나왔으며, 인조 역시 폐모살제, 즉 영창대군의 죽음은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였음에도 재조사를 막았다.

여기에는 서인과 인조 측에서 자세한 살해 내막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조사하고 끝냈다는 주장도 있다. 인조와 서인 측에서 중요한 것은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언급된 썰이 어느 쪽이든 이 사실은 공통으로 지목하고 있으며, 그 살해 방식이 뭐였는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실행자가 강화부사 정항인지 별장 이정표[49]인지도 어차피 뒤의 흑막이 광해군인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마당에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오히려 재조사를 했더니 행여라도 '영창대군이 살해당한게 아니고 단순 병사가 맞았다'는 사실로 밝혀지는게 인조와 서인 입장에서는 더 안 좋은 결과였다. 반정의 명분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반정으로 인조 즉위 후 대왕대비로 격상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조차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에 흐지부지 넘어간 것이다.[50]

실제로 기록을 봤을 때 영창대군이 병사했을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다. 정항이 영창대군이 사망하기 전날, '급박하다'는 서신을 보낸 이야기가 실록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51] 정온은 영창대군의 죽음을 문제 삼으면서 정항이 죽인 것이니 정항을 왕의 친동기를 죽인 자로서 반드시 처형해고 영창대군의 호를 회복하고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나머지 대간들이 발칵 뒤집혀서 정온을 탄핵하였고, 대사헌 박건 등은 "그 소에 ‘정항이 협박하여 죽게 하였다.’ 하였는데, 정항도 신하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군신의 의리를 안다면 어찌 감히 왜곡되게 음호하여 후일의 발판으로 삼겠습니까. 설령 정항이 정말로 간호를 신중히 하지 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난신적자는 누구라도 주벌할 수 있다는 의리로 헤아려 보건대 그다지 심한 죄는 아닙니다. 하물며 근거할 만한 형적도 없는데 정온이 감히 제멋대로 죽였다는 구실로 참수를 청하고, 심지어 전하께서 묘정에 들어갈 면목이 없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임금을 위협한 계책이 더욱 참혹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광해군은 말이 흉악하지만 벌은 주지 말라고 했다가 결국 영의정 기자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국했는데, 정온은 정항이 영창대군이 죽기 직전에야 소를 올린 것이 오히려 의심스럽다고 정항을 비판했다.
정항(鄭沆)이 임소에 도착한 처음에 위리 안치된 중에 연화(烟火)를 거두고 밖으로부터 밥을 제공하였는데, 3일에 병을 얻었다면 즉시 치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늦게서야 장계를 올렸고, 곧 이어 죽었다고 아뢰었으니, 이러한 몇 가지 일들은 사람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상으로부터 추고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성상의 의도를 환히 알 수가 있는데도 끝내 죄를 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사방에 알려지고 후세에 전해진다면 성세의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이후 정온은 여러 신하들이 힘써 그를 구원한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고 제주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인조대에 이조참판에 이르렀는데 병자호란 때 김상헌과 함께 가장 강력한 척화파의 일원이 된다. 한편 부호군 박영신도 광해군이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죽인 것이라고 역사책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귀양을 갔다. 호남의 유생 송흥주 등 11명의 유생들도 상소를 올려 정항을 참수하고 충신 정온은 용서해줄 것을 청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한나라 문제가 거봉을 열어 음식을 먹이지 않은 현령들을 참수한 것과 같은 형벌을 먼저 정항에게 가하여 전형(典刑)의 엄중함을 분명히 보이고 팔방에 효수(梟首)케 함으로써 원한을 품고 죽은 어린 혼령이 황천에서 조금이라도 그 한을 풀게 해 주소서. 그러면 위로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온 나라 신민들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광해군은 정항을 친국하긴 했으나, 자신의 의도한 것이든 단순 사고였든 내심 광해군도 영창대군의 죽음을 반겨했는지 이후 별말없이 풀어줬다.[52]

따라서 이를 영창대군의 사인에 대해 나온 여러 말과 종합하여 이러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을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영창대군을 냉방에 가두며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홀대했다가 영창대군이 병에 걸렸고, 그제서야 겁이나 온돌방에 불을 과하게 때는 바람에 영창대군이 열기를 못참고 죽은게 아니냐는 것. 양잿물도 상처에 대한 소독제로서도 쓰이는데, 뜨거운 방 안에서 입은 화상을 소독하기 위한 용도로 잿물을 쓴 게 와전되어 마시고 죽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진 게 아니냐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의도적이든 의도가 아니든 정항이 영창대군의 죽음에 깊게 관여했다는 것이다.

사실 영창대군의 죽음 자체는 조선사에서 대단한 패륜은 아니었다.[53] 그 전부터 왕의 눈 밖에 난 형제 대군들과 왕족들이 유배 → 사사 테크를 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고, 영창대군은 그래도 명목상 사사는 당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54]

광해군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며 선조조차 위협한 대북이 권력을 쥔 상황에서 광해군 견제에 이용된 영창대군이 살 길은 별로 없었다고 봐야 옳다.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에 써먹은 선조부터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유지를 남긴 것이다.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다니,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임금이 되었구나!"는 식의 말들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만 해도 매우 극단적인 재야의 인식이었다.[55]

영창대군의 죽음 자체는 일단 병사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당장 어린 나이에 유배를 당해서 고생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다.[56] 하지만 진정한 사인이 뭐든 결국 실질적으론 광해군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 광해군도 직접 영창대군이 고된 유배생활을 버티지 못해서 죽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이내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훗날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본인도 일종의 응보인지 늙은 나이에 유배지를 옮겨다니며 숱한 고생을 했다.

이렇게 살제로 불거진 광해군의 의심병은 폐모로 이어졌는데, 살제면 그렇다 쳐도 폐모는 유교적 도덕 질서가 자리잡은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다.[57] 결국 대북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지층을 잃은 광해군은 뒤늦게 다른 당파들을 포용해 나갔지만 정작 소북과 더불어서 가장 신뢰하기 시작한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몰락한다.

3. 가족

어린 나이에 죽었으니 당연히 실제 후손은 없다. 다만 1872년 판 《선원보략수정의궤》의 044b면에 "영창대군 의의 사손은 유학 이도진으로 나이는 42살이다[永昌大君㼁祀孫幼學李道振年四十二]."라는 내용이 나오며, 같은 책 015a면과 046b면에는 "영창대군 의의 계자 창성군 필[永昌大君㼁繼子昌城君佖]"이 언급된다. 창성군은 영창대군의 이복형 경창군의 4남으로, 사후 양자가 되어 가계를 이은 것이 된다.

《선원보략수정의궤》란 《선원보략》, 즉 《선원계보기략》에 대한 수정 보고서이다. 이때 왕자들 중 후사가 없거나 죄인으로 남아 대가 끊긴 집안을 모두 찾은 후, 양자를 들여줌으로써 끊긴 계보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이때 정한 후사가 오히려 계보를 어지럽혔다는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다. 해당 입적을 명시한 어명이 있었다면 몰라도, 사후양자를 들여준 시점이 대상자가 죽고 한참을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 수립 후인 1900년(광무 4년)에 《선원속보》를 간행하면서 이러한 조치를 모두 재검토했고, 단지 후사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적시킨 경우의 대부분을 정식 양자가 아닌 단순한 봉사손 지정으로 정리했다.

4. 여담

흥미롭게도 조선을 침략한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후계자로 사실상 정해진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생겼으니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이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선조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데 광해군 포지션이었던 히데츠구는 자결을 가장한 죽음을 당하고 영창대군 포지션인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되지만 결국 히데요시 가문이 멸망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인조는 영창대군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명령하였는데 조정신료들은 영창대군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이유로 영창대군에게 시호를 주는것을 반대하였지만 인조는 끝까지 영창대군에게 시호를 내려 줄 것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5. 대중매체

  • 1995년 KBS 드라마 〈 서궁〉에서는 배우 최강원이 연기했다.
  • 2015년 MBC 드라마 〈 화정〉에서는 배우 전진서가 연기했다. 광해군( 차승원 분)과 영창대군의 사이를 '서로 무서워 하는 관계'라고 한다. 최후 부분은 과정이 나오지 않고 죽은 부분만 나왔다.
  • 인조 대가 배경인 웹툰 칼부림〉에도 환영으로 등장. 순박한 표정으로 유배 중인 광해군의 무릎에 앉으나 그가 다시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조롱한다. 물론 환영인데다 오랜 유배 끝에 무덤덤한 광해군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1] 원래는 성남시 태평동에 묘소가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1971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누군가는 현대의 간식이나 장난감을 제단에 놓고 가기도 했다. # [2] '영창'은 경기도 이천의 별호였다. 전형적인 대군 작명. 다만 그럼에도 그 한자는 전국옥새에 세겨진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의 영창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장수를 기원하는 근사한 봉호가 광해군 3년(1611년)에 내려졌고, 그런 봉호의 뜻과 정반대로 10살도 못돼서 요절한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3] 광해군이 계모 소성대비( 인목왕후)를 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 [4] 정원군, 순화군 [5] 그러나 그때도 자신이 먼저 전위 이야기를 꺼내 신하들을 떠볼 정도로 선조는 신하들을 믿지 못했고, 떨어진 권위에 심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6] 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사망 당시 후궁들이 모두 원자보다 형인 아들을 두고 있던 터라, 그 후궁들 중 한 명을 왕비로 올릴 경우 원자가 더 이상 적장자가 아니게 되어 그 정통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 원자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부러 후궁을 승격시키지 않고 새로 간택령을 내려 뽑은 것이다. 그것도 원자의 친모 장경왕후와 같은 파평 윤씨 문중의 친척을. 원래 중종도 새로 간택을 하기보다는 단경왕후를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총애하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올리기를 원했었는데 신하들의 반대에 수긍했다는 설도 있다. [7] 조선시대 임금의 평균 나이가 40대 중반임을 감안한다면, 당시 기준 선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며, 이미 세자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분조를 잘 이끌어 차기 군주로써의 자질을 증명해낸 만큼, 그 입지가 굳건했다. 즉, 인목왕후 간택은 정치적인 이유로도, 왕실 예법의 이유로도 당위성을 찾기 힘든 무리수였다. [8] 하지만 워낙에 영창대군으로 알려져 있기에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처사로 볼 수는 있다. [9] 왜와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침. [10] 남이공의 성을 따 남당이라고도 불렀다. [11] 류영경의 성을 따 유당이라고도 불렀다. [12]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13] 建儲. 세자(儲)를 세우다(建). [14] 윤정 저, 국왕 숙종 <잊혀진 창업주 태조를 되살리다>, 여유당, 2013년 [15] 예를 들어 맏이 진안대군 정도전에게 아들과 제자를 잃은 이색과 인척이다(이색의 손자가 진안대군의 사위다). 심지어 태종의 정실 원경왕후도 고려의 최고 권문세족으로 통했던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 [16]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건국 1달 후에 이뤄졌는데, 건국과 세자 책봉의 텀이 짧은 점을 고려하면 건국 이전부터 이미 낙점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394년 신진 사대부 출신이자 왕씨 숙청에 참여했던 심효생의 딸과 혼인한다. [17] 이방번의 장인은 공양왕의 형 왕우다. (공양왕이 왕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며, 왕우도 조선 건국 이후 이런 이유로 왕씨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자손은 훗날 무인정사 때 멸족되었지만.) 방번이 세자가 되면 태조가 도륙낸 고려 왕실의 일원이 국구가 되는 사태가 일어나기에, 성격 핑계로 처음부터 제쳐버렸다. [18] 17세기에 조선과 명나라의 지배층에서는 조선 초기에 사주단자를 교환하면 약혼으로 치던것이 양가 아버지가 어릴때 혼담이 오간것도 혼인으로 치는것으로 바뀌어서 보지도 못한 약혼남이 죽으면 평생 수절을 강요하는것으로 성리학 예법을 확대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자에게 아버지는 영원히 아버지고 한번 군주를 섬기면 죽었다 깨나도 군신관계를 해소 할수 없고 이를 어길때는 이신(貳臣)이라하여 패륜 행위로 간주되었다. [19] 거기다 적모 의인왕후 본인도 선조가 내점해둔 신성군 생전부터 광해군의 세자 지위와 추후 승계를 단단하게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선조가 광해군 상대로 선위 파동이라든지, 승계 원칙을 어느정도 흔드는 행위를 거리낌없이 했던것도 광해군의 큰 후원자이자 정비인 의인왕후 사후의 일이였다. [20] 장자는 양자로 들이면 안 되지만 이 규정도 편법으로 무시했다. 지손 가문의 장자를 종가의 양자로 들이기가 성행했다. [21] 단종은 지지기반이 약해서 찬탈이 벌어진게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세종과 문종이 생전에 믿을만한 지지기반으로 고명대신을 붙여주었고, 종친들에게도 부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종친들과 고명대신들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왕실최고어른이자 최고서열인 왕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친들 중 서열이 가장 높은 수양대군이 찬탈의 중심자가 되었고 그를 따라 일부 종친들과 대신들도 배신하여 수양대군 편에 붙었다. [22] 세종과 문종 본인들 입장에서는 고명대신들 정도면 충분하게 생각했고 종친들도 본인들 생전에는 납작 엎드렸기 때문에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친들에게 이미 힘을 준 상황에서 혈연의 정보다 왕위에 대한 욕심이 우선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지나치게 간과했고, 그나마 이러한 종친들을 막아줄 현덕왕후와 소헌왕후가 사망한 뒤에도 이들 대신 미래의 왕대비가 될 수 있는 계비를 들이질 않아 왕실어른의 부재를 초래하여 수양대군이 고명대신들이 국정을 농단한다는 명분으로 무력 행사를 거리낌 없이 실행하게 하는 명분을 주었다. 만약 세종이나 문종 둘 중 한 명이라도 계비를 맞아들여 계비가 (대)왕대비에 올랐다면 이런 명분조차 그냥 개소리로 치부되어 수양대군이 되려 역관광을 맞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계비가 있었다면 수양대군이 왕위가 탐나도 난을 일으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23] 선조는 비록 나라를 버리고 도망갈지언정 자기 권력 하나 지키는 것에는 굉장히 집중하던 인간이었다. 따라서 선조가 왕실에서 이제 자신의 정적이 된 세자를 견제하는 왕자를 따로 내세워서 자신의 왕권을 다지는 일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고 그것이 실현된 결과가 영창대군의 탄생이었다. [24] 이것도 영창대군이 새로 들인 중전에게서 나온 적자라는 것 때문에 거의 없다시피한 세자 교체 가능성의 여지라도 던져졌던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은 선조와 영창대군 지지 파벌이 영창대군의 혈통을 이용해 적장자 상속제를 들먹여도 광해군의 세자 자리를 바로 뒤집을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광해군은 택현을 명분으로 고령의 선조를 상왕으로 올리고 곧바로 즉위해도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된 전쟁직후 혼란기이기에 유교 이념에 걸맞는 태평성대에는 적장자가, 혼란기에는 가장 공이 크고 어진 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25] 설령 있다 쳐도 만일 그러면 역성혁명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려 자칫하면 조선의 명맥을 끊은 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특히 선조가 병들어서 내린 교지를 보면, 개인적인 좋고 싫음보다 현실을 택했음을 보여준다. [26] 조선에서 세자의 실무 경험은 혈통만큼 큰 정통성을 부여해 주었다. 환국의 그늘 아래 세자 자리가 위태로웠던 경종조차도 대리청정을 통해 차기 국왕으로 자리를 굳혔다. 한 일화로 경종 대리청정 아버지 앞에서의 돌발 행동(승지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승지들이 경종을 기다리게 만들었는지 대뜸 "승지고 사관이고 죄다 물러나라"며 심한 히스테리를 부렸는데, 워낙에 전에 없던 일이라 다들 어쩔 줄 몰라했다. 경종도 잠시 후 지나쳤음을 인정했지만)을 숙종이 질책하자 소론 신하들이 숙종을 비판했고, 이것에 대해 숙종도 수긍할 정도였다. 노론 쪽에서도 사간 이봉익이 상소를 올려, 숙종이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가 지나쳤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27] 여러 가지 국난 중에서도 특히 전쟁 중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쓴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적으로는 입지를 튼튼히 할 수 있었으며, 국민들에게는 두고두고 영웅으로 사랑을 받았다. 한국사에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적군 4만을 궤멸시킨 전공으로 영양왕의 계승자로 인정받은 고구려의 영류왕, 나당연합을 성사시켜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한 공적으로 왕위계승권을 보장받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 집안이 한미하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아버지 태조 왕건을 따라 일리천 전투에 참전해 후백제를 멸망시킨 공적을 세운 고려의 혜종이 있었다. 외국의 사례를 찾아봐도 미국 대통령 중 위대한 순위 상위권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등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전쟁 극복이며, 2022년 별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이유 중에도 공주 시절 제2차 세계대전에 보급장교로서 참전했다는 점도 있었다. [28] 인조반정 이전에는 생전 무사들과 즐겨 모이던 임해군의 반란 가능성은 충분히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건이라, 이후 영창대군의 구명을 주장한 곽재우조차도 임해군은 죽어 마땅하다고 논했다. 왕위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기엔 너무 어렸던 영창대군과는 달랐다. [29] 더구나 하릉군은 가장 서열이 빠른 금원군의 양자. 하원군은 덕흥대원군 집안을 이어야 할 가능성이 높기에 명분상 둘째 하릉군이 가장 유력했다. [30] 즉, 광해군의 정통성은 (법적)어머니이자 정실 왕비 의인왕후부터가 유력한 세자 후보였던 신성군 생전부터 인정해주었다. 아무리 의인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했더라도 친정 가문이 조선시대 명문가 중 으뜸에 속하는 반남 박씨인데다 내명부를 잘 통솔한 훌륭한 왕비였기에 그녀의 발언권은 신성군 생전에도 선조가 마냥 묵살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높았다. [31] 인정했다간 만력제가 옳다꾸나 하고 '적자도 아닌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해줬으면서 왜 내 셋째 아들은 인정 안해줘?'라고 우길게 뻔했으므로. [32]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만력제가 광해군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때 만력제는 광해군을 "조선의 세자"라고 표기하였다. 명나라 황제와 명 조정이 세자 첩지와는 상관없이 사실상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한 것이다. [33] 명나라의 인정으로 논하자면 태조도 명의 인정을 못받아 권지고려국사에 머물렀지만 자신의 왕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조선에 대한 명의 책봉은 어디까지나 사후 처리지 사전에 꼭 받아와야 하는 건 아니었고, 그걸로 후환이 생긴 사례는 없다. 광해군의 사례에서 유독 강조되는 건 어떻게든 왕 노롯을 계속하기 위해 선조가 핑계로 썼기 때문이다. 결론은 왕의 의지 문제. [34] 물론 유영경이 전위에 반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영상으로서 왕이 "나 물러날 거임" 하는 상소에 의례적으로라도 반대해야 하는 게 신하로서의 도리였다. 문제는 유영경은 대놓고 영창대군을 빨아댄 것. [35] 선조는 16살에 즉위해 총 40년 7개월을 용상에서 보냈다. 이는 조선 27왕 전체 4위이며 그때까진 1위였다. 이의가 선조의 즉위 때 나이와 같아지려면 재위 54년을 채워야 했는데, 이러려면 영조의 재위 기간을 뛰어넘게 된다. 선조는 인목왕후를 맞이했을 때 50세로 조선 왕 평균 수명을 넘겼고, 5년 사이에 정명공주와 왕자 이의를 낳았다. [36] 진짜 광해군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 하다못해 이들의 반의 반이라도 되는 사고를 쳤다면야 폐출의 명분이 되지만, 광해군은 세자 시절 워낙 모범적이라 그런 건 없었다. [37] 인목왕후는 본인에게 힘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했던 인조대에도 형편 없는 처세를 했었다. [38] 광해군일기(중초본) 1613년 5월 17일 기사 [39] 참고로 서경주의 아버지 서성(徐渻)은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유배된다. 서성은 선조의 고명 대신 가운데 가장 폐모 반대에 적극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은 뒤집힌다. 서경주는 이괄의 난 때 호종한 공로로 숭덕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금화내자제조(禁火內資提調)를 겸하였으며, 1631년(인조 9년) 아버지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만년에 다시 상방원(尙方院) 및 관상감(觀象監) 제조와 총관(摠管)을 겸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전란을 피해 인조 21년 64세로 죽을 때까지 혼란의 시기에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여담으로 김제남의 아들 김규는 칠서의 옥 때 역적이 되어 화를 보았다. [40] 특히나 본심이든 아니든 10차례나 넘는 선위파동과 탁소북을 이용해 광해군과 영창대군간의 대립을 조장한 점은, 그야말로 영창대군을 사지로 모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분조를 이끌고 입지가 확고한 세자라 해도, 연이은 선위파동으로 입지가 위협받고, 적장자라는 명분을 지닌 동생이 국왕의 지지를 받는다면,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눈에 거슬릴만한 상황이다 [41] 대부분의 신하들도 대세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훙일 다음 날 즉위를 부추겼는데, 이에 대해서는 광해군의 즉위가 유영경으로 불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수 신료들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42] 유영경은 광해군 즉위 이후 영의정 자리에서 내쫓기고 파직과 삭직을 거쳐 유배당하고, 유배지에서 자결한 걸로도 모자라 시신까지 끄집어내져서 부관참시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비단 유영경 뿐만 아니라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탁소북에 속한 대신들도 대부분 사사당하거나 쫒겨났다. 다만 허욱, 한응인은 공로가 있어 자리를 유지하다가 한 때 쫓겨났으나 이후 다시 복귀했다가 연달아 일어난 옥사로 인해 다시 쫓겨났다. [43] 위에서 언급된 탁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기 위해 벌인 반역에 준하는 행적. [44] 당시의 정승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년 ~ 1613년)이 아니라, 5살 연하의 죽천 이덕형(竹泉 李德泂, 1566년 ~ 1645년)이다. 훗날 인조반정 공신이기도 하다. [45] 조선사의 비슷한 예로 태조 왕씨 몰살 때도 비슷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46] 광해군 7년에 홍유의는 종성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이후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47] 기협은 이후 광해군 9년에 사면되었고 정묘호란 때 청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48] 전통적인 온돌 구들장은 일반적으로도 섭씨 40도는 우습게 올라간다. 이걸 작정하고 땐다면 60도 ~ 70도까지 올라간다. 일반 가정에서도 온도를 높이면 등을 대기도 어려울 만큼 뜨겁다. 시골 아랫목에 장작을 때면 데기도 일쑤였음을 감안하면, 자리에 눕기는커녕 뜨거워서 서있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약을 내리거나 목을 치는 것보다 훨씬 잔인한 살인 방법이다. 더군다나 사망했을 당시에 8살로, 현시점으로 봤을 때 초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어린 나이였다는 걸 생각해 보자. [49] 이후 1615년(광해군 7년)에 죽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 [50] 인목왕후 본인 입장에선 아들이 진짜 살해당했다면 가해자까지 잡아서 족치든 뭐든 하고 싶었겠지만 사실 살해됐는지 안됐는지 정황 자체가 애매한건 사실인데다 어쨌든 광해군이 귀양을 보내지만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므로 원흉인 광해군만을 족칠 수 밖에 없었다. [51] 서신의 정확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52] 실록에 따르면 정항은 정온이 자신을 탄핵한 일 때문에 벌벌 떨었는데,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으려 했으나 동생이 "우리 아이가 어찌 형과 더불어 연좌를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조카를 도로 파양시켜 데려가자 울분에 빠져 곡기를 끊고 술을 퍼마시다가 죽었다고 한다. [53] 다르게 말하면 조선에서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많이 터졌다는 거다. [54] 당장 세조의 경우 어린 조카 단종 외에도 동복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역모로 몰아 사사를 지시했으며, 인조는 신료들의 의견에 끝내 삼촌인 인성군을 사사해야 했고 경선군, 경완군을 내치기도 했다. 다만 인성군의 경우엔 인조가 끝까지 살리려고 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그 외에 여러 이복동생들( 무안대군, 의안대군, 안양군, 봉안군)을 살해한 태종 연산군, 조카들( 폐세자 이고, 창녕대군, 양평군)과 친아들 복성군을 사사한 중종,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손자들( 은언군, 은신군)을 내친 영조, 이복동생 은전군을 죽인 정조 등, 의외로 4촌 이내의 친족을 죽인 왕은 많다. 그래도 정조는 스스로 원해서 죽인 건 아니었지만. [55] 이 상소를 쓴 겁 없는 선비는 그대로 목이 달아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56] 태어날 때부터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어린아이가 갑자기 섬으로 쫒겨난 뒤,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고 사니 병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일이다. 조선의 유배형이 건장한 성인 남성조차 제대로 버티지 못할만큼 가혹했던 걸 생각하면 이런 의견도 무리는 아니다. [57] 광해군의 경우는 신덕왕후 강씨의 사례를 인목왕후의 모델로 삼은 것이 분명한데, 당대 여론에 크게 힘입은 신덕왕후 격하 사례와 달리 인목왕후와 광해군은 군신의 예가 분명했다. 신덕왕후는 죽은 사람이라 권위에 한계가 있었지만 인목왕후는 멀쩡히 살아있는 왕의 어미였다. [58] 퓨전 사극으로 실존 인물들에서 모티브를 딴 가상의 인물들이 나온다. [59] 광해군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가상의 왕. [60] 작중에는 차율무라는 가명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