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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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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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 제2대 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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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인조의 왕자
인평대군 | 麟坪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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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묘 전경 | |||
출생 | 1623년 1월 10일 | ||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어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부근)[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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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8년 6월 13일 (향년 35세) | ||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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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요(㴭) | ||
부모 |
부왕
인조 모후 인열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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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6남 1녀 중 3남 | ||
배우자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福川府夫人 同福 吳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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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
자 | 용함(用涵) | ||
호 | 송계(松溪) | ||
군호 | 인평대군(麟坪大君)[2] | ||
시호 |
충민공(忠敏公) → 충경공(忠敬公) |
인평대군의 유묵.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예술인.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이자 소현세자, 효종의 동복 동생이며 용성대군의 동복 형이다.또한 인조의 막내 남동생이자 원종(정원군)의 막내아들인 능창대군의 양자이다. 따라서 후술할 그의 친후손 남연군 이구와 그의 자손들 호적에 남연군이 은신군에게 입적 되기 전 뿌리가 인조의 후손이 아닌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적혔다.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대군이다. 동생 용성대군이 6살에 죽었고[3], 이후 조선에서는 대군이 없었기 때문.[4]
2. 생애
한성부 경행방 잠궁에서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생후 3개월 뒤 아버지가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자가 되었고, 1630년 2월 7일[5]에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고산 윤선도를 스승으로 두어 효경과 소학 등을 배웠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인조를 모시고 수행한 공로로 원종 공신 1등에 올랐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형 봉림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간다. 당시 두 형제가 겪었던 일들은 그 들을 수행한 문신 어한명이 쓴 《 강도일기(江都日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 이후, 두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7년을 만주에서 고생한 형들과 달리 심양에 끌려간 지 1년만인 1638년에 돌아왔고 1646년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6] 1등으로 책봉받았다.
동복형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事恩士)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엄연히 조선의 왕자(대군)이자 사신이었지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노숙을 밥 먹듯 하며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하사(進賀士), 동지사(動指士)까지 합쳐서 총 13번, 매년 1~2회 꼴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자그만치 13번이나 청나라와 조선을 오고 가는 것도 고역인데,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막중한 책무도 덤으로 도맡았다. 이렇다보니 인평대군은 청나라의 사신으로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고 이로 인해 몸까지 쇠약해졌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인평대군은 맨날 청나라에 접대받으러 간다(!)고 쑥덕거리기만 했다. 이렇게 사신을 보낼 때마다 등판하는 인평대군이 안쓰러웠던 송시열이 보다못해 효종에게 " 선왕께서 동생 잘 챙기라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형이 되어가지고 어찌 그리도 뻑하면 호랑이굴에 보내면서 쉴 새 없이 혹사를 시키십니까"라며 상소를 올렸을 정도. (《효종실록》 기사)
그래도 효종의 유일한 친동생(한배에서 나온 동복동생)으로 효종 재위시절 내내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7]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이 감싸주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청탁을 했다던지, 접대를 했다던지. 그리고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마치 자식처럼 아주 반기며 맛있는 음식도 주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
3. 사망
1658년(효종 9년) 6월 13일(음력 5월 13일)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 효종은 동생의 죽음을 너무나 크게 슬퍼하여 한동안 인평대군의 집을 떠나지 않아 신하들의 반대로 마지못해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제사를 직접 돌았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있으며 후일 종묘에 있는 효종의 묘정에 공신으로 배향되었다.인평대군의 묘 | 인평대군 치제문비 |
경기도에서는 1992년에 그의 묘를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했다. 2016년 2월 11일 오후 2시 30분께 그의 묘가 있던 야산에 화재가 나 묘가 불타는 사고가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다행히 옆에 있던 인평대군 치제문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75호)로 화재가 확산하는 것은 막았다고. 당시 기사.
4. 가옥
<colbgcolor=#94153E> 17세기에 인평대군의 집을 그린 《인평대군방전도》 |
중종 대에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이 있던 곳으로 신광한은 이 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신대동' 또는 '신대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저택은 저녁볕을 잘 받는 위치에 있어서 '석양루(夕陽樓)'로도 불렸다.
후일 고종 대인 1865년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을 제작, 보관하는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뒷날 이 일대에 이화장이 들어선 이후 이승만이 이 곳에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그 앞에 남아 있었다.
5. 영정
인평대군의 영정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까지 그의 종가에서 영정을 보관했다.그런데 후술할 인평대군의 8대 종손이자 조선귀족이었던 이재극이 1923년에 잃어버렸다. 그해 12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재극은 평소에 인평대군 영정 두 폭을 자신의 집 한 켠에 걸어두고 문을 잠가 보관했다. 인평대군의 기일에만 문을 열어 한 번씩 봤는데, 1923년 기일에 열어보니 영정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 이에 이재극 일가 사람들이 어찌된 건지 철저히 조사했는데 누가 훔쳐갔다고 하기에는 그런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재극은 경찰에 사건을 의뢰하려 했으나, 조상님의 영정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돌면 집안 망신이 된다는 이유로(...) 몇 달 간 계속 속앓이만 하다가 동대문경찰서에서 이를 탐지하여 조사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면 정원군 시절의 모습이 전해지는 원종과 더불어 인조, 소현세자와 효종의 얼굴을 추측할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될 것이나 이후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6. 여담
- 도둑맞은 적이 있다. 이광필(李光弼)이란 사람이 그의 집에서 금 병풍과 벼루집, 그리고 동물의 털로 짠 붉은색 담요 등을 훔치다 잡혔다. 왕자의 집을 도둑질했으니 당연히 중죄였다. 이에 이광필이 물귀신 작전을 써서 자신의 친구들과 이복동생 등 여러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금방 들켰다. 그래서 이광필은 절도죄에 무고죄까지 더해져 처형당했다.(《 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2월 21일 갑오 2번째 기사 : 이광필을 무고죄로 처형하다.)
-
소용 조씨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인
효명옹주와 껄끄러운 일화가 있다. 효명옹주는
인조의 유일한 딸로, 금지옥엽으로 자라 성격이 이기적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궁에서 잔치가 열려 왕실 가족이 다같이 참석했을 때, 효명옹주는 자신의 이복오빠인 인평대군의 아내 복천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오씨는 "작급으로는 내가 옹주보다 아래이나[8] 적통으로서는 내가 옹주보다 먼저이다."라고 주장했고, 효명옹주는 "
부왕(인조)이 계시니 내가 먼저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효명옹주의 나이가 11세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는데, 어린 나이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을 보면 오만방자한 성격이 다 드러난다.
사실 양쪽 말 다 맞다. 인조가 살았든 죽었든 옹주의 품계는 무계이니 정1품인 부부인보다 엄연히 위다. 하지만 오씨는 효명옹주보다 15살이나 많은 이복 오빠이자 적통 대군인 인평대군의 부부인이자 손위 올케였다. 둘의 말이 모두 맞았기에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일이 커지자 인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때 인조는 자기 딸의 편을 들어 효명옹주가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 이때 다툼의 상대가 복천대부인이 아니라 민회빈 강씨였다는 판본도 있는데, 신빙성은 매우 낮다. 대부인은 품계상 옹주보다 아래니 애매하지만, 세자빈은 어떻게 쉴드가 안 된다. 세자빈은 차기 국모로서 무품 중에서도 왕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다. 설령 옹주가 아니라 공주고 세자보다 누나여도 세자빈에게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 효명옹주가 아무리 오만했어도 세자빈에게 덤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효명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9]
인평대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친형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의 가족들을 음해하는 데 앞장선 원수인 소용 조씨의 딸인데다, 자신의 부인을 대놓고 무시한 행적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이 걸려서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동복 형제들간의 우애는 좋았다. 인조는 이복 형제자매들간의 사이를 염려했는지 승하하기 전에 효종에게 효명옹주와 그녀의 남동 생들을 잘 보살펴주라 당부했다. 소용 조씨는 효종 즉위 직후 '효종 저주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지만 효명옹주와 그녀의 동생들은 효종의 보살핌을 받아 국문도 면하게 해주고, 귀양지도 지속적으로 편한 곳으로 옮겨주다가 종래에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주었다.
- 《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 헨드릭 하멜 및 그 일행들과 인연이 있다.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해서 제주에 머물다 한양으로 압송당해 지내던 중,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을 보고 하멜의 동료 2명이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했다. 그러나 실패했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험분자로 여겨 죽이려고 했다. 심지어 이미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 역시 가망없을 거라고 했을 정도. 정확히는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 것"이라 말했다. 즉,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절망하던 하멜 일행은 마침 지나가던 인평대군을 보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딱하게 여긴 인평대군이 효종에게 간청해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줬다. 이 정도면 인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썼다.
-
하마터면 역모로 몰려 큰일날 뻔했다.
1656년(효종 7년)에 당시 승지 유도삼이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의 연회에 참석해서 행패부리다가 뒤늦게 대군이 있음을 알고는 사과했다.
柳承旨最後扶疏醉入來蹲座則座客謂曰大君自家在此矣柳承旨顚倒起拜稱小臣不察云座
유승지(승지 유도삼)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좌객이 "대군 자가께서(인평대군)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승지가 깜짝 놀라 일어나 절을 하며 '소신의 불찰입니다'라고 말했다.
- 추국일기 3권 #
그런데 문제는 사과하던 중에 그만 칭신, 즉 인평대군에게 신하를 칭한 일이 일어난 것. 원래 칭신은 왕에게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이거 까딱 잘못하면 역모로 몰리기 딱 좋은 거리다. 아니나 다를까 천안군수 서변이 이 사실을 전 군수 홍주일의 아들 홍만시에게 전해 듣고, 오정일· 허적· 원두표 등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효종은 이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두표는 서인인데 오정일, 허적은 대표적인 남인 세력이었기 때문. 일단 고변에 연루된 자들을 근신시키고는, 서변 및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국문했다. 그 결과 서변이 뜬소문을 듣고 공을 세울 욕심에 무고한 것임이 드러났다. 결국 서변과 홍만시 등은 혹독한 국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유배를 갔다. 이 사건에 대해 대사간 유철은 유도삼이 인평대군에게 신하라 칭한 것은 아무 뜻 없이 한 말이나 사사롭게 대군을 만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다며 유도삼의 파면을 청했다. 그러자 효종은 하나뿐인 친동생 인평대군을 없애려는 나쁜 짓이라며 분노했고 오히려 유철이 서변을 사주했다며, 그를 국문하고 절도에 귀양보냈다. 자세한 내용은 서변의 옥사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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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암집화(楓巖輯話)》, 《이순록(二旬錄)》, 《
성호사설(星湖僿說)》 등 조선 후기에 나온 책들에 인평대군가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책마다 조금씩 버전이 다른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평안도 성천군에 재색을 겸비한 득옥(得玉)이란 기녀가 있었다. 인평대군이 성천에 갔을 때 득옥을 보고 연모하여 자신의 집에 데려왔다. 인평대군은 술자리마다 득옥을 옆에 두었는데,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창이 보고서는 몰래 득옥과 정을 통했다. 이를 알게 된 오정창의 아내 정씨 부인은 득옥을 없앨 계획을 꾸몄다. 바로 여종을 시켜 득옥의 방에 인평대군이 아끼던 귀중품을 숨기고 이를 득옥이 훔쳤다고 모함한 것. 시기도 하필이면 인평대군이 집을 비운 때였다. 이에 인평대군의 부인 오씨는 무고함을 알면서도 노비들을 시켜 득옥을 매질해 죽인 다음 산에다 매장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득옥이 살아돌아왔다! 그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오씨 부인의 방과 먹을 약에 피가 낭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평대군은 병석에 누웠다. 득옥이 인평대군 베개 옆에 앉아있는 것을 본 집안 사람들은 놀라 무서워했고, 얼마 못가 인평대군은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득옥은 귀신이었다. 즉, 살아온 게 아니라 복수하려고 귀신이 되어 돌아온 것. 인평대군 사후 득옥은 오씨 부인에게 “심정이 어떻습니까? 저승에서 죄 없이 죽은 저를 가엾이 여겨, 대군을 모시며 팔각정에서 놀아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부인은 저를 또 부러워하겠군요”라면서 조롱했고, 이후 가솔들이 늦은 밤에 (인평대군 저택의) 후원을 가면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에 오씨 부인은 신경이 쇠약해져 얼마 못가 남편을 따라갔다. 이후로도 득옥은 온갖 변괴를 일으켜 그 일족을 다 멸하고 나서야 저주 행위를 멈췄다. #
물론 실화는 아니다. 다만, 인평대군과 그 가족들의 이른 죽음이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저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하는 추측이 있다. 이 이야기는 2020년 7월 7일 채널 A 역사재현 프로그램 〈 천일야사〉에서 다루었다.
〈천일야사〉에 나온 득옥 에피소드
- 1656년(효종 7년)에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남긴 기행문 《연도기행(燕途紀行)》에 괴물 강길에 대해 적어두었다. 강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강길 문서 참조.
- 가족과 후손 단락에서 언급하겠지만,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혈연 상 실제 조상이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릴 때, 몇몇 유림들이 이에 반발하여 인평대군을 모신 서원을 짓는 꼼수를 부렸다. 설마 자신의 조상을 모신 곳을 건드리겠느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흥선대원군은 인평대군의 서원도 없애버렸다.
- 불행히도 인평대군의 후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가 됐다. 대표적인 인물로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과 그 아들 영선군 이준용, 인평대군 가의 종손이었던 이재극 등. 재미있는 점은 효종의 생물학적 후손이었던 경은군 이재성은 독립협회에 후원을 하고 의병들과 어울리다 탄핵을 당했다는 것이다.
7. 예술적 기질
인평대군의 유묵.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점도 닮았으니 바로 예술적 기질이다. 안평대군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인평대군도 그에 못지 않았다. 시, 서, 화 모두에 실력이 있었고 제자백가[11]에도 정통했다.
<colbgcolor=#94153E> 구천은폭. 폭포의 중허리를 가로질러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보허각(步虛閣)을 지었으며 다리 한쪽에는 영휴당(永休堂)을 세워 자신의 별서로 삼았다. |
<colbgcolor=#94153E> 인평대군이 그린 《일편어주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
미술 작품 이외에 글도 잘 지었다. 《송계집(松溪集)》 · 《연행록(燕行錄)》 · 《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 중 2013년 5월 《송계집》의 초고본인 《송계기고(松溪紀稿)》가 발굴 공개되었다. #
그가 지은 시조 3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각각 한 수씩 전하는데 아래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조 2수를 소개한다.
바람에 휘었노라 굽은 솔 웃지 마라.
춘풍에 피온 꽃이 매양(每樣)에 고왔으랴.
풍표표(風飄飄) 설분분(雪紛紛)할 제
네야 나를 불으리라.
(현대어 풀이) :
바람이 몰아치기에 할 수 없이 휘었지만, 굽은 소나무야 웃지 말아라!
봄 바람에 피어난 꽃이 언제든지 고왔을 것이랴,
모진 바람 불어치고 눈이 흩날리면
나를, 너만은 부러워 할 것이다.
《바람에 휘었노라》(평시조, 서정시, 단시조다.)
춘풍에 피온 꽃이 매양(每樣)에 고왔으랴.
풍표표(風飄飄) 설분분(雪紛紛)할 제
네야 나를 불으리라.
(현대어 풀이) :
바람이 몰아치기에 할 수 없이 휘었지만, 굽은 소나무야 웃지 말아라!
봄 바람에 피어난 꽃이 언제든지 고왔을 것이랴,
모진 바람 불어치고 눈이 흩날리면
나를, 너만은 부러워 할 것이다.
《바람에 휘었노라》(평시조, 서정시, 단시조다.)
소원(小園) 백화총(白花蔥)에 나니는 나비들아.
향내를 좋이 여겨 가지마다 앉지 마라.
석양에 숨궂은 거미는 그물 걸고 엿는다.
(현대어 풀이) :
작은 동산에 핀 많은 꽃떨기에 나는 나비들아 /
향내를 좋이 여겨서 가지마다 앉지 말아라 /
해질 무렵 음흉(淫凶)한 거미는 그물을 매어놓고 엿보고 있다.[12]
《소원 백화총에》
또한 한시(漢詩)에도 능했다. 대표작으로는 《봉화낙선재구호》 등이 있다. '형
효종의 시에 낙선재에서 즉석에서 답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낙선재(樂善齋)는 지금
창덕궁에 있는 건물이 아닌
창덕궁 돈화문 바깥 동쪽에 있던 집으로 효종의
잠저이다. 향내를 좋이 여겨 가지마다 앉지 마라.
석양에 숨궂은 거미는 그물 걸고 엿는다.
(현대어 풀이) :
작은 동산에 핀 많은 꽃떨기에 나는 나비들아 /
향내를 좋이 여겨서 가지마다 앉지 말아라 /
해질 무렵 음흉(淫凶)한 거미는 그물을 매어놓고 엿보고 있다.[12]
《소원 백화총에》
一天霜雁送寒聲(일천상안송한성)
서리가 가득하여 기러기 소리 싸늘한 하늘에
河漢迢迢夜氣晶(하한초초야기정)
까마득한 은하수 아래 밤기운은 수정같다.
臥病胡床仍不寐(와병호상잉불매)
청나라에 와 병들어 누웠으니 잠 못 자는데
透簾明月照深情(투렴명월조심정)
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드는 주렴 밖 밝은 달.
《봉화낙선재구호》
이러한 인평대군의 뛰어난 예술적인 면모는 그가 살아왔던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약소국(조선)의 왕자로서
인질(볼모)로 끌려갔었고 사신으로 자주
청나라에 드나들면서 그가 느꼈던 모멸감과 고통을 시서화 등 예술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서리가 가득하여 기러기 소리 싸늘한 하늘에
河漢迢迢夜氣晶(하한초초야기정)
까마득한 은하수 아래 밤기운은 수정같다.
臥病胡床仍不寐(와병호상잉불매)
청나라에 와 병들어 누웠으니 잠 못 자는데
透簾明月照深情(투렴명월조심정)
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드는 주렴 밖 밝은 달.
《봉화낙선재구호》
8. 가족 관계
- 부인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福川府夫人 同福 吳氏, 1622 ~ 1658) - 감사 증 우의정 오단(監司 贈 右議政 呉端)의 딸
- 적장남 : 복녕군 이욱(福寧君 李栯, 1639 ~ 1670) - 고종의 7대조
- 적차남 : 요절
- 적3남 :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1641 ~ 1680) - 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처형됨
- 적4남 : 요절
- 적5남 :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 1647 ~ 1680) - 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처형됨
- 적6남 :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棩, 1648 ~ 1700) - 동생 용성대군에게 입적
- 적장녀 : 이금온(李金溫, 1654 ~ ?)
- 사위 : 조기수(趙祺壽)
- 외손자 : 조원명(趙元命, 1675 ~ ?)
- 외손자 : 조기명(趙耆命, 1677 ~ ?)
- 적차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사위 : 정중만(鄭重萬)
- 적3녀 : 요절
- 적4녀 : 요절
- 측실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김여수(金汝水)의 딸
8.1. 후손
오단(呉端)의 딸 복천부부인 오씨와 혼인해 슬하에 6남 4녀를 얻었다. 2남, 4남과 3녀, 4녀는 요절했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총 4남 2녀이다. 큰아들이 복녕군 이욱/유(福寧君 李栯)[A], 3남이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그리고 5남이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이며 6남이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㮒)이다. 초명은 '棩' 인데 사촌 형 현종의 이름 역시 '棩' 이라 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하였다. 복평군은 일찍 죽은 인조의 4남이자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로 출계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실제 후손이기도 한 고종 대에 가서야 용성대군의 봉사손을 정하면서 사후 입적 된 것일 뿐, 생존 당시와 사후 200여 년 간은 법적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다. 큰딸은 향주 이금온(李金溫)으로 조기수(趙祺壽)와 혼인했고 둘째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향주로 정중만(鄭重萬)과 결혼했다.복천부부인 오씨는 인평대군과 동갑으로 임신 중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아이를 못 낳고[14]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장남과 삼남인 복녕군과 복창군은 이미 봉군되었고 결혼까지 한 어엿한 성인이었으나 나머지 2남 2녀는 아직 어린이들이었기에 이를 딱하게 여긴 현종이 고아가 된 사촌 형제들을 궁궐에 들여서 키웠다. 그러면서 이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깍듯이 잘 대접하였다. 현종과 숙종 모두 외아들이었기에 현종에게 가장 가까운 부계친척은 사촌들이었고 숙종에게는 오촌이 가장 가까웠다.
숙종 시기에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일컬어 봉호에 다 '복(福)'이 들어간다고 해서 '삼복(三福)'
주목할 것은 장남 복녕군의 가계이다. 바로 고종의 실제 혈맥이기 때문이다. 고종은 혈통상으로 복녕군의 7대손이다. 여기에 양자 입적을 통해 가계가 더 복잡해지게 된다. 복녕군의 5대손이자 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이 족보 상으로 13촌 아저씨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은신군은 영조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왕위계승권과는 먼 방계혈족이지만, 은신군은 원래 사도세자의 서차남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자연스레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다. 그래서 고종이 가까운 왕족 자격으로 왕위 계승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조선 최후의 왕통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16]
한편 덕흥대원군의 후손들끼리 서로 입양하는 횟수가 잦는 등 가까이 지내자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려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은 11대손(12세손) 이하로 전부 항렬자를 같게 했는데, 이 때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로 통일시켰다.[17]
인평대군가의 8대 종손(宗孫)이 이재극인데 대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조선 왕실에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왕통이 끝끝내 단절된 것을 따라하듯, 인평대군파 종가 역시 후대로 올수록 자손이 귀해졌는데, 이재극의 아들이자 9대 종손인 이인용의 막장드라마급 방탕한 생활로 가문은 몰락했고,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5남인 이수길이 양자로서 10대 종손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평대군파 종가는 혈맥 상 대한제국 황실의 직계손이다.
용성대군의 양자가 된 6남 복평군의 9대 종손이자 장남 완계군 이찬의 8대손으로 신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며 소설 《자유종》으로 유명한 문학가이자 언론인인 이해조가 있다. 이해조의 손녀는 기독교 여성운동과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대모 이우정 전 국회의원이다.
현재 한국의 맞춤양복점 중 가장 오래된 종로양복점의 창업주 이두용은 인평대군의 9대손이다. 1916년 개업 이래 대를 이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운영 중이다. 현재 사장인 이경주는 이두용의 손자이다. #
8.2. 역대 종주(宗主)
자세한 내용은 대궁 문서 참고하십시오.9. 인평대군이 등장한 작품
- 1986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500년 - 남한산성〉 편에서도 나왔으나 당시 역을 맡은 배우는 알려져 있지 않다.
-
<colbgcolor=#94153E>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의 인평대군
2013년 JTBC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지은성이 연기했다. 지은성은 이 작품 다음해인 2014년 tvN 드라마 〈 삼총사〉에서는 인평대군의 큰형 소현세자의 아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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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 |
[1]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은 2개가 있는데, 인조가 즉위 전에 살던 '상어의궁(上於義宮)'과 왕자(대군) 시절 효종이 살던 '하어의궁(下於義宮)'이다. 효종이 태어난 곳은 상어의궁. 하어의궁 터는 오늘날
혜화동 쪽에 표석이 남아 있다.
[2]
봉호는
강원도
인제(麟蹄)에서 유래했다.
[3]
장성했더라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았다.
[4]
인조 이후 적자(왕비에게서 낳은 아들)가 있었던 왕은 효종, 현종, 순조, 고종 넷뿐이었다(철종은 일찍 죽어서 제외). 그러나 네 명 모두 적자가 세자가 될 1명만 있었기 때문에 대군이 없었다(순조의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5]
음력
기사년 12월 26일.
[6]
이전 문서나 '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는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으로 책봉받았다.'라고 적었지만, 실제 영국공신 1등에 책봉된 이는 구인후(具仁垕, 1578~1658)[18]와
김류 단 2명 뿐이다. 그리고 이 영국공신은 인조 말
심기원이란 인물(이 사람도
인조반정에 동참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을 받았던 인물이었다.)이 일으킨 역모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는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7]
효종의 또다른 동복형제들인
소현세자와
용성대군은 일찍 죽었고,
숭선군과
낙선군은
이복동생들이었다. 심지어 숭선군과 낙선군의 친모는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과 결탁해 반역을 저지르려다 사사된
소용 조씨였다. 물론 사사된 모친과 다르게 숭선군과 낙선군 역시 효종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8]
왕의 서녀인 옹주는 무품, 대군의 부인은 정1품이다.
[9]
추안급국안에 기록되길 79세 여자 거사 설명(雪明)의 진술에서 "조 귀인(소용 조씨가 귀인이었던 때다)이 자신에게 베개를 하나 줬는데, 보니 꽤나 좋은 베개라 이런 물건은 자신한테 필요없다고 하니, 조 귀인이 인평대군 방에서 보낸 베개라고 하면서 직접 베개를 뜯어서 검은 비단으로 된 주머니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노루의 발굽과 같이 생겼다"고 했다.
[10]
단, 인평대군의 경우 원음은 '린평대군'이다. '기린 린(麟)' 자.
[11]
춘추전국시대에 각각의 사상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자 도움이 되려 했던 사상가들을 일컫는 말.
[12]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홀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위험을 경계하라는 의미.
[A]
[14]
아마도 충격으로 유산하거나 사산한 듯.
[15]
스승인 윤선도가 남인이고 처가인 동복 오씨가 남인가문이었던 때문이다.
[16]
단, 양자 관계로 인해 법적으로는
효종이
고종의 8대조이다.
[17]
그 전까지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어도
선조 후손이 아닌 덕흥대원군파와, 선조,
인조의 왕자군에서 갈라진 파마다 항렬이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덕흥대원군 11대손을 기준으로 할 때,
능원대군파에서는 '세O(世)',
경창군파에서는 '신(愼)O' 등으로 썼다. 인평대군파의 항렬은 인평대군의 아들 대부터 '木', '火', '土' 를 각각 외자의 부수로 사용했고 '土' 변 항렬 이후 '진(鎭)O', '병(秉)O', 'O중(重)'으로 이어나갔다. 그 다음이 'O응(應)'인데 'O응(應)' 부터는 모든
덕흥대원군 후손들의 항렬이 같다. 이후 '재(載)O', 'O용(鎔)', '해(海)O',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 'O희(熙)' 순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