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21:43:52

능원대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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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종 익안대군
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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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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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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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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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이상황, 조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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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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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능원대군파의 역대 종주
능원대군가 역사 시작 1대 능원대군 이보 2대 영풍군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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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대군파 초대 종주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원종의 왕자
능원대군 | 綾原大君
파일:ed562f564bb4dfcfe4525ee1f818623c213102.jpg
능원대군묘 전경
출생 1598년 5월 15일
조선 평안도 성천
(現 평안남도 성천군)
사망 1656년 1월 26일 (향년 57세)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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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보(俌)
부모 부왕 원종
모후 인헌왕후
형제자매 4남 중 3남
배우자 문화부부인 문화 류씨
(文化府夫人 文化 柳氏, 1598 ~ 1676)
부부인 영암 김씨
(府夫人 靈巖 金氏, 1610 ~ 1696)
자녀
슬하 5남 3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이영숙(李英淑, 1629 ~ ?) 김씨 소생
장남 - 영풍군 이식(靈豊君 李湜, 1630 ~ 1692) 김씨 소생
차남 - 영은군 이함(靈恩君 李涵, 1633 ~ ?) 김씨 소생
3남 - 영신군 이형(靈愼君 李瀅, 1635 ~ ?) 김씨 소생
차녀 - 이영정(李英淨, 1639 ~ 1657) 김씨 소생
4남 - 영춘군 이정(靈春君 李涏, 1640 ~ ?) 김씨 소생
3녀 - 이영순(李英順, 1642 ~ ?) 김씨 소생
5남 - 영순정 이유(靈順正 李浟, 1643 ~ ?) 김씨 소생
경숙(敬叔)
담은당(湛恩堂)
군호 능원수(綾原守)
→ 능원군(綾原君)
능원대군(綾原大君)[1]
시호 정효공(貞孝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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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건사고4. 사망5. 가족 관계6. 후손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원종으로 추존된 선조의 서5남 정원군 인헌왕후로 추존된 연주군부인 구씨 사이의 2남으로, 인조의 동생이며 능창대군의 형이다.[2]

2. 생애

1598년( 선조 31년) 당시 임진왜란으로 아버지 정원군이 피난가 있던 평안도 성천[3]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 34년) 능원수(綾原守)로 책봉받았으며 6년 후인 1607년(선조 40년)에 능원군(綾原君)으로 봉해졌다.[4] 1년 뒤인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는 아들 없이 일찍 죽은 큰아버지 의안군의 후계로 입적되었다.

1615년(광해군 7년)에는 동생 능창군이 억울하게 역모로 몰려 사망하고 살던 집마저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 빼앗기자 1619년(광해군 11년)에 아버지 정원군마저 화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1623년( 인조 1년) 3월에 형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즉위하였다. 1626년(인조 4년) 1월에는 친어머니 연주군부인 구씨가 사망하자 예조의 건의로 그가 상주가 되었다.[5] 이 때 수많은 신하들이 능원군은 의안군의 양자로, 연주군부인의 상을 맡아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초에 의안군의 양자가 된 것도 사실은 법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말로만 후사로 삼은 것 뿐이어서 능원군은 본가로 돌아가 상주를 맡을 수 있었다.[6] #[7] 이후 능원군은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해임당하는 관례를 따랐다. 그러자 밥벌이가 끊겨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인조에게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생활을 꾸렸다.

1632년(인조 10년) 아버지 정원군이 원종으로, 어머니 연주군부인이 인헌왕후 추존받자 그 해 5월에 '능원대군'으로 승격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남한산성에 인조를 옆에서 모시며 지켰고,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론을 주장하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나라의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러나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강화가 성립되자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며 명나라가 완전히 패망한 소식을 듣고는 문을 닫고 통곡하며 오랫동안 식사를 걸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척화파 신하들의 명단인 《명 배신록(明陪臣錄)》에 실렸다. 세자와 대군들이 모두 청의 볼모로 끌려가는 일이 있었을때 같은 대군 신분인 능원대군만 유일하게 볼모가 되지 않았다.

병자호란으로 살던 집을 잃게 되어 광해군의 옛 집이자 인조반정 이후 어머니 인헌왕후가 잠시 살았던 이현궁을 인조에게 하사받았다.

이후 1644년(인조 22년)에 일어난 심기원의 역모사건 때 이를 해결하는 공을 세웠다.

3. 사건사고

성격이 좀 나쁘게 말하면 꽤 폭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인조실록》을 보면 그가 일으킨 사건사고가 제법 많다.
  • 양아버지였던 의안군의 종이었다가 면천받아 역관으로 일하던 정영신이란 사람이 있었다. 1625년(인조 3년) 3월에 말실수했다는 이유로 능원대군에게 너무 심하게 얻어 맞아 며칠 뒤에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노비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으며 그랬다가는 양반이라도 엄한 벌을 받았다. 하물며 당시 시점에 노비도 아니고 양인이었던 사람을 멋대로 때려죽인 것은 아무리 왕족이라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사헌부와 대신들은 능원군을 벌주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형식적으로만 국문을 했고 오히려 "왜 배반한 종들의 말만 믿냐? 수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는다!" 라며 대신들을 나무랐으며 #[8] 도리어 최명길, 김주우, 윤형언 등이 왕손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논죄당한데다 #[9] 도저히 이를 보다 못한 형조판서 오윤겸이 사직을 청하는 일까지 생겼다. #[10] 한 마디로 "잘못 안 한 내 동생 왜 갈굼? 너희가 더 잘못 함ㅇㅇ."라는 적반하장. 이후 이 사건들 두고 윤순지와 김유 등은 국가의 언로가 막힐까 두렵다는 상소를 올렸고, 인조는 자신에게 지나친 면이 있었다고 사과했다. 결론적으로 능원군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 그러나 그 뒤에도 반성을 전혀 하지 않은 듯하다. 1631년(인조 9년) 5월에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에서 일하던 관리 중 하나인 어떤 금리(禁吏)와 안좋은 일이 있었던 듯 한데, 자신을 기분나쁘게 했다고 종들을 풀어 그 금리의 어머니와 아내, 장모를 붙잡아다가 폭행했다. #[11] 이때 능원군은 인조에게서 추고하라는 명을 받자 오히려 화를 내며, 금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또다시 가두고 한 술 더 떠 고문까지 했다.(...) 이에 더 이상 보다 못한 사헌부에서 능원군과 종들을 벌 줄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노비들만 처벌하고 능원군은 또 봐줬다. #[12]
  • 이건 능원대군의 직접적인 잘못은 아닌데 도의적 책임이 따르는 문제다. 1636년 들에게 역병이 돌아 도살을 전격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살인죄를 적용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문에 도살자들이 적발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노비 신분이 되어 멋대로 소를 도살하고 이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이들 중 38명이 능원대군 소속 노비로 들어갔는데, 1647년 2월에 모두 적발당해 그 중 7명이 함경도 평안도 쪽으로 온 가족과 함께 추방당했다. #[13]
  • 1649년(인조 27년) 3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바치는 을 중간에서 불법으로 매수하고 되팔았다. 원래 이렇게 진상하는 말들은 최고급 말인데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말이 그 고을에 없는 경우, 다른 지역에 가서 얻어와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비쌌다. 이걸 이용하여 횡령한 뒤 고가의 이익을 남긴 것. 이 역시 상당히 중죄였지만 예상대로(...) 인조는 그냥 넘어갔다. 이 정도면 답이 없다. #[14]

4. 사망

조카 효종이 재위 중이던 1656년(효종 7년) 1월 1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효종은 소식을 듣고 직접 능원대군의 집을 찾아가 곡을 하였다. 이후 종묘의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파일:ed562f564bb4dfcfe4525ee1f818623c213102.jpg
<colbgcolor=#94153E> 능원대군의 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문화재청에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하였다.

그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직접 썼다. #

5. 가족 관계

  • 전처 : 문화부부인 문화 류씨(文化府夫人 文化 柳氏, 1598 ~ 1676) - 류효립[15](柳孝立)의 딸
    • 자녀 : 모두 요절
  • 후처 : 부부인 영암 김씨(府夫人 靈巖 金氏, 1610 ~ 1696) - 동중추(同中樞) 김만성(金萬成)의 딸
    • 장녀 : 이영숙(李英淑, 1629 ~ ?)
    • 사위 : 류수창(柳壽昌)
      • 외손녀 : 윤항(尹恒)의 처(1646 ~ ?)
      • 외손자 : 류의(柳亻+冝, 1650 ~ ?)
      • 외손자 : 류단(柳偳, 1652 ~ ?)
      • 외손녀 : 임도삼(任道三)의 처(16 53 ~ ?)
      • 외손녀 : 구우익(具右翼)의 처(1657 ~ ?)
      • 외손녀 : 이구경(李龜慶)의 처(1660 ~ ?)
    • 장남 : 영풍군 이식(靈豊君 李湜, 1630 ~ 1692)
    • 며느리 : 박대상(朴大相)의 딸 군부인 반남 박씨
      • 손자 : 금천군 이지(錦川君 李榰, 1650 ~ ?)
      • 손녀 : 이교령(李喬齡, 1652 ~ ?)
      • 손녀 : 이숙혜(李淑蕙, 1653 ~ ?)
      • 손녀 : 이수혜(李秀蕙, 1655 ~ ?)
      • 손자 : 금창군 이온(錦昌君 李榅, 1661 ~ ?)[16]
      • 손녀 : 이서혜(李瑞蕙, 1662 ~ ?)
    • 며느리(양첩) : 미상
      • 서손녀 : 이소혜(李小蕙, 1661 ~ ?)
      • 서손자 : 금남군 이동(錦南君 李棟, 1664 ~ ?)[17]
      • 서손자 : 금양군 이량(錦陽君 李樑, 1667 ~ ?)[18]
    • 차남 : 영은군 이함(靈恩君 李涵, 1633 ~ ?)
    • 며느리 : 조이량(曺以樑)의 딸 군부인 창녕 조씨
      • 손자 : 창녕군 이장(昌寧君 李樟, 1656 ~ ?)
      • 손자 : 하산부정 이재(夏山副正 李梓, 1659 ~ ?)
      • 손자 : 하천군 이의(夏川君 李椅, 1660 ~ ?)
      • 손녀 : 시흥 강씨(始興 姜氏) 강흥주(姜興周)의 처(1660 ~ ?)
      • 손자 : 하릉군 이적(夏陵君 李樀)
      • 손자 : 하평군 이무(夏坪君 李懋)
      • 손자 : 이방(李榜)
      • 손녀 : 윤명대(尹鳴大)의 처
      • 손녀 : 이신룡(李臣龍)의 처
      • 손녀 : 이만화(李萬華)의 처
      • 손녀 : 민상(閔瑺)의 처
    • 3남 : 영신군 이형(靈愼君 李瀅, 1635 ~ ?)
    • 며느리 : 정백(鄭栢)의 딸 군부인 해주 정씨
      • 손자 : 해창군 이해(海昌君 李楷, 1655 ~ ?)
      • 손녀 : 이두혜(李斗蕙, 1659 ~ ?)
      • 손녀 : 문성채(文星彩)의 처
      • 손녀 : 김창하(金昌夏)의 처
    • 차녀 : 이영정(李英淨, 1639 ~ 1657)[19]
    • 4남 : 영춘군 이정(靈春君 李涏, 1640 ~ ?)
    • 며느리 : 신찬(申瓉)의 딸 군부인 평산 신씨
    • 며느리 : 성탁(成晫)의 딸 창녕 성씨
      • 손자 : 창산군 이상(昌山君 李相, 1676 ~ ?)
      • 손자 : 창선군 이미(昌善君 李楣, 1679 ~ ?)
      • 손자 : 이권(李權)
      • 손녀 : 김옥(金沃)의 처
      • 손녀 : 곽진오(郭鎮五)의 처
    • 3녀 : 이영순(李英順, 1642 ~ ?)
    • 사위 : 류성삼(柳省三)
    • 5남 : 영순정 이유(靈順正 李浟, 1643 ~ ?)
    • 며느리 : 윤동리(尹東离)의 딸 파평 윤씨
      • 손자 : 파성부정(坡城副正) 이빈(李彬)[20]
      • 손자 : 파산부정(坡山副正 이삼(李杉, 1663 ~ ?)
      • 손자 : 파릉군 이삼(坡陵君 李槮)
      • 손자 : 이항령(李恒齡)
      • 손자 : 이욱(李▼(木+彧))
      • 손자 : 이안(李楌)
      • 손자 : 파춘군 이목(坡春君 李▼(木+㣎))
      • 손녀 : 이진번(李震蕃)의 처

6. 후손

정실부인이 2명이다. 첫 부인은 문화부부인 류씨로서, 류효립(柳孝立)[21]의 딸이고, [22] 두 번째 부인은 김만성(金萬成)의 딸이다. 류씨 부인은 자녀를 여럿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어 이 부인 쪽으로는 후사가 없다. 류씨 부인은 아버지 류효립이 역적으로 몰려 참수되자[23] 이혼을 종용받고 신하들도 모두 내쳐야 한다고 강권했으나 능원대군이 격하게 반발하여 인조도 결국 첩으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럼에도 능원대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류씨 부인을 정실로 대우하고 잘 지냈다고 한다. 숙종때 김씨 부인의 자손들이 상소를 올려 복권된다.

김씨 부인은 5남 3녀를 낳았다.[24] 이후 손자만 20명, 증손자가 무려 45명으로 늘어났고 이후에도 계속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능원대군파를 이루었다.

그의 4남 영춘군의 7대손 이인응(이세보)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양가 왕족 경평군(慶平君)이 되었지만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의 견제로 파양당했다.

현대 인물로는 군인이자 정치인 이진용, 한국 현대 연극계의 태두 배우 이해랑, 현대자동차 부사장을 역임한 이방주[25]가 있다.


[1] 봉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 [2]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 차남이자 서자인 능풍군, 그리고 3남이자 적자인 능원대군,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 [3]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 [4] 작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 [5] 장남인 인조가 상주를 맡을 수 없었다. 신분으로만 보면, 인조는 왕이고 연주군부인은 왕자의 아내일 뿐이었다. 실제 혈통을 떠나서 임금이 일개 종친 부인의 상주를 맡을 수는 없다는 것이 법도였다. [6] 의안군은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사망했기에 양자를 들이면 그 양자의 법적 어머니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 법 기준으로 입양자는 반드시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죽었든 살아있든) 존재해야 했다. [7]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11권, 1626년(인조 4년) 2월 10일 계미 1번째기사. [8]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8권, 1625년(인조 3년) 3월 27일 을해 5번째 기사. [9]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8권, 1625년(인조 3년) 3월 22일 경오 3번째 기사. [10]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9권, 1625년(인조 3년) 4월 8일 을유 2번째 기사. [11]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24권, 1631년(인조 9년) 5월 26일 기해 2번째기사. [12]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24권, 1631년(인조 9년) 5월 28일 신축 2번째 기사. [13]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48권, 1647년(인조 25년) 5월 26일 계유 3번째 기사. [14]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50권, 1649년(인조 27년) 3월 21일 경진 1번째 기사. [15] 고모가 문성군부인, 류희갱(柳希鏗)의 아들 [16] 이명 이구령(李九齡) [17] 이명 이희령(李稀齡) [18] 이명 이팔령(李八齡) [19] 아버지 능원대군이 죽자 매우 슬퍼하였고, 식음을 전폐하여 18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1900년판 선원보에는 처녀로 나와 있다. [20] 이명 이태령(李泰齡) [21] 광해군의 장인인 류자신의 맏손자이므로, 광해군 왕비의 장조카이다 [22] 정원군이 집안을 보호하고자, 당시 북인의 실세가문인 류씨집안과 능원군의 혼사를 주도하였다 [23] 류효립은 인조반정 직후 유배되었다가, 광해군을 상왕으로 하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역모를 꾸몄가 역적으로 참수되었다 [24] 출처 : 송시열 作. 능원대군 비명. [25] 이해랑의 아들로 ROTC 출신의 유명 경제인. 홀로코스트 부정, 식민지근대화론 등 부적절한 역사관의 기고와 책을 낸 작가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