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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71년
8월 ~
9월 경 (음력 선조 4년 8월) |
사망 |
1648년
4월 27일 (향년 76세) (음력 인조 26년 윤3월 5일) |
재임기간 | 제107대 영의정 |
1636년
8월 14일 ~
1637년
9월 21일 (음력 인조 14년 7월 14일 ~ 인조 15년 8월 4일) |
|
제116대 영의정 | |
1644년
5월 10일 ~
1645년
1월 4일 (음력 인조 22년 4월 5일 ~ 12월 7일) |
|
제118대 영의정 | |
1645년
2월 28일 ~
1646년
4월 19일 (음력 인조 23년 2월 3일 ~ 인조 24년 3월 4일) |
|
봉호 |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순천 김씨 |
자 | 관옥(冠玉) |
호 | 북저(北渚) |
부모 |
부친 -
김여물 모친 - 함양 박씨 박수강(朴壽岡)의 딸[1] |
부인 | 진주 류씨 - 류근(柳根)의 딸 |
자녀 | 장남 - 김경징 |
[clearfix]
1. 개요
조선 광해군 ~ 인조 때의 문신이자 인조반정의 반정공신.각종 문집자료에서는 보통 자인 관옥(冠玉)을 따서 '김관옥(金冠玉)'으로 일컬어진다.
유명한 명신 이항복의 제자 중 1명이며 인조반정을 주도한 킹메이커.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인이자 공서파 서인의 대표격 인물. 광해군과 북인의 폭정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조선을 안정시키고[2] 당색이 서인이었음에도 남인의 정계 진출을 용인하여 정국의 균형을 유도한 보수파 엘리트였다. 그러나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아들 김경징의 전횡을 방조하였으며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들을 참소(讒訴)[3]하여 외직으로 쫓아내고 국가의 안위가 달린 상황에서 본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행보를 보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공녀로 끌려가게된 처와 첩, 그리고 딸을 살려달라고 정명수에게 매달리기도 하였다.
2. 생애
부친은 임진왜란의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여 영의정에 추증된 김여물이다. 그런데 전쟁 말기에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에서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탄핵되었다. 서인과 남인들은 김류가 모함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북인들은 김류가 탄금대에서 기생들과 놀았다는게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의 사관들의 평가가 정반대인데 파직했다가 금방 복권되는 것으로 애매하게 결말이 났다.광해군 집권 시절에는 나름대로 관직 생활을 했으나 강경파 북인들에게 시달리면서 고생을 했다. 특히 광해군의 폐모(廢母)에 반대하여 탄핵받자 관직을 내던져버리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릉동 행궁에 누군가 익명으로 격문을 투서한 일이 있었는데 장유, 홍서봉, 김상헌, 조희일 등과 함께 '삼청동 결의(三淸洞結義)'로 지목받아 위험에 빠지기도 했지만 허균이 꾸민 일로 밝혀져서 위험을 모면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북파에게 모함을 받았고 이 때문에 반정을 결심하게 되고 신경진과 의기투합하였다
이후 신경진이 이귀를 포섭하면서 김류는 자신의 삼촌뻘 나이인 이귀와도 연을 맺고 나라를 뒤집기로 합의를 본다. 1번째 계획은 실패했으나 마침내 인조반정에서는 대장으로 선임되어 놓고도 이이반이 역모 고변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벌벌 떨면서 포자(捕者)가 자신을 붙잡아 오기를 기다렸다 김류가 집에서 나오지를 않자 당황한 이귀를 포함한 반정군은 젊은 이괄에게 대장을 맡겼다. 심기원과 원두표의 설득으로 도중에 반정군에 합류하고서는 뜬금없이 "내가 대장이니 빠지라"고 했고 이것 때문에 반발한 이괄과 싸웠으나 이귀의 중재로 멈췄다. 하지만 반정이 성공한 이후에는 이괄이 반정 당일에 용감히 싸워 공을 세웠다고 후대하였다.[4]
한편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막나가는 성격으로 유명한 이귀와 김류, 신경진, 심명세 등은 남인을 정계에 참여시키면서, 북인 처벌 문제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시기의 정책에 반대하며,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간 남이공과 김신국을 비롯한 광해군 반대파 북인들은 살려주었지만, 북인 정권 시절,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 세력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토벌 임무를 철저히 수행했다. 그래서 이때 이이첨, 정인홍, 류희분을 비롯해서 북인 실력자들이 역적 토벌이라는 이유로 정적이 되며, 친족들을 싸그리 처형하거나 폐서인시켜 농민, 상인, 어민과 다를 바가 없는 상민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졌다.[5] 기자헌과 유몽인은 온건파라 그런지 반정 당시에는 살았지만 유몽인은 유응형이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모함을 해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기자헌 역시 이괄의 난이 터지자 사사당했다.
이무렵 논공 행상은 젊은 시절부터 명문 자제로서 오만한 기록이 많았던 이괄의 불만을 높여서, 인조 재위 초장부터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결국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기자헌을 포함 한 북인 정치범 38명이 이괄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이유로 연루가 되어서 옥에 가뒀다.
이때 북인 38명에 대해 조정에서는 처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귀는 의견을 반대하고 그들을 국문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죽이거나 귀양보내자고 주장했으며, 김류는 바로 처형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때마침 이괄의 반군이 우세에 들어가고, 정부군이 열세에 들어가자, 인조와 삼정승은 서로 의논하면서 결과적으로 김류의 의견이 채택되고 기자헌은 사사되고 나머지 북인 정치범 37명은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서인과 연합하고 있었던 남인 출신 영의정 이원익도 피난지에서 탄식했을 정도였다. 이 탓에 민심만 괜히 악화되어서 결국에는 반란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이괄의 인기가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이이첨, 기자헌, 정인홍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실력자들을 광해군과 통한 내통자로 여기며, 대북과 소북을 가리지 않고 숙청한 행위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처사였다.[6]
이러한 서인과 남인의 북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숙청 작업은 피해자인 북인한테서는 명분없는 처벌이라며 비난해서 민심이 뒤숭숭해지고, 오히려 북인들은 반발하면서 반역을 준비했다. 박홍구 임취정 유효립 등 북인 세력들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거사를 준비했으나 이내에 발각되어서 처형당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1629년에 후금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가 들통 난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1631년에 발각 된 정한추대사건[7]등을 꾸몄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래서 명분이 있으나 민심이 안 좋아진 북인 숙청은 위급시에 이렇게 가벼운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당시 서인과 남인 정권의 한계였다.
인조에게 사랑받은 서인의 얼굴마담이었는데 애초에 능양군이던 인조를 왕의 재목으로 추천한 사람이 김류였다. 하지만 평시의 잡일에는 능할지언정 급박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옹졸하고 무능했다. 말년에는 영의정이 되어서 정국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으며 심기원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는 내용이 퍼져 있는데 사실은 심기원을 죽인 사람은 김자점이고 김류는 별달리 심기원 토벌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김류는 서인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인물이다. 노년에는 온 조정이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미는 가운데 김자점과 둘이서 봉림대군을 인조의 후사로 밀었으며 봉림대군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김류의 안목은 옳았다.
비록 인조의 뜻에 따라 김자점과 함께 영합해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찬성하기는 했으나 강빈[8]의 사사에는 끝까지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는 등 꾸준히 신념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죽는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류의 업적으로 1.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것, 2. 조정의 중신으로서 국정을 원만하게 운영한 것, 3. 정원군 추숭과 강빈 사사에 반대한 것을 들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동시에 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통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병자호란 때 김경징을 강도검찰사[9]에 임명할 것을 강요한데 대해 통분스럽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극렬하게 비판했다.
전 영의정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졸(卒)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략)
김류는 근엄한 마음과 굳센 의지에 기국(起鞠)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공보(公輔)의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계해년에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책봉되어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이조 판서로서 문형(文衡)을 맡았고 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섯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었다. 추숭(追崇)과 강옥(姜獄)이 있을 적에는 모두 정당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아 끝내 대계(大計)를 도와 이루고 국본(國本)을 정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품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정축년과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패자(敗子)에게 중임을 제수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통분(痛憤)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윤3월 5일 경오 1번째 기사
김류는 근엄한 마음과 굳센 의지에 기국(起鞠)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공보(公輔)의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계해년에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책봉되어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이조 판서로서 문형(文衡)을 맡았고 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섯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었다. 추숭(追崇)과 강옥(姜獄)이 있을 적에는 모두 정당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아 끝내 대계(大計)를 도와 이루고 국본(國本)을 정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품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정축년과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패자(敗子)에게 중임을 제수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통분(痛憤)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윤3월 5일 경오 1번째 기사
3. 평가
자세한 내용은 김류/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1597년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김류는 복수사(復讐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호서 지방으로 사명을 받고 나갔다. 그런데 당시 "김류는 충주를 왕래할 때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며 탄금대 아래에서 술을 마셨다"는 소문이 돌았다. 탄금대는 김류의 아버지 김여물이 전사한 곳이므로 사헌부는 그의 반인륜적인 행태를 비판했고 그로 인해 김류는 파직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그의 결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 1601년에 검열 직으로 임명되어 복귀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이 일에 대해 김류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은 것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선조실록>에서도 김류가 정말 그런 만행을 저질렀는지 의심스럽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이 김류가 권신으로 위세를 떨치던 인조 집권기에 집필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김류가 탄금대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근거없는 낭설로 보인다.
헌부가 아뢰기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유(金瑬)가 복수 초모사(復讐招募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충주(忠州)에 왕래할 적에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아비 김여물(金汝岉)이 전사한 곳입니다. 자식이 된 자로서 자기 아비가 전사한 곳에 이르면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여 차마 그곳을 지나갈 수 없는 일인데, 그의 소행이 감히 이와 같았으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통탄하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 인륜의 기강을 바루소서.(후략)
선조 31년 2월 18일 계유 2번째 기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유(金瑬)가 복수 초모사(復讐招募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충주(忠州)에 왕래할 적에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아비 김여물(金汝岉)이 전사한 곳입니다. 자식이 된 자로서 자기 아비가 전사한 곳에 이르면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여 차마 그곳을 지나갈 수 없는 일인데, 그의 소행이 감히 이와 같았으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통탄하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 인륜의 기강을 바루소서.(후략)
선조 31년 2월 18일 계유 2번째 기사
(전략) 이덕형이 아뢰기를,
"(중략)요즘에는 나이 젊은 사람들이 잘못 보고 듣고는 남의 행동에 대하여 너무 과중(過重)하게 논평하여 한번 누명을 입으면 천지간에 자립(自立)할 수 없게 됩니다. 예컨대 김유(金瑬)가 자기 아버지가 전사한 장소에서 기생과 놀았다는 것과 (중략) 비록 소관(小官)들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말로 인하여 일생 동안 영원히 폐인이 되어버린다면 어찌 성대(聖代)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마땅히 조정에 물어 별도로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후략)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1번째 기사
"(중략)요즘에는 나이 젊은 사람들이 잘못 보고 듣고는 남의 행동에 대하여 너무 과중(過重)하게 논평하여 한번 누명을 입으면 천지간에 자립(自立)할 수 없게 됩니다. 예컨대 김유(金瑬)가 자기 아버지가 전사한 장소에서 기생과 놀았다는 것과 (중략) 비록 소관(小官)들의 일이나 사실이 아닌 말로 인하여 일생 동안 영원히 폐인이 되어버린다면 어찌 성대(聖代)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마땅히 조정에 물어 별도로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후략)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1번째 기사
우승지 김시헌(金時獻)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 정유년에 명을 받고 호서(湖西)에 가 있을 때 김유(金瑬)가 복수군 소모관(復讎軍召募官)으로 도내에 내려와서 신을 찾아 충주(忠州)에 왔었는데 복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는 모양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때 부호군 송순(宋諄)이 문안사(問安使)로 충주에 와서 이마를 찌푸리며 신에게 말하기를 ‘탄금대(彈琴臺) 말만 하면 김 정자(金正字)는 금방 목이 메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 김유가 충주에 온 것은 원래 신을 만나 일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마음은 차마 자기 발로 그 아비의 죽은 땅을 밟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기생을 끼고 풍류를 벌이면서 자기 아버지가 전사한 곳에 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김유가 이미 벼슬아치가 되었으면 그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본관(本官)이 자연 다 알게 됩니다. 그가 설령 참으로 기생을 끼고 풍류를 즐긴 일이 있었다면 그가 끼고 놀았던 기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고 또 풍악을 울렸던 악공도 있을 것이며, 그 밖의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나른 자와 마졸(馬卒)들까지 적어도 10여 명은 있었을 것인데, 여러 사람이 보았을 것이니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실지 없었기 때문에 김유가 죄를 입은 것에 대하여 당시 수령들은 모두 지극히 원통하다고 말하였고, 온 도내의 사람들도 그 억울함을 말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김유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공정하여 속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김유가 한 일이 옛사람이 취했던 복수(復讎)·토적(討賊)의 의리와 맞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타당하지만 흔적도 없고 인정에도 가깝지 않은 말로 그를 불측(不測)한 죄에 빠뜨리려고 한다면 어찌 천하에 지극히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몇 해를 두고 김유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의 봉장(封章)이 끊이질 않고 있으나 그 실상을 아는 것은 신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구중(九重)에 진달하려 하였으나 대례(大禮)가 끝나지 않아 조야(朝野) 모두가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문 채 오늘까지 지체하여 왔던 것입니다. 삼가 연중(筵中)의 대신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말한 사실을 듣고 천일(天日)이 내리 비치어 그 사정을 통촉하시면 그 동안 억울했던 일이 행여 신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처음부터 끝까지의 곡절을 대강 아뢰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굽어 살피소서."(후략)
선조 34년 1월 22일 신유 2번째 기사
"신이 지난 정유년에 명을 받고 호서(湖西)에 가 있을 때 김유(金瑬)가 복수군 소모관(復讎軍召募官)으로 도내에 내려와서 신을 찾아 충주(忠州)에 왔었는데 복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는 모양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때 부호군 송순(宋諄)이 문안사(問安使)로 충주에 와서 이마를 찌푸리며 신에게 말하기를 ‘탄금대(彈琴臺) 말만 하면 김 정자(金正字)는 금방 목이 메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 김유가 충주에 온 것은 원래 신을 만나 일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마음은 차마 자기 발로 그 아비의 죽은 땅을 밟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기생을 끼고 풍류를 벌이면서 자기 아버지가 전사한 곳에 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김유가 이미 벼슬아치가 되었으면 그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본관(本官)이 자연 다 알게 됩니다. 그가 설령 참으로 기생을 끼고 풍류를 즐긴 일이 있었다면 그가 끼고 놀았던 기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고 또 풍악을 울렸던 악공도 있을 것이며, 그 밖의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나른 자와 마졸(馬卒)들까지 적어도 10여 명은 있었을 것인데, 여러 사람이 보았을 것이니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실지 없었기 때문에 김유가 죄를 입은 것에 대하여 당시 수령들은 모두 지극히 원통하다고 말하였고, 온 도내의 사람들도 그 억울함을 말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김유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공정하여 속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김유가 한 일이 옛사람이 취했던 복수(復讎)·토적(討賊)의 의리와 맞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타당하지만 흔적도 없고 인정에도 가깝지 않은 말로 그를 불측(不測)한 죄에 빠뜨리려고 한다면 어찌 천하에 지극히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몇 해를 두고 김유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의 봉장(封章)이 끊이질 않고 있으나 그 실상을 아는 것은 신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구중(九重)에 진달하려 하였으나 대례(大禮)가 끝나지 않아 조야(朝野) 모두가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문 채 오늘까지 지체하여 왔던 것입니다. 삼가 연중(筵中)의 대신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말한 사실을 듣고 천일(天日)이 내리 비치어 그 사정을 통촉하시면 그 동안 억울했던 일이 행여 신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처음부터 끝까지의 곡절을 대강 아뢰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굽어 살피소서."(후략)
선조 34년 1월 22일 신유 2번째 기사
이조가 아뢰기를,
"김유(金瑬)의 일을 영상에게 의논하니 ‘김유가 논박을 받던 초기에 사대부들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기는 하였으나 나이 젊은 후진들이 하는 일이고 또 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어서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충청도에 들어가 비로소 그의 억울한 실상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 전에 헌의할 때 이미 다 진달하였으니,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영상의 생각도 이러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품합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34년 3월 8일 병오 1번째 기사
"김유(金瑬)의 일을 영상에게 의논하니 ‘김유가 논박을 받던 초기에 사대부들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기는 하였으나 나이 젊은 후진들이 하는 일이고 또 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어서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충청도에 들어가 비로소 그의 억울한 실상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 전에 헌의할 때 이미 다 진달하였으니,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영상의 생각도 이러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품합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34년 3월 8일 병오 1번째 기사
(전략)소광진(蘇光震)·김유(金瑬)를 검열로 삼았다.
선조 34년 6월 18일 갑신 2번째 기사
선조 34년 6월 18일 갑신 2번째 기사
헌부가, 이조 좌랑 홍서봉(洪瑞鳳), 예문관 검열 김유(金瑬)를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정유년 왜적이 다시 양호(兩湖)를 침범하여 경사(京師)에 계엄(戒嚴)이 내렸을 때 (중략) 김유는 복수사(復讐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호서 지방으로 사명을 받고 나갔다. 충주(忠州)의 탄금대(彈琴臺)는 바로 김유의 아비인 김여물(金汝岉)이 순절한 곳인데, 당시 사람들이 ‘김유가 멋대로 술을 마시고 기생을 끼고 탄금대에서 놀았다.’고 무함하여 중한 논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괴산(槐山)·충주(忠州) 등의 사인(士人)들이 상소를 올려 모두 그것이 날조된 실상임을 아뢰자 드디어 다시 거두어 기용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이 젊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또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제일 꺼렸는데, 이제 또 그 의논을 주워 모아 탄핵, 파직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김유가 사관(史官)이 되어 새로 천거될 사람에 대해 의논하는데 동료와 뜻이 맞지 않아 4일이나 서로 버티면서 끝내 그들에게 정도를 굽혀 따르지 않았다. 동료는 바로 시배(時輩)인데, 즉시 대관을 사주하여 김유가 궐문(闕門)을 나서기도 전에 탄핵하는 글이 이미 이르렀다. 단지 김유만을 논박하면 지시하고 사주한 자취가 드러날까 걱정하여 홍서봉도 함께 탄핵한 것이다.】
선조 수정실록 선조 35년 2월 1일 갑자 3번째 기사
정유년 왜적이 다시 양호(兩湖)를 침범하여 경사(京師)에 계엄(戒嚴)이 내렸을 때 (중략) 김유는 복수사(復讐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호서 지방으로 사명을 받고 나갔다. 충주(忠州)의 탄금대(彈琴臺)는 바로 김유의 아비인 김여물(金汝岉)이 순절한 곳인데, 당시 사람들이 ‘김유가 멋대로 술을 마시고 기생을 끼고 탄금대에서 놀았다.’고 무함하여 중한 논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괴산(槐山)·충주(忠州) 등의 사인(士人)들이 상소를 올려 모두 그것이 날조된 실상임을 아뢰자 드디어 다시 거두어 기용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이 젊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또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이 제일 꺼렸는데, 이제 또 그 의논을 주워 모아 탄핵, 파직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김유가 사관(史官)이 되어 새로 천거될 사람에 대해 의논하는데 동료와 뜻이 맞지 않아 4일이나 서로 버티면서 끝내 그들에게 정도를 굽혀 따르지 않았다. 동료는 바로 시배(時輩)인데, 즉시 대관을 사주하여 김유가 궐문(闕門)을 나서기도 전에 탄핵하는 글이 이미 이르렀다. 단지 김유만을 논박하면 지시하고 사주한 자취가 드러날까 걱정하여 홍서봉도 함께 탄핵한 것이다.】
선조 수정실록 선조 35년 2월 1일 갑자 3번째 기사
- 방구석에 처박혀 벌벌 떨고 있던 김류는 1등 공신인데 그를 대신해 총대장 노릇을 했던 이괄이 2등 공신이라는 점 때문에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반정 이후 이괄이 임시직인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10]이나 중앙의 요직이 아닌 관서의 병력을 통솔하는 부원수로 임명된 것[11] 때문에 공적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았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김류와 이괄이 사이가 나빴다"는 이야기 또한 "반정 당일에 서로 다투었다"는 기록 정도를 제외하면 정사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12]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서 김류는 이괄이 난을 일으키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괄을 후대했다. 반정 이틀 후에 공신은 수도에 둬야 한다고 인조에게 강하게 주청하여 이괄을 한성에서 벼슬하게 해줬으며 이괄을 자신에게 추천한 김원량[13]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조 앞에서 열심히 칭찬한 바 있으며 이것을 이괄도 같이 듣고 있었다. 또한 인조가 공신 책봉에 문제가 없는지 물었을 때도 김류는 왕이 묻기도 전에 먼저 이괄에게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설파했다. 이괄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왔을 때도 김류는 그럴 리 없다며 이괄을 비호했다고 한다. 비록 거사 당일에 추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병력을 모집하고 동참할 사람들을 선정하는 등 전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는데는 김류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는 반정 때부터 시종일관 김류와 다투며 대립했던 이귀조차도 인정했던 사실이었으며 김류가 1등 공신에 녹훈된 것은 합당한 처사였다. 이괄은 비록 2등 공신에 녹훈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는 가장 선두에 있었다. 1등 공신 바로 다음가는 위치로 인정해준 것인데 순위로 따지자면 11위[14]인 셈이니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15] 녹훈에서 정말로 문제가 될 인물들은 김경징, 김련 같은 이들이었다. 김경징은 김류의 아들이고 김련은 김자점의 아들이었는데 거사에 참여하지 않고도 각각 2등 공신과 3등 공신이 되었다. 특히 김경징의 경우 그 이름이 이괄의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직접 거사에 참여한 이시백· 이시방 형제의 이름보다 앞선 것이었다.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 승정원일기>에 나오는데 "이괄은 이러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 명나라에서 온 사절이 물어보면 이괄은 이러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하자."는 내용이다. 이괄이 성정이 오만했고 안하무인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꾀했다."는 말은 공적을 탐낸 문회 같은 사람들이 지어낸 무고였으며 인조 정권이 명나라에게 최대한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민 소문이었던 셈이다. 요약하면 '인조 정권과 김류는 이괄을 후대했으며 이괄 또한 큰 불만없이 정권에 복종했다.' 정도가 되겠다. 비록 한성판윤에 임명되자 사직하겠다며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이괄은 반란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군소리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반란을 일으킨 것 역시 역심을 품고 비밀리에 거사를 꾀했던 결과라기보다는 역모 혐의를 뒤집어 쓰고 죽게 될 상황에 처하여 우발적으로 벌인 일로 보아야 한다.
(전략)김류가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을 그대로 부임하게 하시겠습니까. 북방이 중하긴 하지만 나라에 근본이 되는 서울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괄은 지금 대공을 세웠으니 도하(都下)에 두어 의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방은 이 사람이 아니면 수습할 수 없다."
하였다. 김류와 이귀가 다시 힘써 청하자,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인조 1년 3월 15일 을사 13번째 기사
"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을 그대로 부임하게 하시겠습니까. 북방이 중하긴 하지만 나라에 근본이 되는 서울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괄은 지금 대공을 세웠으니 도하(都下)에 두어 의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방은 이 사람이 아니면 수습할 수 없다."
하였다. 김류와 이귀가 다시 힘써 청하자,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인조 1년 3월 15일 을사 13번째 기사
상이 또 명광전(明光殿)에 나아가 대장 김류·이귀·이괄을 인견하였다.(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중략)
송영망(宋英望)은 김자점(金自點)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최후에야 왔으니, 김자점·심기원(沈器遠)·심명세(沈命世)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이괄(李适)과 동맹을 맺은 것은 김원량(金元亮)의 힘이었는데, 원량은 유식한 사람이라 남들이 모두 신용합니다. 그날 부모의 병으로 인해 오지는 못하였으나 영망(英望)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후략)
인조 1년 3월 25일 을묘 2번째 기사
김류가 아뢰기를,
(중략)
송영망(宋英望)은 김자점(金自點)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최후에야 왔으니, 김자점·심기원(沈器遠)·심명세(沈命世)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이괄(李适)과 동맹을 맺은 것은 김원량(金元亮)의 힘이었는데, 원량은 유식한 사람이라 남들이 모두 신용합니다. 그날 부모의 병으로 인해 오지는 못하였으나 영망(英望)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후략)
인조 1년 3월 25일 을묘 2번째 기사
상이 김류 이하를 문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녹훈한 것은 취사(取捨)에 있어 과연 타당함을 잃었을 염려가 없는가? 이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반드시 십분 흡족하게 하여야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막중한 일이기 때문에 훈신이 일제히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중략) 이괄은 당초 결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거사하던 날 칼을 잡고 갑옷을 입고 나서서 뭇 사람의 마음을 고동시켰고 부오(部伍)를 나누어 군용(軍容)을 갖추는 데는 이괄의 공이 컸기 때문에 2등의 맨 앞에 올렸습니다."
(후략)
인조 1년 윤10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어제 녹훈한 것은 취사(取捨)에 있어 과연 타당함을 잃었을 염려가 없는가? 이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반드시 십분 흡족하게 하여야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막중한 일이기 때문에 훈신이 일제히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중략) 이괄은 당초 결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거사하던 날 칼을 잡고 갑옷을 입고 나서서 뭇 사람의 마음을 고동시켰고 부오(部伍)를 나누어 군용(軍容)을 갖추는 데는 이괄의 공이 컸기 때문에 2등의 맨 앞에 올렸습니다."
(후략)
인조 1년 윤10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전략) 이귀는 아뢰기를,
"신은 자점·기원·명길 등과 처음 이 일을 모의하였으나 이들은 다 서생(書生)이어서 힘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김류가 이 일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군중의 마음이 자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날 김류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군중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김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큰 일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후략)
인조 1년 윤10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신은 자점·기원·명길 등과 처음 이 일을 모의하였으나 이들은 다 서생(書生)이어서 힘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김류가 이 일을 추진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군중의 마음이 자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날 김류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군중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김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큰 일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후략)
인조 1년 윤10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김류(金瑬)·이귀(李貴)를 불러 대신과 함께 빈청에 모여서 정사훈(靖社勳)을 감정(勘定)토록 명하여 53명을 녹훈하였다.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최명길(崔鳴吉)·이흥립(李興立)·구굉(具宏)·심명세(沈命世)는 1등, 이괄(李适)·
김경징(金慶徵)·신경인(申景禋)·이중로(李重老)·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신경유(申景𥙿)·박효립(朴孝立)·장돈(張暾)·구인후(具仁垕)·장신(張紳)·심기성(沈器成)은 2등, 박유명(朴惟明)·한교(韓嶠)·송영망(宋英望)·이항(李沆)·최내길(崔來吉)·신경식(申景植)·구인기(具仁墍)·조흡(趙潝)·이후원(李厚源)·홍진도(洪振道)·원유남(元𥙿男)·김원량(金元亮)·신준(申埈)·노수원(盧守元)·유백증(兪伯曾)·박정(朴炡)·홍서봉(洪瑞鳳)·이의배(李義培)·이기축(李起築)·이원영(李元榮)·송시범(宋時范)·강득(姜得)·홍효손(洪孝孫)·김련(金鍊)·유순익(柳舜翼)·한여복(韓汝復)·홍진문(洪振文)·유구(柳䪷)는 3등이다. 이어 녹훈된 사람 중에 파직된 자는 모두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인조 1년 윤10월 18일 갑진 3번째 기사
인조 1년 윤10월 18일 갑진 3번째 기사
(전략) 상이 이르기를,
"부자 형제로서 공훈에 참여된 자가 더러는 너댓 명에 이르는데, 이 일은 어째서인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신의 아들이 녹훈에 참여된 것도 극히 미안한 데다 신이 또 여느 사람들의 밑에 있어야 할 자로서 도리어 그 위에 있으니, 실로 황공하고 민망스럽습니다."
(후략)
인조 1년 윤10월 20일 병오 1번째 기사
"부자 형제로서 공훈에 참여된 자가 더러는 너댓 명에 이르는데, 이 일은 어째서인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신의 아들이 녹훈에 참여된 것도 극히 미안한 데다 신이 또 여느 사람들의 밑에 있어야 할 자로서 도리어 그 위에 있으니, 실로 황공하고 민망스럽습니다."
(후략)
인조 1년 윤10월 20일 병오 1번째 기사
(전략)이괄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신이 재주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실텐데 곤외(閫外)의 중임을 나누어 맡겼으니, 이때야말로 신이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후략)
인조 1년 8월 16일 갑술 4번째 기사
"성상께서 신이 재주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실텐데 곤외(閫外)의 중임을 나누어 맡겼으니, 이때야말로 신이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후략)
인조 1년 8월 16일 갑술 4번째 기사
(전략) 이정귀가 아뢰기를,
“천사(天使)를 접견할 때의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승정원이 어전 통사(御前通事)로 하여금 등록을 상고하여 추출하게 한 다음 초안을 작성하여 신에게 보내왔으므로 신이 이미 그것을 보았습니다. 조사(詔使)가 만약 반정(反正) 때의 일을 묻는다면 당연히 주문(奏聞) 안에 갖추어진 내용대로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역적 이괄의 변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할 말을 의논하여 정해야겠지만, 당연히 ‘역적 이괄은 거의(擧義)한 훈신(勳臣)으로 망녕되이 자기의 공을 과신한 나머지 불만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변방의 곤수(閫帥)로 나가게 되면서 더욱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반란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략)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4월 29일(병오) 비
“천사(天使)를 접견할 때의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승정원이 어전 통사(御前通事)로 하여금 등록을 상고하여 추출하게 한 다음 초안을 작성하여 신에게 보내왔으므로 신이 이미 그것을 보았습니다. 조사(詔使)가 만약 반정(反正) 때의 일을 묻는다면 당연히 주문(奏聞) 안에 갖추어진 내용대로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역적 이괄의 변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할 말을 의논하여 정해야겠지만, 당연히 ‘역적 이괄은 거의(擧義)한 훈신(勳臣)으로 망녕되이 자기의 공을 과신한 나머지 불만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변방의 곤수(閫帥)로 나가게 되면서 더욱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반란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략)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4월 29일(병오) 비
신경진과는 대를 이어서 친분이 깊었는데 아버지들과는 서열이 반대였다.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이 도순변사이고 김류의 아버지 김여물이 신립의 부장이었는데 김류는 되려 신경진의 직속상관이었다.
5. 대중매체
- 2013년 JTBC 드라마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김종결이 연기했다. 인조반정의 주역 중 삼전도의 치욕 때까지 살아있던 서인의 영수로서 중신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이다.[16] 때문에 초반에는 노회한 정객의 포스를 보여주며 과격한 심기원과 김자점, 인조 등을 조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소용 조씨에게 관광을 당하고 그녀로 인해 왕실이 개판이 되어가는데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통탄해하다가 퇴장한다.
저놈의 입을 찢어라.
돌이켜 보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전부 다 화친을 배척한
예판의 탓이옵니다! 이제 예판에게 답서를 쓰게 하여 칸에게 보내시옵소서!
- 2017년 개봉한 영화 <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송영창이 연기했다. 교활한 기회주의자에다가 가증스러운 위선자이며 자기 몸 보신에 능한 늙은 간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대부와 왕실의 형식적인 권위만을 앞세우고 하찮게 여기는 백성들의 고통과 슬픔과 안위는 신경쓰지도 않으며 백성의 원성을 한몸에 받는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일관한다.
[1]
효령대군의 외5대손.
#
[2]
임진왜란 때의 활약이나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던 외교적 수완 때문에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분별한
궁궐 공사로 민생을 파탄내고
이이첨이나
기자헌과 같은 간신들을 가까이하여 조정을 혼란에 빠뜨린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3]
남을 헐뜯어서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하여 바침.
[4]
김류가 이괄에게 앙심을 품고 논공행상에서 낮게 책정했다는 이야기는 야사를 통해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실제로는 몇 번이나 이괄의 공을 추켜세웠다. 논란 문단의 '이괄을 푸대접했다?' 문단 참고.
[5]
박승종은 의병 모집을 시도했지만 이미 궁궐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이 틀렸음을 깨닫고 아들 박자흥과 함께 음독자살한다.
[6]
물론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정권도 마찬가지로 광해군의 옥사와 궁궐 공사를 도우면서 그로 인해 욕을 먹고 광해군 정권의 입지를 크게 훼손한 것이 반정으로 몰락시킨 것에 대해서는 자업자득이다.
[7]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
[8]
소현세자의 부인. 시아버지 인조의 수라상
전복에
독을 넣었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사사되는데 훗날 민회빈(敏懷嬪)으로 추증.
[9]
지금의
군대 직책으로 비유하자면
강화도를 지키는 지역방위사령관인 셈이다.
[10]
이괄이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이 부당한 처사였다는 주장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데 이는 인조반정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룻밤만에 권력을 얻었다는 것은 하룻밤만에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반란을 대비해야 했다. 한성판윤은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각 도의
관찰사보다 높은 위치였으며 의정부 좌·우참찬, 6조 판서와 함께 아홉 대신을 뜻하는 9경(卿)에 포함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특별시장 겸 서울고등법원장 겸 서울고등검찰청장에 해당하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한양 어디든 마음대로 기찰하고
재판을 내릴 수 있었는데 갓 거머쥔 권력을 지켜야 하는 반정 세력으로서는 한성판윤에 믿을만한 사람을 앉혀
치안을 철저히 살필 필요성이 있었다. 이괄이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은
정권 유지를 위한 방편이었으며 인조 정권이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11]
이괄이 관서의 군정을 살피는 부원수로 임명된 것 역시 지방의 한직으로 몰아낸 처사나 좌천성 인사로는 볼 수 없는데 당시 인조 정권의 가장 위협적인 적은
후금이었으며 후금이 쳐들어올 경우 맞서 싸우게 될 이들이 바로 관서군이었다. 그런 관서군을 이끄는 자리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이괄이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괄 또한 "중임을 맡기시니 이 때야말로 은혜를 갚을 때다."라는 반응을 보였으니 자신이 맡은 임무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
김류가 늦게 오자 그를 대신해 임시 대장을 맡고 있던 이괄이 항명하였다. 그러나 이귀가 중재하여 금방 그만뒀으며 칼을 빼들고 김류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연려실기술>의
야사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13]
이괄이
역모 혐의를 받았을 때 열심히 비호했다가 이괄 부자의 충복으로 찍혀
이괄의 난이 벌어지고 나서
김자점의 주장에 따라 참수되었다.
[14]
1등 공신은 총 10명이었다.
[15]
보통 1등 공신같은 높은 위치는 업적이 크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권력 분배를 잘못해서 망하는건
동서고금을 통틀어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집안 사람 챙기는건 동서양, 유럽, 아시아 어디서나 성행한 일이었으며 이런 식의 권력 분배는 현대의 민주
사회까지도 변치 않는 권력의 기본적인 속성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신경진은 인조의 인척이자 잠저 시절부터 가장 오래 함께한 심복이었다. 구굉 또한 인조의 척족이었으며 신경진과 마찬가지로 능양군 시절부터 가장 오래 함께한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거의 마지막에 회유된 훈련대장 이흥립의 경우 권신인
박승종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에도 거사에 참여해서 공이 매우 크다고 인정받아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렇듯 이괄의 위에는 반정을 주도하던 인물, 인조와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인물,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뿐이었는데 반정 당시 이괄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6]
물론 2살 연상인 심열(박규점 역)이 나오기는 하지만 단회성에 그쳐 존재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