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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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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문성공(文成公) 윤증 尹拯 |
|
<nopad> 보물 1495호 윤증 초상 | |
출생 |
1629년
7월 18일 (음력 인조 7년 5월 28일) |
사망 |
1714년
3월 9일 (향년 84세) (음력 숙종 40년 1월 24일) |
시호 | 문성(文成) |
본관 | 파평 윤씨 |
자 | 자인(子仁) |
호 | 명재(明齋), 유봉(酉峰) |
붕당 |
서인 소론 |
부모 |
부친 -
윤선거 모친 - 공주 이씨(公州李氏) 이장백(李長白)의 딸 |
부인 | 안동 권씨 권아(權雅, 1632 ~ ?)[1] |
자녀 |
2남 1녀 장남 - 윤행교(尹行敎, 1661 ~ 1715) 차남 - 윤충교(尹忠敎) 장녀 - 풍천 임씨 임진영(任震英)의 처 |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스승이었던 송시열과 부친의 묘갈명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를 발단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된다. 소론의 영수 격으로 여겨진다.평생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서 지냈으나 높은 명망으로 선배, 동료, 후학들의 추천으로 지속적으로 관직을 받았다. 우의정까지 제수 받았으며, 임금의 얼굴 한 번 뵙지 않고 (명목상이지만) 정승에 올랐다고 하여 세간에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렸다.
2. 생애
윤증 연보 참조. #- 참고 문헌
- 이형성, 明齋 尹拯에 대한 後代 評價와 追崇
- 김용흠,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명재 윤증의 위상
- 이종성, 명재 윤증과 남계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 김세정, 명재 윤증과 서계 박세당의 학문과 교유(交遊) 관계
- 강혜선, 조선 후기 윤증(尹拯) 가문의 부의식(父意識)과 아버지 상(像)
2.1. 출생에서 부친 사망 전까지
윤황(尹煌, 1571 ~ 1639)의 손자, 윤선거의 맏아들이다. 성혼의 외증손자이기도 하다.1629년 한성부(漢城府)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632년 동생 윤추(尹推, 1632 ~ 1707)[2]가 태어난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였고, 부친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는데 청군에게 함락되자 모친 공주 이씨는 아이들을 종에게 맡기고 자결하였다. 9세에 불과했던 윤증은 모친을 가매장하여 위치를 표시하였고, 다음해에 수습하여 장사지낼 수 있었다. 윤증은 적진에서 2주 가량 머물렀으나 살아남아 강화도로 귀환할 수 있었다.[3] 호란 이후 윤황이 유배되며 부친과 함께 유배지인 영동에 따라갔다가, 유배가 풀리자 금산을 거쳐 이산(尼山)의 집으로 돌아왔다. 1639년 조부가 사망하였다. 부친에게 꾸준히 배우며 가학을 계승하였으며,[4] 윤선거의 제자인 나양좌와 절친이 된다. 당숙부 윤원거(尹元擧, 1601 ~ 1672)가 사촌들인 부친과 그 형제들 - 윤순거(尹舜擧, 1596 ~ 1668)[5], 윤문거(尹文擧, 1606 ~ 1672)[6]이 교류하며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삶을 지켜보게 된다.[7]
1642년 부친의 친구인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 ~ 1664) 문하에서 동생 윤추와 함께 수학했다.[8] 당시 부친이 유계와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술하고 있었으며 부친을 도왔다.[9] 1647년(19세) 에 탄촌(炭村) 권시(權諰, 1604 ~ 1672)의 딸 안동 권씨와 혼인하였으며 그에게도 배우고 20년 넘게 학문 교류를 지속하게 된다.[10] 1651년 부친의 스승인 김집을 만나 스승으로 모셨으며, 1652년에는 송준길, 1654년에는 조익(趙翼, 1579 ~ 1655)을 만난다.
1657년 김집의 권유로 회덕에서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몇 개월 수학하였고 이후 스승으로 섬겼다.[11] 이후 25년 가량 질의 응답을 하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1673년 송시열의 글에 윤증과의 교류 양상이 남아 있다.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에 대한 글이며 윤증과 함께 공부하던 내용이 나온다. 링크 둘의 사이에 문제가 커지기 전인 1675년, 예송으로 남인과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시열은 자신을 이어 ‘세도(世道)’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윤증을 거론한 바도 있다. 링크
1658년 30세에 부친과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수정하였으며, 부친의 친구인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 ~ 1684)[12]와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났던 박세채와 만나보기 전 미리 편지로 학문을 논하였고, 1661년에는 해주의 석담서원에서 드디어 처음 만나 교분을 다진다. 1660년에는 숙부 윤문거가 귀향하여 주자학 연구에 집중하였다. 1661년 아들 윤행교(尹行敎, 1661 ~ 1725)[13][14]가 태어났다. 높아지는 학문으로 대신들이 천거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의망되나, 윤선거는 아직 젊은 윤증이 일찍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유계 등에게 편지를 보내 천거를 만류하였다.[15] 1666년 박세당과 대학, 논어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16]
2.2. 부친 사망 후
1669년 부친 윤선거가 사망하였다.[17] 그리고 율곡의 연보를 교정하였다.[18] 1671년 부친의 상제를 마치고 연보를 만들었으며, 박세채에게 부친의 행장을 부탁하였다. 1672년 장인 권시가 사망하였고, 선영 근처의 정수암(淨水庵)에서 매달 후학들에게 강의를 시작하였다. 또한 집 옆의 서실에서도 찾아오는 학도들을 맞아 가르쳤다. 송준길이 12월에 사망하여 만사와 제문을 지었다.[19] 김장생의 '상례비요'를 교정하여 중간했다.1673년 11월 부친의 행장[20]과 연보[21], 그리고 기유의서(己酉擬書)[22]를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 부친의 묘갈명[23]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동생들이 부친 생전에 송시열과의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점을 우려하여 묘갈 부탁 여부를 걱정했는데[24], 윤증은 '평소에 비록 의견이 다 맞지는 않았어도 선인(先人)의 마음은 시종 간격이 없으셨다. 또 선인의 집우(執友)로는 오직 이 어른이 계실 뿐이니, 이 어른을 두고 다른 곳에 청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기유의서 또한 부친이 벗에게 당부하는 말이기에 없앨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함께 가져가 보였다. 송시열은 기유의서에서 자신과 윤선거의 입장 차이를 다시 확인하고, 박세채가 극찬한 행장을 보며 윤선거의 주장이 확산될 수 있음을 우려하게 된다.[25] 그래서 지어준 묘갈명은 박세채의 행장으로 대신한다며[26] 대충 마무리하였으며, 윤증은 이런 서술과 태도는 부친과 스승 모두에게 훗날 오명을 남길 수 있다고 판단하여, 송시열에게 부친과는 어떤 면에서 생각이 달랐는지 분명히 해달라 수 차례 요청하였다.
“불초한 제가 비록 무식하지만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일인 줄은 압니다. 다만 선인께서는 평소 문하와 교분을 맺어 반드시 충신(忠信)으로써 서로 허여하고 도의(道義)로써 서로 기약하였습니다. 비록 문하가 매번 소소한 논의가 합치되지 않는 일로 간혹 의심하고 도외시하기도 하였으나, 선인의 간절한 정성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응하는 것이 천리(天理)의 당연함인데, 지금 이 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뜻이 실로 범범하기만 하니, 옆에서 보기에 도무지 정의(情義)가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탄식하고 한스러워하는 점입니다.”
1674년 현종 사망 후 숙종이 즉위하였다. 1675년 3월 이산(尼山)의 노강(魯岡)에서 노강서원(魯岡書院)이 지어져 윤선거를 배향하였다. 이 곳에서도 윤증은 강학하였다. 6월에는 예송논쟁으로 유배되어 있던 송시열에게 다시 편지하였는데 답서에는 언짢아 함이 있었다.[27]
“삼가 지난겨울 이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편지 내용과 시구에 불평을 드러낸 경우가 많았습니다. 종전부터 사소한 일이 쌓여 재앙이 빚어지는 것은 매번 이러한 곳에 있었으니, 기품(氣稟)과 학문의 작은 결점이라고 여겨 점검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1676년에는 장기(長鬐)로 이배되어 있던 송시열을 찾아 4일 함께 머물다가 돌아왔다. 그 때 윤휴와 절교한 일과 그 과정을 이야기하자 송시열은 누그러지고 자상한 모습을 보이며 윤휴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고 하고, 먼저 묘갈을 언급하여 윤증은 다시 박세채와 함께 정리해 수정을 부탁하게 된다. 중재하는 입장이던 박세채도 함께 편지를 보내 송시열에게 부탁하였고,[28] 윤증도 나양좌, 박세채와 지속적으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선인(=윤선거)의 학문은 실질[實]을 위주로 하였기에 내면에 힘을 써서 자신의 덕을 닦았고, 사문(師門=송시열)의 학문은 이름[名]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남들의 평가에 무게를 두어 겉으로 드러난 명성을 추구하였으니, 이는 들어간 곳이 본디 이미 달랐던 것입니다. 사문은 주장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스스로 허심탄회하게 남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너무 높게 내세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의심스러운 점을 들어 논란하지를 못합니다. 또 굳세고 준절(峻截)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남을 맹렬히 꾸짖는 것을 굳세다고 여기고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여기니, 항상 못을 기울이고 바다를 뒤집을 듯한 의사는 있지만 봄기운이 만물을 길러 주는 듯한 기상은 없고, 단지 남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려는 화두(話頭)만 들리지 널리 사랑하고 선을 이루어 주는 진실과 성실함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학문의 치우침이며 기질의 병통이니, 그 장점으로 인하여 도리어 병통이 만들어져서 득실(得失)의 결과가 이러한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의심을 받은 몸이므로 거듭 죄를 얻게 될까 두려워서 이렇듯 간절한 마음을 품고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영원히 사생의 의리를 저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 윤증이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송시열은 윤휴에 대한 윤 부자의 태도를 언급하며 요구에 결국 응하지 않아, 1679년에 결국 스승에게 실망한 윤증은 노력을 중단하며 둘 사이의 시비는 1차적으로는 일단락 되었다. 이 때까지는 강화도에서의 윤선거의 행적은 전혀 언급된 바가 없었다.
'지난 가을에 보내 드린 뒤에 겨울 동안 두 번 편지를 보냈는데, 오래지 않아 바로잡아 정하여 도로 보내겠다고 하더니 그 후에 봄이 되도록 다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지금 편지가 처음에 이와 같고 또 보내온 뜻에 따라 찬정하겠다고 하였으니 다만 옛적의 태도 그대로인 듯하다. 그러나 처음에 이미 이와 같을까 생각하였으니, 일은 여기에서 그쳐야 할 뿐이다.'
1676년에는 이유태와 송시열 사이에도 다툼이 발생한다. 2차 예송논쟁 당시 이유태가 1차 예송 때 송시열과 같은 의견을 표했던 것과 달리 '갑인설(甲寅說)'을 지어 송시열에게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묻고 수정을 요청했다. 송시열은 수정해서 돌려주었는데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송시열이 귀양을 가게 되자 송시열은 이유태가 자신의 기존 견해를 뒤집었다고 하며 절교를 선언했다. 윤증이 당시 오간 편지를 보고 송시열에게 이유태가 견해를 바꾼 것이 아니고 또 사사로이 한 말도 아님을 거듭 말한 다음 마음을 풀고 화해하라고 했는데 그리 되지 않았고, 이유태 또한 송시열의 비난에 가만히 있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지켜보던 윤증은 송시열에게 다시 편지하며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지인들이 이제 그만 하라고 하여 결국 중단하였다.[29] 이유태는 결국 송시열 계의 강한 비판으로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사망하였다.
1678년에는 '가례원류'를 교정했다. 1680년에는 박세채와 의견을 주고 받으며 '국휼중사례사의(國恤中四禮私議)'를 저술하였다. 같은 해에 삼복의 옥에 이어 김석주와 송시열이 합작한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유배에서 풀리고 영중추부사가 된 송시열이 회천(懷川)으로 돌아오자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아직까지는 불만은 있지만 인연이 끊길 정도까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의정 김수항이 윤증을 천거하였으나[30]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1681년 현종개수실록을 김수항, 이선, 이사명이 감수하고 있었다. 이사명[31]이 나양좌에게 “국사(國史) 중에 미촌(美村=윤선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군데는 그를 극도로 칭찬한 내용이고, 한 군데는 강도(江都)의 일을 논한 것으로 간간이 헐뜯어 의논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사국(史局) 사람들이 모두 상세한 내막을 알고자 하여 편지로 이산(尼山)에 알려야 되겠다고 합니다.” 하여 나양좌가 윤증에게 그 뜻을 알리자 윤증은 부친이 죽지 않고 강화도를 빠져 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한 것은 조부 윤황을 뵙고 함께 죽고자 함이었으며,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율곡의 입산했던 일과 효종이 윤선거의 출사를 사양하는 소를 받고 척화를 주장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내린 것을 들어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이 편지는 나양좌가 자형인 김수항에게 보였고, 그를 통해 이사명과 이선[32]이 함께 보게 되었다. 이 내용은 회니시비가 본격화되며 다시 회자된다.
“선인의 강도 일은 다른 곡절이 없습니다. 성이 함락되던 날 선인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진원군(珍原君)의 행차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대개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미 적병의 칼날을 면하였으니, 미복으로 난을 피한 것은 본디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권공(權公=권순장(權順長))과 김공(金公=김익겸(金益兼))은 남문(南門)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과 같이 분신하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또한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인은 단지 돌아가서 노친을 뵙고 함께 남한산성에서 죽고자 했던 것인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끝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의 뜻이었으니, 빈틈없는 의리로 따지더라도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선인 스스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였다.’라고 하며 통절하게 스스로 각박하게 자책했던 것입니다. 지금 간혹 강도의 일을 가지고 선인을 헐뜯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찌 율곡(栗谷)의 ‘망녕된 것으로써 슬픔을 잊으려 했다.[以妄塞悲]’는 상소를 가리켜 ‘스스로 다 말했다.[自道盡]’고 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율곡은 오히려 정말 입산한 잘못이라도 있었지만 선인이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은 애당초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으니, 효종대왕의 비답에 이른바 ‘진동(陳東)이 끝내 윤곡(尹穀)의 죽음을 불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라는 것은 의리에 정밀한 성인의 말씀으로, 진정 백세가 지나서도 의혹되지 않을 만한 것입니다.” - 윤증이 나양좌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1681년 송시열이 김석주와 어울리며 적극 동조하고 세도(世道)를 자임(自任)하며 독단적인 일 처리를 하는 것을 보고,[33] 그동안 부친의 묘갈 문제와 이유태와의 예설 문제를 보며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던 송시열에 대한 충언(忠言)을 결심하며 신유의서(辛酉擬書)를 작성한다.[34] 여기에 나오는 말이 그 유명한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왕패병용 의리쌍행;王覇竝用 義利雙行)'이다. 예기에 나오는 스승을 섬기는 도리로 “얼굴을 대 놓고 극간해도 안 되지만 그 잘못을 숨겨서도 안 된다.[無犯無隱]”를 바탕으로 의리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편지를 쓰고 나서는 정작 묘갈 문제로 이전보다 소원해진 상태이기에 관계에 더 해가 될까 망설이며 보내지 않았다. 1682년 다음해에 박세채를 만나 “나는 비간(比干)이 한 마디 간언을 하고 죽었던 일을 본받고자 하네.” 하며 결국 보낼 뜻을 밝혔으나, 박세채가 “편지의 뜻은 실로 좋지만 이 어른이 이미 말을 받아들일 도량이 없고 근래 양쪽의 분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만약 이 편지를 보낸다면 바로잡는 유익함은 기필할 수 없고 장차 분열만 더욱 초래할 것이네. 또 형은 세상에 나가지 않아 규방에 들어앉은 처자나 다름이 없는데, 만약 이로 인해서 세도에 누를 끼친다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하며 만류하여 결국 보내지 않았고, 깊숙이 감추어 자손 조차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유의서(辛酉擬書)
“제가 외람되게 오랫동안 문하에 출입하였기에 내면에 간직하신 성품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를 삼가 엿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주 부자(朱夫子)가 경계한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王覇竝用義利雙行]’는 설(說)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근년 이래로 마음속의 의심이 날로 더욱 커지기에 감히 한 번 생각을 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른바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께서는 도학(道學)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을 종주로 삼고 사업은 오로지 대의(大義)에 뜻을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본디 순수하게 모두 천리(天理)로써 스스로 기약하려 하였으니, 어찌 패술과 사리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회옹의 도로써 자임하고 대의라는 이름을 스스로 세우려는 과정에서 주장이 너무 지나치게 되었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스스로를 너무 높이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점을 말씀드리고 논란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이에 떠받들며 동조하는 자는 친하게 대하고, 가부(可否)를 따져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소원하게 대하며, 잘못을 바로잡거나 뜻을 거스르는 자는 후환이 미치고,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는 재앙이 없으니, 이것이 큰 명성이 세상을 압도하는데도 내면의 실덕(實德)은 병든 이유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처신에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퇴도(退陶= 이황)의 학문은 한결같이 회옹을 본보기로 삼았지만 강의 준절(剛毅峻截)한 점은 끝내 부족했던 듯하다.’ 하셨으니, 대개 이 점을 퇴도의 병통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처신은 또 강의 준절 쪽으로만 치우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자신을 이기는 데 용감한 것이 강(剛)인데 지금은 남을 맹렬하게 꾸짖는 것을 강으로 여기고, 이성[理]이 욕망[慾]을 이기는 것이 강인데 지금은 힘으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을 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수작(酬酌)하는 사이에 드러난 모습을 보면, 사욕을 이기고 몸소 행하는 등 실제 힘을 쏟아야 할 곳에는 거의 미치지 못하고, 조롱과 질책으로 사람을 누르고 추어올리며 주고 빼앗으려는 의도가 말과 글로 표출되는 것이 통절하고도 심각하여, 남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려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한 마디 말의 동이(同異)와 한 가지 일의 어긋남을 자로 재어서 취사(取捨)하느라 이리저리 나누고 쪼개어 평생토록 맺어 온 정의(情義)조차 내팽개치듯이 버리니, 이것은 또 은혜가 적었던 신불해(申不害)ㆍ한비(韓非)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접하는 데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문하에 노니는 자들이 모두 눈치를 살펴 부회(附會)하는 것을 어진 이 높이는 일로 여기고, 남의 잘못을 샅샅이 들추어내고 각박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것을 악을 미워하는 일로 여기니, 수준이 높은 자는 명예를 사모하고 수준이 낮은 자는 그 이익을 탐하여 한결같이 담론(談論)만을 배울 뿐 성정(性情)과 심신(心身), 날로 쓰는 이륜(彝倫)은 전혀 염두에 없습니다.
주현(州縣)의 궤급(饋給)과 문안이 과도하고 사림의 떠받듦이 지나친 것에 이르면, 사람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되 그 덕에 감복하지는 않으니, 완연히 하나의 부귀한 문정(門庭)을 이루어 더 이상 선비 집안의 기상이 없습니다. 마침내는 평생의 친구들 중에 끝까지 정의(情誼)를 유지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6, 7십 년간 형제처럼 함께 강학(講學)하였던 곳을 하루아침에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버티고 아주 사소한 일을 놓고 죽자고 다투는 싸움터로 변하게 함으로써 장차 후세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또 한집안에서 형제끼리 싸우는 변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짐이 들어맞는 데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문장과 언론에 이르면 회옹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회옹의 말이 없이는 그 설을 믿을 수 없는 듯이 여깁니다. 그러나 차분히 그 실질을 고찰해 보면 간혹 명목은 맞아도 그 뜻은 꼭 서로 비슷하지는 않은 것이 있고, 간혹 먼저 자신의 뜻을 세워 놓고 회옹의 말을 끌어대어 무게를 더하고자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겉으로는 거역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승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문장으로 드러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평생에 걸쳐 수립한 업적이 실로 대의를 창도(唱導)하여 밝힌 것에 있으나, 이른바 대의라는 것은 언어만으로 갖추어지고 승낙만으로 기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본디 사람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조금 지나면서부터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안으로 나라를 굳건히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우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여 복수하기를 도모한다.’는 것이 탁월하게 볼만한 내실은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많은 녹봉과 높은 지위, 사방에 가득한 명성뿐이니, 일로 드러나는 것이 또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한두 가지 내면의 문제점 또한 엿보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그것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는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학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율곡 선생이 말씀하기를, ‘기질을 바로잡는 법은 사욕을 이기는 데 있으니, 사욕을 이기지 못한다면 기질을 바로잡지 못한다.’ 하였고, 주자는 ‘사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성질의 편벽됨이 첫 번째이고,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두 번째이고, 피아(彼我)를 구분하여 남을 미워하고 이기려는 사심(私心)이 세 번째이다.’ 하였습니다. 또 율곡은 ‘이기기 어려운 사욕은 오직 분노와 욕망이다.’ 하였고, 사씨(謝氏)는 ‘굳셈[剛]과 욕망은 정반대이다. 물욕(物慾)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물욕을 이기므로 항상 만물의 위에서 펴지게 되고, 물욕에 가리는 것을 욕망이라고 하니, 물욕에 가리므로 항상 만물의 아래에 굽히게 된다.’ 하였습니다. 분노하고 남을 미워하여 이기려는 마음은 굳센 듯이 보이지만 굳센 것이 아니니, 다름이 아니라 모두 인욕(人慾)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의 기질은 강덕(剛德)은 많지만 그 쓰임이 천리(天理)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이 덕의 병통이 되니, 참으로 이른바 ‘사욕의 이기기 어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욕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병통을 바로잡아 그 덕을 온전히 하지 못하니, 그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모두 이 병통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학문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자(孔子)가 ‘충신에 주안점을 둔다.[主忠信]’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사람이 충신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진실하지 못하여 악을 하기는 쉽고 선을 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충(忠)은 실심(實心)이고 신(信)은 실사(實事)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곡 선생이 이것을 인용하여 거듭 말하기를, ‘사람에게 실심이 없으면 천리에 어그러지게 된다. 한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만사가 모두 거짓되고, 한 마음이 진실하면 만사가 모두 진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성실함은 성인의 근본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기질의 병통이 이와 같은데도 바로잡지 못하니, 실심으로 학문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점칠 수 있습니다.
대저 의리는 천리이고 사리는 인욕이며, 천리에 순수한 것은 왕도(王道)이고 인욕이 섞인 것은 패술(覇術)입니다. 내면에 간직한 성품과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아 순수하게 모두 천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으니, 어찌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문하의 총명하고 굳센 자질, 확고하고 치밀한 학문, 평생토록 수립한 우뚝한 공업으로도 하나의 성실함이 확립되지 못하고 하나의 사욕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결국은 득실(得失)의 나뉨이 여기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 회옹의 법문(法門), 벼슬아치와 선비들의 종장(宗匠)이 모두 문하의 한 몸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참으로 천하 후세에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실질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너무도 슬프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정 문하의 본래 강한 기질과 평생 쌓은 학문으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냄새를 씻어내고 껍질을 벗겨낸다면, 하나의 성실이 확립됨과 동시에 모든 뜻이 다 바르게 되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러서 무엇 하나 천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현(前賢)의 통서(統緖)를 이어 후세에 가르침을 남겨 처음에 스스로 기약하였던 뜻을 이루는 일이 진정 문지도리를 한 번 돌리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링크
“제가 외람되게 오랫동안 문하에 출입하였기에 내면에 간직하신 성품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를 삼가 엿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주 부자(朱夫子)가 경계한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王覇竝用義利雙行]’는 설(說)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근년 이래로 마음속의 의심이 날로 더욱 커지기에 감히 한 번 생각을 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른바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께서는 도학(道學)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을 종주로 삼고 사업은 오로지 대의(大義)에 뜻을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본디 순수하게 모두 천리(天理)로써 스스로 기약하려 하였으니, 어찌 패술과 사리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회옹의 도로써 자임하고 대의라는 이름을 스스로 세우려는 과정에서 주장이 너무 지나치게 되었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스스로를 너무 높이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점을 말씀드리고 논란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이에 떠받들며 동조하는 자는 친하게 대하고, 가부(可否)를 따져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소원하게 대하며, 잘못을 바로잡거나 뜻을 거스르는 자는 후환이 미치고,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는 재앙이 없으니, 이것이 큰 명성이 세상을 압도하는데도 내면의 실덕(實德)은 병든 이유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처신에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퇴도(退陶= 이황)의 학문은 한결같이 회옹을 본보기로 삼았지만 강의 준절(剛毅峻截)한 점은 끝내 부족했던 듯하다.’ 하셨으니, 대개 이 점을 퇴도의 병통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처신은 또 강의 준절 쪽으로만 치우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자신을 이기는 데 용감한 것이 강(剛)인데 지금은 남을 맹렬하게 꾸짖는 것을 강으로 여기고, 이성[理]이 욕망[慾]을 이기는 것이 강인데 지금은 힘으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을 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수작(酬酌)하는 사이에 드러난 모습을 보면, 사욕을 이기고 몸소 행하는 등 실제 힘을 쏟아야 할 곳에는 거의 미치지 못하고, 조롱과 질책으로 사람을 누르고 추어올리며 주고 빼앗으려는 의도가 말과 글로 표출되는 것이 통절하고도 심각하여, 남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려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한 마디 말의 동이(同異)와 한 가지 일의 어긋남을 자로 재어서 취사(取捨)하느라 이리저리 나누고 쪼개어 평생토록 맺어 온 정의(情義)조차 내팽개치듯이 버리니, 이것은 또 은혜가 적었던 신불해(申不害)ㆍ한비(韓非)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접하는 데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문하에 노니는 자들이 모두 눈치를 살펴 부회(附會)하는 것을 어진 이 높이는 일로 여기고, 남의 잘못을 샅샅이 들추어내고 각박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것을 악을 미워하는 일로 여기니, 수준이 높은 자는 명예를 사모하고 수준이 낮은 자는 그 이익을 탐하여 한결같이 담론(談論)만을 배울 뿐 성정(性情)과 심신(心身), 날로 쓰는 이륜(彝倫)은 전혀 염두에 없습니다.
주현(州縣)의 궤급(饋給)과 문안이 과도하고 사림의 떠받듦이 지나친 것에 이르면, 사람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되 그 덕에 감복하지는 않으니, 완연히 하나의 부귀한 문정(門庭)을 이루어 더 이상 선비 집안의 기상이 없습니다. 마침내는 평생의 친구들 중에 끝까지 정의(情誼)를 유지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6, 7십 년간 형제처럼 함께 강학(講學)하였던 곳을 하루아침에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버티고 아주 사소한 일을 놓고 죽자고 다투는 싸움터로 변하게 함으로써 장차 후세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또 한집안에서 형제끼리 싸우는 변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짐이 들어맞는 데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문장과 언론에 이르면 회옹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회옹의 말이 없이는 그 설을 믿을 수 없는 듯이 여깁니다. 그러나 차분히 그 실질을 고찰해 보면 간혹 명목은 맞아도 그 뜻은 꼭 서로 비슷하지는 않은 것이 있고, 간혹 먼저 자신의 뜻을 세워 놓고 회옹의 말을 끌어대어 무게를 더하고자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겉으로는 거역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승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문장으로 드러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평생에 걸쳐 수립한 업적이 실로 대의를 창도(唱導)하여 밝힌 것에 있으나, 이른바 대의라는 것은 언어만으로 갖추어지고 승낙만으로 기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본디 사람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조금 지나면서부터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안으로 나라를 굳건히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우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여 복수하기를 도모한다.’는 것이 탁월하게 볼만한 내실은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많은 녹봉과 높은 지위, 사방에 가득한 명성뿐이니, 일로 드러나는 것이 또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한두 가지 내면의 문제점 또한 엿보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그것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는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학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율곡 선생이 말씀하기를, ‘기질을 바로잡는 법은 사욕을 이기는 데 있으니, 사욕을 이기지 못한다면 기질을 바로잡지 못한다.’ 하였고, 주자는 ‘사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성질의 편벽됨이 첫 번째이고,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두 번째이고, 피아(彼我)를 구분하여 남을 미워하고 이기려는 사심(私心)이 세 번째이다.’ 하였습니다. 또 율곡은 ‘이기기 어려운 사욕은 오직 분노와 욕망이다.’ 하였고, 사씨(謝氏)는 ‘굳셈[剛]과 욕망은 정반대이다. 물욕(物慾)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물욕을 이기므로 항상 만물의 위에서 펴지게 되고, 물욕에 가리는 것을 욕망이라고 하니, 물욕에 가리므로 항상 만물의 아래에 굽히게 된다.’ 하였습니다. 분노하고 남을 미워하여 이기려는 마음은 굳센 듯이 보이지만 굳센 것이 아니니, 다름이 아니라 모두 인욕(人慾)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의 기질은 강덕(剛德)은 많지만 그 쓰임이 천리(天理)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이 덕의 병통이 되니, 참으로 이른바 ‘사욕의 이기기 어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욕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병통을 바로잡아 그 덕을 온전히 하지 못하니, 그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모두 이 병통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학문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자(孔子)가 ‘충신에 주안점을 둔다.[主忠信]’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사람이 충신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진실하지 못하여 악을 하기는 쉽고 선을 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충(忠)은 실심(實心)이고 신(信)은 실사(實事)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곡 선생이 이것을 인용하여 거듭 말하기를, ‘사람에게 실심이 없으면 천리에 어그러지게 된다. 한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만사가 모두 거짓되고, 한 마음이 진실하면 만사가 모두 진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성실함은 성인의 근본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기질의 병통이 이와 같은데도 바로잡지 못하니, 실심으로 학문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점칠 수 있습니다.
대저 의리는 천리이고 사리는 인욕이며, 천리에 순수한 것은 왕도(王道)이고 인욕이 섞인 것은 패술(覇術)입니다. 내면에 간직한 성품과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아 순수하게 모두 천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으니, 어찌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문하의 총명하고 굳센 자질, 확고하고 치밀한 학문, 평생토록 수립한 우뚝한 공업으로도 하나의 성실함이 확립되지 못하고 하나의 사욕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결국은 득실(得失)의 나뉨이 여기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 회옹의 법문(法門), 벼슬아치와 선비들의 종장(宗匠)이 모두 문하의 한 몸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참으로 천하 후세에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실질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너무도 슬프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정 문하의 본래 강한 기질과 평생 쌓은 학문으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냄새를 씻어내고 껍질을 벗겨낸다면, 하나의 성실이 확립됨과 동시에 모든 뜻이 다 바르게 되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러서 무엇 하나 천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현(前賢)의 통서(統緖)를 이어 후세에 가르침을 남겨 처음에 스스로 기약하였던 뜻을 이루는 일이 진정 문지도리를 한 번 돌리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링크
1682년 박세채를 만나 토론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처조카 권이정[35]이 찾아와 “제 외조부의 만절(晩節)이 점점 더 수습하기 어려워지는데 왜 한 마디 바로잡아 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하자 편지를 쓴 바 있으나 보내지 않은 이유도 이야기해주며 큰 뜻을 조용히 전해달라 했다. 이를 송시열이 듣고 크게 화내어 말이 퍼지자 박세채와 나양좌가 상황을 묻고 조처하도록 이야기하자 답서를 보냈다.
"묘갈명에 미화하는 말을 잔뜩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을 품은 것이다.’라는 말은 함장(=송시열)이 당초에 하신 말씀인데, 내게 이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고명(高明)도 알 것입니다. 보내 준 편지에서 ‘편지를 써서 사죄해야 한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나는 의혹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함장이 선인을 폄하하려 한 것이 묘갈명 이후로 실로 한 가지 일, 한 마디 말만이 아니다가 목천의 일에 이르러서 극에 달하였으니, 자식 된 마음에 어찌 예전처럼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리(情理)가 전과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함장에게 실로 본원과 언행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한 것이 지난번에 논했던 바와 같은데도 감히 질정하지 못하니, 옛사람이 말한 ‘사생(師生)’ 사이의 의리는 실로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리도 전과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과 의리가 모두 전과 같지 못하지만 스스로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겠으니, 비록 사죄하고자 한들 어떻게 말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심상하게 안부를 여쭙는 예라면 비록 전처럼 자주는 아니더라도 본디 감히 폐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를 이해해 주느냐, 나를 탓할 것이냐 하는 것이 단지 여기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송시열이 유배에서 돌아와 이상(李翔)에게 윤선거의 노강서원 제향 당시 목천(木川) 사람이 ‘강도부노불합향사(江都俘奴不合享祀)’[36]는 글을 여러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냈다고 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당시 이상이 돌아와 목천 유생들에게 묻자 유생들이 놀라 노강서원에 당시의 통문을 문의하였는데, 그런 내용은 없었다.
1683년 숙종이 3차례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유로 돈소(敦召)하고 함께 오라고 명하여 반복적으로 사양하였으나, 마지막에는 결국 한 달 가까이 사관이 옆에서 지키고 임금의 명이 갈수록 정중해지고 “지금 가주서(假注書) 이두악(李斗岳)의 장계(狀啓)를 보니, 전 참의 윤증이 병세가 조금 차도가 보이기를 기다려서 교외로 나오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찌 다 비유하겠는가. 올라올 때에 역마를 지급하라고 하유하라.”고 전교를 내리자 결국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5월 3일 과천 나양좌의 집에 도착하여 상소를 다시 올리기도 전에 소식을 들은 숙종이 승지를 보내어 데려오라고 하였다. 이 때 박세채도 송시열의 동의를 받아 윤증의 출사를 다시 설득하기 위해 과천을 찾아 하루 묵었다. 윤증은 그의 설득에도 “우리들이 오늘날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나간다면 제대로 해야 할 것이네. 만약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우암(尤庵)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키지 않아서는 안 되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원한 관계를 풀지 않아서는 안 되고, 삼척(三戚)의 문호(門戶)를 닫지 않아서는 안 될 것[37]인데, 우리들의 역량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속으로는 절대로 하지 못할 줄을 알면서 무턱대고 나가는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네.” 하자 박세채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못했다. 윤증은 다시 낙향하였다. 낙향 후 7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 1684년 1월 대사헌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684년 봄,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38]이 신유의서의 내용을 발견하여 그 내용을 베껴가 송시열에게 보인다. 4월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이 상소하며 본격적으로 회니시비가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최신은 신유의서가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며, 부친 윤선거의 강화도에서의 행적도 싸잡아 언급하였고, 윤휴와의 일, 묘갈명의 일, 목천의 일을 거론하며 송시열의 주장을 반복하였다. 박세채가 상소하여 일의 전말과 곡절을 밝히며 변론하였으나 송시열 측은 그를 강력히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1681년 강화도에서의 윤선거의 행적에 대해 윤증이 밝혔던 편지에서 '율곡은 입산한 잘못이 있었다'는 한 마디를 꺼내어 욕을 하고, 권순장, 김익겸처럼 절의를 지킨 사람을 배척했다고 하였다. 이어 이진안(李震顔)이 상소하여 윤증을 배척하자 김수항은 이진안을 비호하고, 부제학 최석정은 이진안이 무고하였으며, 김수항의 실책이라고 비판하였다. 윤증은 조득중에게 편지를 보내 권순장과 김익겸을 논한 부분에 대해서는 죽음을 논할 의도는 없었지만, 다시 살펴보니 본인의 말투가 경솔하고 거만했기에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고 자책하였다.
한편 박세채와 박태보가 송순석이 편지를 베껴간 것을 계기로 지금이라도 신유의서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윤증에게 권하였으나, 윤증은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나양좌가 동문인 성지선, 조득중과 함께 상소하여 변론하고자 했는데, 윤증은 만류하였다.[39]
“이제 와서 뒤늦게 보내는 것은 성의 없는 행동이니, 사람들이 보고서 책임을 때우려 든다고 의심하지 않으면 필시 곧장 더욱 멋대로 비방하고 헐뜯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차라리 소신을 지키며 조용히 기다리고자 할 뿐입니다. 방금 북인(北人=상소를 올린 최신)의 상소를 보았는데, 이것이 어찌 북인이 스스로 한 일이겠습니까. 불초자식이 선친에게 욕을 끼친 죄는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그 아들에 대한 노여움으로 그 아비까지 욕보인 것은 참으로 너무도 심한 처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오직 이른바 ‘문을 걸어 잠근 채 들어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죽는다.’는 것을 최선의 법으로 삼을 뿐입니다.” -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반드시 따라 주지 않을 줄 알면서 일부러 굳이 보내는 것은 좌계(左契)를 잡고자 하는 것[40]이네. 그렇다면 이 마음이 절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니, 비록 혹 감동시킬 만한 이치가 있다 한들 어떻게 감동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 편지를 썼던 것은 만에 하나라도 의견이 합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네. 어찌 스스로를 위한 계책으로 썼겠는가.” - 박태보에게 보낸 편지
“상대가 나를 범하여도 따지지 않고 피아(彼我)의 간격을 두지 않는 것이 바로 선인의 평소의 마음가짐이었는데, 어찌 형은 이 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천지가 밝게 펼쳐지고 귀신이 빽빽하게 늘어섰으니 어찌 끝내 성명(聖明)을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조용히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양산(楊山)이 ‘그만둘 수 없다.’고 한 말도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나양좌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송시열이 편지를 보내오자 답하였다. 송시열의 문장 하나하나에 조목조목 답하고 있다. 공손한 문장이나 강한 날이 서있다.
“참람된 논의를 권생(權生=권이정)을 통해 전하게 한 뒤로 항상 황송한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의서(擬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비록 황송한 심정은 더욱 깊어졌지만, 몇 년 동안 머뭇거리며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듣고 보게 되신 것을 또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인의 상소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또 마음이 슬퍼져서 어찌할 줄을 모른 채 문하(=송시열)를 위해 애석해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뜻밖에 하나하나 용서하시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더구나 선한 뜻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하늘이 미워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맹세하셨으며, ‘인륜도 없고 이치에도 어긋났다.’라는 말로 북인을 꾸짖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아! 문하의 말씀이 이러한데도 스스로 감정의 벽을 쌓고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 끝내 스스로 어른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이는 문하는 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제가 실로 문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하교하신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답변드리고자 합니다.
하교에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가 나의 실질적인 병통이네.’라고 하셨으니, 저의 망녕된 견해가 혹 마음을 깨우친 점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아! 저의 망녕된 견해와 망녕된 논의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으니, 상세한 것은 실로 신유년(1681, 숙종7) 여름에 올리려고 했던 장서(長書)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장서를 올리지 못한 것은 실로 성의가 부족한 저의 죄입니다. 예전에 선인(先人)은 문하에 대해서 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었는데, 의심스러운 점을 보면 모두 기질의 병통으로 돌리고 본원에 대해서는 일찍이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망녕된 견해는 본원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여, 기질의 병통을 고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키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참람하게 이처럼 함부로 논하는 까닭입니다. 몇 해 전 봉산(蓬山 장기(長鬐))으로 찾아뵈었을 때 문하의 꾸지람과 가르침을 받았는데, ‘자네의 선장(先丈)은 붕우에게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충고해 주었는데, 자네는 그렇지 않으니 선친의 법도를 잃었다고 하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삼가 절하고 받아들인 후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여 지금까지 감히 잊지 못하고 있으나, 갖추어 쓴 편지 한 통을 오히려 몸을 도사린 채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감히 즉시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선친의 규범을 실추하였으니, 이것이 또 큰 죄입니다.
하교에 ‘이놈이 글을 잘못 지어서 자네의 선장에게 죄를 얻었다면, 자네로서는 마땅히 의리에 입각하여 관계를 끊겠다고 통고했어야 할 것이네.’라고 하셨습니다. 아! 관계를 끊겠다고 통고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범 충선공(范忠宣公)이 구양공(歐陽公)에게 하지 못했던 일인데 더구나 못난 제가 문하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화숙(和叔)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말을 불평한 마음이 촉발되어 나온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이는 실로 저의 본심이 아닙니다. 불평한 마음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입니다. 제가 비록 못났지만 어찌 천하 후세의 공의가 필부(匹夫)의 사정을 용인하지 않을 줄을 모르고 사사로운 감정에 가려서 감히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저의 망녕된 견해가 잘못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불평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불평한 감정에 가려서 소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저도 감히 스스로 옳다고 우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교에 ‘묘갈명의 초본을 지은 이후로 자네가 고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따랐네.’라고 하셨습니다. 묘갈명을 고쳐 주기를 청한 것은 모두 세 번이었습니다. 처음에 고쳐 주기를 청했을 때에는 고쳐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실제로 감히 재차 청할 생각을 못하였고, 그다음에 고치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도 또 다소간의 서신의 왕래가 있었으니, 어찌 감히 세 번째로 청할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마지막에는 편지를 보내 다시 초본을 보내라고 하셨으나, 저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감히 즉시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숙이 ‘개정본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스스로 먼저 어른의 뜻을 막아서는 안 되네.’라고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보냈는데, 그 후에 과연 약간의 글자만을 고쳐 주셨으므로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묘갈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문하께서는 저희 집에 대해서 한 가지 미세한 일과 한 마디 미덥지 않은 말이라도 선인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이기만 하면 후생(後生)들에게 폭로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사사로운 마음에 늘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며 탄식하였습니다. 또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파서 일찍이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한 한 가지 말이 있는데, 지금 어쩔 수 없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문하께서 일찍이 고(故) 김 상서(金尙書)[41]의 말을 인용하여 선인을 ‘잔인한 사람(忍人)’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까지도 허실(虛實)을 가리지 않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으니, 자식 된 마음에 어찌 통한이 사무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의 구구한 정리가 전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니, 죄를 피할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의리가 예전과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또 별건의 일입니다. 스승은 도(道)가 있는 바이기 때문에 얼굴을 대 놓고 극간(極諫)해서도 안 되지만 그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할 말이 있어도 감히 다하지 못하고 의심나는 점이 있어도 감히 질정하지 못하여 정성을 다 쏟기도 전에 의심과 비방이 먼저 쌓이니, 예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실로 이런 의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연래로 스스로 걱정스러워 했던 것은, 밖으로는 스승을 신뢰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제 마음을 믿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의심이 없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여, 겉과 안이 모순되고 마음과 입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스스로를 지켜, 오직 말로(末路)에 시끄러운 단서를 더 보태어 세도에 거듭 누를 끼치지 않게 함으로써 그나마 죄를 줄이는 방편을 삼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곤경에 빠져 장차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교에 ‘목천의 일은 선장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뜻이었네.’라고 하셨습니다. 대개 선인의 당시 일에 대해서는 그 득실과 시비(是非)를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또 사람은 제각각 의견이 있는 법이니, 만약 처신의 당부(當否)를 논하여 공정하게 시비를 정한다면 자손이라 할지라도 감히 그에 대해서 사사로운 감정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은 그렇지가 않아서 갑인년(1674, 현종15)부터 신유년(1681, 숙종7)까지 8년 사이에 이곳과 목천 인근에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문하로부터 말이 전해졌습니다. 저로서는 문하에게 고한 자가 선인을 헐뜯으려는 생각을 몰래 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여 그 말을 전파하여 시끄럽게 변론하고 다투느라 한바탕 욕하고 싸우게 만든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실로 통탄스러운 심정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문하를 의심했던 데는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문하가 화숙에게 보낸 편지에 모인(某人)이 성내며 욕했던 말을 끌어대며 옆에다 ‘어강도사(於江都事)’라는 네 글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습니다. 이것이 만약 그의 말이라면 이미 썼다가 도로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이며, 지우되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듣건대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이 자주 이 일로 선인을 흠잡는 구실을 삼고 왕왕 멋대로 말하면서 조금도 삼가고 조심하는 바가 없다고 하니, 이와 같다면 설사 그 말이 목천 사람에게서 나왔더라도 문하의 뜻에 영합한 여론(餘論)일 뿐입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이상(李翔))가 여쭈었을 때는 그 말이 유수방(柳壽芳)에게 나온 것처럼 말씀하셨고, 목천 사람이 여쭈었을 때는 문득 말을 스스로 만든 것으로 자처하셨으며, 제가 편지를 보냈을 때는 허황(許璜)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으나, 최후에 태중(泰仲)이 여쭈었을 때는 초려(草廬)에게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다면 미혹한 마음에 의심이 없고자 하더라도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감히 그렇게 말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뜻밖에 하나하나 용서하시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더구나 선한 뜻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하늘이 미워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맹세하셨으며, ‘인륜도 없고 이치에도 어긋났다.’라는 말로 북인을 꾸짖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아! 문하의 말씀이 이러한데도 스스로 감정의 벽을 쌓고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 끝내 스스로 어른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이는 문하는 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제가 실로 문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하교하신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답변드리고자 합니다.
하교에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가 나의 실질적인 병통이네.’라고 하셨으니, 저의 망녕된 견해가 혹 마음을 깨우친 점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아! 저의 망녕된 견해와 망녕된 논의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으니, 상세한 것은 실로 신유년(1681, 숙종7) 여름에 올리려고 했던 장서(長書)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장서를 올리지 못한 것은 실로 성의가 부족한 저의 죄입니다. 예전에 선인(先人)은 문하에 대해서 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었는데, 의심스러운 점을 보면 모두 기질의 병통으로 돌리고 본원에 대해서는 일찍이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망녕된 견해는 본원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여, 기질의 병통을 고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키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참람하게 이처럼 함부로 논하는 까닭입니다. 몇 해 전 봉산(蓬山 장기(長鬐))으로 찾아뵈었을 때 문하의 꾸지람과 가르침을 받았는데, ‘자네의 선장(先丈)은 붕우에게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충고해 주었는데, 자네는 그렇지 않으니 선친의 법도를 잃었다고 하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삼가 절하고 받아들인 후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여 지금까지 감히 잊지 못하고 있으나, 갖추어 쓴 편지 한 통을 오히려 몸을 도사린 채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감히 즉시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선친의 규범을 실추하였으니, 이것이 또 큰 죄입니다.
하교에 ‘이놈이 글을 잘못 지어서 자네의 선장에게 죄를 얻었다면, 자네로서는 마땅히 의리에 입각하여 관계를 끊겠다고 통고했어야 할 것이네.’라고 하셨습니다. 아! 관계를 끊겠다고 통고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범 충선공(范忠宣公)이 구양공(歐陽公)에게 하지 못했던 일인데 더구나 못난 제가 문하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화숙(和叔)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말을 불평한 마음이 촉발되어 나온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이는 실로 저의 본심이 아닙니다. 불평한 마음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입니다. 제가 비록 못났지만 어찌 천하 후세의 공의가 필부(匹夫)의 사정을 용인하지 않을 줄을 모르고 사사로운 감정에 가려서 감히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저의 망녕된 견해가 잘못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불평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불평한 감정에 가려서 소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저도 감히 스스로 옳다고 우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교에 ‘묘갈명의 초본을 지은 이후로 자네가 고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따랐네.’라고 하셨습니다. 묘갈명을 고쳐 주기를 청한 것은 모두 세 번이었습니다. 처음에 고쳐 주기를 청했을 때에는 고쳐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실제로 감히 재차 청할 생각을 못하였고, 그다음에 고치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도 또 다소간의 서신의 왕래가 있었으니, 어찌 감히 세 번째로 청할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마지막에는 편지를 보내 다시 초본을 보내라고 하셨으나, 저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감히 즉시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숙이 ‘개정본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스스로 먼저 어른의 뜻을 막아서는 안 되네.’라고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보냈는데, 그 후에 과연 약간의 글자만을 고쳐 주셨으므로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묘갈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문하께서는 저희 집에 대해서 한 가지 미세한 일과 한 마디 미덥지 않은 말이라도 선인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이기만 하면 후생(後生)들에게 폭로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사사로운 마음에 늘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며 탄식하였습니다. 또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파서 일찍이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한 한 가지 말이 있는데, 지금 어쩔 수 없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문하께서 일찍이 고(故) 김 상서(金尙書)[41]의 말을 인용하여 선인을 ‘잔인한 사람(忍人)’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까지도 허실(虛實)을 가리지 않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으니, 자식 된 마음에 어찌 통한이 사무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의 구구한 정리가 전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니, 죄를 피할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의리가 예전과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또 별건의 일입니다. 스승은 도(道)가 있는 바이기 때문에 얼굴을 대 놓고 극간(極諫)해서도 안 되지만 그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할 말이 있어도 감히 다하지 못하고 의심나는 점이 있어도 감히 질정하지 못하여 정성을 다 쏟기도 전에 의심과 비방이 먼저 쌓이니, 예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실로 이런 의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연래로 스스로 걱정스러워 했던 것은, 밖으로는 스승을 신뢰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제 마음을 믿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의심이 없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여, 겉과 안이 모순되고 마음과 입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스스로를 지켜, 오직 말로(末路)에 시끄러운 단서를 더 보태어 세도에 거듭 누를 끼치지 않게 함으로써 그나마 죄를 줄이는 방편을 삼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곤경에 빠져 장차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교에 ‘목천의 일은 선장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뜻이었네.’라고 하셨습니다. 대개 선인의 당시 일에 대해서는 그 득실과 시비(是非)를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또 사람은 제각각 의견이 있는 법이니, 만약 처신의 당부(當否)를 논하여 공정하게 시비를 정한다면 자손이라 할지라도 감히 그에 대해서 사사로운 감정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은 그렇지가 않아서 갑인년(1674, 현종15)부터 신유년(1681, 숙종7)까지 8년 사이에 이곳과 목천 인근에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문하로부터 말이 전해졌습니다. 저로서는 문하에게 고한 자가 선인을 헐뜯으려는 생각을 몰래 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여 그 말을 전파하여 시끄럽게 변론하고 다투느라 한바탕 욕하고 싸우게 만든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실로 통탄스러운 심정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문하를 의심했던 데는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문하가 화숙에게 보낸 편지에 모인(某人)이 성내며 욕했던 말을 끌어대며 옆에다 ‘어강도사(於江都事)’라는 네 글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습니다. 이것이 만약 그의 말이라면 이미 썼다가 도로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이며, 지우되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듣건대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이 자주 이 일로 선인을 흠잡는 구실을 삼고 왕왕 멋대로 말하면서 조금도 삼가고 조심하는 바가 없다고 하니, 이와 같다면 설사 그 말이 목천 사람에게서 나왔더라도 문하의 뜻에 영합한 여론(餘論)일 뿐입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이상(李翔))가 여쭈었을 때는 그 말이 유수방(柳壽芳)에게 나온 것처럼 말씀하셨고, 목천 사람이 여쭈었을 때는 문득 말을 스스로 만든 것으로 자처하셨으며, 제가 편지를 보냈을 때는 허황(許璜)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으나, 최후에 태중(泰仲)이 여쭈었을 때는 초려(草廬)에게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다면 미혹한 마음에 의심이 없고자 하더라도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감히 그렇게 말했던 까닭입니다.”
송시열이 이에 답장하여 해명하는데, 다시 윤휴의 일을 끌어오고 김익희의 말은 자신이 아닌 그에게 물어보라며 조롱하였다. 이를 안 박세채가 송시열을 책망하기도 했다. 윤증은 결국 부모에게 모욕이 지속되자 서신을 다시는 보내지 않고 관계를 끊었다. 이후 스승과 제자의 의리는 끊겼지만, 옛 의리는 고려하여 사람들과 대화할 때 송시열을 가리켜 ‘우재(尤齋)’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도 회천(=송시열)과의 일에 잘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사람들이 나더러 한 가지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도 편파적인 논의이다. 후세에 은혜와 원망이 모두 잊힌 다음에도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가 있겠지만, 다만 반드시 나를 두고 스승을 배반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 내가 겪었던 일을 교훈으로 삼아 사제(師弟)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후세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제 사이의 의가 끊겨가는 와중에 송시열과 박세채의 문인인 이세필(李世弼, 1642 ~ 1718)이 송시열과 박세채에게 '심경석의(心經釋疑)'[42]에 나오는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율곡의 인심도심 해석에 대해 질의를 한다. 송시열은 이세필의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하였고 이세필도 반론하는 정도 수준에서 종료되었다. 박세채 또한 1688년에 간략히 답한 내용이 문집에 전한다. 이 문답을 접한 기호학파 학자들은 관심을 보이며 견해를 표했다.[43] 윤증은 1686년 5월 이세필에게 편지를 보내 이세필과 송시열의 문답을 옮겨 적은 후 자신의 견해를 부기하여 송시열의 입장에 동조하며 이세필을 비판한 바 있다.[44]
1687년 2월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윤선거가 윤휴를 지지하며 다른 사람이 되어 세도(世道)의 해를 끼쳤고, 윤증이 자신을 비난한 것도 사실이며 강도에서의 일로 자신을 탓했는데 그를 웃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잘못은 있으나 주자의 '사설(邪說)로 정도(正道)를 해치는 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변명하였다. 그리고 소견은 윤선거와 다르나 교의는 변한 적이 없다며 자신이 제문(祭文)도 작성하였으니 그의 혼령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알 것이라며 조그만 사슴을 쫓는 데 정신이 팔려 태산(泰山)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링크 이에 박세채가 문생들이 변론해야 한다고 하여 박태보가 상소를 작성하고 나양좌가 소두(疏頭)가 되어 성지선, 조득중과 함께 정묘항소(丁卯抗疏)를 올리게 된다.[45] 나양좌는 영변으로 귀양가고, 성지선, 조득중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고, 오도일, 최석정, 이돈, 이익수, 최규서는 모두 삭출되었다. 정묘항소를 접한 송시열은 이희조[46]와의 편지에서 윤선거의 치욕적인 모습을 말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 내용은 윤증도 알게 되었다.
"남의 하인(下人)으로 변장하여 구차히 모면한 것은 그 몸을 욕되게 함이 크다고 하였는데, 대저 ‘위노구면(爲奴苟免)’ 네 글자는 곧 미촌(=윤선거)이 상소문에서 자책(自責)한 말일세. 그러나 미촌은 여기에서도 오히려 하인이 된 이전의 한 가지 일을 숨기고 군부(君父)에게 토로하지 않았네. 창주공(滄洲公=김익희(金益煕))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오랑캐가 군사를 몰아 모든 사부(士夫)와 백성들을 포위하여 몇 사람을 참살한 다음 통사(通事)를 시켜 이르기를 ‘항복하지 않는 자나 도망치는 자는 다 이와 같이 될 것이다. 항복할 자는 다 무릎을 꿇어라.’ 하자, 미촌도 군중을 따라 꿇고 있다가 마침 세완(世完)이 나간다는 말을 듣고 함께 나가기를 청했다고 하였네. 이 한 가지 일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본 사실인데,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마치 산골짜기에서 피난한 사람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일세."
링크
서인은 분열되었다. 나이 든 훈척과 고관들은 송시열을 지지하며 노론이 되었고, 젊은 관인과 유자들은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결집하였다. 윤증의 비판이 젊은 유자들의 공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2.3. 회니시비 이후
1688년 박세당, 박세채와 함께 파주에서 만나 이틀 동안 묵으며 토론하였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자 박태보가 숙종에게 부당함을 간하다가 사망하여 제문을 짓고 훗날 묘표도 지었다. 박태보는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윤증이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47] 윤증은 박태보의 부친이자 벗인 박세당에게 여러차례 위로하는 서신을 보냈다.통곡하고 또 통곡하오니 눈앞의 잔혹상은 어찌 차마 보겠습니까? 오호라! 아들이 장차 벼슬에 나가면 아버지가 충성을 가르치니 충성에 죽은 것을 어떻게 허물하리오? …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다시 얻을 수 있으리오? 바른 기운이 없어지고 우리의 도덕이 의탁한 데가 없으니 아까운 마음이 슬퍼하는 마음보다 더합니다.
그리고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인 훗날의 경종을 원자로 지명하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계열에서 반발하자 기사환국이 발생하였고 송시열이 결국 사사되었다. 윤증은 박세채와의 편지에서 소회를 밝힌다.
“탐라(耽羅)의 행차[48]가 반도 못 와서 갑자기 후명(後命=사약)을 받았으니, 옛 정의에 있어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묘년(1687, 숙종13) 봄[49] 이전에는 정의가 비록 끊겼어도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각박하게 처신하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급기야 송상이 직접 상소한 후에는 이런 생각이 모조리 사라졌으나, 현도(顯道=나양좌)의 상소에서 이른 ‘온갖 것들을 다 끌어 모아 공격하고 물어뜯은 것이 원수보다 더 심하였다.’라는 말은 그래도 너무 심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이희조(李喜朝)와 문답한 글[50]이 나왔는데, 참으로 원수보다 더 심하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남쪽으로 귀양 갈 때에 혹 가서 영결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고 그의 영구가 돌아올 적에는 또 한 차례 곡하기를 바라는 자가 있었으나, 끝내 내 마음을 억지로 굽혀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691년 여동생이 사망하였다.[51] 박세당, 박세채와 학문을 토론하고 노강서원에서 민이승 등에게 강학하였다. 1693년 제자 박태한(朴泰漢)에게 편지하여 학업에 힘쓸 것을 권하였다. 1694년 아들 윤행교가 문과 급제하였으며, 김집의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을 교정하고 발문을 지었다. 그리고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숙종이 얼굴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사직소에 그 내용도 언급하였다.
"‘군신지간에 얼굴도 알지 못한다.’는 하교는, 성상의 하교가 여기까지 이른 데 대해서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또한 어찌 한 번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고 싶어 하는 지극한 바람이 없겠습니까. 단지 한 번 나가 뵙는 것으로는 큰 은혜에 보답할 수가 없는데, 하잘것없는 정성만으로 징소하는 거룩한 예에 답하는 것은 분의(分義)로 볼 때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사관이 비답을 전하는 한 가지 일은 대신(大臣)에게나 베푸는 것이니, 실로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일찍이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이 특별한 은수(恩數)를 입었는데, 죽음을 앞둔 노년에 또다시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입어 초라하고 누추한 집에서 편히 지내며 앉은 채로 왕인(王人)을 맞이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성조(聖朝)의 은례(恩禮)를 전혀 재량하고 참작함 없이 이렇게 함부로 베푸신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사방에 보이고 후세에 드리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박세채가 좌의정이 되어 당론을 소멸시키려고 한다며 조언을 구하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실질을 중시하라는 내용이며, 박세채가 소론이라는 지목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태도를 확실히 하기를 촉구했다. 박세채는 다음해 1695년 2월에 사망하였고 윤증은 제문을 지어 조상하였다.
“4건의 차자에서 논한 바는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병을 치료하려는 자는 반드시 근본 원인을 찾아내야 하는 법인데, 고명은 오늘날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른 근본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강구해야 할 일은 이 병의 근원을 찾아내어 한 번 그 막을 벗겨 내는 것이니, 그렇게 하고 나서야 바른 도가 확립되고 공의(公議)가 행해져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당론의 소멸도 거의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구차하게 어정쩡한 태도로 미봉하여 잘못을 감추려 든다면, 또한 장차 물이 더욱 깊어지고 불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과 같아 함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당론을 교서 한 장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야말로 우활하기 그지없는 일이니, 이 어찌 결승(結繩)의 정치를 가지고 어지러운 진(秦)나라를 다스리려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한다면 반드시 모두들 비웃을 것이니, 그만두고 실질적인 데에 종사하는 것만 못할 듯합니다.
끝 부분에 논한 ‘약한 쪽을 부지(扶持)하고 강한 쪽을 억제했다가 함께 지목(指目)을 입었다.’[52]는 말은 내 마음에 매우 석연치 않습니다. 지난날의 일은 형이 회로(懷老=송시열)와 거취(去就)와 논의가 맞지 않은 뒤에 지목이 생겨났던 것이니, 당시에 사류(士類) 조광보(趙光甫=조지겸(趙持謙)) 같은 자도 단지 집사(執事)의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에 와서 병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초연히 스스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시에 형을 따랐던 사류의 마음을 납득시킬 수 없을 듯합니다.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는 내가 실제로 담당하게 되었으니[53]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으나, 실로 집사의 이 마음이 바로 어정쩡한 태도로 미봉하여 잘못을 감추려는 뜻에서 나온 것일까 염려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병의 근원일 듯하므로 감히 혐의를 피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니, 맹성(猛省)하기 바랍니다.”
끝 부분에 논한 ‘약한 쪽을 부지(扶持)하고 강한 쪽을 억제했다가 함께 지목(指目)을 입었다.’[52]는 말은 내 마음에 매우 석연치 않습니다. 지난날의 일은 형이 회로(懷老=송시열)와 거취(去就)와 논의가 맞지 않은 뒤에 지목이 생겨났던 것이니, 당시에 사류(士類) 조광보(趙光甫=조지겸(趙持謙)) 같은 자도 단지 집사(執事)의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에 와서 병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초연히 스스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시에 형을 따랐던 사류의 마음을 납득시킬 수 없을 듯합니다.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는 내가 실제로 담당하게 되었으니[53]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으나, 실로 집사의 이 마음이 바로 어정쩡한 태도로 미봉하여 잘못을 감추려는 뜻에서 나온 것일까 염려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병의 근원일 듯하므로 감히 혐의를 피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니, 맹성(猛省)하기 바랍니다.”
윤증의 형편이 어렵고 흉년까지 겹쳤음을 조정에서 알고 식량을 보내려 하자 받지 않으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받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참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97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제자 박태한이 상을 치르느라 무리하다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제자 민이승도 사망하였다. 윤증은 후계자로 생각하던 제자 3명을 모두 잃었다. 1698년 좌참찬에 제수되었고, 1699년 자급을 올려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제수되었다. 1701년 최석정이 윤증의 '사례사의(四禮私議)'를 보고 국가의 어려움을 질의하여 답하였다. 장희빈이 사사되자 동궁을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703년 박세당이 사망하여 만사와 제문을 지었다. 1707년 동생 윤추가 사망하였다.
1709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다음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까지 18번이나 사양하고 나서야 숙종은 비로소 허락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겨 제수했다. 1710년 나양좌가 사망하여 만사와 제문을 지었고 훗날 묘지명을 지었다. 1711년 조득중이 사망하여 만사와 제문을 지었다. 문하들이 영정을 만들기 위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였으나 윤증이 거절하여, 화사가 밖에서 보며 모사하게 하였고 이 그림이 전하는 것이다. 1712년 부친의 유고 '노서선생유고(魯西先生遺稿)'를 편찬해 간행하였다.[54]
1713년 제자 유상기와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유계와 윤선거가 '가례원류(家禮源流)' 초본을 쓰고, 유계는 초본을 베낀 후 윤선거에게 돌려주었다. 윤선거는 내용을 다듬는데 그치지 않고 고치고, 내용을 첨가하였다. 유계는 출사했기에 이후 저작에 손을 거의 대지 못했고, 윤선거에게도 '나는 거의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는 편지도 보낸 바 있다. 윤선거는 내용이 너무 많다 생각하여 윤증에게 추려서 정리하도록 했었다. 유계의 손자 유상기는 과거 초본을 가지고 이이명에게 부탁하여 유계가 혼자 엮어 송시열과 강론 후 교정한 것이니[55] 간행하라는 어명을 받아 달라고 했다. 어명을 받아낸 유상기는 윤증을 만나 이야기하며 윤선거와 윤증이 수정한 최종본을 간행하기를 청했다. 윤증은 허락하려 하였으나, 나중에 어명을 받는 과정을 알게 되자 그건 문제가 있으니 초본 또한 수미가 갖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간행하라고 했다. 그러자 유상기는 윤선거가 유계가 보유를 부탁한 말을 저버리고 독차지하려 한다고 험한 말을 했다. 윤증은 내력을 밝히며 함께 엮어도 유계의 책인데 무슨 문제냐, 보유를 부탁한 일도 없다고 타일렀으나 유상기는 욕하며 혼자 절교를 선언해버렸다. 윤증도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자 절교는 선언하였으나, “시남의 자손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실로 가련하게 생각할 일이지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여름에 병을 얻었고, 숙종은 어의를 보내고 약재를 하사하였다. 1714년 손자 윤동원[56]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손들을 불러 경계하는 말을 남기고 아들 윤행교에게 “내가 죽은 뒤 조정에서 만약 예장(禮葬) 등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내리거든 너는 반드시 나의 유의(遺意)로써 상소하여 진정(陳情)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정승을 역임한 것을 뜻하는 관함(官銜)을 쓰지 않도록하고 '징사'라고 쓰라 명했다.
윤증 사후 숙종은 승지와 예관을 보냈고, 예장 등 은전을 하사하였으며 예조 좌랑을 통해 제문을 보냈다. 링크 왕세자인 훗날의 경종도 관료를 보내어 조제하였다. 링크 윤행교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은전을 사양하였으나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숙종은 또 따로 5언 절구 2수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첫 시는 '선정신 윤증을 추모하여 지은 것[追惟先正臣尹拯作]'이라는 제목도 지었다.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였고 / 儒林尊道德
소자 또한 일찍이 흠앙했었소 / 小子亦甞欽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었기에 / 平生不識面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진다오 / 沒後恨彌深
살게 해 준 세 분[57] 은혜 똑같다지만 / 生三雖事一
본래부터 경중의 차이 있는 법 / 自有重輕殊
우습구나 논사의 장관[58]으로서 / 可笑論思長
제멋대로 대로[59]를 무함했으니 / 甘心大老誣
소자 또한 일찍이 흠앙했었소 / 小子亦甞欽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었기에 / 平生不識面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진다오 / 沒後恨彌深
살게 해 준 세 분[57] 은혜 똑같다지만 / 生三雖事一
본래부터 경중의 차이 있는 법 / 自有重輕殊
우습구나 논사의 장관[58]으로서 / 可笑論思長
제멋대로 대로[59]를 무함했으니 / 甘心大老誣
조문한 인사는 2,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실록의 졸기는 노론, 소론에서 작성한 다음 2가지 버전이 있다. 숙종실록 숙종보궐정오실록
2.4. 사후
윤증 사후 1715년 유상기는 정호(鄭澔)와 권상하(權尙夏)[60]에게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받아 윤증을 헐뜯는 내용이 포함된 가례원류를 인쇄하여 올리자 숙종은 그 글을 불태우라고 하며 하교하였다.“윤 판부사는 훌륭한 덕을 갖춘 유현으로서 사림의 중망을 받아 왔는바, 내가 평소 존경하고 믿은 것이 어떠했는가. 그런데 부제학 정호가 감히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서 침모(侵侮)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그것만도 이미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지은 《가례원류》 발문 중에는 헐뜯는 말이 낭자하니, 이것이 실로 무슨 마음인가. 더구나 발문을 지은 것이 유현이 별세한 뒤라는 점은 더욱 놀랍다. 정호를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 것이며, 이 발문은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유생들이 상소하여 일의 전말을 알리자 다음 비답을 내리고, 무함하는 상소를 다시 올린 유상기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1716년 '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노론을 회니시비의 승자로 판결한 숙종은 서문을 보존하고 윤증에게 허물이 있으니 선정(先正)의 칭호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1717년에는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1722년(경종 2년)에 회복되었다. 1723년 문성(文成) 시호를 받았다. 1731년 '명재유고(明齋遺稿)'가 간행되었다.
3. 학문
가학으로 성혼-윤황-윤선거-윤증으로 계승되기도 하며, 예학으로는 이이-김장생-김집-윤선거-윤증, 혹은 이이-김장생-송시열-윤증으로도 이어진다. 그리고 퇴계도 율곡과 함께 존중하여 이황과 이이를 함께 우리 동방 학문의 정맥(正脈)으로 인정하고, '퇴계는 동방의 주자이니, 주자를 배우고자하는 사람은 마땅히 퇴계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언급도 있었다. 이황-권시-윤증으로 이어지는 심학도 있다. 그리고 양명학적인 경향도 내재되어 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결국 다양한 요소들의 유학이 섞여 있는 개방적인 유학자였다. 송시열의 주자 절대화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주자학을 바탕에 두고 ‘실(實)’을 중시하는 실학(實學)을 강조하며 허위를 배격하였다.[61] 무실(務實;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하는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닌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신유의서에서도 송시열이 인욕(人欲)을 극복하지 못하여 실심(實心), 실공(實功), 실덕(實德)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북벌 대의를 말로만 외치지 말고 제도 개혁을 통한 실제적인 국방력 강화를 도모하라는 의미이다. 제자 민이승이 육경(六經) 오서(五書) 및 심경 등 여러 서책을 오랫동안 탐구하면서 실심과 실공으로 하자 칭찬하였던 적도 있다. 그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문인은 박태보, 박태한, 민이승, 정제두[62]를 포함하여 100여명에 이른다.
제자들이 저술을 권했을 때는 “책을 저술하여 입언(立言)하는 것을 어찌 후학이 감히 할 바이겠는가. 옛사람의 저술은 반드시 농기구를 만들고 질그릇을 굽는 것과 같이 빠뜨릴 수 없는 경우에 한 것이었다. 지금은 경전(經傳)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에 이르기까지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본디 저술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배우는 자들은 단지 여기에 나아가서 익숙히 읽고 정밀히 생각하여 진정으로 알고 실제로 행하면 될 뿐이다. 만약 여기에 힘쓰지 않고 저술만 일삼아 전현(前賢)들보다 나아지기를 구한다면 이는 무실(務實)의 학문이 아니다.”라고 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유형원의 '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발문(跋文)을 써서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했다. 링크 박세당이 노론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계기가 된 사변록(思辨錄)에 대해서도, 박세당의 제문에 '오래 동안 깊이 침잠하여 얻은 바를 기록하여 이루어진 책이다. 비록 간간이 선현의 취지와 다른 것이 있지만, 공의 의사를 헤아려보건대 어찌 감히 다른 학설을 세우고자 한 것이겠는가? 요컨대 의문나는 것을 따져보고자 한 것이니, 이는 또한 회재(晦齋; 이언적)나 포저(浦渚; 조익) 같은 선정(先正)들께서도 일찍이 하신 일이다.'고 긍정하였다.
예학에도 밝아 '명재의례문답'이 전한다. 당시의 학자 및 제자들의 예에 관한 물음에 윤증이 대답한 글을 항목별로 분류하여 편집 간행한 책이다. 가례도, 통례, 관례, 혼례, 상례, 제례, 국휼중사례, 왕가폐, 예서의의가 수록되었다. 예학에서도 과거의 예설과 학문을 전승하는 데 머물지 않고 ‘무실(務實)의 예학(禮學)’, 즉 주체가 꾸준히 진실을 밝히고 정밀하게 가다듬고 또 실천하는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실학으로서의 예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실의 태도를 예학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4. 평가
아버지 윤선거 밑에서 수학하여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그 밖에도 장인이 되는 권시를 비롯해 김집, 유계, 송준길,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저 중 셋[63]이나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니 그야말로 아버지 윤선거의 위상과 평판을 알 수 있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이후 학문에 뜻을 품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학문으로 송시열의 수제자로 자타 공인하고 있었으나, 1669년 윤선거의 죽음이 그의 위치를 바꿔놓게 된다.윤선거와 송시열의 의견 차이는 사후에 윤증과 송시열이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윤증의 소론과 송시열의 노론은 북벌 등의 명청에 대한 의리문제, 국가 운영 방향과 민생을 위한 제도 개혁에 있어 큰 이견이 있었고, 묘갈명 문제는 그 틀 안에서 '절의를 지켜 자결하지 않은/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생존을 택한 윤선거'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던 문제였던 것이다.
윤증과 송시열이 왕복한 편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송시열의 편지 송자대전 110-111권. 그리고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의 별집 4권은 모두 송시열과 이 시비의 관련자들인 나양좌, 박세채, 박태보와 윤증 사이에 오간 서한들이 정리되어 있다. 명재유고 별집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강한 대립각을 세웠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송논쟁과 각종 환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64] 특히 경신환국 이후 남인의 처리를 두고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서인 강경파에 대응하여 박세채, 남구만, 박세당 등과 함께 서인 온건파를 이끌게 되어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다.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문제가 발발했을 때 상소를 올리거나 정치 당국자나 학인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5. 여담
- 주자학이 주이기는 하나 실심(實心)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고, 그 문하에서 양명학을 받아들인 양득중과 정제두가 나와 양명학을 수용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제두가 양명학에 몰입한 것을 알고 그를 아끼는 입장에서 주자학적 관점으로 정제두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실학에 대해서는 후했으며 특히 유형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 윤증의 후손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에서 올리는 차례상이 상상을 초월하게 검소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 윤증이 후손들에게 '제상에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과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마라', '훗날 못 사는 후손이 나오면 제사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테니 간단히 하라'는 당부를 남겨서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마을 사람들에게 폐가 된다고[65] 양잠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2018년 초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명재 윤증'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 위의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탈모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탈모인 사람들이 있었고 상투를 틀 때는 이렇게 윤증처럼 주변 머리를 길러서 상투를 틀었던 것으로 보인다.
- 박명수와 닮았다고 화제가 됐었다.
[1]
권시(權諰)의 장녀.
선원록에 이름이 남아있다.
[2]
호는 농은(農隱)이다. 부친 아래에서 형과 함께 가학을 계승한다. 1668년 문과 초시에 급제하였으나 전시에는 나가지 않았다. 윤증처럼 출사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1681년 첫 출사 후 1706년 사헌부 장령까지 역임했다. 아들 윤가교는 나양좌의 장녀와 혼인하였다.
[3]
1살 위인 누나에게는 족보를 기록한 소첩을 주어 혹시라도 헤어지게 되면 이것으로 징표를 삼으라고 했다. 누이는 헤어졌다가 결국 의주에서 참판 이시매(李時楳)를 만나 속환할 수 있었다.
[4]
윤선거는 엄한 스승이어서 두 아들과 손자들의 학업을 감독, 지도했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 읽어야 할 책의 목록과 그 책의 기본적인 성격을 일러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매일의 공부 과정을 기록한 일지를 작성하여 보고하라고도 했다.
[5]
윤선거처럼 김집의 문인이다. 김집 사후 만사가 전한다.
링크
[6]
윤선거의 넷째형.
윤석열의 직계조상이다.
[7]
윤원거 사후 윤문거가 그를 '징사(徵士)'( 재야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나라의 부름을 받아도 출사하지 않는 선비)라고 했는데 윤증은 이를 칭송했다. 윤증 자신도 훗날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에 징사라고 쓰도록 유훈을 남긴다.
[8]
유계의 아들 유명윤 형제는 윤선거에게 배웠다.
[9]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간으로 하여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에서 유관한 것을 채록하여 주석을 붙여 원(源)으로 삼고 주희 이후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모아 유(流)로 삼아 편찬한 책이다.
[10]
권시는 남인이었으나 서인계인 예학의 대가인 박지계(朴知誡, 1573 ~ 1635)의 문인이다.
[11]
윤선거는 아들에게 송시열의 뛰어남도 이야기하였으나, 선(善)을 수용하는 도량이 넓지 못한 병통도 있음을 알라고 했다.
[12]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유계와 함께 김집의 제자 5인방 중 한 명이다.
[13]
문과 급제 후 이조참의, 대사헌, 승지, 부제학을 역임했다. 박세당의 조카 박태소(朴泰素)의 딸과 혼인하였고, 부인 사별 후 1680년 송기후(宋基厚)의 딸과 재혼했다.
[14]
아들에게도 윤증은 본인이 받은 교육 그대로 엄격한 지도를 하였다. 17세의 윤행교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모쪼록 어른을 가까이하고 따라서 날마다 가르침을 받고 만나는 일마다 스스로 경계하여 집에 있을 때처럼 어린 아이로 자처하지 말거라. 일과를 정해서 날마다 읽은 것과 익힌 것을 기록하여 보내도록 해라. 때때로 누나를 찾아가는 것 외에는 출입하여 또래들과 지내지 말고, 질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거라. 모든 일에 삼가고 공경하며 신칙하도록 해라.'
[15]
이후에도 지속되는 벼슬 제수에도 윤증은 단 한번도 출사하지 않았다. 1665년 공조좌랑, 1667년 전라도사, 1668년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
박세당은 사돈이기도 하다. 윤증의 누이가 박세당의 형 박세후와 혼인하였다.
[17]
남인이던
윤휴의 조문도 받았다. 윤휴는 그러나 뒤에 보내온 제문에서 윤선거를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며 뒤통수를 쳐 윤증을 탄식하게 만들며 절교를 선언하게 된다.
[18]
자신의 학문의 근원을 율곡학에 두는 것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절차로 해석된다.
[19]
송시열과 사이가 틀어진 것과 달리 송준길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윤증의 제문
[20]
박세채 작성
[21]
본인 작성
[22]
윤선거가 사망 전 송시열에게 작성한 편지로 기유년에 작성한 것이어서 기유의서라고 한다. 보내려고 하였으나 송시열이 서울로 떠나 보내지 않았었다. 주자학만 맹신하는 송시열의 학문 태도와 독선적인 정국 운영을 비판하고, 허목과 윤휴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윤휴 등 남인을 인정하고 등용하라는 내용이다.
[23]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 들어갈 글
[24]
윤선거는 생전에 송시열이 사심(私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큰 병통으로 여겼다.
[25]
윤증이 윤휴의 조문을 받은 것도 불쾌해 했다.
[26]
진실한 현석[66]이(允矣玄石) 극도로 잘 선양하였기에(極其揄揚),
나는 따로 짓지 않고 그대로 따라(我述不作), 이렇게 묘갈명을 게시하노라(揭此銘章)
[27]
당시 전해지는 송시열의 글이나 전해지는 말들이 좋지 않았기에 우려한 윤증이 보낸 것이다. 상세 내용은 명재유고 별집에 있다.
[28]
“문하의 글은 한 군데는 ‘덕을 형상(形狀)하는 글을 쓰려 하니 더욱 망연(茫然)하여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고, 한 군데는 ‘이것은 진심으로 좋아하고 성심으로 신복(信服)한 화숙(和叔)의 말인데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 아부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 가서는 ‘나는 화숙을 태산 교악(泰山喬嶽)처럼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리누르고 추어올리고 이랬다저랬다 말을 뒤집는 즈음에 그 설(說)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승복하지 않으니, 말로 해명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29]
“이름은 비록 사생(師生) 관계지만 성신(誠信)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30]
“본래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데다 성실한 마음으로 실천하여 크게 사론(士論)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더욱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경연에 출입하게 하소서.”
[31]
나양좌의 매제
[32]
송시열의 문인
[33]
젊은 사류들이 송시열에게 많은 실망을 표했다.
[34]
“두 대에 걸쳐 사우(師友)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서 의리상 끝내 침묵할 수 없다.” - 부친과는 벗이었고, 자신과는 스승과 제자의 사이이다.
[35]
장인 권시의 손자이다. 송시열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36]
'강도의 포로는 서원에 향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
[37]
외척 3가문의 영향을 막을 것.
김석주,
김만기,
민유중을 가리킨다.
[38]
박세채의 사위이기도 하다.
[39]
3년 후 1687년에 올리게 된다.
[40]
자신이 송시열에게 성심을 다해 충고를 해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다는 말
[41]
=김익희, 병자호란 당시 분신으로 순절한 김익겸의 형이다. 김익겸은 윤선거와 함께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면 함께 순절하기로 했고 실행하였다. 김익희는 김익겸의 분신이 윤선거의 선동으로 인한 것이고, 윤선거 아내의 자결도 윤선거가 다그친 때문이라고 하여 그를 잔인한 사람(忍人)이라고 했다고 한다. 송시열이 이희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익희의 이 말을 거론했던 바가 있다. 말의 사실 여부를 떠나 윤증은 송시열이 악의를 가지고 근거 없는 말을 퍼트렸다고 의심하고 있다.
[42]
퇴계 문하의 이덕홍(李德弘)이
진덕수가 지은 '심경(心經)'의 난해한 구절을 퇴계에게 질정한 강의록이었는데, 송시열과 박세채가 숙종의 명을 받고 이를 정식으로 교정, 편찬하였다.
[43]
권상하는 1703년 9월 이세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를 기록하며 자신의 견해는 따로 없이 송시열의 답변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최창대[67]는 윤증과 박세채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비판하며 이세필에 우호적인 논평을 남겼다.
[44]
참고: 이선열, 17세기 율곡학파의 인심도심 논변 - 이세필, 송시열, 윤증의 '氣用事' 논변을 중심으로-
[45]
윤증은 편지를 보내 굳이 변론하지도 따지지도 말자고 하며 공의(公議)가 저절로 안정되기를 기다리자고 했다.
[46]
이단상의 아들. 회니시비 당시 소론과 대립하였다.
[47]
박태보는 숙부 박세후에게 입양되었는데, 박세후는 윤선거의 사위로 윤증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곧 윤증의 조카이다.
[48]
송시열이 제주에서 올라오던 것을 가리킨다.
[49]
정묘항소와 이후 송시열의 모습
[50]
윗 문단의 윤선거를 비하한 내용이 포함된 편지
[51]
박세후와 혼인했던 여동생이고, 박태보의 양모이기도 하다.
[52]
박세채가 당론 타파를 논하며 노소 분쟁에 대해 힘이 약한 소론을 편드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자신이 소론이라는 지목을 받았다고 한 것.
[53]
윤증이 소론의 영수로 활동하게 된 것
[54]
일찍 내었다가 사람들에게 훼손당할 것을 우려하여 수십년 미루었다.
[55]
윤선거의 공저자 역할을 뺐다.
[56]
윤행교의 아들
[57]
부친, 스승, 임금
[58]
윤증을 비난했던 정호를 가리킨다.
[59]
윤증
[60]
권상하는 여기에서 《가례원류》가 유계의 저작이며 윤선거는 다른 사우(師友)들과 함께 다소간 보조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윤증을 극단적인 말로 폄하하였다.
[61]
흔히 생각하는 조선 후기의 실학과는 다른 것이다. 다만 완전히 다르다기 보다는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학문으로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윤증과 가까웠던 박세당은 실학자로 볼 수도 있다.
[62]
직접 사제 관계를 맺은 것 같지는 않지만 서로를 스승과 제자로 여겼다. 조선 사상사의 가장 뛰어난
양명학자로 평가된다. 정제두의 부인과 윤증이 6촌으로 인척이기도 했다. 정제두가 양명학에 빠진 것을 알고 주자학적 관점에서 정제두의 논리를 비판하기도 했다. 양명학을 비판하면서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였다. 윤증 사망시 강화도에 있던 정제두는 늦게야 그 소식을 알게 되어 장례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뒤에 윤행교에게 편지로 비통함을 표현하였다.
[63]
김집, 송준길, 송시열
[64]
그의 생애 동안에 예송논쟁과
숙종 시대의 환국이 모두 일어났다.
[65]
양반 집안에서
양잠을 한답시고 백성들의
뽕나무잎을 수탈해가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