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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6년
7월 2일 (음력 인조 24년 5월 20일) |
사망 |
1715년
12월 6일 (향년 69세) (음력 숙종 41년 11월 11일) |
시호 | 문정(文貞) |
본관 | 전주 최씨 |
자 | 여시(汝時), 여화(汝和) |
호 | 존와(存窩), 명곡(明谷) |
부모 |
부친 - 최후량(崔後亮, 1616 ~ 1693) 모친 - 광주 안씨 안중임(安仲任, 1621 ~ 1673)[1]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차남
|
부인 | 경주 이씨 - 이경억(李慶億)의 딸 |
자녀 |
장남 - 최창대(崔昌大, 1669 ~ 1720) 장녀 - 전주 이씨 이성휘(李聖輝)의 처 차녀 - 경주 이씨 이경좌(李景佐)의 처 |
[clearfix]
1. 개요
조선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였던 정치가, 유학자, 문장가, 음운학자, 수학자.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조부 최명길처럼 명분에만 집착하지 않는 현실 정치가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토지, 세금, 군역 등 백성의 삶을 신경 쓰는 것 외에도 인재 등용을 위해 문벌, 지역, 서얼 차별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노론과도 함께 가고자 하였다.
2. 생애
1646년 5월 (인조 24년) 충북 진천에서 최후량[2]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석만(錫萬)이었다.남구만, 박세채의 제자이며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났다. 1662년 생원시 장원하였고 이경억(李慶億)[3]의 딸 경주 이씨와 혼인하였다. 1666년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4] 1669년 아들 최창대가 태어났다. 1671년(현종 12년, 26세) 문과 급제 후 관직에 나갔다. 1678년 관직 생활 초기 남인에게 밀려난 송시열과 김수항을 변론하다가 파직 당하기도 하였으나[5],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승진을 거듭하며 수찬, 교리, 응교, 동부승지, 승지를 거쳐 1684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1683년 부모 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예기유편(禮記類編)'의 편찬을 시작하였고, 1692년에서 1693년 사이에 완료하였다.[6]
1685년 신유의서의 공개로 회니시비가 조정에서 불거졌는데, 윤증를 옹호하며 영의정 김수항 등의 비판을 받고 링크 파직되었다가 부제학으로 돌아왔다. 호조참판, 이조참판을 거쳐 1687년 다시 부제학이던 때 노소 대립이 극심해지며 나양좌를 소두로 한 윤선거를 옹호하는 상소가 다시 올라왔고,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링크
1689년 이조참판 역임 중 기사환국이 발생하며 안동부사에 보임되어 외직으로 나간다.[7] 1693년 부친 최후량이 사망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중앙으로 돌아와 판윤, 제학을 거쳐 1696년 대사헌에 올랐으며 경기, 호서 지방의 식량난을 목격하고 진휼책을 올려 허락받았다. 링크 이후 이조판서, 대제학이 되었고, 줄기차게 국가 개혁을 위한 시무책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1697년에는 서얼이던 이현(李礥)을 호조좌랑에 추천하여 결국 임명되었다. 링크[8][9][10] 1697년 초에도 여러 도의 기민(飢民; 굶주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대책을 올려 실행하였다. 3월에 우의정이 되었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링크
1698년 2월 왜관의 왜인의 수가 늘자 경계를 요하는 말을 올렸고, 링크, 국내의 기근으로 청나라와 중강(中江)에서의 쌀 교역 가격에 대해 분쟁이 있자 대안을 제시하였다. 링크 이후에도 문제는 지속되었고 청에서 이부시랑 도대(陶垈)가 쌀 1만석을 가져와 최석정이 중강에서 만났다. 당시 도대가 숙종에게 바친 글에서 '권제(眷弟) 도대(陶垈)는 머리를 조아려 절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고, 링크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바친 것을 불충으로 양사에서 들고 일어나 최석정은 파직되었다. 최석정 본인도 그 글에 당연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현실적으로 거부하지 못했음을 숙종에게 아뢰었고 숙종도 이해하였으나 양사의 주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링크 파직되었으나 곧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어,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복하고 복위하는데 기여하였다. 4월에는 탕평을 위해 추천한 오시복, 이서우, 권유, 이봉징과 관련하여 김창협, 김창흡 형제와 갈등이 발생하였다. 링크 10월에는 숙종의 특별 하유로 출사를 다시 권유받아 조정에 다시 나왔다. 링크 1699년 3월 좌의정이 되었다. 4월에 과거제, 양전, 군 등에 대한 현재 국가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포함한 차자를 바쳤다. 링크 5월에는 건강이 좋지 않던 세자(훗날의 경종)가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에서 건강을 회복하자, 숙종이 기뻐하며 예연지당(蘂淵之堂)을 집경당(集慶堂)으로 이름을 바꾸며 최석정에게 명하여 집경당기(集慶堂記)를 지어 올리게 하여 작성 후 상을 받았고 링크, 다시 한 번 과거·균전·양역·군역 등의 폐단에 대해 아뢰며 해결을 촉구하였다. 링크
1701년 6월 (숙종 27년) 영의정이 되었다. 링크 이후에도 변함 없이 탕평론을 주장하였다.[11] 또한 개인적으로는 조부 최명길의 신원과 명예 회복을 위해 신도비 건립을 추진한다. 8월 복위되었던 인현왕후가 사망하였고, 9월 숙빈 최씨의 고변으로 무고의 옥이 발생하였다.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보호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장희빈의 제거가 결정되었고 위태로워진 세자의 보호를 위한 상소도 올린다. 링크 중도 부처당했으나, 숙종은 1년 만에 방송하고 출사하도록 하여 1703년 2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본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시행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그 해결이 되지 않으면 출사가 도움될 것 같지 않다며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2] 5월에는 세자의 외숙부 장희재를 비호하였다고 하여 노론의 탄핵으로 사직한다. 1703년에는 또한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싼 노소간의 분쟁도 발생하였다. 1706년에는 소론 유생인 임부, 남인 유생인 이잠[13]이 각각 노론이 세자를 해치려한다는 상소를 각각 올리며 옥사가 발생하였다. 정국은 노론에 유리하게 흘렀고, 노론에서는 임부의 옥사 때 책임을 맡았던 소론이 조작했다며 압박하며 노소 갈등은 더욱 악화된다. 그러나 숙종은 최석정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였고, 최석정은 수년간 영의정을 독점하며 국정을 주도한다.[14] 1707년 9월에는 정몽주 후손의 녹용, 양녕대군의 묘호를 정하고 사당 조성을 하자는 최석정의 청이 받아들여져 시행된다. 링크
1708년 3월 경연에서 '절작통편(節酌通編)[15]의 강독 중 소북 계열의 임수간이 제왕의 방법에는 절실하지 못하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소론 이인엽이 이를 편들자 노론의 이관명이 주자를 망령되게 논평한다며 대놓고 반대하는 일이 있었다. 링크 숙종은 3정승의 자문을 받았는데, 좌의정 이유와 우의정 서종태는 그대로 강하기를 청했으나, 최석정의 의견에 따라 일부는 진강하지 않도록 결정한다. 링크 1709년 1월 동부승지 이관명이 '예기유편'의 문제를 비판하며 최석정이 재주를 뽐내려는 오만의 결과가 성인을 모함하고 현인을 업신여겼다며, 박세당의 사변록에 견주며 배척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최석정은 이관명이 제기한 문제의 조목마다 해명하며 면직해달라는 상고를 올리고 숙종은 불안해하지 말라고 유시한다. 링크 그러나 이후에도 정쟁은 악화되며 성균관 노론 유생들 및 지방 유생들의 상소도 빗발쳤다. 최석정도 자신의 입장을 꾸준히 밝히며 사직을 요청했으나 숙종의 신임은 변하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709년(숙종 35년) 10월에 8번째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11월부터 숙종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며 회복이 더디자 숙종은 과민해졌으며, 다음해 1월까지 나아지지 않자 도제조를 겸하고 있던 최석정을 문외출송 시켜버린다. 링크 기회를 잡은 노론은 파직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려 결국 최석정은 파직되었다. 노론은 그것으로 부족하다 판단하고 예기유편의 판본을 헐어버리고 삭탈관직하도록 아뢰어 숙종의 허락까지 받아낸다. 링크 1710년 4월에는 예기유편을 예조에서 소각해버렸다.[16]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최석정은 판중추부사로 진천에서 말년을 보낸다. 1711년 7월 최석정이 시골에서 병이 중하다는 말에 숙종은 어의를 보냈고, 링크 1712년 부인 경주 이씨가 사망하여 청주에서 장사를 지낸다. 1714년 윤증 사망 후 최석정이 지은 제문이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논란이 일었고, 링크 최석정도 숙종에게 사직소를 올렸다. 링크 1715년 3월에도 송시열을 비난했다고 권상하의 탄핵을 받았고, 7월에 한양 근교의 미사(渼沙)로 왔고 11월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숙종은 “지극한 슬픔으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었다.”란 반응을 보였다. 졸기는 노론이 주도하여 쓴 숙종실록에는 인격 모독 등이 포함되어 상당히 박하게 쓰여있고 링크, 소론이 주도하여 쓴 숙종실록보궐정오에는 아주 좋게 쓰여 있다. 링크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34권 15책이 전한다. 아들 최창대가 시문을 수습해 편집하고 간행하려 하였으나, 최석정 사망 5년 후 1720년 본인이 사망하며 최석정의 문인인 조태억에게 간행을 부탁하였으며, 다음 해 조태억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간행하였다.
연보는 다음 링크 참조. 링크
3. 정치가 외의 면모
33세이던 1678년 홍문관 교리 시절 경세정운(經世正韻)을 저술하였고, 이후에도 양명학의 거장 정제두와 토론하며 60세인 1705년까지도 지속적인 보완 노력을 하였다. 주역, 특히 소옹의 상수학을 응용하여 훈민정음을 설명하였다. 세종과 훈민정음을 극찬하였으며,[17] 조선 문명을 중화 문명을 하나의 시야에서 포착하려 했다. 조선 후기 정음학(正音學)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18]1700년 박율이 편찬한 산학원본(算學原本)의 서문을 작성했다. 말년에 정치에서 물러나 은거할 때 구수략을 저술했다. 갑을병정 4편으로 구성되었고, 갑을병 3편은 청나라를 통해 입수된 서양 수학을 정리하였고, 정은 본인이 찾아낸 마방진과 라틴 방진을 기술하였다. 첫째로 9x9정사각형에 3x3 마방진[19] 9개가 있는 마방진이 있다. 둘째로 1부터 n까지 한줄에 한개씩 쓴 라틴 방진을 가로 세로로 겹친 그레코 라틴 방진을 세계 최초로 연구하였다. 9x9는 찾고 10x10을 찾는데는 실패하였다. 그리고 육각형 거북이 등껍질처럼 숫자를 배열하여 한 육각형에 오는 숫자의 합이 같도록 한 지수귀문도를 창시하였다.
명곡집(明谷集)에 실려 있는 이세구(李世龜)[20]와 교환한 24편의 서신 기록이 남아있다.
몹시 풍부한 장서를 수집하였는데, 조선 후기 여타 경화세족 장서가들과는 달리 소장 장서에 장서인을 한 번도 찍은 적이 없다 한다. 남에게 책을 빌려주고도 돌려받으려 찾는 법이 없었으며, 늘 자식과 아우들에게 "서적은 공공의 물건이니 개인이 사사롭게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마침 책을 모을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책이 나에게 모은 것이다"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문예가의 면모가 엿보인다.[21]
4. 기타
상단에 있는 최석정 초상은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중이며 우리나라 보물 1936호이다. 수학자로서의 업적으로 과기부와 대한수학회가 '올해의 최석정상'을 2021년부터 수여하고 있다.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최명길, 최석정, 최창대의 묘가 함께 있다. 최석정의 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169호이다.[22]
5. 가족 관계
최석정의 형은 최석진(崔錫晉, 1640 ~ 1690)이고 진사시 급제 후 공조 정랑까지 지냈다. 동생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 1654 ~ 1724)은 이조판서, 좌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거물이다.최석정의 아들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1669 ~ 1720)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대사성, 병조참의, 공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50세에 개성 유수 임명 특지를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후 사망하였다. 친자가 없어 최수신(崔守身)을 양자로 들였다. 실록 졸기 연보 링크 오상[23]의 손녀이고, 오두인[24]의 딸인 해주 오씨와 혼인하였다.[25] 당색을 초월하여 노론인 김창협[26], 김창흡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27][28] 부친과 김창협 형제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기 전인 1692년에 김창협에게 편지와 동유시 한 편을 보냈는데, 그에 대한 김창협의 답신이 전한다. 시와 공부에 대한 김창협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링크 부친 최석정 초상과 함께 최창대의 초상도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집으로 '곤륜집(昆侖集)'이 전한다.[29]
[1]
덕흥대원군의 외고손녀.
덕흥대원군 → 이명순 → 안응형 → 안헌징 → 안중임
[2]
최명길의 양자이다. 최명길은 본처와 자식이 없어 동생 최혜길의 차남인 최후량이 양자로 입적되었다. 최명길은 본처가 사망하고 후처와 혼인 후 친아들 최후상을 보았는데, 양자로 입적되어 있던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자신의 후사로 삼아 가산을 상속시켰다. '이미 아비와 자식이 정해지면 저절로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으므로 바꿀 수 없다.'면서. 최후상도 자식을 보지 못했고, 최석정이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3]
현종대의 이조판서 이경휘(李慶徽, 1617~1669), 좌의정 이경억(李慶億, 1620~1673) 형제는 선조, 광해군 시기의 군 전문가인 형조판서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의 아들이다. 이경휘는 송시열(宋時烈) 및 송준길(宋浚吉)과 가깝게 교유하고, 서인(西人)의 예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경억은 1659년(효종 즉위년) 기해예송(己亥禮訟) 당시 앞장서서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적극 지지하고 남인 윤선도(尹善道)의 3년설(三年說)을 맹렬히 배척하였다.
[4]
당시 과거 공부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조부 최명길과 친했던
나만갑의 아들 나성두의 집에 머물렀다는 본인의 언급이 있다. 최석정은 나성두의 아들
나양좌와 친구이다. '내가 약관(弱冠)에 벗과 같이 명례방(明禮坊)에 있는 해주 목사(海州牧使) 나공(羅公, 나성두(羅星斗))의 집에 가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의 선조 지천공(遲川公=최명길)은 구포공(鷗浦公=나만갑)과 교분이 매우 친밀하였고 나는 공과 문무(文武)의 길은 다르지만 실로 3대 동안 서로 왕래하는 의리가 있었다.' -
나홍좌 묘비명
[5]
부친의 임소를 따라 진천으로 갔다.
[6]
왕명으로 2차례 간행되었다. 국왕에게 강의하기 위해 저술하였으며, 단순한 고전으로서의 예기가 아닌 현실적인 실천을 위한 노력이었다.
[7]
당시 부친의 몸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8]
최석정은 상소에서 조부의 과거 상소문을 인용하며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9]
조부 최명길은 인조 시절 1625년, 1633년 2차례 서얼 허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던 바 있다. 특히 1633년에는 이조판서로 문과 전형을 맡았던 해에 인사에서 서출이었던 5명이 형조, 공조, 호조좌랑에 임명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서얼은 과거에 급제해도 정치적 영향력이나 결정권이 없는 실무형 관직 서너 자리에만 임명될 수 밖에 없었다.
[10]
이들의 노력에 더해 서얼들의 집단 연명 상소도 있었고, 서얼 허통에 의지를 가진 훗날의 영조와 정조의 조치에 의해 요직은 물론 청직까지 임명되게 된다. 1772년(영조 48년)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선전관에 임명하는 선례가 남았고, 1777년(정조 1년)에는 서얼의 관계 진출 합법화하는 조항을 직접 제정하여 당상관인 호조, 형조, 공조참의 등 요직에 취임할 법적 근거까지 마련되게 된다. - 참조: 박경남, 최명길 최석정의 서얼허통 상소와 지식인의 역할
[11]
단순한 남인 등용 및 노론, 소론이 함께 가자는 탕평이 아닌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한 새로운 국가 체계를 만들려고 하였다. 1698년 수교집록, 1706년 전록통고의 법전 정비를 이뤄낸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12]
노론 사관은 매우 좋지 않은 평을 하고 있다. "최석정은 사람됨이 가볍고 얕아서 공보(公輔)의 그릇이 못되며, 재주가 엉성하고 지식이 짧아서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는데도, 한갓 문자(文字)의 하찮은 재주를 가지고 망령되게 법제(法制)를 변경하려고 하여, 전후에 진달한 바가 모두 실행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이 항상 한스러워하였다. 임금이 돈돈하게 권하고 놓지 아니함을 보고서 다시 나아가기를 바라고 일을 담당할 뜻이 있었으므로, 그 상소의 말이 이와 같았다".
링크
[13]
이익의 배다른 형이자
이용휴의 숙부이다.
[14]
중간중간 체직된 시기도 있었다. 1707년 좌의정
김창집이 최석정을 배척하며 체직되고, 1708년에는 권익평의 상소로 사직하기도 했다.
[15]
송시열이 퇴계의 주자서절요, 정경세의 주문작해를 합하고 주자의 글을 추가해 편찬한 책이다.
[16]
총 1045책이었다고 한다. 예기유편의 훼판(毁板), 화서(火書)는 주자학에만 고착되어 사상적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후기 조선의 모습을 상징한다. - 참고: 양기정, 禮記類編의 毁板과 火書에 관한 연구
[17]
'영원한 인문의 규범을 드리운 그 공이 중국 문명의 개창자인 三皇에 못지 않다.'
[18]
참고 - 김동준, 崔錫鼎의 語文觀과 文明認識
[19]
애석하게도 아기방진은 양 대각선의 합이 모두 같지는 않다.
[20]
1649~170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歷史)·산학(算學) 등에 걸쳐 박통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증손이자 영조 때 영의정
이광좌의 아버지이다.
[21]
유만주의 일기 흠영에 이런 대목이 쓰여있다.
[22]
동생 최석항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에 있으며, 최석항의 친부 최후량과 형 최석진의 묘가 근처에 있다. 양부 최후상의 묘도 호평동 옆의 평내동에 위치한다.
[23]
이조판서
[24]
1624 ~ 1689, 형조판서 역임. 현종의 사돈이다. 셋째 아들 오태주가 현종의 3녀
명안공주(숙종의 동생)와 혼인하였다. 넷째 아들 오진주는 김창협의 딸과 혼인하였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박태보와 함께 반대하다가 국문을 받고 유배가던 중 사망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
[25]
오두인의 다른 딸은
김수항의 조카(형 김수흥의 아들)인 김창열과 혼인하였다.
[26]
인척이다. 김창협의 사위 오진주와 최창대의 배우자인 해주 오씨가 남매 지간.
[27]
최창대의 제자 신유한이 지은 제문의 내용. '내가 예전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시(詩)는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 어려운데 근세에 오직 최아무개만이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라고 한 말을 들었다. 그의 아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같은 경우는 또 말하기를 “최 아무개의 글 가운데 홍유인애사(洪有人哀辭)와 같은 것은 한유(韓愈)의 구양생애사(歐陽生哀辭) 이후에 비로소 볼 수 있는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안목을 갖춘 이들의 칭찬이 이와 같았다.'
[28]
노소 분기 전 김창협 형제와 함께
이단상의 제자인 창계 임영과 가문 사이의 친분도 찾아볼 수 있다. 임영과 최석정 사이의 편지
링크, 임영과 최창대가 주고 받은 시도 전하며
링크, 1696년 임영 사후 최석정의 제문, 최석항과 최창대의 만시도 함께 전하고 있다.
링크
[29]
양자 최수신이 이태좌,
이광좌, 이하곤의 도움을 받아 1725년에 간행하였다. 초고는 대부분 산실되었다고 하며, 별저가 따로 있었던 듯 하나 현존하지는 않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