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00:45:17

심의겸

서인
西人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사림파 [[틀:훈구파|{{{#000,#ddd ▲ 훈구파}}}]]
선조
(1575 ~ 1608)
박순 윤두수 고경명 성혼 심의겸
이이 정철 황윤길 조헌 송상현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오윤겸 신흠 심지원 이경석 정태화
청서 공서
노서 소서
김장생 김상헌 김류 신경진 이귀
김집 이식 김자점 이시백 최명길
효종 - 현종
(1649 ~ 1674)
청서 소서 노서
산당 한당 낙당 원당
송준길 송시열 김육 김자점 원두표
숙종
(1674 ~ 1720)
강경파 온건파
송시열 민유중 김수항 윤증 남구만
김만기 김석주 김만중 박세채 최석정
노론 소론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沈義謙
출생 1535년( 중종 30년)
사망 1587년 10월 8일 (향년 51 ~ 52세)
(음력 선조 20년 9월 7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1],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손재(巽齋).

청릉부원군 심강의 차남이며 김효원과의 대립으로 붕당이 만들어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남동생이다. 선조에게 있어서는 법적 외삼촌이 된다.[2]

2. 생애

청릉부원군 심강과 어머니 전주 이씨 완산부부인 이씨 사이의 8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후 9촌 숙부(삼종숙) 심홍(沈泓)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55년(명종 10) 식년시 진사시에 3등 28위로 급제하고 # 1562년(명종 17)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했다. # 이량이 젊은 사림들을 자신의 권력욕으로 제거하려 하자 막기 위해 노력하고 선비로서의 명망이 높아졌다.[3]

1572년(선조 5)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에 발탁되려고 했으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서 기숙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1574년(선조 7)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고 이후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이 추천되었으나 김효원은 '직분(이조정랑)이 척신의 것이 될 수 없다'고[4] 반대[5][6]하면서 둘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심의겸의 집이 궁궐에서 바라본 기준으로 도성 ' 서쪽 정릉방'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은 도성 ' 동쪽 낙산 및 건천동'에 있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으로 갈라지며 당쟁의 시초가 되었다. 그야말로 붕당 정치의 시초를 제공한 인물이 된 셈이다.

이후 1584년에 이이가 죽자 서인은 동인의 공격으로 전원 다 유배를 가게되는데 이때 심의겸은 유배간지 얼마 안되어 1587년(선조 20년) 5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인종, 명종실록과 선조실록에서 등장한다. 인종, 명종실록에선 별다른 비중은 없고 심씨일가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때 심의겸이 “내 이름을 기억해둬. 다음 제 10권의 중요 인물이거든.”이라 하는데 이건 아마 붕당정치 때문에 그런것으로 추정된다. 이량이 심씨일가를 박살낸다는 계획이 심강에게 전해지자 이에 위험을 느낀 심의겸은 이량을 탄핵한다. 이후 이량이 유배되면서 인종, 명종실록에서의 등장은 끝나고 선조실록에선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임명되는걸 반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에 김효원은 심의겸을 복수할 기회를 넘보고 있었는데 이때 이조전랑 후보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자 김효원은 보란듯이 이조전랑 후임에 심충겸을 임명할수 없다며 보란듯이 반대하자 심의겸도 화가 나서는 김효원과 대립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있어서 동인이라 불리고 심의겸의 집이 한양 서쪽에 있어서 서인으로 불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후 이이가 1584년에 병으로 죽자 동인은 이이, 성혼, 정철을 서인으로 몰아세우며 이들을 탄핵하자 선조는 서인 세력을 대거 유배 보내버린다. 이때 심의겸은 1587년(선조 20년) 9월 2일에 53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등장종료.


[1] 안효공파 청양군 의겸파의 파조이다. [2] 선조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3] 공교롭게도 이량은 자신의 외삼촌이다. 외삼촌이 제2의 윤원형으로 득세를 하고 실권을 휘두르려 하자 외삼촌임에도 불구하고 견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4] 1574년까지만 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 반대 사유는 나름 명분이 있었다. [5] 자신이 이조정랑 자리에 발탁되려던 것을 반대했던 심의겸에게 결코 좋은 감정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6] 문제는 김효원이 반대한 시점도 영 좋지 못했던게 바로 심의겸의 누나인 대비 인순왕후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되어서 국상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심의겸 입장에서는 누나 인순왕후의 사망으로 외척으로써의 힘을 잃은 상황에서 정작 김효원이 국상중인데도 동생 심충겸을 외척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니 심의겸 입장에서도 이런 김효원에게 악감정이 생기는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