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0:25:23

한당(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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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역사
3.1. 대동법 추진3.2. 산당과의 갈등3.3. 노론으로 통합
4. 주요 인물

1. 개요

인조반정 후 형성된 공서 중 실무 관료진 중심이었던 소서가 발전되어 형성되었다.

2. 상세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인조조 말년 서인 낙당(原黨)· 원당· 산당·한당(漢黨) 등으로 분화되었다. 형성된 이유는 소현세자 사망 뒤 동생인 봉림대군[1]이 세자가 되고,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역모에 연계되고 사사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한당의 유래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한당의 한은 한강을 뜻하며 한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도 있다. 한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은 구성원들이 실무 관료진이자 역사적으로 왕실과 혼인관계도 맺었다. 대동법 등 국정 현안마다 명분보단 현실을 중요시하는 현실론자들이였다. 인조조 때는 김류가 중심이었으나, 김류가 인조 25년에 사망하면서 김육으로 넘어왔고, 대체적으론 효종 때의 명재상 김육과 그의 가족[2], 그리고 역시 인척 신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관료 지향적 성향이 매우 강한 집단이었다.

이후 산당과 함께 노론으로 이어진다.

3. 역사

한당은 산당보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지만, 산당과 손을 잡으려고 하면서도 그들의 목적 중 하나인 강빈 신원 때문에 견제하려고도 했던 효종의 발탁에 한당이 정책은 일부 시행될 수 있었다. 산당의 진출은 시대의 흐름이였으나, 모두 받으면 왕권이 땅에 떨어지기에 한당과 제휴를 맺었다. 특히, 산당은 김육과 적대관계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한당의 정책들을 산당이 반대했기 때문.[3] 김육과 적대관계였던 송시열은, 그 대가를 숙종 때 치르게 된다.

3.1. 대동법 추진

대동법은 공물 대신 을 바치게 하는 납세제도로 1659년 서인의 종주로 받들여지는 율곡 이이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했고, 양란으로 토지가 황폐해지면서 세입이 감소되자 1608년엔 이원익과 한백겸이 주청하여 방납 문제가 가장 심했던 경기도부터 실시되었다. 이후 1624년엔 강원도도로 확장되었으며 효종 때 김육 충청도까지 확대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그의 대동법 시행 집념은 대단해서, 정승 재위 기간에 호서와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려했고, 스스로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 이야기만 꺼내니 사람들이 웃을 만도 하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매우 매진했다.

1649년 충청도 대동법 실행을 주장했는데 대다수 조신들은 반대 의견을 표출했다. 충청도 출신인 김집 역시 "체제가 먼저 개선되고 안정되어야 한다"며 반대했다. 대동법을 반대하는 관료층의 반발을 억눌러야 했고, 성공하기 위해선 왕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이것의 영향으로 김집 등 산당과 갈등, 더 나아가선 대립을 낳았다. 산당 등 반대측의 이유는 대토지를 소유자들의 이익 침탈을 막기 위해서였고, 사대부가 이 소유자들이였기에, 김집과 양송 등 산당도 자연스레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민생 안정을 위해 노비종모법, 양역(良役) 변통 역시 추구했다.

3.2. 산당과의 갈등

대동법 반대 이후, 김집은 조정에 들어오자마자 ‘시무 6조소’를 올려 비전과 그에 기반한 정책들을 제시했다. 이중 하나는 원로대신에게 자문을 해 품계에 상관 없이 추천된 인물을 조정에서 기용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저 자기 세력을 조정에서 늘리려한다는 비판 역시 가세졌고, 김육은 이러한 사태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결국 '삼불가불퇴론'으로 이러한 김집의 행태를 풍자했는데, 김집은 결국 조정에서 사임했다.

송시열 역시 나서 본인을 체직해달라 했고, 김집은 효종이 말리는데도 낙향했다. 이러한 사실에 분노한 산당은 김육을 거세게 비판했으나, 돌아온 것은 왕의 비호였다. 영수가 떠나자 산당도 계속 조정에 있을 명분이 사리지게 되었고, 대표적인 인물들인 양송, 이유태와 유계는 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낙당, 원당을 제쳤으나 한당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그러나 1655년부터 산당이 복귀했고, 이는 노비추쇄(奴婢推刷) 사업으로부터 시작된 효종과 한당 사이에 불화로 보기도 한다. 이 때를 틈타 산당은 다시 막대한 영향력을 떨쳤다. 효종 전기는 한당, 효종 후기는 산당이였다.

이보다 전인 효종 전기에 김자점의 난에 연루되어 신면이 죽고, 김육 역시 효종 9년에 세상을 떠나며 산당에게 원래부터 주도권을 뻇긴 한당은 주요인물의 부재로 약화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아들인 수완 좋고 능력 있는 김좌명이 있었기에 세는 일부 남아있었다. 그리고 김우명이 왕실과 인척이 되고, 김석주가 부상하면서 무시 못할 정도로 떠올랐다. 여기서 한당과 산당의 관계는 재조정된다.

3.3. 노론으로 통합

더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송시열은 남인을 몰아내려 애썼으나, 현종은 산림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당이고 능력이 있으며 왕의 신임까지 있는 김육의 장남 김좌명과 동맹을 맺어서 남인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김좌명이 사망했고, 이를 알리 없는 동생 김우명과 김우명의 조카이자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는 송시열을 가문의 적이라 부르며 지속적으로 공격한다. 이들은 2차 예송 때 남인의 편을 들며 송시열을 꺾었고, 산당 역시 위축되었다. 산당과 남인의 대결에 한당은 한 발 빠져있었지만, 김석주는 지속적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역전에 성공했다. 송시열의 지지를 얻은 것은 덤.

김석주는 명실상부 최고 권력자가 되고, 송시열 역시 그를 도와줬다. 한편, 김석주는 김장생의 손자이기도 한 훈련대장 김익훈과 함께 일을 도모해 남인을 일망타진하려 했다. 불만 가득해 보이는 한 사람을 포착했고, 미리 포섭한 첩자가 은근쓸쩍 불만에 동조하자 모든 것을 다 말해주며 김석주의 계획은 순탄히 성공하는 듯 싶었다.[4] 고변자가 어차피 자기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니 굳이 남인 고위층 인물을 연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김익훈은 결국 자기가 쓴 상소를 역모 연루자 명의로 올렸다. 이것이 들통나자, 대간들은 김익훈을 탄핵했으나, 송시열은 자신의 지친되는 사람을 못 도와주어서 부끄럽다며 신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인 노론 소론으로 갈리는데, 한당 대다수는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석주와 송시열의 동맹 관계가 두텁다는 것을 알게되어 노론으로 이어졌다.

4. 주요 인물


[1] 효종이다. [2] 장남 김좌명과 차남 김우명, 손자 김석주 등등 [3] 지금와선 한당이 옳아보이지만, 당시의 관점으로도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은 양란 후 체계가 무너진 반대급부로 성리학 교조주의가 유행했다. [4] 여기에 남인의 중진인 민암도 엮였으나, 역모 주도자들이 많이 하는 유명한 인물로 사람들의 신뢰 얻기였다. [5]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손자이며,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의 장남으로 왕실의 핏줄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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