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2:22:45

심온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태조 정종 태종
안천부원군 한경 상산부원군 강윤성 김천서 여흥부원군 민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청천부원군 심온 화산부원군 권전 여량부원군 송현수 파평부원군 윤번
예종 예종, 성종 성종
청천부원군 한백륜 상당부원군 한명회 함안부원군 윤기견 영원부원군 윤호
연산군 중종
거창부원군 신승선 익창부원군 신수근 파원부원군 윤여필 파산부원군 윤지임
인종 명종 선조
금성부원군 박용 청릉부원군 심강 반성부원군 박응순 연흥부원군 김제남
선조 광해군 인조
해령부원군 김희철 문양부원군 류자신 서평부원군 한준겸 한원부원군 조창원
효종 현종 숙종
신풍부원군 장유 청풍부원군 김우명 광성부원군 김만기 여양부원군 민유중
숙종 경종 영조
경은부원군 김주신 청은부원군 심호 함원부원군 어유구 달성부원군 서종제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오흥부원군 김한구 청원부원군 김시묵 영안부원군 김조순 영흥부원군 김조근
헌종 철종 고종 순종
익풍부원군 홍재룡 영은부원군 김문근 여성부원군 민치록 여은부원군 민태호
순종
해풍부원군 윤택영
추존
{{{#!wiki style="margin: -16px -11px" 목조(이안사) 익조(이행리) 도조(이춘)
이숙(이공숙) 최기열 안변부원군 박광
환조(이자춘) 덕종(의경세자) 원종(정원군)
영흥백 최한기 서원부원군 한확 능안부원군 구사맹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 문조(효명세자)
풍릉부원군 조문명 영풍부원군 홍봉한 풍은부원군 조만영 }}}
조선 왕비 · 조선 추존 왕비 · 대한제국의 국구 }}}}}}}}}

<colcolor=#fff>
조선 영의정
태조 ~ 연산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min-height: calc(1.5em + 9.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판문하부사
홍영통, 안종원, 권중화, 심덕부, 이화, 이거이, 조준, 김사형
초대

이서
제2대

이거이
제3대

성석린
제4·5대

조준
제6대

성석린
제7대

이화
제8대

하륜
제9대

이서
제10대

하륜
제11대

성석린
제12대

하륜
제13대

성석린
제14대

남재
제15대

류정현
제16대

한상경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17대

심온
제18대

류정현
제19대

이직
제20대

황희
제21대

하연
}}}
제21대

하연
제22대

황보인
제22대

황보인
제23대

이유
제24대

정인지
제25대

정창손
제26대

강맹경
제27대

정창손
제28대

신숙주
제29대

구치관
제30대

한명회
제31대

황수신
제32대

심회
제33대

최항
제34대

조석문
제35대

이준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36대

박원형
제37대

한명회
제38대

홍윤성
}}}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39대

윤자운
제40대

신숙주
제41대

정창손
제42대

윤필상
제43대

이극배
제44대

노사신
제45대

신승선
제46대

한치형
제47대

성준
제48대

류순
}}}
}}}}}}}}}

<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조선 세종의 장인 | 소헌왕후의 부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
沈溫
출생 1375년( 우왕 1)
사망 1419년 1월 27일 ~ 1월 29일 사이[1] (향년 43 ~ 44세)
(음력 1418년, 세종 즉위년 12월 23~25일 사이)[2]
묘소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재임기간 제17대 영의정부사
1418년 10월 11일[3] ~ 1419년 1월 11일[4]
(음력 세종 즉위년 9월 3일 ~ 12월 7일)
봉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시호 안효(安孝)
본관 청송 심씨[5]
중옥(仲玉)
부모 부친 - 심덕부
모친 - 인천 문씨(仁川門氏)[6]
형제자매 이복 형 - 심인봉(沈仁鳳), 심의귀(沈義龜), 심계년(沈繼年)
친형 - 심징(沈澄, ?~ 1432)
친남동생 - 심종(沈悰, ? ~ 1418),[7] 심정(沈泟, ? ~ 1418)[8]
부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순흥 안씨 (? ~ 1444)[9]
자녀 슬하 5남 6녀
[ 펼치기 · 접기 ]
적장녀 - 소헌왕후
적차녀 - 진주 강씨 강석덕(姜碩德)의 처(1397 ~ ?)[10]
적3녀 - 노물재의 처(1399 ~ ?)[11]
적4녀 - 진주 류씨 류자해(柳子偕)의 처(1401 ~ ?)
적장남 - 심준(沈濬, 1405 ~ 1448)
적5녀 - 전의 이씨 이숭지(李崇之)의 처(1406 ~ ?)
적6녀 - 순천 박씨 박거소(朴去疎)의 처(1413 ~ ?)[12]
적차남 - 심회
적3남 - 심결(沈決, 1419 ~ 1470)
서장남 - 심장수(沈長壽, 1408 ~ ?)
서차남 - 심장기(沈長己, 1409 ~ ?)

1. 개요2. 생애3. 억울한 죽음인가?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세종 국구이다. 태종의 외척 숙청 작업으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다.[13] 세종의 외삼촌이자 태종에게 사사된 민무휼의 사돈이며,[14] 문종 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의 외할아버지이다.

2. 생애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아버지 심덕부는 회군공신으로 고려 최무선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고 한양의 궁전과 종묘 건설 총책임자였다.

정종 대에 종3품 군사 직책인 보공장군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태종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미지 때문에 사극에서도 주로 온건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행동파이자 야심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위인 충녕대군의 출세를 위해 세력을 포섭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 정황이 있다. 사위를 위해 거의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몸조심했던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나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과도 상당히 대비되는 행적을 보였다.[15] 다른 장인들처럼 몸을 사리지 않는 심온이 태종에게 거슬렸던 것으로 보이고, 장차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르면 심온 집안이 어떤 영향력을 왕실에 발휘할 지 태종은 심히 우려한 듯 하다. 양녕대군이 14년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장인인 김한로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반면 심온은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 지 반 년이 채 지나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1418년 9월 사위인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장인어른인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태종 외척이라면 무조건 의심하고 경계했는데 마침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심온을 전송했다는 말을 듣고 여흥민씨처럼 심온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심온이 조선을 떠나있는 동안 심온의 동생을 강상인의 옥에 연루시켰고 심온 역시 연좌제로 연루시켰다. 결국 심온은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한양에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 강상인과의 연관성을 실토하고 하루 뒤 사사되었다.[16] 이 때 태종의 뜻을 받들어 심온 숙청 작업을 맡았던 사람이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박은이었다.[17] 이 때문에 심온이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다.

심온은 태종이 승하한 후에도 금지어가 되어 복권되지 못하다가 외손자인 문종이 즉위한 후에야 겨우 복권된다. 세종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 건 알았지만 심온이 결백했다고 밝히고 복권시킬 경우 오히려 자기 아버지 태종이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서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부담과 왕실의 위엄 때문에 손을 못 대었던 것으로 보인다.[18] 문종도 직접적으로 심온이 억울하다고 말한 게 아니고 내가 굳이 관직을 주려는 게 아니라 세종의 영릉 비문에는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의 이름도 올라야 하는데 1번 새기면 고치지도 못하니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면서 운을 띄웠다. 물론 이 때쯤 되면 왕이 외할아버지 복권한다는데 반대할 신하는 없어서 문제없이 처리되었다.[19] 그나마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죽지 않고[20] 변방의 관노로 전락했거나 관로가 막혔다가 태종이 죽은 후 이직 황희의 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세종의 명령으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심온의 딸들 또한 별 탈 없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대부 집안과 혼인하였으며 변방의 노비로 있던 시기에도 물리적으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21][22] 성종 대의 중신 노사신 세조, 성종 대 <사시찬요>, < 금양잡록>, < 고사관수도> 등을 남긴 강희안, 강희맹 형제가 심온의 외손자이며 또다른 심온의 외손자인 박중선의 딸들은 월산대군 제안대군의 부인, 중종 장경왕후의 생모이다.

이 때 역적의 딸이라 하며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종의 항의와 아들을 이미 3명이나 두었다 하여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청송 심씨 가문의 숙청이 종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다른 외척들처럼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소헌왕후를 폐위하면 외척을 제거한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에 폐하지 않았다.[23] 무엇보다 숙청의 목적이 왕비 집안 견제였는데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집안도 또 잡아야 했다. 그러면 또 폐비하고 또 숙청하고 악순환이 되니 왕비를 건드는 건 태종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경우다.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새 왕비를 들여서 그 왕비가 적자를 낳게 되면 소헌왕후의 아들들의 정통성 문제가 꼬여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정통성 문제로 인해 이미 태종 본인이 일으킨 1, 2차 왕자의 난이라는 피바람이 있었다. 적장자 세습이라는 원칙을 어떻게든 확립하려 했던 태종으로서는 이런 모험을 또 할 수가 없었다.

태종이 죽은 이후 세종은 심온의 죽음에 대해 재수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은 심온 사건을 주도한 류정현을 따로 불러 좌의정으로 임명한 후 중대사마다 그의 의견을 참고했다.[24] 소헌왕후는 그런 세종의 태도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이후에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25] 심온의 가족들은 이후 태종이 죽고 어느 정도 시간이 좀 나서야 복권이 될 수 있었지만 심온은 복권되지 못했고 이후 심온의 외손자인 문종이 왕에 오르고 나서야 이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아들인 세종 입장에서는 부왕의 결정을 바로 뒤집는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손자인 문종에게는 그런 부담이 훨씬 덜 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은 살아남았지만 세종 때는 연좌로 벼슬을 못하다가 문종 때 심회, 심결이 관직을 받고 세조에게 각별히 대우받아 심회는 영의정, 심결은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다. 심온의 장남 심준은 문종 즉위 전에 죽어 벼슬을 못 받았지만 그 아들 심미가 벼슬을 받았다. 그런데 심회는 성종 폐비 윤씨의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부관참시 당했다. 여담으로 성종 ~ 연산군 시기의 대신인 노사신은 그의 외손자이다.

3. 억울한 죽음인가?

명목상 죄인 심온의 역모죄는 사건 전개나 사후 처리 등을 볼 때 사실이 아니며 단순히 숙청의 명분에 불과하다. 다만 숙청을 피하기 위한 처신을 잘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으며, 처신 문제 한정으로는 억울할 것 하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청송 심씨보다는 오히려 여흥 민씨가 억울한 편이다.[26][27][28] 용의 눈물을 비롯한 그동안 대한민국의 여러 사극에서 민씨 숙청은 자세히 다뤄졌고, 심온과 심정 숙청은 성군 세종의 처가라는 점에서 고고한 선비로 묘사되어 왔다. 따라서 이 가문이 얼마나 강력한 권세가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사실 심온의 가문인 청송 심씨는 생전에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도 견제해야 했던 가문이었다.

태종이 외척을 함부로 숙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와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은 태종이 자신의 문과 급제 동기이기 때문에 믿고 사돈댁으로 정해 민감하게 여겼던 군부 수장까지 역임시켜 키운 사람들이다. 이후 태종은 김한로를 귀양시켰는데, 이는 김한로가 양녕대군의 비행을 방치하고 오히려 부추겼기 때문이지 외척인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외척은 통제하지 못하면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지만 통제만 잘되면 든든한 국정 동반자가 될 수 있어 단순히 외척이라는 이유로 숙청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29]

따라서 여흥 민씨 청송 심씨는 단순히 외척이라서가 아니라 태종이 통제할 수 없다고 볼 정도로 권력이 비대해져 숙청된 것이다. 더욱이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는 사극에서 한 번도 비중 있게 다뤄진 적이 없어 대중의 인식이 미미하지만 사실 그는 여말선초의 단연 손꼽히는 거물이었다.[30]

이성계에게 황산대첩이 있다면 심덕부 나세, 최무선과 함께 진포대첩을 지휘한 전쟁영웅이다. 위화도 회군 조민수, 이성계 바로 뒤의 3인자였으며 고려 군부 전체로 보면 최영과 이성계 다음가는 존재감을 지녔다. 여기에 동생 심원부가 이제현의 제자, 심원부의 삼남 심천식이 정몽주의 제자라서 군부와 정계, 권문세족과 신흥 유신, 온건파와 급진파에 폭넓게 영향력이 닿아 있었다.

폐가입진에 참여한 흥국사 9공신의 한명으로 그의 7남 심정이 이방번의 장인이기도 한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기에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그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실제로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 전후로 심덕부는 공양왕과 이성계 사이에서 대놓고 간을 봤다. 윤소종이 이성계의 정적 처리가 지체된다 우려하자 이 사실을 공양왕에게 전해 윤소종을 유배보냈고 정몽주 쪽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1390년 이성계 측은 윤이·이초의 옥사와 여기에 묶어넣은 김종연 사건에 정지, 지용기, 박위, 심덕부를 전부 옭아넣는데 이들이 모두 군부의 유력 인사들로 이성계 측이 군권을 독차지하기 위한 술수였다.[31] 하지만 변안열처럼 제거하지 못하고 겨우 3개월 유배에 그쳤다.

공양왕 측에서는 그를 문하시중에 임명하며 끌어들이려 애썼고, 1391년 세자 왕석의 명나라 입조에 동행시킬 만큼 신뢰했다.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에게 가장 믿을만한 카드였다는 뜻인데 정몽주의 목을 잘라버린 이성계 측도 심덕부는 못 건드려서 조선 개국 후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심덕부의 6남 심종을 혼인시켜 회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 아들 심인봉[32]이 군부 1인자인 의흥삼군부 도총제 직을 역임했고 5남 심온도 좌군도총제 등 군부 요직을 거쳤으며. 6남이자 이성계의 부마 심종은 장인 이성계를 배신하고 1차 왕자의 난 때 왕자들 편에 섰다. 그는 2차 왕자의 난으로 귀양간 회안대군과 대놓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통교했는데도 죽이지 못하고 귀양 가는 선에서 덮어줬다.

정양군 왕우의 사위인 7남 심정은 무(武) 쪽으로 가르침을 주라고 양녕대군 옆에 붙여놓았더니 매와 여자를 바치는 등 그의 비행을 대놓고 부추겨 태종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이런 심정의 행동은 탄핵 상소에 적힌 기록으로, 태종이 이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직시켰다. 양녕대군이 심정에게 받은 것은 꿩이고, 매는 주인인 심종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럼에도 태종은 일단 참았고 심정은 10년 이상 군부에 몸담으며 중앙군 요직인 중군 동지총제까지 올라갔다.

여기에 화룡점정이 다섯째 아들인 심온으로 소헌왕후의 아버지, 세종의 장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심온 역시 민제의 아들이자 원경왕후의 외척인 민무휼과 사돈을 맺었고 민무휼의 장인이 이직으로 이직과도 민무휼을 통해서 인척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직의 사촌동서가 하륜으로 심온은 하륜과도 어느정도 인척을 형성했다. 이미 아우인 심종이 난을 일으키고 쫓겨난 회안대군과 접촉,[33] 양녕대군 비행 부추김, 군부에 지나친 영향력 등으로 태종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아들들을 자중시키려고 했던 민제와 달리 심온은 아우들을 전혀 자제시키지 않았다.[34]

태종은 후계자가 될 세자, 이미 아들 셋을 잃은 상황에서 유사시 첫째 대신이 될 효령대군까지는 자신의 과거 동기인 문신 관료를 택했고 왕위와 거리가 먼 충녕대군의 처가로는 문무에 영향력이 깊은 권세가를 지명했는데 처음 고를 때야 셋째 아들에 대한 배려였을지 모르나 셋째가 왕이 되는 처음에 상정하지 못한 사태가 터지며 일이 꼬였다. 심온의 집안은 힘없는 셋째 왕자의 처가로는 충분하지만 일국의 국구 집안으로는 너무 강력했다.

그리고 강상인의 옥이 터진다. 군권을 절대 신하들에게만 맡겨놓을수 없었던 태종은 종친 혹은 자신의 문과 합격 동기들을 군직에 임명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했는데 수십년 간 태종을 모신 참판 강상인이 대놓고 군권은 내가 관리한다는 태종의 뜻을 무시했다. 상아패와 오매패는 태종의 재가를 받지 않고 강상인이 맘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태조 말도, 태종 말도 안듣는 청송 심씨를 그대로 방치하면 세종이 통제하지 못할건 자명했다. 심온이 명에 가고 없는 틈에 재빨리 심정과 그와 얽힌 군맥을 제거하고 심온까지 날려버려 세를 꺾었다. 태종의 심온 제거는 단순히 외척에 대한 경계가 아니다. 너무나 강력한 청송 심씨와 그들을 따르는 군맥에 대한 견제로 꼭 필요한 조치였다.

다만 이렇게 심온 자신은 딱히 잘못한게 없음에도 집안의 세가 너무 세고 자기가 세종의 장인이라는 죄에, 눈치가 충분하지 않은게 죄였던 만큼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자비로운 처분을 받았다. 물론 죽음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강상인 사건의 표면적 핵심은 강상인이었고 그 외에 이관, 심정, 심온 이 세 사람이 엮인 일이었는데 강상인이야 핵심이니 거열형을 당했고 이관과 심정도 참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강상인 사건의 진짜 핵심인 심온은 그나마 사약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이전에 죽인 민씨 4형제는 자진(표면상)[35] 하는 것으로 끝냈다는걸 감안하면 실제로 지은 죄는 없지만 권력때문에 부득이하게 죽인 것이니 자비를 베풀어주었지만 강상인은 확실히 잘못을 한게 맞으므로 가혹하게 처벌한 것으로 보인다.[36]

그러니 심온 개인으로 본다면 억울한 죽음이 맞다. 애초 세종의 장인이 아니었다면 딱히 연루될 이유도 없이 잘먹고 잘 살았을거고, 심온도 남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물러날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는 등 공과 사를 엄하게 구분하는 태종이 심온을 딱히 벌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37] 게다가 위에 나온 것처럼 강상인의 잘못과 심온은 사실상 아무런 연관이 없었는데 태종이 그걸 빌미로 답정너로 강상인을 패대면서 심온이 시켰다고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것이니 억울한 게 맞다. 사실 정말 심온이 잘못했다면 소헌왕후에게 해가 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곤장형 3회, 압슬형 2회를 버텨가면서 억울하다고 주장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했으니 무죄를 주장한거고 류정현의 말을 듣고서야 자백을 인정했으니 억울하게 간 것이다. 그렇기에 아래 대중 매체에서 나오듯이 심온은 대체적으로 굉장히 억울하게 사사되는 것으로 여러 매체에서 그려지고는 한다.[38]

4. 대중매체

  •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정하완이 연기했다. 태종 치세 초부터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 중 하나로서 하륜으로부터 기대를 받거나 황희가 태종에게 쓸만한 인재들 가운데 하나로 천거하는 등 꾸준히 등장하나 중요한 조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위 충녕대군이 세자의 물망에 오른 이후이다. 태종이 외척이라면 경계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기뻐하는 주변인들과 달리 크게 걱정한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영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 상왕인 태종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며 결국 명나라에서 귀국하자마자 끌려가 국문을 당한다. 딸인 소헌왕후는 이 소식을 듣고 실신했다가 대비이자 시어머니인 원경왕후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이에 원경왕후는 "친정 식구가 멸문지화 당한 한을 며느리에게 대물림할 수 없다"며 태종에게 선처를 호소하지만 무시당한다. 세종도 장인인 심온이 억울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실권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린다. 모진 심문을 받으면서도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태종이 심복인 내금위장을 몰래 감옥으로 보내 심온이 죽어야만 모든게 끝난다는 걸 암시하자 결국 "더 이상은 사람을 죽이지 말 것"과 "중전인 딸의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것"을 조건으로 죄를 시인하고 죽음을 맞는다.[39] 자신을 죽이려는 태종의 음모를 실행하는데 앞장선 박은에게 원한을 품어 후손에게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심온과 박은이 오랫동안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기에[40] 심온의 배신감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심온은 평소 박은을 뛰어난 학자로 높이 평가하며 사석에서 "나보다 박은 대감이 영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하기도 했고 명나라로 떠나기 전 배웅나온 박은에게 "조정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박은도 심온에게 밀려 영의정이 되지 못한 걸 내심 고까워하기는 했으나 무고를 할 정도로 미워하지는 않았기에 심온을 고문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내비친다. 하지만 태종에 의해 외척 제거의 선봉에 세워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살 길을 찾다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하게 된다. 심온이 죽은 후 그의 딸이자 중전인 소헌왕후가 훗날 복수할까봐 두려워한 대신들은 태종에게 소헌왕후도 폐위하자고 건의하지만 왕권에 집착해 처가와 외가를 쓸어버린 태종조차 지쳐서 "지금 중전을 폐하면 또 새로 중전을 들여야 하고 그럼 그 중전의 외척도 똑같이 멸해야 할텐데 내가 얼마나 더 외척을 도륙내야 겠느냐!"하며 역정을 내고 며느리인 소헌왕후만은 건드리지 않는다.[41][42]
  • 2008년 KBS 드라마 <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연기했다. 사위인 충녕대군에게 좋은 스승이며[43]대놓고 야심을 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치가로서의 포부나 수싸움도 제법 나타낸다.[44]작중 왕세자인 양녕대군이 결정적으로 몰락하는 어리 스캔들과 여진 정벌의 기도를 밝혀 버리는 인물도 바로 심온이며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태종과 독대하여 병권까지 세종에게 맡기기를 주청하여 태종의 눈 밖에 난다.[45]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무고를 당하며 극에서 원경왕후의 라이벌이었던 효빈 김씨마저 "이 일은 너무하다며 심온을 구할 방법이 정말 없느냐"고 원경왕후에게 한탄할 지경. 영의정이 된 후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조선으로 귀국하기 직전 옥사가 터졌다는걸 알게 되자 최만리 등은 명나라 관료들과 접촉해서 차라리 명나라로 심온을 망명시키려 한다. 하지만 심온은 "일국의 대신이 누명을 쓰고 외국으로 도망가면 그 또한 국가 망신"이라는 주장을 하며 순순히 조선으로 들어와 죽임을 당한다. 당시 접촉했던 명나라 환관인 황엄은 "조선의 진정한 충신"이라며 감탄했을 지경.
  • 2011년 SBS 드라마 <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세종이 심온을 살리려고 '귀국하지 말고 명나라로 피신해 있으라'는 밀지를 써서 믿을만한 생각시에게 들려보내 심온의 집사장에게 전하라고 밀명을 내렸는데 막상 심온의 집은 의금부에서 접수한 상태였고 마침 몸을 피해 있던 심온의 노비 중 하나인 석삼과 그 아들인 똘복이와 접선하게 된다. 똘복이는 의남매인 담이에게 밀지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했지만 글자를 자세히 몰랐던 담이는 "전하가 쓰신 내용 맞다"고 둘러댔으며 그 밀지 전달을 석삼이 자진하여 맡아 의주로 달려가 심온에게 밀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사실 그 생각시는 심온 숙청파인 조말생에게 포섭된 상태로 세종의 밀지는 똘복이와 만나기 전에 이미 바꿔치기되어 있었으며[46] 석삼이 밀지를 전달하는 장면을 금부도사가 포착하여 석삼은 그 자리에서 치명타를 입고 같이 끌려온 심온은 세종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사를 선택했으며 죽기 전에 똘복이에게 전하는 석삼의 유서를 대신 써 주었다.
  • 2021년 KBS1 드라마 <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김승욱[47][48]이 연기했다. 과의 대화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민무휼과 민무회의 처벌과 유배에 한탄을 보내기도 하였다. 다만 훗날 심온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한탄은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해주었다. 충녕이 결국 세자를 거쳐 보위에 오르자 각별히 사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태종의 뜻에 의해 영의정에 제수된 가운데 명나라 사절로 가는 길에 가문의 어마어마한 위세를 떨치려는 듯한 배웅 잔치가 열리며 플래그를 제대로 꽂고 만다. 그리고 결국 강상인의 옥에 휘말리며 사망 확정.
    부족한 분량 속에서도 박은이 심온의 사행길에 몰려든 환송 인파를 보고 태종에게 보고하는가 하면, 강상인의 국문에도 나서는 등 향후 두 가문의 악연이 빚어지는 단초도 충실하게 까는 것은 물론, 사행길 환송연에 몰려든 수많은 손님들을 보고 당황하는 심온의 모습이나, 원경왕후의 " 청송 심씨 여흥 민씨 못지 않은 명문가라 그런 가문이 외척이 되면 주상이 그냥 두지 않을 것" 라는 대사 등으로 심온의 죽음이 단순히 외척이라 죽은 게 아니라 영향력이 큰 가문이 외척까지 되어 제거된 것임도 표현하였다. 여담으로 기구한 최후 때문에 심'On'에서 심' Off'가 되었다며 심오프라는 별명이 붙었다.
  • 심온과는 무관하지만 < 오성X한음>에서 청송 심씨와 반남 박씨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이 담긴 에피소드가 나온다.
  • 드라마와 달리 국내에서 시판되는 어린이용 세종대왕 위인전기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심온이라는 인물 자체가 통째로 누락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 이러한 점으로 미뤄볼때 친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를 죽이는 잔인한 장면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책을 읽는 어린이들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태종의 심온 숙청을 사극 드라마들과 달리 세종대왕 위인전기 책에 넣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1] 율리우스력 1월 18일 ~ 1월 20일 사이 [2] 태종은 심온을 우선 수원으로 압송한 뒤 자결하게 하고 현지에서 바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한성부를 출발한 것은 음력 12월 23일이고 압송관이 수원에서 돌아와 사망 보고를 올린 것은 음력 12월 25일로, 단순히 편도 하루 거리라고 계산하면 실제 사망일은 음력 12월 24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3] 율리우스력 10월 2일 [4] 율리우스력 1월 2일 [5] 심온은 청송 심씨 시조 심홍부의 현손으로, 청송 심씨 안효공파의 파조이다. [6] 문필대(門必大)의 딸. 심덕부의 후처이다. 文씨가 아니다. [7] 태조의 3녀 경선공주의 부마. [8] 부인이 왕우의 딸이다. [9] 안천보(安天保, 1339~1425)의 딸. [10] 강희안, 강희맹(姜希孟)의 어머니. [11] 영의정 노사신의 어머니. [12] 아들은 박중선(朴仲善)으로, 윤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외증조모. [13] 세종실록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왕이 내리는 사약을 받고 그것을 스스로 들이켰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명예를 지키는 서술이 쓰인 경우가 있다. [14] 심온의 장남 심준이 민무휼의 사위다. 당시 지배층의 혼인관계가 지금의 재벌가 혼인관계 이상으로 오밀조밀해서 이런 식으로 이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15] 김한로와 정역은 오히려 문과 급제 동기인 태종이 작정하고 밀어줬다. 이들이 역임한 관직중엔 병조판서도 있는데 태종이 얼마나 군권에 민감했는지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신임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16] 사실 심온은 관련이 전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심온이 떠나자마자 태종이 다시 강상인을 붙잡아 조사했고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해댔다. 그러고 나서 심온이 귀국하자마자 고문해댔는데 심온도 자기가 억울한 건 사실인지라 하루도 안 되는 사이 곤장을 3번 맞고 압슬형도 2번을 받으면서도 실토하지 않았지만 수사 책임자 역할을 맡은 류정현이 "당신쯤 되는 지위에 있는 분이 이런 고문을 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소? 실토하지 않고 배겨내겠습니까?"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심온은 결국 태종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게 이렇게 엮을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양위하고나서도 군국대사를 처리하고 있었고 심온의 동생 심정이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고위급 군 지휘관에 있었다. 심온의 아비 심덕부가 공신 중 하나인 것은 제외하고서도 심온의 다른 동생 심종이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딸 경선공주의 부마이자 무인정사 2등 공신이었다. 심온의 큰형 심인봉도 의흥삼군부 도총제로 고위급 지휘관에 있었으니 태종이 큰 문제라고 여기고도 남았을 정도였다.(형 심인봉은 그렇지 않을 것을 봐서 세종 즉위년에 도총제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심온 자신도 민무휼과 사돈지간을 맺었는데 둘 모두 끝이 좋지 않았던 것. [17] 심온이 이조판서 시절 자파 인사 위주로 기용한다고 했으며 영의정이 되었을 때는 실권이 없다고 투덜거린다고 했다(다만, 심온은 국구가 되고 사은사로 명나라로 가면서 영의정이 된 상태였다). 박은의 경우 당시 좌의정이었다. [18]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을 진심으로 존경했을 뿐 아니라 대단한 효자였다. 아버지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고 장인을 복권할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는데, "간신 박은 유정현이 충신 심온을 모함했다."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박은, 유정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이렇게 심온을 복권시킬시 정치적 후폭풍이 불어닥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심온을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이 아직 살아있는 때라서 이들까지 갈아버려야 했는데 정치 보복은 세종의 정치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효자/불효자 같은 개인적 성격을 따지지 않더라도 부왕이 한 일을 바로 뒤집는 것은 왕조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자체로 국왕의 권위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3~4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복권되는데 청나라의 중원 통일을 주도한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역시 순치제의 증손자인 건륭제 시기에나 복권될 정도. 좀 다른 케이스이긴 하지만 정조 역시 생전에 사도세자의 복권을 꿈도 못 꾼 이유가 영조가 생전 정조를 사도세자의 일찍 죽은 형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늘 세자에게 자신은 책임이 없고 홍계희, 김상로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며 정조가 자신의 사후에도 함부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 없게끔 여러 견제책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 즉위 당시 함부로 사도세자의 추숭을 함부로 논하지 말라고 했으며 사도세자 추숭의 상소를 올린 이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남인 채제공이 야당에서 제1여당으로 발돋움할 수단으로 당시 노론 세력에게 죄가 있다며 사도세자의 신원회복을 논하자 견원지간이였던 노론 소론이 합세해 채제공을 역적으로 모는 등 한바탕 풍파가 일어나기도 했다. [19] 다만 사헌부에서는 선왕(세종)도 뒤집지 않던 일을 뒤집어서 되겠냐고 태클을 걸었으며 문종 또한 내가 결정한게 아니고 신하들의 의견을 따른 것이라고 적당히 넘어간다. [20] 어차피 역모 사건이 벌어져도 여자들은 사형을 당하지 않지만 아들들까지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온의 숙청이 외척 경계에 의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정말로 반역을 꿈꿨다면 아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기 때문. 여담으로 심온의 적자들은 장남인 심준은 어려서 귀양을 가지 않았다고 하며, 차남 심회와 삼남 심결은 1418년, 1419년 생이다. [21] 그마저도 오해를 살까봐 대언(=승지)들을 불러서 "선왕께서 관노로 삼는 건 원치 않아 했는데 류정현이 강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된거고 그 이후에도 논의가 있기는 했는데 선왕께서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못했던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 심온의 아들 심회는 복귀한 이후 영의정까지 오른다. [22]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심온의 일족이 노비가 되었던 일을 거론하면서 "일단 천인으로 만들되 천인의 일은 시키지 말 것이며 뒷날 이를 고치도록 하라"라는 태종의 지시를 언급한다. 험한 대우를 받았다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예 그런 대우를 받았던 적이 없다. 누가 감히 왕의 장모와 처제들을 험하게 대우할 수 있겠는가 < 용의 눈물>에서는 심온의 아내가 노비 신세가 되자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비싸 보이는 옷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관군이 이를 꾸짖으며 심온의 아내를 대우해주는 모습이 나온다. [23]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이 박은을 흘겨보며 "벌써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투기도 모르고 후덕한 며느리를 내가 왜 폐하겠는가? 내가 심온을 친 건 왕비를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척의 힘을 꺾어두려는 것임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끌끌~"이라는 장면을 넣어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아주 간략하게 보여주었다. 그 앞 장면에서 "이미 시집왔으니 그 아비의 죄에 연계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 내가 공비(소헌왕후)에게 밥을 먹으라 했고 염려하지 말라 했다."라는 말도 넣어서 이것이 결코 소헌왕후를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24] 함께 심온 사건을 주도한 박은은 태종이 죽기 하루 전 죽었는데 사후 세종에게 "아첨하는 신하" 라며 까였다. 아무래도 심온 사건 때 보여준 태도에 적잖이 기분 나빴던 모양. [25] 조선의 국가 정책이 숭유억불이기는 하지만 이는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인다는 것이지, 아예 불교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도 태조가 중병에 걸렸을 때 승려들을 불러다 기도를 올린 적이 있고 세종도 말년에 불교에 기울었으며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불경을 간행했다. 이러니 왕실 여성이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26] 반면 태종의 장인이었던 민제는 사위에게 사형당하는 대신 병으로 자연사했다. 다만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과 달리 민제는 태종에게 장인이자 스승이었기 때문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나 심온처럼 숙청할 위치가 아니었다. [27] 유일하게 민무회는 잘못이 있다. 민무구, 민무질이 죽은 후 형 민무휼과 함께 양녕대군을 찾아가서 제발 우리 좀 잘 봐달라고 했을 때 양녕대군이 선을 긋자 저하께서는 어느 집안에서 자라셨습니까?라는 위험한 말을 했고 그 자신의 죽음의 계기가 된 사건도 명백히 왕이 내린 판결에 눈치없이 개입하려다 걸려서였다. 즉 위의 세 형들과 아버지와는 달리 본인은 처신이 별로 좋지 않았다. [28] 의외로 심온에 대한 숙청과 소헌왕후 폐위 주청으로 악명높았던 박은의 경우 민씨 가문에 관해서는 왕자의 난 시절부터 맺어왔던 친분때문에 민씨 형제 숙청에 가담하지 않았다가 오히려 간관들에게 탄핵을 당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던 적도 있었다. [29] 조선으로 그대로 넘어왔다가 태종 13년에 폐지된 고려의 좌주문생 제도 하에서 시험관인 지공거와 급제자는 끈끈한 사제관계로 밀착된다. 태종과 김한로, 정역은 지금 생각하는 고시 합격동기 정도가 아니라 우현보라는 스승 아래 사형제들이었다. [30] 기껏해야 용의 눈물에서 1차 왕자의 난에 비중이 낮은 조연으로 등장한 게 전부다. [31] 흥국사 9공신 중에 정몽주가 돌아선 것만 유명한데 이들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역성에 찬동한건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뿐이다. 심덕부는 공양왕과 이성계 양측을 저울질했고 박위는 정몽주에게 회유되었다가 김종연 사건때 건져준 걸 계기로 이성계에게 넘어갔고, 지용기는 아내의 재종형제 왕익부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몫으로 축출되었다. 성석린 설장수도 정몽주 측으로 분류되어 길진 않지만 유배생활을 했다. [32] 심덕부의 첫번째 부인인 청주 송씨의 소생이다. 즉, 심온에게는 이복형에 해당된다. [33] 정확히는 생강을 받고도 보고를 안한게 훗날 밝혀진 일이다. 이 일은 신하들이 회안대군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태종의 비호로 폐서인되고 귀양가는 것으로 끝났다. [34] 민제는 민무구 민무질이 끝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 실패했다. 심온의 경우 아우들이며, 맏형인 심인봉이 여전히 군부의 요직들을 장악하던 상황이었기에 심온이 직접 자제시키는 것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무리였다. [35] 이게 애매한게 민무구 민무질은 자진이 맞지만 기묘하게도 그 아래인 민무휼, 민무회는 태종이 직접 자진 명령을 내리진 않았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되 자진하려 하면 말리지는 마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36] 강상인 사건의 발단 자체가 병조의 실세인 강상인이 태종에게 보고를 올려야 함에도 이를 어기고 세종에게 보고를 올린 것이다. 이전에 태종이 직접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병조의 일은 자신이 직접 맡고 국사의 주요 의논에서도 참여하여 도울 것이라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왕명을 어긴 것이므로 당연히 잘못을 저지른거다. [37] 사실 태종이 숙청은 했어도 숙청/제거한 인사의 친인척들도 무조건 죽이던 군주는 아니었다. 왕자의 난 당시 남은은 죽였지만 남은의 형인 남재는 살려주었고, 정도전은 제거했지만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 역시 사형시키지 않고 후일 그를 중용하고, 집권 이후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 역시 사사형을 내려 사형시켰지만 살아남은 그의 유가족들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38] 물론 청송 심씨가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었는지도 자세히 그려지지 않는다. 사실 태종 이방원에서 원경왕후 소헌왕후에게 "청송 심씨도 우리 여흥 민씨만큼이나 강한 가문이니 태종이 곧 칠거다" 라고 언급하는 것이 전부. [39] 민씨 형제와 달리 권력을 남용한 적도 없고 오히려 조용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태종이 작정하고 죽이려 했으니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작중에서도 매우 현명한 인물로 묘사되고 양녕이 폐세자되고 사위인 충녕이 세자가 될 무렵부터 늘 경계하며 생활하지만 끝나 태종의 칼을 피할 수는 없었다. [40] 하륜이나 황희로부터 천거를 받는데 두 사람만 따로 묶은 것은 아니고 류정현이나 다른 인물들도 함께 거론되나 언제나 박은과 함께 언급되었다. 국문을 받을 당시 심온은 유정현에게는 "호놈"을 하며 반말을 했지만 박은에게는 "좌상 대감"이라 부르며 하오체를 썼다. [41] 당연한 게 왜 심온을 죽였는지를 생각하면 소헌왕후를 폐한다는 것은 중전을 두지 않을 것이 아니라면야 지금까지 해온 짓을 수포로 돌리는 짓일 뿐이다. [42] 다만 이건 작중에서 민씨 및 심씨 일가가 멸문된 이유를 단순히 "외척이라서"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오류로, 실제 이유는 외척인 것에다 이들 가문의 위세가 매우 강해서 왕실에서도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실제 양녕대군의 장인으로는 일부러 외척이 될 것을 감안해 세력도 고만고만하고, 태종 자신과 사형제 지간이었던 김한로를 데려왔는데, 예기치 못하게 세자가 충녕으로 바뀌면서 청송 심씨는 졸지에 멸문의 대상이 된 것. [43] 극 중에서, 과 함께 하는 모습보다 사위와 함께 하는 모습이 더 많다. [44] 이수, 윤회를 포함한 신왕파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그들의 존경을 받는 묘사도 나오며 세종에게 일이 생겼을 때 회의를 하는 곳이 심온의 사랑채다. [45] 태종은 이때 겉으로는 적당히 묵살하고 넘어갔지만 속으로는 사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려는 개수작으로 여겼던 모양. 훗날 심온이 태종의 옥사를 전해들었을때 이때를 회상하며 '늙은 아비의 우려가 그리도 노여우셨습니까?'라고 독백한다. [46] 바꿔치기된 밀지에는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상태로 군관이 들이닥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역모죄. [47] 이 배우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대를 다룬 드라마 < 정도전>에서 심온을 숙청하는 박은의 아버지인 박상충을 연기했다. 또한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심온의 동생 심정 역이었다. [48] 정도전에서는 임호가 맡은 역인 정몽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였는데, 여기선 입장상 그 임호한테 잡히는 역할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