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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징

이름 <colbgcolor=#fff,#191919>김경징(金慶徵)
선응(善應)
본관 순천 김씨
출생 1589년
평안도 강계
(현 자강도 강계시)
사망 1637년 9월 21일[1] (향년 48세)
국적 조선

1. 개요2. 생애
2.1. 인조반정까지의 행적2.2. 석연치 않은 개시(改試) 급제2.3. 군관을 장살하다2.4. 인조를 비판하다2.5. 자기집 종 국문을 청하다2.6. 상소를 올리다2.7. 척화를 부르짖다2.8. 병자호란
2.8.1. 강도검찰사로 임명되다2.8.2. 이민구와의 돈독한 관계2.8.3. 강화도에서
2.9. 최후
3. 평가
3.1. 실록의 평가3.2. 김경징 옹호론
3.2.1.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3.2.2. 실록의 평가는 부당하다
3.3. 김경징 비판론
3.3.1. 김경징 관련 기록의 신빙성
3.3.1.1. 병자록과 병정기사3.3.1.2.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은 병자록뿐인가?3.3.1.3. 김경징은 세력간 충돌의 희생양인가?
3.3.2.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전에 책임이 없는가?3.3.3. 김경징의 사형은 부당하고 과도한 처벌이었는가?3.3.4. 말만 번지르르했던 위인3.3.5. 위선적이고 잔혹한 일면3.3.6. 실록의 평가는 합당하다
4. 기타5. 사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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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인물.

본관은 순천, 자는 선응(善應)으로,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이고, 아버지는 승평부원군 김류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유근의 딸이다. 태종 시기에 왜구와 여진족과 맞서 공을 여러 차례 세운 무신 김승주의 후손이며, 김승주의 아들 김유온의 7대손이기도 하다.

그는 살아생전에 아버지이자 반정공신인 김류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려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고, 병자호란 때에는 부친 김류의 천거로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허송세월하였으며, 시국이 급한 때에 장신과 군권을 두고 다투는 등 내분까지 벌였다. 그러다 청나라군이 바다를 건너 섬에 상륙하자 살기 위해 왕족 일가를 수호하는 임무와 처, 모친조차 내팽개치고 도망쳤고, 이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이들의 탄핵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인조반정까지의 행적

광해군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올라 찰방(察訪)[2]을 맡았다. 사과(司果:정6품)를 지내던 1621년( 광해군 13) 치러진 별시 문과에 병과 25위로 급제하였다.[3]

1623년 3월 아버지 김류와 함께 인조반정에 참가,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1623년 5월 광해군의 처남인 류희분의 종 이말질수(李末叱水)의 행적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자 포도청으로 하여금 체포하여 국문하게 했다. 그 결과 광해군의 폐세자 이지가 땅굴을 파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를 저지하는 공적을 세웠다.

2.2. 석연치 않은 개시(改試) 급제

1623년( 인조 1) 사간원이 계축년 이후의 파방(罷榜. 과거 급제자 발표를 취소함.) 등을 청했다. 계축년은 1608년으로 광해군이 즉위한 해이다. 즉, 광해군 즉위 이래 시행된 모든 시험은, 부정이 의심되니 전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 중에서도 무오(1618년) 식년시 강경(講經)과 신유 별시(1621년 10월 20일)가 특히 논란이 많았다. 관련 출처
  • 칠대문(七大文)의 기롱(譏弄)
문과 초시 초장에는 강경과 제술의 두 가지 시험 방법이 있으며, 이중 강경은 구술시험에 해당한다. 강경에는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과 책을 보고 뜻을 말하는 고강이 있었다. #

고강에는 칠서강(七書講)·사서강(四書講)·이서강(二書講)·일경강(一經講) 등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문과 식년시 초장에는 칠서강을 행했고 이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응시자가 편명을 기록한 찌들이 담긴 통에서 하나를 뽑고, 이어서 대문(大文)의 수를 기록한 찌들이 담긴 통에서 하나를 뽑으면, 시관이 이것을 강지에 기록하고 시험을 시행했다.[4] #

그런데 광해군 때는 강경에서 부정행위가 만연했다고 한다. 응시자가 미리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시험 날 시관이 해당 응시자로부터 준비된 자표를 받아 강지에 기입했던 것이다. 무슨 문제를 풀 것인지 사전에 서로 짰던 셈이다. 이 때문에 식년시(1615년) 강경 시험 이후에는 어떤 사람이 길가의 대문 벽에다가 ‘문장과 재사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네. 자기 원하는 칠대문을 줄줄 외고 있으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겠지.(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라고 시를 지어 붙이기도 했는데, 세간에서 조롱거리 삼아 이 글을 항상 읊고 다녔다고 한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109권, 광해 8년 11월 27일 갑오 8번째 기사 1615년 식년시 특이사항

결국 1618년 8월 12일 무오 식년시 때, 이 문제가 크게 불거져 전시를 연기하였다. 그리고 전시를 언제 시행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계속 시간만 흐르다가, 광해군일기[중초본] 173권, 광해 14년 1월 25일 신유 1번째 기사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 오류지요(五柳之謠), 박홍구의 아들
류희분(광해군의 처남)에게는 아들과 조카 5명이 있었다. 이중 4명이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 응시했고, 다른 한 명은 같은 달 있었던 알성시에 응시했다. 당시 시험관은 이들의 이름과 자를 부챗살에 적어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 다섯이 합격하자, 사람들은 오류(五柳, 다섯 류씨)라고 불렀다.[5]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서 이덕형의 아들과 박홍구의 아들이 함께 합격했다. 그러자 시험관은 ‘죽은 재상의 아들과 현 재상의 아들을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여겨 박홍구의 아들을 합격시켰다.[6] 신유년 별시 특이사항 이것이 논란이 되어 신유 별시는 합격자 발표를 하지 않고 미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 김경징은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서 참방[7]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해조(該曹, 형조)와 대신들이 김류의 눈치를 보다가 합격자들만 따로 추려서 재시험을 치르자고 의견을 굽혔다. 그리하여 무오년(1618년) 식년시 강경의 합격자와 신유년(1621년) 별시 합격자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둔 자들을 대상으로 인조1년(1623년) 8월 12일 개시(改試)를 시행하였다. 인조 1년 개시 특이사항

김경징은 해당 시험에서 병과 10위로 급제하였고[8], 이후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된다.

물론 김경징이 신유년(1621년) 별시와 계해년(인조1년, 1623년) 개시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신유년 별시 자체가 부정행위가 심각했기에, 시험 자체를 무효로 해야 옳았고, 조정의 여론 또한 그와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김경징은 과거 시험을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권신을 아버지로 둔 덕분에 그는 곧바로 최종 시험을 치르는 초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전략)
"계축년 이후에 역적의 괴수가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과거를 가지고 당파를 심는 길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정을 두거나 차술(借述)[9]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각년의 모든 방(榜)을 일일이 조사하여 삭제하기도 하고 파방하기도 하여 선비들의 분한을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예조에 계하하였다.(중략)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그 사이에 혹은 정당하게 참방한 자가 있으니 뒤섞어 파방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삭제해야 할 사람만 삭제해야지 전체를 파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 경연에서 다시 품하여 친경 별시(親耕別試)와 함께 강시(講試)를 다시 행하고 합쳐 한 방을 만들기를 청하였다.이 두 방은 흉도들이 가장 심하게 부정을 행한 것이어서 공론이 모두 파방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류(金瑬)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별시(別試)에 참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조와 대신이 그 형세에 견제되어, 처음엔 조사해 삭제하기를 청하더니 끝내는 다시 시험보이자고 하였다. 유신의 처음에 행사의 구차함이 이처럼 심하므로 식자들은 공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인조 1년 3월 17일 정미 1번째 기사

2.3. 군관을 장살하다

1624년, 김경징은 비변사 당상에 임명되었으나 인조가 "비변사가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는 것은 당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며 당상의 수를 줄이는 바람에 해임되었다. 그후 그는 공조 참판이 되었는데, 재임 중에 군관을 곤장치던 중 군관이 죽어버렸다.

김경징은 궁궐 앞에 꿇어앉아 대죄했고, 인조는 훈계 정도로 넘어가려 했지만, 사헌부는 법에 따라 죄를 정해야 한다고 청했다. 그 후 형조에서 이 사안을 다루다 인조의 심기를 거슬려서, 형조판서 이시발이 하옥되어 심문을 받은 후 면직당했다.[10] 인조 2년 7월 16일 무진 4번째 기사 인조는 김경징에 대한 형량을 다시 고하라고 명령했고, 사헌부는 형량을 낮추어 김경징의 벼슬을 삭직하는 선에서 끝냈다. 이 당시 대사헌은 정엽이었으며, 나만갑은 정엽의 사위였다. 때문에 나만갑 역시 김류와 김경징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이후 나만갑은 대사헌 남이공을 체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김류와 인조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11] 결국 좌천되어 지방의 한직을 전전했다. 심지어 그의 주변 사람들과 그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조차도 똑같이 화를 입었다.[12][13] 인조 3년 5월 7일 갑인 2번째 기사 인조 3년 5월 17일 갑자 2번째 기사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2번째 기사
특명으로 박정(朴炡)을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유백증(兪伯曾)을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만갑(羅萬甲)을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삼았다. 이 3인은 모두 강경하고 정직하여 과감히 말하였다. 경연의 직에 있으면서 관원의 부정을 규핵(糾劾)하였는데 일시에 외직에 보임되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후략)
인조 3년 7월 3일 기유 1번째 기사
(전략)사신은 논한다. 지금 세 신하(박정, 유백증, 나만갑)가 외직에 보임된 것은 모두 김류가 얽어 배척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의 사대부가 모두 그의 행사를 바르지 않게 여겼다. 이에 이르러 겉으로 구해(救解)하는 빛을 보였으나 은연중 이 세 신하를 왕비·왕숙문의 당에 비하였으니, 아, 너무도 심하다.(후략)
인조 3년 7월 5일 신해 1번째 기사
(전략)이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쓰지 않으시니 신이 우러러 아뢰고 싶지 않으나, 다만, 이 일은 존망이 달려 있는 것이므로 침묵만 지킬 수 없습니다. (중략) 지금, 세 학사(박정, 유백증, 나만갑)가 외직에 보임된 것은 참으로 불행인 것입니다. 근일 이것 때문에 사대부들 사이에 기상이 수참(愁慘)합니다. 나만갑(羅萬甲)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벌할 만한 죄가 없고, 재능이 많고 천성이 곧으니 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이 김류에게 묻기를 ‘나만갑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더니, 김류 또한 ‘그가 무죄하나 다만 그 마음씨가 험함을 죄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논함에 어찌 마음을 주벌하는 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만갑의 죄는 정엽(鄭曄)의 사위가 된 데에 불과합니다. 정엽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박정과 함께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살인한 죄를 논하였는데 오늘날 나만갑이 외직에 보임된 것은 여기에서 싹튼 것입니다.(후략)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1번째 기사
(전략)김류가 아뢰기를,

"(중략)나만갑(羅萬甲)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銓郞)에 적합하겠습니까. 나만갑을 쓰고 김세렴을 내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불공정하겠습니까. (중략) 요즘 듣건대, 나만갑이 전판(銓判)(여기서는 이조판서를 말한다.) 을 비방하기 때문에 전판도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중략) 나만갑은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그를 다시 발탁하여 등용하신 뒤로 그의 우기(愚氣)가 더해져 제반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마치 자기 혼자 담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중략)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략)
인조 7년 7월 11일 갑오 1번째 기사
(전략)이귀가 아뢰기를,

"나만갑에게 병통이 없지는 않지만 기절(氣節)만은 가상했기 때문에 소신이 원수(元帥)에게 추천하려고도 하였습니다. (중략) 신이 듣건대, 김경징(金慶徵)이 나만갑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 찬성 댁에는 자주 가면서 우리 집에는 오지 않느냐?’ 하니, 나만갑이 대답하기를 ‘이 찬성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어 모든 시비에 관한 문제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시지만, 너희 집에서는 나를 서리배로 취급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그런데 좌상(김류)은 성격이 온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너무 심하게 의심한 나머지 항상 외직에 보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인조 7년 7월 16일 기해 2번째 기사
특별히 대제학 장유(張維)를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았다. 그 전에 장유가 차자를 올려 나만갑을 신구(伸救)하였는데, 차자의 말 가운데에 ‘어미와 영결(永訣)하게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장유가 만갑의 당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던 중에 장유가 그의 말[馬]을 빌려주어 만갑으로 하여금 어미를 모시고 가게 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자,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그의 차자 내용을 보면 ‘그의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는데 또 말을 빌려주어 그 어미를 태우고 가게 했으니, 이는 임금에게 거짓으로 고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렇게 제수하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대체로 태학사(太學士)를 고을의 수령으로 내보내는 일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므로, 명이 내려지자 조야(朝野)가 모두 경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장유는 염정(恬靜)한 인물로서 본래 경망스러운 거동이 없었는데 더구나 군부(君父)를 기망하면서 동류(同類)를 곡진히 감싸주겠는가.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한 말은 정리상 그의 절박한 상황을 거론함으로써 상을 감동시켜 깨닫게 해드리기 위한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그 모자(母子)가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어 급한 처지를 구제해 준 것은 같은 조정의 동료로서 서로 돌보아주는 의리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죄안(罪案)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인조 7년 7월 21일 갑진 1번째 기사
나만갑(羅萬甲)을 해주(海州)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나만갑은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중죄인을 서울과 가까운 곳에 유배시킬 수는 없다." 하여, 지역을 바꿔 유배한 것이다.
인조 7년 7월 29일 임자 1번째 기사
(전략)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에게 붕당을 조성하는 자취가 현저히 나타났기 때문에 김류(金瑬)가 그 풍조를 개혁하려 한 것이니,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전일 경연에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만갑은 열 번을 쫓겨나도 그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인조 7년 8월 7일 기미 1번째 기사[14]
박정(朴炡)을 남원 부사로 좌천시켰다. 이는 상이 박정을 나만갑(羅萬甲)의 당으로 여긴데다가 남원이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기 때문에 특별히 임명한 것이었는데, 시론이 박정을 애석하게 여겼다.
인조 7년 9월 10일 신묘 1번째 기사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만언차(萬言箚)를 올렸다. (중략)

사신은 논한다. (중략) 나만갑이 과연 죄가 있어 축출된 것이 아니며 장유와 박정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도 역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으니,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중략) 아, 김류의 처사가 과중하였으니 남의 말이 있는 것은 의당하나, (후략)
인조 7년 10월 3일 갑인 2번째 기사[15]
(전략)특지(特旨)로 유백증(兪伯曾)을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삼았다. 유백증을 나만갑(羅萬甲)의 편당이라 하여 쫓아낸 것이었다.
인조 7년 10월 3일 갑인 5번째 기사
대사간 이식(李植) 등이 상차하기를,

(중략)지난번 대신들이 탑전에서 나만갑을 계론(啓論)했던 뜻은 외직으로 보내어 억제시켜 보려던 것에 불과하며, 그들이 사제(私製)에서 논한 바를 들어봐도 역시 전랑(銓郞)의 의망을 정지시키고 지방 수령에 제수하고자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중략) 지금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죄주기를 한층 가중시켜서 그 여파가 연루자에게 점차 확대되어 시끄러운 단서가 어지럽게 생겨나 도리어 대신들로 하여금 미안한 바가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당론을 진정시키고 알맞게 다스리는 도리이겠습니까.(후략)
인조 7년 10월 9일 경신 1번째 기사
(전략)김류가 이를 듣고는, 나만갑(羅萬甲) 등이 평소 김세렴과 사이가 좋지 않아 모함한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그 뒤에 경연에서 아뢰기를,

"나만갑은 경박한 사람으로 전상(銓相)의 권리를 침해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또한 유언비어를 듣고 의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크게 노하여 나만갑은 중도 부처하도록 명하고, (후략)
인조 8년 4월 24일 계유 2번째 기사

2.4. 인조를 비판하다

김경징은 1626년 예장 도감 제조, 예조 참판을 지냈고 1630년엔 승정원 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맡았다. 경연 참찬관 시절, 그는 황실의 세금 면제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인조의 태도를 비판했다.
"구언(求言)하신 것은 단지 겉치레였을 뿐입니다. 지난번에 대관(臺官)이 궁가(宮家)에 대해 면세(免稅)해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논열(論列)한 것이 한달 가까이 되는데도 전하의 윤허는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그 밖에 쓸 만한 말들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이로써 본다면 겉치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5. 자기집 종 국문을 청하다

김경징은 1632년에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총어사를 맡았다. 또한 이 시기에 경기도 관찰사를 맡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종이 자신을 저주했다고 고발했다. 이 과정에서 박승황의 아내 말질정도 국문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위관 김상용은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는 것은 옳으나, 삼성(三省,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언했다.

국문은 역모 같은 국가 안위와 관련된 사건이나 혹은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단지 범죄를 꾀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문까지 행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사헌부와 사간원도 김상용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인조는 이를 묵살했고 오히려 양사의 사람들이 체직되었다. 결국 말질정은 장을 맞다가 죽었다.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기를,

"불행하게도 사패(賜牌)한 계집종이 남몰래 옛 주인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신의 집을 모조리 없앨 꾀를 내어 부엌·굴뚝·기둥·지붕에다 흉측한 물건을 묻어두었는데, 음험하고 사특한 짓이 빌미가 되어 어미의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자식된 자의 망극한 정으로는 그의 살점을 저며도 분함을 씻기에 부족합니다만, 신은 일단 법조(法曹)에 고발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소를 보고 금부에 명하여 사주한 자를 잡아다 국문해서 공신(功臣)을 모해한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금부가 저주한 죄인 칠향(七香)이 끌어댄 박자흥(朴自興)의 처와 박승황(朴承黃)의 처를 잡아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박자흥의 아내는 이이첨(李爾瞻)의 딸인데 잡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자살하였고, 계집종 칠향은 형문(刑問)을 받고 승복하였다. 말질정(末叱貞)은 바로 박승황의 아내로서 신문(訊問)해도 승복하지 않았는데 위관(委官) 김상용(金尙容)이 ‘말질정의 박가(朴家)의 절친(切親)으로 설혹 그 일을 관여하여 알았더라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아야 옳지, 함께 삼성(三省)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고, 양사도 삼성에서 국문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으나, 상이 끝내 상용의 의논을 따르지 않아, 말질정이 끝내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박승황(朴承黃)이 자기의 형인 박승종(朴承宗)과 평생 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말질정이 박승종의 부자(父子)에게 무슨 연연한 생각이 있기에 몰래 앙갚음할 꾀를 품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처지에 빠졌겠는가. 다만 이 일이 김류(金瑬)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관 이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곧장 형추(刑推)를 청하여 삼성에서 국문하다가 결국 장사(杖死)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인조 10년 12월 1일 갑자 1번째 기사
자기 집안에 위해를 끼치려 한 범죄자를 처리하기 위해 무려 삼성의 국문을 요구했다는 점, 인조가 그 요구를 받아주고 그것도 모자라 비판하는 사람들을 역으로 체직시켰다는 점, 여기에 연루된 다른 용의자 말질정이 혐의가 석연치 않음에도 곤장을 맞고 죽어야 했다는 점에서, 김경징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2.6. 상소를 올리다

이후 김경징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는데, 1634년 4월 인목왕후의 '폐모론'에 참여했음에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엄히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요즈음 자신이 직접 폐모할 것을 정청하는 데 참여하였던 자가 대각에 출입하면서도 일찍이 한마디도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이 없이 의기양양한 채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공론이 격발되는 것을 어찌 멈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성상소(城上所)의 홍주일(洪柱一)과 상의하여 계초(啓草)를 작성하였는데, 바로 일찍이 정청에 참여하였던 자 몇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는 일과, 정청한 문서 몇 건을 베껴 내어 양사와 전조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동료들에게 간통한 결과, 죄 주기를 청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동료들의 의논이 결정되었으나 유독 문서를 베껴 보내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사간 이경증과 헌납 이시해가 끝까지 고집하였는데, 한 사람은 ‘정청한 문서를 베껴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고, 한 사람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일을 논하는 체모는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늦고 빠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잘못된 견해는 시비를 밝히고 공론을 수립하자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에게 무시당하여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단코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인조는 비록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직책을 계속 맡게 했다. 이후 김경징은 1635년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2.7. 척화를 부르짖다

1636년,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이 화를 내며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인조 14년 2월 26일 신축 2번째 기사 이후 인조는 대신들과 금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때 윤방은 "청이 쳐들어 올 게 분명하니, 미리 강도(강화도)로 피신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김경징은 “지금 중요한 건 방어하는 것이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강화도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여요전쟁이나 임진왜란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의 침공을 대비하여 미리 대피하거나 안전한 곳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은 방어하는 측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 중 하나이다. 윤방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면박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거의 아들 혹은 조카뻘 되는 사람에게.(윤방은 김경징보다 26살 더 많고, 김류보다는 8살이 더 많다.)

그 당시 강화도로의 피신을 반대한 것은 비단 김경징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인 김류를 비롯한 대다수의 서인과, 그 서인 정권이 장악한 비변사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백성을 두고 강화도로 도망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 나라를 황제국이라 인정하는 것이니 '후금'이라고 불러야 한다고도 했다. 마침내는 후금에 사절단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꺼냈다. 청과의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그들은 소위 척화파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조정 신료들 가운데 주화를 논하는 이들은, 이귀, 최명길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서인 정권은 김류 부자를 필두로 척화를 외쳤고, 신중론을 펼치던 소수의 상식인들은 그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16]

아무튼 이 일이 있고 약 1달 후, 윤방은 인조에게 체직[17]을 청하기까지 했다. 이때의 일이 어지간히도 한스러웠던 모양이다.
대신과 비국 당상, 삼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우리 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 마땅히 방어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도성은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니 미리 강도에 들어가서 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오늘날 강구할 것은 방어할 방법이지 피란에 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강도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두 번째의 일입니다."

하였다.
인조 14년 2월 29일 갑진 1번째 기사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강도(江都)를 나라의 보장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조정의 계획이 결정되었고 사민(士民)들이 의지하고 있는 바이니,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매번 묘당에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나라의 계책이 마땅히 묘사(廟社)와 군부(君父)를 만전한 지역에 둔 다음에야 싸우거나 지키거나 함에 있어 군색한 일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침 등대(登對)하는 기회에 망령되이 이에 대해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디 말을 조리 있게 못해 미처 뜻을 다 말하지 못한 채 갑자기 곁에 있던 신료에게 논척당하여 (윤방이 탑전에서 강도로 이피(移避)하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면전에서 논척하였다.) 감히 앞서 하던 말을 끝내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일어나 공격을 하였는데, ‘어떤 자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윤황(尹煌)이 상소한 말이다.) 그러니 사리상 그날로 사퇴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신으로 있는 처지에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에 감히 발끈하여 떠나지 못하고 조당(朝堂)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오늘날까지 있어 왔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들의 상식에 벗어난 말은 마음속에 품어 둘 필요가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 14년 3월 22일 정묘 1번째 기사

2.8. 병자호란

2.8.1. 강도검찰사로 임명되다

1636년 12월 13일 청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조정에서는 한성부 판윤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검찰부사로, 수찬 홍명일을 종사관으로 임명해, 강화도에 파견했다.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천거한 것은 부친인 김류였는데, 이 때문에 김류는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의 안전을 우선시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18]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중략)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후략)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전략)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후략)
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2번째 기사

2.8.2. 이민구와의 돈독한 관계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강화도를 수비할 당시, 김경징은 무슨 일이든 이민구에게 먼저 물어본 후, 그가 시키는 대로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화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민구를 ‘김경징의 유모(乳母)’라고 불렀다.
지평 심대부(沈大孚)가 아뢰기를,
“(중략)이민구(李敏求)의 명망과 재주 그리고 조정의 신임이 어찌 김경징(金慶徵)이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유모(乳母)’라고 불렸다고 들었을 뿐, 한마디 말을 해서 김경징의 행위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보면,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죄(斷罪)할 때 이민구는 마땅히 수악(首惡)이 될 것이니, 이민구가 살아 있는 것은 김경징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후략)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3월 22일(을유) 맑음, 20번째 기록

기록에는 ‘김경징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이민구의 죄 또한 가볍지 않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김경징의 권세와 행적을 고려해보면, 이민구가 바른 말을 했더라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김경징과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며 경계를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이민구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2.8.3. 강화도에서

김경징은 병자호란이 시작되자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 수비를 맡게 되었지만 매일 술을 마시며 경계를 게을리 했다. 또한 김포와 통진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피란민들을 구제한다는 연유를 들어 배로 실어 왔으나,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나눠 주지 않아 모든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 심지어 강화도로 건너갈 때 세자빈조차 배에 태우지 않았고 세자빈이 원망에 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마지못해 세자빈만 태우고 건너갔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후에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심지어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과 연미정 이북 사이에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고, 청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 바다가 있는데, 청군이 어떻게 건너오겠느냐?"면서 방심까지 했다. 보다 못한 원로 대신인 김상용[19]이 "네 나이가 몇인데 어찌 이리도 철없이 구느냐? 네 아비인 김류도 임금을 따라 남한 산성에 갔는데,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라고 꾸짖자 화가 잔뜩 나서 군사 업무를 처리하는 도장을 땅에 내팽개치고는 "내가 알 게 뭐냐! 어떻게 되건 나는 모른다!"라고 씩씩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만주족은 고려시대때 침략해온 몽골족과는 달랐다. 여몽전쟁 당시 몽골의 원나라는 물에 대한 금기[20]가 있어 해전에 약했기 때문에 강화도 농성전은 효과가 있었다.[21] 하지만 만주족은 여진족 시절 요하, 송화강, 압록강, 목단강 같은 큰 강은 물론이고 동해, 서해 바다에서 어업을 해왔고, 심지어 해적질도 했다.[22] 청을 건국한 이후에는 강화도 보다 대륙에서 머리 떨어진 대만 하이난에도 군대를 상륙시켜 정복했다. 그런 만큼 이들이 바다를 넘어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오판일 뿐이었다.

결국 청군이 도해하려는 움직임이 조선군에게 포착되어 김경징 본인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23] 김경징은 여전히 경계를 소홀히하고 있었다. 급기야 청군이 쏜 포탄이 앞에 떨어지자 그대로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민가를 헐어 만든 뗏목을 타고 도해해온 청나라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병사들을 동원해 막거나 왕실을 피신시키지 않고 이민구와 함께 배를 타고 충청도로 도피했다. 방어전을 지휘해야할 총 지휘관의 부재는 유수 장신과 함께 강화도 함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오히려 강화도 방어에 책임이 없는 김상용이나 김익겸[24]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자폭하는 최후를 맞았다.[25]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챙기지도 못했다.[26]

강화도가 함락당한 이후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은 모두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조선 여자들은 청국에 끌려가 화냥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27]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항전의 의지를 잃었고, 결국 청군에 항복했다.

만약 김경징이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왕실 가족만이라도 대피시키는데 성공했다면 강화가 함락당했더라도 비난을 덜 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간신히 대피해서 충청도로 피난했고, 충청도의 병력과 영호남의 근왕군도 올라오고 있었던 데다가 명나라[28]도 이 당시 산둥 반도에서 강화도 방어를 도울 수병을 보내려고 했었기 때문에[29] 조금이라도 버티며 시간이라도 벌었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승산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김경징의 안일한 태도와 무책임한 도주 때문에 이 모든 가능성은 물거품이 되었다.

2.9. 최후

인조는 반정 공신의 아들이라 웬만해서는 용서해 주고자 강계로 귀양 보내면서 덮으려고 했지만, 그가 보여준 추태를 기억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았고, 아버지인 김류마저도 죽어 마땅할 짓을 저질렀다고 비판[30]하면서 1637년 9월 21일,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사약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한 특혜에 가깝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35권, 15년(1637년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9월 21일(병술) 2번째 기사를 찾아보면 어떻게 김경징을 처벌했는지 볼 수 있다. #[31][32]

실록에서는 단지 김경징이 사사당했다고만 나와 있지만, 그에 대해서 매우 안 좋은 일화들이 많이 실려있는 연려실기술에서는 그의 최후까지 매우 찌질하고 비굴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경징은 김류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끝까지 비굴한 모습[33]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니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명예롭게 아들이 잘못이라도 인정하고 스스로 죽겠다고 하면 그래도 위안이라도 받았을텐데, 마지막까지 찌질하고 한심하니 아버지 김류조차도 더는 못 참고 아들의 뺨을 갈기면서 "죽은 네 어미와 처를 생각해서라도 네놈 역시 알아서 죽어야 했다!"고 꾸짖었다고 한다.[34] 결국 끝까지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면서 최후의 발악하다 강제로 사약을 먹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3. 평가

3.1. 실록의 평가

조선왕조실록의 인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그가 죽던 날에 작성한 기록에서 " 김경징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지한 광동(狂童, 즉 미치광이)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고 썼다. 죽을 때도 끝까지 추태를 부리다 죽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김경징이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만 하다.
사신은 논한다. 아아, 강도[35]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정묘년 이후로 시설하여 보장(保障)으로 삼았다. 그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사변이 있을 때에 임금이 머무를 곳으로 삼았으니, 묘당이 참으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맡겨 방어할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인데, 김경징은 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 글을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므로 길에 나가면 거리의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데, 김류(金瑬)는 사랑에 가리워 그 나쁜점을 몰랐으나 사람들은 집안 망칠 자식이라 하였다. 이 때에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이민구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이다. 평생에 시와 술로 자부하고 본디 실용(實用)의 재주가 없었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홍명일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이다. 데면데면하고 느려서 일할 줄 몰랐다. 세 사람이 명을 받고 나갈 때에 세 집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이 매우 화사하므로 서울에서 피란하는 자가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36] 강도에 이르러서는 적병이 날아서 건널 형세가 아니라 하여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피란한 사자(士子)들이 분통 터져 두어 줄의 글을 지어 검찰사의 막하에 보냈다. 그 글에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 어느 날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나고, 이민구와 홍명일도 뒤따르고,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윤방(尹昉)은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성안에 있다가 미처 피해 나가지 못하고 열성(列聖)의 신주를 묻었는데, 청나라 군사에게 도굴되어 조종(祖宗)의 신주가 드디어 다 더럽혀졌다. 아,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인가.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류는 부귀 때문에 이미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3.2. 김경징 옹호론

3.2.1.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김경징에 대해 알려져 있는 일반적인 사실들은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야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정사와 당시 강화도에서 봉림대군과 세자빈 및 원손을 모셨던 문관들이 남긴 문헌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없어 신빙성이 의심된다. 특히 병자록의 경우, 저자 나만갑(羅萬甲)이 '불손한 의도'로 김경징을 깎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나만갑은 1625년 김류가 북인 출신의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김류로부터 "나만갑은 본시 기가 성한 사람이어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니 조정이 장차 안정되지 못할 겁니다."라는 비판을 받고 강동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이귀가 나만갑의 재주를 칭찬하며 김류가 그를 잘못 모함했다며 비난하자, 김류는 격노해 이귀에게 서신을 보냈다.
"양사의 논박이 이미 극심하여 두렵기 그지없는데 또 상신(相臣)의 큰 힘이 가세하니, 외로운 이 사람은 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원컨대 대감(台監)은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주십시오."

이후 나만갑은 1629년 7월에 이조 낭관의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김류는 "나만갑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에 적합하겠습니까."라고 비판해 이를 막았고 인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해 "사론을 주도하고 조정의 의견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했다."며 해주로 유배시켰다. 이렇듯 나만갑은 김류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고 급기야 유배까지 보내지기도 했으니 김류에게 안좋은 감정을 품을 소지가 충분했다.

또한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주화파들의 행적을 편파적으로 비난하고 척화론자들의 언행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시선은 김류의 가족에 대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김류의 아내, 즉 김경징의 어머니와 김경징의 아내가 강화도에서 함락될 때 자결한 사실에 대해 김류의 손자이자 김경징의 아들인 김진표가 자살을 강요했다고 기술했다. 즉, 김진표가 자신의 부인에게 자결을 강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이 광경을 본 김류의 부인과 김경징의 처도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실려 있지만 당시 민심이 김류에게 극히 부정적이어서 김류 집안 부녀자들의 절개를 깍아버리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 또한 같이 기재되어 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 - 연려실기술

또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뒤늦게 들어갔던 예조 판서 조익의 문집 '포저집(浦渚集)'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졸장' 김경징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포저집'에 따르면, 조익은 김경징에게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죽고 싶다. 만약 내가 수백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자, 김경징은 조익 앞에서 슬피 울면서 손을 잡고 위로했다고 한다.

이때 관군 이외의 장정과 피난 온 사람들은 모두 의병으로 차출되어서 더이상 남아있는 자가 없어 병력을 얻기가 참 힘들었기에 김경징 등이 병력을 뽑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즉, 김경징이 강화도 방어를 위해 별다른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그의 비겁하고 안일한 자세 때문이 아니라 병력 자원이 부족해서 새로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익의 기록은 그가 강화도에서 실제로 벌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에 신빙성이 높다. 반면 '병자록'을 지은 나만갑은 당시 남한 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하고 있어서 강화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병자록 외에도 김경징을 비난하는 기록이 많고 인조실록에 기재된 사관들의 논조 역시 김경징에게 지극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지는 기록들은 대부분 나만갑의 병자록이 출판된 후 작성된 것이며, 나만갑처럼 강화도에 체류하지 않은 지은이가 서술한 것이다. 인조실록을 집필한 사관들도 병자록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척화론을 주장한 선비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반면 왕에게 영합해 주화론을 주장한 김류 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그들은 김류의 손자 김진표가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병자록의 근거없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쓰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 책임을 맡은 적이 없다!

김경징은 1636년 11월 26일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가 12월 14일에 다시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되어 세자빈과 세손, 그리고 봉림대군을 호위해 강화도로 모시게 했다. 검찰사(檢察使)는 국가에 관계되는 대사나 군사상의 중대한 일을 검찰(검사하고 살핌)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된 임시 관직이다. 이후 인조는 김경징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적병이 남한 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째 되었다. 군신 상하가 고립된 성에 의지하며 위태롭기가 한 가닥 머리카락과 같은데, 외부의 원병은 이르지 않고 통유(通諭)할 길도 끊어졌다. 경들은 이런 뜻으로 도원수·부원수 및 제도(諸道)의 감사와 병사에게 전유(傳諭)하여 빨리 달려와 구원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 그리고 본부(本府)의 방비도 마땅히 검칙해야 할 것이니, 나루를 건너는 자를 엄히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기어코 회보(回報)하게 하라."

그후 인조는 다시 김경징 등에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징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경징이 강화도 수비를 도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뜻밖의 기록이 포착된다.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원손(元孫)이 모두 병화(兵禍) 중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돌보며 염려하는 뜻이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니, 원손이 다행스럽게 모면한 것은 하늘이 실로 도운 것입니다. (중략) 장신(張紳)의 경우는 강도 유수로서 자신이 주사(舟師)를 총괄하고 있으면서도 천연의 요새를 잘 수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보병 수십 명이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도 방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면서 남보다 뒤떨어질까만 염려하였습니다. (중략) 왕이 답했다.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혹 과할 듯싶다." - 인조 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 기사

이로 볼때 강화도 수비를 맡은 이는 김경징이 아니라 강화도 유수 장신이다. 김경징이 맡은 임무는 세자빈과 세손, 그리고 봉림대군 일행을 경호하는 것이다. 여기에 검찰사의 신분으로 수군을 모아 강화도로 집결시키는 임무도 별도로 수행했지만, 강화도 수비는 어디까지나 강화도 유수 장신과 휘하 장군들이 맡았고 김경징이 따로 부릴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김경징을 왜 이리도 미워했으며 김경징은 왜 처형을 면치 못했을까? 그 이유는 실록에 기재된 기평군 유백증의 상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37년 6월 21일자 기사에 기재된 상소에서, 유백증은 김경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 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중략) 합계(合啓)에 대한 답에 ‘원훈(元勳)의 외아들을 차마 처형할 수 없다.’ 하셨으니, 이것도 김경징이 죄가 없다고 여기시지 않은 것입니다. 연계(連啓)하여 마지않으면 윤허받을지도 모르므로 곧 정계하자는 논의를 일으켰으니, 김류의 권세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김경징은 당초 세자빈과 세손, 봉림대군 일행을 강화도로 모실 때 큰 불경을 저질렀다. 그는 왕실 일행을 사흘동안 나루터에 머물러서 건너지 못하게 해 빈궁이 통곡하게 만들었고 자신과 친한 사람만 먼저 건너게 했다. 또한 그는 사흘 뒤 왕실 일행을 건너게 했지만 백성들이 따라 건너는 걸 허용하지 않아 그를 따라 피난온 백성들이 청군에게 헛되이 죽거나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그를 원망했고 사족들 역시 김경징이 왕실에 불경을 저질렀다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게다가 김경징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시켰을 때 세자빈, 원손 등을 피신시키지 못하고 제 한몸만 건져 육지로 달아나버렸다. 이로 인해 세자빈과 원손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청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결국 김경징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며 이는 당시 죽어 마땅한 범죄였다. 김류로서는 아들을 구하려 했다가는 왕실을 지키지 못한 죄로 집안이 파멸할 가능성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죽게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요약해서 말하자면 김경징의 죄는 강화도 수비를 책임지지 못한 죄가 아니다. 김경징에게는 그것을 책임 질 의무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김경징이 그럼에도 죽어야 했던 이유는 백성을 버리고 사익을 우선했으며 왕실 가족들이 탈출하지도 못하게 만든 죄였다.

3.2.2. 실록의 평가는 부당하다

실록의 평가는 '청서파'를 자처한 사족들의 편파적인 시각이 지극히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실록상의 김경징은 사관들의 논평을 제껴놓고 보면 무능력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인조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뒤엎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광해군의 폐세자가 도주를 꾀하는 걸 조기에 간파해 이를 막아냈다. 또한 나랏일에 대해 여러 차례 간언했고 폐모론을 주장해놓고도 왕의 비호를 받으며 떵떵거리는 이들을 비판했으며 청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파천을 먼저 논의하는 대신을 향해 정면에서 반박하기도 했다. 인조 실록의 사관은 그가 탐욕과 교만을 일삼았다고 하지만, 그가 뇌물을 받았다던가, 백성을 해쳤다든가 같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로 볼때 그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병자호란 이전까지 큰 문제없이(공조 참판 시절 군관에게 곤장을 쳤다가 그만 죽여버린 것 빼고) 관직 생활을 순탄하게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세손 등 왕실 일행을 호종하는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사형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야사의 기록처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그와 함께 강화도에 있던 조익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며 강화도의 허술한 수비를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강화도에 집결한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다들 도망쳐 버려서 성을 수비하는 군사는 수백에 불과했다고 한다. 게다가 장신은 강화도 방위와 관련해 김경징과 여러번 마찰을 빚은 끝에 아예 김경징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런 그가 강화도 함락의 원흉으로 지목당해 지금까지 손가락질 당한 것은 청서파를 자처한 사족들의 일방적인 비난이 후세까지 전해져 세간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와 김류 등 공신 세력은 척화론을 주창한 사족들 때문에 패전을 겪게 되었다며 그들을 징벌하려 했다. 이에 사족들의 여론을 주도하는 척화파는 격렬하게 맞섰고 주화파야말로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할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 세력의 충돌은 강화도 문제에서 특히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는 자신에게 영합한 김류의 아들을 지켜주고 싶어했는데, 이는 김류가 입지를 온전히 누려야 자신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화를 주창한 사족들은 김경징이 왕실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결국 김류는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후 척화파를 옹호한 사족들은 강화도 함락의 모든 책임이 김류의 아들 김경징에 있다고 몰아붙였고 이 여론이 후대까지 이어지며 이야기에 살이 뭍으면서 오늘날 희대의 졸장 김경징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경징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도망간 것은 맞으며, 그러니 그가 받은 벌이 억울한 것은 아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데 아버지조차 어쩔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삽질이 엄청났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경징이 강화도 함락의 원흉이라는 세간의 시각은 사실과 거리가 멀며 김경징은 지은 죄 이상의 비난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후에 복권이 논의조차 되지 않았으니 평가를 달리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효종 대부터 척사를 주장한 사족들이 대대로 집권해서 복권을 논의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왕실을 보존하지 못한 죄의 무게가 커서 감히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 김경징이 다르게 평가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3.3. 김경징 비판론

3.3.1. 김경징 관련 기록의 신빙성

위 항목에서는 김경징의 악행에 대한 기록들은 신빙성이 의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김경징을 비난하는 기록 중 하나인 병자록의 경우, 저자인 나만갑은 당시 강화도에 체류하고 있지 않았으며, 김경징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따라서 나만갑이 김경징을 악의적으로 폄훼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조익의 포저집에 나오는 김경징의 행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
  • 김경징을 비난하는 기록이 병자록 하나뿐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은 병자록이 출판된 이후 작성된 것이거나 혹은 당시 강화도에 체류하지 않은 인물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성이 떨어지고, 병자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강화도에서 직접 봉림대군과 세자빈 및 원손을 모셨던 문관들이 남긴 문헌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없다.
  • 실록에서도 김경징에 대해 좋지 않게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청서파의 편파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 청서파는 공서파와 대립하고 있었으며 김경징은 공서파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사관들이 청서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김경징은 주화파와 척화파 간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죄를 뒤집어 쓴 것이다.

하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이어질 항목에서 후술한다.
3.3.1.1. 병자록과 병정기사
첫 번째 주장부터 살펴보자.

나만갑은 김류 부자(父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37] 청서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시 강화도에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병자록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반대파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은 것은, 위에 제시된 사료를 보면 알 수 있듯 김류가 아니라 나만갑이다. 나만갑은 14년여의 공직생활 중 8년에 가까운 세월을 김류의 모함에 의해 귀양을 가거나 외직을 전전해야 했다. 이는 실록이 증명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병자록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타당하지만, 그 원인은 나만갑이 아니라 김류 부자에게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롭고 올바른 김류 부자를 질투한 나만갑이 병자록을 통해 악의를 품고 그들을 왜곡했다.'가 아니라, '김류의 참소와 비방에 의해 본인은 물론 주변인까지 억울하게 외직으로 좌천된 전적이 있으니, 병자록에 나만갑의 억하심정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다.'가 맞는 말이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이런 이유로 병자록의 내용을 전부 부정하는 것 또한 지나친 비약이다. 김류와 김경징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병자록뿐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익은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당시, 인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친 인물이다. 인조 15년 2월 20일 경인 4번째 기사 인조 16년 7월 22일 계미 3번째 기사[38] 이 때문에 포저집(이하 병정기사)[39]은 조익이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기 위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자료이다. 병자록을 반박하는 근거로 병정기사를 가져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게다가 위의 주장과는 달리, 병정기사에는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며 강화도의 허술한 수비를 걱정했다.’는 내용이 없다.
(전략)
19일에서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을 계속 분비국(分備局)에 가서 보니,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가 담당하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로 하는 일은 없고 단지 문서를 수응(酬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중략)언젠가 분비국에 가서 김경징과 이민구에게 말하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경성(京城)에까지 육박해 왔을 때에 이정암(李廷馣)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가인(家人)이 구해서 살린 적도 있고, 옛날에 숙손소자(叔孫昭子)가 계손(季孫)이 임금을 쫓아낸 것을 통분하게 여겨 축종(祝宗)에게 죽게 해 달라고 빌게 한 고사도 있는데, 지금 나도 참으로 죽고만 싶다. 만약 내가 수백 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하자, 김경징이 나를 보고 슬피 울면서 손을 잡고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때 관군(官軍) 이외에 남정(男丁)과 피난 온 사람들은 모두 의병(義兵)으로 차출되어 더 이상 남아 있는 자들이 없다 보니 병력을 얻기가 참으로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이민구가 병력을 얻을 계책을 강구해 보았지만 그것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략)변보(變報)를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떤 이가 뿔피리를 불어서 군사들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김경징은 그렇게 할 경우에 인심을 경동(驚動)시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단지 성 안의 무사들만을 모아서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그 숫자는 겨우 7, 8십 명에 불과하였는데,(후략)
포저집 병정기사
병정기사의 서술을 요약하면, '김경징과 이민구를 3일 내내 지켜봤는데, 안에 틀어박혀서 종이만 만지고 있더라.' '내가 나랏일이 걱정된다고 한탄하자 울어줬다.'(...) 정도가 된다. 결국 병정기사의 내용대로라면, 김경징은 지척에 있는 적을 경계하기는커녕 안에 틀어박혀서 일하는 척이나 하며 잡담이나 나누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나마 김경징을 변호할 만한 기록은 '병력을 얻기가 힘들었다.'는 내용 정도이다. 그러나 '관군 이외에'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듯, 병력을 증원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 인원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 강화성에는 수백의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병정기사에 따르면, 청군이 도하하려 한다는 보고를 듣고도, 김경징은 병력을 집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7,80명 정도의 소수만을 데리고 전장으로 향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즉, 병자록에는 저자인 나만갑의 주관이 반영되었다는 의혹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 내용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또한 병자록을 반박하기 위한 자료로 병정기사를 가져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병정기사 역시 조익이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기 위해 작성했다는 의혹이 있는데다, 김경징을 옹호할 만한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3.3.1.2.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은 병자록뿐인가?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강화도에 없었던 인물들이 남긴 기록은 좋게 보아도 남에게 들은 것을 받아 적은 것일 테니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후대에 작성된 기록 역시 당대의 기록에 비해 정확성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병자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이 병자록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도일기는 병자호란 때 경기좌도수군판관이었던 어한명이 남긴 기록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김경징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경징의 이미지와 대동소이하다.
나(어한명 자신)는 곧장 그 사람을 따라가 그(김경징)를 만나 보았는데, 한참을 이야기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하늘을 쳐다보고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부채를 들고서 흔들며 말하기를, “무엇을 어찌하겠소, 무엇을 어찌하겠소?”라고만 할 뿐이었다. 조금 후 덕포 첨사(德浦僉使) 조집이 배를 타고 오자 그는 기쁜 얼굴로,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가속을 태워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어한명은 봉림대군을 수행하며 강화도의 참상을 직접 체험했으며, 조정의 관료들과는 면식이 없었다.[40] 특정 당파의 성향이 없는 중립적인 인물이 기록한 만큼, 강도일기의 김경징에 대한 서술은 병자록이나 병정기사의 그것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병자록을 비롯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와 큰 차이가 없다.

봉상시정 이시직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있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사복시주부 송시영과 함께 자결했다.[41] 그는 노복에게 자신이 죽으면 매장해줄 것을 부탁하며 아들에게 유서를 부쳤다. 유서의 내용은 실록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전략)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중략) 송시영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

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 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42]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후략)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9번째 기사
저기서 말하는 '취한 장수'가 누구인지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욕되게 살려고 한다.'는 서술을 통해 싸움을 피해 도망친 인물임을, '나라를 배반했다.', '파수하는 일이 와해되었다.' 등의 서술을 통해 강화도가 함락된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강도검찰사 김경징.[43]
'김경징은 청군을 목전에 두고도 술잔치나 벌이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특정 부류의 악의가 담긴 중상모략이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이 직접 목격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경징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당대의 기록이 병자록뿐이라는 주장도, 김경징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기록은 현장에 없던 사람이 병자록을 보고 받아 적어 탄생한 것이란 주장도 틀렸다.
3.3.1.3. 김경징은 세력간 충돌의 희생양인가?
세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은, 어느 집 개가 벼락 맞아 죽은 것까지 기록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과, 기존의 기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후세가 판단할 수 있게 그대로 남겨두는 공정성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사관의 주관이 반영됨을 감안하더라도, 읽는 사람이 진상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장 위의 항목에서도 김경징을 옹호하는 근거로 실록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공서파와 청서파로 나뉜 것은 사실이고, 김류, 최명길 등의 주화파가 척화파의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김경징은 주화파와 척화파 간 대립의 희생양에 불과하다고 볼 수는 없다. 실록의 졸기들을 살펴보자.
(전략)
김류는 근엄한 마음과 굳센 의지에 기국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공보(公輔)의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계해년에 정사원훈(靖社元勳)에 책봉되어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이조 판서로서 문형을 맡았고 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섯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었다. 추숭(追崇)과 강옥(姜獄)이 있을 적에는 모두 정당함을 지켜 동요하지 않아 끝내 대계(大計)를 도와 이루고 국본(國本)을 정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후략)
전 영의정 승평 부원군 김류의 졸기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윤3월 5일 경오 1번째기사
(전략)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 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 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중략)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졸하자 상이 조회에 나와 탄식하기를 "최상(崔相)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석하다." 하였다.
완성 부원군 최명길의 졸기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 5월 17일 정사 2번째 기사
전 부제학 이민구(李敏求)가 죽었다. 이민구의 자는 자시(子時)인데 이조 판서 이수광(李晬光)[44]의 아들이다. 젊어서 뛰어난 재능이 있어 사마시와 문과에 모두 장원하였다.(중략)묻혀 지낸지 30년에 마침내 불행하게 죽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많이 그의 문장을 아깝게 여겼다.
전 부제학 이민구의 졸기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2월 19일 정축 4번째 기사
(전략)이민구는 고 재상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문장으로 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민구와 그의 형 이성구(李聖求)는 모두 외과(巍科)에 발탁되어 좋은 벼슬에 올라 명예가 매우 융성하였다.(중략)세월이 오래되자 조정에서도 혹 그의 글재주를 아깝게 여겨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도 있었으나 번번이 공론에 부딪쳐 저지되었다. 폐기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그 사람됨이야 참으로 논할 것도 없으나 시문(詩文)은 모두 그의 무리에서 탁월하게 빼어났으니, 역시 근래에 드러난 자였다.
전 재신 이민구의 졸기 현종개수실록 22권, 현종 11년 2월 19일 정축 4번째 기사
(전략)조익의 자는 비경(飛卿)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잠심하였고 젊어서 급제하였다. 일찍이 과제(課製) 때에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을 지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보고 ‘세상에 어찌 이만한 식견이 있는가.’ 하였다.(중략)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자제로서의 일을 늙어도 게을리하지 않고 지켰다. 상중에 있을 때에는 3년 동안 죽을 먹고 밤낮으로 호곡하여 피가 침석(枕席)을 적셨다. 늘 공경을 지키고 본심을 간직하는 것을 일생의 공부로 삼았고 종일 바르게 앉고 병이 있지 않으면 비스듬히 기댄 적이 없었다.(후략)
좌의정 조익의 졸기 효종실록 14권, 효종 6년 3월 10일 을미 2번째 기사

김류와 최명길의 졸기를 보면, 병자호란 때의 행적을 비판할지언정,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하고 있다. 강화도 방어전 당시 김경징과 마찬가지로 업무에 태만하다 적전도주했던 이민구조차도, 졸기에서는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아깝게 여겼다.’는 등 좋은 말을 남겨놓았다. 인조를 호종할 임무를 내던지고 강화도로 도망친 조익마저도 학식이 깊고 효심이 지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사관들은 자신과 성향이 다르거나 혹은 행적에 흠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무작정 비방하고 헐뜯지 않았다. 게다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예우로라도 좋은 말을 써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경징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다. 좋게 말하고 싶어도 그럴 거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경징이 사형을 받은 것은 그가 진영 간 대립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위의 '생애' 항목을 살펴보자. 김경징은 아비의 권력에 의지하여 재시험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혜택을 누렸고, 군관을 장을 쳐 죽였다. 나만갑이 군관 장살에 대한 처벌을 주장한 대사헌 정엽의 사위란 이유로, 그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시켰다.[45] 또한 자기 집 종이 저주를 한 일로 무려 국문을 청하는 등 과도한 요구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혐의가 분명치 않았던 말질정까지 장을 쳐 죽였다. 그 패악질은, 큰아버지뻘 되는 조정 대신인 윤방을 면전에서 망신줄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강화도에서의 행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김류가 주화파였기 때문에 아들인 김경징까지 함께 척화파에게 비판을 받았다.'는 주장도 틀렸다. 김류 부자는 서인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척화파였다. 김경징이 척화파라는 것은, '강화도로 피하자.'는 윤방의 건의에 "싸우는 게 우선이다."라고 반박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척화파는 '백성들을 두고 섬으로 피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도덕적으로야 바른 말이었지만, 척화파는 말만 무성했을 뿐 다가올 전쟁에 대한 준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김경징 역시 맞서 싸우자고 혓바닥만 놀렸을 뿐, 강화도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는 자신의 직무를 무시하고 허송세월하다가 적이 바다를 건너오자 냅다 도망쳤다. 또한 척화파였던 김류도 병자호란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오르게 되자 돌연 입장을 바꿔서 최명길의 주화론으로 갈아탔고, 전후에는 "나라를 망친 척화파들을 처벌해야 한다."며 척화파의 처벌에 앞장섰다. 김류와 김경징은 주화파여서 비방을 받은 것이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의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보 때문에 비판을 받은 것이다. 부자가 쌍으로.

3.3.2.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전에 책임이 없는가?

인조 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 기사는 ‘김경징의 임무는 강화도 방어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볼 수 없다. 김경징의 임무는 적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병자호란 당시 김경징의 직위는 강도검찰사였다. 검찰사는 조선 시대의 임시직으로, 중대한 사변이 발생했을 때 군사상의 중대한 일을 검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강도는 강화도를 뜻하니, 강도검찰사의 임무란 강화도의 군무를 확인하고 감찰하는 것이다. 외적으로부터 강화도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그곳의 군무를 검찰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김경징이 강화도 방어와는 무관한 일을 맡았다고 할 수 있는가.
주강에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검토관 윤강이 아뢰기를,

"신이 근래에 대관(臺官)이 피혐하는 일을 보니,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강도를 지키지 못한 신하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장신은 이미 죽었는데 김경징(金慶徵)만 어찌 모면하겠습니까. 홍주일(洪柱一)의 말은 진실로 놀랍습니다. 서경우(徐景雨)는 일찍이 헌부의 장관이 되어 피혐하는 글 중에 은근히 보호하는 뜻을 보였으니 매우 괴이합니다. 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을 율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윤허하지는 않았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5월 8일 을해 3번째 기사
헌납 권심(權淰)이 아뢰기를,

“신이 김자점(金自點) 등이 군율을 어긴 죄에 대해 형벌을 청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중략)김경징(金慶徵)은 이미 검찰(檢察)의 직임을 받고서 수어(守禦)하는 대비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적병(敵兵)이 강에 다다랐을 때 자신이 나루터에 있으면서 무리를 독려하여 저항해 대적할 계책을 행하지 않고서 지레 도주하여 묘사(廟社)와 빈궁(嬪宮)이 일시에 함몰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의 도리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바이고 나라의 법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어찌 훈귀(勳貴)라고 하여 너그러이 용서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후략)
승정원 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25일(임술) 맑음
부제학 이경석(李景奭), 부수찬 유철(兪㯙) 등이 상차하기를,

"국가의 상란(喪亂)은 이미 지극하다 하겠거니와, 하늘이 거의 재앙을 그만 내릴 만한데 변이(變異)가 일어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중략)천연의 요새지인 강도(江都)가 함몰된 것은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당초 합계(合啓)가 시작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김경징(金景徵)을 곧 처형하지 않다가 한 해가 거의 다 되어서야 비로소 사사(賜死)하였습니다.(후략)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0월 7일 신축 1번째 기사
양사가 합계하기를,

"윤방과 김류는 다 나라를 망친 대신입니다.(중략)강도를 지키지 못한 죄를 어찌 김경징만이 당해야 하겠습니까.(후략)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2월 11일 을사 1번째 기사
(전략)
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적격자가 아니어서이니, 이것이 어찌 지형이 그래서였겠는가. 그런데 지금 급급히 소재지를 옮기려 하니, 비록 초나라의 방성(方城)과 한수(漢水) 같은 천험의 형세를 얻는다 하더라도 다시 김경징(金慶徵)·장신(張紳)과 같은 자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면 전과 같을 뿐이다. 묘당은 적임자 얻을 생각은 않고, 읍만 옮기려고 힘쓰니, 아, 이상하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1월 22일 병술 1번째 기사
(전략)
김경징이 강도(江都)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대간들이 안율(按律)하라는 청이 있었습니다만 얼마 아니 있어 정지하였으니, 그것은 인조(仁祖)께서 사정(私情)을 따른 엄한 전교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군주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병(權柄)을 가지고 있는데도 권세(權勢)있는 사람에게는 감히 법대로 행하지 못하고서 손을 양사(兩司)에게 빌리려고 하십니까? 전하도 그를 오히려 두려워하시면 양사에서만 이를 괴로와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인조께서 노하시어 김경징의 죄를 바루라고 명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리석은 신하가 전하에게 바라는 것은 인조(仁祖)께서 말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으로 본받는 것입니다."
(후략)
숙종실록보궐정오 16권, 숙종 11년 4월 15일 갑진 1번째 기사

물론 검찰사는 전쟁하는 장수가 아니니, 강화도가 함락된 잘못을 김경징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강화도의 방어와 그와 관련된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관서는 강도유수부였으며, 그 우두머리는 강도유수 장신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징이 장신과 마찬가지로 처형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중략)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

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3번째 기사
(전략)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평소부터 강화 유수 장신(張紳)과 잘 지내지 못한데다가 수상(김류)의 세력을 믿고서 자주 장신과 더불어 병권을 다툰 바람에 어긋난 일이 많았으므로 남한 산성에서 두 번이나 교지를 내려 그치게 하였다.
(후략)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2월 19일 정축 4번째 기사

김경징은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 태세에 만전을 기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임무를 태만히 하였고, 오히려 장신과 반목하며 내분을 일으켰다. 인조가 직접 나서야 했던 것을 보면, 둘의 갈등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군이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왕족 일가와 자기 가족마저 내버려두고 자기는 꽁무니를 빼버렸다. 김경징이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죄를 장신과 함께 받은 것은 합당한 처사였다.

3.3.3. 김경징의 사형은 부당하고 과도한 처벌이었는가?

위에서는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의 책임이 없었으며, 단지 왕실 가족들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왕족을 지키지 못한 벌이 처형이라는 것은 과하다.’는 뜻이거나, 혹은 ‘김경징은 강화도 함락의 책임이 없었다.’는 뜻이거나, 혹은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잘못이 왕족을 지키지 못한 잘못보다 크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이든 잘못되었다.

조선은 왕조국가이고, 사대부는 그 체제 아래 많은 혜택을 누린다. 그 권력은 국가의 체제를 수호하는 의무가 전제된 것이고, 그 중 가장 중대한 것이 바로 왕가를 지키는 것이다. 게다가 김경징이 맡은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왕족 일가의 호위였다. 그는 사대부의 도의적 책무이자 왕이 직접 내린 임무를 무책임하게 내던진 것이다.

게다가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을 뿐, 김경징 또한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철통같이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들과 조익의 병정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업무를 소홀히 했고, 전투가 벌어져 강화성이 함락됐을 때는 혼자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김경징이 사사된 것이다. 그에게 맞는 형벌은 사형이나 그 이상의 것이었다. 오히려 일가족이 오랑캐에게 포로로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김경징을 두둔하던 인조가 이상할 지경이다.[46][47]

3.3.4. 말만 번지르르했던 위인

생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김경징도 바른 말을 하긴 했다. 인조가 황실의 세금 면제에 대한 비판에 침묵하자 이를 비판했고, 폐모론에 참여한 자들을 엄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48] 윤방의 강화도 피난 건의에 대해 "싸울 생각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느냐."고 비판한 것도, 말 자체는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전부 말뿐이었다는 것.

김경징은 남이 잘못을 저지르면 추상같이 비판했지만, 본인의 잘못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이미 앞에서 한번 언급했지만 그의 삶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아버지 덕분에 과거를 다시 준비할 필요 없이, 하이패스로 최종 시험을 치르고 과거 급제자 행세를 했다. 반정공신들의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일군 것도 없이 반정 2등공신에 올랐다. #[49] 경솔하게 곤장을 치다가 군관을 때려죽였다. 일개 범죄자를 무려 국문에 처해, 마찬가지로 곤장 맞아 죽게 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는 역할을 맡고도 일은 않고 놀기만 하다가, 적이 바다를 건너오자 모두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 이렇듯 김경징의 생애는 특혜, 비리, 폭력,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 말과 행실이 따로 노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3.3.5. 위선적이고 잔혹한 일면

앞서도 살펴봤듯이, 국문이나 곤장에 대한 이야기가 유달리 많다. 반정 이후 류희분의 종 이말질수를 국문하여 죽이고, 공조참판 재임 중에는 군관을 곤장 때려죽이더니, 또 자기 집 종의 처벌을 위해 국문을 요구하여 말질정까지 곤장 맞아 죽게 만들었다. 그나마 이말질수의 경우는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있지만,[50] 다른 경우는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군관 장살(杖殺) 건은 김경징의 위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곤장을 치다가 사고로 죽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군관을 장살한 것이 고의는 아니었을 수 있다. 면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후의 처신이다. 사헌부의 간언으로 말미암아 삭직을 당하자, 대사헌 정엽은 물론이고 그의 사위인 나만갑에게까지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결국 상소도 대죄도 그저 그 뒤에 이어질 인조의 훈계를 수단삼아 벌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쇼에 불과했던 셈이다.

말질정의 장사(杖死)는 김경징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김경징은 “계집종 칠향이 저주를 했다.”며 국문을 요구했는데, 증거라고는 본인의 주장뿐이었다. 칠향의 국문은 인조의 총애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때문에 보다 확실한 증거의 제시가 불가피했고, 그래서 고문으로 칠향의 자백을 받아냈다. 문제는, 말질정(칠향이 자신의 배후라고 지목한)이 실제로 저주를 사주했다는 증거 역시 없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또 곤장을 쳤지만, 말질정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다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칠향의 저주도, 말질정의 사주도, 모두 김경징의 주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사의 간원들이 말질정의 국문을 반대한 것도,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이 말질정을 동정하고 김류 가문을 비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아버지인 김류 또한 이괄의 난 때 역모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던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시킨 전적이 있다. # 명확한 증거도 없이 모조리 죽인 것이라 당시에 논란이 매우 심했다. 결국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이귀가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들을 신리(申理)해달라는 차자를 올렸는데, 김류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그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 어쩌면 김경징의 폭력성은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일은 않고 놀기만 해서 아내인 박씨에게까지 비판을 들었는데, 이에 "여자가 뭘 아느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야사라서 일화의 신빙성에는 의심이 가지만, 박씨의 높은 절개는 역사에도 남아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는 남편이 목숨 아깝다고 도망칠 때, 집안의 다른 부녀와 함께 자결로 생을 마감하여, 후일 사세충렬문에 열녀로 모셔졌다.
(전략)
○ 김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근(根)의 딸)ㆍ경징의 아내 박씨(효성(孝誠)의 딸)ㆍ진표(震標)의 아내 정씨(백창(百昌)의 딸) 및 김류의 첩 신씨ㆍ경징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아울러 정려하였다.《강화지》
○ 그때 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었다. 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 하니, 두 부인이 이어서 자결하고 일가 친척의 부인으로서 같이 있던 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 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혹자는, “진표가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일컬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강화지》
(후략)
연려실기술 中

3.3.6. 실록의 평가는 합당하다

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김경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나마 조익의 병정기사나 이민구의 답정판서서(동주집)에 김경징을 변호할 만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전략)이때 관군(官軍) 이외에 남정(男丁)과 피난 온 사람들은 모두 의병(義兵)으로 차출되어 더 이상 남아 있는 자들이 없다 보니 병력을 얻기가 참으로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이민구가 병력을 얻을 계책을 강구해 보았지만 그것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중략)그리고 사시(巳時)쯤 되었을 때에 판옥(板屋)의 대선(大船)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이것은 필시 남방의 전선(戰船)이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배들이 나루를 수백 보쯤 앞에 두고서 모두 정지한 채 전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장신이 거느린 경기(京畿)의 전선들이었다.(중략)오시(午時)쯤 되었을 적에 적의 선박이 차례로 건너오기 시작하자, 검찰 등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주사(舟師)의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주사는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후략)
병정기사中
(전략)며칠 뒤에 무인 최상원(崔尙元)이 남한산성으로부터 밀랍으로 봉한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수륙(水陸)의 방비를 모두 유수 장신(張紳)에게 위임하니 간섭하는 문제가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틀 뒤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승려가 또 남한산성으로부터 왔는데 유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대개 행조(行朝)에서 밖의 포위망이 단단하므로 최상원이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앞의 유지를 다시 내린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애초에 강화도를 방어할 책임이 없었고, 조정의 뜻도 이와 같았으니 강화도의 기무(機務)에 대해서는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김경징과 장신이 많은 말로 옥신각신 다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때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문득 패망의 원인이 되겠습니까. 장신 또한 적을 바라만 보다가 일을 그르쳐 나라가 잘못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나치게 사람들의 뜻을 따라 군사를 징발하는 데 신중하였으니, 오랑캐들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간혹 군교(軍校)들이 와서 적들의 실상을 보고하고 동료들이 더욱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권하는 말을 했지만, 문득 지나친 걱정이며 쓸데없이 겁을 내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그의 지기가 대단히 사나워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니, 이것도 천운(天運)입니다.(후략)
답정판서서中
그러나 조익과 이민구는 자신의 떳떳치 못한 행적을 변호하기 위해 해당 저작들을 남겼다는 의혹이 있다.[51][52] 특히 답정판서서에 ‘검찰(강도검찰사, 검찰부사의 업무)은 싸우는 일이 아니다.’ ‘강화도의 일은 우리(김경징, 이민구) 관할이 아니다.’ ‘장신은 청군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 보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민구는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잘못을 모조리 장신에게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는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전투에 대한 부분이라면 모를까,[53] 인물들에 대한 서술은 다른 자료와 대조할 필요가 있다.

김경징은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 태세에 만전을 기할 책임이 있었다. 또한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가를 호위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임무들을 모조리 내팽개쳤다. 적을 경계하기는커녕 이민구와 함께 안에 틀어박힌 채로 검찰을 소홀히 했다. 싸우는 장수도 아니면서 대장 행세를 하며 장신과 병권을 다투었다. 강화도로 건너갈 적에는 왕족 일가보다 가족을 먼저 태워 보내고, 청군이 상륙했을 때는 왕족 일가는 물론이고 가족조차 내버려두고 달아났으니, 왕족 일가를 지키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김경징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록에서 김경징을 괜히 미친 새끼(狂童)라고 칭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런 멸칭이 합당할 정도의 중죄를 지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만이 부각되어, 그 이전의 만행들은 묻혀버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은 잘못에 비해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4. 기타

  • 조선 시대 고전소설 강도몽유록(작자는 불명)에선 병자호란 당시 죽어나간 부녀자들이 원혼으로 나와 밤길에 한 정자에서 모여 한탄하면서 당시 조선 위정자들을 적나라하게 깔때 김경징, 김류를 이런 이들을 오냐오냐 봐준 인조까지도 찌질이로 미치도록 깐다.
  • 민담에는 김경징이 '육갑병신(六甲兵神)'이라는 신장(神將 : 신들의 장군)을 부리는 술법을 알아 업무에 태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신장을 불렀는데, 신장이 오지 않았다. 강화도가 거의 함락될 쯤에 신장이 나타났는데. 김경징이 "뭐하다 늦었냐!"며 항의하자 이 신장 왈, " 홍타지가 불러서 그쪽에서 싸우느라 늦었다"고 했다. 바리에이션으로 나는 명나라 신장이라서 청나라 앞에선 힘을 못 쓴다고 하며 사라졌다는 버전도 있다. 결국 김경징은 패배했고, 이후에 ' 육갑 병신'은 욕설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민담에서도 이리 대놓고 깔 정도. [54]
  • 김경징의 성씨인 순천 김씨(順天 金氏) 문중에서는 가문의 인물 중 하나인 김경징에 대해 '부당한 곡식분배'와 '태만한 방어 대책'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으나, 강화도의 수비병력이 부족하며 해변 방어를 포기하고 성 방어를 하려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백성들이 흩어져 성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언급을 통해 강화도의 함락 건을 김경징이 아닌 열약한 강화도의 사정으로 은근슬쩍 떠넘기고 있다. 충청 방면으로 도주했다는 점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덤. 또한 강화도 수비 실패 이후 탄핵을 받은 것에 대해 붙임말을 붙였는데 역시나 실드에 가깝다.
  • 김경징과 그가 충실히 섬겨야 할 사람인데 완전히 실패했던 인조14촌 사이다.[55]

5. 사극에서


[1]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2번째기사 [2]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이다. [3] 후술하겠지만 파방(罷榜)되었다. [4] 『논어』 강서를 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응시자가 첫 번째 통에서 「학이편」을 뽑고, 두 번째 통에서 12번을 뽑았다면, 시관은 강지에 『논어』 「학이편」 12번째 대문이라 기록하고, 응시자의 고강을 들은 후 성적을 평가한다. [5] 신유년 별시 급제자 중 유씨는 병과 4위 류두립(柳斗立), 병과 7위 류정립(柳正立), 병과 10위 류중립(柳中立), 병과 35위 류익립(柳益立) 4명뿐이다. 이중 류정립과 류익립이 류희분의 아들로, 류익립이 형이고 류정립이 동생이다. 류두립은 아버지가 류희량(柳希亮)이고, 류희량은 류희분의 동생이다. 그리고 류중립은 아버지가 류희발(柳希發)인데, 류희발은 류희분의 동생이고 류희량의 형이다. 신유년 알성시 급제자 중 류씨는 을과 1위 류명립(柳命立) 한 명뿐이다. 류명립은 류희분의 아들로, 류정립과 류익립의 동생이다. 따라서 오류(五柳)란, 류두립, 류정립, 류중립, 류익립, 류명립, 이들 다섯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 신유년 별시의 병과 36위 박취장(朴就章)은 박홍구(朴弘耉)의 삼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박홍구의 아들은 박취장으로 보인다. [7] 參榜.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 문과 급제자의 명부)에 이름이 오름. [8] 이전 기록에는 개시에서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실록을 보면 1623년 5월에 김경징은 이미 형조좌랑이었다. 인조 1년 5월 7일 병신 5번째 기사 그리고 개시는 8월 12일에 시행되었다. 즉 김경징이 형조좌랑이 된 것은 개시 급제 때문이 아니다. [9] 남이 지은 글을 자신의 답안지에 적어 자기 글인 것처럼 써내는 행위. [10] 판서 직만 면직되었고, 겸직하고 있던 다른 직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1]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천거한 사람이 김류이다. [12] 박정, 유백증, 나만갑, 김반, 이소한, 이들 다섯이 대사헌 남이공의 체직을 주장했다. 인조는 장관과 상의도 없이 나섰다는 점을 죄목으로 그들을 외직으로 좌천시키려 했다. 남이공을 천거했던 김류 역시 이들 다섯의 처벌에 찬성했는데, “박정과 나만갑이 주도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따라 나선 것이니, 박정과 나만갑은 중벌을 주되 다른 셋은 처벌을 가볍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상헌, 이준 등 조정 신료들은 “박정 등이 장관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 맞지만, 남이공은 대사헌에 적격이 아니라는 그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벌을 주는 것은 과하다.”고 맞섰다. [13] 서인 중,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한 이들을 공서,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을 청서라고 한다. 청서파는 반정공신들이 관직을 독점하는 것을 비판했으므로, 자연히 공서파와 대립하게 된다. 반정을 주도한 김류는 공서파의 대표였고, 청서파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인조는 서인과 공서의 독주를 막고자 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가 바로 소북의 영수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발탁한 것이었다. 청서파의 거두 김상헌은 반정 직후부터 시종일관 남인과 북인의 배제를 주장했으므로, 김류가 남이공을 천거한 것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리고 여기에 가세한 것이 청서의 소장파였던 박정, 유백증, 나만갑, 김반, 이소한이었다. 공서와 청서 간 갈등이 격해지자, 인조는 당사자인 남이공은 외직인 함경감사로 발령했고, 박정과 나만갑은 귀양 보냈으며, 청서의 의견에 동조했던 이귀 역시 파직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김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14] 나만갑의 좌천을 주도한 인물이 김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15] 내용 자체는 최명길의 만언차를 비판하고 있으나, 나만갑과 관련 인물들의 좌천이 과도한 처벌이며 김류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은 인정하고 있다. [16] 여담이지만, 공서와 청서 간의 정치 갈등에 관여한 인물들은 서인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또한 공서의 일원인 김류 부자는 척화를 주장했는데, 이는 청서를 비롯한 서인 대다수의 의견이기도 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서파와 청서파는 별도의 정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신념이나 가치관 때문에 파당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17] 遞職. 관직이 바뀌는 것. 임기가 만료되거나 상피의 법이 적용되는 경우,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는 등의 문제가 있는 경우 체직되었다. [18] 당시 강화도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또한 검찰사의 임무는 말 그대로 군무 검찰로, 직접 나가 싸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아들을, 가장 안전한 곳의, 싸우지 않는 자리에 앉혀놓았으니, 사람들 눈에 김류 부자가 어떻게 비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19] 1561년 ~ 1637년 / 주전파의 대표 인물이었던 김상헌(1570년 ~ 1652년)의 친형이다. [20] 고립된 내륙 지역에 자리한 몽골은 홉스골 호와 케룰렌 강, 오논 강,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시라무렌 강, 러시아 부랴티야 자치 공화국의 바이칼 호 등을 제외하면 큰 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지형이 거의 없다. 홉스골은 큰 호수는 아니지만 몽골 공화국 영내에서는 가장 큰 물로 배도 다니며 시라무렌 강은 내몽골 자치구 내에서 유일하게 큰 하천이다. 그래서 물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에 몸을 씻는 것을 기운이 빠져나간다는 미신이 있어 물에 닫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래서 물에서 나는 물고기 새우 등의 수산물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길 정도로 물에 대한 금기가 상당히 강했다. 심지어 칭기즈칸 때 제정된 법에 의하면 물에 배설할 시 사형으로 다스렸다. [21] 다만 해전에 약한 것은 통일 몽골 제국 때에만 국한된 일이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뒤로는 바다 사정에 밝은 광둥, 푸젠, 저장성 출신의 중국 한족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몽골도 해전에 몹시 능해졌다. 범문호, 유복형 등 옛 남송의 수군 항장들과 한족 출신 선박 기술자들의 가세를 바탕으로 원나라 시기 배를 타고 베트남이나 일본을 쳐들어가거나 여몽 전쟁 종전 후 고려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삼별초 세력들의 거점지인 제주도와 진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 원정 해상 기후도 고려하지 않아 태풍에 쓸려나가 실패했다. [22] 삼국지 읍루전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큰 사건으로는 고려 시대인 1018년에 울릉도에 위치한 우산국을 약탈하여 멸망 직전까지 몰아라아. 그 이듬해에는 도이(島夷)가 고려 일본에 침입한 바 있는데, 이들의 정체가 여진족으로 추정된다. [23] 강화도 동안과 육지는 정말 가깝다. 강화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을 염하라고 하는데, 이 염하의 폭은 고작 600m에 불과하다. 48번 국도 강화대교의 길이는 한강 다리와 달리 860m에 불과하다. 육지 쪽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수비군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이다. 게다가 병자호란이 발발한 그해의 겨울은 엄청 추워서 염하까지 얼어붙었다!! [24] 1614년 ~ 1637년. 김만중의 아버지로서 김만중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순절했다. [25] 성문에 화약을 뿌려놓고 을 던지려고 하는데, 손자가 같이 죽겠다고 하여 이를 말렸지만, 손자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함께 자폭했다고 한다. [26] 야사에 따르면, 그의 아들인 김진표(1614년 ~ 1671년)가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결하라고 압박을 넣어서 결국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오랑캐 인 청군에게 사로잡혀 유린당하는 치욕을 당할 바에 죽는 게 낫다는 논리였다. [27] 단, 화냥녀 병자호란 당시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문서 참조. [28]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해도 명나라는 어느 정도는 건재했다. [29] 첫 시도는 풍랑 때문에 중단되었고, 다시 보내려 했을 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 당한 뒤였다. [30] 사실은 김류도 미워도 명색이 자식이자 혈육인 만큼 되도록이면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고, 왕족마저 버린 행위로 대역죄라는 주장도 나와 자칫하면 자신과 손자 김진표는 물론 3대까지도 죄다 목이 날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뜻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31] 김경징과 함께 강화도 방위를 맡았던 강화유수 장신(? ~ 1637년)도 달아난 것에 책임을 물어 참수형을 받을 뻔 했으나, 그 동안의 공로를 감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을 받고 자살했다. [32] 오히려 김경징과 장신 등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달아난 상황에서 열세인 병력으로 끝까지 항전했던 충청수사 강진흔이 참수형을 당했다. 강진흔은 강도 방위를 맡은 장신이 청 해군의 배후를 치다가 역습을 받아 달아나자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라고 소리치며 분전했다. 그런데도 달아난 김경징보다도 더한 참형을 받았으며, 봉림대군마저도 "싸우지도 못하였거니와 달아나지도 못하였다!"라는 악평을 했다. [33] 그 당시 양반들은 가죽으로 만든 갓신을 신고 다녔는데, 김류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김경징은 아버지의 다리를 부여잡고 짚신에 얼굴을 부벼대며 목숨 구걸을 했는데, 어찌나 비볐던지 짚신 앞이 다 헤졌다고 한다. [34] 사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김류도 살아생전에 악행을 하도 많이 저질러서 비난을 많이 받던 인물이다. 그나마 눈치껏 처신을 잘해서 최고 벼슬인 영의정까지 오르며 78살 천수를 누렸다. 그런데 사실 김류에게 가는 비난의 절반 이상은 바로 아버지 김류 때문에 아들 김경징이 권세만 믿고 높은 자리에서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긴 하다. [35] 江都, 강화도를 뜻한다. 네이버 사전 [36] 참고로 김경징과 홍명일의 아버지 김류와 홍서봉, 이민구의 형 이성구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했었다. [37] 김경징이 공조참판 시절 군관을 곤장을 때려 죽였을 때,(杖殺) 사헌부는 그를 법에 따라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틀린 말 아닌데 왜? 이로 인해 김경징은 삭직(削職)당했다. 당시 대사헌은 정엽이었으며, 나만갑은 정엽의 사위였다. [38] 여담이지만, 이러한 죄로 인해 조익은 호란이 끝난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된다. 그러나 강화도로 도망친 이유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점,(아들 진양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를 강화로 모시게 했는데 도중에 아버지가 실종되었다.) 아버지를 도피시킨 뒤 윤계, 심지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점 등이 참작되어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원손보양관으로 제수되었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그 뒤로도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은 후에야 좌참찬으로 조정에 나갔다.(1648) 이러한 점을 볼 때, 조익은 제 목숨 아까워서 꽁무니를 뺀 김경징 같은 부류와 동급으로 칠 만한 인물은 아니다. [39] 포저집은 조익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손자들인 조지항, 조지정 등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전후의 체험을 서술한 것은, 포저집에 수록된 기록 중에서 병정기사에 해당한다. [40]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한 후, 어한명의 충성심을 회상하며 여러 차례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어한명은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권상하와 김창협에 의해 그 성명과 업적이 밝혀졌고, 1816년(순조 16년)에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41] 송시영은 우암 송시열의 종형이다. [42] 살신성인부앙무작(殺身成仁俯仰無怍)이라는 글귀인데, 후세에까지 알려진 유명한 구절이다. [43] 장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장신에 대한 내용은 '장강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들이 강을 건너왔는데'라는 전반부에 해당한다. 당시 장신은 강화 유수겸 주사대장으로 임명되어 강화도의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44] 지봉유설의 저자 그 사람 맞다. [45] 엄밀히 말하자면 김경징의 잘못은 아니다. 나만갑의 좌천은 김류가 주도했고 인조가 묵인한 결과이기 때문. [46] 심지어 1637년(인조 15년)에는 "김경징을 예장(禮葬)하라."고까지 했다. 예조에서 "장신을 사형에 처했을 때도 예장을 하지 않았는데, 김경징만 달리 할 수 없다."고 반대해서 없던 일이 되긴 했지만. # 이렇듯, 인조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김경징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47] 어쩌면 인조는 다른 목적으로 김경징을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말인즉슨, 인조 역시 김경징을 죽이고 싶었지만, 반정 때부터 충성을 바쳐온 김류에게 그런 심기를 표출하려니 심정적으로 미안한 감이 있어, 본심과 정반대의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조정의 여론은 김경징 사형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고, 그 주장은 논리로도 명분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인조가 김경징을 옹호하더라도 그러한 판세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인조는 "난 네 아들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워낙 강하게 반대하니 그러지 못하겠다. 유감이다." 같은 메시지를 김류에게 전달하기 위해, 김경징의 편을 들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김경징을 예장하라.'는 명령 역시 진심이 아니고, 그저 김류를 달랠 목적으로 던진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조가 실제로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만. [48] 인조반정의 명분이 바로 폐모살제이다. [49] 인조 1년 윤10월 20일 병오 1번째 기사. 기록 전반부에 인조가 "부자형제가 공훈에 등록된 경우가 있다."며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다. [50] 폐세자를 유배지에서 도주시키려 한 정황이 있었다. [51] 조익은 인조를 호종할 임무를 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쳤다. [52] 이민구는 김경징과 어울려 놀다가 청군이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지자 도주했다. 조정에서는 수차례 그를 서용(敍用)하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강화도에서의 행적과 이후의 처신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취소되었다. 이민구로서는 조정에 다시 나가기 위해 강화도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53] 조익과 이민구 모두 강화도 방어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적어도 전투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참조할 가치가 있다. [54]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 주범 중 하나인 곽경이 송을 지킨답시고 모은 병사들의 이름이 육갑 신병이었고 여기서 따온 민담으로 추정된다. [55] 김경징의 기준으로 혈연적 촌수를 계산하면 (14) 김경징 - (13) 김류 - (12) 김여물의 처 함양 박씨 - (11) 박수강 - (10) 박정 - (9) 박숙동의 처 전주 이씨 - (8) 안강도정 이량 - (7) 효령대군(공통 조상) - (6) 보성군 이합 - (5) 평성군 이위 - (4) 의신군 이징원 - (3) 구순의 처 전주 이씨 - (2) 구사맹 - (1) 인헌왕후 - 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