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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비정통 국왕
|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 |
밀풍군묘 |
|
출생 |
1698년
4월 8일 (음력 2월 28일) |
장소 미상 | |
사망 |
1729년
4월 25일 (향년 31세) (음력 3월 28일) |
장소 미상 | |
능묘 | 밀풍군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
재위기간 | 비정통 국왕 |
1728년
3월 15일 ~
1728년
3월 24일[3] (9일) |
|
본관 | 전주 이씨[4] |
휘 | 탄(坦) |
부모 |
아버지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어머니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
형제자매 | 6남 5녀 중 장남 |
부인 |
군부인
청풍 김씨 (淸風 金氏) 군부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
자녀 | 5남 4녀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탄(李坦),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소현세자 이왕의 증손으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이며,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 이혼의 장남이 밀풍군(密豊君)이다.2. 생애
현종 때 경안군이 복권된 이후, 효종의 후손인 현종과 숙종, 경종은 물론 영조까지도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왕실에서 상당히 잘해주었다. 석견의 두 아들은 한때 역모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지만 풀려났고, 경종 실록에서 〈 임창군 졸기〉에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이 영향으로 석견의 장손인 밀풍군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옹정 원년 사은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오는등 꽃길만 걸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 반란의 주동 세력이 밀풍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이 밀풍군을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
사실 밀풍군의 위치가 정말 애매하긴 했다. 숙종은 소현세자의 자손들을 복권했으므로, 경종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족보상 같은 항렬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소현세자의 장손으로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던 밀풍군이 양자로 입적되거나, 직접 임금이 되지는 못해도 맏아들이 경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흥선대원군 두갑자 전에 살아생전 '밀풍대원군'이 될 수도 있었다. 밀풍군은 경종과는 열 살, 영조와는 네 살 차이였으며, 경종이 즉위한 1720년 당시 스물셋이었다. 그리고 결국 8년 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면서 "영조는 가짜고 밀풍군이 진정한 경종의 양자로 대를 이을 자손이다!"라는 주장이 터져나오는 것.
그러나 밀풍군은 반란군이 추대했다는 점 외에는 스스로 역모를 꾀할 의사도 없었기에, 사실상 본인도 이인좌의 난에 휘말린 거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영조 역시 밀풍군이 억울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이후로 신하들이 밀풍군은 물론 그의 일가를 모조리 탈탈 털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댔지만, 영조는 목이 메어 하교를 못 할 정도로 슬피 울며 상소를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떠밀리듯이 밀풍군에게 자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처(自處)하는 것으로 써 내도록 하라."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법(法)이란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법이고 나 한 사람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마는 옛날 제왕(帝王)이 이러한 곳에 대해 보전할 수 있는데도 잘 처리하지 못한 경우를 두루 보고서 마음속으로 늘 개탄해 왔다. 나의 덕(德)이 적은 것으로 인해 친족(親族)에게 돈목(敦睦)하는 교화가 나라에 행해지지 아니하여 흉적(凶賊)으로 하여금 구실로 삼게 만들었으니, 통한(痛恨)스런 나머지 목이 메어 능히 다 유시(諭示)할 수가 없다."
하고, 이탄(李坦)이 자진(自盡)할 때 독촉하지 말며 비록 검험(檢驗)하는 것이 구례(舊例)라 할지라도 단지 부관(部官)·의생(醫生)·부리(府吏)만 들어가 검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실록》 21권 영조 5년(1729년) 3월 28일[5]
"자처(自處)하는 것으로 써 내도록 하라."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법(法)이란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법이고 나 한 사람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마는 옛날 제왕(帝王)이 이러한 곳에 대해 보전할 수 있는데도 잘 처리하지 못한 경우를 두루 보고서 마음속으로 늘 개탄해 왔다. 나의 덕(德)이 적은 것으로 인해 친족(親族)에게 돈목(敦睦)하는 교화가 나라에 행해지지 아니하여 흉적(凶賊)으로 하여금 구실로 삼게 만들었으니, 통한(痛恨)스런 나머지 목이 메어 능히 다 유시(諭示)할 수가 없다."
하고, 이탄(李坦)이 자진(自盡)할 때 독촉하지 말며 비록 검험(檢驗)하는 것이 구례(舊例)라 할지라도 단지 부관(部官)·의생(醫生)·부리(府吏)만 들어가 검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실록》 21권 영조 5년(1729년) 3월 28일[5]
밀풍군은 그렇게 서른 둘의 나이로 자살했고, 그의 막내동생 밀운군(密雲君)마저 나중에 또 다른 역모[6]에 연루되면서 죽었다. 자세한 내용은 밀운군 문서 참조. 이 때가 소현세자계 후손들의 최대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 임창군이 6남 5녀를, 본인도 5남 4녀를 둔 자식부자였다는 점이다.
3. 복권
1864년(고종 1년 7월 11일 죄명 삭제, 18일 관작 회복)에 복권되었다.4. 가족 관계
- 정부인 : 군부인 청풍 김씨(郡夫人 淸風 金氏)
- 계부인 : 군부인 임천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 장남 : 이관석(李觀錫)
- 며느리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신사적(申思廸)의딸
- 손자 : 이복형(李復亨)
- 손자 : 이득형(李得亨)
- 손자 : 이덕형(李德亨)
- 차남 : 상원군 이공(商原君 李糿, 1715 ~ 1733) - 연령군에게 출계된 뒤 공(糿)이라는 이름을 받음. 사후 아버지와 형이 이인좌의 난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영조에 의해 파양됨
- 3남 : 이항석(李恒錫) - 밀원군 이용(密原君 李墉)에게 양자로 출계
- 4남 : 이겸석(李謙錫)
- 며느리 : 김해 허씨(金海 許氏) - 허지(許沚)의 딸
- 5남 : 이익석(李益錫)
- 며느리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지(沈址)의 딸
- 장녀 : 조기명(趙虁命)에게 출가
- 차녀 : 송유(宋瑜)에게 출가
- 3녀 : 임도원(林度遠)에게 출가
- 4녀 : 김상필(金商弼)에게 출가
4.1. 후손
밀풍군의 차남 이진석(李晉錫)은[7]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기 전 경종의 양자입적으로 거론됐다가[8] 최종적으로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상원군(商原君)에 봉해졌지만, 후손이 없었기에 파양당했다고 한다.[9][10]삼남 이항석(李恒錫)은 밀풍군의 동생, 즉 숙부인 밀원정 이용(密原正 李墉)의 양자로 갔는데 이항석의 증손자 이명섭(李明燮)과 이명혁(李明赫)은 철종 시기 또 역모에 연관되어 다시 한 번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 했다. 이명섭, 이명혁의 동생인 이교응(李敎應)의 손자 이한용(李漢鎔)은 철종의 형 영평군의 손자로 입적되어 풍선군으로 봉해졌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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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호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유래했으며 초직은 밀풍정(密豊正)이었다가 도정을 거쳐 1710년에 군(君)으로 봉해졌다.
[2]
1864년 죄명 삭제, 18일 관작 회복.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 후술.
[3]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 세력에게 추대받았다.
[4]
소현세자파 3대손.
[5]
죄인 이탄을 자진하도록 명하다. 대사헌 송인명 등이 이탄의 죄상을 아뢰다
[6]
나주 괘서 사건으로 죽은 소론 준론 심정연(沈鼎衍)의 조카인 심내복(沈來復)이 연좌제로 유배되어 있던 중 역모를 꾀하였는데 이때 밀운군을 추대하기로 했었다.
#
[7]
이상대(李尙大)로도 알려져 있다.
[8]
촌수를 따지면 경종과는 9촌 숙부 - 조카 사이다.
[9]
간혹 아버지 밀풍군이 역모에 연루된 것 때문에 파양됐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데, 실제로 신하들이 그렇게 하자고 얘기를 했으나 영조가 따르지 않았다.
# 결국 상원군이 죽은 1주일 후에야 후손을 다시 세우라는 얘기가 나온다.
# 다만, 진짜 후손이 없어서 문제였다면, 상원군 밑으로 다른 양자를 들이면 되는 것을 굳이 파양한 것을 보면 밀풍군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기도 하다.
[10]
1874년 판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을 보면, 상원군의 사후 양자로
덕흥대원군의 9대손인 이철존(李喆存)을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하지만 사후에도 군(君)이라는 작위를 추증받지 못함). 그렇지만 이철존에게도 아들이 없어서
의안대군(義安大君)의 17대손인 이기중(李杞重, 족보 명은 이하익(李夏翼))을 양손자로 들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1]
여담으로
풍선군은 친자식을 얻지 못해
덕흥대원군파 출신
청풍군을 양자를 삼고
청풍군은 친아들을 낳게 된다.
청풍군의 손자가 호텔 그랜트힐튼서울 회장 이우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