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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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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君

1. 개요2. 조선 이전
2.1. 고려의 부원대군
3. 조선
3.1. 조선의 대군들
4. 매체에서의 등장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군(君) 작호(爵號)의 일종. 본래 작호는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대군'은 그 약칭으로 쓰였던 것이다. 고려 초기에 태조의 왕자 중 한명이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 원 간섭기에 봉군제(封君制)가 도입되면서 정식 작호로 제정되었다. 1401년 기존에 공(公)으로 책봉되어 있던 왕자들을 부원대군으로 고치면서 재도입되었는데, 이 시점부터 본래 약칭이었던 '대군'만 쓰이게 되었기에 사실상 대군으로 공식화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 대원군'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중 및 언론 등에서 비유적 표현으로 간혹 사용되는데,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거나 대통령의 혈연으로써 정계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들이나 남자 형제를 종종 이에 빗대어 부르기도 한다.(...) 봉하대군, 영일대군 등.

2. 조선 이전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대군(大君)이 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 신라로, 경명왕의 아들 8명 밀성대군 박언침[1], 고양대군 박언성[2], 속함대군 박언신[3], 죽성대군 박언립[4], 사벌대군 박언창[5], 완산대군 박언화[6], 강남대군 박언지[7], 월성대군 박언의[8]가 있다. 또한 경애왕의 아들 2명 금성대군 박교순[9], 계림대군 박순현은 신라 마지막 대군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정식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선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가필이 가능한 족보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더 많은 신라의 왕들을 배출한 김씨 족보에는 대군이라는 작호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문이다. 심지어 경명왕의 아들들은 항렬자로 보이는 한자가 이름에 있지만, 경애왕의 아들들은 해당되는 바가 없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들도 작호가 대군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군을 칭한 경명왕과 경애왕의 아들들은 어디까지나 "자칭" 한국사 최초의 대군들로 볼 수 있다.[10]

이 신라 가문을 포함하여 여러 본관의 시조에 대해 고려 초기 공신에 책봉되어 무슨 부원군에 책봉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정작 공신까지 책봉되었다면서 정사 역사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충선왕 이후에야 등장하는 부원군으로 기록되는 등 시대와 맞지 않는 칭호가 나타나고 있기에 숭조사업에 따른 왜곡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정식 사서와 교차검증되지 않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서를 기준으로, 군(君) 계통의 칭호를 사용한 사례는 최초로는 고조선 혹은 전한에 의해 예군(穢君)으로 임명된 군장 남려가 있고 더 확실히 한국계 국가에서 최초로 임명된 건 고구려의 양국군(讓國君) 고추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때는 사용이 좀 들쭉날쭉하였고 본격적으로 제도로서 자리잡은 건 고려시대부터이다. 특히 고려 초기에는 왕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수 칭호였으며, 일반 신하가 봉군되기 시작한 것은 원 간섭기에 봉군제(封君制)를 도입하여 원 간섭기에 부원대군· 부원군· 3종류가 정해진 때였다.

2.1. 고려의 부원대군

  •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11]: 태조와 의성부원부인의 아들, 홍유의 외손자.
  •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충선왕의 아들 왕도(王燾), 충선왕의 양위로 즉위.
  • 제안부원대군(齊安府院大君): 충선왕의 매부 왕숙(王淑).
  • 강양부원대군(江陽府院大君): 충선왕의 사촌형제 왕용(王鏞).
  • 함녕부원대군(咸寧府院大君): 충선왕 책봉, 정간왕의 후손 왕유(王維).
  • 단양부원대군(丹陽府院大君): 충숙왕의 사촌형제 왕후(王珛).
  • 연덕부원대군(延德府院大君): 충숙왕의 사촌형제 왕훈(王塤).
  •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 충숙왕 책봉, 본명 권재(權載), 충선왕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후(王煦)로 개명.
  •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충목왕의 숙부 왕기(王祺). 충정왕이 폐위되자 즉위.
  • 경산부원대군(京山府院大君): 충목왕 책봉, 충선왕의 의붓딸 경녕옹주[12]의 남편 노책(盧頙).
  •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공민왕의 아들 왕우(王禑). 공민왕 사후 즉위.
  • 면양부원대군(沔陽府院大君): 공민왕 추봉, 궁인 한씨[13]의 증조부 한통(韓通)·조부 한평(韓平)·부친 한준(韓俊) 3인.
  • 면성부원대군(沔城府院大君): 공민왕 추봉, 궁인 한씨의 외조부 한량(韓良).
  • 순정부원대군(順正府院大君): 제안부원대군의 아들 왕숙(王璹).
  • 순인부원대군(順仁府院大君): 순정부원대군의 조카 왕상(王瑺).
  • 회안부원대군(淮安府院大君): 대방공의 손자 왕순(王珣).
  • 화의부원대군(和義府院大君): 영녕공의 손자 왕거(王琚).
  • 경창부원대군(慶昌府院大君): 양양공의 증손 왕유(王瑜).
  • 경창부원대군(慶昌府院大君): 양양공의 현손 왕희(王熙).
  •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심왕 왕고의 아들 왕덕수(王德壽).

3. 조선

조선 초기에는 기존의 봉군제에 더해 공(公)· 후(侯)· 백(伯)을 책봉해왔으나, 1401년에 공·후·백 작위 칭호를 폐지하면서 공으로 책봉되어 있던 왕자들을 모두 '부원대군'으로 변경했다.[14] 이 시점부터 '부원대군'은 그 약칭인 '대군'으로만 쓰였기에, 사실상 '대군'으로 공식화되었다.
관품
종친부(宗親府) <colbgcolor=white,#505050>
충훈부(忠勳府)
<colbgcolor=white,#505050>
의빈부(儀賓府)
<colbgcolor=white,#505050>
대상
세자의 자손
대군의 자손
왕자군의 자손
공신·국구 부마
<colbgcolor=white,#505050> 무품
(無品)
대군(大君) 왕의 중자(衆子) 대원군(大院君)
군(君) 왕의 서자로 일명 왕자군(王子君)
정1품 중자 [15] 부원군(府院君)
군(君)
위(尉)
종1품 서자 적장자(嫡長子)
정2품 적장손 적장자
종2품 중손(衆孫) 중자·적장증손 적장손
정3품 도정(都正) [16] 부위(副尉)
정(正) 중증손(衆曾孫) 중손 중자·적장증손 첨위(僉尉)
종3품 부정(副正) 중증손 중손
정4품 수(守) 서자 중증손
<외척의 초수(初授) 품작>
국구(國舅): 정1품 ○○부원군
공주(公主)부마: 종1품 ○○위
옹주(翁主)부마: 종2품 ○○위
군주(郡主)부마: 정3품 ○○부위
현주(縣主)부마: 종3품 ○○첨위
종4품 부수(副守) 얼자 서자
정5품 령(令) 얼자
종5품 부령(副令) 종친의 서얼
정6품 감(監)

태종 때부터 '대군'은 세자가 아닌 적자에게 내리는 작위로 정해졌다. 왕의 서자는 대군이 아닌 그냥 으로 봉해졌는데, 그 신분이 특별했던 만큼 속칭 '왕자군(王子君)'이라 하여 다른 군들과는 구별하기도 했다. 대군의 본래 품계는 정1품으로 주어졌으나, 경국대전이 반포될 무렵에 품계가 주어지지 않는 백관 위의 최고 서열로 격상되었다.[17] 대군으로 봉해진 왕자들은 세자 신분은 아니었기에 왕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왕이 폐위 혹은 급사하거나 정변이 일어나는 등의 이유로 왕위를 물려받기도 한다. 인조 대 이후로는 대군에 봉해진 왕족이 없는데, 왕의 적자가 한 사람 뿐이거나 아예 없었거나, 일찍 대군 책봉을 받기전에 요절해서 씨가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세종의 아들들부터는 대군 및 군에게 내리는 호칭에 전국 각지의 지명을 따다 붙였다. 가령 수양대군의 '수양'은 해주의 별칭, 금성대군의 ' 금성'은 나주의 별칭, 창녕대군의 '창녕'은 말 그대로 창녕이다. 이는 중국의 황제가 친왕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책봉하듯이, 조선 국왕 역시 아들들에게 '명목상' 봉토를 하사하고 책봉하는 책봉체제의 시스템을 따른 것이다.
國俗稱王子大君王孫爲自家 或呼資階者非也 國初亦呼進賜 今則通稱百官
나라의 풍속에 일컫기를, 왕자와 대군, 왕손을 자가(自家)라 불렀다. 벼슬의 직품과 관계를 받은 자는 그리 부르지 않기도 했다. 나라 초기엔 나리(進賜)라 부르기도 했으나 이는 오늘날 백관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재난고 14권 #
東人稱宗室貴者日自家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실의 귀한 사람을 일러 ' 자가(自家)'라 한다.
- 순암집 #

대군 또는 군은 보통 ' 자가', '대군 자가' 등으로 불리었으며, '왕자 자가', '왕자군 자가'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대군 나리'라고도 불렀다. 왕자인 대군과 군은 무품계이므로 대감이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 주장이다. 왕의 아들인 대군과 군을 대감이라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신분을 낮춰서 부르는 불경한 행위이다. (관련 기록은 자가 항목 참조)

또한 대군과 군을 '자가'라 부르는 것은 민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我朝義原君。麟坪大君之孫也。嘗遊海西。有一人來見曰。小人祖母以自家(東人稱宗室貴者曰自家。)婢子。犯過逃亡。今已許多年。而子孫甚繁矣。隱漏不見。罪莫大焉。故敢此進告。願有以處之。
아조(我朝)의 의원군(義原君)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손자이다. 일찍이 해서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소인의 조모는 자갸(自家)(저자주:우리 나라 사람이 종실의 귀한 자를 ‘자갸’라고 부른다.)의 계집종이었습니다. 잘못을 범하고 도망하였는데,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자손이 매우 많습니다. 숨어 살면서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죄가 더없이 큽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나아와 고하는 것이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하였다.
- 순암집 # 이미지
여기서 저 사람이 말한 '자갸'(자가)'는 ' 인평대군'이다. 이 사람의 할머니가 인평대군의 여종이었으며, 그 손자가 인평대군의 손자인 의원군에게 찾아와 할머니의 죄를 대신 고하고 벌을 내려달라 청한 것이다.

조선 국왕 중에서 생전에 '대군'이라고 불린 왕으로는 세종(충녕대군), 세조(진평대군, 함평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 예종(해양대군), 중종(진성대군), 명종(경원대군), 효종(봉림대군)이 있다. 생전에 '대군'이라고 불리지 않은 왕으로는 정종(영안대군), 태종(정안대군), 단종(노산대군), 성종(잘산대군), 인조(능양대군)가 있다. 이들은 생전에 대군이라고 불린 것이 아니라 나중에 대군으로 소급 적용된 것이다.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일반적으로는 왕자를 뜻하는 프린스(Prince)로 쓰지만 가끔 서양의 대공에 대응되는 Grand Prince로 쓰기도 한디.[18] 조선의 경우 서얼 왕자인 군에게도 왕위를 계승한 이력이 있고, 방계왕족에게도 군의 작위를 내린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기 위한 것. 왕의 적자인 대군과 구별하려고 할 때 다른 군은 Prince로 번역한다.

3.1. 조선의 대군들

<colbgcolor=white,#505050> 아버지 <colbgcolor=white,#505050> 어머니 봉호 비고
목조 효공왕후 안천대군
안원대군
안풍대군
안창대군
안흥대군
익조 손씨 함녕대군
함창대군
정숙왕후 함원대군
함천대군
함릉대군
함양대군
함성대군
도조 경순왕후 완창대군
완원대군
완천대군
완성대군
환조 한산 이씨 완풍대군
영성대군
정빈 김씨 의안대군
태조 신의왕후 진안대군 태조의 적장자였으나, 후계에서 탈락하였고 고려 멸망 1년 후 사망. 사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영안대군 훗날의 정종. 후궁소생은 있었지만 정비소생은 없었다.[19] 대군이라는 작위는 태종 시기에 등장한 작위이므로 실제 대군이 된 적은 없었다.
익안대군
회안대군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정안대군 훗날의 태종. 아래에 있는 이복동생 둘( 무안대군, 의안대군)을 죽였다. 대군이라는 작위는 태종 시기에 등장한 작위이므로 실제 대군이 된 적은 없었다.
덕안대군 사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신덕왕후 무안대군 숙종 때 복권되며 대군으로 봉해졌다.
의안대군 조선 최초의 세자이자 최초의 폐세자. 대군이 아니라 세자이며 생전에 대군이었던 적이 없으나 숙종은 그를 복권하면서 대군으로 추봉하고 끝내 세자로서의 시호를 지어주지 않았다.
태종 원경왕후 양녕대군 세자였으나, 폐세자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다.
효령대군
충녕대군 훗날의 세종. 세자 이제가 폐세자된 후 새로운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다.
성녕대군
세종 소헌왕후 수양대군 훗날의 세조. 원래 '진평대군'이었다가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수양대군이 되었다.[20] 아래에 있는 친동생 둘(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였다.
안평대군 '안평'은 홍주의 별칭이다.
임영대군 '임영'은 강릉의 별칭이다.
광평대군 '광평'은 광주의 별칭이다.
금성대군 '금성'은 나주의 별칭이다.
평원대군 '평원'은 원주의 별칭이다.
영응대군 '영응'은 연안의 별칭이다.
문종 현덕왕후 노산대군 단종. 문종의 (장성한) 유일한 아들이므로 당연히 처음부터 세손(할아버지 세종 재위 시)→ 세자(아버지 문종 재위 시)였다.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상왕에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그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노산'은 평창의 별칭이다. 훗날 숙종 때 '노산대군'으로 격상되었다가, 마침내 '단종'으로 추존되었다.
세조 정희왕후 해양대군 훗날의 예종. 형 의경세자의 급사로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다. '해양'은 남해의 별칭이다.
덕종 소혜왕후 월산대군 시인으로 명성을 떨친 대군이며 이름은 정,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이다. 세조의 장손이자 추존왕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 사실상 왕위를 아우에게 양보한 월산대군은 평생을 조심하면서 풍류객으로 지냈는데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월산'은 경주(월성)의 별칭이다.
잘산대군 훗날의 성종. 숙부 예종의 급사로 왕위에 올랐다. 생전에 세자였던 적도 없고 대군이었던 적도 없다.
예종 장순왕후 인성대군 요절했다.(1461~1463) 사후 9년이 지난 1472년에 대군으로 추봉되었다.
안순왕후 제안대군 '제안'은 황주의 별칭이다.
성종 정현왕후 진성대군 훗날의 중종. 형 연산군이 폐위된 후 왕위에 올랐다. '진성'은 진주의 별칭이다.
연산군 거창군부인 창녕대군 둘째 아들. 아버지가 폐위되면서 불과 5살에 형 폐세자 이고와 함께 사사되었다. '창녕'은 창녕군에서 따온 봉호이다.
중종 문정왕후 경원대군 훗날의 명종. 형 인종이 급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경원'은 인천의 별칭이다.
선조 인목왕후 영창대군 선조가 늘그막에 본 늦둥이로 유일한 적자였으나, 이복형 광해군에 의해 불과 8살에 죽었다. '영창'은 이천의 별칭이다.
원종 인헌왕후 능양대군 훗날의 인조. 백부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생전에 대군이었던 적은 없다.
능원대군
능창대군 능양군의 동생. 형이 왕이 되기 전인 1615년에 광해군에게 역모를 의심받아 자살하였다. 원래 '능창군'이었고 생전에 대군이었던 적은 없으나, 이 왕이 되고 아버지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능창'은 능주의 별칭이다.
인조 인열왕후 봉림대군 훗날의 효종. 형 소현세자의 급사로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다. '봉림'은 봉산의 별칭이다.
인평대군 능창대군의 사후,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인평'은 인제의 별칭이다.
용성대군 요절했다.(1624~1629) 조선 마지막 대군. '용성'은 남원의 별칭이다.
순조 순원왕후 대군(大君) 196년만에 중전 소생에게서 태어나서 장성하면 대군으로 책봉받을 수 있었으나 생후 2개월만에 요절하였다.
고종 명성황후 대군(大君) 1875년생 순종의 동생. 요절
대군(大君) 1878년생 순종의 동생. 요절

4. 매체에서의 등장

많은 한국 사극에서는 마마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왕자에게 자가가 아닌 마마라고 칭하는데, 이는 오류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가로 칭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5. 관련 문서



[1] 밀양 박씨 시조 [2] 고령 박씨 시조 [3] 함양 박씨 시조. [4] 죽산 박씨, 고성 박씨, 음성 박씨 시조. [5] 상주 박씨 시조. [6] 전주 박씨, 무안 박씨 시조 [7] 순천 박씨 시조 [8] 월성 박씨 시조. [9] 울산 박씨의 시조 박윤웅의 조상. [10] 이들이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각 분파의 시조로 추숭되는 과정에서 후세에 대군 칭호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11] 본명과 정식 작호(爵號)가 실전되어 별칭인 궁호만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12] 원래는 제안부원대군의 아들 왕현(王眩)의 딸이지만, 어머니인 허씨가 왕현이 죽은 뒤에 충선왕의 후궁이 되었다. [13] 공민왕이 우왕(모니노)의 친모로 공인한 인물로, 이후 자신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한 신돈의 시녀 반야가 등장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반야를 생모로 공인하였으나, 반야가 실제 우왕의 생모가 맞는지는 논란이 있다. [14] 다만 이후 성녕대군이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으로 추증된 사례가 있다. [15] 1819년부터 대원군의 사손이 종친부 정1품 군을 승습했다. [16] 종친부 도정은 승진으로 임명되었고, 대원군의 사손은 돈녕부 도정직을 승습하였으나 1819년부터 종친부 정1품 군을 승습했다. [17] 이런 신분을 속칭 '무품(無品)'이라고 한다. 왕자군도 무품 서열로 격상되었는데, 대군보다는 그 서열이 낮았으므로, 대군을 무품상계 왕자군을 무품하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18] 동유럽계의 대공, 주로 러시아, 슬라브계 국가들의 대공이 Grand Prince이나 대공이라는 작위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영미권, 불어권의 경우엔 일괄적으로 Grand Duke라고 표기한다. [19] 이런 이유로 이방원이 왕위를 잠깐 맡겼다는 견해도 있다. 만약 적자가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주장하면, 계유정난 프리퀄이 발생할 수도(...). [20] 마지막 봉호인 수양대군이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오래 불렸던 봉호는 진양대군이다. '수양'은 해주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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