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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세종과 소헌왕후의 왕릉 | 영녕릉 내 1기
여주 영릉 驪州 英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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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1] |
조성형태 | 합장릉(合葬陵) |
매장자 |
세종 (
1450년
3월 30일 승하) 소헌왕후 ( 1446년 4월 19일 승하) |
조성시기 | 1446년 6월 13일 |
주 관리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유적관리소 |
홈페이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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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英陵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조선왕릉으로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있다. 아내 소헌왕후와 합장되어 있는데, 이 능은 조선 왕조 역사상 최초의 합장릉이다.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은 묶여서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2. 연혁
원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헌릉 근처[2]에 묻히고 싶어해서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를 태종의 능역 서북쪽에 장사지냈고, 본인이 승하한 후에는 그곳에 합장되었다. 그런데 세종의 수릉(壽陵)[3]을 정할 당시 당대의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이 이 묏자리를 두고 '' 여기는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절사손장자)라고 반대해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정인지 등이 헛소리로 치부하며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는 처단하소서!.'고 상소했지만, 세종은 그냥 자신을 향한 충언 정도로 받아들이며 기분 좋게 넘어갔다.그렇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최양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계유정난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 세조 또한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승하했다.[4] 이 때문에 예종은 할아버지 내외를 여주로 이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당시 영릉 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무덤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예종의 청을 받아들인 이인손의 후손들이 묘를 파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지석이 나왔고 후손들이 이를 따르자 연이 떨어진 자리도 명당이어서 가문이 계속 번창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장으로도 왕실의 장자 수난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왕실의 장자 수난은 숙종을 제외하고는 정말 유난히 심한 편이었다.[5]
영릉 이장은 세조 때부터 정식 논의되다, 1469년(예종 원년)에 천장하여 현재 자리로 옮겼는데, 이 자리가 천하의 대명당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아주 대단한 자리이다.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자리로, 일설에는 세종 같은 성인[聖人]을 이러한 대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_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_'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한국(한반도)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왕의 묘역답게 능역도 크게 해 놓았고, 기념관이나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의 과학 문물들도 많이 전시해 놓았으며[6], 오늘날에도 견학 온 사람들로 크게 붐빈다. 이 능 또한 대개의 조선 왕릉과는 달리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가서 관람할 수 있는데, 헌릉처럼 계단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영릉은 조선의 역대 왕릉에서 마지막으로 신도비(神道碑, 일종의 추모비)가 세워진 능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릉에서 신도비가 세워진 능은 건원릉( 태조), 후릉( 정종), 헌릉( 태종)과 영릉 까지고 세조 때부터는 세조 본인이 이런 걸 만들지 말라고 해서 그 이후의 왕들은 신도비가 없다. 여주의 영릉은 광릉이 조성된 후 이장됐기 때문에 왕릉 조성을 간소화하라는 세조의 지침을 따라 새 영릉에도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영릉을 여주로 이장할 당시 옛 영릉의 석실과 신도비 등 여러 석물들은 옮기지 않고 그대로 땅에 묻어버렸는데 500년 뒤인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대모산 일대를 발굴 조사하다 이 석물들 중 일부를 발견했다. 이것이 구 영릉 석물이며 현재 서울 청량리 세종대왕 기념관에 전시돼있다.
다만, 2008년에 옛 영릉으로 알려져 있던 국가정보원 경내 서쪽 능선의 무덤 자리를 발굴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무덤은 석실로 조성한 소헌왕후까지 묻힌 합장릉이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회격묘에 단실이었기 때문에 영릉으로 보기엔 어려웠고 결과적으로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초장지(初葬地)[7]임이 확인됐다.[8] 구 영릉의 원래 위치는 순조가 묻혀있는 인릉 자리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위의 구 영릉 석물이 사실은 영릉이 아니라 희릉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추정은 공식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진짜 구 영릉 석물들은 그 자리에 인릉이 조성되면서 인릉의 석물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근처에 후손인 효종과 왕비인 인선왕후의 녕(영)릉(寧陵)이 있다. 그래서 두 묘역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500원이며 단체 관람으론 400원을 받는다.[9]
3. 교통
인근에 새로 지어진 수도권 전철 경강선상의 역은 영릉역이 아니라 좀 더 직관적으로 풀어 쓴 이름인 세종대왕릉역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후술하겠지만 세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역은 같은 행정 구역(세종대왕면)에 있을 뿐, 연계 교통이나 타 관광지 연계 등을 생각하면 여주역으로 가는게 낫다.상술하였듯 영릉 권역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는 2016년 9월 기준 하루 3편 정도로 능의 주인인 세종이 호통 칠 수준이었다. 경강선 임시 개통 기간 동안은 1시간에 1대 운행하는 열차에 맞춰 임시 버스가 운행하기도 하였으나, 반응이 별로였는지 정식 개통 이후로는 아직 말이 없다. 여주 시내에서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111번 버스를 이용하면 그나마 매표소 기준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내려준다.[10] 여주 시내나 여주역 택시를 타면 등에서 2016년 9월 기준 약 6000원 정도가 나온다.
남한강 자전거길이 인근에 있어서 자전거가 있으면 접근이 쉽다. 단, 자전거는 내부로 반입이 안된다.
2024년 3월 기준, 영릉 앞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 현황은 다음과 같다. 양방향은 여주역에서 출발하거나 종점에서 여주역 방면으로 갈 때 모두 정차하는 노선이다. 일부 노선은 한쪽 방면으로만 정차하는데, 여주역에서 갈 때 탈 수 있는 것은 종점, 영릉에서 여주역으로 갈 때 탈 수 있는 것은 시내로 표기하였다.
정류장 이름 | 경유 노선 |
세종대왕릉[11](52192) | [양방향] [양방향] [시내] [*시내 [양방향] [종점] [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양방향] [양방향] [양방향] [종점] |
세종대왕릉입구[25](42742) | [양방향] [양방향] [시내] [시내] [양방향] [종점] [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양방향] [종점] [양방향] [양방향] [종점] |
세종대왕릉입구[41](52026) | [양방향] [양방향] [시내] [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시내] [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종점] |
4. 관람
관람구역은 세종/ 소헌왕후의 영릉(英陵)과 효종/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으로 나뉘는데, 각각 매표소와 주차장 등이 따로 있지만, 관람구역 내의 두 영릉 사이에 약 700m 남짓한 숲길이 이어져 약간의 언덕 넘기 운동을 하면 함께 관람할 수 있다. 관람구역 밖에도 두 영릉의 주차장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있어서, 왔던 길로 돌아가기가 싫다면 이를 이용할 수도 있다. 세종의 영릉은 별도 전시관 및 세종대의 과학 기구 복제품 등이 전시되어서 천천히 관람하려면 적어도 30~40분 이상 소요된다. 효종의 영릉까지 관람하려면, 이동시간 등을 고려하여 1시간 30분~2시간 정도는 어림잡아야 한다.전술하였듯이 두 영릉을 연결하는 길은 관람 구역 내 외부 모두 있고, 세종의 영릉 쪽에는 능 말고도 전시관 등 볼 것들이 더 있기 때문에 어떤 길로 돌아갈지를 미리 생각해서 동선을 짜는 쪽이 유리하다. 차를 끌고 와서 두 릉을 모두 관람한다면 어떻게든지 반대편으로 돌아가야겠지만, 택시 등을 타고 이동한다면 그냥 반대쪽에서 콜 택시 불러서 집에 가는 방법도 있다. 다만, 대체로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세종의 영릉 쪽을 메인으로 생각하고 효종의 영릉은 곁다리 정도로 관람하거나 스킵하기 때문에 주차장의 규모나 편의시설 등은 세종의 영릉 쪽이 훨씬 낫다
효종의 영릉 쪽 입구는 소규모 주차장에 매표소와 화장실로 이렇게 끝이고 택시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주로 세종의 영릉 쪽에서 내리기 때문에 들어오는 택시가 없어서 나가는 택시도 없다. 이 쪽에서 시내로 나가려면 전화나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등을 통해서 콜 택시를 부르도록 하자. 운이 좋으면 세종의 영릉에 손님을 내려주고 시내로 나가려던 택시를 잡아 타서 콜 택시가 시내에서 들어올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57] 두 영릉 모두 능침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왕릉들이고, 또한 두 영릉 사이를 왕래하려면 언덕이 있는 숲길을 넘어야 해서 미리 음료수 같은 것을 구입하려면 세종의 영릉 쪽으로 넘어가야 된다. 이쪽에 음식물과 기념품 등을 파는 매점이 있다. 효종 쪽에는 그런 게 일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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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 주소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2]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및
강남구
개포동,
일원동의
대모산 일대.
[3]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정해놓은 무덤
[4]
세조의 경우 생전 아버지의 승하 후부터 조선 왕실에 피바람이 몰아치자 묫바람을 의심했으나 끝내 원인을 보지 못하고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승하했고, 이후 세조의 아들 예종이 이장을 위해 할아버지 세종의 무덤을 파 관을 열어보자 세종의 관 속에 썩은 물이 한가득 고여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묫바람 중 수렴으로 인해 무덤을 이장한 사례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물론 나무뿌리가 시신을 휘어감거나, 유골이 검게 변한다던가, 무덤 속에 벌레나 뱀 등이 들어간다거나 등 여러 묫바람의 사례도 존재하나 가장 많은 이유는 수렴때문이였다.
[5]
조선 왕실의 장자 수난에 대한 야사로는
경복궁의 방향과 관련된 일이 있다.
정도전 문서 참고.
[6]
현재는 영릉 근처에 별도로 시설을 만든 후 그곳으로 옮겼으며 원래 자리는 공원으로 만들었다.
[7]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에 있다.
[8]
세종의 영릉이 있었다고 하면 그 아래에 석실(돌방)이 있어야 하는데, 발굴 당시 회격묘의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바닥이 단단하면서 움푹 파인 흔적이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김안로가 희릉을 이장할 때 구실로 '현재 조성한 자리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현재의
서삼릉 쪽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
[9]
여주시 거주자가 아닌 외부인도 해당된다(특히 여주시민은 여기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50% 할인된다). 덤으로 만 24세(만 24세가 지나는 세는 나이 26세 생일이 되면 그 혜택은 종료된다.)까지는 무료이다.
[10]
반면, 그마저도 약과라 할 수 있겠다. 조선왕릉 영릉이 쉬는날(월요일)에는 아예 버스 운영을 안해서, 매우(대략)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11]
역사문화관 앞 하차
[양방향]
양방향 정차.
[양방향]
[시내]
영릉에서 여주역으로 갈 때만 이용 가능. 여주역에서 탈 때는 들어가지 않는다.
[양방향]
[종점]
여주역에서 영릉으로 갈 때만 이용 가능. 여주역 방면은 들어오지 않는다.
[시내]
[양방향]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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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
[25]
여주시내에서 영릉(세종대왕릉) 입구 교차로 가기 전에 있는 정류소. 정류소 구조물에는 "왕대2리"라고 되어 있으며, 영릉소머리국밥 등 식당가 앞에 있다.
[양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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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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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
[양방향]
[양방향]
[종점]
[41]
여주시내에서 영릉(세종대왕릉) 입구 교차로 가기 전에 있는 정류소. 정류소 구조물에는 "왕대2리"라고 되어 있으며, 식당가 건너편에 있다.
[양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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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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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시내]
[양방향]
[종점]
[57]
사실 두 영릉의 입구 사이의 거리는 차로가면 약 5분 정도면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거리라 그다지 멀지는 않다.